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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191919> 신성 로마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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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신성 로마 제국 구성국들의 군대의 경우 프랑스 대혁명이 터진 1789년 당시의 세속 선제후국과 그 이상급 국가만 기재. ※ 라인 동맹 및 독일 연방, 북독일 연방 구성국들의 군대의 경우 왕국 이상급 국가만 기재. ※ 독일 제국 구성국들의 군대는 독립적인 전쟁성을 가진 경우만 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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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 왕국의 군대. 왕국을 선포한 해인 1701년 창건되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뒤 1918년 해체되었다. 2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다양한 전장에서 활약하였으며, 변방국가였던 프로이센을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올려놓은 원동력 중 하나이며, 독일 제국군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전술적인 발전은 분명 대단한 수준이었고, 군사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군대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전략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 미숙함을 보이고 문민통제를 무시한 프로이센군 장교단은 결국 독일의 능력 밖으로 전쟁을 확전시켜 나갔으며, 결국 독일 제국과 그 후신인 나치 독일의 패망에 일조한다.
2. 역사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시절에는 상비군 개념이 없었으며 용병에 의존한 방어 전략이 사용되었다.[1] 그러나 베를린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진두지휘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 시기에 들어 상비군이 창설되었으며 프리드리히 3세 선제후가 동군연합이었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서 프로이센 국왕으로 칭왕하면서 우리가 아는 프로이센군이 창설되었다.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부터 시작된 부국강병 정책에 힘입어 급격히 발전하였으며,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주변국 군대를 연파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나폴레옹 전쟁기에는 희대의 군사적 천재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대패하고 굴욕적인 틸지트 조약을 맺기도 했으나, 러시아 원정이 실패로 끝난 후 라이프치히 전투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하는 데 큰 축을 담당하였다.
이후로는 전쟁론으로 대표되는 선진적인 군사 연구와 산업 혁명으로 대표되는 국가적 역량 강화 및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뛰어난 외교술에 힘입어 덴마크, 오스트리아 제국, 프랑스 제2제국을 차례로 격파하여 통일 독일을 선언했다. 프로이센군은 다른 제후국 군대들과 함께 신생 독일 제국군에 흡수되었지만[2] 실질적으로는 제국군 그 자체가 프로이센군이라 봐도 되었다.
빌헬름 2세 시절에는 해군을 급격히 팽창시키며, 식민지 건설에 나서게 되면서 영국과의 군비경쟁이 시작된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결국 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해산되었다.
3. 군종
군종은 육군과 해군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후에는 항공대 또한 두 군 산하에 창설되었다.3.1. 육군
육군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시절의 군대를 모태로 형성되었고, 전통적으로 프로이센군의 핵심에 놓여 있었다. 기병이 아닌 전열보병 중심으로 구성된 프로이센의 육군은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그 아들인 프리드리히 대왕이 즉위한 1740년 시점에 80000명 가량이었으며, 국가 예산의 7분의 5가 육군 중심의 군에 배당되었을 정도로 처음부터 매우 중시되었다.따라서 군 혁신 또한 육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세계 최초로 후장식 볼트액션 소총인 드라이제를 전력화하고, 일반참모 제도를 통해 근대적인 군 편제를 만들어낸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프로이센의 산업 혁명과 철도의 보급은 신속한 병력 기동을 가능케 했다. 대(大) 몰트케에 따르면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28만 5천 명을 단 25일 만에 전부 전장으로 보낼 능력이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그보다 적은 20만 명을 45일씩이나 걸려서야 이송할 수 있었다.
3.2. 해군
독일 해군의 변천사 | ||||||||
프로이센 해군 | → | 황립 해군 | → | 국가해군 | → | 전쟁해군 | → | 독일 해군 |
반면 프로이센 해군의 경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 시절 창설되어 그의 지원 아래 잠깐 확장한 이후로는 거의 없는 수준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널찍한 포메른의 해안을 방어하기에는 항상 턱없이 부족했다. 7년 전쟁 당시 고작 8척의 갤리선과 5척의 포함을 보유했을 뿐이다. 1815년 독일 연방이 결성된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로, 독일 연방 내 가장 강력한 해군 세력은 전부 독일이 아닌 외국의 해군들이었다. 하노버 왕국 군주이기도 한 영국 국왕의 영국 해군, 룩셈부르크 공국 군주 자격의 네덜란드 국왕이 이끄는 네덜란드 해군, 홀슈타인 공국 군주 자격의 덴마크 국왕이 이끄는 덴마크 해군이 바로 그들로, 이 중 영국과 네덜란드는 일찍이 독일 연방에서 탈퇴하였지만 덴마크는 홀슈타인 공국 문제로 독일계 국가들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반면 프로이센 해군은 고작 상선에 군기만 단 수준이었다.
이는 1848년 1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덴마크 해군이 독일의 무역로를 마비시켜버림에도 이에 대해 독일계 국가들이 변변찮은 대항 하나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에 1848년 혁명으로 성립된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는 1848년 6월 14일 '국가 함대'(Reichesflotte)를 결성하는데, 불과 4년 후인 1852년 해체될 때까지 하노버 왕국과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간의 알력 다툼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이후 프로이센 해군은 북독일 연방 해군의 중핵이 되었으며, 이는 고스란히 독일 제국 해군으로 이어진다.
제국 해군 시절에는 빌헬름 2세의 함대법 제정으로 독일 역사에서 전례없이 강력한 해군을 건설하게 되었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현존함대전략을 취하며 수세적으로 나오며 별 활약을 하지 못한 채 종전을 맞고, 유틀란트 해전 에서 전략적으로 대차게 깨지고, 스캐퍼플로에서 자침하여 잠깐 뿐이었던 영광을 영원히 잃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