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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10:30:59

제1차 국공합작

1차 국공합작에서 넘어옴
<colcolor=#222> 第一次國共合作
First United Front

1. 개요2. 배경
2.1. 신해혁명에서 호국전쟁까지2.2. 호법운동의 좌절2.3. 중소우호관계 조성2.4. 중국공산당의 등장
3. 전개
3.1. 쑨원과 볼셰비키의 접촉3.2. 쑨원-마링 회담3.3. 쑨원-달린 회담3.4. 중국 공산당의 통일전선 방침3.5. 쑨원-요페 공동선언
4. 참고 문헌
4.1. 단행본4.2. 논문
5. 관련문서
5.1. 인물5.2. 단체5.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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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4년 중국국민당 중국공산당 사이의 국민혁명을 위한 통일전선이 형성되고 중국공산당원에게 국민당에 개인자격으로 가입할 자격이 주어진 정치적 합의와 동맹전선. 당시에는 연아용공(聯俄容共; 소련과 연합하고 공산당을 용인한다), 연소용공(聯蘇容共)이라고 호칭했으며 1927년까지 지속되었다.

2. 배경

2.1. 신해혁명에서 호국전쟁까지

1911년 우창봉기를 시작으로 신해혁명이 일어나 1912년 선통제가 퇴위하고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수천년간 지속되었던 중국의 군주제가 종식되었다. 1912년 위안스카이를 임시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수립되었으나 군주제는 종식되었으되 민주주의는 도래하지 않았는데 위안스카이가 자신의 권력을 침해할 법한 국회를 핍박하면서 각종 독재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1913년 3월 20일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던 국민당의 실질적인 수반 쑹자오런이 상하이에서 저격당해 이틀 후에 절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른바 쑹자오런 암살 사건이다. 이 사건이 해결되기도 전에 위안스카이는 반대파를 제압하기 위해 선후대차관 사건을 일으켰다. 결국 국민당은 쑨원의 주도로 계축전쟁을 일으켜 위안스카이를 타도하고자 했으나 위안스카이에게 2개월 만에 진압당하고 외국으로 망명하는 길을 택했다. 위안스카이는 1913년 잔류한 국민당원들을 난당으로 몰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고 국회의원 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은 것을 구실로 국회를 정회,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하고 5월에 신약법을 발표하여 <초급총통제>라 불리는 황제적 총통제를 실시하였다.

쑨원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였고 황싱은 구사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15년 초급총통제로도 만족하지 못한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자 그동안 위안스카이를 옹호하던 입장이었던 진보당의 영수 량치차오도 반원으로 돌아서 차이어, 탕지야오 등과 연합하여 호국전쟁을 일으켰다. 남방의 여러 군벌과 실력자들, 해외의 중화혁명당도 이에 동조하여 전국 각지에서 독립 선포, 토원봉기를 일으켰고 남방에 군무원이라는 대립정부가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위안스카이의 무리수에 열강이 지지를 철회하고 위안스카이의 측근과 심복들까지도 대거 이탈하여 호국군에 합류하면서 궁지에 몰린 위안스카이는 제제를 취소하고 급병으로 사망했다. 후임 총통 리위안훙은 구국회와 약법 복구를 약속하였고 호국전쟁은 종식되어 중화민국의 민주주의가 회복된 듯 하였다.

2.2. 호법운동의 좌절

하지만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 북양군벌은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돤치루이가 영도하는 안휘군벌과 부총통 겸 강소도독 펑궈장이 영도하는 직예군벌로 분화되어 대립했다. 돤치루이는 안휘군벌의 영도권을 확실히 하고 남방의 반독립적인 군벌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자 했다. 돤치루이의 전횡을 경계한 대총통 리위안훙은 펑궈장 및 국회와 연계하여 돤치루이를 견제하려고 했고 이에 따라 대총통과 국무총리 사이의 부원지쟁이라는 정쟁이 발생했다. 부원지쟁은 돤치루이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막무가내로 주장하면서 폭발했고 국회 해산을 요구하던 돤치루이가 면직되면서 내전으로 확대될 위기에 놓였는데 급기야 안휘독군 겸 장강순열사 장쉰이 개입하면서 장훈복벽이라는 촌극으로 번졌다. 장쉰은 리위안훙을 핍박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약법을 폐기하였으며 선통제를 복위시켰다. 이에 직계와 환계가 모두 연합하여 돤치루이를 다시 국무총리 겸 토역군사령관으로 추대, 장쉰을 토벌하고 복벽을 취소하였다.

복벽을 제압한 돤치루이는 국회 회복을 거부하고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 량치차오의 연구계를 규합하여 독재를 하였다. 이에 쑨원은 구 국민당으로 구성된 헌정 상각회 국회의원들을 거느려 광저우로 남하해 서남군벌 탕지야오, 루룽팅과 연계하여 광저우에 호법정부, 즉 1차 광동 군정부를 설치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돤치루이가 무력토벌을 감행하면서 이는 호법전쟁으로 번졌으나 북양정부의 분열과 북방과 협상을 원한 천춘쉬안 등 정학회 정객들의 음모, 호법이 아니라 세력확장이 목적이었던 전계군벌, 계계군벌들의 배반으로 인해 쑨원은 사실상 군정부에서 축츨되어 광저우를 떠나야 했다. 쑨원은 5.4 운동 이후 대중노선에 주목하여 1919년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조하여 다시 혁명을 도모했다.

