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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00:19:12

슐리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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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3. 문제점
3.1. 계획 시3.2. 실행 시3.3. 오스트리아와의 불통
4. 결과5. 몰트케가 망쳤는가?6. 여담7.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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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ein Plan überlebt die erste Feindberührung.
적과의 첫 접촉 이후까지 살아남는 계획은 없다.[1]
헬무트 폰 몰트케

슐리펜 계획(Schlieffen-Plan)은 프로이센군 총참모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 원수가 1905년 12월 작성한 독일 제국의 전쟁 계획이다. 작성자인 슐리펜 원수의 이름에서 따왔다. 프랑스의 강력한 방어선을 회피하기 위해 벨기에 네덜란드를 통과하여 프랑스를 침공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본 계획은 7월 위기를 악화시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끈 여러 결정적 요인들 중 하나로 꼽힌다. 몰트케 참모총장에 의해 수정된 계획이 실행되어 전쟁의 초반부 양상을 결정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더 나아간 미래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침공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도 평가된다.

2. 내용

The Great War에서 설명한 슐리펜 계획

빌헬름 2세 세계 정책으로 러시아 제국은 독일과의 동맹을 결렬하고 1892년 프랑스 공화국 러불동맹을 체결했는데, 이로 인해 독일 제국은 양면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슐리펜 계획의 기본 구조는 이러한 양면전쟁을 타파하기 위해 군사력 동원이 느릴 것으로 예측되는 러시아가 군대를 동원하는 시간을 활용해 프랑스를 빠르게 제압한 뒤[2] 주력군을 재빨리 동부전선으로 돌려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것이다.

당시 독일 제국군 참모본부는 러시아 제국의 전근대적인 행정체계와 부실한 철도 수송망을 고려해 예비군의 동원, 편성, 훈련, 최전선까지의 수송까지 최소 2달(6주) 이상이 걸리리라 예상했다.[3] 따라서 러시아 전선에는 최소한의 독일 병력만 배치하여 견제만을 시도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막기로 한다.[4]

프랑스를 치기 위해 슐리펜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격전지인 스당 등의 중부전선 지역을 회피하고 우익에 전력을 집중하여 대우회를 통해 파리를 북부에서 포위한 다음 프랑스군을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프랑스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상실한 실지인 엘자스-로트링겐의 확보를 위해 우익[5]으로 주력을 투입한다는 제17계획을 세운 상태였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헛점을 찌른, 설정만으로는 잘 짠 계획이다.

정작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독일 본토로 하는 공세야말로 프랑스로서는 가장 안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럴 가능성은 적다 판단했고, 프랑스가 먼저 벨기에를 통해 공세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벨기에는 우방으로 삼아야 한다고 계획하였다. 프랑스가 제17계획을 만든 까닭은 그래도 독일이 차마 중립국인 벨기에를 못 침공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인데, 안타깝게도 그 때 독일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더불어 당시 독일의 예비군 동원 능력은 프랑스를 훨씬 상회했으니 전쟁이 터지면 즉각적인 공격으로 평시 전력을 최대한 강력하게 써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따라서 이 계획을 간략하게 간추리면,

러시아 방면에 할당된 사단들의 수가 매우 적은데, 그 이유는 상정된 상황이 벌어졌을 시 독일 제국의 육군 전력이 모든 지역에 전력을 할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육군에서는 예산 확충을 통해 장비라도 마련하려 했으나 해군이 함대법 등 건함 경쟁에 집중하고 있어 정부 예산을 엄청나게 소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슐리펜 계획은 대전기 동안 독일의 프랑스 침략 전략에 기반을 닦고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그 자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실패하였으나 이 계획에 영향을 받은 훗날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침공이 프랑스를 6주 만에 굴복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3. 문제점

