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0-02-02 15:43:48

스여우싼


파일:석우삼.jpg
중화민국 안휘성 정부주석
정체 石友三
한국식 독음 석우삼
영문 Shi Yousan
한장(漢章)
출생 1891년 청나라 길림성 장춘
사망 1940년 12월 1일 중화민국 하남성 복양현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학력 없음.
직업 정치가, 군인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4. 관련문서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배신과 배반으로 점철된 민국시대 군벌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배신의 역사를 자랑하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1년 길림성 장춘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어릴 때는 일꾼으로 일했으나 필광원이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소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소학교에서 훗날 옌시산의 휘하의 장군이 되는 상진에게 수학했다. 1908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군에 입대하여 우페이푸가 지휘하는 청나라 신건육군 제3진의 병사가 되었으나 제3진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군에서 나오게 되고 이후 베이징에서 한동안 백수로 지냈다.

그러다가 1912년 펑위샹의 부하가 되어 기민한 성품을 바탕으로 펑위샹의 호위병이 되었고 펑위샹이 승진함에 따라 스여우싼의 지위도 올라갔다. 1924년 펑위샹이 서북변방독판에 임명되자 스여우싼은 8혼성여단 여단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스여우싼은 한푸쥐, 쑨롄중, 손량성, 유여명 등 펑위샹의 측근인 심삼태보 중 한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다. 1924년 북경정변 이후 국민군 1군 산하 제8혼성여단장에 임명되었다가 이후 제6군 군단장 겸 6사단 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직봉풍전쟁이 일어나자 펑위샹의 명을 받고 옌시산의 병력을 저지하는 임무를 받게 되었으나 안문관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상대 부대의 지휘관인 상진이 마침 자신의 옛 스승인 것을 이용, 상진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1926년 펑위샹이 소련으로 외유를 떠나고 국민군이 직봉풍전쟁에서 완전히 패하자 스여우싼은 국민군 패잔병들을 흡수하여 휘하에 3개 사단을 거느리게 되었다. 펑위샹을 대신하여 국민군을 지휘하던 장지강이 감숙성으로 퇴각을 명하자 스여우싼은 서북으로 가기가 싫어 옌시산에게 투항하였다.

2.2. 국민혁명 반장전쟁

1926년 9월, 펑위샹이 중국 국민당 가입을 선언, 제2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국민혁명군을 이끌게 되었다. 펑위샹은 스여우싼에게 옛 일을 묻지 않겠다고 하였고 이에 스여우싼은 펑위샹에게 다시 합류하여 1방면군 산하 5군 군장에 임명되었고 1928년 2월 펑위샹의 지시에 따라 산동 방면에 배치되어 4월에 시작된 국민당의 2차 북벌에 역시 제1방면군 산하 5군 군장 자격으로 참전했다.

1929년 편견회의 이후 24사단장에 임명되었는데 펑위샹 장제스의 사이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1929년 3월 1차 장계전쟁이 발발하자 장제스가 리쭝런 바이충시를 무력으로 토벌하고 리지선을 감금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펑위샹은 1929년 5월 1차 장풍전쟁을 선포하였다. 당시 2집단군 5군장을 맡고 있던 스여우싼은 펑위샹의 지시에 따라 하남성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이후 평한철로, 농해철로, 무승관 터널, 황하의 철교들을 폭파하며 중앙군의 전진을 막으려 했다.[1] 허나 6월 1일 허창으로 철수한 스여우싼은 장제스가 심복인 전대균을 보내 자신에게 500만원의 군비와 안휘성 정부주석 자리를 제안하자 6월 2일 즉각 펑위샹의 10대 죄상을 통전하며 국민정부에 합류하여 동관에서 정저우로 철수해버렸다.

