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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3-12 01:40:45

상계군벌

湘係軍閥 / [ruby(湘系军阀, ruby=Xiāngxì jūnf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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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탄옌카이 정권2.2. 자오헝티 정권2.3. 탕성즈 정권2.4. 국민정부 시대
3. 인물4. 참고문헌5. 관련문서

1. 개요

호북성, 호남성을 중심으로 했던 중화민국의 군벌. 호북지역은 직예군벌의 확고한 세력으로 장악되었기 때문에 주로 호남 쪽에서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호남군벌이라고도 한다.

2. 역사

증국번 태평천국의 난을 맞아 조직한 의병인 상군이 원조이다. 이 상군은 태평천국 진압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상군의 지휘관이었던 증국번이나 좌종당은 이후 청나라의 실권을 쥐게 된다. 이후 청나라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서양식 군사학교를 세우자, 상군이나 호남성 출신들이 이곳에 대거 입학하여 군벌을 이루게 된다. 이들은 민국 시기 내내 군벌로 세력을 이루었다.

2.1. 탄옌카이 정권

1910년 시점에서 호남은 신군, 순방영, 녹영 3개 계통의 부대가 있었는데 녹영은 청나라의 공식 군대고 순방영은 호남 치안 유지를 위한 구식군대이며, 신군은 훗날 상계군벌의 주요 지도자들을 다수 배출하는 신식군대였다. 상계군벌의 일부는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한 증국번의 향용인 상군에서 기원했지만 대다수는 바오딩 군관학교나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유학한 신군에서 기인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원래 보로운동, 제헌운동에 참여했던 신사층의 지도자 탄옌카이가 호남성의 지도자가 되었다. 탄옌카이는 호남성의 혼란을 정리하고 혁명 전에 비해 4배로 폭증한 군사비 압박을 줄여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1912년 시점에서 5만명에 달했던 상군을 대다수 해산했다. 이는 호남의 재정 상태를 개선시켰지만 북양군벌이 불과 1개 혼성여단만 가지고 호남성을 장악할 수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13년 계축전쟁이 터졌을 때 탄옌카이는 호남성의 독립을 선포해다가 혁명군이 패하는 것을 보고 이를 취소했는데 이 때문에 위안스카이에게 밉보여서 쫓겨나고 호남 출신의 북양군벌 탕향명에게 호남독군 자리를 내주었다. 이후 호남에는 차오쿤의 3사단과 3여단이 악주에 주둔했고 호남은 위안스카이의 중앙집권 정책에 따라 북양군벌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1915년 호국전쟁이 터지면서 청첸, 탄옌카이, 루디핑, 자오헝티 등 상군의 장령들이 루룽팅의 지원을 받아 탕향명을 축출하고 호남을 해방시키는데 성공하면서 2차 탄옌카이 정권이 들어섰다. 탄옌카이는 다시 치안과 재정을 위해 자신이 신뢰하는 자오헝티의 1사단만 남기고 군대를 대다수 해산했는데 호법전쟁이 발발하면서 호남은 북방에서 내려온 차오쿤, 우페이푸 직예군벌 군대의 공격을 받게 된다. 직예군벌의 압도적인 무력에 상군은 패배했지만 돤치루이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직예군벌이 진격을 중단하면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돤치루이는 장징야오를 호남독군에 임명했으나 쑨원이 탄옌카이를 호남독군에 임명하면서 호남성에는 2명의 독군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후 1920년 안직전쟁이 터지면서 탄옌카이는 장징야오를 축출하고 3차 탄옌카이 정권을 수립하는데 성공했으나 북양군벌과 내통한 혐의로 축출된 청첸계 장령들의 반란으로 하야한다. 자오헝티는 탄옌카이의 잔여세력을 규합해 청첸계를 숙청한 이후 호남의 지배자가 되었다.