1920년 광동군벌 천중밍이 루룽팅을 축출하고 광동을 장악한 후 쑨원을 초빙하면서 2차 호법운동이 벌어졌으나 1922년 1차 직봉전쟁에 개입하여 북벌을 시도한 쑨원에 반발한 천중밍이 6월 16일 영풍함 사건을 일으켜 쑨원을 다시 축출했다. 1922년 8월, 1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한 직예군벌이 수령 차오쿤을 대총통에 옹립하기 위해 구국회를 회복함에 따라 쑨원의 맹우들 대다수도 북상하여 쑨원을 버렸고 1923년 10월 회선 사건이라 불리는 차오쿤의 뇌물선거가 벌어지면서 호법운동은 완전히 단념되었다. 1923년 운남과 광서 군벌 류전환, 양시민과 연합하여 천중밍을 축출하고 3차 광동정부를 수립한 쑨원은 호법운동과 영미를 비롯한 구미 열강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자체적인 무장을 확보하여 혁명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2.3. 중소우호관계 조성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의 영향이 중국에도 미치고 있었으며 폴란드와 발트 3국에서 연패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유럽 혁명에 실패한 볼셰비키는 이에 대한 타개책을 동아시아에서 찾기로 결정해 1918년 7월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1] 게오르기 치체린(Georgiy Chicherin, 1872-1936)이 러시아 제국 시기 중국에서 취한 특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하고 1919년 3월 코민테른을 성립했다. 5.4 운동 이후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던 가운데 1919년 7월 25일[2]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 대리[3] 레프 카라한(Lev Karakhan, 1889-1937)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중국 인민과 중국 남북정부에 보내는 선언>, 소위 <카라한 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제1872호 조회: 제1차 대중국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8월 26일 이즈베스티야 지에 게재되었으나 중소 교통의 단절와 돤치루이 정부의 대소 봉쇄 정책으로 인해 6개월이 지난 후에야 중국에 알려졌다. 1920년 3월 3일 극동 공화국 외무장관[5] 야코프 얀손(Yakov Yanson, 1886-1937)이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회의 위탁을 받아 중국의 주 이르쿠츠크 영사관에 제1차 대중국 선언을 전달했고 중국 외교부가 3월 26일에 이를 수용하면서 중국 각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 카라한 선언은 결과적으로 하나도 시행되지 않은 기만적 선언이었지만 볼셰비키가 표방한 피압박 계급의 해방, 비압박 민족의 해방의 구호는 중국의 혁명가들을 고무시켰다. 중국 각지의 316개 단체가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카라한 선언은 세계에서 제일 큰 빛을 가져다주는 것이 된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으며 볼셰비키에 대한 우호감정도 대단히 높아졌다. 중국 정부는 1920년 7월 1일 경자배상금 지불을 중단했고 지금껏 러시아 제국을 승인하던 방침을 포기하고 1920년 9월 23일 러시아 제국이 파견한 러시아 공사, 영사들에 대한 외교관 대우를 중지하고 중국의 러시아 조계와 재산을 중국이 관리하겠다고 선포했다.

1920년 8월부터 1921년 10월까지 명목상 얀손의 후임이자 실질적으로는 볼셰비키측 친설사절단의 임무를 띤 이그나티 유린(Ignatiy Yurin, 1888-1935)[6]이 4차례에 걸쳐 베이징을 방문하여 공산주의를 선전했다.[7] 1920년 9월 27일 카라한이 제2차 대중국 선언을 발표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에 중국 정부는 1920년 11월 30일 외교부 아사위원회 회장 유경인에게 유린과 비공식적으로 담판할 것을 지시했으며 1921년 4월 정식으로 접대했다. 5월 8일 일시 귀국했던 유린은 7월에 다시 방중하여 중소 상무조약, 중동로 철도, 외몽골 문제를 협상했으나 진전은 없었다. 유린이 10월에 귀국한 이후 외무인민위원 치체린의 주도로 1921년 12월 파이케스가 러시아 SFSR 주중국 전권대표로 임명되어 12월 12일 중국에 도착해 중국과의 협상을 담당했다. 파이케스는 기존의 대중국 선언을 확인하면서도 기존의 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권익의 전면 철폐가 아니라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즉 중동로 철도 문제와 외몽골 문제에 관해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익을 사수하려는 것이 목표였는데 중국 정부는 주권 회수를 목표로 삼고 이미 실질적으로 이를 어느 정도 진행시켰기 때문에 협상에 응하지 않아 진전이 없었다.

