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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항공기에서 촬영된 전선의 참호들 |
양측 참호 전선이 대치하면서 형성된 무인지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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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참호전( 塹 壕 戰, trench warfare)은 참호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전투를 말하며, 보통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지상전 양상을 일컫는다.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총검을 장착한 볼트액션 소총을 들고 온갖 군장 매고서 병사들이 참호에서 뛰어나와 적 진형을 향해 돌격하는 모습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1]2. 서론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2022)에서 묘사된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 |
당시 참호전의 본격적 발단은 1914년 9월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의 후퇴였다. 당시의 파리를 50여km 남겨둘 만큼 엄청난 진격속도를 보였던 독일 제국군은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프랑스를 빠르게 제압한다는 기존의 슐리펜 계획이 틀어진 채 연합군과의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말았는데, 이에 독일 제국군은 점령 지역 유지와 방어를 위해, 연합군은 독일군의 진공을 저지하기 위해 각자 참호의 건설을 시작했다.
철조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참호는 보병만으로 돌파하기 몹시 어려웠고 돌파에 성공하더라도 입는 인명 피해가 극심하다. 예컨데 솜 전투에서 영국군은 전투 당일에만 5만 8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 때문에 양측은 참호를 우회하려 시도했지만 사람과 말이 주요 이동 수단이던 당대의 기동성 부족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적 참호선을 우회하려 시도하다 돈좌되고, 거기 눌러앉아 참호를 파고 그걸 원래 참호와 잇는 것을 되풀이한 결과 끝내 참호선이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늘어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2]
서부전선 모든 곳에 참호가 설치되자 참호를 우회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해졌다. 결국 적 참호선을 뚫기 위해서는 제아무리 뛰어난 지휘관과 병사들이 있다 할지라도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취급하며 적 참호의 기관총 앞으로 보병들을 돌격시키는 방법만 남게 됐다. 수천~수만 명의 시체를 쌓으며 간신히 참호 하나를 점령해도 그 뒤에 적 참호선이 겹겹이 쌓여 있어 적의 증원군에게 다시 빼앗기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진격도 어려웠으며, 이런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현대에 흔히 쓰이는 공격 수단인 전차, 장갑차, 전투기와 같은 병기들은 전쟁 중반이 지나서야 정말 초보적인 수준으로, 제한적인 수량만 투입할 수 있었다.
결국 서부전선에선 서로 진격할 수도 후퇴할 수도 없는 지지부진한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 양측 간 참호 사이의 황무지는 진흙탕 죽음의 무인 지대가 되었고, 병사들은 살인적인 백병전을 빈번하게 치러야 했으며, 그럼에도 전선은 단 몇 km조차 변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이런 특수한 전장이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고[3] 이로 인해 참호전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쟁 양상과 그 당시의 전후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3. 참호전의 역사
3.1. 원시적 형태의 참호전
제1차 세계 대전과는 병기도 전술도 달랐지만 '참호전'은 고대부터 존재했다. 고대부터 체계적이고 효율성 높은 모습을 보였던 로마 군단의 경우, 야전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개인 무장에 야삽이 포함되었다. 물론, 고대 로마군의 다른 장구류들이 그랬듯, 야삽 역시 개인이 구매하여야 하였다.기록에 남아있는 역사상 최초의 참호전은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쓴 것이었다. 그는 첫 번째 회전에서 참호에 병사를 대기시킨 뒤 미트리다테스군을 맞아 싸워 격퇴하였고, 두 번째 회전에선 참호를 판 뒤 미트리다테스군을 그 쪽으로 몰아붙여 승리할 수 있었다. 삼국지의 조조도 참호를 이용하는 전투방식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는 완성 전투에서 장수와 싸운 뒤 패주하는 과정에서 추격해온 유표, 장수 연합군을 맞아 참호를 팠다. 그 뒤 병사를 그 밑에 대기시켜 연합군이 다가오자 그 참호에서 병사를 내보내는 기습작전으로 성과를 거뒀다. 또한 이슬람을 세운 무함마드는 메디나로 쳐들어온 메카의 원정군을 상대로 참호전을 펼친 끝에 이겼다는 기록도 있다.
가장 원시적인 참호전은 중세 유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머스킷을 비롯한 보병화기 그리고 공성포를 비롯한 화포가 발전하자, 병력을 직사화기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점차 중요해졌다. 공성측에서는 수성측에서 발사하는 직사화기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고 적 요새로의 포위망을 점차 좁혀가기 위해서 참호를, 수성측은 요새를 보조하는 수단으로 참호를 적극 애용했다. 그러나 총알과 대포가 빗발치는 전장에서 땅 파는 일은 더러움을 떠나서 목숨의 위험도 컸다. 이에 참호 건설과 적 성벽 파괴를 전문으로 하는 공병이[4] 고액의 보수를 받고 용병으로 활동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성형 요새 문서에서 당대 공성전을 참고.
전열보병 시기가 되자 화기의 발전으로 엄폐의 중요성, 더 나아가 야전 엄폐물의 중요성이 더 부각됐다. 현대인의 통념과 달리 그 당시 장교들이라고 엄폐물을 무시하며 싸울 정도로 무식하거나 꽉막히진 않았다. 이는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건설된 15km 가량의 참호 방어선, 19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리스본 근방에 참호선(Torres Vedras 방어선)을 건설한 사례에서 알 수 있다. 다만 당대 전쟁의 특성상, 공성전이 아니면 참호전을 치를 기회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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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전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전쟁 규모의 변화에 있다. 개인화기의 발전으로 '총을 든 사람의 수 = 군사력'이라는 간략한 공식은 매우 이른 시기에 성립됐다. 그러나 보급 역량의 부족과 세금 문제로 군 규모를 거대하게 유지하기 어려웠으며, 징병제가 도입된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도 각국은 보급 문제로 단기결전을 선호했다. 즉, 참호에 병력을 주둔시켜야 될 상황을 기피했으며, 장기전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웠고, 장기전을 감당할 만큼 전략목표들의 가치도 크지 않았다.
철도와 해상 운송의 발전, 기계화와 식민지를 통해 군의 보급 역량이 증가하자 유럽 각 국의 군 규모도 급격히 커지기 시작한다. 야전에 더 많은 병력을 장기간 배치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화포의 사거리도 증가하게 되자, 대규모 병력을 안전하게 그리고 값싸게 주둔할 방법으로 참호가 주로 활용됐다. 물론 후술할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이 당시의 참호도 단기결전이 실패하자 어쩔 수 없이 건설하게 된 것에 가깝긴 하다.
3.2. 전간기: 신식 화기 앞에 드러난 기존 전술의 한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점만 해도 참호전을 주 전장으로 생각했던 나라는 없었다고 봐도 좋으며, 서부전선에서 펼처진 대규모의 참호전은 의도된 전쟁 양상이 아니었다. 흙으로 만든 참호는 (어디까지나) 요새나 전략적 고지 및 하천 방어를 보조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참호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는 일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그 당시의 유럽 각국의 주된 군사 교리는 나폴레옹 시기와 보불전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적국이 동원 가능한 수보다 더 많은 병력을 더 빠른 속도로 전장에 배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더 나아가 참모를 활용해 대규모 군대를 얼마나 잘 통제할 수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왔다. 이에 따라,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각국의 전략도 그 이전과 같이 대규모 회전을 통해 승리를 취하는 방향에 가까웠지, 적국과 피비린내나는 장기전이나 더 나아가 적의 도시, 전략 거점이나 요새도 아니고 참호 한 곳을 얻겠다고 수 년간 수십만 명씩 죽어나갈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편, 1차 대전에 앞서 남북 전쟁, 미국-스페인 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각 식민지에서의 소규모 전쟁들은 장차 보병전의 양상이 어떻게 바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전쟁들이었다.
남북 전쟁에서는 미니에 탄과 강선 소총, 후미장전식 화포 등의 전장 도입으로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이 월등히 증가하게 되었고, 동시에 신식화기를 갖춘 진영의 화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됨에 따라 전투의 양상은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을 살리거나 신식 화기로 일방적 전투를 펼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남북전쟁에서는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을 극대화시킨 저격 병과가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두 차례의 보어 전쟁에서 영국군은 민병대에 불과한 보어인의 저격과 게릴라전에 완전히 농락당해 영국군이 자랑하던 레드 코트의 일제 사격과 포병 화력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참패하기도 하였다.
두 전쟁이 준 교훈은 유럽 각국에 반영됐다. 기존처럼 많은 수의 인원에게 플린트락 수준의 화기를 주는 것보다는, 잘 훈련된 병력들에게 장거리 교전이 가능한 신식 소총을 쥐어주는 것이 더 효율적임이 증명됐다. 재장전 속도와 명중률이 우수해진 만큼, 오합지졸들의 일제 사격보다 잘 훈련된 보병 개개인의 자율 사격이 더 효율적임도 증명됐다. 그리고 보병 화력이 증대한 만큼, 과거 전열보병 시기처럼 대규모 보병 편제는 전술적으로 불필요하고 인력 낭비임도 증명됐다.
따라서 당시 강대국들의 핵심 과제는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1) 얼마나 많은 양의 병력을 동원 가능한가 2) 동원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는가 3) 상비군을 위한 신식 화기의 질과 양이 적보다 우월한가 4) 소규모화된 편제를 통솔하기 위한 장교의 수는 충분한가.
실전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른 영국군과 미군은 타국보다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었다. 가령 영국은 남아프리카 전선에서 얻은 다양한 경험들을 군제 개혁(1906년 할데인 개혁 Haldane Reforms)부터 주력 제식화기, 군복, 병사 훈련 등 다양한 방면에 적극 반영했다. 이러한 성과는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초기 영국군이 보여준 성공적인 분투로 가치가 증명된다.
한편, 남북 전쟁을 거쳐 미국-스페인 전쟁, 최종적으로 러일전쟁에 이르자 기존의 전술이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다. 병사 개개인의 화력이 증가하였으니 기존의 통념대로 '더 많은 병력 = 더 강한 전술적 이점'이 성립되어야 했으나, 기관총과 야포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의 발전은 기존의 통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화망을 촘촘하게 구성하기 위한 보병들의 밀집 행렬이나, 적의 재장전을 노린 일제 돌격은 적에게 좋은 사격 연습이 될 뿐이었다. 기존까지의 전술론 참호와 요새로 잘 방어된 적 진지를 점령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움이 증명됐고, 경제적 및 인명적 비용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엄폐물과 참호가 활용된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보자. 남북 전쟁의 프레더릭스버그 전투와 게티즈버그 전투는 낮은 돌담과 단순한 참호만으로도 적에게서 충분한 엄폐를 제공하고, 더 나아가 공세 측을 일방적으로 학살할 수 있음이 드러난 전투였다. 미국-스페인 전쟁의 산 후안 언덕 요새 전투는 더 충격적이다. 해당 전투에서 미국과 스페인의 병력비는 대략 10:1이었으나, 사상비는 대략 2.5:1로 미군측의 뼈아픈 승리였다. 이는 규모의 우위만으로 참호와 신식화기를 상대하기 역부족임을 보여줬다. 궁극적으로 러일전쟁이 되면, 화포와 참호로 무장된 요새 몇몇 곳을 점령하기 위해선 국가의 경제가 휘청일 수준의 군비 지출이 발생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참호전이 점차 흔해지고 있었으나, 정작 유럽 각국은 참호전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러일전쟁을 참관한 프랑스 및 영국 군사전문가들은 눈 앞에서 수많은 인명이 참호전에 소모되는 것을 목격하고도 기존 전술에 변화가 필요함을 느끼기는커녕, 인종차별적인 선입견으로 전쟁을 평가하기 바빴다.[5]
그러나 미국과 영국이 비싼 교육비를 치르고 전훈을 얻은 것과 대비해서, 프랑스나 독일 제국, 이탈리아 등 저런 진흙탕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는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은 신식 화기로 식민지인을 학살하거나, 마치 워게임을 하듯 모든 것을 예측해서 적국을 압도하는 '수학적인 전쟁'을 '장차 현대전의 모습'이라 받아들이게 되고, 이는 한 번의 회전을 통해 적을 일망타진하면 전투를 자연스레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가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런 진흙탕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을 전략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여겼다. 제1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유럽 대륙국들의 군 전략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것은 나폴레옹과 프로이센 왕국군이 보여준 기동술과 용병술이었다. '적국과의 지지부진한 장기전 = 전략적으로 기피해야 될 상황 = 작전이 잘못되었음 = 이런 작전으로 전쟁을 하는 건 아마추어'라 여긴 것. 그렇기에 전간기 유럽 각국들은 적국을 개전부터 압도하기 위한 작전 입안에 매달렸지, 전쟁이 장기화되었을 경우를 크게 상정하지 않았다.
특히나 이 '계획적'인 면에 있어서 각 국가가 짜던 계획은, 단 하나라도 재량껏 취소하거나 변경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독일은 물자 수송시간표를 수정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영국이 보호하던 벨기에를 치는 계획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대로 전투를 속행했으며,[6] 결국 방어적 교리와 견고한 요새로 무장한 벨기에를 뚫지 못하며 독일은 시작부터 계획이 크게 어그러진 채로 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또 손자병법에서도 강조되듯이 전쟁은 무리해서라도 빨리 끝내야 하며, 공성전과 장기전은 수행하는 것부터가 큰 피해이기에 정말 가능한 한 피하는 게 맞다. 즉 전략적으로 지극히 옳은 판단을 한 것은 맞다. 허나 유럽 대륙국 모두 서로 같은 생각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고, 기술의 발전과 시스템의 변화로 촉발된 생산력 폭증과 동원능력[7]을 너무나 과소평가하였으며, 서로가 서로를 원주민 학살하듯 손쉽게 상대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과 오만, 판단 미스가 겹치고 쌓이고 쌓이다 끝끝내 유럽 각국이 전쟁에 돌입하게 되면서 비로소 터지게 된다.
3.3. 예상외로 쓸 만했던 참호
1차 대전의 주역이 될 각국이 참호의 효율을 몰랐던 것은 아니나, 이들에겐 참호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할 이유가 부족했다.일단 엘랑 비탈 교리로 유명한 프랑스군은, 보불전쟁의 복수심에 불타 방어보다는 독일에 대한 복수에 중점을 두었으며 공세를 멈추는 것을 최악의 행위라 여겼다. 나폴레옹 시기부터 이어져 온 공세 중심 백병주의는 보불전쟁과 러일전쟁 등에서 이미 화력주의에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복수심에 불타던 프랑스군[8]에게는 공세를 멈추고 수비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참호전을 벌일 전장이 다름아닌 자국의 영토였던 만큼, 프랑스는 참호전을 질질 끌기보다는 공세주의로 해결해버리고 독일과 맞서 싸워 그들을 무너뜨리고 싶어 했다.