장제스에 투항한 스여우싼은 13로군 총지휘에 임명되었다. 허나 1929년 9월, 장파쿠이 계계군벌의 잔당을 규합하여 2차 장계전쟁을 일으키자 장제스는 스여우싼에게 광동 방위를 지시했다. 이에 스여우싼은 머나먼 남방에서 싸우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 동요하게 되었다. 이에 탕성즈가 그를 꾀어 반장파에 가입할 것을 권했고 스여우싼은 12월 1일, 난징을 향해 기습적으로 포격을 감행한 후 12월 2일 호당구국군 5로 총사령관에 취임, 장당전쟁에 가담했으나 12월 20일 장쉐량 옌시산이 장제스 옹호를 통전하며 참전하자 놀란 스여우싼은 옌시산에게 투항해버렸다.

1930년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스여우싼은 북평 국민정부 4방면군 총사령관 겸 2로군 총지휘에 임명되어 쑨뎬잉 등을 거느리고 농해선 공격을 맡았으나 장쉐량 봉천군벌이 관내로 진출하자 9월 19일, 장제스에게 다시 항복 의사를 타진하였다. 한푸쥐의 주선으로 투항을 허락받은 한푸쥐는 13로군 총지휘 직책을 회복하고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장쉐량에게 투항했다. 11월 21일, 소속 부대를 3만 2천명으로 감축했다. 1931년 봄, 봉천에서 장쉐량을 만나 충성을 맹세하고 산하 병력 6개 사단, 3만 2천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화북에 주둔하였다.

2.3. 1차 양광사변 열하사변

그러던 중 1931년 2월 발생한 탕산 사건을 계기로 개조파, 서산회의파, 광동파가 결집하여 1931년 5월 광저우에서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하여 1차 양광사변을 선포하자 화북을 장악하고 싶었던 스여우싼은 그 기회를 틈타 다시 반장파에 서기 위해 불온한 책동을 벌였다. 장제스는 이를 파악했음에도 광동파를 저지하기 위해 황하 이남으로 병력을 남하시키고 있었다.[2] 여기에 관동군은 성공여부는 불투명하지만 스여우싼을 키워 장쉐량을 대신할 3세력으로 만들 수 있다고 여겨 마침 다롄에서 체류하던 스여우싼에게 지원 의사를 타진했고 스여우싼도 호응하여 소총 1만정과 약간의 기관총 및 이에 필요한 탄약을 구입할 수 있는 군자금을 제공한다면 일본과 어떤 밀약도 맺을 수 있다고 타진해왔다.

장제스는 스여우싼을 달래기 위해 중앙에 복종하면 매달 20만원의 군비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이에 스여우싼은 중앙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으나 광저우 국민정부에서 50만원의 군비를 제안하자 옌시산을 반장파에 끌어들이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는 등 불온한 책동을 벌이다가 결국 1931년 7월 18일 순덕(順德)에서 광저우 국민정부가 제공한 군비를 지급받고 광저우 국민정부 제5집단군 총사령관에 취임, 7월 21일에 장제스와 장쉐량 토벌령을 하달하였다. 7월 24일 국민정부는 스여우싼의 모든 공직을 박탈했고 장쉐량은 만복린을 토역군 총사령관에 임명, 스여우싼을 토벌하게 하였다. 스여우싼은 초기에 기세 좋게 베이핑으로 진군하였지만 황하를 넘어 북상한 중앙군, 만복린의 봉천군, 스좌장에서 진격해온 상진의 산서군의 협공을 받아 7월 31일 하북성 자록(朿鹿)에서 두들겨 맞고 개박살이 났다. 스여우싼은 하야를 통전하고 국민군 시절의 맹우였던 한푸쥐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고 1932년 한푸쥐의 사주로 과거 산동을 지배했던 군벌 장쭝창을 암살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푸쥐의 뒤통수를 치고 산동성의 대권을 장악하려 하다가 한푸쥐와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결국 1932년 스여우싼은 관동군 참모 도이하라 겐지의 회유를 받고 산동을 떠나 톈진의 일본 조계지로 가게 되었다. 그는 톈진에서 폭동을 조직하기도 했으며 1931년에 일본군이 조직한 이제춘의 항일구국군과 합세하여 중국군과 일본군이 대치하는 화북 지역에서 화북민중자치연군정부를 조직하고 당산과 진황도에 정부를 설치하여 일본으로부터 무기와 자금을 지원받았다. 1933년 열하사변 당고정전협정 체결 이후 관동군 부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 돤치루이, 우페이푸, 쑨촨팡, 장징야오, 바이젠우 등을 매수해야 한다고 판단, 이들을 동원하여 화북연치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우고 육군성 기밀비 300만원을 들여 매수를 시도했다. 스여우싼은 호남독군을 지냈던 안휘군벌 장징야오, 우페이푸의 부하 바이젠우 등과 함께 일본을 위해 일하게 되어 <정의사>를 설립, 옛 부하들을 선동하여 5월 18일 랑방의 독립을 선포하게 하고 친일파 깡패들을 조직하여 풍대 사건을 일으키는 등 항일운동을 방해하는 매국노짓을 하였다. 이 때문에 다이리가 그를 암살하기 위해 한차례 시도하였으나 장징야오를 죽이는 데는 성공했으나 스여우싼 암살은 실패하였다. 어쨌거나 장징야오의 죽음을 보고 기겁한 스여우싼은 한동안 일본과 손을 끊었다.