2.4. 중국공산당의 등장

천두슈 리다자오는 1918년 봄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설립했으며 1919년 베이징에서 사회주의 연구회가 조직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모임이 아닌 무정부의자, 조합주의자, 생디칼리스트들이 섞인 복잡한 조직이었으나 1920년 5월 코민테른 대표 그리고리 보이틴스키와 양명제의 지원으로 공산주의 클럽이 상하이에서 창설되었고 9월 베이징, 연말에 광저우까지 지부를 만들었다. 1920년 6월, 블라디미르 레닌은 코민테른 제2차 대표대회에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제시하여 "코민테른은 식민지 및 낙후한 나라들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와 임시적 동맹을 맺되 그것과 융합해서는 안 되며 가장 맹아적인 형태에 있어서까지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독자성을 무조건적으로 보전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여 통일전선을 통한 동아시아에서의 혁명을 추진했다.

1921년 6월 3일 코민테른 주중국대표 마링이 상하이에 도착하여 원동서기처 니콜스키와 만나 이한준과 이달에게 중국공산당의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이해 상하이 서기 대리 이달이 6월 20일을 대회 일자로 잡고 100원의 여비를 보내며 각지의 공산주의 소조에서 대표 2명씩 상하이에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7월 23일[8]에야 각지의 대표가 모이게 되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망지로 106호의 이한준의 집에서[9] 제1차 전국대표대회, 약칭 1전 대회가 비밀리에 소집되었다.

대회를 지도한 것은 코민테른 대표와 마링과 니콜스키였고 참가자들은 7개 조직, 50여명의 당원을 대표한 13명이었다.[10] 이중에는 후일 탈당한 광동대표 천궁보, 일본대표 저우포하이, 베이징 대표 장궈타오를 포함하여 상하이 대표 이달, 호남대표 마오쩌둥, 우한대표 진담추, 우한대표 둥비우, 산동대표 등은명, 상하이 대표 이한준, 유인정, 왕진미, 하숙형, 천두슈의 대리인 포혜증 등이 참여하였다. 회의 도중인 7월 30일 프랑스 조계지 경찰이 회의장을 수색하는 통에 대표들은 8월 1일 마지막 회의 장소를 절강성 가흥현 남호위의 유람선으로 정하여 그곳에서 폐회했다. 이들은 정식으로 중국 공산당이라는 당명을 정하고 무산계급의 혁명군으로 부르주아 계급을 무너뜨리고 무산계급 전정과 사유재산 폐지, 계급차별 소멸을 천명했다. 중앙국이 설치되었고 천두슈가 총서기, 장궈타오가 조직주임, 이달이 선전주임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세력이 미약하였고 크렘린의 평가도 좋지 않았다.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서 카를 라데크(Karl Berngardovich Radek)는 중국 공산당에 대해 신랄한 평가를 내렸다.
"동지들, 장밋빛 꿈속에 빠지지 마시오. 당신들의 힘을 과대평가하지 마시오. '우리 중국인 동지가 이 자리에서 뿌리를 강하게 내리고 있다'라고 말할 대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친애하는 동지여, 일을 시작할 때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있는 그대로 보아야만 합니다.' 광동이나 상하이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의 동지들은 노동자 계급과 연합하는데 실패했습니다. (...) 그외의 많은 동지들은 그들의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어 마치 한때 공자를 연구했듯이 마르크스와 레닌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동지들, 사회주의나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의문은 이제 일상적인 행사가 아님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 우리의 당면과제는 첫째, 젊은 노동자 계급을 조직하는 것, 둘째, 유럽과 아시아의 제국주의에 투쟁하기 위하여 혁명적 부르주아 요소와의 관계를 규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혁명적 부르주아 요소'와의 동맹이 소련이 추구하던 바였다. 1921년 6~7월 코민테른의 제3차 당대회는 후퇴기 전술을 제시하여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 방침을 채택했다. 볼셰비키는 직예군벌의 실질적인 수령 우페이푸나 광동군벌 천중밍 등의 '혁명적' 군벌과 접촉했고[11] 쑨원 중국국민당에게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2차 대표대회 이후 코민테른에 가입한 중국 공산당은 부르주아들과의 동맹을 요구하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국공합작의 시작이었다.

3. 전개

3.1. 쑨원과 볼셰비키의 접촉

일찍이 쑨원은 1918년 여름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10월 혁명을 축하하며 중국과 러시아의 공동 투쟁을 원한다는 전보를 보내 레닌에게서 '동방의 광명'이라는 칭송을 받은 바가 있었다. 1920년 10월 상하이에서 쑨원을 만난 아무르 주 중국부 서기 페도로프는 쑨원을 '중국의 저명한 사회주의자이자 남방혁명운동의 영수'라고 고평가했다.

볼셰비키와 쑨원의 첫 접촉은 1920년 11월 천두슈의 소개로 중국공산당 창건을 위해 방중 중이던 보이틴스키가 상하이에서 쑨원을 만나 볼셰비키 혁명에 관해 설명해 준 것이었다. 이때 쑨원은 광동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볼셰비키와 접촉이 어려우니 만주나 블라디보스토크에 전파기지국에서 볼셰비키와 광저우 사이의 통신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고 보이틴스키는 중국 남부에서의 군사적 승리가 중국 중북부 지역의 혁명운동으로 발전되기를 희망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920년 10월 치체린이 쑨원에게 편지를 보냈고 쑨원은 1921년 8월 28일 볼셰비키와 연계할 뜻이 있음을 밝혔다.

