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공화국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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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카리모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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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공화국 초대 대통령 이슬람 압두가니예비치 카리모프[1] Islam Abduganiyevich Karim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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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9B5><colcolor=#ffffff> 출생 | 1938년 1월 20일 | ||
소련 우즈베크 SSR 사마르칸트 | |||
사망 | 2016년 9월 2일 (향년 78세) | ||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 |||
재임기간 | 초대 대통령 | ||
1991년 9월 1일 ~ 2016년 9월 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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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9B5><colcolor=#ffffff> 배우자 | <colcolor=#373a3c,#ddd>타티아나 카리모바 | |
자녀 | 2녀 | ||
신장 | 170cm | ||
학력 |
타슈켄트 주립공과대학[2] (기계공학 학사) 타슈켄트 주립경제대학[3] (경제학 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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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우즈베크 SSR 재무장관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 우즈베키스탄 제1대 대통령( 1991년 ~ 20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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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무종교 ( 무신론) | ||
직업 | 정치인 | ||
정당 |
[[우즈베키스탄 자유민주당| 우즈베키스탄 자유민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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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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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1990년 3월 24일 우즈베크 SSR의 대통령에 재임한 이래 이듬해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자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2016년까지 총 26년간 장기 집권을 이어나갔으며 집권기 동안 반대파에 대한 고문과 경찰력을 이용한 권위주의 정치를 일삼았고 2005년 안디잔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에 대한 학살로도 국제적인 악명을 얻었다.
2. 생애
1938년 1월 30일 소련 우즈베크 SSR 사마르칸트에서 태어났다. 1964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80년대 중반에 아랄해가 점점 말라가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목화 생산 증진을 강요하는[4] 소련의 경제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5] 그렇지만 정작 독립 이후에도 이러한 경제 정책은 수정되지 않고 있으며 목화 수확철이 되면 목화 따겠다고 학교를 쉬고 학생들은 뇌물을 준다거나 하지 않은 이상 반드시 목화를 따야 했으며[6] 시골 농민들도 꼴랑 몇푼 안 되는 돈을 받고 목화밭에서 할당량을 채우며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일해야 했다.이렇게 얻은 인기로 1989년 소련 우즈베크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장이 되었다. 1990년 3월 24일에 우즈베크 SSR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소련 붕괴 이후인 1991년 12월 29일에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하였다. 1995년 3월 26일에 국민투표로 대통령 임기를 연장하고 2000년에 95.7%의 지지율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2002년 대통령 임기를 재차 늘리고 계속 집권하였다. 2007년에도 90.7%의 지지율로 재선, 2015년에도 91%의 지지율로 재선되었다. 물론 제3세계의 상당수 독재 국가들처럼 부정선거인데 투표용지는 그의 재선에 찬성하는 곳이 더 잘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심지어 투표하지 않은 투표 용지가 있으면 그 투표 용지는 그가 재선하는 것을 찬성하는 표로 악용되었다.[7]
한편 그는 미국과는 2000년대 중반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미군이 우즈베키스탄 공군 기지에 미 공군을 주둔시켜 러시아가 무척 불쾌하게 여겼을 정도다. 그러다가 2005년에 안디잔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면서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사건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미국에선 그에 대한 지지를 버렸고 미국 및 유럽 연합은 카리모프 정권을 압박하기 위한 경제협력 중단 및 경제제제 실시를 단행하는 걸 검토했으며 이와 관련하여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은 이미 향후 2년간 우즈베키스탄 내 추가투자를 유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그는 반미로 정책을 바꾸면서 우즈베키스탄 내 미 공군 기지를 폐쇄해 버렸다. 부랴부랴 미국은 국방장관이던 도널드 럼스펠드를 보내 기지 주둔비를 더 올려서 내고 여러가지로 당근을 제시했지만 거부당했다. 그 뒤 친러, 친중 정책을 한층 강화했고 이후로도 미국과 사이가 별로 안 좋았다. 물론 중국과 러시아는 인권 등에 관련해서 최소한의 눈치를 보는 미국이나 유럽과는 다르게 민간인을 학살하든 말든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지 않은 이상 독재자들의 도덕성이나 인권 문제에는 전혀 신경을 안 쓰는 편이라 우즈벡에서 대규모 반정부군이 발생했을 시 이를 박살내는 합동 군사훈련까지 실시하며 그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맡았다.