봄이 되면 말 그대로 뻘밭이 되기까지 하는 넓디넓은 영토에서 싸움을 펼칠 러시아군은 참호와 같은 고정 진지를 활용하기 쉽지 않았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을 통해 참호와 기관총의 효율을 알고는 있었으나, 러시아에겐 참호를 파고 화력 자원을 갈아넣을 정도로 보급선이나 재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고, 특히 동부전선 특유의 기동전에선 이를 적재적소에 활용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러시아와 독일의 동부전선에서는 참호전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독일 제국군은 러시아 제국과 연합군이 양쪽에서 오는 양면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클라우제비츠의 사상과 보불전쟁의 승리 요인을 참고해 최대한 빠르게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즉 독일군에게 상대의 방비에 맞서 같이 참호를 세운다는 선택지는 사실상 전쟁의 승리를 포기한다는 선언에 가까웠고, 때문에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과 같이 꼼꼼한 전투 계획을 기반으로 속전속결식 기동전을 선호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경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실전을 치른 적이 거의 없었다. 보스니아 점령 당시 보스니아에 진주하여 보슈냐크인 민병대를 제압한 것과 의화단 운동 때 숟가락 얹기용으로 해군 육전대 조금 보낸 적이 있기는 한데 이걸로 전훈을 얻을 수가 없다. 거기에 더해 세르비아 측과는 제국 내부 슬라브계 전사들의 전투 거부 등으로 골머리를 앓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엄연한 열강의 군대인데도 돈이 없어서 이런 쪽에 대한 대비가 미비했다.
이탈리아 왕국군 역시 알프스산맥이라는 천혜의 방어선이 있는 데다가 가상적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전쟁을 하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향해 공세를 취하는 전략이었기에 참호전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다.
예외는 영국군과 벨기에군이었다. 영국군은 두 차례의 보어 전쟁으로 우습게 보던 보어인들에게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을 낭비하며 개고생을 하던 경험을 기반으로 값비싼 교훈을 얻어 현대전에 빠르게 적응하였고, 벨기에군은 독일군에 비해 수적, 질적 열세인 상황을 극단적인 방어적 교리로 완화하려 했다.
특히나 이 중 벨기에는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전쟁이 시작될 경우, 우회로 확보를 위해 독일이 벨기에를 위협할 것임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전 국토의 전략적 거점을 요새화해 좁은 영토와 적은 인구수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방어적 교리를 중시했던 벨기에의 노력으로, 벨기에 전선의 기지와 참호는 1차 대전 초기부터 독일군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슐리펜 계획으로 최대한 빠르게, 딱 봐도 약해 보이던 벨기에를 통과하려 하였던 독일에겐 벨기에의 저항은 상상도 못한 큰 변수였고 결국 독일은 벨기에의 요새와 참호를 공략하기 위해 특수 제작한 공성용 중포를 긁어모으거나 비신사적인 전략까지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벨기에군이 참호와 요새로 격렬히 저항한 만큼, 독일군은 무고한 벨기에 시민들에게 앙갚음했다. 그러나 벨기에군은 이미 독일군의 계획을 초장부터 붕괴시켜버렸으며, 전력을 가다듬은 프랑스와의 전선이 고착화됨에 따라 진격 가능성이 사실상 말소되어버린 독일 역시 결국 계획에도 없던 참호전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1914년 8월에 있던 몽스 전투에서는 영국군이 참호를 활용해 효율적으로 방어했다. 당시 영국군은 직업군인으로만 이뤄진 정규군이었으며, 그중에서도 몽스 전투에 참전한 영국군은 다수의 식민지 전투 경험을 통해 깊게 판 참호와 기관총의 위력을 체득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의 군대들이 도랑을 끼고 전투를 펼치며 허리를 겨우 숨길 정도로 참호를 파고 있을 때, 영국군은 독일군과의 첫 번째 전투부터 마을을 요새화하고 몸을 완전히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참호를 파는 철저함을 보여주었다. 영국군은 몽스 전투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매우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사상자 비율 또한 압도적으로 우월했다. 비록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요청으로 파리 사수와 전선 보강을 위한 전략적 후퇴를 했지만, 파리를 향해 거침없이 진격하려던 벨기에 방면의 독일군에겐 벨기에의 방어선과 영국의 참호가 골칫거리였음은 틀림없다.
이렇게만 보면은 독일이 벨기에와 영국에게 호되게 당하고 뒤늦은 교훈을 얻은 것 같지만, 사실 독일은 유럽의 타국에 비해 전쟁 초기부터 참호에 깊은 관심을 보인 나라 중 하나였다. 독일은 1906년부터 기동훈련에 철조망과 참호를 활용했으며, 보어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드러난 참호전의 이점을 빠르게 학습했다. 그리고 1914년에는 보병의 군장에 참호 도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군이 참호를 건설하지 않은 것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기세를 살려 최대한 빠르게 전쟁을 끝내려고 했던 것이지, 참호를 팔 줄 모르거나 '촌스럽다'고 여겼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파리를 빠르게 점령하려고 계획한 마른 전투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들은 전선을 보강하기 위해 다른 국가보다도 더욱 효율적이고 무자비한 참호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9] 이미 승기가 사라지기 시작한 이상 독일군은 더 이상 이기기 위한 진격을 택하지 않았고, 지지 않기 위해 그들은 승기 없는 전쟁에서 그나마 유리한 협상 위치를 얻고자 전쟁이 몇 년이 이어지든 전선에 아예 틀어박혀 있을 작정이었다.
3.4. 우연과 악재가 만들어낸 참호전선
어디까지나 전략적 거점의 방어 수단에 불과하던 참호의 규모를 참호'전'이라는 일련의 대전략으로 확대시킨 계기는 문서 상단에 서술된 마른 전투의 후퇴였다.타넨베르크 전투의 승리 덕분에 일약 스타로 떠오른 독일의 장군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동부전선에 집중해서 러시아 제국을 우선 무찌르자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제1차 이프르 전투에서 별다른 성과를 못 보였던 서부전선의 병력 일부가 고전을 겪는 오-헝군을 돕는 동시에 동부전선에서의 주도권을 강화하기 위해 동부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서부전선의 독일군 병력이 줄어들었으니 프랑스와 영국에겐 이보다 좋은 공세의 기회는 없었다. 독일군의 공세를 막는 데만 급급하던 프랑스군은 벨기에 전선을 유리하게 정리하고 싶어 14년 12월 동계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화력의 부족으로 독일군을 밀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영국군은 포탄 부족과 포병의 유연하지 못한 지원 사격 때문에 기껏 거점을 빼앗았다가 독일군에게 다시 내주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프랑스군은 예비병력의 활용에 문제가 있어 일선병력이 괴멸되고 나서야 후방병력이 전선에 도착하여 점령한 거점을 쉽게 내주곤 하였다.
또한 전쟁 막바지인 1918년에서야 연합사령부를 구성할 만큼 영국과 프랑스는 하나의 전쟁을 별개로 치르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약속된 화력 지원이 이뤄지지 않거나 공세를 별개로 진행하여 각개격파당하는 일도 허다했다.
반면 독일군은 부족한 인력으로 넓은 전선을 방어해야 하는 만큼 참호를 더 깊게 파고 진지를 강화했다. 마른 전투가 실패로 끝난 뒤 1914년 9월 14일 몰트케는 현재의 전선에 요새를 건설하고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비록 마른 전투가 실패했지만 전략적 후퇴를 하기엔 벨기에 전선이 지니는 가치가 너무나 중요했다. 양측 모두 이곳을 내어준다면 진격 루트가 알자스-로렌이나 아르덴 숲을 통한 선택지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자는 베르됭 전투에서 알 수 있듯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기에 치열한 접전이 펼쳐진 곳이며, 후자는 험난한 지형의 아르덴 숲을 통해 진격해야 하는 부담이 따르는 만큼 진격로로 선택하기 어려웠다.
결국 독일군은 협상군의 거친 공격을 끈질기게 방어해 냈고 지도상으로 봤을 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황만 계속되었다. 또한 적이 참호를 우회하지 못하도록 해야 해서 참호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독일과 협상국의 참호는 바다로까지 이어졌다.
참호의 규모가 증가하면서 필요한 인력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했고 더 이상 참호와 요새를 우회할 길을 찾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선 참호 전선을 뚫을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의 기술로는 참호 돌파 시도에 막대한 포탄과 병력이 필요했던 만큼 전쟁은 얇은 참호선 곳곳을 뚫기 위한 참혹한 국지다발전 양상으로 계속 이어졌다.
한편 1915년 이탈리아가 뒤늦게 전쟁에 참전하자 또 다른 양상의 참호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1915년까지 눈치만 살피던 이탈리아는 기습을 통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공략하려 하였지만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오-헝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다. 수 차례의 이손초 전투는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으며 평지와 요새에서 펼쳐지던 전투는 갈수록 교착 상태에 빠져 험난한 알프스 산맥에서 전선이 형성되었다.
산악지대는 방어에 유리한 것이 장점이나 물자 수송과 거점 형성에 어려움이 있어 장기적인 대치 상황에 부적격한 것이 큰 단점이다. 그러나 영토를 한 치도 내주기 싫었던 양측은 알프스 산맥의 험준한 봉우리를 따라 곡괭이를 이용해 암벽에 참호를 건설하고 산비탈에 케이블카를 건설해 물자를 수송하고 어떻게 올라갈지도 모르겠는 봉우리에 야포를 매달아 인력으로 끌어올리는 근성까지 보였다.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전투는 어떻게 보면 오히려 서부전선보다 더 처절했다. 포격이 일어날 때마다 포탄에 맞은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큰 인명피해를 냈고 물자 보급의 어려움과 더불어 고산병과 알프스 산맥의 혹한은 병사들이 쉽게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다 '하얀 금요일'이라고 불린 1916년 12월 13일에는 약 만 명이 넘는 병사가 눈사태로 인하여 죽음을 맞기도 하였다. 이날 벌어진 참상은 적을 몰살하기 위해 양측이 서로에게 곡사포를 쏘아 인공적으로 눈사태를 유도했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인 죽음이었다.[출처]
사실상 이탈리아 전선의 참호전은 참호전 + 고산지대라는 최악의 환경에서도 양측이 억지로라도 뭔가를 쥐어 짜내고자 한 현실도피성 발버둥인 셈이었다. 이때 이탈리아군은 타국에 비해 군법 위반에 대한 처벌 강도가 훨씬 높았는데 이는 열악한 환경에서 군대의 사기를 억지로라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정된다. 결국 이탈리아 전선 개전 이후 2년 넘게 양군은 서로의 방어선을 제대로 뚫지 못해 대치만 계속 이어갔고 양군이 제대로 승부를 보게 된 시점은 카포레토 전투로 전선이 이탈리아 영내의 베네토 평원으로 옮겨온 마지막 1년이었다.
이러한 참호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병사 개개인이었다. 가장 먼저 식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1914년만 해도 톱밥과 분필이 든 말라 비틀어진 빵을 먹는 일은 없었다. 분필 가루를 넣은 이유는 빵을 흰색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몇 날 며칠간 광범위한 포격을 가하다보니 취사 시설이 전선과 점점 멀어지며 규칙적인 식사도 점점 힘들어졌다. 포탄과 독가스, 저격수로 전우가 죽어가니 사기는 바닥을 칠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공세의 계획일이 다가오면 적이 쏘는지 아군이 쏘는지 알 수 없는 포탄세례가 지속되었으며 기관총 세례를 뚫고 적의 참호를 점령하더라도 통신의 미비로 아군의 포탄이 날아오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참호 근무 부대를 교대하는 제도는 전쟁 중 후반기에서야 들어섰는데 이로 인해 제대로 된 휴식과 영양 섭취가 불가능한 병사들의 위생 상태는 매우 열악하였다. 비가 내리면 땅은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밭으로 변했고 참호에 고인 빗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가 병사들이 참호족(Trench Foot)이라는 병에 걸리기도 했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포탄과 공격해오는 적에 대한 압박감으로 셸쇼크(Shell Shock)라는 일종의 정신공황 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아군 참호와 상대편 참호 사이는 무인지대라고 불렀는데 그 사이에는 살아있는 것이라곤 시체를 파먹는 쥐와 벌레뿐이었기 때문이다. 미처 수습되지 못한 병사들의 시체와 절규를 내뱉는 부상자,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 빗물이 고여 시체와 병균, 벌레와 독가스를 머금은 독극물로 채워진 죽음의 구덩이와 이런 무인지대를 바라보며 참호 속에서 총소리와 포탄 소리에 미쳐가는 병사들이 널려 있었다.
가시성이 떨어지는 밤이 되면 무인지대에서도 병사들이 활동을 했다. 적 참호로 주기적으로 정찰을 떠나고 전언을 전하거나 철조망과 전선 등을 다시 정비하였으며 그때까지 살아서 신음하고 있는 운 좋은 부상병을 수습해 후송해오기도 하였다. 또 저격수들은 보통 동틀 무렵 무인지대로 올라가 무인지대를 기어다니며 부상병들을 구하거나 철조망 등을 수리하다 미처 참호로 귀환하지 못한 적군을 상대로 저격 활동을 수행하였다.
3.5. 왜 서부전선에서만 생겨났나?
동부전선과 발칸, 중동에서는 참호전이란 상황이 없었다. 서부전선에 비해 지형이 험하고 넓어 전선이 엄청나게 길고 보급도 서부에 비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원래 전쟁은 보급이 핵심이지만 참호전은 다른 전투양상보다 보급이 훨씬 더 중요했다. 참호전 상황에서는 사망자도 많지만 소모되는 생필품 수량도 엄청나게 많았다. 전쟁이 몇 년씩 장기화되며 도시에 생필품 부족현상이 길어졌고 민간의 삶의 질도 낮아졌다. 하물며 동구권 국가들은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부유한 나라도 아니었다. 특히 러시아는 민심이 최악이었다.
1차대전 동부전선은 러시아의 엄청난 수의 야포가 상징적인데 이건 재정이 나빠져 기관총 같은 신문물을 들여올 수 없어 낡은 무기를 다 동원한 것 뿐이다. 물론 러시아군도 러일전쟁의 전훈을 통해 기관총의 유용함을 알고 있었고 맥심 기관총을 국산화한 PM M1910과 같은 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해당 기관총은 사격 방향을 바꾸기 위해 가대 전체를 움직여야 하는 등 여러 한계가 있었다. 수량도 그리 넉넉하다고 볼 수는 없었으며 경기관총은 외국에서 공여받은 소수의 루이스 경기관총이나 쇼샤 경기관총 정도를 운용하였을 뿐이다. 이 문제는 소련 성립 후 개량을 거쳐 개선된다. 동부전선에선 협상국과 동맹국 양측 모두에게 충분한 기관총이 사용된 것도 아니라 기관총 유효 사거리 이내에서 교착상태에 빠지는 일도 적었다.