1920년 12월 제정 러시아 장군 출신의 포타포프[12]가 쑨원을 만난 후 치체린에게 "광열한 반영주의자인 쑨원은 중국 각지에 자신의 추종자들을 갖고 있으며 (...) 많은 자본가들이 그에게 물질적인 지지를 제공하고 있다. (...)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하려고 하고 있으며, 통일 후에는 선거를 통해 의회를 조직하려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극동부 서기 소콜로프는 쑨원의 기본목표가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소개하며 상하이의 노동자와 수공업자들이 쑨원의 초상화를 걸고 있음을 지적했고 볼셰비키 극동정책의 가장 긴박한 임무는 광저우 정부와 관계를 맺는 것이라 지적했다. 1921년 11월 최초의 공식 사절단 파이케스가 중국에 파견되기 직전에 치체린은 쑨원보다는 북양정부와 협상하는 것에 기대를 걸고 레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존경하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쑨원의 편지를 보냅니다. 그속에 당신에 대한 문안도 있소. 그는 당신을 자신의 친구라 하였는데, 당신은 그를 알고 있습니까? (...) 전에 우리가 쑨원에게 편지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우리가 그에게 편지를 쓴 것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베이징과의 담판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허나 레닌은 쑨원과 협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치체린 동지:
나는 쑨원을 모르고, 우리는 서로 편지도 주고 받지 않았소. 내 생각에는, 가능한 한 열광적으로 대해주고, 자주 편지를 주고 받아야 하지만 비밀리 진행하여야 하며, 우리의 사람을 광저우에 파견하는 것이 좋을 성 싶습니다.

이에 치체린은 파이케스에게 광저우 정부와 비밀리에 접촉할 것을 지시하며 쑨원에게 보내는 편지를 급히 전달하고 절대로 북양정부와의 관계 정상황에 영향을 주지 말 것을 당부했다.

3.2. 쑨원-마링 회담

1921년 봄, 보이틴스키가 이르쿠츠크에 위치한 코민테른 극동국으로 돌아간 후 6월 레닌의 비서 마링[13]이 상하이에 도착했다. 중국공산당 창당을 지도한 마링은 상하이에서 장계를 비롯한 국민당 간부들과 접촉해 중국국민당 총부와 연계를 맺어 국민당에게 워싱턴 회의 반대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극동각국 공산당 및 각 혁명단체대표대회>에 참석할 것을 제안하했다. 1921년 12월 23일 마링이 천두슈의 소개장을 받아 공산당원 장타이레이를 통역으로 데리고 쑨원과 회담하고자 계림에 도착했다. 당시 쑨원은 북벌을 위해 계림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호남과 강서로의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링은 계림에서 수일간 머물면서[14] 국민당 지도부와 인맥을 맺었으며 군간부들에게 러시아 혁명에 대해 선전했다. 3일간 쑨원, 후한민, 쉬충즈 등과 3차례에 걸쳐 장시간 토론했다. 마링은 영국령 홍콩이 광동정부의 발전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며 천중밍과 쑨원의 사이도 맞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중국 국민당과 소련의 제휴에 대해 제안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시했다.
마링은 1921년 3월 제10회 당대회에서 정식으로 확인된 소비에트 러시아의 신경제정책을 예시로 들면서 볼셰비키 정책의 유연성에 대해 강조했고 쑨원은 신경제정책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쑨원은 중국에서는 공산혁명이 불가능하다는 분명한 뜻을 밝히며 2번째 회담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은 혁명 후 아직 4년도 되지 않았고 나는 러시아의 실정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도 혁명당원이다. 그런데 어찌 혁명에 대해 동정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혁명의 주의라는 것은 나라에 따라서 다르다. 갑의 나라에서 가능한 일이 반드시 을의 나라에서도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공산혁명이 러시아에서는 가능했지만 중국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앞으로 북벌을 위해서 영국의 세력범위인 장강 유역으로 들어간다. 만약에 우리가 소련과 제휴하고 있다는 것을 영국이 알게 된다면 영국은 반드시 우리를 타도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북벌계획은 마지막이 된다.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지금은 다만 러시아와 의례적인 연락만을 취하겠다. 우리가 북양군을 타도한 후에 다시 구체적으로 검토해서 합작을 도모한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에 마링이 질문했다.
"선생이 가지신 혁명사상의 기초는 무엇인가?"

쑨원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중국에는 하나의 도덕적 전통이 있다. 그것이 요, 순, 탕, 문, 무, 공자로 이어져 내려왔다. 내 사상의 기초는 이러한 전통에 있다. 나의 혁명은 중국의 전통사상을 계승하고, 나아가서는 더욱 그것을 발양, 확대하자는 것이다."

당연히 마링은 중국의 전통사상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적잖게 당황했다. 마링은 쑨원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지만 쑨원이 여전히 중국 고대 사상에 대해 설명하자 포기하고 무엇 때문에 혁명을 하는지 물었다. 쑨원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혁명을 하는 것이다."

이 대답 역시 마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15] 마링은 쑨원과 대담을 마치고 국민당 간부 장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류애를 위해 혁명을 하는 것이라면 혁명은 영원히 성공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고 원망하며 미워하기 때문에 혁명을 하는 것이다."