전쟁이란 따지고 보면 대부분 불확실성의 영역에 속한다. 군사행동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 중 4분의 3은 지극히 애매하고 불확실한 구름에 잠겨 있다. 전쟁은 우연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슐리펜 계획은 근본적으로 플랜 B를 효율적으로 세울 수 없는 단기결전을 염두에 둔 매우 빡빡한 작전이었다.[6] 독일군의 방대하다는 예비군은 실제로 정규군과 비교해 훈련의 질도 떨어지고 포병과 기관총과 같은 화력 지원 체계도 부족한 상황이어서 제대로된 작전 수행이 힘들었다. 더군다나 이 계획이 기본적으로 속도에 기반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속도의 핵심인 철도와 보급 문제에 있어서는 구멍 투성이었다. 단 한번의 중대한 실수가 계획 전체를 붕괴시킬 수 있었으며 실제로도 독일은 슐리펜 계획을 통해 양면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은 프랑스와 러시아, 그리고 벨기에를 침공함으로 영국까지 한꺼번에 상대하는[7] 엄청난 계획인데도 독일 정부 내에서 전혀 소통이 없었다는 것이다. 외무장관이나 재상과 같은 민간 정책결정자는 물론이고 해군이나 육군 내 다른 조직과의 협의도 거의 전무해 일급 비밀인 전쟁계획을 다른 부서와 공유해 문제점을 점검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이 슐리펜 계획은 슐리펜이 퇴임한 1906년에 메모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전쟁부는 6년이 지난 1912년이 되어서야 슐리펜 계획의 존재를 알았다.

3.1. 계획 시

먼저 '42일'이라는 시간 안에 프랑스를 잡아야만 했고,[8] 프랑스가 러시아에 철도 차관을 제공하면서 러시아의 동원 능력이 향상되어 슐리펜 생전보다도 시간 제한이 짧아졌다. 이 때문에 계획의 유연성이 아주 떨어져 일단 발동하면 멈추거나 바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실제 계획(소몰트케의 수정안)을 따를 때 여실하게 드러났다.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빌헬름 2세가 참모총장 소몰트케에게 계획 변경을 요청했지만, 몰트케는 수많은 시간표로 서로 이은 계획을[9] 그렇게 단시간 안에 못 바꾼다고 답변하며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 그날 밤, 뒤늦게 황제 빌헬름 2세가 영국과 타협할 수 있으니 군대를 멈추라고 명하자 몰트케는 반쯤 넋이 나가서 "폐하, 이미 시작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는 이미 멈추지 못할 수준까지 왔다는 뜻이었지만[10] 당시 기술의 한계로 정밀시계처럼 맞춰놓은 철도사용체계를 멈추는 그 순간, 한 달 동안은 공격은 꿈도 못 꾸고 방어를 위한 열차 동원조차도 불가능해지는 큰 문제가 발생해버리는 것이었다. 이 때 영국과 프랑스가 그 타이밍에 독일로 치고 들어오면 독일로서는 얼마 안되는 기병연대들이 자력행군하는 것 외엔 손도 못쓰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는 일의 어려움(굽시니스트의 오만잡상툰)

3.2. 실행 시

이러한 원초적 약점에 더해 소몰트케는 슐리펜이 유언으로까지 남겼던[14] 우익강화 방침을 버리고 우익:좌익의 병력비를 7:1에서 6:2로 약화시켰다.

벨기에 방면 병력의 약 1/7이 서부전선의 좌익인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간 것이라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지만, 네덜란드의 저항을 우려해서 마스트리흐트 돌출부를 점거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줄어든 우익 병력이 이동할 통로가 더 좁아짐은 당연했다.[15][16] 또한 군대로 위협하면 순순히 무릎을 꿇으리라 생각했던 벨기에[17]가 예상외로 거세게 저항하는 바람에 계획은 더 지체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러시아 제국이 동원을 일찍 끝내고 대규모의 군대를 동부전선에 투입하면서 개전 초 동프로이센이 위험해졌고, 이에 따라 슐리펜 계획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예비대를 지원군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이 예비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이 승리하면서 동부전선은 안정화되었고, 서부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다시 열차를 타고 돌아갔다. 하지만 서부전선도 예비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이 패배하면서 단기전의 가능성이 사라져고 참호전으로 전선이 고착화되어버렸다. 끝내 이 금쪽같은 병력은 철도에 탄채 독일 영토를 동서로 왔다갔다만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면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독일 제국군은 단기결전에 실패하고 그렇게나 두려워하던 양면전쟁, 장기전의 늪에 빠저든다.

