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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01:45:06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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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칭3. 역사
3.1. 기원과 정착3.2. 중앙아시아 강제 대이주와 새출발3.3. 소련 해체 이후
4. 언어5. 문화6. 규모7. 유명 고려인들
7.1. 군인, 정치인7.2. 기업인7.3. 학술인7.4. 문화예술인7.5. 체육인7.6. 신고려인7.7. 기타
8. 정체성9. 한국에서의 이미지10. 대중매체 속 고려인
10.1. 드라마 < 까레이스키>10.2. 하나안10.3. 모바일 게임 소녀전선10.4. 좋좋소10.5. 템빨
11. 논란 및 문제점
11.1. 무국적자 문제11.2. 소련과 러시아, 고려인 등을 구분하지 못해서 생기는 차별
12. 오해
12.1. 중앙아시아인 러시아의 동양계 소수민족들은 고려인이다?
13. 한국 내 고려인 거주자 및 거주지 현황14. 여담1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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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Корё-сарам[1]/ Российские корейцы / Этнические корейцы ( 러시아어)
Корьо-сарам ( 우크라이나어)
Карё-сарам ( 벨라루스어)
Koryo-saram ( 영어)[2]

고려인(高麗人)은 소련 붕괴 후의 구 소련 지역 전체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의미하는 민족 명칭이다. 소련 붕괴 전에는 한국계 소련인이었다. 인구는 약 50만 명으로, 약 200여만 명의 조선족의 4분의 1 정도이다. 러시아[3]와 중앙아시아[4]를 중심으로 거주했으며, 남부 러시아의 볼고그라드 부근, 러시아 서쪽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의 발트3국 우크라이나, 캅카스에도 소수 고려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한다. 이들은 대부분 19세기 말에 러시아 제국 프리모리예주( 연해주)로 이주하였던 '재러 한인(혹은 재러 조선인)'에서 기원한다.

그 외에도 사할린섬에 사할린 한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는데, 사할린은 한 때 일본 열도 본토로 취급받는 제5의 섬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소련에 넘겨진 땅이다. 그리고 이 곳의 한인 이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때 당시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갔다가, 종전 이후에 사할린이 소련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방치된 것이다.[5][6] 즉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하 전시체제기에 시행된 강제동원 정책의 피해자이다. 따라서 중앙아시아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의 정체성은 아주 다르다. 사할린 한인은 재일 한국인과 비슷했으나, 그들과도 냉전 시대의 분단 때문에 독자적인 정체성으로 남았다.

기존의 중앙아시아와 사할린 이외에도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에 또 다른 이주민 집단이 있는데 이들은 북한인 출신으로 소련 시절에 이주노동자로 왔다가 남은 사례이다.

2. 명칭

대한민국에서는 러시아어 까레이스키·코레이스키(Корейский)라고 불린다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코레이스키'는 '한국의, 한국인의, 한민족의'라는 뜻의 형용사이다.[7] 굴절어 특유의 형용사형이 국적, 혈통( 데모님)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는 영어식으로 생각해 러시아어도 그런 줄 혼동해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어로 한국인 한국 남자는 각각 '코레이치(Корейцы)'[8]와 '코레예츠(Кореец)', 한국 여자는 '코레얀카(Кореянка)'라고 부른다.

러시아인 사이에서 중앙아시아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계 그룹으로서의 고려인을 지칭할 때 흔히 불리는 말은 '코료사람(Корё-сарам)', 즉 고려사람이다. 그렇기에 고려시대에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고려인들 사이에서도 자신들을 이렇게 지칭한다. 여기서 '사람(сарам)'은 한국어 단어 ' 사람'의 음역이다. 마치 한국어권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 러시아인을 가리켜 ‘러시아인’이라고 하지 않고 러시아어 그대로 '루스키예(Русские, 러시아 민족)'나 '로시야네(Россияне, 러시아의 국민)'라고 부르는 셈이다. 이중 루스키예는 해방 직후엔 일본어식 발음인 ' 로스케'라고 불리기도 했다. 해방 직후 이북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꺼삐딴 리에서 소련인들을 그렇게 부르는 묘사가 있다. 한국에서 한자어 표현인 '인'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고려인들은 '사람'이라는 순우리말을 쓴다.

조선과 한국 대신 민족 정체성의 명칭을 '고려'로 나타내는 것은 이미 해방 전 소련 시기부터 나타난다. 조선의 일본 병합 후 러시아 내 조선인 커뮤니티가 본국과 단절된 채 형성집합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어의 Корея에 이끌렸음이 분명하다. 고려공산당, 고려혁명군이 그 예이다. 1922년에 작성된 홍범도의 소련 입국 조사서에는 입국 목적이 '고려 독립'으로 적혀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

일본과 중국에서도 '고려인(高麗人)'이라고 하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한민족 그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3. 역사

3.1. 기원과 정착

고려인은 19세기부터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기원이다.[9] 연구. 1860년, 2차 아편전쟁의 패배로 끝나고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는 외만주 및 연해주를 할양받았다. 1869~1874년 조선 북부에서 대흉년이 발생하자, 많은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월경하여 그 이북에 아예 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했고, 1871년 평안도관찰사 한계원은 정부의 승인 없이 압록강 대안의 조선인 개간지를 28개 면(面)으로 분할하여 각각 강계군에 11면, 자성군에 4면, 초산군에 11면, 벽동군에 2면 귀속시키고 항약을 설치하여 관리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동북 지방, 즉 만주 연해주로 이주했다. 청에서는 봉금령 조치가 이완되고 러시아는 인력 확보를 위해 조선인들의 국경 침범을 묵인하고 있었기에 조선인들의 이주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물론, 국경의 질서 유지 및 치안 문제로 청에서는 봉금령을, 러시아는 국경 통제를 일시적으로 강화하기도 했지만, 청은 1875년에 봉금령을 완전히 철폐하고 러시아도 조선인 이주 자체를 완전히 막진 않았다. 또한 조선인의 만주 - 연해주 이주를 단속해야 할 조선 정부도 통제에 실패했다. 고종대에는 연해주의 조선인 집단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였고 러시아 정부의 정책 변화는 연해주에서 조선인들이 입지를 굳히게 해주었다.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 통치와 문화 수용을 거부하는 만주족 한족의 통제에 애를 먹고 있었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어의 사용에 거부감이 적고 러시아 정부에 어느 정도 복종하는 조선인들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지원했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한 일부 조선인들이 러시아 정교회를 받아들이는 등, 러시아 문화를 수용하던 것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을 비롯해 여러 아시아 지역을 방문한 영국인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만주, 연해주의 조선인들이 번성하는 모습을 보고는 "주체성과 독립성, 영국인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들로 변해 있었다. 그들의 변화는 정직한 정부 밑에서 자신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라는 평을 남겼다. #

1897년 러시아 제국의 센서스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내에 한국어 화자가 26,005명에 달했다.