결국 마링은 볼셰비키와 국민당의 구체적인 합작안에 대한 합의를 보지 못하고 분명한 의견차를 확인한 다음에 계림을 떠나게 되었으나 국민당이 코민테른의 계획에 적합하다는 인상을 받고 우페이푸나 천중밍보다는 쑨원과 합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마링은 다시 광저우로 이동, 천중밍, 랴오중카이 등과 회견한 후 베이징으로 돌아와 쑨원이 사회주의 성향이 짙다고 고평가하며 주중국대표 파이크스에게 코민테른 집행국과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회에 보내는 두 통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코민테른 집행국에 보내는 보고서에는 중국 공산당과 중국국민당에 대한 사정이 설명되어 있으며 국공합작의 필요성이 역설되어 있었고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회에 보내는 보고서에는 중국 나방에 사절단을 파견해 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쑨원 역시 공산혁명에는 반대했으나 신경제정책 등에 듣고 볼셰비키와의 합작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어 더욱 강성한 반제 성향을 보이면서 랴오중카이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러시아의 경제상황은 아직 공산주의를 실행할 만큼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나는 당초에 러시아가 공산주의를 실행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매우 이상하게 느꼈다. 그러나 마링의 설명을 듣자니, 러시아는 공산주의를 실행해 보았으나 커다란 곤란에 부닥쳤고, 그 결과 '신경제정책'이라는 것을 채용했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실업계획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반가운 일이다.

3.3. 쑨원-달린 회담

이후 쑨원은 러시아의 혁명을 찬양하는 여러 발언을 쏟아냈다. 1922년 1월의 담화에서 쑨원은 프랑스와 미국은 낡은 공화주의 모델을 대표하지만 러시아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냈으며 중국은 삼민주의를 기반으로 최신 모델을 만들 것이라고 선언했고 같은 달 병사들을 향한 연설에서 소비에트의 목표에 대해 찬양하며 평균지권과 기간산업의 국유화 방침을 고수할 것임을 밝혔다. 시프린은 당시 쑨원의 연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는 사회적 격변과 다목적 혁명의 가능성을 보이기 위해 러시아를 예로 들었다. 러시아의 정치적 혁명과 사회적 혁명의 결합은 그의 삼단계 방략에서 한 단계가 모자랄 뿐이었다. 그는 "우리는 잘못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하면서 새로운 세계는 공자가 이상화했던 "위대한 도가 실현되어 모두가 같이 향유하는 세계이며 (...) 현재는 새로이 수립된 러시아 정부만이 그에 닮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러시아 혁명이 비록 중국혁명 뒤에 일어났지만 러시아 혁명은 공공복지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성취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북극권에 위치한 데 비해 중국은 온대에 위치하고 러시아에는 자본가들이 존재하는 데 비해 중국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중국이 궁극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얻으리라고 느꼈다.
손문평전, 215페이지

다만 1922년 6월까지 쑨원은 바이마르 공화국이나 일본, 영국, 미국과의 합작에 대해서도 완전히 포기한 상태가 아니라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쑨원은 1922년 4월 라팔로 조약을 체결해 소비에트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맺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큰 기대를 걸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미 1921년 5월, 유럽 국가 중에서는 최초로 중국을 평등과 호혜의 원리에 따라 대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국제법이 통상적으로 규정하는 외의 어떠한 치외법권이나 특수권익도 포기했다. 독일 측에서도 치머만 전보 사건을 주도한 바가 있는 전 외무장관 파울 폰 힌체(Paul von Hintze)가 러시아와 국민당을 연결하는 3각동맹을 구상하며 쑨원과 접촉하고 있었다.

1922년 5월 파이케스는 코민테른 대표 세르게이 달린을 보내 쑨원과 협의하게 했다. 달린은 통일전선의 이점에 대해 설명했지만 쑨원은 광저우에 러시아 공산당 간부를 파견하고 광저우와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도로 건설 지원을 요청할 뿐 한커우를 점령한 후에야 소비에트 러시아를 승인하겠다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몽골이 중국의 불가분의 일부로 몽골에 대해서도 타협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볼셰비키와 합작하려는 조속한 움직임은 영국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달린과의 회담 직후 영풍함 사건이 터졌고 영풍함 사건에서 영미에게 실망한 쑨원은 바이마르 공화국과 볼셰비키에게 더욱 기대를 걸게 되었다. 허나 1922년 9월 쑨원이 광저우에 두고 간 외교문서들이 천중밍에게 노획되어 홍콩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소비에트 러시아-국민당 3각 동맹이 폭로되었다. 쑨원은 자신이 공산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면서 영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고 밝혔지만 원래도 쑨원의 지위를 의심하고 있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이 쑨원과의 모든 공식적 관계를 부인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과의 합작도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남은 것은 볼셰비키밖에 없었다.