물론 미국과 유럽의 압력도 학살이 조명되고 국제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었을 때 뿐이고 그의 입지가 우즈벡에서 여전히 절대적이었고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나라인지라 은근슬쩍 경제나 군사 협조가 다시 시작되었다. 사실 중앙아시아는 키르기스스탄을 제외하면[8] 4개국이 죄다 막장 독재자들이 장기 집권하고 있고 중동- 북아프리카만큼은 아니지만 정권에 위협이 된다 싶으면 수십 명이고 수백 명이고 자국민들을 쏴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고 민족간 유혈충돌로 1,000명 넘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9] 험악한 동네인지라 사소한(?) 인권 문제에 일일이 태클 걸고 제재를 걸었다가는 그냥 그딴 거 신경 안 쓰는 중국과 러시아한테 이 지역의 영향력을 다 내주겠다는 소리와 다름없다. 특히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에너지 자원 확보는 유럽 입장에서 러시아의 천연자원 무기화에 대응하기 위한 상당히 중요한 사안인지라... 다만 미국은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발을 빼면서 중앙아시아 지역의 필요성이 급감하면서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국내에서는 꾸준한 경제성장[10]과 정치 안정 등의 업적으로 높은 지지를 받았던 만큼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정치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반대진영에서는 우즈베키스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경제성장은 그가 잘했다기보다 우즈베키스탄 노동자들이 해외에서 일해서 우즈베키스탄에 돈을 송금해서거나, 면화를 강제로 따라고 해서 착취해서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정치 안정은 말 그대로 반대파들을 잡아다 죽여버리니까 이렇게 된 것이라서 그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2.1. 사망
2016년 8월 27일에 뇌출혈로 쓰려져 둘째 딸 롤라 카리모바-틸랴예바가 자신의 SNS를 통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말했다. # 일부 언론들에 사망설이 돌자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반박문을 냈다. # 결국 위독설이 있다고 인정했다. # 그 동안 그는 프랑스, 독일, 핀란드, 러시아 등지에서 저명한 의사들을 초빙해 오며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2016년 9월 2일에는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쉬쉬하던 중 로이터 통신의 외교 소식통과 튀르키예 정부가 순차적으로 그의 사망 소식을 전했으며 몇 시간 후에 우즈벡 정부도 부랴부랴 그의 사망을 공식 발표했다. 사실 튀르키예 정부가 그의 '사망'을 공포했을 당시까지만 해도 혼수상태이긴 해도 살아는 있었지만 뇌졸중과 다발성 장기 부전의 합병증을 앓던 중 심장마비로 현지시간으로 밤 8시 55분 사망 선고를 받았다. 향년 78세.
그가 사망한 후 우즈베키스탄은 3일간의 애도기간을 선포하며 추모 분위기에 빠졌고 세계 각지의 지도자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11] 대한민국 외교부는 다음날 홈페이지에 올린 대변인 성명에서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지칭했는데 외교부 측은 현지 교포 및 대 우즈벡 관계 등을 고려하여 '상대국에 대한 예우 차원'이라고 밝혔으나 그간의 악행으로 보아 논란이 될 여지가 생겼다. 그는 9월 3일 장례식이 치러진 후 사마르칸트의 하즈라트히즈르(Hazrat-Hizr) 모스크 인근에 지어진 높이 7.55m의 호화로운 영묘에 안장되었다. 카리모프의 영묘, 내부 사진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는 2003년부터 카리모프 정권의 총리를 맡아온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와 2005년부터 재임한 제1부총리 루스탐 아지모프가 꼽혔는데 이 중에서 미르지요예프가 대통령 권한 대행에 공식적으로 임명되었다. # 그 해 12월 4일 치러진 선거에서 미르지요예프가 당선되어 12월 14일부터 대통령으로써 업무를 개시하였다.