서부전선에서도 본래 프랑스군을 붙들어 두기로 했던 독일 제국군의 좌익이 예상외로 선전하자, 단익포위에서 양익포위를 위한 전선돌파를 명령하는 등 갖가지 전투지도상의 실책을 연발한다. 괜히 눈 앞의 상황에 매달리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 버리면서 단기결전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것이다.

전략적으로 포기하기로 한 동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의 시작이었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의 실력자들은 불안감이 심했다. 러시아가 생각보다 빨리 참전했을 때, 러시아가 동원한 군대는 70개 사단이었다. 하지만 이에 맞설 독일 제국군은 겨우 12개 사단 정도였다. 그럼에도 소몰트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을 공격할 때 독일 제국군의 즉각적인 지원 의사를 표명했다. 물론 독일에겐 그럴 여력이 없었으므로 명백한 소몰트케의 거짓말.

끝내 뛰어난 전략가였던 참모 막스 호프만의 건의로 타넨베르크 전투 마수리안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이 대승을 거두지만, 이건 결과론에 가깝다. 슐리펜은 동부전선은 프랑스를 쓰러뜨릴 때까지 전황유지만 하면 된다고 봤기 때문에, 여차하면 동프로이센을 (일시적으로) 내주는 전략적 후퇴도 고려한다는 강경책이었지만, 동프로이센을 포함한 동부 지역을 근거로 하고 있던 독일 제국의 상층부[18]는 이를 결코 수용할 수 없었으며 이건 독일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동부전선의 강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본래 슐리펜 계획은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관계가 틀어진 덕분에 단기간에 결판을 봐야 승산이 있다는 결론에서 세워진 전략이었으니, 끝내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유지한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틀어버린 빌헬름 2세가 모든 배경의 근원임을 빼면[19] 누가 더 문제라고 일컬을 수도 없었다.

3.3. 오스트리아와의 불통

러시아와 프랑스가 더욱 가까워지고 동원 가능 시간이 갈수록 촉박해짐에 따라,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사적 공조 필요성은 나날이 증대되었다. 우선 독일 제국군으로서는 빡빡한 슐리펜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는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의 전력을 늦춰주어야 했다. 오스트리아군 역시, 그들이 세운 B, R, B+R계획 중 어떤 것이든 세계 2위의 육군을 보유한 러시아 제국군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독일군이 폴란드 방면에서 러시아를 반드시 견제해주어야 했다.

이렇듯 양 군대는 서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 자체가 달랐다. 독일은 우선 가장 위협적인 적인 프랑스를 목표로 했으므로 동부전선의 러시아군은 독일 1개 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전담해야 했다. 반면 남부의 세르비아, 그리고 동북부의 러시아에 포위된 형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입장에서는 독일군의 주력이 프랑스가 아니라 폴란드 돌출부에 포진한 러시아를 상대해 주어야 했다. 때문에 소 몰트케 회첸도르프의 참모부 간에는 합동 작전을 위한 의견 조율을 통해 양 군의 목표를 일치시키는 과정을 가지거나, 하다못해 서로의 계획이 어떤지라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통이 전혀 없었다. 두 군대의 참모부는 서로의 계획에 대해 몰랐으며, 서로가 자신의 계획에 맞춰 움직이기를 당연하다는 듯이 가정하였을 뿐이었다. 7월 위기가 시작되자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지원을 요청하고 독일 황제와 참모부 역시 이에 화답하였으나, 실제 각국의 전략목표나 병력 운용에 대한 정보 공유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불통에 대해 사학자 A.J.P. 테일러는 저서 "기차 시간표 전쟁"에서 놀라울 정도라고 표현했다. 현대 독일 연방군 군사사연구소의 연구원인 게하르트 그로스 대령 역시 저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에서 같은 평가를 내렸다.