3.4. 중국 공산당의 통일전선 방침

한편 코민테른은 국민당이나 우페이푸, 천중밍 등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군벌들과의 합작을 종용하고 있었지만 중국공산당 내부에서는 이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1921년 7월의 제1차 대표대회에서 '기타 당파에 대한 정책'을 놓고 공산당원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는 무산계급은 기타 정당과는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부는 기타 정당과의 합작 필요성을 주장했다. 국민당에 대해서도 북양군벌보다는 진보적이라는 고평가도 있었지만 북양군벌이나 남방정부나 모두 한통속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결국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우리 당은 현재 존재하는 모든 정당에 대하여 독립, 공격, 배타적 태도를 가진다. 정치투쟁에서 군벌주의와 관료주의를 반대하는 속에서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요구하는 속에서 우리들이 우리들의 태도를 반드시 표방할 때에는 우리 당은 무산계급의 입장을 견지하며 기타 어떠한 정당과 어떠한 관계 성립도 불허한다."는 배타적인 태도의 결의를 통과시켰다. 하지만 국민당에게 합작 가능성에 대해 타진하고 있던 코민테른 대표 마링은 대회가 폐막된 후 중국공산당 지도부에게 "우리는 무산계급정당으로서 현재의 임무는 바로 정치무대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천두슈는 광저우에서의 공직을 버리고 돌아와 국공합작에 대한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확실히 일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 필요성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로 규정된 천중밍, 우페이푸 등과 접촉하였다. 천중밍은 중국 공산당과 연계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공산당과의 합작을 먼저 제의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왔는데 이에 따라 1920년 천두슈가 교육위원회 위원장으로 초빙되는가 하면 1921년 8월 공산당원 펑파이가 해풍현 근학소장에 임명되었고[16] 공산당은 천중밍과 함께 감조운동을 전개하고 광동에서 선전활동을 벌였다. 이 때문에 공산당 내부에서는 임조함, 담평산, 천궁보 등이 쑨원을 환상주의자로 비판하며 천중밍과 합작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우페이푸 역시 철도산업을 독점한 교통계에 대한 탄압을 위해 공산당을 이용하고자 했는데 공산당 역시 철도노동자조합 건설을 위해 우페이푸와 연계하였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당내합작이라는 형태의 국공합작에 대해서는 반대를 분명히 표했다. 1922년 4월 6일 천두슈는 보이틴스키에게 국공합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한편 천중밍은 중국혁명이 아니라 지역적인 정권의 공고화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평가가 하락했고 1922년 6월 16일 영풍함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 공산당은 쑨원 지지 선언을 발표하면서 천중밍과 결렬했고 담평산 등 천중밍을 지지한 공산당원들을 징계했다. 코민테른이 천중밍에 대한 관심을 끊으면서 천중밍은 공산당의 합작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22년 7월 16일부터 7월 23일까지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어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에 가입, 코민테른의 중국 지부가 되겠다고 결의한 바가 있었다. 천두슈가 국공합작에 대해 반대를 분명히 하자 마링은 코민테른을 움직이기로 했다. 1922년 7월 모스크바에 돌아간 마링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중국국민당을 단순한 부르주아 정당이 아니라 여러 계급의 연맹이며 민족 혁명 운동에 힘이 있는 진보적 정당임을 강조하며 국공합작이 필요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코민테른은 마링의 건의를 받아들여 7월 18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게 통지를 접수하는 대로 즉시 당의 주소를 광저우로 옮기고 모든 활동에 대해 마링과 긴밀히 연락하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지시를 받은 중국 공산당은 1922년 8월 하순, 항저우 서호에서 이틀 동안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천두슈, 리다자오, 차이허썬, 장궈타오, 고군우, 마링, 장타이레이 7인이 참석했다. 마링은 중국공산당에게 코민테른의 7월 지시와 8월 지시에 따른 중국 국민당에 대한 태도를 밝히고 당내 합작 방식으로 국공 통일전선을 달성할 것을 지시했다. 리다자오는 국공합작에 찬성하는 의견을 보였으나 장궈타오는 당내 합작은 당 정책을 견제받는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천두슈는 코민테른의 결정이라면 복종할 수 있으나 반드시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면서 쑨원 앞에서 서약해야 하는 입당 방법을 취소하고 중국국민당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의 결과, 중국 공산당은 대다수가 당내 합작에 찬성하여 중국국민당에 가입하자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당연히 중국공산당의 입장으로서는 자신들이 코민테른의 하부조직으로 코민테른의 대표 의견을 추종해야 한다는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중국공산당이 사용하는 경비의 94%가[17] 코민테른에게서 지원되고 있었으므로 코민테른에 절대 복종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후에도 우페이푸와 공산당의 동맹 추진이 진행되었다. 1922년 7월 러시아 SFSR 외교인민위원부 극동사무전권대표 빌렌스키는 우페이푸를 중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소개하고 군대, 재정, 교통, 내정부를 장악하고 남방의 다수 성의 지지를 받으며 그 위세는 쑨원을 무너뜨리기 직전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우페이푸와의 회담 역시 유익하고 의의있다고 보고했다. 우페이푸가 소련과의 접촉에 적극적으로 나온 것은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우페이푸가 교통계 탄압을 위해 공산당의 힘을 빌리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1922년 9월~10월 중국공산당은 우페이푸와 협상하여 교통부에 공산당원들을 파견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이로 인하여 경한철도를 중심으로 노동자 조직이 형성되어 강력한 노동운동을 전개해 교통계를 타도했고 1922년 11월에 개최된 코민테른 제4차 대표대회에서 카를 라데크는 우페이푸와 연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노동운동이 급격히 성장한 것을 우려한 우페이푸는 1923년 2.7 사건을 일으켜 50여명의 노동자를 살해하고 300명에게 부상을 입혀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이 때문에 분노한 공산당은 우페이푸와도 결렬했고 공산당과 합작할 수 있는 세력은 국민당만 남게 되었다.

