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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2-08 12:51:27

주페이더

파일:주배덕.jpg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3대 참모총장
한문 朱培德
한국식 독음 주배덕
영문 Zhu Peide
익지(益之)
출생 1889년 10월 29일 청나라 운남성 녹풍현
사망 1937년 2월 17일 중화민국 난징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쿤밍 강무학당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4. 관련문서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일찍이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여 국민혁명에 참가했으며 이후 반장전쟁, 초공작전에서 활약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9년 운남성에서 태어났다. 1908년 운남육군 19진 수영학당을 졸업한 후 1910년 쿤밍 강무학당에 진학, 1기로 졸업했으며 재학 중에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다. 주더와 동기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차이어의 운남성 봉기에 참여했으며 1915년 호국전쟁에서 호국군 1군에 소속되었다가 리례쥔의 2군으로 옮겨 광동 방면에서 북양군벌과 교전했다.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대리총통 리위안훙이 임시 약법과 구국회를 회복시키면서 전쟁이 끝나자 호국군 2군을 개편한 혼성 7여단에 속해 광저우에 주둔했다. 1917년 호법전쟁 쑨원을 만나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후 군공을 세워 광저우 위수 사령관 겸 4사단장까지 승진했다.

1920년 탕지야오와 이근원 사이에 내전이 발생하자 탕지야오를 지지했으나 이근원에게 축출되어 장개유와 방성도의 주월전군에 소속되어 5군 7여단장에 임명, 복건에서 북양군벌과 교전했으나 크게 패했다. 탕지야오가 장개유와 방성도를 숙청하고 이근원을 새로운 주월전군 사령관에 임명하자 반발하여 리례쥔의 권유로 5군 7여단의 잔여세력을 이끌고 이를 4사단으로 편성하여 호남 남부로 퇴각했다. 1920년 5월, 탕지야오는 주페이더에게 병력을 이끌고 사천의 자신의 영지를 지키라고 지시했는데 주페이더가 개입하기도 전에 사천에 주둔한 전계군벌이 참패하면서 탕지야오는 사천에서 축출되었다.

1921년 5월, 천중밍이 광저우 혁명정부를 수립하고 쑨원과 합작하자 리례쥔이 광동과 광서에 흩어져 있는 전계군벌들에게 광동정부에 합류할 것을 호소했고 이에 양익겸을 수령으로 삼아 광동정부에 가담했다. 이때 구핀전에게 축출된 탕지야오가 양익겸과 접촉하여 자신의 부하로 삼으려 하자 리례쥔은 양익겸을 해직하고 주페이더를 주월전군 총지휘에 임명하여 탕지야오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게 했다. 주페이더는 12월에 중국 국민당에 가입했다. 1922년 영풍함 사건이 발생하자 쑨원을 지지하며 천중밍에 맞서 싸웠고 이후 쉬충즈의 천중밍 토벌에 참가하여 1923년 광저우를 점령하고 3차 광동정부 수립에 일조했다. 이후 대본영 참모, 군정부장 대리에 취임하여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1924년 쑨원의 북벌에 따라 강서성 남부를 공격했으나 큰 성과를 보지 못했고 광저우 상단 사건 등이 일어나면서 중단되었다.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하고 양시민, 유진환이 국민당에 대항해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했다.

1925년 7월 1일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왕징웨이, 후한민, 탄옌카이, 쉬충즈, 린썬, 랴오중카이, 쑨커, 청첸 등과 함께 국민정부위원에 선출되었으며 7월 6일 군사위원회 수립 이후 왕징웨이, 후한민, 랴오중카이, 쉬충즈, 장제스, 탄옌카이 등과 함께 군사위원에 임명되었고 이후 군수부장에 취임했다. 1925년 8월 국민혁명군 창설 이후 휘하의 운남군을 개편한 3군 군장에 취임하였고 중앙집행위원, 정치위원 등을 역임했다. 1925년 8월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이후 왕징웨이, 장제스, 탄옌카이 등과 의논하여 군정부장 쉬충즈 숙청에 동참했으며 국민당의 2차 동정에 참가하여 천중밍을 완전히 토벌했다. 동정 이후 하이난을 지배하는 광동군벌 등본은을 토벌하기 위한 남정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4군 군장 리지선의 견제로 경질되어 리지선이 남정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올라 군권을 장악하려는 장제스와 마찰을 빚었으나 1926년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장제스의 동참 권고를 묵살했지만 그렇다고 왕징웨이를 돕지도 않고 방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3군을 거느려 참전했다.

2.2. 국민혁명

북벌 초기 우페이푸의 양호 지역을 먼저 공격한다는 전략에 따라 2군과 함께 우익군에 배치되어 호남과 호북을 공격했다. 이후 영왕운동에 동조하여 강서성 공격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은 장제스가 지원을 요청했을 때 왕징웨이와 친분이 전혀 없음에도 장제스에게 먼저 왕징웨이 복직을 지지하라고 요구하여 장제스를 크게 놀라게 했다. 1927년 1월 난창 군무선후회의에 참석했다. 우한 점령 이후 8군 군장 탕성즈가 휘하의 허젠 등을 군장으로 승진하여 3개 군을 통솔하고 양호 지역을 장악하는 것을 경계하였고 이 때문에 장제스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군비 문제 때문에 장제스와 감정이 좋지 않았는데다가 장제스가 난창 천도론을 주장하며 난창을 기반으로 삼으려하자 자신의 기반을 잃을 것을 경계하여 반장 감정을 품게 되었고 1927년 4월 1일, 장제스를 경계하려는 우한 국민정부의 의도에 따라 강서성 정부주석에 임명되면서 완전히 반장파에 가담했다. 1927년 3월에 열린 3중전회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참석하진 않았다.