1900년대 초에는 영-러 간 갈등의 첨예화, 러시아의 남진, 아관파천 등의 문제로 러시아와 조선 모두 일본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한 뒤로 조선인들의 이주가 극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해 이 때부터 연해주는 한국 독립 운동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했다. 최재형과 같이 러시아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이주 한인 지도자들은 막 이주해 온 의병장, 독립 운동가들을 지원하고 연해주의 한국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최재형은 안중근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의거 이후에는 권업회의 초대 회장으로 재임했다. 사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는 조선이 일본에 협력한다고 여겨서 이주에 제약을 두려고 했지만, 이민은 계속 늘어나 1914년 기준으로 한국계의 숫자가 64,000명에 달했고 러시아 국적자도 20,000명이나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연해주의 한인들은 러시아군에 입대해 독일군과 싸웠다. 당시 독일군에 포로가 된 조선인 러시아 병사의 육성이 녹음되어 독일 박물관에 남아 있다. 당시 조선인 부대의 군가를 들어보면 " 을지문덕, 이순신처럼 열심히 싸워 베를린을 점령하여 러시아에 은혜를 갚고, 전쟁 경험을 살려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을 해방하자."라는 내용이다. 참조바람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연해주 한인들은 독립 운동을 벌였으며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1919년에는 3.1 운동에 호응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만세 운동을 벌였다. 만세 운동 직후, 연해주 한인들은 대한 국민 의회를 결성,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연해주만의 독자적인 정부이던 국민 의회는 독립 운동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공론을 받아들여 상해임시정부, 한성 정부와 단일 정부로 통합하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상하이, 한성과의 의견 차이가 커서 완전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하였기에 대한 국민 의회는 정부 통합 이후에도 연해주의 독립 운동 단체로 운영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터지자, 연해주 한인들과 유럽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 노동자 단체인 고려인 동맹도 소련 정권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1920년 4월 4일, 일본군은 '백군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적백내전에 개입하고 러시아의 극동 지역을 침공했다.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 운동을 뿌리 뽑기 위해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과 각지의 한인 정착지들을 공격하였고 이 사건으로 최재형을 비롯해 수백 명이 넘는 한인들이 사망했다. 이를 '신한촌 사건' 또는 ' 연해주 4월 참변' 이라고 부른다.

4월 참변 이후, 연해주의 독립 운동은 기세가 꺾였지만 한인들은 이전보다 더 나빠진 환경 속에서도 계속해서 독립 운동을 이어나갔다. 러시아 내전 초기에 적군에 대한 지지를 표한 것과 일본군이 백군을 돕는다는 점 때문에 연해주 한인들은 붉은 군대에 합류해서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내전이 종결된 후, 소련 정부는 고려 혁명군을 비롯해 붉은 군대에 협력한 독립군들을 무장해제시켰다.

한국독립군의 입장에서 이것은 배신 행위였으나, 우크라이나 흑군, 녹군, 백군 카자키 등, 다양한 소수민족 분리주의 군대와 처절한 싸움을 벌였던 소련 정부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소수민족 무장 집단의 존재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독립군들은 무장해제당했으며 대한 국민 의회도 소멸, 소련 공산당의 통제하에 놓인 한인 동맹이 연해주 한인들의 유일한 자치 단체가 되었다. 소련 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반발한 일부 독립 운동가들은 만주로 떠났다. 가령 대한의용군 사령관으로서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의 일원으로 백군과 싸웠던 이용과[10] 김홍일[11] 소비에트의 배신에 격분하여 만주로 떠났고, 이후 상하이로 돌아가 중국 국민혁명군에 가담했다.
파일:포시예트 구역.png 파일:고려인ND.jpg
1927년부터 1937년까지는 아예 고려인들 위한 자치 지역이 연해주 내 포시예트라는 곳에 할당되기까지 했다. 행정상 "민족구역(Национальные районы/National District)"이라는 형태로, 고려인들 말고도 소련 내 여러 민족들이 할당받은 구역 형태 였다. 일제 강점기로 인해 나라 없는 민족이 된 당시 고려인들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1923년 고려인의 숫자는 10만을 넘었고, 1937년에는 17만에 이른다. 고려인 학교가 370곳, 신문도 7개나 있었으며 연해주에서 고려인들의 자치 공화국 '고려인 소비에트 공화국'이 구상되어 설치 직전까지 갔다. 이때가 연해주에서 고려인의 최절정기였다.

3.2. 중앙아시아 강제 대이주와 새출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인민위원회와 전소(全蘇)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결정 No. 1428-326cc

1937년 8월 21일

원동지방 국경부근 구역에서 고려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인민위원회와 전소연방 공산당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원동지방에 일본 첩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치들을 취한다.

1. 전소연방 공산당 원동지역 지방집행위원회, 원동지역 내무인민위원부는 원동지방 국경부근 지역들, 즉 포시에트, 몰로도프, 그로데코보, 한카이, 하롤, 체르니고프, 스파스크, 슈마코보, 포스트이셰프, 비킨, 뱌젬스키, 하바롭스크, 수이푼, 키롭스키, 칼리닌, 라조, 스바보드느이, 블라고베셴스크, 탐보프카, 미하일로프, 아르하라, 스탈리노, 블류헤르에서 모든 고려인 주민들을 내보낸 후 남카자흐스탄주, 아랄해 구역, 발하쉬호 구역과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이주시킬 것을 지시한다. 이주 작업은 그로데코보에 인접해 있는 구역들과 포시예트 지구에서부터 개시한다.
2. 이 작업은 즉시 착수하여 1938년 1월 1일까지 완료한다.
3. 이주 시 고려인들은 자기 소유물, 농기구, 가축 등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허용한다.
4. 이주민들이 두고 가는 동산, 부동산 및 파종지의 미수확 작물에 대한 가격을 산정하여 그들에게 보상한다.
5. 이주대상 고려인이 출국을 원하는 경우 국외로 떠날 수 있게 하고, 간소한 국경 통과절차를 적용하여 출국을 방해하지 않는다.
6. 소련 내무인민위원부는 이주와 관련하여 고려인들 사이에서 발생 가능한 폭력과 무질서를 제압할 수 있는 조치들을 강구한다.
7. 카자흐공화국과 우즈베크공화국 내각들은 이주민들의 거주 지역을 즉시 확정하며 그들이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협조를 제공하고 지도할 의무를 갖는다.
8. 인민교통위원부는 고려인 이주민들과 그들의 소유물을 원동지방에서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베크공화국으로 이송하는 데 있어 원동지방 집행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적시에 차량을 공급할 의무를 갖는다.
9. 전소연방 공산당 원동지방위원회와 원동지방 집행위원회는 3일내에 이주대상 가구와 인원수를 산출하여 통지할 의무를 갖는다.
10. 이주의 진행 상황, 출발 구역에서 떠난 인원, 정착지역에 도착한 인원, 국외출국이 허락된 인원 숫자에 대하여 10일 단위로 전문 보고한다.
11. 고려인을 이주시키는 구역들에 대한 국경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국경수비병력 3,000명을 증원한다.
12. 고려인들이 떠난 건물에 국경수비대원들의 배치를 허락한다.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인민위원회 의장
V. 몰로토프
전소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I. 스탈린

만주사변을 비롯해 일본의 중국 침공에 위협감을 느끼고 있던 소련 정부는 고려인의 존재가 일본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나는 고려인들이 지속적으로 자치권을 요구하는 것에도 부담을 느꼈다. 1937년 8월 21일, 스탈린고려인 강제 이주령을 승인한 뒤, 이주 작업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소련 당국은 3 ~ 7일 전에 이주를 통보해 한인 사회가 제대로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고 수많은 한인들이 무기력하게 기차에 실려 아시아 정반대쪽의 중앙아시아로 끌려 갔다. 고려인 강제이주사건은 당대 소련을 휩쓸었던 대숙청 광풍의 하나였다.