3. 인권 탄압
그는 1999년 AFP 통신과의 회견에서 “나는 국가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200명의 목을 자를 수도 있다. 내 자식들이라도[12] 국가에 위해가 된다면 내 손으로 직접 목을 치겠다.”고 말했을 만큼 공포를 조성해 일각으로부터 “ 중앙아시아 지역 내에서 가장 유능하고 폭압적인 보안대의 수장”이라는 말을 듣을 정도로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이에 걸맞게 카리모프 시기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약 10,000명에 달하는 숫자의 정치범들이 감옥에 들어가 있으며 정치범들은 우즈베키스탄 정부로부터 전기고문과 구타 등을 당하거나 강간 위협을 받았다. 실제로 2006년에 정치범으로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 아잠 파르모노프는 우즈베키스탄 당국이 복면을 씌우고 구타를 하면서 거짓 자백을 강요했으며 파르모노프의 손톱과 발톱에 못을 박거나(!), 가족들을 해치겠다는 협박을 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자료정치범들에 대한 엉터리 재판도 행해지는 데다 정치범들은 최악의 수감 환경에서 고문을 받고 심지어 당국이 그들의 형기조차 멋대로 연장하고 있을 정도며[13] 우즈베키스탄 국외 라디오 수신이 차단되고 전화는 철저히 도청당하고 있다. 이에 휴먼라이츠워치는 "우즈베크 당국이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정치범에 대해서도 적절한 치료 등을 하지 않고 있다."며 "이 같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태도는 국제인권협약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이라고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비판했다.
한편 2003년 제정된 법에 의해 카리모프 가족은 우즈베키스탄에서 범죄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14] 이는 카리모프 정권의 실상을 알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영국 대사의 2002년부터 2004년까지의 증언이다. 대사의 증언에 따르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고문, 납치, 살해, 부정부패, 감시 경찰에 의한 강간이 벌어진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에 우즈베키스탄은 경찰국가라고 불리는데 실제로 우즈베키스탄 거리에 서 있는 교통경찰은 운전자가 면허증을 챙겼는지 확인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사복 경찰은 관광객이 금지구역에서 사진을 찍는 걸 보면 바로 검거했는데 그 이유는 막대한 벌금을 매기지 않는 대가로 경찰들이 하루치 일당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체 시위에 대비하여 관중 수용규모 10,000여명에 불과한 분요드코르의 홈구장 자르스타디움에서 경기가 벌어지면 무려 1,200명의 경찰이 동원된 일이 있을 정도로 시위를 적극적으로 차단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다보니 우즈베키스탄인들 사이에서는 경찰을 부르는 은어까지 나왔는데 바로 " 오이(현지어 Bodring)"다. 경찰관이 길거리에 청록색 제복을 입고 선 모습이 긴 오이에 빗댄 것으로 사람들은 경찰관이 다가오면 "오이가 온다.(Bodring kelyapti.)"라고 수군거린다. 청록색 이미지와 많은 경찰 수에 빗대서 ‘거리의 나뭇잎보다 경찰이 많다.’는 유머가 있을 정도다.
특히 카리모프 정권이 국제사회에서 가장 욕을 먹은 이유가 후술할 안디잔 학살과 함께 우즈베키스탄 당국이 국가산업인 면화재배에 청소년과 일반 주민을 강제동원하며 이 과정에서 각종 인권탄압이 벌어진 점이다. 자세한 내용은 우즈베키스탄 항목 참조.
2014년에는 지학순 정의평화상 수상 단체인 ‘우즈베키스탄 인권연합(Human Rights Alliance of Uzbekistan)’의 대표 옐레나 우를라예바(Елена Урлаева, Yelena Urlayeva)에게 가혹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국내 인권 시민 단체들이 항의했다고 한다. 그녀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이루어지는 목화 산업의 강제노동에 대해 비판했는데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그동안 매년 목화 수확기에 유치원생에서부터 청소년과 교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원을 장기간 면화 수확에 강제 동원하는 노역에 가까운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2014년 5월 31일 경찰에게 체포돼 18시간 심문과 구타, 성적 모욕을 당했다. 이 때 이루어진 조사는 대단히 모욕적이고 치욕적이였다. 그녀에게 고문관들은 성분이 불분명한 신경진정제를 자백을 받으려고 3차례나 주사한 것으로도 모자라 조사 과정 동안 경찰은 그의 머리를 가격하기도 했고 그녀에게 욕설을 퍼붓고 수차례 구타하면서 그녀가 녹화해 담은 피해자 인터뷰 메모리를 빼앗았다. 심지어 그러고도 의사들은 그녀가 데이터 칩을 은닉하고 있다고 의심하며 경찰이 그를 잡고 있는 시간 동안 하혈할 때까지 질과 항문을 검사하고 엑스레이 촬영을 강행했다. 그녀는 야외에서 용변을 해결할 것을 강요받았고 나체인 상태로 사진에 찍히기도 했다. 자료 기사