결국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지원 의사를 믿은 오스트리아군은 자신들의 B 계획에 따라 황태자 암살단을 도운 세르비아를 응징하러 발칸 반도로 몰려가버렸으나, 막상 독일군이 자신들의 작계에 따라 프랑스를 향해 진격하는 것에 경악했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계획을 알지 못했던 독일군은, 적인 러시아군이 예상 외로 동원계획을 빠르게 마무리짓는 반면 아군의 방어선은 그다지 강화되지 않은 모습에 당황했다.

위기감을 느낀 오스트리아는 곧 계획을 B+R계획으로 전환하였으나 이로 인해 발칸반도의 전황은 완전한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급작스러운 계획 변동으로 인해 분과 초를 다투는 철도 시간표와 동원 계획이 어긋난 것이다. 그 결과 작계가 꼬이며 세르비아 침공을 증원할 예비대인 A집단군이 갈리치아로 가버린 오스트리아의 발칸 최소집단군은 결사항전의 의지로 무장한 채 산과 강을 따라 방어선을 세운 세르비아군을 밀어내지 못했다. 반면 갈리치아에 전개되었던 B집단군과 발칸으로 향하다 다시 뒤돌아 갈리치아로 올라간 A집단군은 빠르게 동원을 완료한 러시아군의 전열 앞으로 축차투입되어 처절하게 박살났다.

마찬가지로 독일 역시 1개 군단을 서부에서 빼내어 동부전선으로 보내야만 했으며 이는 슐리펜 계획의 세밀한 운용계획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독일이 해당 군단을 서부전선에서 빼내지 않았어도 슐리펜 계획은 실패했으리라는 것이 중론이지만, 이들을 빼낸 것 때문에 서부전선의 독일군 전력이 확연하게 약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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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회중시계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빌헬름 2세가 오토 폰 보겐호프(Otto von Bogenhoff) 장군에게 수여한 IWC 회중시계다. 시계 케이스에 적혀있는 독일어는 'FELDZUG GEG FRANKREICH RUSSLAND ENGLAND usw'로 FELDZUG는 전역이란 뜻이고, GEG는 ~에 대하여란 뜻이며, FRANKREICH RUSSLAND ENGLAND는 각각 프랑스, 러시아, 영국. usw[20]는 라틴어의 etc. 와 같은 뜻으로, 기타 등등이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 프랑스, 러시아, 영국, 기타 등등 전역이란 얘기인데, 당시 독일은 말 그대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였다.

계획을 세우는 데 가장 큰 적은 완벽한 계획을 꿈꾸는 것이라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금언을 무시한 결과 슐리펜 계획은 1차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초반기에는 슐리펜이 프랑스의 가장 하책이라고 여긴 알자스 진공을 프랑스군이 기꺼이 해서 장밋빛 미래가 보였으나, 벨기에의 저항으로 이레 가까이 전선이 벨기에 방면에 묶였고, 센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버텨보려는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의 작전[21]을 프랑스군 소장파와 노장 조제프 갈리에니가 마른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수행해내어 독일 제국의 전략적 목표 좌절이라는 역사적인 결과를 냈다.

끝내 이 싸움에서 측면을 찔린 독일 제국군이 안정적인 고지대를 선점하러 전선을 조금 물리면서, 서부 전선은 북해 연안에서 스위스 국경지대까지 참호가 형성됐다. 그리고 피로 피를 씻는 4년 간의 참호전이 열렸다.

그리고 이 참호전 속에서 굴렀던 아돌프 히틀러는 극도로 공산주의를 혐오했지만, 1939년 전격적으로 독소 불가침조약을 성사시키면서 전선을 서쪽으로 한정하고 파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어떤 뜻에서 보자면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서쪽으로만 급속 진군한 독일 국방군의 모습이야말로 슐리펜 계획의 진정한 형태였다.