9월에 이뤄진 이주는 11월에 모두 종료되었고 열악한 환경 때문에 수백 명이 넘는 한인들이 기차 안에서 죽어나갔다. 한인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유형에 처해졌고 일부는 반소 행위를 이유로 총살당했다. 이주에 저항하거나 조금이라도 지체하는 이들은 NKVD에게 체포되어 처벌받거나 심하면 사형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고려인 강제 이주 작업은 소련 정부 입장에서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농업 집단화 시기의 부농( 쿨라크)들도 이러한 폭거에 당했고 1944년 체첸인이나 볼가 독일인 강제 이주를 비롯해 소련의 소수 민족들은 고려인들처럼 급작스러운 강제 이주를 당했다. 역으로 유럽 러시아 지역에 거주하던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이 고려인들이 살던 연해주로 끌려오기도 했다.[12]

강제 이주의 결과, 고려인 172,481명이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하고(우즈베키스탄 : 76,526명, 카자흐스탄 : 95,256명), 이주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13] 강제 이주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연해주 한인들이 다니던 학교의 교사들 중에는 한인이 아니어서 강제 이주 대상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던 한인들을 그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다며 이주를 자처해서 한인들과 함께 떠났고, 중앙아시아 현지에서 계속 한인들을 가르쳤다. 이들이 카자흐스탄에서 세운 사범 학교는 오늘날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대학교로 명맥을 잇고 있다. #

고려인 강제 이주는 일부 한인들이 일본의 첩자로 활동하고 있고 연해주 한인들이 한국 독립 운동을 지원해 일본을 자극한다는 게 이유였다. 이 과정에서 김경천, 김단야, 박진순 등 연해주를 대표하는 한인 독립 운동가들이 어처구니없게도 '일제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대숙청의 희생양이 되었다. 또한, 당시에 한인들이 추진하고 있던 한인 자치 지구의 설립도 결국에는 백지화되었다. #

당시 NKVD의 문서에 따르면, 연해주에서 일제 밀정들이 많이 활동했고, 한인 중에서 일제에 협력한 부역자들이 상당했다고 한다.[14] 소련측이 이유없이 강제 이주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당장 일본군이 연해주에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며 그리고 2011년에 공개된 문서에는 연해주 한인들이 소련 중앙 정부가 소수민족에게 복리증진을 위해 지급하는 지원금을 중앙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고국의 독립 운동 자금으로 쓰고 있어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소련 정부는 연해주 한인들이 일본에 부역하는 것도 걱정되지만, 또한 이들이 독립 운동을 지원해서 일본을 자극할까 봐 아예 통째로 먼 곳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소련은 나치 독일과 일본을 동시에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1941년 4월 13일, 일본 제국과 소·일 불가침 조약(소·일 중립 조약)을 체결해 이중 전선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불가침조약은 소·일 양국 모두에게 이득이 되었다. 일본과의 중립 조약 덕분에, 소련은 극동군 병력을 나치와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약 25만 명이 극동군 소속으로 소련을 지키기 위해 유럽 러시아로 이동했다.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 동안, 소련으로부터 4,000만 톤의 석탄, 1억 4,000만 톤의 목재, 5,000만 톤의 철, 1,000만 톤의 어류, 그리고 시베리아와 소련 극동 지방의 금을 공급받았다. 소련·일본간의 무역은 미국과 전쟁 중인 일본군의 전쟁 수행에 큰 도움을 줬던 것이다. 소련 · 일본 중립 조약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고려인 이주민들은 소련 정부에서 달랑 천막이랑 얼마안되는 식량만 던져준 열악한 상황의 신천지에서 서로 협력하여 관개 시설을 설치하고, 1920년대에 소련 정부의 초청을 받아 이미 카자흐 지역에서 벼를 재배하고 있던 고려인 선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벼 농사를 시작하였다.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고려인들은 기존의 삶의 방식을 회복하였다. 정착 과정에서 이른바 '마르코프차(Марков-ча)'[15] 혹은 ' 한국 당근(Морковь по-корейски)'이라는 요리가 탄생했다. 냉전이 끝난 뒤, 한·러간 교류가 크게 늘어나면서 한국과 러시아에서 '한국에는 한국 당근이 없다'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당시 고려인들은 소련 경제 체제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상당히 독특한 형태의 임차농업 방식인 '고본지' 또는 '고본질'을[16] 통해 괜찮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임차농업 방식 덕분에 소련내의 한인들은 짭잘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고 동시에 소련의 국가 주도 농업이 내포한 총체적인 비효율성을 개선하는 효과도 함께 낳았다고 한다. 소련 한인들은 어떻게 ‘양파 밭의 제왕’이 되었나 게다가 중앙아시아는 한반도에 비해 농사짓기 너무 좋은 땅이라서 한반도에서 하던 노력의 약간만 해도 몇 배의 풍작이 일어나 일할 맛이 났다고 한다.

현재도 고려인들은 농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한·러 수교 이후에는 한국에서 농업 기술들을 배워가거나 종자들을 러시아로 가져가서 크게 농장을 운영하여 성공하는 경우들도 있다고 한다. 러시아 우랄에서 한인 농사꾼이 짓는 수박 농사

고려말 사용은 1937년부터 약 10년 간 금지되었지만, 그 후 금지가 풀려 민족어 교육도 가능하게 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의 한 사범 대학에서는 60년대까지 고려어 학과도 있었다. 고려인들은 '레닌기치(«Ленин кичи»)'라는 한글 신문을 간행하고, 고려어 방송, 고려인들을 위한 극장까지 운영했다. 그러나, 러시아어 교육을 통해 소수 민족들을 동화시키려는 소련 정부의 교육 정책, 자녀 세대의 출세를 원하는 부모 세대의 러시아어 교육 장려 등의 요인이 영향을 미쳐서 고려인 1·2세대는 고려어에 매우 능숙한 반면, 3세대 이후부터는 매우 미숙하다. 그래도 한국과의 교류에 힘을 쓰고 있고 전통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도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고려인들은 척박한 중앙아시아의 환경을 열렬한 교육열과 억척스러운 삶으로 극복해 소련 소수민족 중에서 아르메니아인, 독일인, 오세트인, 유대인 다음으로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민족으로 성장했다. 당시 소련에서의 고려인들은 우수한 성과를 올리는 근면성실하고 건실한 민족으로 명성이 높고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1944년에 강제이주 당한 체첸인들의 이주와도 비교할만 하다. 체첸인들도 고려인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소련 관원들이 들이닥쳐서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끌려 갔다. 몇몇 자료에 따르면, 고려인과 체첸인은 초기에는 충돌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잘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막 벼 재배에 성공한 고려인들은 체첸인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온정을 베풀어 주었다. 산악 지역 출신인 체첸인들은 중앙아시아의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농경에도 미숙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인들은 체첸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농사 짓는 법도 가르쳐 주었고 아동들을 보육해 주거나 농장에 체첸인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체첸인 노인들은 '그때 고려인들이 해준 개고기가 맛있었다' 라고 기억하기도 한다.[17]