그래서 동부전선의 전투양상은 서부전선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인식된 참호, 철조망, 벙커, 저격수, 기관총이 조합된 공성전이 아니라 기병, 장갑차, 장갑열차 등을 동원한 기동전이었다. 설령 참호로 된 전선이 형성되더라도 중간지대가 너무 넓어서 그 안에 사는 민간인들이 평상시의 생활을 유지하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동부전선 등에서는 전차 등장 이전부터 장갑차가 전차 노릇을 하며 활약했고 전통적인 기병도 현역으로 활동했며 전투마차인 타찬카가 널리 사용되었다. 기관총과 철조망, 지뢰, 참호, 전차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까지 기병이 계속 존속했던 것은 이러한 서부전선 이외 전역에서의 경험 탓도 있다.
그렇다고 동부전선이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서부전선의 병사가 시체와 진흙 사이에서 구르며 참담한 식사와 취침을 해야 했다면 동부전선의 병사는 험난한 겨울 기후와 딸리는 보급선과 함께 눈 먼 포탄 세례를 피하느라 처절하게 싸우고도 아무것도 못 먹고 굶어야만 했다.
4. 기본적인 양상
4.1. 방어선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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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 참호(첫 번째) 전장에서 주변의 것들을 모아서 만든 참호 '이상적' 참호(두 번째) 배수시설과 묶인 호안이 있는 시설이 좋은 참호. '습지' 참호(세 번째) 주로 참호에 물이 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면 위에 만듦. |
벽은 닭장용 철망이나 양철 슬레이트, 모래주머니 따위로 무너지지 않게 보강을 하고 가능하면 배수로도 팠지만, 그건 여유로운 상황에서 넉넉한 인력과 보급을 동원해야 가능한 것이었다. 총알이 날아오는 상황에서 급조한 참호는 꼼짝없이 흙바닥에 흙벽이었다. 깡으로 바닥을 파서 참호를 지어야 했기에 여름에 땅이 진흙뻘밭이 되어버리거나 겨울에 땅이 얼기라도 하는 날에는 고생이 더욱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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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Parapet)
적 방향을 향한 방어 구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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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장(Parados)
후방을 향한 방어 구조물. 만에 하나 참호가 점령당했을 시 적군이 아군 방향으로 사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았다. 급조 시 생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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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estep
사격 시 올라서는 발판. 우천 시 걸터앉아 반대쪽 벽에 발을 걸치는 등 도랑이 된 참호 바닥에서 몸을 이격시키는 중요한 역할도 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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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nd Level
땅바닥. 그러니까 참호를 파기 전 땅의 원래 높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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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 Board
참호 바닥에 까는 재료로 가장 널리 쓰였던 나무건널판. 주로 여분 탄박스를 해체하여 사용했으며 이것 말고도 군용 수레를 해체하여 나온 잔해나 미군처럼 전투식량 깡통 따위를 넓게 펴서 깔기도 했다. 걸핏하면 진흙진창이 되는 참호 바닥에 꼭 깔아야 했던 필수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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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p
배수로. 바닥 아래에 시공하여 빗물과 각종 하수를 배출한다. 당연히 전장에서 참호 바닥 아래 배수로를 시공할 여유는 거의 없었으므로 배수로가 없는 일반적인 참호에 있던 병사들은 바닥에 물이 차거나 참호가 침수되면서 참호족에 시달려야 했다.
'일반적' 참호와 '이상적' 참호는 모두 땅 밑 깊게 파지만 '습지' 참호는 물에 잠기는 일이 많기 때문에 땅을 얕게 파고 부족한 엄폐는 여장과 배장을 높게 쌓는 것으로 해결한다. '이상적' 참호에는 배수로를 깊게 판 뒤 발판 역할을 하는 Duck Board를 깔아 마른 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습지' 참호는 바닥이 물에 잠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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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7월,
솜 전투의 체셔 연대 병사들 경계병이 Firestep에 올라가 전선을 살피는 동안 아무렇게나 누워서 새우잠을 자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
후방 참호라면 그나마 교통호에 딸린 비교적 넓은 지하 유개호에서 침대 위에 누울 수 있었지만 전방이라면 정말 나무판자 깔린 기다란 구덩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좁고 축축하고 차가운 곳에 오랜 기간 동안 노출된 병사들은 적군뿐만 아니라 온갖 질병에 맞서 싸워야 했다.
사실 잘 구축된 참호건 급조된 참호건 사람이 지낼 만한 곳은 전혀 아니었다. 더욱이 참호전은 몇 주에서 몇 달까지 전선이 유지되었다. 그래도 양쪽 다 주기적으로 최전방 참호에 있는 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시켰다. 짧게는 하루 이틀, 보통 2주 안에 교대했다. 아무래도 체력 소모가 심한 편이니 인력이 되면 계속 교대하는 건데 이것도 예외 상황은 있어 어떤 부대는 6달 동안 최전방 참호에서 지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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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군·방어군 모두 여러 참호를 파고 전면에는 대규모 철조망을 참호에는 기관총을 설치하여 적의 공격을 막는다. 이후로 쇼샤처럼 소대 혹은 분대지원화기로서 경량화된 경기관총도 나오지만 이 무렵의 기관총은 무겁고 덩치가 큰 수랭식 대대 지원 화기인 중기관총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거의 몇백m마다 하나 정도만 놓여 있었다.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에 야전 운용 시에는 전세대의 기관총인 가드너나 노덴펠트처럼 전용 포가가 필요한, 마치 나폴레옹 시기의 포병대처럼 운용해야만 했다.
실제로 기관총 반은 포병용 조준기를 보급받아서 마치 포병처럼 운용했기 때문에 광대한 참호망을 전부 커버하기에는 설치 비용에 비해 효과가 상당히 미미했다. 기관총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이걸 보병이 맡느냐 포병이 맡느냐로 논쟁이 벌어졌다. 참호선 곳곳에 기관총호를 따로 만들게 된 것은 1915년 전후 시점부터로 이 무렵부터 전선 곳곳에 기관총호가 나눠 만들어져갔다.
또한 참호 내부 시설은 몰라도 참호 외부 구조물(철조망, 모래주머니 등)은 저격수나 포격으로 인해 전선이 고착되면 증축하기가 곤란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간소화되었다.
한편 참호 방어선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국가마다 양상이 달랐다. 프랑스군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참호를 적에게 공세를 가하기 위한 단기 거점으로 여겼다.
반면 침략자 입장인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러시아를 물리치는 동안 서부전선에서 시간만 잘 끌어준다면 언제까지든 눌러 앉아 있어도 좋다고 여겼다. 전쟁 초기 (상대적으로 형편이 괜찮았던) 독일 측 참호는 전등과 침상까지 배치되어 있었던 반면 프랑스군은 참호에서의 휴식은 프랑스 영토를 수복한 뒤에 하는 것이라 여겼다. 참호와 무인지대 간의 거리도 각국마다 차이가 있었는데 가령 영국은 적 참호와 최대한 가깝게 건설하여 무인지대를 최대한 줄이는 것을 주 전략으로, 프랑스는 무인지대를 최대한 연장시키고 포병 화력으로 적을 타격하는 쪽을 선택했다. 물론 프랑스군은 본토에서 싸우니 참호보다 훨씬 강력한 콘크리트 요새에서 방어할 수 있었던 점도 있었다.
이 과정은 대규모 공격전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참호에 병력을 배치한 상태에서 매일 지속적으로 한다. 그래서 나중에 가면 참호가 거의 미로에 가깝게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참호 미로에선 병사 개개인만이 길을 잃는 게 아니라 부대, 심지어 대대 단위로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이를 위하여 해당 참호의 지리를 잘 꿰뚫고 있는 정찰병이 이들을 구출하는 데 동원되었으며 복잡한 참호에서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하여 무너진 건물 잔해를 나침반 삼거나 참호 곳곳에 표지판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독일군은 참호를 만들 때 모서리를 무조건 90도로 각을 맞춰 팔 것이 교범이었다. 심지어는 병사들이 지나다니며 모서리가 닳는 것도 철저하게 다시 각을 맞출 것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이 이랬던 이유는 다름 아닌 박격포 등이 참호에 떨어졌을 시 모서리가 90도인 참호라면 인명손실이 줄어들어서였다. 당시에는 이 사실을 독일군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야, 독일 애들은 참호도 각 맞춰서 파네, 힘들겠다."로 대충 넘어갔는데 Mythbusters에서 실험해본 결과 정말 폭발 충격파가 모서리에 부딪혀 사라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일직선으로 판 참호는 한쪽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총으로 교전이 가능해서 이런 각진 참호선은 방어측이 유리한 근접전을 강요하는 구조이기도 했다.
적 저격수를 교란하는 한편 그 저격수의 방향을 파악하기 위해 참호 위에 가짜 머리를 달아두는 경우도 있었다.
4.2. 대규모 공격준비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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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격을 받는 참호 |
참호를 촬영한 항공 사진. 하얀 포탄 구멍 자국들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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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공격 측은 엄청난 규모의 사전 포격(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해 상대의 참호, 지뢰, 철조망 등을 박살내고 돌격했는데, 짧게는 돌격 직전, 길게는 몇 날 며칠을 연달아 행했으며, 이에 상대 측도 맞포격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야포에게 비약적인 사거리와 정밀 포격을 기대할 상황이 아니었으며, 일제히 통제할 수도 없었기에 결국 양측의 포격 세례는 무차별 포격을 야기해 한번 시작되면 양측 모두 참호 안에 틀어박히게 만드는 양상을 띠었다. 한편 가스 포탄도 쓰였는데, 이것도 상대 병력에게 방독면을 쓰도록 강제해 피로와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또한 대규모 포격에 앞서, 선발 부대를 투입하여 적의 산병이 엄폐할 것으로 예상되는 거점을 정찰하기도 하며, 철조망을 제거하기 위해 병력을 내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적 참호의 근무병이나 저격수에 맞아 죽기 딱 좋은 행위나 다름이 없었기에, 포격을 통한 진로 개척에 크게 의존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는 프랑스 만화가 자크 타르디의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그래픽 노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잘 묘사된다.
포격 과정에서 방어군은 모두 참호로 대피하여 큰 피해 없이 포격을 버텨낸다. 콘크리트로 건설된 토치카나 흩어져 있는 적 방어 병력을 제외한다면 철조망 같은 급조 방어선은 모두 포격에 증발하므로,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는 보병들의 진격이 큰 무리가 없게 된다. 즉, 몇 분간의 기관총 세례만 버티면 적군 참호에 돌입, 점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장애물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으면 난이도가 급상승한다는 것. 솜 전투 당시 제대로 포격이 되지 않은 일부 지역에서는 철조망 제거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 결과 어떤 곳은 하루 만에 보병 중대가 돌격 한번에 통째로 증발하기도 했다. 게다가 솜 전투의 주역이던 영국 육군은 한 지역에서 징집한 병사들을 한 중대에 배치하는 정책을 취했기에, 이런 중대 단위 증발은 전후 지역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Childers Reforms을 기반으로 한 이 정책을 팔스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지역 출신 편제 방식은 영국만의 특수성이 아닌 독일을 비롯해 많은 국가에서 사용하던 방식으로, 병사간의 사기를 증진하고 (민병대나 현재의 향토예비군처럼) 지역 방어에 효율적인 이점이 있었다. 어쨌거나 미래에 사회와 국가의 기둥이 될 2~30대들이 무더기로, 그것도 무참히 죽어나가는 것을 눈 앞에서 본 1차 대전 세대들은, 이후 전쟁에 대해 매우 부정적 반응을 보이게 되었고. 이는 아돌프 히틀러가 영국과 프랑스를 대상으로 많은 외교적 이득[11]을 취할 수 있던 배경이 되었다.
당시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가장 강력한 포격을 가했다고 평가될 만큼의 포격이 수 일 동안 이어졌는데 정작 철조망 하나 치우지 못 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겠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영국 육군 포병대는 대부분이 유산탄을 사용했는데, 유산탄은 폭발력을 어느 정도 포기하는 대신 많은 파편으로 인마살상을 하는 것이 주 목적이기 때문에 개활지에서 밀집한 보병들에게는 효과적이었지만 빈약한 폭발력 탓에 방어용 구조물에는 직격탄이 아닌 이상 효과가 매우 미미했다. 정작 참호나 철조망과 같은 구조물에 유효한 고폭탄은 극소수만이 사용되었다.
또한 나중에 조사된 바에 따르면 영국군의 포격은 상당히 부정확했으며 솜 일대의 토질은 습기가 많아 부드러웠고 영국군 포탄은 질이 떨어졌기 때문에 불발탄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1차대전 때 생긴 불발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해서, 종전 100년을 찍은 지금도 벨기에에는 영국 육군 1개 공병대대가 상주하며, 수시로 발견되는 불발탄이나 지뢰 등을 처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포격이 너무 강력해도 문제인데, 진격로에 엄청난 숫자의 구덩이를 만들어 기동력이 심각하게 저해되기 마련이다.
거기에 서부전선 특유의 부드러운 토질도 구덩이 생성에 한 몫 했는데,
땅이 부드러움 → 포탄이 땅에 깊게 박힌 뒤 터짐 → 지상 피해는 별로 없는데 땅만 크게 패임
이런 형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포탄 구덩이들은 폭도 넓고 깊이도 깊어서 재수 없게 잘못 빠지면 탈출하기도 어렵고, 빙 돌아가게 만들어 기관총 포화에 노출되는 시간을 키우는 역할을 하여 오히려 아군 병사의 사망률만 높이는 상황을 만들었다.설상가상으로 구덩이에 물이 고여 그대로 방치되면 깊이도 잘 알 수 없고 주변 지대도 늪처럼 물러지며 세균들이 번식하기에 딱 좋은, 말 그대로 죽음의 함정이 만들어져 여러 명이 총상 등을 입거나 발을 헛디뎌 빠져 감염이 일어나거나 줄줄이 익사자가 되고 결국 시체 썩은 물웅덩이가 곳곳에 생겨 심각한 위생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물론 구조도 쉽지 않은 대참사가 일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포격이 만든 구덩이들은 공기보다 무거운 독가스가 고이기 딱 좋은 환경이다 보니, 구덩이 밖의 병사들이 안심하고 방독면을 벗었다가 고여있던 독가스에 피해를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포탄 구덩이가 완전히 공격 측에게 피해만 준 것은 아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물이나 가스가 고여있지 않고 군데군데 깊게 패여있는 포탄 구덩이들은 진격하는 공격군의 좋은 엄폐물이 되어주기도 했다.
