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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01 11:34:59

서북군벌

중화민국의 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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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국민군 계열
2.1. 하북군벌2.2. 마가군벌
2.2.1. 영하군벌2.2.2. 감숙군벌2.2.3. 청해군벌
2.3. 섬서군벌
3. 주요 인물
3.1. 국민군 계열3.2. 하북군벌3.3. 마가군벌
3.3.1. 청해계열3.3.2. 영하계열3.3.3. 감숙계열
3.4. 섬서군벌
4. 신강군벌
4.1. 주요인물
5. 참고문헌

1. 개요

섬서, 청해, 감숙, 수원, 신강 일대에서 활동한 군벌들. 펑위샹의 국민군 계열이 가장 강력한 세력을 차지하였으나 중원대전에서 펑위샹이 붕괴된 후 뿔뿔이 흩어져 장제스에게 투항하였고 각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신강군벌은 국민군과 관계가 없는 독립적인 세력으로 존재했다.

2. 국민군 계열

1924년, 2차 직봉전쟁 중에 직예군벌의 육군검열사이자 3로군 총사령관이었던 펑위샹 북경정변을 일으켜 독립한 계열이다. 북경정변 이후 펑위샹이 국민군을 조직하였기 때문에 국민군벌이라고도 하며 펑위샹의 성을 따서 풍계군벌이라고도 한다.

1924년, 펑위샹은 북경정변을 일으켜 대총통 차오쿤을 핍박하여 하야시키고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과 손잡고 우페이푸를 축출했다. 펑위샹은 과거 하남독군 시절부터 매춘, 아편매매, 전족을 금지시키는 등 개혁적 성향을 가진 군벌로 핍궁사건을 일으켜 청나라 소조정을 해산시키는 등 구체제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펑위샹은 쑨원을 베이징으로 초청하는 등 남방의 중국 국민당에 친화적인 모습을 드러냈으나 장쭤린이 초빙한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가 임시 집정에 취임하면서 돤치루이 정부를 지지했다. 돤치루이 정부는 펑위샹이 지배하고 있던 베이징에 위치했기 때문에 펑위샹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직봉전쟁 이후, 장쭤린이 장강 이남 지역으로까지 공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펑위샹과 장쭤린과의 관계도 금이 가기 시작했으며 1925년 손봉전쟁으로 장강 하류에서 봉천군벌의 세력이 축출되자 펑위샹은 봉천군벌의 개혁파인 궈쑹링, 비주류 리징린과 손잡고 장쭤린에 대항하려고 했다. 하지만 궈쑹링이 일으킨 반봉사건이 실패로 돌아가고 국민군 산하의 손악와 호경익이 하남성의 우페이푸 세력과 무단으로 교전하면서 펑위샹은 우페이푸, 장쭤린의 연합군과 적대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산서군벌 옌시산이 반풍 전선에 가담하게 되었다. 1926년에 이르러 돤치루이마저 펑위샹을 적대하려 하자 펑위샹은 대고구 사건을 구실로 돤치루이를 압박하여 하야시켰으나 직봉풍전쟁이 발발하면서 펑위샹은 베이징을 버리고 섬서, 감숙, 청해의 오지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근거지를 서북으로 옮기게 되었다.

펑위샹은 이 시기부터 소련 중국 공산당과 접촉하며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였고 소련으로부터 군사적 원조를 받았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고 국민혁명군이 호북, 산동까지 진격하자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 총사령관에 취임함으로 국민당에 가입했다.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우한과 난징 사이에서 저울질하다가 1927년 쉬저우 회담 이후 장제스와 손잡고 왕징웨이에게 공산당과 결별할 것을 요구하면서 국공결렬이 일어났다. 하지만 편견회의 이후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장제스에게 불만을 품고 1차 장풍전쟁, 2차 장풍전쟁을 일으켜 반장전쟁에 참여했지만 패배했다. 이후 옌시산 중원대전을 일으키자 펑위샹은 리쭝런과 함께 장제스에게 대항하였지만 또다시 패배하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펑위샹은 군권에서 물러나며, 실제로 서북 군벌은 타 지역으로 분할되거나, 하나의 구심점이 없는 조직으로 흩어지게 된다.