스탈린 사후, 체첸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소수의 고려인들이 권유를 받아 카프카스 지방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고려인들은 벼농사 대신 야채와 과일 농사를 지었고 이들 덕분에 카프카스 지방의 야채와 과일 소비가 늘었다고 한다. 체첸인들도 과거 자신들을 도와준 고려인들에 대해서 자주 감사를 표했고 그래서 그런지 인종과 종교의 각축장인 카프카스에서 고려인들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다고 한다.[18] 하지만 소련 해체 후 체첸 사태로 인해 고려인들의 삶의 터전도 파괴되었고 다른 곳으로 떠나는 고려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1990년대까지 카프카스에 거주하던 고려인 인구는 50,000명까지 늘었던 적이 있으나, 현재는 1,000명 미만 남짓한 숫자만이 남아 있다, 참조글
체첸인들은 니키타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허가를 받아 대대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고려인들은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연해주로 돌아가지 못했다. 예고도 없이 끌고간 체첸인들과 달리 강제이주 며칠 전에 미리 공지를 해줬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생활 터전이 이미 중앙아시아 일대에 묶여있던 지라 체첸인과 같은 대대적인 귀환이 힘들었다. 게다가 글라스노스트 이전까지는 이주에 대해 발언하는 것조차 금지되었으며 이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기록도 아예 못했다. #, #

독소전쟁이 발발할 당시 고려인도 ' 소련인'으로서 참전하였으나, 그 규모는 크지 않았다. # 여전히 고려인들을 신뢰하지 못한 스탈린의 의심증 때문이었다. 고려인으로 중앙아시아에 끌려간 홍범도 장군이 독소전쟁에 참전했다는 야사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며 홍범도는 이 시기에 극장 수위로 일했다. 이는 의병 독립군으로 큰 전공을 세운 홍범도를 존경한 고려인들이 만든 이야기로 추정한다.

고르바초프 시대에는 한·소관계가 개선되면서 북한의 고위층이었다가 8월 종파사건 이후 소련으로 망명한 리상조[19], 강상호, 정상진 등 북한 출신 탈북 고려인들이 방한하여 북한을 비판하기도 했다.

3.3. 소련 해체 이후

1991년, 소련이 붕괴된 시점의 고려인들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비롯해 다양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대다수가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해 한국으로 귀환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타지키스탄이나 카프카스에 살던 일부 고려인들은 내전( 타지키스탄 내전, 체첸 전쟁)에 휘말려 고생을 하기도 했다.

1993년 러시아 최고 연방 회의가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을 복권시켰으나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은 없었다. 소련 치하에서 강제 이주로 고통받은 소수 민족이 한 둘이 아니라 러시아가 감당하기 힘들기에 그냥 무시해 버린 것이다.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 역시 과거 강제 이주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 피해 당사자들이 서서히 노령으로 사망하는 데다 3세대 이후의 젊은이들은 강제 이주와 관련해서 아예 모르거나 '아픈 과거'라며 언급을 꺼리는 터라 강제 이주의 역사는 잊혀지게 됐다.( 참고)
우리가 모르는 고려인 이야기. 카자흐스탄 '알마티'부터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까지

소련 와해 이후 러시아의 극심한 경제적 혼란이 안정되면서 새로 러시아에 귀화하는 한민족 계통을 '신고려인'이라 부르며, 한국계 러시아인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고려인(한국어 자막 있음)

4. 언어


고려인들이 구사하는 한국어 중앙아시아 한국어 혹은 고려말로 부른다. 하지만 세대가 갈수록 한국과의 인연이 점점 멀어지면서 구사할 수 있는 화자 수는 날로 감소하고 있다. 대개 고려인들의 고향은 함경도 지역이었기 때문에 크게 보면 중앙아시아 한국어 동북 방언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틀은 동북 방언이나 육진 방언과 크게 차이가 없다. 유튜브 댓글에는 경상도 말투가 들린다는 반응이 있는데,[20] 함경도 지역의 방언 자체가 경상도와 표현을 공유하거나 성조 등 유사한 점이 있는 것이다.[21] 함경도 쪽에서 탈북을 한 사람조차 서울말보다 부산 사투리를 빨리 배울 정도다. 다만 100년 이상 격리되었기에 현재 함경도 지역 방언들보다 더 옛스러운 말투들이 많다.

고려인들이 처음 이주한 곳이 러시아 연해주였고 이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는데 당시 소련 러시아어를 사실상의 공용어로 취급하고 있었다.[22] 그래서 고려인들도 차츰 러시아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고려말 어휘에 러시아어에서 차용된 어휘들이 많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려인 후손들과 한국과의 인연이 점점 옅어지면서 현재 중앙아시아 한국어는 일부 노인들 정도나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사멸 위기에 있으며 현재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러시아어를 많이 쓴다.

비슷한 처지였던 중국의 한국계 중국인( 조선족)들과 비교해도 한국어 화자 수가 크게 감소한 편인데, 한국계 중국인들은 냉전 시절에도 지리적으로 인접한 북한과 교류했고, 연변 조선족 자치주로 자치구역이 지정된지라 그나마 한국어의 존속 및 확대가 더욱 용이했다. 반면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은 정치적인 문제는 물론이고 지리적으로도 남북한과 너무 멀고, 그렇다고 따로 자치구역을 가진것도 아닌지라 이러한 교류가 매우 적었다. 그래서 한국어 화자가 빠르게 감소한 것. 오늘날 고려인들이 배우는 한국어는 냉전 종식 이후 이어져온 남한과의 교류에 따른 영향으로 대한민국 표준어인 경우가 많으며, 그에 따라 젊은 고려인들 중 그나마 한국어가 유창한 이들도 대한민국 표준어를 쓰지 조상의 언어인 중앙아시아 한국어나 동북 방언을 쓰지는 않는다.

5. 문화

비슷하게 타국에 형성된 소수 민족 집단이라는 점에서 조선족과 비슷하지만, 중국에 비해 정치적인 동화주의[23]가 심하지 않은 러시아 특성상 자문화를 나름 잘 보존한 편이며 러시아 내에서나 한국에서나 갈등이 거의 없는 편이다. 특히 사할린섬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러시아 동부 지역에서는 고려인들의 음식 문화가 융합된 러시아식 한국 요리가 널리 퍼져 있을 정도.

6. 규모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 주로 밀집해 있다. 원래는 대부분 연해주에 살았지만 거의 다 강제이주당했고, 현재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은 중앙아시아에 갔다가 이주 제한이 풀린 뒤 다시 이주해온 것이다. 구소련 붕괴 후 중앙아시아 독립 국가들의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지면서 외지인인 고려인들을 박대하고 자민족을 우대하는 경향이 커지자 그나마 고려인들의 옛 고향인 연해주로 돌아오는 것. 러시아 측에서도 인구 증가에 도움이 되므로 연해주로 이주하는 고려인들에게 정착비를 주는 등의 지원을 하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외만주 고토를 주장하며 연해주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에 맞서 고려인들로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이고 그런 면에서 통일 한국과 한국을 통한 경협에 적극적인 입장이다.[24]

소련 때까지만 해도 살기 나쁘지 않았던 우즈베키스탄이 독립 이후로 한 동안 경제적으로 사정이 영 나빠졌고 경제적인 혼란이 수습된 이후로도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지라, 많은 고려인들은 삶의 질이 더 좋은 카자흐스탄, 러시아로 떠나는 추세다. 한국에 정착한 연해주 출신 고려인 영주귀국자들은 대부분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에 자리를 잡은 상태다. 파주에서는 매년 가을 사할린 어르신 축제가 열린다.