독일에서 프랑스로 진격할 때 알자스-로렌 방면은 라인 강과 보주[22] 산맥 및 고지대를 지나야만 하니, 신속하게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내려면 저지대 지역인 베네룩스 3국을 강행통과해야 한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여서, 신속하게 독일 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려면 역시 베네룩스 3국을 강행통과해야 하며, 실제로 1913년의 프랑스군 참모총장은 독일 제국과의 전쟁 시 벨기에를 통과해서 독일 영토로 진격하자는 제안을 총리에게 했다. 슐리펜 계획에서 설정한 돌파경로는 보편타당한 셈. 그러나 이건 프랑스 입장에서나 그럴 듯한 이야기지 예정에도 없는 양면전쟁을 벌여서 시간에 쫓기는 독일 제국에게는 울며 겨자먹는 도박일 뿐이었다.

1차대전과 슐리펜 계획은 전쟁에서의 철도의 역할을 보여줬지만 그 한계 또한 같이 드러냈다. 협상군과 동맹군은 철도를 이용해 엄청난 수의 병력을 동원하는데 성공했고, 그 부대를 유지할 엄청난 양의 보급품을 철도로 수송했다. 하지만 철도 종단점은 전투부대를 따라가기엔 너무 경직되었으며,[23] 따라서 대부분의 전투부대는 철도 종단점과 한참 떨어져서 행동해야 했다. 게다가 철도 종단점과 전투부대 사이를 이어줄 수송부대는 전쟁 초기의 병력동원 시점에서부터 전투부대와 떨어져버렸다.[24] 결국 철도역에는 피복과 탄약이 굴러다니고 전투식량이 썩어가고 있었지만, 전선에 도달하는 양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 당시에도 구데리안이 화물차를 전투용으로 개조하고 싶다고 말했던 일화가 있던 만큼[25] 화물차가 있긴 있었지만 일반 차량조차도 최신문물로 취급받을 정도로 대중화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고 현가장치도 기술적 개념 제시는 몰라도 실용화는 저조한 상태였다.

이렇기 때문에 보급전의 역사로 유명한 마르틴 반 크레펠트는 이를 넘어서 슐리펜 작전 원안은 보급계획이 관념적 수준이었으며 오히려 사실성 있게 재편한 것이 소몰트케의 조정안이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넘어서 테렌스 쥐베르는 슐리펜 계획은 그저 독일의 전쟁계획이 1차대전을 일으켰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독일의 정신승리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일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테렌스 홈즈나 로버트 홀리같은 학자들에게 반박당하기도 했다.

세계대전사로 유명한 존 키건은 슐리펜 계획은 현실적이고 수학적, 지리적 현실을 반영한 작전이나, 프랑스와 벨기에의 인프라를 이용하기까지 비포장도로 수백 km를 자력으로 이동해야 하고, 독일군이 프랑스와 벨기에의 변경에 설치된 인프라를 확보한다 하더라도 해당지역의 빈약한 인프라로는 파리 점령에 필요한 병력을 착실히 전개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라며 가망이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결정적으로, 설령 파리를 점령했다고 한들 2차 세계대전처럼 염전 사상이 퍼지지 않았으며 좌우갈등도 적은 상태의 프랑스 제3공화국이 곧바로 항복을 했을 가능성은 미지수였다. 게다가 독일 제국군은 전쟁을 끝낼 전략적 목표가 없었으니 계획의 성공이 독일의 승리를 불렀을 가능성도 적다.

5. 몰트케가 망쳤는가?

슐리펜 계획이 실패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예비군의 작전 수행 능력 부족과 철도 보급 수송 능력의 약화 및 그로 인해 계획의 핵심인 빠른 진격 속도를 전개할 수 없었던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러한 슐리펜 계획의 실패 원인이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가 완벽했던 계획을 무리하게 수정한 탓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결론적으로 한계가 있는 시각이라 평가된다.