이 사람 뿐만 아니라 우즈베키스탄에서 활동하는 인권운동가들은 우즈베키스탄 당국이 동원한 용역들에게 구타당하거나 구금되고 있었으며 특히 인권운동가의 대표 우를라예바는 정신병동에 감금되고, 강제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약물을 투약당했다고 한다.[15]
심지어 그는 반대하는 자를 산 채로 끓는 물에 삶아 죽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2002년 무자파르 아바조프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라는 이유로 체포된 후 끓는 물에 담겨지는 고문을 받다가 숨졌는데 사체는 온 몸에 화상을 입은 건 기본이고 머리 뒤에는 피투성이의 거대한 상처가 있었으며 손발톱은 모두 빠져 있었고 이마와 목은 멍들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팽형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로부터 2년 후 고문 사실을 폭로한 그의 어머니도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
뿐만 아니라 산아제한을 목적으로 우즈베키스탄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강제적 자궁적출 수술도 그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 관련 기사
휴먼라이츠워치는 2013년 동안 우즈베키스탄 주민들이 국제인권단체에 접수한 인권보호 요청이 11,858건에 달한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런 학정의 결과로 우즈베키스탄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 2006~2009/2016~2017년엔 고작 3점, 2010~2015년에도 4점을 기록하여 오늘날로 치면 에리트레아 포지션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세계의 자유 최하위권을 놓치지 않는 국가로 전락했다. 정확히는 정치적 권리(PR)는 0점이었고 시민 자유(CL)은 3~4점이었다.[16] 2008~2017년까지 10년 가까이 같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투르크메니스탄보다도 낮게 나왔고 2016~2017년에는 무려 북한하고 동점이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그나마 그의 사후에는 대폭(?) 올라 2023년 기준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 12점[17]이다. 다만 과거에 비해 많이 올랐다고 해도 이는 러시아, 베네수엘라보다 낮고 이란, 쿠바, 바레인과 동점이다.
다만 그가 중앙아시아를 극단주의 테러가 없는 안전한 국가로 만들었다는 평도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이고 아프가니스탄이 그의 영향력으로 극단 테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당시 우즈베키스탄에서 존경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도 진심으로 말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오히려 극단주의 테러조직이 할 짓을 대통령인 그가 대신 했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그의 집권 시기 동안 우즈베키스탄의 부정부패는 매우 심각하여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우즈베키스탄 마피아와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밀접히 연계돼 있으며 공적, 사적 부분의 직업은 일상적으로 매직되었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하술할 악행과는 정반대로 1998년 사형을 폐지했다.[18]
4. 안디잔 학살
자세한 내용은 안디잔 학살 문서 참고하십시오.우즈베키스탄판 5.18 민주화운동이라 불리는 학살로, 단 하루 만에 공식 수치로만 187명의 사망자가 나온 대학살이다. 심지어 이조차 독재국가 특성상 축소된 수치라는 의혹이 있으며, 현지에서는 400~600명에서 약 1,500명, 심지어 2,500명이 죽었다는 의혹도 있다.