그 외에 사할린 섬에도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 일제강점기 당시 탄광 지역에 강제징용당한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러일전쟁으로 얻었던 북위 50도선 이하 사할린( 남사할린)의 탄광에 강제 이주당했다가 일제의 패망 이후 이 지역이 러시아령으로 회복되면서 고려인이 된 것이기 때문에, 이주 원인은 중앙아시아 고려인보다는 재일교포의 경우에 더 가까운, 고려인과 재일교포의 중간자적 존재이다. 실제로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주로 한반도 북부 출신, 사할린 한인은 한반도 남부 출신이 많다고 한다. 사할린 한인 문서 참고.

구소련 국가에서 고려인의 인구동태는 다음과 같다.

7. 유명 고려인들

7.1. 군인, 정치인

7.2. 기업인

7.3. 학술인

7.4. 문화예술인

7.5. 체육인

7.6. 신고려인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나 CIS 국적을 취득한 한국인.

7.7. 기타

8. 정체성

고려인의 정체성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개개인마다의 차이가 있기 때문. 현대 젊은층의 경우는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경우가 상당수이긴 하지만, 자신의 민족이 고려인이라는 자각은 하고 있다. 사실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의 경우 여권 민족명을 표기하므로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다.

대부분 고려인들의 경우 모어가 러시아어이다. 고려인들의 이름 역시 러시아어식 이름을 사용한다. 따라서 외적인 정체성 면에서는 러시아인에 가깝다. 소련 시대의 고려인들은 소수민족으로써 대체로 초민족주의적(transnationalist) 소련인의 정체성을 가졌다. 그러나 문제는 1991년 소련 해체되고 각 연방 구성국이 독립하면서 더 이상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쓰지 않는 점이다. 때문에 소련시절 관공서에 종사하던 고려인 상당수가 소련 해체 이후 쫓겨나는 등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고려인들의 외적인 정체성은 자의가 아닌 스탈린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스탈린은 고려인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기 위해 한국어 사용 및 교육과 함께 학교마저도 설립을 금지했으며 통혼 혼혈 동화를 강권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설과 추석에는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평소에는 김치와 함께 한국식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또한 자신들의 강제이주 역사와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위령탑과 기념비등을 세웠다.

현재 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려인들 대부분은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등 독립 후 새로 지정된 현지 공용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는 못한다. 스스로를 러시아인에 가깝다고 생각하여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지어를 배우기 위해 별로 노력하지도 않는다. 뭐 아직까지 이쪽 지역에서는 러시아어만 잘하면 생활에는 문제가 없다. 또한 소련 해체 후 지역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여러 심한 차별을 받게 된 고려인 중에는 연해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연해주를 자신이나 부모의 '고향'으로 여기는 노인들,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젊은 고려인들 가운데 이런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이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한국 사회단체의 지원상황이 다큐형식으로 한국TV에서 방송된 적 있다. # 비슷한 처지의 또다른 일부 고려인들은 러시아어 외에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등 현지 공용어를 배우는 경우가 존재한다.

고려인 젊은이들은 한국을 '할아버지의 나라' 정도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는커녕 고려말도 제대로 못하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다고 한다. 거기에 좀 노력을 한 후손들의 경우에는 한국으로 일하러, 혹은 유학으로 오는 케이스도 있다.

고려인들은 언어적인 측면 등 러시아 문화에 동화된 부분도 많지만 상술한 한국 당근을 비롯해 한국 요리의 식습관을 지켜나가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의 좀 큰 시장에 가면 분명히 어딘가에는 고려인 반찬 가게도 있으며 국시 같은 이름의 요리도 찾아볼 수 있다.[31] 단 고려인들의 한국 요리는 백여 년 전 옛날 스타일에 가깝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남한)의 요리와 상당히 다르다. 게다가 고려인들의 한국 요리는 북부지방 베이스, 남한의 한국 요리는 중남부지방 베이스인데다 식재료도 구하기 힘든 전통 한국 식재 대신 중앙아시아의 상이한 식재료들로 만든 것이라 더욱 다르다. 가령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김치에는 구하기도 어려운(어려웠던) 젓갈을 거의 넣지 않으며 맵고 짠 맛도 덜하다. 그래서 요즘엔 우즈벡에서 한국으로 일하러 많이 오는데 그 사람들이 우즈벡에 돌아간 후 주변에 사는 현지 고려인들에게 이런저런 한국 요리가 맛있더라, 오랜만에 먹어보게 한 번 만들어달라고 하면 정작 그 고려인들은 생판 처음 듣는 음식 이름이거나 시래기국, 국수 같이 이름은 같은데 막상 받아보면 완전히 다른 음식이라서 오히려 우즈벡 사람들이나 중앙아시아 한국 요리를 접한 한국인들이 충격과 공포로 당황해하는 사례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만일 고려인들의 음식이 궁금하다면 안산역에서 멀지 않은 선부동의 땟골을 방문해보는 것도 좋다. 이 지역에는 고려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다. 거리에서 들리는 말도 거의 러시아어이고 간판의 글자들도 러시아어가 대부분이다.[32] 한국에서는 경기도 안산 땟골사거리의 우갈록과 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있는 우즈베키스탄 식당 등에서 고려인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러시아 음식도 같이 판매하고 있는데, 국시(кукси)[33], 닭고기해(кя хе), 피고자(пегодя), 편수(пянсе) 등이 고려인에서 유래한 음식이다.

2018년 12월 14일 한국외대 중앙아시아연구소가 개최한 포럼에서 고려인들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고 통합단체를 출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

재한고려인 지원단체인 '너머'는 고려인들의 한국정착을 위해서는 한국어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그리고 고려인을 귀환자로 맞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연해주에 있는 고려인 민족학교가 재정위기를 겪고 있다. #

소설가 김숙은 정착지서 쫓겨나 고통 겪는 고려인의 삶을 소설로 계속 다룰 것이라고 밝혔다. #

사진작가 정성태는 고려인과 관련된 사진전시회를 개최하면서 강제이주 후 향수 간절한 고려인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전시회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

한러간에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한국어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늘고 있다. #

9. 한국에서의 이미지

외국의 소수민족으로 비슷한 위치의 중국 조선족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미지가 영 좋지 않은 것에 비해 고려인은 상대적으로 무난하게 여겨지는 편이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을 계기로 민족 정체성을 완전히 파괴한 이래 적극적인 동화 정책을 벌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조선족이 사상 이념과 정체성적으로 기본 마인드가 중국인이란 마인드를 가지고 있으며[34][35] 가진 중국의 개혁 개방 이후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아서 대규모로 유입되어선 한국과 중국 사이의 소수민족으로써 같은 종족인 한국인뿐만 아니라 같은 국적의 중국인들과도 이런저런 마찰을 빚은 이유가 크지만, 고려인은 현재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고려인을 특별히 강제적으로 동화시키려 하진 않고 대부분 고려인들이 한국에 대거 유입된 적이 없어 딱히 한국인들과 갈등을 빚지 않아 부정적으로 엮일 여지가 적기 때문이다.