3.5. 쑨원-요페 공동선언

스탈린에게 보내시오. 이곳은 우리에게 매우 유리하고, 세계 자본주의와의 투쟁에 아주 큰 의의와 거대한 성공기회를 지니고 있소. 여기에서는 세계정치사조가 아주 강함을 느낄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레닌이 같은 의의를 부여한 중앙아시아보다 더 강대하다고 보입니다. 중국은 국제충돌의 초점이고 국제제국주의가 가장 박약한 곳입니다. 나는, 지금 제국주의가 유럽에서 위기를 겪고 있고 그곳의 혁명이 곧 도래할 시기에, 제국주의의 가장 박약한 곳에서 그들에게 타격을 주는 것은 아주 의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1922년 8월 30일, 베이징에서 요페가 카라한에게 보낸 비밀전보

1922년 7월 26일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파이케스를 대신하여 카라임 유대인 출신 아돌프 요페를 주중전권대표로 임명하여 중국에 파견했다. 8월 12일 중국에 도착한 요페는 베이징에서 장궈타오를 만나 중국 국내 사정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요페는 기본적으로 우페이푸, 쑨원과의 합작을, 그리고 '일본의 주구'로 볼셰비키의 악평을 받던 장쭤린을 제거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았다. 요페는 소몽우호조약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며 중동로를 무상으로 반환하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며 중국과의 외교관계 체결, 상무 협정 체결에 대해 북양정부와 논의했으나 우페이푸의 입장이 단호하여 진전이 없었다. 허나 또 다른 과제인 국공합작에 관해서는 매우 신속하게 진전이 이루어졌다.

요페는 쑨원에게 대표를 파견하여 극동의 정세와 해결 방안을 의논했다. 요페는 우페이푸-쑨원의 동맹을 구상했기 때문에 쑨원이 자신을 초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우페이푸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를 찾아가진 못했다. 쑨원은 9월에 랴오중카이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에서의 회담을 추진하였으나 이는 무산되었다. 요페는 8월부터 12월까지 쑨원에게 4통의 편지를 보냈다. 요페는 쑨원에게 소비에트 러시아는 몽골에 침투할 생각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현재처럼 혼란한 시각에 군대를 철수한다면 일본 제국주의가 기회를 타서 들어갈 것이므로, 우리가 지금 몽골을 떠나는 것은 중국에 불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나의 의견에 동의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요페는 우페이푸에게도 비슷한 뜻을 타진했는데 우페이푸에게는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라 장쭤린이 몽골을 점령할 것임을 강조했다. 우페이푸는 전적인 동의를 표하면서도 1923년에 군대를 조직하여 몽골을 점령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이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몽골에 주둔할 개연성은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주둔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쑨원은 요페가 북양정부과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직예군벌을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몽골에 있어서, 나는 귀국 정부의 성의를 완전히 믿는다. 나는 모스크바가 이 지역으로 하여금 중화민국 정치제도에서 벗어나게 할 의도가 없다는 보증을 받아들인다. 베이징에서 개조가 일어나 귀국 정부와 담판을 진행할 수 있는 정부가 나타날 때까지, 소련 군대가 그곳에 남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귀국 군대가 빨리 철수하면, 이는 제국주의 열강의 이익에 영합하는 것 뿐이다.

여기에 쑨원은 묻지도 않은 중동로 철도 문제까지 제기했다.
나도 당신에게 한가지 문제를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귀국 정부가 당신에게 일본과 담판을 진행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일본의 양해를 구한다면,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협의에 달성한다면, 귀국 정부는 중국의 이익을 희생시키려고 하는가. 내가 이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해달라. 모두 알다시피 일본은 북만주에서 러시아를 대체하려 하는데, 러일전쟁 후에 남만주에서 당신들을 대체한 것처럼 말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북만주에서 일본의 지위 강화를 제지할 것을 바란다.

쑨원의 이러한 태도는 쑨원이 영풍함 사건으로 영미에게 실망하고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도 지원을 거절하자 볼셰비키의 지원이 더욱 절실해졌기 때문이었다. 중동로 문제가 중국 주권 문제와 관련된 민감한 것이라 묻지도 않았던 찰나에 쑨원이 중동로 문제에 관해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입장을 마치 소비에트 러시아의 소극적인 모습을 비판하듯이 열렬히 지지하자 요페는 '쑨원은 걸려들었다'라는 급전을 보내며 쾌재를 올렸다.[18] 1922년 8월부터 12월까지 요페는 쑨원에게 4통의 편지를 보냈고 쑨원은 요페에게 3통의 편지를 보내 소통했다. 쑨원은 자신이 몽골 독립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 몽골은 중국의 일부라는 기존의 강경한 주장에서 지금 몽골 독립을 지지하면 자치주의자들의 세력이 확대되기 때문이라고 입장을 후퇴했고 "몽골 자치와 중동로 주둔이 중국과 협상한 결과라면 쑨원 본인은 물론 국민당도 모두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까지 전달했다. 요페는 우페이푸를 배제하고 쑨원과 합작하는 것이 소련의 이익에 부합하다는 확신을 내리게 되었고 마링에게 우페이푸를 사리사욕에 정신이 팔린 군벌이라고 혹평했다. 따라서 쑨원과 요페의 접촉은 갈수록 급진전을 보였다.

