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1-22 14:19:20

하산 호 전투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letter-spacing: -0.9px; word-break:keep-all"
{{{#000,#999
<colbgcolor=#536349> 연표 사건
1936년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1939년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1940년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1941년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1942년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1944년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작전 · 필리핀 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1945년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66666, #000000)"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222><colcolor=#fff> 주요 사건
제1차 세계 대전의 끝
(1918~1920)
<colcolor=#000,#ddd> 부쿠레슈티 조약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세브르 조약 · 로잔 조약 · 뇌이 조약 · 트리아농 조약 · 생제르맹 조약 · 베르사유 조약
전간기 초기
(1918~1931)
러시아 내전 · 외몽골 출병 카프 폭동 로마 진군 루르 점령 메멜 점령 리프 전쟁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 로카르노 조약 · 국민혁명( 제1차 국공합작) · 황고둔 사건 켈로그-브리앙 조약 · 대공황
만주사변
(1931~1933)
만주사변 · 제1차 양광사변 · 나카무라 사건 · 만보산 사건 · 제3차 초공작전 · 류탸오후 사건 · 천진사변 · 영월합작 · 진저우 침공 · 사쿠라다몬 의거 · 마옥산 사건 · 제1차 상하이 사변 · 홍커우 공원 의거 · 송호정전협정 · 이시모토 사건 · 열하사변 · 당고정전협정
나치당 집권 후
(1933~1939)
복건사변 라이히스탁 방화 사건 · 수권법 통과 장검의 밤 신강 침공 ·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 스페인 내전 · 라인란트 재무장 수정의 밤 · 오스트리아 병합 · 하산 호 전투 · 뮌헨 협정
중일전쟁
(1937~1939)
루거우차오 사건 · 상하이 전투 · 난징 전투 ·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트라우트만 공작
국제 기구
}}}}}}}}}}}}

<colbgcolor=#536349> 하산 호 전투
Бои у озера Хасан
張鼓峰事件
[1]
소련-일본 국경분쟁의 일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ttle_of_Lake_Khasan-Soviet_aerial_bombardment_against_Zaozernaya_Hill.jpg
소련 항공대에 의해 폭격당하는 장고봉
파일:조선에서 격추된 소련기.jpg
조선 상공에서 격추된 소련기 엔진을 관찰 중인 일본군
파일:external/www.korean.com.cn/464cdbf53431c96eeb642bd68ccebb88.png
장고봉의 위치를 나타낸 약도[2]
날짜
1938년 7월 29일 ~ 8월 11일
장소
소련 러시아 SFSR 하산 호
교전국 [[틀:깃발|]][[틀:깃발|]][[소련|]]
지휘관 [[틀:깃발|]][[틀:깃발|]][[바실리 블류헤르|]]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니콜라이 베르자린
[[틀:깃발|]][[틀:깃발|]][[사토 고토쿠|]]
결과
소련군과 일본군의 정전
영향
전쟁 이전의 상태로 회귀(status quo ante bellum)
소련-일본 국경 분쟁이 이후에도 이어짐
병력 22,950명 7,000명 - 7,300명
피해규모 전사 및 실종 792명
부상 3,279명
전사 526명
부상 913명
1. 개요2. 전개3. 정전과 영향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명 장고봉 사건(張鼓峰事件 ちょうこほうじけん). 주로 영어권에서는 '하산 호 전투(Battle of Lake Khasan)', 일본에서는 '장고봉 사건'이라고 부른다.

1938년 7월 29일부터 동년 8월 11일까지 약 2주 간 소련군 일본군( 조선군, 관동군)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로, 소-일 국경분쟁 중 할힌골 전투 다음으로 컸던 전투였다.

2. 전개

장고봉(張鼓峰, 러시아명 сопка Заозёрная/Zaozyornaya)은 두만강 근처 하산에 있는 해발고도 약 150m의 언덕으로, 그 자체로는 흔해빠진 언덕이어서 별다른 쓸모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지도에 보이다시피 만주, 조선, 소련 사이에 절묘하게 걸친 탓에 소유권을 두고 분쟁이 시작되었다.[3] 분쟁이 있던 장고봉의 정상 부분을 소련, 만주국 양국은 서로 점령하지 않고 그냥 무주공산으로 방치하고 있었다.

당시 이쪽의 국경선에 대해서 소련 만주국 간 의견이 엇갈렸다. 소련은 베이징 조약에 근거하여 국경선은 장고봉 정상을 통과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일본은 장고봉 정상 일대는 만주국에 속한다고 보고 있었다. 소련은 일본이 국경선을 왜곡하고 있으며 만주국에 설치된 국경 표지판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허나 어쨌든 해당 구역의 방위를 담당했던 조선군 제19사단은 이곳을 국경 불확정 지대로 보고 무력 충돌을 막기 위해 장고봉 정상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그런데 7월 12일 소련군이 파견되어 장고봉 정상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발견되었다.[4] 다음날 13일에는 일본군 감시병이 소련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에 놀란 일본은 대사관을 통해 항의했으나 소련은 이를 애써 무시했고 이로써 건차자도 사건이 끝난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던 때 또 다른 무력 충돌이 예고되었다.