사실 고려인들에 대해서는 러시아나 중앙아시아가 한국과 접점이 적은 이유에서인지 중국의 조선족이나 일본의 재일동포, 미국의 재미교포보다 영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렇다고 한국 내 고려인들의 입지가 조선족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면 곤란한 것이, 고려인들의 한국어 구사 능력이 비교적 약하다 보니 직장을 구하거나 법률 문제로 도움을 받는 등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이 크다.

조선족 같은 경우는 중국에서 따로 자치구역을 갖고 민족문화를 상당히 보존하고 있으며 한국어를 따로 배우지 않아서 한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한국어 문어체가 한자어가 워낙 많다 보니 한국어 학습이 유리한 반면, 고려인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한국에서 살아온 경우가 아니라면 한국어 암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조선족들의 경우 약간만 노력을 하면 한국어로 된 계약서 등을 읽고 쓰는 데 문제가 없지만, 고려인의 경우 한국어로 된 계약서를 자유롭게 읽고 쓰는 수준까지 가려면 공부를 상당히 많이 해야 한다. 하지만 언어의 장벽만 극복하면 사회적인 인식은 조선족보다는 나으므로 취업 및 거주 시 주변의 한국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진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고려인들에 대해 '소련 시절 강제 이주당한 동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지만 조선족은 그냥 '한국어 할 줄 아는 중국인' 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종 고려인들의 사연을 보고 외국국적동포법을 개정하자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문제는 그렇게 되면 조선족에게도 똑같은 혜택을 모두 주어야 하는 모순이 생긴다.

10. 대중매체 속 고려인

고려인에 대하여 한국 미디어에서 그렇게 크게 다룬 것은 없다. 따로 자치지역을 가지고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구가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닌데다가 아무래도 고려인 3-4세대 즈음 되면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해 현대 한국인 가운데 러시아에 익숙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도 있기 때문에 존재감이 영 약하기 때문이다.

1995년에 까레이스키라는 고려인을 다룬 드라마는 있었고, 당시 MBC에서 제2의 여명의 눈동자를 꿈꾸면서 엄청나게 밀어주던 드라마로 드라마 자체는 그럭저럭 볼만했다는 평이었는데 하필이면 모래시계 장녹수에 밀려서 대차게 말아먹었다.

문영숙의 소설 까레이스키, 끝없는 방랑에서는 1937년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로 강제로 이주당하는 고려인들의 힘겨운 삶을 다루었다.

허영만의 만화 아스팔트 사나이에서 악역인 고려인이 나오는데 러시아에 진출하던 천마 모터스에 대하여 훼방놓던 라이벌 기룡 모터스에게 매수당했던 것. 주인공 이강토가 난데없이 한국인으로서 긍지도 없냐고 하자 이 사람은 "난 한국을 조국으로 여겨본 적도 없는데 뭔 소리야?"라고 응수하는데 극중 얼음물에 빠져 익사한다. 이를 두고 한국만화의 이해라는 90년대 책자에선 민족주의에 치우쳤다고 비판한 바 있다.

팬들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스타크래프트 시리즈 미라 한이 고려인 계통이라는 떡밥이 있다. 러시아 억양이 강하기 때문.

웹툰 촉법소년에서 권창수가 고려인으로 등장한다.

10.1. 드라마 < 까레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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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하나안

루슬란 파크(Руслан Пак) 감독이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고려인 4세이다.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한국 기준으로 2012년 10월 11일 개봉했다.

고려인 4세 '스타쓰( 스타니슬라프)'의 인생을 바탕으로 한 내용으로 고아인 스타쓰는 주차장 관리 일을 하며 불량학생들과 어울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고, 결국 꿈꾸던 마약단속 형사가 된다. 하지만 경찰서에서의 부정부패에 환멸감을 느끼고 그만두고 결국 자신이 마약중독자가 되어버린다. 어찌저찌 결국 마약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인 '하나안(Ханаан, 러시아어로 가나안을 뜻함)', 즉 한국으로 가지만 그곳에서 다시 마약과 얽히게 된다.

고려인에 관한 내용보다는 마약과 방황, 부정부패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남자주인공 또한 고려인 4세이며, 첫 영화작품이었다고 한다.

캐나다 토론토영화제에 초청되었고, 하와이 영화제 아시아 영화진흥기구상, 대만의 타이페이영화제 최우수 신인감동상 수상을 수상했다.

하나한 공식 SNS계정

10.3. 모바일 게임 소녀전선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출신의 안젤리아라는 고려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본명은 "안나 빅토로브나 최"[36]. 중국 게임임에도 고려인 설정이 등장해서 한국 유저들의 관심을 받았으며, 실력있고 영향력 있는 조연의 모습으로 2017년에 첫 등장을 알렸다. 그러다 점차 비중이 늘어나더니 지휘관에 이어 제2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서사를 배정받으며 2023년 2분기 이벤트까지 활약한 후 생사불명이 된다. 이후 영전하 이벤트에서 사망하며 퇴장한다.

10.4. 좋좋소

백진상의 거래처 상대로 등장한다. 이름은 표토르 최.

10.5. 템빨

소설 속 게임인 'Satisfy'에서 통합랭킹 1위인 크라우젤이 카레이스키다.

11. 논란 및 문제점

11.1. 무국적자 문제

소련 해체 이전의 고려인들은 출신지가 우즈베크 SSR를 비롯한 각 연방구성공화국이었다. 즉 소련은 다양한 국가들의 강제 연합체였기에 소수민족 배척이 적었으며, 이에 소련의 한 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 해체 이후 각 개별국가들의 러시아어 배제 정책에 따른 정보 불충분, 대숙청으로 인한 서류 분실, 체제 전환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많은 고려인들이 새 국적 취득 신청을 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과거 소련 지역에 현재 전체 고려인의 12%에 해당하는 약 5만의 고려인이 무국적자 신분으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교육을 비롯한 기본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불이익은 그 자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KBS 2TV 추적60분 2006년 1월 4일 방영분에서도 무국적자 고려인에 대해 다룬 적이 있었다.

무국적자의 자녀는 무국적자가 되며, 이 경우 국제결혼 후 배우자의 국적을 취득하는 방법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거주하게 될 경우 무비자로 입국하게 되는데, 무비자 상태로는 경제적 생산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 출처.

우크라이나에서는 한국 대사관의 신분 증명이 있다면[37] 자국 내 무국적 고려인의 국적 회복을 지원해줄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11.2. 소련과 러시아, 고려인 등을 구분하지 못해서 생기는 차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개시 당일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방문한 사람 상당수가 고려인이었는데 반러, 혐러를 빙자해서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에서 이 전쟁을 가지고 고려인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당사자들 입장에선 황당한 인종차별 사례가 속출했다. # 그리고 재한 고려인들이 모두 러시아 본토 출신일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며,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출신도 많다. 그렇지만 이들의 소련 시절 국적은 소련이었지,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이 아니었다.