1935년 11월 기동사변이 발생하자 국민정부는 29군 군장 쑹저위안을 위원장으로 하는 기찰정무위원회를 수립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스여우싼은 기북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2.4. 중일전쟁과 최후

파일:말년의석우삼.jpg
말년의 스여우싼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스여우싼은 쑹저위안 휘하에서 181사단장이 되었고 펑위샹이 6전구 사령관을 맡게 되자 그의 휘하의 69군 군장이 되어 화북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지만 펑위샹의 말을 듣지 않고 적전도주만 일삼았다. 1938년 말 10군단 총사령관이 된 스여우싼은 한푸쥐로 산동성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자 녹종린의 기찰전구에 소속되어 유격전을 실시하였고 이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과 결탁하여 한동안 잘 지냈다.

하지만 1939년 4월 장제스가 산동성의 공산군을 제거해주면 종전 후에 화북의 통제권을 주겠다고 비공식적으로 타진하자 대대적으로 산동성에서 공산당을 토벌하였고 그 공으로 차하얼성 주석에 임명되었다. 허나 1940년 1월 지난 인근의 평한철로에서 1만 7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팔로군을 공격하던 스여우싼은 2차례나 패했다. 2월 스여우싼은 주화이빙과 함께 타이항, 지난에서 팔로군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지난과 웨이동에서 대패했다. 3월 5일, 류보청 덩샤오핑이 지휘하는 팔로군은 츠현과 우안, 서현, 린현에서 국민혁명군 2개 사단을 섬멸했고 1940년 8월, 산동성 정부가 주재한 노촌이 함락되면서 국민정부는 산동성의 통제권을 상실했다.

스여우싼은 이번에는 일본에 붙을 타이밍이라 여겨 카이펑의 북지나방면군과 협상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던 스여우싼의 부하들은 1940년 11월 노서행영주임 손양성에게 쓰유산이 일본군에게 투항하려 함을 고변했다. 이를 알게 된 손양성은 신8군 군장 고수훈과 면담할 것을 스여우싼에게 지시했다. 12월 1일 아무것도 모르고 하남성 복양 유하둔에 있는 고수훈의 주둔지로 들어간 스여우싼은 기습적으로 체포되었다.

잠시 감금되었던 스여우싼은 곧 황하강변에 생매장되어 죽었다.

3. 참고문헌

4. 관련문서


[1] 이 과정에서 소림사를 공격해 승려들을 죽이고 소림사를 불태워버렸다. [2] 이를 대신하여 장쉐량이 스여우싼을 견제하기 위해 4만명의 병력을 산해관 내부로 파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