4.3. 일제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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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폴리 전투 중 왕립 해군 사단(제63사단) 병사들이 무인지대로 돌격하고 있다.[12] |
1차 대전 당시에도 무선 기술이 존재는 했지만 성능이 좋지 않아 자주 활용되지는 못했고, 유선반이 가설하는 유선망에 의존하거나 전서구를 이용한 전통적인 연락방식이 선호되었다. 양측의 포격이 격렬해지면 기껏 세운 유선망이 개판이 되고, 전서구는 포연과 전장 소음으로 길을 잃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등 제대 간 연락을 못 하는 상황이 정말 많았다. 때문에 정보 전달을 위해서는 언제나 유사시 전달을 위한 전령이 있어야 했다.[13] 아돌프 히틀러가 1차 대전 시기 독일 육군에서 받았던 보직도 전령이었다. 당연히 사람이 직접 발로 뛰는 전령 시스템에는 정보 전달 속도 문제가 컸고, 아예 전령 본인도 죽을 위기에 노출되는 경우가 잦았다.
게다가 돌격하는 병력이 쓸 탄환이나 적 참호선 점령 후 장악을 위해 필요한 자재를 운반하려면 기관총 사격을 뒤집어쓰면서 포격으로 엉망이 된 땅을 지나가야 한다. 이 경우 차량이나 수송부대를 쓰기가 마땅치 않기 때문에 돌격하는 병력 개개인에게 무거운 짐을 나누어서 지급하는 때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돌격속도가 느려지므로 그야말로 기관총 사수 입장에서는 사격 연습하기 딱 좋은 상황이 된다.
그런데 일제돌격을 하면 기관총의 과녁이 된다고 일제돌격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돌격을 안 하자니 포격만 계속 얻어맞으면서 인원이 하나 둘씩 죽는 지속적인 손해를 보게 되며 그렇다고 병력을 나눠서 산발적으로 돌격하면 소수의 병력은 돌격 중 기관총 십자포화를 맞아 정말 의미없이 몰살당하고 설령 어찌어찌 일부 부대가 적 참호에 도달했더라도 인원이 모자라 참호를 장악하지도 못하고 떼죽음만 당하게 된다. 따라서 많은 인원이 희생되더라도 상황을 타개하고 살아남은 병력이 적 참호에 육박할 수 있도록 일제돌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포격 후 돌격 전술이 진부해지고 점차 대응책이 마련되자 포격을 하는 도중에 일제돌격을 감행하는 ‘이동탄막포격전술’을 시행할 때도 있었다. 이론적으론 아주 좋은 전술로, 지속적인 포격으로 장애물을 제거하고 적군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막으면서 비교적 안전하게 적 참호까지 육박할 수 있었다. 보병들의 속도에 맞춰서 포격 지점이 아군 보병 앞에 떨어지게 조금씩 조정하는 방식이였는데, 정밀 타격이나 전략 폭격도 없었던 당시의 열악한 상황 탓에 돌격대와 포병대의 시계가 맞지 않거나, 열악한 통신망이 제 일을 못 하여 포격이 돌격대와 너무 멀리 가해져서 효과가 없거나, 아예 돌격하는 아군에게 포격하는 경우도 많았다.
최초의 이동탄막포격전술은 1916년 솜 전투에서 영국군이 첫 선을 보였지만, 병사들의 숙련도 부족 및 각종 제약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제대로 된 이동탄막은 의외로 캐나다군이 비미 능선 전투에서 처음 선보여 짭짤한 전과를 올렸다.
또 영화 등에서 묘사하는 것과 달리, 일반적으로 병사들은 돌격 중에는 부상당한 아군을 돌보는 것이 금지되었다. 물론 부상자들을 아예 방치한 건 아니고, 아예 이 일을 맡는 '들것병'들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의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였다. 들것병은 보통 중대에 2명 내외가 있었는데, 위험지대로 직접 들어가야 해 들것병들이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을뿐더러 진창이 된 포탄 구덩이와 철조망 사이로 부상자 한 명을 들어서 운반하는 데만 4명이 필요하기 일쑤였다. 때문에 돌격 중에 부상을 당하면 그 자리에 그대로 고꾸라진 채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죽기를 기다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저격수들은 아예 부상자를 구해주러 오는 다른 병사들이나 들것병을 노리기 위해 일부러 부상병의 목숨을 끊지 않기도 했으며, 파리 목숨이나 다름 없었던 병사들은 평소에 들것병들에게 먹을 것이나 담배, 술 등 구하기 힘든 것들을 뇌물로 주며 부상당하면 자신을 봐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4.4. 방어사격 및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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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군 병사들이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다. |
공격군의 정면에 기관총을 설치하는 게 아닌 공격군의 측방[14]에 기관총을 설치했는데, 이것은 공격군이 넓은 전장 탓에 횡대로 돌격해 오거나 장애물에 걸려 병목현상과 같은 양상을 띠면서 공격하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사실 기관총을 난사하면 명중률이 심하게 떨어진다. 난사하는 기관총에 죽는다는 말은 까놓고 말해 눈먼 총알에 죽는 셈인데, 당시의 기관총은 더더욱 명중률 문제를 크게 겪었다. 때문에 기관총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한 번의 난사 범위에 최대한 많은 표적을 밀집시키는 게 중요하다. 때문에 기관총 사수 입장에서는 횡대로 들어오는 공격군의 측면에 대기하고 있으면 한 번에 많은 표적을 산탄 범위에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참호전에서는 측방으로 노출된 경우에 방어 쪽 기관총의 공격 범위에 수십 명씩 중첩되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고, 절망적인 조준력을 감안하지 않고 마구 난사하여도 중대 하나를 증발시키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었다.[15]
그래도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부대라면 우물쭈물하다가 적의 침입을 허용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며, 그렇지 않더라도 보통 방어전 중에 아군 참호 중 최전선에 위치한 1개 열 정도의 참호는 잠시 적에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대개 참호선은 기본적으로 3선 이상을 중첩해서 설치하며, 제2선 참호에 예비 병력을 두고 포병들도 적에게 넘어간 제1선 참호를 정확히 명중시키도록 훈련을 받고 참호가 공격받을 시 1선 아군 참호를 조준하고 대기한다.
반대로 공격군은 엄청난 손해를 입으면서 간신히 참호 하나를 점령하더라도 후속해서 들어오는 증원 병력이나 보급이 모자라고, 자기가 점령한 참호의 구조와 특징도 잘 모른다. 따라서 대형 해프닝만 없다면 일반적으로 방어군이 다시 반격해서 참호를 탈환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이것이 독일군의 장기였다. 기동방어와 종심방어(Defence In Depth) 전략은 독일의 특기였는데, 루덴도르프는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 보인 독일의 방어 교리가 인력만 낭비하는 쓸모없는 교리라 판단하여 힌덴부르크 선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방어 교리인 종심방어를 창안하게 된다. 양면전쟁을 겪는 당시 독일은 인력난 또한 매우 심각하였다.
직선에 가까웠던 참호전선을 다층으로 세분화시킴으로써 살상구역과 역공구역, 그리고 2차, 3차 방어 참호로 나누었다. 공격 측은 공격이 성공했다고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고, 반대로 방어 측에서는 최소한의 손실로 적을 점점 더 함정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공격 측이 막대한 피해를 입어가며 참호를 점령한들 애당초 쓸모 없는 참호(이자 함정)만 손에 넣을 뿐이었다.
독일군의 장기인 종심방어와 기동방어, 그리고 프랑스군의 막장스런 개돌식 행보는 니벨 공세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독일군과 루덴도르프도 결국 공세 없이 승리할 수는 없었고 때문에 공세를 계획하나 기껏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여 보존한 병력을 협상군처럼 참호에 무의미하게 던지는 바람에( 루덴도르프 공세) 역시나 똑같이 말아 먹었다. 이후 독일의 방어선은 급격하게 약화되어 미군이 협상국에 참가해 실시한 공세인 백일 공세에 이르러 무너지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상대 참호를 기습하거나 폭약을 매설해 폭파하려는 목적으로 적군 참호를 향해 땅굴을 파거나 돌격용 참호로 쓰기 위한 길도 뚫었다. 물론 방어측도 청진기를 들고 땅의 진동을 감청하거나 방어용 땅굴을 뚫어 땅굴을 파고 들어오는 적군을 날려버리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최전방은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참호가 복잡하게 얽히거나, 아예 참호끼리 겹치는 부분도 있어 참호 안에서 길을 잃어 헤매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적군 진영으로 가서 포로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4.4.1. 맞돌격
방어 측이 공격 측을 격파하여 후퇴시켰을 때 한정으로, 공격 측의 참호로 즉시 맞돌격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생각보다 유효한 전술이었는데, 우선 공격 측이 방어 측의 참호 앞까지 왔다는 말은 이동 경로상에 장애물이 없다는 뜻이고, 공격 측은 이미 방어 측의 기관총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일부가 후퇴하는 도중일 테니 공격 측 참호를 수비할 병력도 거의 다 증발해 버린 상태이다. 또한 공세를 하다 후퇴하여 자신들의 참호로 돌아온 직후이니 돌진해오는 방어 측의 병력을 상대로 반격을 할 여력도 거의 없을 것이다.그러나 이런 맞돌격에 가만히 있을 공격 측이 아니다. 보통 공세를 나가더라도 공격보단 방어 위주의 훈련을 받은 기관총 사수들은 참호에 남겨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은 아군 측의 공세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늘 방어태세에 있기 때문에 맞돌격을 해오는 방어 측 병사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때문에 기관총 사수들은 1차 세계대전의 구시대적인 기사도와 맞물려 '공격도 안 나가면서 편하게 기관총이나 쏴갈기는 겁쟁이들'이란 멸시를 받아야 했다.
어찌되었건, 상대 측의 공세를 격파한 직후가 그나마 가장 공세하기가 좋은 상황인 건 확실했기 때문에 협상국, 동맹국 안 가리고 맞돌격은 자주 쓰인 전술이었다.
4.5. 재공세 준비
이렇게 되면 공격군은 다시 병력과 물자와 장비를 모으고, 그동안 방어군은 다시 참호선을 재정비하면서 1번으로 되돌아간다.간혹 공격이 성공하거나 방어에 실패해서 전선이 몇 km씩 이동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이런 경우는 반격 등의 이유로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원상복구되는 경우가 많았다. 서부전선 초기 전투들 대부분이 예상외의 진격 속도로 후속 예비대와의 간격이 지나치게 벌어져 역공을 당하거나 물자 부족으로 후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5. 전선과 최고 지휘관의 괴리
5.1. 일선 장병들이 겪은 생지옥
"인류는 미쳤다.
지옥도 이보다 더 참혹할 수는 없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할 수 없다. 이 학살극을 보라! 이 공포와 주검들을 보라! 내가 받은 인상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인류는 미쳤다!"
― 프랑스 육군 알프레드 주베르 보병 중위가 베르됭 전투에서 사망하기 하루 전에 적은 일기(1916년 5월 23일)[16]
무의미한 돌격과 살육의 반복이었고, 전선을 밀고 당기며 치열하게 싸우기도 했지만 전진한 거리에 비해서 기가 찰 정도로 압도적인 인명손실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제1차
솜 전투 당시 영국 육군은 공세 개시 하루 만에 6만여 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엄청난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17] 사망 19,240명, 중상 35,493명, 포로 및 실종자까지 합치면 총 57,470명. 어지간한
소도시 인구가 하루 만에 소멸하는 셈이다. 솜 전투가 마무리되었을 때, 연합군이 고작 6마일(9.66km)를 전진하기 위해 지불한 대가는 62만 명의 사상자였고, 독일군이 6마일 밀려나는 동안 낸 사상자는 대략 43~53만 명으로 추산된다. 단 10km 남짓 거리를 전진하는 데 양국이 낸 사상자는 무려 1km당 10만 명이 넘었다.[18]― 프랑스 육군 알프레드 주베르 보병 중위가 베르됭 전투에서 사망하기 하루 전에 적은 일기(1916년 5월 23일)[16]
이런 끔찍한 상황과 함께 시체를 파먹어 고양이만하게 살찐 쥐들이 돌아다니며 산 사람들을 공격해대고,[19] 엄청난 숫자의 이와 벼룩이 득실거리며, 비만 오면 참호에 물이 가득 차 장병들은 걸레처럼 젖기 일쑤에, 포탄으로 파인 구덩이에는 독가스와 썩은 시체에서 발생한 병균으로 가득한 독극물이 고였다. 심지어 참호 속에서 익사하거나 참호가 무너져 매몰당해 개죽음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엄청난 추위와 더위, 온갖 질병까지 만연했던 참호전은 그야말로 인간이 만든 끔찍한 아수라장이자 생지옥이었다.
상황이 너무 처참한 나머지 각국은 전선의 장병들이 고향에 보내는 편지에 참호전의 지옥 같은 상황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물론 병사들에게 보내는 가족의 편지도 배급제나 등화관제로 인한 큰 생활고를 적어보냈다간 빠꾸 없이 검열당하기 일쑤였다.
결국 참호에서의 격심한 스트레스를 못 이긴 몇몇 병사들은 미쳐버린 나머지 후방이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직, 간접적 자해를 택하기도 하였다. 간접적 자해는 적 저격수가 맞추도록 일부러 팔다리나 머리를 참호 위로 내밀어 부상을 입는 것으로, 당연히 죽을 확률이 높으며 산다고 해도 여차하면 과다출혈로 죽는 것이다. 죽으나 사나 고통받는 게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미쳐간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 자해는 발각되면 적전도주로 간주해 사형이었다.[20] 또한 당시 의료 기술의 한계와 야전 병원의 극단적 처치로, 굳이 절단하지 않아도 될 상처를 절단하는 일도 횡행했으며[21], 의료품의 부족으로 가망이 없는 중상 환자는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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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족 검사를 받는 병사들 | 물이 고인 참호 | }}} |
특히 비가 온 뒤 참호에는 물이 고이는데, 배수구가 없는 참호에서 이 물이 알아서 빠질 리는 없기 때문에 병사들은 강제적으로 며칠 동안 발을 물에 담그게 되었으며, 비위생적인 참호 안에서 꽉 끼는 군화를 신은 채로 지저분한 물에 하루종일 발을 담그고 있다 보니, 발이 썩어가는 참호족이 만연했다.