이러한 주장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독일 사학자들이 슐리펜 계획은 승리의 청사진과도 같은 완벽한 계획이었으나 몰트케가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의견을 자평한 것에 기반한다. 이러한 조류를 이끈 것은 독일군 고급장교들로, 이들이 전후에 작성한 회고록으로 인해 속전속결로 끝났어야 할 슐리펜 계획이 4년간의 소모전으로 변질된 것은 순전히 몰트케의 잘못이지, 독일의 전략적 계산이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일종의 '서사'같은 이야기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1956년 게르하르트 리터의 슐리펜 계획 미신 비판(Der Schlieffenplan: Kritik eines Mythos)이라는 이름의 책이 출판되면서 슐리펜 계획이 승리를 위한 청사진이었다라는 관점은 재평가된다. 승리의 청사진 따위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대 몰트케 이래로 정립된 군사 작전이 선천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다는 프로이센의 전쟁계획 전통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동 계획이나 배치 계획 정도는 만들어질 수 있으나, 전역 계획 따위는 아무 짝에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1970년대부터는 다양한 학자들이 벨기에를 통한 프랑스 침공작전의 실용적 측면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에 따르면 애시당초 독일-벨기에-프랑스 철도망과 벨기에-북프랑스 도로교통망은 물리적 한계로 인하여 충분한 수의 병력을 충분히 빠르게 이동시킬 수 없었다. 슐리펜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속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던 셈이다.

몰트케가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는 이러한 서사같은 이야기가 퍼진 이유는 1914년 이전에 독일 참모들이 작성한 관련 기록들이 대부분 기밀이었고 문서들이 1945년 4월 포츠담 폭격으로 프로이센 육군기록보관소가 파괴될 때 모두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폭격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기록들마저도 냉전이 시작되자 동독 측이 가져가 버려 독일 재통일 이후에야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26] 이 자료들로 인해 최초로 독일의 전쟁계획에 대한 윤곽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18년 1차대전 종전 이후에 나온 몰트케의 슐리펜 계획 수정안과 같은 분석들은 대부분 틀린 것으로 규명되었다.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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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펜 계획의 작성자인 알프레트 폰 슐리펜 장군은 사진에서 풍기는 인상처럼 전형적인 독일 장군이었던 듯하다. 새벽녘에 부관과 같이 바깥 순찰을 돌다가 부관이 아침 햇볕에 빛나는 동프로이센을 흐르는 프레겔 강의 경치를 보며 감탄하자, 흘끗 쳐다보고는 "사소한 장애물일 뿐!"이라 일축하고는 제 갈 길을 갔다고 한다. 거기다가 시계마냥 철저하게 시간표대로 생활했다고.

2013년에는 다큐전문 채널인 히스토리 채널에서 제작한 1913년 ~ 1917년기의 제1차 세계 대전 때 화성인이 쳐들어와 웰즈의 우주전쟁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The Great Martian War》라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에서는 프랑스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화성인 군대를 피해 모든 독일 제국군 및 독일 민간인들을 프랑스로 대피시키는 작전으로 나온다.