한푸쥐의 경우, 장제스에게 투항하여 산동군벌로 정착하게 되었으며 쑹저위안, 친더춘, 풍치안, 장자충 등은 하북, 차하얼을 중심으로 하는 기찰정무위원회를 조직하여 하북군벌로 정착한다. 한푸쥐는 장제스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으나 기찰정무위원회는 국민정부와 일본 사이에서 저울질하면서 반독립적인 행보를 보였다.

2.1. 하북군벌

중원대전 이후 봉천군벌에 투항한 풍계군벌의 분파. 중원대전 장쉐량에게 항복한 스여우싼의 13로군과 쑹저위안의 29군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주류는 쑹저위안의 29군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3년 열하사변에서 일본군에 맞서 항전했고 이 덕분에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하북과 차하얼에 주둔하면서 국경 수비를 맡았다. 1935년 시점까지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가 설치되어 베이핑 군분회 대리위원장 허잉친의 통제를 받았으나 1935년 하매 협정이 체결되고 기찰정무위원회가 설치됨에 따라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이때 쑹저위안이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으며 친더춘이 베이핑 시장이 되어 베이핑의 시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 치셰위안을 비롯한 북양군벌의 잔존인사들과 친일파들을 흡수하였으나 일본의 하북 침투에 저항하는 방파제 역할도 수행했다. 1935년까지는 차하얼성도 관할하고 있으나 장북 사건이 발생하면서 염계군벌 푸쭤이에게 차하얼성을 양도하고 하북성으로 철수한다.

일본으로부터는 난징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반일군벌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서안 사건 중에 장제스 처형을 지지한 군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의 군사적 위협 때문에 쑹저위안 등은 반일성향이었으나 일본과의 화해를 모색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장파 장교들이 성장하게 되면서 반일성향이 차차 두드러지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의 침략에 처음 노출되었으며 일본의 의도를 오판하고 부저항주의를 취하다가 근거지인 베이핑을 잃고 패주하면서 소멸되었다. 잔여세력인 29군은 펑위샹의 6전구에서 항일전쟁을 수행했으나 펑위샹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적전도주하면서 해체되었다. 수장인 쑹저위안은 사천에서 병사했고 장자충, 친더춘 등은 중앙의 영도 하에서 항일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2.2. 마가군벌

서북삼마 西北三馬
청해군벌 감숙군벌 영하군벌
마부팡 마훙빈 마훙쿠이

감숙, 영하, 청해성의 마씨 회족군벌들을 말한다. 시초는 청나라 시절 회민 반란 당시 좌종당 측에 투항한 마해안, 마안량의 부대였으며 신해혁명 이후 중앙정부의 묵인 속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한국에서 가장 자료가 부족한 군벌 중 하나다. 북양군벌이나 염석산, 풍옥상, 상계군벌, 광동군벌, 사천군벌, 하다못해 신강의 성스차이까지도 연구가 어느 정도 축적된데 반면 서북군벌은 마부팡의 지역개발정책에 관련된 석사학위 논문 하나가 전부였다.

2.2.1. 영하군벌

마훙쿠이와 영하성을 중심으로 하는 마씨 군벌. 펑위샹과 소 닭보듯 하는 사이인 청해군벌과는 달리 국민군 밑에서 반장전쟁 중 열성적으로 종군했다. 이들의 영지는 후에 닝샤 후이족 자치구가 되었다.

2.2.2. 감숙군벌

감숙성을 중심으로 하는 마씨 군벌. 마훙빈, 마중잉 등이 대권을 놓고 경쟁했으며 마중잉은 감숙 북부로 축출되었다. 축출된 마중잉은 회족을 규합하는 한편 호자 니야즈, 율바르스 칸 등 위구르족과 연합하여 진수런, 성스차이와 대결하였으나 소련군의 개입으로 패배하고 소련에 귀순한다.

