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0-02-04 14:12:25

제노전쟁



1. 개요2. 1차 제노전쟁3. 2차 제노전쟁
3.1. 톈진회의와 선무군의 조직3.2. 장쭝창과 루융샹의 남하3.3. 돤치루이의 중재와 상하이의 함락
4. 참고문헌5. 관련문서

1. 개요

직예군벌 치셰위안 안휘군벌 루융샹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전쟁을 말한다. 1924년 9월의 1차 제노전쟁과 1924년 12월의 2차 제노전쟁이 있다.

2. 1차 제노전쟁

1924년 9월~1924년 10월에 걸쳐 일어난 치셰위안 루융샹 사이의 1차 전쟁. 복건독군 쑨촨팡이 가세하면서 루융샹의 패배로 끝나고 치셰위안이 절강성을 장악하였다. 자세한 것은 강절전쟁 문서 참조.

3. 2차 제노전쟁

3.1. 톈진회의와 선무군의 조직

강절전쟁이 계기가 되어 장쭤린 봉천군벌 차오쿤, 우페이푸 직예군벌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게 된다. 장쭤린은 루융샹과의 동맹을 구실로 관내로 출병했고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때 우페이푸 휘하의 펑위샹이 장쭤린과 결탁하여 북경정변을 일으켜 대총통 차오쿤을 축출하면서 직예군벌은 패배했고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가 11월 15일 임시집정에 추대, 11월 24일에 취임하면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일본으로 망명했던 루융샹은 북경정변의 소식을 듣고 10월 29일 귀국하였고 장쭤린은 그의 절호 연군 총사령관 직을 회복시켜 주었다. 돤치루이는 1924년 12월 10일 장쭤린의 청에 따라 각성의 순열사 직을 폐지하고 독군을 독판으로 개칭했다. 돤치루이는 안휘군벌의 세력을 다시 확장하고자 루융샹을 직예독판에 임명했는데 이에 장쭤린은 장강유역의 각 성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이유로 텐진회의를 소집, 강소성과 안휘성을 직예군벌로부터 빼앗아 다시 안휘군벌이 지배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며 병력의 수송과 군비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오로지 의리를 위한 제의이며 사익은 추호도 없다는 장쭤린의 보증에 돤치루이는 장쭤린의 제안에 믿을만한다고 여겼고 돤치루이와 루융샹은 장쭤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로 인하여 직예독판은 봉천군벌 리징린에게 넘어갔고 돤치루이는 왕읍당을 안휘독판에 임명하는 한편 강소독판 치셰위안을 면직시키고 강소성장 한국균에게 독군을 겸직할 것을 지시한 다음에 루융샹을 소환선무사 겸 강소독판으로 임명하여 치셰위안을 토벌하게 하였다.

3.2. 장쭝창과 루융샹의 남하

12월 10일, 난징에서는 봉군이 대거 남하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치셰위안은 병력을 배치하여 방어준비에 나섰다. 치셰위안은 쑨촨팡과 연대, 스스로 절호연군 1로 총사령관에 취임했으며 쑨촨팡은 절호연군 2로 총사령관이 되었다. 12월 11일 치셰위안 파면명령이 하달되고 루융샹이 정식으로 소환선무사 겸 강소독판에 임명되었다. 12월 12일 장쭤린, 루융샹, 장쉐량, 장쭝창, 양위팅, 리징린, 우광신이 톈진 조원에서 치셰위안 토벌에 대해 논의하여 장쭝창이 선봉에 서서 루융샹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장쭤린은 남하 선무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장덩쉬안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한린춘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한 후 장쭝창 소속 부대 10만 대군과 진유 주둔군 1개 여단을 지휘하게 했다. 장쭝창은 진포선 화물열차를 장갑열차로 개조하여 진포선을 따라 남하했다. 쉬저우에는 강소군 진조원의 1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진조원은 장쭝창과 매우 친한 사이라서 장쭝창의 대군을 막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며 장쭝창에게 총 한방 쏘지 않고 길을 내주었다. 이로 인하여 장쭝창은 손쉽게 쉬저우를 통과, 장강에 이르러 도하를 준비했다.

이어 채평본이 지휘하는 봉군 8사단이 노태를 출발하여 기차를 타고 남하, 장강을 도하하여 난징 하관에 이르렀다. 치셰위안은 봉군에 맞서 저항하려 했으나 휘하 장병들의 사기가 이미 땅에 떨어져 있어 싸우려는 자가 없고 병사들은 앞을 다투어 봉군에 항복할 뿐이었다. 장쭝창의 선봉부대는 쑤저우를 함락시키고 9사단 선두부대가 상주를 점령하여 상하이도 위험하게 되었다. 이에 치셰위안은 방법이 없음을 알고 난징을 버리고 상하이로 도주하였다.

3.3. 돤치루이의 중재와 상하이의 함락

한편 돤치루이는 전쟁이 확대될 것을 우려하여 육군총장 우광신을 파견, 5.30 사건을 처리하게 하는 한편 루융샹이 강소독판, 쑨촨팡이 절강독판이 되는 합의안을 내놓아 절호연군 2로 총사령관 쑨촨팡으로 하여금 치셰위안을 돕지 않을 것을 주문하였다. 임시정부가 자신의 기반을 건드릴 의사가 없음을 타진하자 쑨촨팡은 치셰위안을 돕지 않고 관망할 따름이었다. 이에 장쭝창과 쑨촨팡은 상하이에서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쑨촨팡이 관망하는 사이, 장쭝창은 8사단을 동원하여 상하이를 점령했다. 장쭝창은 부하 필서성을 해군 사령관에, 왕기에게 상하이 세무국장을 맡겨 상하이의 행정을 장악하였다. 치셰위안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루융샹은 잔여 부대를 재편하려고 했지만 인력도 장비도 군비도 턱없이 부족하여 병력을 재건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루융샹은 봉군에 얹혀사는 처지를 견디지 못하고 강소독판 자리를 봉천군벌의 양위팅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안휘독판 왕읍당 역시 자신의 자리를 강등선에게 내주었다.

이후 장쭝창은 산동은 산동인이 다스려야 한다는 장쭤린의 명분에 따라 산동독판으로 이동했고 봉군은 장강유역을 장악하였으나 봉군의 확장에 경계를 품은 쑨촨팡이 봉군에 대항하여 손봉전쟁을 일으키면서 곧 축출된다.

4. 참고문헌

5.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