7. 같이보기


[1] 흔히 "아무리 훌륭한 전투 계획이라도 첫 포성이 울리는 순간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린다."로 알려져 있다. [2] 프랑스를 39일 만에 박살내고 42일차에 점령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프랑스를 6주동안 제압한다라... [3] 러시아는 워낙 광대한 영토와 라스푸티차 탓에 장거리 도로 수송은 힘들다. 지금도 인력과 물자 수송은 절대적으로 철도에 기댄다. [4] 전쟁이 터지자 이 부분이 엇나갔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탈리아 러시아는 물론 열강 반열에 끼지도 못한 세르비아조차 이기지 못하고 고전했다. [5] 독일 입장에서는 좌익. [6]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 슐리펜 계획에서의 독일은 우익 5개군을 네덜란드, 벨기에, 아르덴 지역으로 대우회시키고 좌익 2개군은 전략적 후퇴를 통해 프랑스군의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포위 섬멸을 해야 했다. [7] 전통적으로 영국은 자국의 해안선의 맞은 편인 네덜란드, 벨기에로 이루어진 저지대의 독립을 자국 방어의 생명선으로 생각했다. 아울러 벨기에의 독립과 중립은 영국이 보장해준 것이기 때문에 중립국 벨기에에 대한 침공을 그대로 놔두면 영국은 큰 외교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8] 교통과 기술이 훨씬 발달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무너뜨리는 데는 46일이 걸렸다. 연합군이 어마어마한 삽질을 벌이고 소련이 동부로 쳐들어오지 않았는데도 그렇다. [9] 특히 정교하게 짠 철도수송 계획. 독일 내의 모든 철도역과 화차 사용, 각 부대별 이동을 분 단위까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계획하였다. 따라서 한 군데만 건드려도 계획 전체가 마비된다. [10] 이미 독일 제국군 일부가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넘었다. [11] 철도 복구 부대가 더 많았다 한들, 원래 모든 일은 부수는 게 만드는 것보다 쉬운 법이다. 파괴 공작의 속도를 복구 속도가 애초 따라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12] 이 문제는 2차 대전 초반부 나치 독일 프랑스 침공을 준비할 때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13]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개시에서 파리 봉쇄까지는 두 달이 걸렸고 파리를 봉쇄한 후 제대로 항복을 받기까지는 넉달이나 걸렸다. 이미 나폴레옹 3세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국민들이 반발해서 독일은 다시 싸워야 했다. [14] 슐리펜은 죽기 직전까지 머릿속에서나마 계획의 업데이트를 하고 있었고 '사단 몇 개만 더 있었더라면...' 이라고 혼잣말을 내뱉던 일도 있었다. 그만큼 이 계획은 그에겐 국가에 대한 마지막 충성이었으며 동시의 그 자신의 혼신의 역작이었다. [15] 독일이 벨기에와 달리 네덜란드를 놔둔 이유는 여럿 있다. 네덜란드군은 숫자에 비해 정예로 평가받았고, 지형상의 문제로 독일 제국군 2개 군의 발이 묶일 수도 있었다. 또한 네덜란드는 중립국이었지만 이 때만 해도 프랑스보다 오히려 독일과 가까운 나라였다. 게다가 아직 철도-차도 등 교통 인프라가 2차대전 시기보다 못하던 시기인데, 네덜란드의 전통인 댐 폭파를 써버리면 당장 올스톱. 그리고 네덜란드 침공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매우 곤란한 문제였다. 독일 정부는 영국 해군이 독일을 해상에서 봉쇄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영국이 감히 미국 상선을 공격하지는 못하리라고 판단했고, 네덜란드 상선이 미국 국기를 달고 물자를 수송하면 이를 네덜란드를 거쳐서 구매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미국이 영국의 독일 봉쇄에 동의해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지만 그래도 독일 제국은 네덜란드를 통해서 많은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16] 사족이지만 독일 제국이 1차대전에서 승전하면 네덜란드가 독일 제국에 합병 내지 종속화될 거라 생각하고 네덜란드어를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요제프 괴벨스. [17] 개전 전부터 독일의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까지 벨기에군을 '초콜릿 병사'라고 부르며 우습게 여겼다고. [18] 에리히 루덴도르프 파울 폰 힌덴부르크부터가 포젠 출신이다. [19] 독러관계는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이미 천천히 망가져 갔지만 그렇다고 빌헬름 2세에게 면죄부가 나오지는 않는다. [20] Und so weiter의 준말. '운트 조 바이터' 정도로 발음한다. [21] 이미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이전.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똑같이 해보려다가 끝내 길을 멈추고 비시에서 나치 독일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22] 독일어로는 Vogesen(포게젠). [23] 독일은 벨기에의 철도가 조직적으로나(후퇴하는 벨기에군의 파괴공작) 비조직적으로나(사보타주) 파괴될 것을 예견하여, 철도를 신속히 복구하기 위한 인원, 장비 등을 보유한 철도중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철도의 복구 속도가 파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24] 이는 최대한 빠른 병력소집을 위해, 병력동원 시기에서의 철도사용 최우선권을 전투부대에 주었기 때문이다. [25] 이 말을 들은 군수장교의 대답이 일품이다. "그럼 밀가루는 누가 옮겨?" [26] 1930년대 독일에서 1차대전 이전 독일 참모본부의 전쟁계획을 연구하는 데 쓰인 문서 RH61/v.96 같은 경우 2000년대 들어서야 동독 지역에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