일본은 장고봉에 정찰대를 파견했는데 이들은 소련군의 사격을 받고 오장이 전사하는 등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관동군은 중국 전선에서 공세를 준비하느라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장고봉에서의 사태를 악화시키기 싫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려 했지만, 관동군 작전참모들이 '좁은 곳이라 전투가 확대되지도 않을 것이고 소련군이 전차까지 끌고 오지도 않을 듯'이라고 하여 제19사단을 동원해서 소련군을 격퇴하기로 했다. 조선군 사령관 고이소 구니아키는 제19사단의 출동을 명령했다.

7월 29일 확인 결과 소련군은 장고봉 북쪽에 위치한 사초봉(沙草峰, 러시아명 сопка Безымянная/Bezymyannaya)에도 진지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제19사단이 공격을 가했지만 이미 대규모로 증강된 소련군을 격퇴하지는 못했는데, 7월 31일 19사단 휘하 제75연대[5]가 야습을 가해 소련군 제40사단을 격퇴하였다. 덕분에 제19사단은 장고봉과 사초봉을 탈환할 수 있었다. 이후 8월까지 소련군이 여러 번 반격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은 의외로 선전해서 이를 막아냈다.[6]

그런데 그 이후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8월 1일 소련군 항공대가 나타나 두만강 인근 지역에 폭격을 가한 것이다.[7] 8월 2일에는 당시 극동 군관구 사령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가 참전했다. 그리고 소련군은 슬금슬금 병력을 증강시켜 나갔다. 반면 일본군은 장고봉 일대의 19사단에 이렇다할 중장비나 추가병력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일이 크게 터지는데...

건차자도 사건 이후 제대로 열받은 소련이 1개 군단과 1개 기계화여단, 연해주 항공대를 동원해서 8월 6일 대반격을 가해왔다![8] 무장이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19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장고봉에서 간신히 버티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멸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19사단 장병들은 분투하여 장고봉과 사초봉을 빼앗기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고, 소련군 측도 상당한 사상자가 나왔다.[9]

3. 정전과 영향

그러나 소련, 일본 모두 확전을 원하지 않았고, 결국 일본의 시게미츠 마모루 대사와 소련의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인민위원 간 회담으로 8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정전 합의가 이루어졌다. 합의 내용은 11일 정오로 전투를 중지하고 소련의 주장대로 국경선을 확정한다는 것. 19사단은 두 고지를 점령했지만 이를 소련측에 내줘야 했다. 이에 일본군의 조 이사무(長勇)[10] 대좌와 소련 극동군 참모장인 그레고리 슈테른 대장이 회견하여 정전이 발효되었다. 8월 12일 양 군은 문서를 통해 장고봉 이북의 국경선 문제를 매듭지었고 160m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표에서 확인되다시피 소련군의 피해가 더 컸으며, 격분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책임을 물어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를 숙청했다. 블류헤르 원수는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수감된 후 고문당했으며, 18일 후에 옥사했다.

4. 둘러보기

파일:소련 국장.svg 소련의 대외 전쟁·분쟁
{{{#!wiki style="color: #ffd700;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1D1D1D; margin: -6px -1px -11px"
<colcolor=#ffd700> 전쟁 교전국
1924년 에스토니아 쿠데타 시도
,1924,
<colbgcolor=#f5f5f5,#191919>
봉소전쟁
1929
스페인 내전
1936 ~ 1939
에스토니아-소련 국경분쟁
,1938,
파일:에스토니아 국기.svg
에스토니아 공화국
소련-일본 국경분쟁
1938 ~ 1939
<colcolor=#ffd700> 하산 호 전투
1938
할힌골 전투
1939
제2차 세계 대전
1939 ~ 1945
폴란드 침공
1939
겨울전쟁
1939 ~ 1940
베사라비아-북부코비나 침공
1940
발트 3국 점령
1940
대조국전쟁
1941 ~ 1945
계속전쟁
1941 ~ 1944
페르시아 침공
1941
소련-일본 전쟁
1945
그리스 내전
1944 ~ 1948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그리스 왕국
6.25 전쟁
1950 ~ 1953
1953년 동독 봉기
1953
라제즈드노이호 사건
1953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argin: -2px 1px
[[일본|[[파일:일본 국기.svg|height=20]][br]{{{#000,#fff {{{-2 일본}}}}}}]]
헝가리 혁명
1956
U-2 격추 사건
1960
베트남 전쟁
1960 ~ 1975
소모전
,1967 ~ 1970,
프라하의 봄
1968
소련-중국 국경분쟁
1969
앙골라 내전
1975 ~ 1991
파일:앙골라 민족해방전선 당기.svg
FNLA
파일:카빈다 월경지 해방전선기.svg
FLEC
오가덴 전쟁
1977 ~ 1978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 ~ 1989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
1988 ~ 1994
리투아니아 독립 무력 진압 시도
1991
← 러시아 제국의 대외전쟁
→ 러시아의 대외전쟁
}}}}}}}}}