이태원 압사 사고 당시 고려인 희생자의 시신 운송 비용이 성금으로 전달되자 # 네이버 뉴스 댓글창에 불법체류자에게 무슨 보상이냐고 악플을 다는 쓴웃음 나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정작 고려인들은 H-2 비자나 F-4 비자를 받아서 장기체류가 가능하기 때문에 불법체류자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당연하지만 해당 희생자 역시 불법체류자가 아니다.

12. 오해

12.1. 중앙아시아인 러시아의 동양계 소수민족들은 고려인이다?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중앙아시아인[38]을 보고 고려인일 거라고 섣불리 단정 짓는 경우가 은근히 자주 보이는 편이다. 가령 카자흐스탄의 배구 선수인 사비나 알틴베코바 사진을 보고 고려인이 아닐까하고 추측하는 반응들은 물론이고[39], 키르기스인을 보고 고려인으로 단정 짓는 반응이 그 예시.

이런 착각은 중앙아시아를 백인종의 세계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령 한국 인터넷에서 소위 우즈베키스탄 미녀라고 떠돌던 사진들도 다수가 슬라브계 여성 사진인 것도 이런 오해를 부채질한다.[40]

그러나 사실 중앙아시아는 슬라브계 백인이 아니라 튀르크계 동양인 또는 유라시안이 다수이며, 흑인을 제외한 모든 인종이 다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상당히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보이는 유럽계 백인들은 대부분 19세기 이후인 제정 러시아, 소련 시절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온 러시아인들과 소수의 우크라이나인, 독일계 러시아인, 폴란드계 러시아인 등의 후손이다. 이들은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소수민족이다. 물론 고대에는 슬라브계는 아니지만 같은 백인 인종인 이란계 유목민들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했으나, 몽골 고원 및 만주 서부에서 지내던 튀르크인들이 지속적으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면서 결국 오늘날처럼 타지크인 및 슬라브계 이주민들을 제외한 중앙아시아 주민 대다수가 튀르크계 동양인 혈통이 된 것이다.

카자흐스탄 인구의 63%를 차지하고 있는 카자흐인은 튀르크계 민족이자 몽골계 혼혈로 전형적인 동양인에 가까운 외형을 가지고 있다. 카자흐스탄 인구가 1,950만명인데 고려인의 수는 10만 8천여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키르기스스탄 역시 동아시아인에 가까운 외모를 가진 키르기스인 비율이 전 인구 중 68%다. 고려인이 가장 많이 산다는 우즈베키스탄 역시 3,500만명의 우즈베키스탄 인구 중 고려인의 수는 20만명에 못 미쳐 우즈베키스탄 전체 인구 중 1% 미만이다. 당장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이슬람 카리모프의 사진만 봐도 잘 쳐줘야 유라시안에 가까운 얼굴이다. 즉, 중앙아시아에서 보이는 동양인들은 고려인이 아닐 확률이 훨씬 더 높은 것이다.

물론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동양인들의 외모는 엄밀히 말하자면 고려인 등 한국계보다는 옆동네인 독립국가 몽골의 할하인 등 몽골 제민족들과 더 비슷한 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완벽한 동아시아인 외모를 가진 카자흐인 키르기스인은 몽골 제민족[41]을 닮았으며, 유라시안 튀르크인인 우즈베크인과 투르크멘인은 같은 유라시안 튀르크인인 위구르족과 외모가 비슷하다. 소련의 중앙아시아 공화국 5개 민족[42] 타지크인만이 유일하게 동아시아인과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진 페르시아계 백인이다.[43]

중앙아시아 외에도 부랴트인, 사하인, 투바인 등 러시아의 동양계 소수민족들을 보고 고려인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13. 한국 내 고려인 거주자 및 거주지 현황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국내거주 고려인을 위한 통계를 집계하지 않으므로 대한민국 국내에 거주하는 고려인의 규모에 대한 공식적인 추산치는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출입국관리본부 통계월보(2016년 3월~2019년 3월 기준) 국내 거주 고려인 인구현황에 따르면 국내 거주 고려인은 2019년 3월 기준 83,890명으로 집계됐다. 출신국은 우즈베키스탄이 43%로 가장 많고, 러시아(35%), 카자흐스탄(16%), 키르기스스탄(3%), 우크라이나(3%)가 그 뒤를 이었다. # 최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여파로 대한민국으로 이주한 우크라이나 고려인의 숫자도 더 늘었다.[44]