독일군 쪽이 상대적으로 고지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선 비교적 나았으나, 그 대신 만성적인 물자 부족으로 시달렸으며 참호-후방 교체 주기가 협상군보다 길어 별로 나을 게 없었다. 더구나 솜 지역에 많은 비가 내릴 때는 고지대도 진창으로 변하게 되었으며, 물이 잘 빠지는 지역도 아니었기 때문에 끝내 독일군의 참호 또한 시궁창이 되었다. 물가가 만들어진 만큼 모기가 득시글하게 번식하여 질병의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물난리는 영국군이 가장 심했는데, 벨기에가 국토 전역이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자 전선의 모든 운하와 둑을 폭파하거나 밀어젖혀 독일군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늦췄기 때문이다. 벨기에 영토의 한 귀퉁이를 보전한 대신 상대적으로 저지대에 있는 협상군[22]병사들은 매년 홍수로 고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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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전이 벌어지는 지대는 안 그래도 부드러운 토질인데 중간지대는 포격에 땅이 죄다 갈아엎어지다보니 비만 왔다 하면 그대로 진흙 밭이 되었다. 상당히 지저분한 것은 물론이고 지대 자체가 위험한 곳으로 바뀌었는데, 상술했듯 여기저기에 생긴 포탄 구덩이에 물이 고이면 깊이도 알 수 없는 죽음의 함정이 되었다.
나름 움직이기 편하게 한다고 참호 바닥엔 나무 판자들을 발판으로 깔았는데 잘못 밟으면 놀이터 시소처럼 위로 날아올라 만화영화마냥 얼굴이나 몸을 세게 후려치는 일이 많았으며, 물구덩이 위의 판자가 습기에 썩어 부서져 사람이 빠져 죽는 일도 자주 발생했다. 우스워 보이지만 현실에서 저렇게 바닥에 놓아둔 물체에 갑자기 맞으면 그냥 좀 아픈 정도로는 안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실제 농기구나 연장, 판자 등을 바닥에 둘 때도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대량의 성인들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은 상태에서 제대로 된 위생시설도 없다 보니 배설물 때문에 더욱 눈물나는 엿 같은 상황이 벌어졌는데, 사방에 물이 고여 진탕이라 똥오줌이 참호 안까지 넘쳐 흘러와 참호 속의 장병들은 똥오줌 범벅인 참호에서 먹고 자며 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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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에 지친 영국군 병사들이 비좁은 참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
프랑스 전선의 독일군. 천으로 덮인 피켈하우베와 눈이 쌓인 모습을 보아 1916년 초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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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제대로 된 거주시설을 구축할 여유도 없었으므로 교대가 이루어지기까지 이들은 이렇게 참호 시설에 기대어 불편한 쪽잠을 자며 몇 주에서 몇 달을 지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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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족을 검사하는 군의관. 하지만 저렇게 잘 지어진 참호에서 제때 군의관의 검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운 좋은 일부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
더러운 물이 넘실거리는 곳인지라 참호족으로 고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더러운 흙탕물과 철조망 등으로 인하여 파상풍도 빈발했다. 지저분한 장병들이 집단으로 모여있으니 쥐는 물론 이, 벼룩 등 사람을 물어뜯는 각종 해충들까지 참호에 들끓어 장병들을 극심하게 괴롭혔다.
갈리폴리 전투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해군 장관직을 사퇴한 뒤 예비역 육군 중령으로 소집되어 대대장으로 복무한 윈스턴 처칠의 수기를 보면, 신빙성이 다소 의심되기는 하나 해충에 견디다 못해 큰 통을 구해다 놓고, 자신과 장병들이 총알이 날아오는 와중에도 철모만 쓰고 들어가 자주 목욕해서 부대에서 이와 벼룩을 격감시켰다는 내용까지 나온다.[23] 비단 처칠 중령의 부대뿐 아니라, 일단 참호에서도 혹은 참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어떻게든 장병들의 위생 상태를 개선시켜보고자 하는 노력을 전반적으로 하긴 했다. 물론 관료적인 방법으로 강요하는 통에 병사들이 오히려 고생하는 경우들이 자주 발생하기도 했다.
각국 수뇌부도 아주 손을 놓은 것은 아닌지라 물이 고인 참호에 고무장화와 우의, 보온용 의류 등을 지급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고무장화는 하루도 못 되어 사방의 날카로운 파편과 못 등에 구멍이 나 물이 들어오고, 우의나 트렌치 코트같은 보온용 의류는 울 등의 두터운 천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은데 이것들이 흙탕물에 범벅이 되어 10kg 단위로 무게가 불어나 장병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더구나 연기나 불꽃을 피우면 금방 적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적 포병에게 목숨을 헌납하는 꼴밖에 되지 않아서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축축한 참호 안에서 불을 피워 발을 말리거나 차디찬 통조림 등의 음식을 따뜻하게 데워먹을 수도 없었다.
덤으로 참호 전후방에 포탄이 날아오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라 정시에 따뜻한 음식을 보급하러 오다 포탄에 맞아 추진 인원들이 사망하거나 도망가는 일도 자주 벌어져, 딱딱하고 맛없는 밀가루 조각 등의 비상식량으로 며칠에서 몇 주 동안을 연명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식사를 데워 먹고자 당시 장병들이 가장 원하던 품목 중 하나가 연기 없이 장시간 태울 수 있는 고체 알코올로, 연기가 나지 않아 안전하고 체온이 떨어지는 야간에도 유용한지라 가족들에게 부탁하거나 급여를 모아 공동구매하는 것 등으로 많이 조달했다. 그나마 전쟁 후반기 1917~1918년에 본격적으로 기진맥진해진 영프벨 협상군을 대신해 전장에 대체병력으로서 투입된 미 육군은 이러한 물 고임 문제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해결했는데, 전투 식량으로 지급된 콘비프 통조림을 다 먹고 남은 빈 깡통들을 참호 바닥에다 발판으로 써서 이중삼중으로 깔아버린 것이다. 미군의 보급은 이 때부터 전설의 시작으로, 뛰어난 보급체계 시스템 덕에 깡통은 그야말로 썩어넘쳤기 때문에 바닥이 메워져 차오르는 물로 인한 고생은 그나마 덜했다고 한다.
게다가 참호에 있으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오는 포탄과 탄환 때문에 정신붕괴를 일으켜 미쳐버리는 장병들도 꽤나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탄환충격(셸 쇼크, Shell Shock)[24]으로, 정신적인 충격보다는 포격에 의한 뇌의 물리적 이상이라는 게 당시 의료계의 정설이었다.
위의 정신붕괴 문제에 대해서 심리학자들이 계속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당시 심리학자들을 보는 시각은 거의 점술사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심리학이란 학문 자체가 그 당시에는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을 위시한 당시의 심리학자들은 상당히 자의적으로 인간의 심리를 분석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래도 장병들의 불만이 증폭되는 1916년 이후에는 많은 처우 개선이 있었다. 그나마도 독일군보다는 좀 여유가 있었던 협상군 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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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저격수 영화《60고지 전투》 |
포탄이 날아오지 않는 소강 상태일 때도 저격수 때문에 어떤 진영이건 참호 위로 머리를 내미는 행위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 언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를 역이용해서 일부러 신체 일부분만 참호 밖으로 내놓고 저격을 당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극단적인 자해를 택하는 병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를 한 병사들 중 적지 않은 수는 과다출혈로 사망하거나 치료의 미비로 항구적 장애를 입게 되었다. 독일을 시작으로 각국은 저격수를 양성해서 교착 상태인 참호전에 투입하여 적 참호를 노리게 했다. 그 결과 치열한 신경전을 매일 벌이는 사이 하루에 수십 명 단위로 몰래 저격을 당해 죽어나가는 처절한 사태도 벌어졌다.
게다가 전쟁 양상이 총력전으로 바뀌면서 아무리 병력을 잃어도 증원군이 무한정 오다 보니 각 군은 참호 돌파의 방법으로 압도적인 화력, 즉 머릿수로 밀어붙이기만 되풀이했다. 이런 지옥도는 돈의 힘과 압도적인 보급체계, 물량전으로 압도하는 미군의 참전과 각국의 전차 개발, 그리고 독일의 국력이 완전히 연소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최전선에서 참호전을 직접 겪고 있던 각국 군대의 병사들은 증원군이 전선에 도착하면 "이 멍청한 새끼들아! 너희들 때문에 전쟁이 더 길어지게 생겼잖아! 이 빌어먹을 곳은 대체 왜 왔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참호전을 겪고 나니 지옥 같은 전쟁 그 자체에 환멸을 느끼고 누가 이기든 간에 그냥 빨리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병사들이 많아졌는데, 그런 경험자 병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증원군의 도착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옥 같은 참호전을 더 오래 계속 하라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 심하게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증원군 입장에서도 도와주러 왔더니 집에 돌아가라고 푸짐한 쌍욕을 먹어서 초장부터 사기가 나락을 가고 기존 병사들과 불화가 일어나 협동도 잘 안되는 어이없는 상황이었고 말이다.
죽고 다치고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라는 것만으로도 장병들의 정신이 한계에 내몰리는 마당인데, 사병들 입장에선 쓰잘데기 없는 소모전만 무한 반복되고, 참호전 특성상 싸우는 데서 계속 싸우다보니 시체가 쌓이고 쌓여 엄폐물 역할까지 해 뛰어가다 자빠지면 아군 시체인지 아닌지도 모를 푹 썩은 시체의 산의 뱃속에 다이빙을 하는 등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치는 일이 매일같이 벌어지자 적지 않은 장병들이 PTSD를 비롯한 각종 정신병에 시달렸고 참다못해 더 이상 못해먹겠다며 전투를 거부하는 등 항명을 하는 사례가 넘쳐났다. 항명은 곧 명령 불복종인지라 사형이었지만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장병들이 적지 않았다.
물론 장교들 또한 정신이 멀쩡한 건 아니라서 항명이라고 즉결 처분했다는데 실제론 어처구니 없는 것도 많았다. 말도 안 통하는 벽촌지대 사람을 끌고 와서는 명령을 이해하긴 커녕 언어 자체가 달라서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명령 불복종이라며 총살시키기도 했으며, 심지어 중대가 적의 화력을 버틸 수가 없어서 퇴각한 걸 군인 정신이 부족하네 겁을 먹었네라면서 총살시키려 드는 미친 일들이 벌어졌다.
이런 반역자들을 총살하는 건 보통 신병들의 몫이었는데 애국주의 광풍 속에 나라를 지키겠답시고 전쟁터에 온 신병들은 사형수를 정말로 반역자인 줄 알고 죽였지만 몇 주 뒤엔 자기들이 죽인 반역자의 상황을 뼈저리게 알게 되고 나중에는 되려 자기들이 총살대에 오르는 일이 적지 않았다. 사형을 남발해가면서 하급 장교와 헌병들은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병사들을 전쟁터로 몰아세우려 노력했는데, 이 때문에 장병들에게 “저놈은 인간이 아닌 놈”으로 찍혀서 중앙의 통제가 닿지 않는 곳에선 헌병과 하급 장교가 "불운한 사고"로 등에 총을 맞는 등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하는 일이 빈발하는, 말 그대로 파리 목숨에 불과했다.
사실 참호전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직위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소대, 중대장급의 하급 장교들이었다. 끔찍한 환경 속에서 휘하 병사들을 독려해 공격을 지휘해야 하는데 병사들은 못해먹겠다며 항명을 밥 먹듯이 해대고, 전선에서 동떨어진 윗선은 끔찍한 실황은 아무것도 모른 채 참호를 체스판으로, 병사를 말로 보고는 계속 공격을 명령하고, 소모전만 주구장창 반복하면서 휘하 부대원이 거의 전멸해 버리면 또 참호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새 인원들을 통솔해 이 짓을 그대로 반복해야 했으니 그야말로 똑같이 미칠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보통 공세가 시작되면 호루라기를 불며 병사들을 지도하고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참호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가는 인원들이 바로 이런 하급 장교들이었는데, 당연히 서로 총부리만 내놓고 상대의 머리가 보이기만을 기다리는 참호전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만큼, 가장 먼저 적군 사격에 쓰러질 확률도 높았다. 통계에 의하면 일반 사병의 사망률은 1/8 정도였지만, 초급 장교들은 1/5 가량이 사망하였다. 오죽하면 하루살이 소위란 말도 있었을 지경. 당시 초급장교들의 고통을 잘 묘사한 영화가 저니스 엔드다.
단, 이는 일부 역량은 부족할지라도 어느 정도 양심은 갖춘 지휘관들 한정이었고, 휘하 장병들의 목숨을 소모품으로 여기며 돌격하지 않으면 쏴버리겠다고 협박하거나 즉결처분을 남발하며 병사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인간 쓰레기 하급장교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사항이었다. 전쟁터를 탈출하기 위해 항구적 장애가 남을 정도의 자해를 하거나 일부러 괴저를 일으켰다가 열악한 의료시설 때문에 퇴역도 못 하고 죽는 경우도 있었다.
덧붙여 전쟁의 포화가 미치지 않는 각국의 본토에선 '참호 연습장'이라는 명칭으로 간단하게 만들어 둔 참호를 각종 군용 장비와 함께 민간인들이 관람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참호 연습장이란 대체로 일반 공원에 있었는데, 시민이나 소위 상류층 사람들이 여기서 소풍을 즐겼다. 카페, 레스토랑, 전쟁영화를 상영하는 극장까지 두었다. 이런 것에 낚여서 입대했다가 진짜 참호전을 겪고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들과, 그렇게 죽어간 남편과 자식이 어떤 곳에서 싸웠는지도 모르고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부모들도 엄청나게 많았다. (당시 영국령이었던) 캐나다 BBC 라디오 방송에서도 이러한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지금까지 적군에 맞서 장렬히 전사한 줄 알았던 고조 할아버지가, 알고보니 다쳐서 참호 안에 남겨졌다가 의무대로 옮기는 사이 눈먼 포탄에 죽었다.
사실 참호라는 것이 계획표대로 구축되기만 한다면 비번일 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게호라거나, 병사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는 야전취사장, 참호보다는 훨씬 쾌적한 후방의 숙영지, 이런 시설들을 연결하는 교통호 등을 모두 갖추게 되어 있고, 참호 안에 물이 고이는 것도 배수로와 발판 등을 잘 설치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즉, 계획대로 잘 구축된 참호는 나름 아늑한 보금자리로 봐 줄 수 있는 정도라는 것.