파일:일본 황실.svg 일본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시대 전쟁·전투 교전 세력
<colbgcolor=#b1646c> 메이지 시대
<colbgcolor=#ca7079> 운요호 사건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타이완 출병 파일:청나라 국기.svg 대만 원주민
청일전쟁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동학 농민 혁명 파일:Flag_of_Donghak_Peasant_Revolution_(small).svg.png 동학농민군
의화단 운동 파일:의화단 기.png 의화단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러일전쟁 파일:러시아 제국 국기.svg 러시아 제국
남대문 전투 파일: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남한 대토벌 작전 파일:대한제국 국기.svg 호남계 의병
다이쇼 시대 제1차 세계 대전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삼둔자 전투 파일:1280px-Korea_Independence_Army_Marching_Flag.svg.png 대한독립군
봉오동 전투 파일:1280px-Korea_Independence_Army_Marching_Flag.svg.png 대한독립군
청산리 전투 파일:1280px-Korea_Independence_Army_Marching_Flag.svg.png 대한독립군
시베리아 출병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소비에트 러시아
쇼와 시대 만주사변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영릉가 전투 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svg 파일:대만 국기.svg
연합군
쌍성보 전투 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svg 파일:대만 국기.svg
연합군
열하사변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경박호 전투 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svg 파일:대만 국기.svg
연합군
사도하자 전투 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svg 파일:대만 국기.svg
연합군
흥경성 전투 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svg 파일:대만 국기.svg
연합군
동경성 전투 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svg 파일:대만 국기.svg
연합군
대전자령 전투 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svg 파일:대만 국기.svg
연합군
중일전쟁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소련-일본 국경분쟁 <colbgcolor=#ca7079> 하산 호 전투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소련
파일:몽골 인민공화국 국기.svg 몽골 인민 공화국
할힌골 전투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소련
파일:몽골 인민공화국 국기.svg 몽골 인민 공화국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뉴질랜드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소련-일본 전쟁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소련
파일:몽골 인민공화국 국기.svg 몽골 인민 공화국
}}}}}}}}}



[1] 장고봉 사건, Chōkohō Jiken [2] 영토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조선, 만주, 소련이며, 강 이름인 도문강(圖門江)은 두만강, 봉우리 3개는 위에서부터 사초봉(沙草峰), 장군봉(將軍峰), 장고봉(張鼓峰)이다. 봉우리 근처에 위치한 호수인 합상호(哈桑湖)가 바로 하산 호(Lake Khasan)이다. [3] 지금은 북한-러시아 국경이고 국경역인 하산역이 있다. 철도는 나중에 1950년에 깔았으므로 이 때는 아직 없었다. [4] 소련군이 장고봉을 점거한 이유는 장고봉 이남의 일본군을 압박해 만주 북부의 영역권을 넓혀 일본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라 추정된다. [5] 당시 연대장은 사토 고토쿠 대좌. 임팔 작전에서 그 분에게 대놓고 항명한 그 사람 맞다. [6] 심지어 장고봉을 점령했던 19사단에게는 중포마저 없었다. 거의 순수 알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 [7] 이때 함경북도 경흥군 일대가 폭격을 당했고, 홍의역은 소련군 폭격에 날아갔다. 홍의역이 있던 증산(甑山)은 경흥군 노서면의 동(洞)으로 북한 행정구역상 평남에 있는 증산군과 무관하다. [8] 이때 전투 명령을 내린 사람이 바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였다. [9] 일본군이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던 것은 일본군이 방어자의 입장이었던 데다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지형적 이점에 힘입은 바가 컸다. 러일전쟁 당시 방어하는 러시아군보다 공격하는 일본군의 피해가 더 컸음을 생각하면 된다. 또한 전투가 벌어진 하산 호 인근 지역은 습지와 진창이 많아 전차의 효율적인 기동이 어려웠으며, 당시 소련군의 주력 전차였던 T-26은 경장갑 기동 전차로 아직까지는 국제 평균 수준을 유지하던 일본군의 대전차 공격에 취약했다. 더불어 대숙청의 여파로 극동지역 일선 부대의 기존 지휘관들 상당수가 숙청되고 그 자리를 신임 지휘관들이 막 이어받은 상황이었는데 이것이 소련군 부대들의 심각한 작전능력 저하를 야기했다. [10]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와 함께 난징 대학살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고 추정되는 인물이다. 하나야 타다시 못지않게 부하를 구타하는 악행으로 유명했으며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