11월 국민당 간부 장계가 요페에게 쑨원의 친서를 전달했고 12월에 장계는 요페와 두번 만나 요페와 쑨원이 직접 만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요페는 북양정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장춘회의에 참가하였다가 쑨원의 초청을 받고 1923년 1월 병을 핑계로 남하하여 1월 17일 상하이에 도착하여 1월 22일 쑨원을 방문했다. 리다자오, 쑹칭링이 배석한 상태에서 쑨원-요페 회담이 열렸고 국민당 개조 문제, 코민테른의 중국 혁명 원조 문제가 논의되었다.

4. 참고 문헌

4.1. 단행본

4.2. 논문

5. 관련문서

5.1. 인물

5.2. 단체

5.3. 사건



[1] 외무인민위원은 오늘날 외무장관에 해당한다. 당시 각 소비에트 공화국은 명목상 독립국이었으므로 외교활동도 명목상 독립적으로 했다. 그러므로 이때 치체린의 직위는 소련 외무인민위원이 아니라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이다. [2] 혹은 7월 26일. [3] 외무인민위원 대리는 오늘날 외무차관에 해당한다. [4] 이는 원래 1919년 발표에는 없었으나 1920년 러시아 SFSR이 전달한 외교문서에는 포함되어 있다. [5] 공식 직함이 Министр иностранных дел이므로 '외무장관'으로 옮김. [6] 본명은 이그나치 긴톱트-지에바우톱스키(Ignacy Gintowt-Dziewałtowski)로 폴란드인이다. 후일 볼세비키에 환멸을 느끼고 1925년 폴란드 제2공화국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7] 원래 1920년 6월에 외몽골을 통해 방중하려 했으나 열강의 눈치를 본 안휘군벌이 입국을 거절했으나 1920년 7월 안직전쟁으로 직예군벌이 집권하면서 입국이 가능해졌다. [8] 중국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7월 1일인데 이는 마오쩌둥이 1938년 5월 연안에서 주장한 날짜고 1940년 중국공산당은 이를 수용하여 7월 1일을 공식 대표대회일로 잡았다. 에드거 스노우는 5월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에드거 스노우의 오류다. [9] 여학교였다는 설도 있다. [10] 11명설, 12명설도 있는데 현재는 12명설이 유행하지만 볼셰비키측 인사들을 포함해 15명이 참석한 것이 확실하다. [11] 천두슈는 천중밍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며 천중밍과 함께 광동성 교육개혁에 착수한 바가 있다. 우페이푸 역시 소련의 지도를 받아 노동법을 입법하는 등 친노동자 정책을 일부 시행했다. [12] 1903년에서 1년 간 주한러시아공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했고 2월 혁명 이후 시베리아에서 활동가졌다. 한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고 한다. [13] 본명은 헨드리쿠스 요세푸스 마리 스니블리에트(Hendricus Josephus Franciscus Marie Sneevliet). 짧게 헹크 스니블리에트라고도 불린다. 네덜란드 공산주의자로 중국공산당 창당대회에 보이틴스키와 함께 참여한 바가 있으며 인도네시아에서도 혁명적 부르주아 세력과 공산주의자들의 동맹을 주선한 바가 있다. 후일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저항운동을 벌이다가 붙잡혀 살해되었다. [14] 기록이 엇갈리는데 9일설, 2주설, 3주설 등이 있다. [15] 이 대답을 들었기 때문인지 레닌은 쑨원에 대해 '흉내낼 수도 없을 정도로 처녀다운 순진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16] 이후 펑파이는 국공결렬 이후 해풍 지역에 해륙풍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17] 1921년 10월부터 1922년 6월까지 공산당은 17,655원의 자금을 조달했는데 이중에서 공산당이 직접 구한 것은 천원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전부 다 코민테른이 준 것이다. [18] 엄밀히 말해서 요페 본인은 카라한 선언을 준수하여 조건 없이 중국에 대한 러시아의 특권을 반환하고 몽골에 대해서도 4억 중국인들을 위해 200만 몽골인을 포기해야 한다고 당중앙과 강력하게 대립하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국제혁명 원조를 위한 볼셰비키의 재정력이 턱없이 빈곤함을 지적하면서 조건 없이 중동로를 반환하고 외몽골에서 철수하는 것이 중국의 포섭에 쓸 수 있는 카드를 조기에 소진하는 행위임을 지적하며 반대했다. [19] 스탈린 등 관료집단이 지배한 코민테른에 의한 중국혁명의 실패에 대해서 트로츠키는 <레닌 이후의 제3인터내셔널>이라는 글에서 비판하였다. [20] 1차 국공합작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코민테른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코민테른의 노선 변화에 따라 국공합작도 결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