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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00:12:37

제국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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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udienz_Reichskammergericht.jpg

1. 개요2. 상세

1. 개요

Reichskammergericht

신성 로마 제국 사법기관. 1495년에 창설되어 제국추밀원과 함께 제국의 양대 최고 사법기구였다.

2. 상세

제국 내에서 이뤄진 모든 법적 절차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하지만 영지를 소유한 제후가 불가침 특권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제국대법원도 함부로 개입하기 어려웠다. 그 영지 안에서만큼은 해당 제후가 최고 판사의 역할을 겸했기 때문. 나머지 하나는 형법 영역이었는데, 이건 정말 기본 절차를 위반했을 경우가 아니고서야 황제와 제후들의 재량에 맡겼다.

판결 결과가 어마어마하게 늦게 나오기로 악명높았다. 심지어 소송 결과가 나오는 데에 수백 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어찌나 오래 걸렸던지 일부 소송은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을 정도.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해당사자들이 소송에 관심을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빠른 판결을 촉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권력이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제국대법원은 필요할 때는 며칠만에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의외로 독일 시민들의 권리 증진에 도움이 된 기구다. 특히 주택의 불가침성이나 무역의 자유는 이 제국대법원을 통해서 제국에 도입됐고 1700년대 후반에는 프랑스 혁명 도중의 프랑스 의회에 비견될 정도로 의견이 활발하게 개진되는 공간이었다.

처음에는 프랑크푸르트에 대법원이 소재했다. 나중에 보름스, 아우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레겐스부르크, 슈파이어, 에슬링겐, 슈파이어 순서대로 옮겨갔다. 1527년에 슈파이어로 옮겨져 약 160년 정도 머무르다가, 1689년에 베츨라어로 옮겨져 제국이 1806년 해체될 때까지 쭉 베츨라어에 머물렀다.

원래는 제국대법원 대신 황제가 직접 주재하는 추밀원(Hofgericht)이 최고 법원의 역할을 맡아 전담했다. 하지만 이 법원은 황제 개인에게 속해있는 법원이었기 때문에 황제가 국외에 있을 때는 개회하지도 않았고 황제가 바뀔 때마다 법원 판사들도 물갈이됐다. 1400년대 들어 황제가 절대적인 권위를 잃어버리자 사람들은 추밀원을 신뢰하지 않았고, 결국 제국의 최고 사법기구 자리는 제국대법원이 차지했다.

제국대법원의 관장 분야는 갈수록 확대됐다. 치안 위반, 재산 압류, 투옥, 국고 탄원, 황제의 명령 위반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대한 소송을 받았다. 다만 제국의회에서 통과된 법령, 제후들 사이의 재산 문제는 대법원에서 받지 않았다. 제후들에 관련된 소송들은 형사 고발 및 황실 영지를 제외하면 모두 제국추밀원 쪽으로 갔다.

16세기 이래로 또다른 사법부인 제국추밀원과 각을 세우며 경쟁했고 제국대법원은 정치가 아닌 사법 관련 업무만 처리하는 쪽으로 변해갔다. 제국추밀원은 황제의 개인 고문들로 구성된 궁정법원으로 사실상 황제와 그 측근의 뜻에 따라서 판결을 내렸고, 당연히 제국대법원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 그러다가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소를 먼저 접수하는 쪽이 맡아 처리한다'라는 원칙이 세워지며 둘 사이의 기싸움은 일단락된다.

제국대법원의 판사들은 황제와 제국관구의 영주들이 임명했다. 황제는 명문 귀족들 중 대법원장을 뽑았고 부장판사와 소수의 판사들을 임명했다. 대법원 판사들 대부분은 영주들이 임명했다. 원래 판사들의 절반은 제국기사, 절반은 법학과 졸업생들 중에서 뽑았는데, 1548년 이후부터는 모든 판사들을 법학과 학위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만 가려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