2.2.3. 청해군벌

마부팡 시절 중국-티베트 전쟁에 참여한 적이 있다.

2.3. 섬서군벌

서북군벌에서 가장 비중이 없는 세력. 위유런의 섬서정국군이 시초이며 위유런이 무력투쟁을 포기하고 국민정부에 합류한 이후 양후청 등이 주도했다. 1924년 북경정변 이후 국민군에 가입했으며 국민혁명에 참가하여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으로 편제되었다. 1930년 중원대전에서 장제스를 지지함으로 섬서성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중앙정부가 섬서성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려 하자 이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고 대장정 과정에서 섬서성으로 이주한 중국 공산당 중앙과 교전하게 되면서 피해가 누적되었다.

만주사변 이후 고향을 잃은 봉천군벌의 잔여세력과 동거하게 되었는데 결국 이들과 손잡고 서안 사건을 일으킨다. 하지만 양후청은 투옥되고 섬서군벌은 소멸된다.

3. 주요 인물

3.1. 국민군 계열

3.2. 하북군벌

3.3. 마가군벌

3.3.1. 청해계열

3.3.2. 영하계열

3.3.3. 감숙계열

3.4. 섬서군벌

4. 신강군벌

말 그대로 신강성을 중심으로 하는 군벌들이다. 지역의 유지와 혁명가들을 중심으로 하였던 다른 지역의 군벌들과 달리 신강성은 위구르족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위구르족 군벌들은 비주류나 한족군벌의 보조세력으로 머물렀고 타 지역에서 온 한족 군벌들이 주도했다. 역대 신강성을 지배했던 3명의 군벌 모두 각각 운남, 감숙, 봉천 출신이었다. 서북군벌 중에는 마중잉을 비롯한 감숙군벌과 경쟁관계에 있어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신강군벌의 시초는 신강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으로 신강의 성도인 적화의 도대를 지낸 양쩡신이 경쟁자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1912년부터 1928년까지 신강을 지배했다. 양쩡신은 고립주의와 우민통치, 민족 간 대립을 이용하여 17년간 매우 안정적으로 신강성을 통치하였고 1928년 국민정부에 합류하였으나 부하의 손에 암살당했다. 양쩡신 사후 3년간 진수런이 집권했으나 그도 3년 만에 4.12 디화 정변으로 축출당했고 그 뒤를 이은 것은 성스차이였다. 성스차이는 소련과 결탁, 감숙군벌 마중잉의 공격과 경쟁 군벌들을 모조리 진압하고 신강성의 확고부동한 지배자가 되었다. 1935년 이후 신강성은 사실상 성스차이 일족의 왕국이었다. 그는 철저히 그의 친인척들을 중심으로 신장성을 다스렸다.

신강군벌의 특징은 소련과 접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양정부와 국민정부를 막론하고 중앙정부보다는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였고 위구르족 왕공들과 여러 부족들을 관리해야 하는 소수민족 문제가 현안이었다는 점이다. 양쩡신은 위구르족, 몽골족, 티베트족 등의 보호자를 모두 자처하며 각 민족들을 분열시키는 방식으로 신강을 성공적으로 관리했으나 진수런 시기에는 진수런이 매우 강경한 위구르족 및 이슬람교 탄압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위구르족들의 반발이 극심했으며 진수런의 손에 멸망당한 하미 칸국의 유신들이 율바르스 칸과 호자 니야즈 등이 1931년 하미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집권한 성스차이는 위구르족에 대한 유화정책을 취해 반란을 종식시켰으나 후기로 갈수록 강경한 동화정책을 취하여 위구르족을 탄압했다. 결국 중일전쟁 이후에는 위구르족들이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을 선포하고 국민정부에 대항하기도 했다.

결국 신강군벌은 독소전쟁 이후 소련과 관계를 단절하고 국민정부에 줄을 댔으나 국민정부가 신강 장악을 시도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된다. 성스차이는 다시 소련에 접촉했으나 소련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이를 거절했고 1944년, 성스차이가 충칭으로 소환되면서 신강군벌은 소멸한다.

4.1. 주요인물

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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