탕성즈의 8군, 천밍수의 11군, 장파쿠이의 4군과 함께 난징, 상하이 공략에 참가했고 4.12 상하이 쿠데타 중에 장제스로부터 지지를 호소받았으나 따르지 않고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에 잔류했다. 허나 5월에 양썬 등이 분공을 촉구하며 우한 국민정부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관망하다가 분공조치에 동참하여 5월 29일, 강서성에서 공산당원들과 국민당 좌파를 추방하고 난창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노농운동을 탄압했다. 1927년 6월, 탕성즈가 장제스 타도를 선언하자 휘하의 3군을 거느리고 장파쿠이, 허젠, 차이팅카이와 함께 장제스를 토벌하기 위한 동정에 나섰으나 8월 1일 난창 폭동이 발생하면서 큰 손해를 입고 허젠에게 선봉을 내주고 동정에서 사실상 이탈해야 했다.

1927년 9월 영한합작이 성립된 이후 강서성에서 국민당 특별위원회에 복종했으며 탕성즈가 우한 정치분회를 조직하여 특별위원회에 도전하다가 안휘성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등 도발을 감행하자 10월 20일 발표된 탕성즈 토벌작전에 동참하여 청첸, 리쭝런, 바이충시, 펑위샹, 리지선과 함께 당계전쟁에 참여하여 탕성즈를 무력으로 토벌하였다. 탕성즈는 11월에 하야하여 일본으로 망명했고 양호 지역의 탕성즈 정권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때부터 주페이더는 반장세력에서 이탈하여 장제스에게 복종하였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시작될 때 1집단군 전적 총지휘관에 임명되었다.

2.3. 반장전쟁 초공작전

파일:국민당 가입이후의 주페이더.jpg
국민당 가입이후의 주페이더

강서성 정부주석 재임 중인 1928년 6월, 추수폭동 이후 정강산을 점거하고 유격전을 벌이는 마오쩌둥을 토벌하기 위해 2개 단을 보냈으나 소득이 없었고 11월, 호남-강서 양성 초비 총지휘관에 임명되어 정강산을 공격했으나 1월에 허젠에게 총지휘 자리를 대행하게 했다. 1929년 편견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편견위원에 임명되어 제1 편견구 주임을 맡았다.

1929년 2월, 우한정치분회 주석 리쭝런이 호남성 정부주석 루디핑을 해임하고 허젠을 무단으로 임명한 호남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3월에 1차 장계전쟁이 발발했다. 장제스는 토역군을 조직하여 주페이더를 1로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우한을 공격하게 했고 주페이더는 한푸쥐, 유치와 함께 광서군을 몰아내고 우한을 함락시켰다. 1929년 6월, 국민당 3기 2중전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차 장풍전쟁 이후 8월 1일 난징에서 재개된 편견실시회의에 참여, 편견 실시에 대해 논했다. 1929년 9월 강서성 정부주석에서 해임되어 루디핑에게 자리를 내주고 국민혁명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1931년 3월 2일 장제스, 위유런, 차이위안페이, 장런제, 우징헝 등 12명과 함께 훈정 시기 약법 제정을 건의하였다. 이후 국민정부 조직법이 수정되면서 국민정부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고 일본군이 금주에 이르자 12월 8일 특별외교위원회에서 금주에 주둔한 중국군을 철수시키지 않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만약 쌍방이 전투 상태에 돌입한다면 1주일도 안되어 원조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패할 것을 알면서도 일본과 싸울 것인지 아니면 일본과 협의하여 방법을 강구할 것인지를 선택하면서 금주에서의 철수와 일본과 교섭을 주장했고 다이지타오의 찬성을 받았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자 군정부장 허잉친과 의논, 상하이 방위를 위해 난징에 주둔한 헌병 6단을 상하이에 증파했다. 1932년 3월, 참모총장에서 사퇴하여 장제스에게 자리를 내준 다음 군사위원회 변공청 주임을 맡았으며 1933년 12월부터 1934년 12월부터 훈련총감 대행을 맡았다.

2.4. 말년

1937년, 빈혈에 시달리던 중 국민당 제5기 3중전회에 참석하기 위해 2월 15일 아침에 독일에서 수입된 주사를 맞았다가 오후부터 중독을 보이며 급격히 건강이 악회되었고 이틀 후인 2월 17일 사망했다. 장제스는 이에 대해 조의를 표하고 문상을 갔으며, 2월 20일에 열린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그의 유해는 난징에 소재한 절인 비로사(毗盧寺)에 안치되었다. 국민정부는 그를 위한 국장을 거행하였다.

3. 참고문헌

4.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