물론 포탄과 총알이 날아드는 실제 전선에서는 숙영지나 배수로는커녕 총알을 피할 구덩이를 파는 것만도 힘에 부쳐 이런 부대시설이 전혀 건설되지 않았지만, 안전한 후방의 참호 연습장에는 이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참호 공원에는 카페, 레스토랑, 극장까지 갖춰져 있었다고 하지만, 원래 참호에도 카페나 레스토랑급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병사들이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고 작은 서재나 영사기 등을 갖춰 문화생활 및 휴식을 즐길 수 있는 휴게호를 건설한다는 계획은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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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잡지 L'Illustration에 실렸던 참호생활 홍보자료 |
이 때문에 1차대전 당시 부모가 전선의 병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아들들은 발이 괴사하고 오물들 속에서 상처가 썩어가며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는데 '휴일에는 가능하면 예배에 참석하고, 참석할 수 없더라도 기도는 꼭 드려야 한다'거나, '휴식 시간에는 좋은 책을 많이 읽어라'와 같은 천하태평한 내용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정도이다. 생지옥인 최전선에서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아보는 장병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설명이 필요없을 것으로 보인다.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이라 가능했던 비극. 심지어 이런 상황을 알려서도 안 됐기에 병사들은 눈물을 삼키며 가족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다.[25]
당시 적지 않은 유럽인들이 가졌던 전쟁에 대한 낭만주의, 영웅주의적 관점과 소속 부대를 일종의 의사가족으로 보는 사고방식이 이런 비정상적인 인식을 더욱 부채질했고, 차마 자신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하여 가족들의 가슴을 아프게 할 수는 없다고 여긴 병사들의 심정과 정부 당국의 정보 통제 및 우편 검열, 그리고 대부분의 전투 행위가 참호선에 집중되어 국내(후방)에는 전쟁의 불길이 미치지 않았던 전쟁의 전개 과정 때문에 이런 참상이 후방의 가족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은 특히 독일에 가장 큰 해악을 끼쳤는데, 병사들이 갈려나가는 동안 총알 한 발 날아오지 않는 안전한 후방에서 태평하게 지내던 절대 다수의 독일 국민들은 독일이 불리한 입장이라는 것은 물론 최전선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한지, 전쟁이 얼마나 자국에 해악을 끼치고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어느날 느닷없이 들려온 패전 소식과 패전국으로서 받는 엄청난 페널티에 인지부조화를 일으켜 급기야 "외교관이라는 것들이 유대인 놈들이랑 자본가들 로비를 받아먹고 나라를 팔아먹었다!" 식의 배후중상설 같은 거나 주장하면서 재전쟁을 부르짖었기 때문. 독일 국민들의 이러한 반감과 분노를 양분삼아 일어난 나치 독일이 결과적으로 독일을 철저히 파괴하고 프로이센 영토를 영구 상실시켜버린 실책을 생각해보면 2차 대전까지 이어지는 비극의 연속은 이러한 연유에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참호의 끔찍한 환경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가혹한 군법이 집행되었다. 특히나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과도한 엄벌주의로 악명이 높았다. 프랑스군에서는 포화와 기관총 때문에 공격을 망설인 부대에게 로마 시대에서도 꺼리던 100분의 1형, 10분의 1형을 선고하는 일이 잦았고, 즉결 처분이 남발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일례로 1914년 9월, 한 프랑스 장군이 굶주림에 못 이겨 야생 열매를 먹었다 장염에 걸려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 5명의 병사들을 즉결 처분한 사례가 있다. 거기에 혼란스러운 전투 속에 소속 부대에서 낙오되거나 겨우겨우 돌아온 병사들을 비겁자나 스파이라며 총살하기도 하였다.
다만 모든 전선이 저렇게까지 생지옥이였던 것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치열한 전선들은 베르됭, 솜, 마른, 이프르 등 대부분 독일 프랑스의 북부 국경 쪽이었다. 남부 국경은 형식적으로 전선이 형성되어 있긴 했지만, 전략적 가치가 떨어졌다.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의 핵심 목표는 프랑스 동북부인 파리였다. 그래서 양쪽 수뇌부에게 남부는 신경 쓸 필요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다. 프랑스와 독일이 수 백 년 동안 으르렁대며 싸웠던 알자스-로렌 역시 전쟁 초기를 제외하고는 의외로 전쟁 내내 조용했다.
더군다나 남쪽 전선은 병사들을 괴롭혔던 물, 추위로부터도 훨씬 자유로웠다. 강수량도 적고 건조했으며, 바다와도 멀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한 참전용사는, 평화로운 전선에서의 참호 생활은 동료들과 함께하는 약간의 스릴이 있는 비박 캠핑 같았다고 회고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평화로운 전선과 치열한 전선 사이로 주기적으로 부대들을 교대시켰지만, 행정적/병력적 여력이 부족했던 독일군의 순환은 훨씬 더뎠고 심지어 어떤 부대들은 같은 전선에서 몇 년씩 주둔하기도 했다.
5.2. 고위 장교와 정치인들의 한심한 현실 판단
이런 처참한 상황을 몸소 겪어본 고위 장교는 아무도 없었다. 통신 수단의 발달로 고위 지휘관들은 최소 몇km 떨어진 곳에 둔, 포격에도 안전한 벙커를 마련한 다음 거기서 비싼 시가를 피우거나 고급 커피를 마시면서 지도나 보며 작전을 지시했고, 참호전의 특성상 전선이 대규모로 급격하게 변하지 않은 탓에 지휘관들이 굳이 안전한 벙커와 편리한 숙소를 버리고 최전선으로 갈 까닭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결국 이들이 병사들에게 내리는 지시는 의미없는 탁상공론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전방 지대는 오히려 수십 km의 전 전선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통신 수단이 없었으니 문제였다. 유선 전화야 있었지만 적의 공격 준비 포격이 참호 가까이 떨어지거나 하면 단선되기 일쑤였고, 이는 아군의 공격 때도 지속적으로 올라온 문제였다. 확보한 적의 참호에 유선 전화망을 가설해도 당연히 금방 단락되었고, 전선과의 통신은 문서 수발병을 거쳐야만 했다.
기껏 전방에서 일선 보고를 수합하고 상부에 보고한 뒤 상부가 계획을 세운 다음, 다시 일선 부대에 하달하면 상황이 끝난 지 수 시간 뒤였다. 각 군 수뇌부 입장에서 수만 명에서 수십 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지휘하는 핵심 지휘관이 통신 두절 상태에 놓이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 정확하다. 이와 반대되는 사례로는 봉천 전투 당시의 일본군 3군이 있는데, 상부의 강요에 의해 사령부를 전선에 밀착시켰다가 러시아군의 역공에 걸려 핵심 지휘부가 전멸당할 뻔 했다.
게다가, 관료제의 폐해로 전방의 장교들은 쓸데없는 서류 업무를 보느라 부대 지휘와 전투력 유지에 쏟을 시간이 줄어들곤 했다. 부하 장병들이 포탄에 날아가는 와중에도 "귀 연대에 며칠 전 보급한 딸기 통조림의 수량을 실셈해서 보고하라.", "장성기를 휘날리는 차량이 지나가면 차 안에 아무도 없어도 무조건 경례할 것을 전파하라."처럼 하등 쓸모없는 지시를 이행할 것을 독촉하는 서류를 예사로 받았다.
또 일부의 오해와 달리, 1차 세계대전의 고위 장교들은 귀족 출신이 아닌 사람도 많았다. 영국원정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헤이그, 프랑스군 3대 원수들이었던 조제프 조프르, 필리프 페탱, 페르디낭 포슈 모두 구 귀족이나 상류층이 아닌 중산층 출신이었다. 이때쯤 되면 군대의 규모가 귀족의 수에 비해 급격하게 팽창하여 더 이상 중세나 나폴레옹 시대처럼 귀족들이 고위 장교단을 독점할 수 없었다. 또 군계급 제도가 확립되어 장군들이라 하더라도 젊었을 때는 위관급으로 현장에서 구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이는 명예 혁명, 프랑스 혁명 등을 통해 신분제가 일찌감찌 철폐되고 귀족들이 독점하던 장교 지위를 신분 상관없이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사관학교 등 공교육을 통한 양성으로 대체한 프랑스/영국의 경우이고, 독일 제국군의 고위 장교들은 여전히 이름에 폰이 붙은 융커들이 다수였다. 러시아 제국 역시 고위 장교단의 절대다수는 귀족들이었다.
5.2.1. 변명
다만 이러한 비참한 상태가 지속되었던 이유는 각국 수뇌부들의 무능 때문만은 아니고, 당시로서는 이 방법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이때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위력을 떨쳤던 중(重) 폭격기도, 중전차도, 지진폭탄도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애초에 이 무기들의 시작이 바로 기나긴 참호전을 타개할 목적으로 발명된 무기들이다.[26] 즉 땅을 파서 만든 참호를 뚫을 수단은 보병들이 닥치고 돌격하든지, 제2차 세계 대전의 포병 수준에 비하면 형편없는 포병, 그리고 해안에서나 가능한 해군 군함의 포격밖에 없었다.
당시 포병의 경우 일단 포의 사정거리가 길지 않았으며, 대구경 고폭탄을 운용 가능한 중야포의 수는 굉장히 적었다. 거기에다가 포병 교리가 미성숙해서 솜 전투와 같이 포격은 열심히 했는데 장애물이 전혀 제거가 안 되는 황당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포병 교리는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성숙해진다.
그리고 이 참호전으로 인해 항공기의 활용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항공대가 창설되었다. 원래 파일럿들이 유사시 최후의 발악 내지는 자살용 권총 하나만 들고 양 전선에 정보를 수집, 이후 포병들에게 전달해 이곳에 포격을 가하는 방식의 정찰기 역할이였다. 처음에는 상대방 측에서는 신기한 거라며 손을 흔드는 것은 물론 정찰기끼리 반갑게 인사까지 하는 등 온건한 모습을 보였으나 정찰기가 정찰한 곳에 집중 포격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어떻게든 격추시키려고 애쓰기 시작했고, 양측 파일럿들도 정보를 수집하지 못하게 하려고 서로 권총을 갈기기 시작하다가 그게 카빈 소총이 되고, 결국 기관총이 달리면서 공중전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항공 전력에 대한 투자가 진행되면서 폭격기도 개발되었으나 1차대전 당시 폭격기는 탑재할 수 있는 폭탄의 무게도, 숫자도 적었기에 참호전을 타개할 수는 없었다.
해군 함정의 포격의 경우, 당시 세계 최강의 전함인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에 장착된 15인치 Mk-I 주포는 사거리가 26.5km 정도였다. 즉, 포격 지원을 해주고 싶어도 해안 인근이 아닌 이상은 타격할 수 있는 지점에 제한이 너무 크다. 게다가 이런 해군의 주력 전함들은 화력지원 같은 임무에 투입할 여유가 없는 게 당시 영국 주력함대는 제리 놈들을 견제하기에 바빴기 때문. 만약 화력 지원을 하다가 재수없게 기뢰에 걸려서 전함을 무의미하게 상실하기라도 하면 그로 인한 타격은 심각할 수밖에 없다. 다르다넬스 해전에서 전함 3척이 기뢰에 접촉해 침몰하자 피셔가 기를 쓰고 신형 전함을 도로 빼온 이유도 이거다.
보병의 화력이라도 좋았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단발식으로 쏘는 볼트액션식 소총을 쓰고, 그나마 기관총이 대대별로 1~2대 보급된 정도였다. 폭탄도 아닌 총기류였기에 참호에 틀어박혀버리면 '제압'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점령'을 할 수 없는 사태가 속출했다. 심지어 참호전의 해결사인 박격포의 경우에는 전쟁 중반에 등장한 스톡스 박격포가 등장하기 전까지, 구형 봄바드는 물론 심지어 투석기와 유사한 투탄기까지 사용하는 현장이 계속되었다. 다만 투탄기는 정숙성 때문에 이후에도 종종 사용되었다.
물론 반자동소총이나 자동소총 같은 과도기적 형태의 자동화기들 자체는 1차대전 이전에도 존재했고, 군부도 이에 대한 유용성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1차대전 때도 일부 채용되기는 했으나, 문제는 채용 시기. 전쟁 후반기에나 채용되어 최전선에서 제대로 활약할 일이 드물었고 수량도 적었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자동화기가 사용된 전쟁터는 제2차 세계 대전부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론상으로는 포병의 철저한 포격과 그에 보조를 맞춘 보병의 진격을 통해 참호를 돌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통신 수단이 월등히 발전한 현대에도 제병 합동 작전은 상당히 기교가 필요한데, 당시 통신 수준으로 봐서는 더 어려울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포병이 의미있는 사격을 하려면 탄착의 관측이 필요한데, 당시 광학 장비로는 포병 혼자서 탄착을 관측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으며, 이때는 레이더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27]
참호전에서는 보병들의 백병전이 밥 먹듯이 일어나기 때문에 아군 오사가 일어날 확률도 매우 높아 포병이 대강의 좌표를 알아도 마구 쏠 형편이 못 되었다. 이 때문에 현실적으로 보이지도 않는 곳의 적을 포격해야 하는 포병이 정확하게 목표를 타격하기란 불가능했으며, 보병을 이용해 목표 좌표를 확실히 확인하고 탄착 여부를 관측하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했지만 적의 대응 사격이나 누전, 쥐에 의한 피해, 기타 사고, 발전하지 못한 통신 수단 등으로 인해 전선의 보병과 후방의 포병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통신을 주고받기 어려웠다. 그렇게 보조가 안 맞아서 일어난 일이 위에 말한 사태이다.
이런 점 때문에 초 단위까지 싱크로시킨 시계들을 이용해서 포격이 끝나자마자 돌격하는 방법을 써먹기도 했지만 기술력이나 착오, 또는 기타 이유들로 그 시계들이 어긋난다면 꼼짝없이 자국의 청년들을 적국의 기관총 앞에 조공하거나 아군 포병대 밥으로 던져줄 수 있다는 문제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 갈리폴리 상륙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 사전 포격이 보병 부대의 돌격 예정 시간보다 한참 전에 끝나버렸다. 사실 한참이래봐야 몇 분에 불과하지만 그 정도면 적 참호의 병사들이 재정비를 마치기에는 차고 넘치는 시간이다. 그리고 몇 분 후 호주 보병 부대들이 돌격할 때 튀르크군은 이미 벙커에서 나와 기관총 세팅을 다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고 돌격하던 병사들은 그대로 떼죽음을 당했다. 물론 한 번에 돌격시켰을 리는 없고 여러 번에 걸쳐서 돌격시켰는데 처음 몇 번의 돌격에서 이 짓이 병사들이 기관총에 갈려나가는 개죽음이라는 걸 인지하긴 했지만 일단 사령부에서 돌격 명령이 내려왔기도 했고 어차피 기관총에 맞아 죽은 병사들은 말이 없기도 했기 때문에 2~3만 명에 달하는 청년들을 그냥 그대로 튀르크군의 기관총 밥으로 던져주고 말았다.