5. 가족 관계
- 티무르 틸랴예프 (둘째 사위)
5.1. 장녀 굴나라 카리모바
Gulnara Karimova, 1972년 7월 8일([age(1972-07-08)]세)
한때는 부친의 권세를 이어받을 전승자로 거론되었지만 부패 혐의에 연루되어 해외에서 활동하던 중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왔고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비리로 인한 검찰 조사를 받았으며 현재는 몰락해서 자택에 감금되어 감시를 받고 있다고 한다. 험한 꼴도 당한 듯 한데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카리모바는 익명의 인물을 통해 전달한 자필 편지에서 "부친인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감금생활을 하고 있으며, 구타와 감시 등 불법행위에 시달리고 있다."고 주장했고 "집에는 인터넷과 TV는 물론 전화도 끊긴 상태이며 16세 된 딸의 건강이 나빠져 불안하다."고 전했다. 그녀는 이 모든 게 정치적 음모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사실 이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 게 카리모바는 2013년부터 트위터에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비판하거나 모함하는 글을 올려 카리모프를 자극한 것이 유력한 이유라는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자료
말 그대로 "내 자식들이라도 국가에 위해가 된다면 내 손으로 직접 목을 치겠다.”는 포고가 허구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런 비리 혐의나 권력을 이용한 안하무인격 행보로 인해서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에게서 '가장 미움받는 인물'이 되었다고 하며 국민들은 이 여자가 죽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쓴다고 한다. 영국의 신문 가디언은 카리모바가 최근 아버지의 귄력을 승계받을 인물로 어설프게 자리매김하려다 우즈베키스탄 내부에 많은 정적들이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녀는 악명높은 우즈베키스탄의 강제수용소에 수용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여담으로 그녀는 대통령의 권력과 자금을 등에 업고 사업가, 보석 디자이너, 팝스타, 영화 제작자 등으로 활동했는데 그녀의 막장 행보를 보여주는 일화로 한 때 미국의 인터스팬(Interspan)이란 기업이 우즈베키스탄의 차(茶)산업에 투자하여 성공한 적이 있었다. 이를 본 굴나라는 인터스팬 사의 직원을 압박해 인터스팬 사가 2006년에 우즈베키스탄 내 자산 전부를 포기하고 철수하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굴나라는 우즈베키스탄 차 시장 점유율을 2%에서 67%까지 끌어올렸다. 또 우즈베키스탄 문화예술 포럼 재단 이사회의 창립자이자 의장이며 우즈베키스탄의 문화적, 사회적 삶에 초점을 맞춘 여러 NGO의 회장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남을 돕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이 조직들이 그녀의 방대한 사업 지분과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는 프로파간다 목적이 강한 사실상 페이퍼 컴퍼니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한다.
지금은 부패혐의로 수감 중이다.
5.2. 차녀 롤라 카리모바틸랴예바
Lola Karimova-Tillyaeva, 1978년 7월 3일([age(1978-07-03)]세)
개인 홈페이지
타슈켄트 세계경제외교대학에서 국제학 석사를, 타슈켄트 국립대학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땄으며[19] 2008년부터 2018년까지 유네스코 주재 우즈베키스탄 대사를 역임했고 현재는 스위스 제네바의 4,600만 달러짜리 저택에서 살면서 우즈베키스탄의 고아와 장애 아동을 돕는 두 개의 자선 단체[20]와 향수 브랜드[21]를 운영하고 있다. 2005년 우즈베키스탄 체조 연맹이 창설된 이래 회장직을 맡아왔고, 2010년에는 그녀는 아시아체조연맹(AGU)의 명예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얼마나 부유한지 세계 최선진국인 스위스 기준으로도 엄청난 부자라 2012년 스위스의 비즈니스 잡지 빌란(Bilan)에서 그녀 부부가 스위스에서 가장 부유한 3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될 정도였고 본인도 2013년 9월 BBC와의 인터뷰에서 스위스 300대 부자인 것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며 과장되었다고 밝히면서도 자신의 남편 티무르 틸랴예프(Timur Tillyaev)가 공공 입찰에 참여하지 않은 대신 무역 운송 회사에 지분을 가졌으며 가스나 면화 같은 국가 지원 사업에 참여해도 세금 면제와 독점 지위는 가지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2013~2014년 기준 그녀의 재산은 1억~2억 달러였다고 하며 2017년 조사에 따르면 스위스와 아랍에미리트 은행 계좌에 1억 2700만 유로(약 1846억 4022만 원)가 넘는 금액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며, 심지어 그녀 부부의 부를 일구는 데 우즈베키스탄 마피아가 개입했다는 의혹까지 있다. 그녀의 부정부패에 대한 자세한 의혹은 이 링크를 참고하길 바란다. #
2013년 7월에는 베벌리힐스에서 침실 7개, 욕실 11개가 딸린 약 4500㎡ 면적에 5,800만 달러 상당의 초호화 저택을 샀다는 보도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집 시설이 정말 어마어마하다.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연회장, 40석 규모의 영화관, 실내외 수영장, 사우나, 체육관, 최대 12대의 차량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 차고, 90피트(약 27.4m) 길이의 미술관, 가죽 패널로 마감된 도서관, 옥상 정원으로 이어지는 비밀 계단,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진 대규모 부엌, 무도회장, 5,000병 규모의 와인 저장고 등이 있다고 한다. 집 외부에는 60피트(약 18.3m) 길이의 인피니티 풀, 온수 욕조, 야외 주방, 3개의 추가 욕실이 있으며, 1에이커(4,047㎡) 정도의 야외 부지에는 4개의 장미 정원, 2개의 분수, 실제 백조가 살고 있는 연못이 있다고 한다. # 댓글은 가난한 독재국가[22]의 지도자의 딸이 어떻게 저런 집을 샀냐고 비토하는 반응이 대세였다.