14. 여담

15. 관련 문서


[1] 한국어 '고려 사람'을 그대로 음역한 표현이다. 강세를 살린 발음은 'Корё-сара́м [kɐˈrʲɵ sɐˈram\](카료 싸람)'에 가깝다. [2] 고려 사람. 표기를 우리말로 사용하는 몇 안되는 외국어 표기다. [3] 다수가 사할린 극동지방에 거주한다. [4] 그 중 대부분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에 거주한다. [5] 당연히 일본 땅이었던 사할린에는 일본인도 많았는데, 이들은 인구교환협정을 거쳐 99%가 철수했다. [6] 모 시사잡지에서 소련 붕괴 이후의 사할린 한민족 사회를 취재한 바 있는데, 이들은 이북 5도 출신이 많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의 정착과정과 달리 대부분 영호남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남북 분단 이후 북한 이주를 선택하기도 어려웠고,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서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소비에트 정부가 중앙아시아에서 데려와 파견한 고려인들에 대해 왜인지는 모르지만 뿌리 깊은 원한이 있다고 한다. [7] 때문에 러시아어로 대한민국에 대해 Корейская Республика로 번역하기도 한다. 공식적인 번역은 Республика Корея이다. [8] [kɐˈrʲejt͡sɨ\]. 한국인이 듣기에는 '까례읻스' 혹은 '까레이츠'에 가깝게 들린다. [9] 1863년이냐 64년이냐는 약간의 논쟁이 있다. [10]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준 열사의 아들. 망국 이후 저장성 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하고 이동휘의 영향을 받아 만주로 향했으며, 대한국민회의 중책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국민회 소속 사관학교 교장으로 활동하고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하였으며, 이후 러시아로 가 대한의용군을 수립했다가 자유시 참변 당시 체포되어 압송되던 도중 탈출했다. 군비단 병력이 포함되어 대한의용군이 재편되자 사령관직과 사관학교 교장직을 겸하며 원동해방전쟁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후술할 이유로 러시아를 떠나 중국으로 가서 국민혁명군에 참여하고 김홍일이 국부군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때까지는 김홍일과 같이 싸운 동지였지만,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로 국민당 좌파와 공산주의자를 숙청하며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국민당을 떠났다. 후에는 일본에게 잡히고 나서 한동안 연금당했다가 탈출했다. 1930년대 내내 행방이 묘연했지만 광복이 되자 38선 이남 한반도로 돌아왔고, 중도주의 성향인 신진당의 부당수로써 단독정부 수립 반대 운동을 하다가 김구가 암살되는 등의 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월북했다. 그리고 북한 정부 초대 내각에서 도시경영성을 비롯한 각 부처의 장관을 지내며 김홍일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섰다가 1954년에 사망했다. 외증손자 조근송씨가 조사한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김일성에게 숙청되어 사형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사후인 1990년에 민족통일상을 받았으며, 현재는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11]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육군 중장, 외무부 장관. 임정에 가담했다가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에서 싸웠고, 내전 종결 직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 가담했다. 임정과 공조하여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에 조력했고, 국부군에서 중장까지 진급하며 중일전쟁 당시 맹활약했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신생 대한민국 국군에 임관하여 북한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국군 제1군단의 초대 군단장이기도 하다. [12] 그래서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 극동 지역에는 우크라이나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인구에서 우크라이나계의 비중이 의외로 적지 않다. [13] "1938년의 한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고려인 1,000명당 42명이 사망했고 어린이는 5명에 1명꼴로 숨졌다고 한다. 다른 기록은 11,000여 명, 혹은 16,000여 명이 이동 과정에서 숨진 것으로 추정하는데,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질병 기아 등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까지 포함하면 훨씬 늘어난다."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② '죽음의 유배길' 6,500㎞ [14] 당시 국제 정세는 매우 험악했다. 1931년 만주사변, 1936년 일본의 반 코민테른 협정 체결, 1939년 할힌골 전투 소일국경분쟁의 사건들은 소련이 과민 반응을 보일만한 근거가 된다. [15] '마르꼬프채'로도 알려져 있다. [16] '고본'이란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하는 사업에 각자 내놓는 밑천을 뜻한다. '질'은 어떤 행위를 뜻하는 한국어 접미사다. [17] 참고로 개고기는 이슬람에서 금지하는 음식 중 하나지만 굶주리지 않고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기에 당시 체첸인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먹었다. [18] 2차 체첸전쟁 당시, 체첸반군들이 버스를 납치했는데 거기 타고 있던 두명의 고려인을 보고선 '소란을 부려서 정말 죄송하다'며 정중하게 사과를 한 뒤 고려인들만 풀어주었다고 한다. [19] 사실 리상조는 고려인 출신이 아니라 부산 출신이지만, 소련 망명 이후 소련에 정착하면서 고려인이 됐다. [20] 정확히는 경북 사람일수록 어릴 때 시골 생각이 난다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경상도지만 경남 바닷가 쪽인데 잘 모르겠다는 말이 많다. 경북 사람 얘기가 많아서 그렇지 강원도 영동 사람들도 알아듣겠다는 얘기가 있다. [21] 서울/경기 지역의 언어의 영향이 경상도와 마찬가지로 산에 막혀 약했기에 이런 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설이 있다. 이른바 '방언주권론'이다. [22] 소련엔 공식적으론 공용어 같은 건 없었다. 왜냐하면 소련은 만민평등을 지향하는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적으로만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15개 구성국 중에서 소련=러시아로 통할 정도로 러시아가 가장 면적도 넓고 인구도 비중도 많은 데다 철저한 중앙집권체제였던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가 곧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이기도 했기 때문에 사실상 러시아어가 공용어로 취급되었다. [23] 중국도 문화적인 동화주의는 약하다. 아예 한국어는 표준 규범이 있을 정도다. 문제는 그것을 중국 것이라고 하다보니 한국과 마찰이 생기며, 문화적으로는 동화시키지 않으니 이를 근거로 중국 정부에 충성을 주장하는 교육을 한다는 것이다. 시진핑 집권 이후에는 문화 탄압도 심해지는 추세다. [24] 그런데 러시아 센서스에 따르면 극동 연방관구에 사는 고려인 수는 2002년(61,946명)보다 2010년(56,973명)에 더 줄었다.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인 곳은 수도 모스크바가 있는 중앙 연방관구(동기간 16,720명 → 21,779명) [25] 다만, 러시아 해외정보국장이었던 세르게이 나리시킨은 그를 일본에서 일하는 불법체류자의 중요 대리인 중 하나로 지목했다. 이외에, 그가 중국에서 활동을 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검증되지 않았다. 그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26] 출처는 러시아어 위키백과 [27] 선거 결과 낙선했다. [28] 옐브루스 프로세서, ARM(CPU), 스팍(SPARC) 등 CPU 개발 회사 [29] 이소룡의 팬이었으며, 공연에서 "반자이"를 외쳤으며 (1990년 05월 루즈니키 스타디움 공연), 한국 음식을 좋아했다는 직업 동료의 기록이 남아 있다. [30] 한국명은 안제인이다. [31] 참고로 이 국시를 다른 사람도 아닌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했던 요리사인 미카엘이 구현해낸 적이 있다. 정확히는 오리지널 그대로는 아니고 배운 걸 주제에 따라 어느정도 응용한 것이다. [32] 정부 주관으로 한 때 고려인들의 영구 귀국이 이뤄져 안산 지역에 집성 아파트촌 등이 생겼다. 다만, 이조차도 1세대 본인에 한정해 혜택을 준지라, 2, 3세대는 한국 국적을 얻지 못하는 기가 막힌 사태도 있었다. [33] 5번 출구 우리은행 근처 파르투네라는 식당에서 주문 가능한데 온면과 냉면 모두 주문 가능하다. [34] 이런 점이 시진핑의 집권 이전에는 조선족 출신 가수 백청강이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에서 우승할 정도로 큰 문제는 되지 않았으나, 시진핑이 집권하고 중화 패권주의를 휘두르면서 한중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으며 인식을 심각히 악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35] 사실 조선족은 국적 상 중국인이 맞기 때문에 중국인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위 소분홍이라 불리는 중국인 특유의 과도한 자국 찬양과 한국이나 한국인을 무시하고 깔보는 조선족들이 많아서 인식이 더더욱 나빠졌다. [36] 빅토르 초이가 모티브다 [37] 제일 쉬운 방법은 조상의 제적등·초본 기록이 있고, 국내에 친척이 남아있을 경우다. [38] 한국인과 외모상 유사한 점이 많은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등 튀르크계 동양인들과 황백혼혈인 우즈벡인 등. [39] 카자흐인이다. [40] 우즈베키스탄의 백인 대다수는 이란계 민족인 타지크인이다. 카자흐스탄의 백인 대다수가 러시아계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41] 모골인은 제외. 이쪽은 파슈툰인, 타지크인 등 아프가니스탄 현지의 백인 민족들과 지속적으로 혼혈되어 전형적인 중동계, 남아시아계 백인의 외모에 가깝다. [42] 카자흐, 우즈베크, 투르크멘, 키르기스, 타지크 [43] 당장 타지크어도 어원이 비슷한 페르시아어를 소련 시절에 키릴 문자로 어느 정도 변형한 수준이다. 다만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라틴 문자로 타지크어를 표기하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아랍 문자로 타지크어를 표기한다. [44] 2001년 우크라이나 인구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고려인은 12,711명에 달하는데 이후 상당수가 한국으로 이주했다. 코리아중앙데일리(Korea JoongAng Daily)의 2023년 2월 5일자 기사에 인용된 대한민국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2022년 12월 말 한국에 체류하는 우크라이나인은 최소 5,205명이다. 그 중 3,438명은 우크라이나 고려인(Korean ethnicity)이며, 추가로 200~300명의 무국적 우크라이나 고려인이 한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 법무부는 또한 개전 이래 우크라이나 난민 최소 3,000명이 대한민국에 입국했다고 추산했다. 2023년 2월 24일 광주 고려인마을에 따르면 지난 1년간(2022년 2월 24일~2023년 2월 24일) 광주 고려인마을에 피난온 우크라이나 고려인의 숫자는 875명으로 대부분 여성과 노약자다. # # [45] 언어도 동북 방언과 가장 유사하고 식문화도 이북 식문화와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