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진짜로 75mm 구경의 포도 매우 희귀한 판이고, 양국 모두 총력전 상황을 고려하지 않아 준비한 포탄도 부족하였다. 또한 당시 중포들은 특수 제작하여 전략적인 목적으로 사용될 만큼 전선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힘들었으며, 전쟁 후반에서야 참호를 갈아엎어버릴 화력의 중포와 숫자를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보병과 포병의 이론상의 완벽한 유기적인 협동은 2차 세계 대전이 되어서야 실현되었는데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무선 통신이었다. 1차 세계 대전 때는 유일한 장거리 송신 수단이 유선 통신 장비 뿐이었고 유선을 안 쓰는 것은 깃발 신호나 전서구 뿐이었다.[28] 이러니 참호에 적을 몰아내고 나서 점령해도 증원이나 포격 지원을 할 수가 없었다.
좀 무식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 나온 때는 1차 세계대전 후반이었다. 처음에는 전선에 야포를 골고루 배치하여 적 참호선에 넓게 포탄을 뿌렸는데, 이게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인지한 협상국은 포병 교리를 모든 중포와 포를 총동원해 끌어모아서 한 지역에다 퍼부어버리는 전술로 바꿨다. 이러면 철조망이든 참호든 거기를 지키는 보병과 함께 아예 흙에 파묻어버리고 덤으로 유선 통신망도 죄다 망가지기 때문에 제대로 된 방어가 아예 불가능해진다. 이 전술은 매우 효율적이었고 이 방법을 통해 협상국은 독일의 철통 방어선인 힌덴부르크 선의 오랜 교착상태를 무너뜨리고 천천히 독일의 심장부를 향해 진격해 나갔다.
실제로 참호 속 병사들의 스트레스와는 별개로 참호전은 병사들의 생존률을 엄청나게 올려준 전술이었다. 엘랑 비탈에 미쳐서 공격 의지가 참호의 방어력을 뚫을 수 있다고 착각했던 프랑스군은 140만 전사자 중 60만 명을 전쟁 첫 해인 1914년, 그것도 5달 만에 날려먹었는데, 교리를 바꾸고 나서는 사상자 수가 확 줄어들었다. 이 덕분에 실제 사상자 비율도 상당히 떨어졌는데, 사상자 수가 많았던 이유는 제1차 세계 대전의 군인 사상자는 산업화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 가능해져서 발생한 것이지, 비율로 따지면 나폴레옹 전쟁은 물론 남북 전쟁 시기보다도 상당히 낮아졌다.
이걸 사람 대 사람의 검투나 격투에 비유하자면, 두 선수가 철저하게 가드를 올리고 대치한다면 서로 몇 대 때리더라도 치명상만큼은 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 대 사람의 충돌이 아닌 집단 대 집단의 충돌 상황에서 이러한 대치 상황을 유지하다보니 그 집단 속의 병사 입장에서는 목숨만 붙어있을 뿐 죽을 맛이라는 게 문제일 뿐이다. 쉽게 말해 참호전으로 고통받는 병사 개개인의 신세는 전장에서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철저한 소모품이라 할 수 있는 위치였다.
시대별 전투 사상율의 변화 - 출처: 무기체계와 전쟁
다만 그렇다고 해서 각국 수뇌부가 당시로서는 최선의 대응을 했다는 식으로 마냥 면죄부를 주는 것은 매우 어렵다. 프랑스군의 공세숭배(Culte de l'offensive) 사상만 살펴봐도 엄청난 막장인데, 공격제일주의의 창시자 그랑메종 육군 대령은 이런 사상을 극대화시켜 교본에도 "전통으로 돌아가는 프랑스 육군은 공세 외에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같은 구절을 넣고야 말았다. 엘랑 비탈 사상으로 잘못 알려진 공격제일주의 교리는 전초 프랑스 육군의 극심한 인명 피해의 주범으로 평가받는다.
영국 육군 또한 포병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부정확하고 포탄은 품질이 낮았으며 지휘부에서는 피해 상황조차 제대로 모르는 등, 전장에서 다소 혼란이 있을 만함을 고려해도 도저히 옹호하지 못 할 행태를 보였다. 이런 극심한 병력 소모로 인해 협상군 및 동맹군, 특히 영국과 독일은 여단~사단 규모로 해군 병력을 차출해 참호에 투입시키기도 했다. 진창에서 구르기 싫어서 병사가 아닌 수병을 택한 입장에선 그야말로 날벼락이다.
덕분에 영국과 프랑스는 젊은 청년층을 너무 많이 잃어 뒷날 일어나는 제2차 세계 대전 초반에 엄청나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방어전 일변도로 나서게 된다. 분명 전투의 전사자 비율 자체는 줄었지만, 과거의 상비군은 민간인과 완전히 다르게 운영했던 반면, 1차 대전부터는 전쟁의 양상이 총력전으로 바뀌면서 투입 병력 자체의 규모가 비교하지 못 할 만큼 늘었고 노동 인구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참호전하면 기관총 앞에 갈리는 병사들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일단 돌격을 하면 적 참호에 도달할 확률은 낮지 않았다. 참호는 진지가 아니고 선형이기 때문에, 아무리 기관총을 촘촘히 배치해도 모든 범위를 커버할 수는 없었고, 사상자가 발상하더라도 일단 적 참호에 도달은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후에 점령을 할 수 있느냐, 점령을 해도 지킬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6. 타개책
참호전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던 교착상태였다. 기관총, 저격수, 철조망으로 넓은 영역에 걸쳐 접근을 거부하는 참호선은 기존의 보병 중심 전술로 상대할 수 없었다. 설령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고 적 참호까지 닿는다 하더라도 그 안에 뛰어드는 순간 넓은 개활지에서의 전투를 상정한 대부분 병사들의 장비는 쓸모가 없어졌기에, 또 한 번 막대한 피해를 견뎌내야 했다. 1미터가 넘었던 대부분 국가의 제식소총은 참호 벽에 걸리기 일쑤였고, 어떤 것은 총검을 달면 병사의 키보다 길어지기도 했다. 총을 조준해서 쏘는 것보다 달려들어 두들겨 패는 것이 더 빠른 이 곳에서는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당시 유럽 열강들이 그렇게도 낮잡아 봤던 "야만적인" 근접전이 이루어졌으며, 지급되는 총검마저도 지나치게 긴 날 때문에 손에 들고 쓰기 부적합해 트렌치 클럽, 트렌치 나이프 등, 단지 참호에서 싸워 살아남기 위한 무기들이 병사들에 의해 급조되거나 개발 후 지급되었고, 좁은 공간에서 운용하기 편한 권총과 근접 무기의 조합이 선호되었다.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양 진영은 계속해서 새로운 전술과 병기를 개발했다. 먼저 기존에 정찰 임무를 맡던 기병이 참호와 기관총, 철조망으로 인해 그 능력을 상실하자 대신 기구, 그리고 신기술인 항공기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다만 1차 세계대전 무렵엔 비행 속도가 느려 기관총이나 대공포도 아닌 고작 소총에 맞고 격추당하는 일도 종종 있기는 했다.
또한 장전을 뒤로 하기 때문에 포신을 길게 만들 수 있는 후장식 대구경 장포신 곡사포의 발달로 사거리가 무시무시하게 늘어난 포병은 이제 육안 관측이 아닌 이들이 정찰을 통해 찍어준 좌표에 맞추어 보이지도 않는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포병은 전쟁 후반기에는 보병의 진격 속도에 정확히 맞춰 이동 화망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전술의 발전을 이룬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항공 전력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처음에는 정찰로 좌표를 찍어주는 것이 목표였던 육군 항공대는 서로를 견제하려는 공중전을 거치면서 나중에는 전술 폭격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대규모가 된다. 바로 공군의 탄생이다.
포병을 활용한 참호 외부의 지원이 아닌, 참호 그 자체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한 시도 또한 여러 가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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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협상군의 경우 방호력과 화력을 겸비한 차량으로서 보병 전진에 가장 큰 장애물인 철조망을 짓누르고 적 참호를 돌파하는 Mk 시리즈 등의 전차를 발명하여 투입했다. 독일군도 Mk 시리즈에 대항하기 위해 A7V 같은 전차를 만들긴 했지만, 그다지 좋은 성과를 거두진 못하였다. 어쨌든 전차의 대두로 참호전에서 필수 방어선 철조망을 철거하자 전차 뒤에서 엄호받으며 따라오던 보병이 그 길을 통해 토치카까지 가는 피해가 줄어들게 되면서 참호전은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초기 전차들은 내구성과 운용방식에 문제가 많았으나, 이전까지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무기였기에 예상된 일이었다. 일단 많이 만들어서 밀어붙이면 몇몇은 끝내 참호를 돌파할 것이었고, 그렇게 뚫린 선으로 보병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협상국은 적 참호 지하까지 여러 개의 갱도를 파서 대량의 폭약을 매설하여 폭파시켜 보기도 했다. 공병을 이용하여 적 진지의 지하를 침하시키는 전략은 옛부터 종종 있었지만, 폭약의 발전으로 인해 단순히 적 진지를 '침하'시키는 정도로만 끝나지 않았다. 광산 노동자와 기술자들을 훈련시킨 후 공병 부대로 참전시켰는데, 이들은 참호 지하에 갱도를 파는 일 뿐만 아니라, 청진기를 이용하여 적 공병과 갱도 위치를 파악하는 일, 적의 갱도를 공격하거나 점령하는 일 등을 맡았다.
갱도 전쟁 중에서는 호주 육군 공병대가 참여한 60고지 전투가 매우 유명하다. 당시 전장이었던 곳에는 아직도 폭파되지 않은 거대 지뢰 2개소나 남아 있어서, 1950년대에 그 하나가 낙뢰로 폭발한 적도 있다. 덕분에 참호와 그 파괴 공작을 위한 이런 대공사를 거치면서 공병은 전에 없이 큰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이 모든 난장판이 끝난 뒤, 1918년의 각국 군대는 이미 1914년 처음 전쟁을 시작했던 때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군대가 되어 있었다. 보병과 기갑, 항공, 포병이 유기적으로 조합되어 적의 전선을 돌파하고 목표를 타격하는 현대전의 기본적인 양상이 바로 참호전이라는 강철과 진흙, 피로 도배된 요람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끔찍한 참호전 속에서 교훈을 얻은 인류는 항공기, 전차, 공병과 전술적 타격이란 개념을 만들고, 2차대전에서는 아예 최소한의 피해로 분쟁을 종결시키고자 핵무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저 비상식적인 위력의 핵무기의 탄생이 오히려 전쟁을 방지하는 강력한 억지력으로 자리잡아 2차대전 이후 강대국과 강대국간의 전면전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7. 현대의 참호전
현대전에서는 폭격, 벙커버스터, 열압력화기, 전차 등 참호전과 같은 고착상태를 타개할 방법이 차고 넘친다. 현대전에서는 1차 대전 이래 참호를 돌파하려는 노력이 이어지면서 각종 화기 및 기갑과 항공 전력이 발전해, 제1차 세계 대전처럼 대규모 참호전이 벌어질 가능성은 낮다.박격포와 자주포 등 곡사화기의 정확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하였고, 공중폭발탄 등 신형 포탄이 대거 등장하여 포격만으로도 피해가 막심하다. 그리고 공격 측이 제대로 작정하고 항공폭탄급 열압력탄이나 소이탄을 떨어뜨리면, 참호는 그대로 무덤으로 변한다.
열압력탄이 아니긴 하지만 미군이 데이지커터로 이라크군의 참호와 지뢰밭을 통째로 날려버린 사례도 있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아르메니아의 참호를 아제르바이잔이 무인기로 가볍게 날려버린 사례도 있다.
걸프 전쟁 당시 이라크군은 '대포밥 전술'로 2선급 부대들을 참호에 배치한 뒤 소모전이 발생하면 후방에 대기중이던 1선급 부대로 미군을 격퇴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미군은 GPS를 이용해 수백km가 되는 거리를 우회해서 사막에서 전혀 낙오되지 않고 기동했으며 이라크군이 구축한 참호와 벙커들은 미군의 전차, 포병, 항공기의 공습에 녹아내렸다.
특히 화강암질이 대부분인 한반도 같은 산악 지대라면 참호 형성 자체를 못한다. 이런 지형은 폭약 없이 보병만으로 땅을 깊고 길게 파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참호가 파여있는 곳은 산 중에서도 토양이 많아 삽이 박히는 곳 정도 뿐이다. 평지에서는 위와 같이 참호를 돌파할 수단이 넘쳐난다.
이후의 전쟁에서는 참호전보다는 엄밀히 말해서는 교리도 형태도 전술도 다르지만 자연 및 인공적 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자의 철저한 은폐 및 엄폐, 공격자는 지형 및 노출의 불리함을 안고 보병 중심의 전력으로 대치 및 교전을 통해 조금씩 전진한다는 면에서 유사성이 있는 시가전, 애초에 양상부터가 전혀 다른 전장인 기동전이 바로 다음 전쟁부터 새롭게 나타났고, 이들이 현대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도 한국 육군에 장교나 부사관으로 임관해서 소대전투 전술을 배우거나 병사로 최전방에서 훈련이나 전시에 진지가 참호인 부대들로 자대배치 받으면 위의 내용과 전혀 다른게 없는걸 배운다. 실제로도 최전방 부대의 경우 아예 보병이 하는 훈련이 기동전, 참호전, 시가전 밖에 없으며 그나마 기동전도 부대 이동하다가 기습당했을 때 대응하는 수단으로 쓰기 위한 수준이나 공격시 적의 진지의 약점을 찾기 위한 수단 정도로만 쓴다. 메인은 참호전이고 시가전은 뒷전으로, 정확히는 그냥 길가다가 마을 지나는 중에 기습 받을 때나 하는 것 아니면 대침투작전(훈련)때 하는 것 정도로 취급한다. 진지공사때 거점에 만드는 진지도 참호와 다른점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전에서 참호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최신 병기의 활용이 제한되는 상황에서 지형적 유리함을 선점할 경우 참호가 가지는 장점은 여전하기 때문에 국지적인 참호전 양상은 현대에서도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
7.1. 이란-이라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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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에서 화학전을 치르는 이란군 보병[29] |
그 결과, 전쟁 후반기였던 1983년부터 1988년까지 대부분의 지상전이 참호전 형태로 진행되었다. 양측 모두 너무나 오랜 소모전으로 경제가 사실상 붕괴되어 전차나 공군은 거의 동원하지 못했고, 정말 급할 때만 조금씩 전선에 투입시켰다. 이 때문에 전장에는 주로 보병이 투입되었으며, 그 결과 무기만 현대식으로 바뀐 참호전이 부활했다. 심지어는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1차대전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는 화학전까지 실시되었는데, 원래 독가스의 사용은 국제법에 의하여 금지되지만 이란의 대반격으로 남부 유전지대가 위험해지자 이라크군이 그냥 쌩까고 썼다.[31]
7.2. 돈바스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돈바스 전쟁의 돈바스 전선에선 양측 모두 전선을 채운것은 대부분 보병들로 구성된 민병대였기 때문에 8년간 참호전이 이어졌다.이렇게 동부전선에 구축된 단단한 참호와 요새는 예상과 달리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도 러시아군에 맞서서 든든한 방어선이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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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을 따라 구축된 러시아군의 참호 |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도 참호전의 악명은 지속되었다. 이 전쟁은 개전 초까지만 해도 기갑병력을 동원하여 대규모 공세를 펼치는 러시아군을 방어하는 우크라이나군의 양상으로 진행되었지만, 이후 러시아군이 키이우 함락에 실패하고 전선이 동남부 지역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계절이 바뀌며 이동에 극심한 문제가 생겨 전선이 고착되자 양측 모두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이 날씨 문제로 이곳의 일부 참호들 또한 100년 전 서부전선의 악명처럼 바닥에 물이 차는 문제를 겪고 있으며, 이것 때문에 끝없는 화력 교환으로 바닥에 쌓이는 탄피를 그냥 놔두거나[32] 주변 폐허에서 모아 온 파편과 쓰레기로 바닥을 까는 등의 궁여지책이 행해지고 있다.