그로부터 두 달 후 2013년 9월 BBC 우즈벡 서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이 언니 굴나라와 12년 동안 연락하지 않았으며 "우리 사이에는 가족이나 우호적인 관계가 없습니다...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입니다."라고 밝혔다. #
6. 기타
- 독재 행각과 별개로 강한 친한 성향을 보이며 한국에게만큼은 친숙한 정책을 펼쳤다. 1996년에는 대우증권의 우즈대우뱅크(현 한국산업은행 우즈베키스탄) 설립을 처음으로 허가한 걸 비롯해 같은 해엔 정부-대우자동차 간 합작법인 '우즈대우 아브토'를 세워 자동차 생산 및 수출국으로 급부상시켰고, 한국GM으로부터 매년 20억불짜리 차 부품을 수입할 정도였다. 2006년 3월에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대한민국과 우즈베키스탄 공화국간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공동선언'을 체결했고 2013년에는 전자정부 구현을 위해 김남석 전 행정안전부차관을 우즈베키스탄 정보통신기술발전부(MITC)차관으로 임명한 바 있다.( 참고 자료) 미국·유럽이 안디잔 학살에 반발해 우즈베키스탄과 단교 수준의 조치를 내리자 카리모프는 안디잔 학살 무렵 우즈베키스탄을 찾은 한국을 극진히 대접했고, 이는 이명박 정부 들어 우즈베키스탄의 굵직한 인프라 사업들을 한국에 맡긴 것은 물론 현지 한국 대사를 러시아 대사와 함께 카리모프 옆에 앉힐 정도로 더욱 강화되었다. 당시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던지 외국 국제정치학 책에도 우즈베키스탄의 최고 협력 국가가 한국이라는 사실이 실리기도 했을 정도였고, 이후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의 친교 관계는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다. #
- 1995년 2월 16일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무궁화대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저명한 민주화 운동가가 극악무도한 독재자에게 훈장을 줬다는 모순이 생기지만 이는 그가 집권 초기라 본색을 드러내기 전이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 2010년에 영국 가수 스팅이 그의 딸이 주선한 콘서트에서 공연을 펼쳤고 100만 달러 약 10억원의 돈을 받아가자 우즈베키스탄주재 영국 대사였던 크레그 머레이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는 악랄한 정권을 미화하는 이벤트에서 노래하고 100만 파운드를 받았다. 완전히 미친 거 아닌가?"라는 글을 올려 스팅을 비판했다. 기사, 원문 블로그 크레그 머레이는 "끓는 물에 산채로 사람을 넣어 죽이는 것"을 비롯해 재직시 목격한 실상을 전 세계에 폭로한 인물이다. 더군다나 스팅은 평소 진보적인 정치 소신으로 유명하고 한때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비난하는 노래를 쓴 적도 있었던 만큼 더더욱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 테니스와 독서가 취미였다고 한다.
[1]
우즈베키스탄어 발음은 '이슬롬'
[2]
Toshkent Davlat Texnika Universiteti
[3]
Toshkent Davlat Iqtisodiyot Universiteti
[4]
사실 목화농장 강제노동 문제도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주평인데 이때의 소련에서 목화 생산량을 늘리라면서 우즈베크 SSR 지도부를 닦달하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생산품목을 목화로 일원화시키는 수준이었지만 이것도 한계에 다다른 1970년대부터는 아예 법을 어기고 학생들이나 노인들을 동원하면서까지 목화 수확을 닦달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그 덕택에 강제노동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1990년대 이후로도 지속되었다.
[5]
정작 웃긴 것은 카리모프가 생전에 가장 욕을 먹던 행위 중 하나가 목화 강제노동이었다.
[6]
오히려 소련 시절보다 처우가 나쁘다는 증언도 있다. 소련 시절에는 그래도
도시락은 주면서 일 시켰는데 지금은 그런 것조차도 없다며...
