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955년 8월 10일 아우크스부르크의 남쪽에 있는 다뉴브 강 지류(支流)인 레히강(江) 중류에 있는 레히펠트에서 독일 국왕 오토 1세(훗날 신성 로마 황제 오토 대제)가 마자르족( 헝가리인)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둔 전투.
9세기 말 이래 약 60년간 유럽 각지를 유린하던 마자르족은 레히펠트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후 서유럽 침략을 완전히 중단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다음 판노니아 지방에 정주하여 헝가리 대공국을 세우게 된다.
2. 내용
9세기말 동유럽 판노니아에 도달한 유목 민족 마자르족은 독일과 이탈리아, 심지어 이베리아 반도 등 유럽 각지를 거의 매년 수시로 침략하여 유럽 세계에 큰 위협이 되었다. 당시 유럽의 기사 군대는 유목민 기마 부대인 마자르족에게 속수무책으로 패하였고, 마자르족은 불패의 군대로서 전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1] 마자르족에게 침략을 당하지 않으려면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독일 왕국 역시 마자르족과 평화협정을 맺고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바쳐왔으나 이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독일 국왕 오토 1세는 그동안 유럽 기사들이 승리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막강했던 마자르족에 대처하기 위해 마자르족의 전술을 연구하여 종심 방어 시스템을 고안한다. 이에 따라 오토 1세는 변방의 축성을 강화하고 군사 시스템을 개혁하여 새로운 전술에 맞게 군대를 훈련시켰다. 수년간의 준비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자 마침내 오토 1세는 기존의 평화 조약의 파기를 선언하며 마자르족에게 더이상 공물을 바치지 않겠다고 했다.
오토 1세가 평화 조약을 파기하자 마자르족은 독일 왕국이 내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남부 독일을 침입했다. 이때 오토의 아들과 사위인 슈바벤 공 루돌프와 로트링겐 공 콘라트가 마자르족의 위협에 굴복하여 아버지 오토 1세에게 반역하고 마자르족에게 협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자르족에게 철저히 대비해 왔던 오토 1세는 마자르족을 방어해 낸다.
오토 1세의 종심 방어 시스템에 충격을 받은 마자르족은 955년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독일 왕국을 쳐들어 왔다. 그동안 약탈을 목적으로 했던 침공과는 차원이 다른 독일 왕국 점령을 목표로 한 총력전이었다. 또한 마자르족은 전년도의 침공 때처럼 독일 왕국의 내부 분열을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영지를 빼앗긴 루돌프와 콘라트는 다시 오토 1세와 연합하게 된다. 마자르족의 침입을 대비하고 있었던 오토 1세는 마자르족을 격파하기 위해 구상해 왔던 전략을 실전에서 활용에 옮겼다. 955년 1월 15일 오토 대제는 마자르족을 레히강 유역의 레히펠트로 유도했고 결전이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마자르족은 배후에 강을 등지고 싸우는 바람에 정면에서 돌격해 오는 중무장한 게르만 기사들의 압박에 밀려 달아나다가[2] 강에 빠져 죽는 등 유목민 특유의 치고 빠지는 전술을 제대로 구사할 수 없었다.[3] 결국 레히펠트에서 마자르족은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완벽한 참패를 당하고 만다. 또한 마자르족의 지도자들인 불추(Bulcsú), 렐(Lehel) 및 술(Súr)은 사로잡혀 독일의 레겐스부르크로 끌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3. 영향
마자르족은 약 60년간 유럽 각지를 유린하며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으나 955년 레히펠트 전투에서 속수무책의 참패를 당한 이후 다시는 서유럽을 침략하지 않았다. 이후 마자르족은 서유럽 약탈을 완전히 접고, 판노니아에 정주하여 헝가리 대공국을 세우게 된다.레히펠트 전투로 서유럽은 마자르족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마자르족에게 시달리던 이탈리아 역시 더이상 침략을 당하지 않게 되었고, 이는 교황 요한 12세가 오토 1세를 황제로 대관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오토 1세는 레히펠트 전투 승리 후 백성들로부터 "독일 민족의 아버지이자 구세주"라고 열렬히 환영을 받으며 반란 지역인 슈바벤 및 로트링겐을 완전히 장악했다. 한편 콘라트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투가 벌어진 날이 마침 무더운 여름철이라 사슬 갑옷을 헐렁하게 풀었다가 하필 마자르족이 쏜 화살에 목이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1]
당시 마자르족 기병들의 기습이 어찌나 빨랐는지, 식사 도중에 이들의 공격을 받은 유럽 군사들은 음식을 미처 삼키지도 못하고 입안에 물고 있는 채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2]
유목민족인 마자르족 기병들은 체구가 작은 말을 타고 경무장을 했던 관계로 그들보다 중무장을 하고 체구가 큰 말에 올라탄 게르만 기사들의 돌격에 정면으로 맞서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3]
훗날 1388년 중국
명나라 군대도 몽골계 국가인
북원의 잔존 세력을 이렇게 배후의 부이룬 호수로 몰고가 압박하는 전술로 대승을 거두었다. 아무리 유목민 기병이 대단하다 할지라도 기동력을 상실하게 되면 얄짤없이 학살 당한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예시들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