러시아군은 엄청난 규모의 포병 전력을 동원하여[33] 우크라이나의 참호를 끝없이 두드리는 방식으로 진격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군은 타국으로부터 공여받은 군사장비를 이용해 종심돌파이론을 실현하는 식으로 참호전을 파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후 2022년 11월 헤르손이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탈환되었고 이에 대응해 러시아군이 남부 지역에 대규모 참호를 파기 시작하면서, 러시아 진영에도 보병들의 참호전이 확대 추세다.
2023년도에 있던 우크라이나 대반격을 돈좌시킨 것 역시 이런 참호 등으로 이루어진 러시아의 대규모 재래식 방어선(수로비킨 선)이다. 당시 우크라이나군은 서방식 교리 등을 훈련받아 기동전을 펼치려 했으나 방어능력을 충실히 갖춘 참호선에 막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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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의 참호를 기습공격하는 우크라이나 해군특수부대 |
전투 양상만 보면 보병들이 참호 하나하나 침투해 들어가 무력화시키는 과정은 과거와 다를바 없지만, 전투 방식은 근래의 발전된 CQB/CQC를 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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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의 참호전 전술 자체는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술과 비슷한 점이 많다. 드론 등을 비롯한 각종 정찰자산으로 적 참호를 정찰한 뒤 방어지역에 집중포격을 가한 후 기갑차량의 지원을 받는 돌격소대가 전진하며 참호를 제압하여 확보하는 방식이고 미군의 참호전 전술 또한 비슷하다. 1차대전과 큰 차이점은 무인 드론을 이용한 공격이 참호전에 활용되는 점인데, 항공정찰과 동시에 폭발물을 공중에서 떨어뜨리거나 자폭드론을 활용해 참호 구석구석까지 들어가 적군 보병을 직접 공격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1차 세계대전 때처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쥐떼 문제로 병사들이 골치를 썩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병사들이 참호에서 고양이를 키운다고 한다. #
7.3. 기타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1998-2000)에서도 참호전 양상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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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시리아군의 고타 주 공세 당시 영상 |
시리아 내전에서도 간간히 보인다. 이 영상의 참호는 이슬람 반군 "자이쉬 알 이슬람"이 내전 초기부터 구축한 '죽음의 선'이며, 결국 돌파당할 때까지 시리아군과 공화국 수비대에 큰 피해를 주었다. 시리아의 사례는 공격 측이 넉넉한 화력과 체계적인 공군을 동원할 수 있는 사정이 못 된다면 참호가 여전히 유효한 방어수단인 것을 증명해주는 셈이다.
8. 매체에서
참호전의 생생한 묘사를 알고 싶다면 에리히 M.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보자. 그 외에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광의 길, 최근 영화로는 프랑스 영화 '인게이지먼트(Un Long Dimanche De Fiancailles, A Very Long Engagement)'나 스티븐 스필버그의 ' 워 호스(War Horse)'가 참호전의 완벽한 재현을 보여준다. 1917에서도 당시의 참호전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9. 각국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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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담
서유럽 전역에서 참호전이 펼쳐졌던 만큼, 프랑스의 베르됭 같은 지역에서는 지금도 참호전의 흔적을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비록 현재는 울창한 숲이 되었지만 100여년이 지났음에도 움푹 파인 불규칙적인 구덩이와, 언덕 곳곳에 남아 있는 참호의 흔적, 포격으로 파괴된 요새와 마을의 모습은 영화나 게임에 등장하는 광경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며, 조금만 걸었을 뿐임에도 다양한 모습을 지닌 참호들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다. 한편 베르됭과 같은 몇몇 격전지에는 인류사에 대한 기록과 반성의 의미로, 그리고 백년이 지난 현재에도 발견되지 않은 불발탄이 남아 있는 현실적인 위험 때문에 몇몇 장소를 출입제한하고 있다. 유럽 전역에서 불발탄이 발견되어 동네 뒷산에서 처리하는 것은 이따금 있는,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이다.격전지가 된 몇몇 마을들은 4년간 이어진 양측의 포격으로 거의 모든 시설이 파괴되어 전후에도 주민들이 돌아오지 못했고 그 상태로 숲이 자라나버려 사라졌지만 프랑스 당국은 아직도 이 마을들을 행정구역에서 지우지 않고 명예 시장도 계속 임명하고 있다.
[1]
화학전 상황인 경우 방독면까지 착용한 채 돌격하는 경우도 흔했다. 이프르 전투 이후 양측 모두 발사한 포탄의 상당수가 화학탄이었다.
[2]
이렇게 당시 북해부터 스위스 국경까지 참호선을 이은 것을 '바다를 향한 경주'라 부르기도 한다.
[3]
실제로 승기를 잡았던 연합군조차 독일이 항복하는 그 순간까지 독일 본토에 진입하지 못했다. 이는 전후 독일에서
배후중상설이 크게 유행하는 원인이 된다. 참혹했던 1차대전에서 파스샹달과 함께 손에 꼽히는 솜 전투에서 연합군이 밀어낸 거리가 10km인데 파리부터 베를린까지 500km가 넘는다.
[4]
이를 새퍼(Sapper)라 부른다. 삽질 및 참호를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 Sappe에서 유래했다.
[5]
참고: 프랑스 파견무관(attaché militaire)1)이 본 러일전쟁: 제0차 세계대전에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저자: 문종현
[6]
빌헬름 2세가 개전 직전 협상방안이 떠올랐다며 작전취소를 명령했으나 이미 병사들은 열차에 탑승했고 선발대는 벨기에 국경을 넘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결국 협상을 포기하게 된다.
[7]
당장 나폴레옹 전쟁 시절
러시아 원정에 할당된 나폴레옹군의 총병력이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였던 61만이었지만(통상적으로 인용되는 클라우제비츠의 주장), 이로부터 100년이 지난 1차 세계대전에서는 베르됭 한 곳에만 독일과 프랑스 모두 100만이 넘는 병력을 투입했다.
[8]
프랑스 입장에서는 프로이센에게 탈탈 털리며 굴욕적으로 패배한 보불전쟁이 끝난지 반 세기도 안 지났을 때다. 일반적인 진급 사이클을 생각해보면 보불전쟁 전후로 사병-위관급 장교(소위~대위)들이 계속 군문에 남았을 경우 영관-장성급에 포진될 시기가 1차대전 즈음이다. 여기에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 불어닥친 민족주의 광풍을 생각하면 복수심이 없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당장
샤를 드골만 해도 보불전쟁이 끝난 지 19년이 지난 1890년생임에도 보불전쟁의 복수와 민족주의 열기에 빠져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문을 시작한 케이스다.
[9]
후술하겠지만, 충격량을 줄이기 위해 아예 참호를 90도 각도로 파라고까지 했으며, 실제로 독일군의 참호는 열악한 상황 때문에 편차는 있었으나 구조 자체는 1차 세계대전 내내 최상급에 가까웠다.
[출처]
Reader's Digest Association, "Great Disasters : Dramatic True Stories of Nature's Awesome Powers", 1989.
[11]
뮌헨 협정,
가짜 전쟁 등.
[12]
왕립 해군 사단 특유의
방서모를 착용하고 있는 이들은 1916년 이전까지
영국 해군의
해군 육전대로 활동해 왔으며 이후 해상 활동이 줄어들고 지루한 참호전이 전개되자 육군으로 편입되었다.
[13]
유무선, 심지어
위성 통신까지 발달한 현재에도 폭격이나 포격, EMP 등으로 통신 상태가 개판이 날 것을 대비해 전령(연락병)은 연대, 대대 본부단위로 2-3명씩 할당되어 있다.
[14]
정확히는 공격군 입장에서 10시 혹은 2시 방향 정도. 대략 45도.
[15]
이런 사례는 후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오마하 해변에서 재현되었다. 이 당시에는 상륙작전 특유의 위험성 + 잘 설비된 벙커와 대인+대전차 지뢰 및 장애물 등 여러 방어선 + 수비선을 무너뜨려 줄 지원 화력 부실 + 당대 최강의 기관총 중 하나인
MG42가 어우러지며 보병들이 말 그대로 갈려나갔다.
[16]
출처: 《참호에서 보낸 1460일》
[17]
참고로 1차 인도차이나 전쟁부터 남베트남 패망(1955~1975)까지 약 20년간 발생한 미군의 전사자 수가 대략 5만 8천명이다. 1차세계대전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8]
1km당 10만명이면 1m당 100명, 다시 말해 전선을 고작 1cm 밀어내기 위해 사람 1명 이상의 목숨이 날아간 셈이다.
[19]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고양이만하게 살찐 쥐들이 고양이와 개를 물어죽인다는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장병들은 쥐들의 습격을 피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체인이 달린 마스크를 쓴 채 잠을 자기도 했다.
[20]
참호전을 다룬 프랑스 영화 인게이지먼트에서 주인공의 남자친구가 이 죄로 기소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다만, 자국군이 직접 처형하는 대신 비무장한 채로 참호 밖으로 나가게 해 독일군의 총탄에 맞아 죽도록 놔두는 것이 집행 방법이었다.
[21]
최초의 항생제는 1920년대 말에나 개발되었다. 그 이전에는 사소한 상처도 패혈증 등으로 직결되는 일이 굉장히 많았고, 특히 전쟁터에서의 총상은 깊게 파고 들어가는 특성상 치료는커녕 소독조차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감염이 생기기 전에 그냥 절단해 버리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22]
대부분 벨기에군과 영국군, 미군. 프랑스군은 북해 방향 저지대보다 알자스/로렌 방면을 비롯한 스위스 방향 고지대에 배치된 경우가 많아 그나마 좀 나았다.
[23]
목욕하기 위해 불을 피우면 연기와 김이 펄펄 올라와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어 그것이 실제로 가능했는지 의심을 산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포탄이 날아드는 제1선 참호에서 저 짓거리를 할 수는 없을 테지만, 위에 천을 깔거나 비교적 후방 지역에서 시행하는 등 하고자 하면 방법은 있다. 혹은 불을 피우지 않고 찬물 목욕을 하는 것은 일선 참호에서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겨울에는 얼어죽을 수도 있으니 불가능하겠지만 여름이라면 그럭저럭 할만 했을지도. 물론 참호전 상황에서 목욕이라는 사치를 즐길 수 있던 부대들은 극소수였던지라 대부분의 장병에겐 먼 나라 이야기였다.
[24]
정식명칭은 CSR(Combat Stress Reaction)이고
PTSD와는 다르다.
[25]
1차대전 당시 유럽인들이 가졌던 전쟁에 대한 인식은 현대인들의 기준에서는 대단히 기괴해 보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예를 들어
영국인들조차도 끔찍하게 맛없다고 여겼던 것으로 악명높은 통조림 전투식량으로 유명했던 매커너히(Maconochie)사는 신문 광고로 '매커니히 전투식량을 맛있게 먹은 군 장병들의 감사인사'를 자주 게재했는데, 심지어 개중에는 "돌격전 임무 수행 중 전사한 동료가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귀사의 제품을 맛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와 같이 해괴한 것도 있을 정도였다. 격전 중 전사한 군인이 최후의 순간에 자기 곁에 있는 전우에게 "아... 매커니히 통조림 더 못먹게 되어서 아쉬워..." 라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다는 것도 어이가 없지만, 현대인의 감성으로 보자면 조작을 하더라도 이런 어이없는 소리를 광고라고 떠들고 있으면 "군인을 모욕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고 되려 욕을 먹기 딱 좋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이게 광고거리였다.
[26]
후술할 내용과
제1차 세계 대전 문서에도 나와있다시피 무기 개발 역사에서 이 전쟁과 전투를 기점으로 다시 한번 분기점이 나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참호전을 타개하면서 보병들을 지원하기 위한 무기들이 많아지고, 2차 대전이 터지자 이런 무기들끼리 본격적으로 맞붙는
전차전,
공중전 위주로 흘러갔다.
[27]
레이더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군이 최초로 실전 배치하게 된다.
[28]
이 당시에도
무전기는 있었지만 덩치가 너무나 크고 구조가 복잡해서 도저히 야전에서는 쓸 수가 없었다.
[29]
사진 속 보병이 든 총기는 독일제 기관총
MG3이다.
[30]
이후 벌어진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을 생각하면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당시
미국과 이라크의 관계는 나름 괜찮은 편이었다.
이란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붕괴되면서 중동에서
이스라엘 외에
친미국가가 필요했던 미국이 적극적으로 이라크를 밀어줬기 때문.
[31]
이는 현재까지도 중일전쟁 이후 독가스가 전장에서 대규모로 쓰인 유일한 예시로 남게 되었다. 사실 이라크군은 원래부터 독가스를 굉장히 애용하는 편에 속했다. 당장 쿠르드족을 대량 학살할 때도 쓴 것이 독가스였다.
[32]
이미 물을 먹어 질척이는 흙에서는 탄피가 흙에 묻혀들어가며 지대를 고정하는 역할을 하기에 가능하다. 단단히 굳은 땅에 탄피가 쌓이면 박히지 않고 구르면서 병사들의 발이 미끄러질 것이다.
[33]
러시아의 포병 전력은 아직도 규모로는 확고한 세계 1위이다. 구소련의 교리부터가 머릿수 많은 기갑전력을 이용한 종심돌파 이외에도 대량의 포병을 중심으로 한 화력전이었기에 사실 당연한 결과이긴 하다.
[34]
한국어, 참호전
[35]
중국어, qiànháozhàn
[36]
일본어, ざんごうせ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