[7]
보통
3.15 부정선거처럼 대놓고 투표함을 조작하는 등의 행위만 부정선거로 보기 쉬운데 실제 부정선거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8]
물론 키르기스스탄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비치 아카예프가 1990년부터 2005년까지 독재 정치를 했으나, 막판엔
튤립 혁명으로 물러났다.
[9]
그나마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적이라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우즈벡-키르기스 민족 간의 유혈충돌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악명이 높다.
[10]
하지만 이 경제성장은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서 늦게 이루어진 것이고 그동안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거북이처럼 느려터진 답답한 경제 성장을 하던 나라가 우즈베키스탄이었다. 이 양반은 애초에 경제성장이 아니라 저개발 독재자의 대명사였다. 실제로 1996년경 경제 정상화 이후 2003년까지도 경제성장률이 4%대밖에 안 됐으며 세계은행 통계 기준 2002~2005년 우즈베키스탄은 거의 극빈국 포지션이었다. 시작이 막장이었던 셈. 옆나라
타지키스탄의
에모말리 라흐몬과 비교하면 그 막장성이 더더욱 돋보인다. 다만 이쪽은 세계에서
유이한
이중내륙국이라는 것도 감안해야 하며, 라흐몬의 경제성장도 따지고 보면 카리모프도 울고 갈 수준으로 해외송금빨이 강하다.(...)
[11]
심지어
쿠바 국무원은 9월 5일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사망에 대한 공식 애도일로 선포했다.
[12]
여기의 첫 제물이 장녀인 굴노라 이슬로모브나 카리모바인데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카리모프는 약속대로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감금하는 조치를 취했다.
[13]
실제로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비판한 일 때문에 1999년 구금된 리포터 유스프 루지무라도프(Yusuf Ruzimuradov)는 카리모프 사망 2년 후인 2018년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
[14]
다만 카리모프는 가족이 범죄를 저지르면 자기 손으로 처리하겠다고 약속했고 부패한 장녀를 감금하므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 문제는 장녀가 단지 카리모프의 신경을 긁어서 열받은 카리모프가 굴노라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워서 집행한 거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다.
[15]
사실 반체제 인사들을 정신병원에 가두는 것은 소련 시절의 관행이다. 차마 감옥에 가둘 수는 없는 사람들에게 정신병원에 가두는 것으로 대신 조치를 취한 것이다.
[16]
세부적으로 따지면 표현 및 사상의 자유를 묻는 D 부분은 0점을 기록한 2016~2017년을 제외하면 꾸준히 1점을 기록했으며, 개인의 자치와 권리를 묻는 G 부분은 2~3점을 기록했다. 집회의 자유를 묻는 E 부문과 법치를 묻는 F 부문은 항상 0점이었다.
[17]
PR 2점, CL 10점
[18]
이는
투르크메니스탄보다 1년 앞선 것이다.
[19]
아버지의 위세로 딴 것인지, 진짜 능력으로 딴 것인지는 불명.
[20]
각각 2002년/2004년에 설립했다. 고작 24세밖에 안 된 사람이 어떻게 자선 단체를 만들 정도의 재력을 얻었는지는 묻지 말자...
[21]
2013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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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013년 기준으로 우즈베키스탄의 1인당 GDP는 2420달러도 되지 않았고 2021년 기준으로는 그보다도 더 낮은 1983달러다. 당시 기준으로 평균적인 우즈베키스탄인 24,000명의 1년 수익을 모아야 살 수 있는 수준이었던 셈이다.
선진국 영국인들의 반응도 이러하니 우즈베키스탄인들이 이 소식을 접하고 보였을 분노의 수준은 가늠할 수 없다.
[23]
하필이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시기가 2005년 5월 10~12일로, 안디잔 학살 하루 전이었다.
[24]
무신론에 긍정적인 종교는 없는 데다 무슬림들에게 무신론자라는 말이 욕설일 정도로 이슬람 역시 무신론에 대해 부정적이며 특히
이슬람주의 및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이 강하거나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을 가진 무슬림들의 경우 무신론자 뿐만 아니라 무종교인들에 대해서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다만 이슬람 근본주의 및 극단주의자들만 그런 것은 아니며 다른
종교 극단주의자들 역시 무신론자 및 무종교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25]
사실
국가 무신론을 표방하던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상 카리모프가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려면 무신론자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