2.2. 자오헝티 정권

자오헝티 정권의 특징은 본격적인 연성자치론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자오헝티는 1922년 1월 호남성 헌법을 발표, 남북정부와 모두 단절하고 호남성 자치를 내세웠다. 하지만 호북자치전쟁에 참전했다가 패한 일과 북양정부와 남방의 광동정부의 동시 압박에 노출되어 상당히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상하이로 떠났던 탄옌카이가 쑨원의 지원을 받아 1923년 호남성으로 출병하면서 탄옌카이와 자오헝티 사이의 담조전쟁이 발발했다. 여기서 탄옌카이가 거의 이길 뻔 했으나 우페이푸의 지원을 받은 자오헝티가 결국 승리하였다. 탄옌카이는 루디핑 등을 거느려 중국 국민당 국민혁명 대오에 참가했고 자오헝티는 우페이푸의 압박으로 사실상 자치를 취소하고 직예군벌에게 종속되는 처지가 되었다.

2.3. 탕성즈 정권

1926년에 이르자 호남성에서는 국민당의 영향력이 강성해졌는데 이를 등에 업고 계계군벌과 연계하여 떠오른 것이 4사단장 탕성즈였다. 탕성즈는 대중운동을 통해 자오헝티를 압박해 쫓아내고 호남성장에 취임했으나 자오헝티 계열의 섭개흠과의 전쟁이 붙게 되었다. 섭개흠에게 패한 탕성즈는 중국 국민당에 합류, 국민혁명군 8군 군장에 임명되어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참가하여 다시 호남으로 돌아와 호남과 호북을 모두 점령하여 양호 지역을 장악하고 장제스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된다.

그러던 중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가 일어나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가 분열되는데 상계군벌들은 대부분 우한 국민정부의 편에 서게 되었지만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과격한 토지혁명과 폭동으로 인해 허젠, 허극상. 하두인 등의 호남군벌들이 분노하여 마일사변을 일으키면서 우한 국민정부는 위기에 몰렸고 여기에 펑위샹이 장제스와 손을 잡으면서 상계군벌들은 월계군벌 장파쿠이와 힘을 합쳐 난징을 군사적으로 토벌하고자 했다.

결국 8월에 우한과 봉천군벌의 공격을 동시에 받은 장제스가 계계군벌의 압박으로 사퇴하면서 영한합작이 이루어졌는데 탕성즈는 자신의 힘만 믿고 안휘성 정부를 취소하고 멋대로 장악하는 등 행패를 부리다가 분노한 리쭝런, 바이충시에게 토벌당하고 쫓겨나면서 양호 지역은 계계군벌이 장악했고 상계군벌은 몰락했다.

2.4. 국민정부 시대

그러다가 상계군벌이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 것은 장제스가 계계군벌을 견제하기 위해 루디핑을 호남성 정부주석에 임명하면서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리쭝런은 1929년 호남 사건을 일으켜 루디핑을 파면했다. 이 때문에 1차 장계전쟁이 일어났고 1930년 중원대전에 이르게 된다. 반장파들은 모두 패배하였고 호남에서 계계군벌은 축출되었으며 탕성즈도 호북의 바이충시 부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어부지리로 다시 기반을 좀 확보하게 되었는데 중원대전 때 반장파 편에 서는 바람에 또 망했다. 하지만 허젠, 청첸, 루디핑 등은 초공작전 등에 참가하면서 건실한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특히 허젠은 1차 양광사변 때도 장제스의 편에 계속 서서 장제스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호남군벌들은 중국 공산당의 공세에 맞서 초공작전에 참여했으며 이후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에 맞서 항전했다. 1946년 국공내전이 재개되고 중공군이 장강을 넘어 도하하자 청첸 등은 장사기의를 일으켜 중화인민공화국에 붙어버렸다. 허젠 마오쩌둥의 아내 양카이후이를 처형하는 등 공산당과 원한이 깊었기 때문에 국부천대를 따라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3. 인물

4. 참고문헌

5.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