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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7 19:45:24

헨리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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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헨리 3세
(Henry III)
출생 1207년 10월 1일
잉글랜드 왕국 햄프셔 윈체스터 성
사망 1272년 11월 16일 (향년 65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재위기간 잉글랜드의 왕
1216년 10월 28일 ~ 1272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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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윈체스터의 헨리
(Henry of Winchester)
배우자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1236년 결혼)
자녀 에드워드 1세, 마거릿, 베아트리스, 에드먼드, 캐서린
아버지 존왕
어머니 앙굴렘 여백작 이자벨
형제 리처드, 조앤, 이사벨라, 엘레노어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잉글랜드 왕위 등극2.3. 제1차 남작 전쟁의 종결2.4. 섭정들의 통치와 분쟁2.5. 1230년 프랑스 원정2.6. 휴버트 드 버그의 실각과 리처드 마셜의 반란2.7. 헨리 3세의 치세
2.7.1.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와의 결혼2.7.2. 생통주 전쟁2.7.3. 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와의 정책2.7.4. 대외 정책2.7.5. 내치
2.7.5.1. 행정 체계2.7.5.2. 궁정 운영2.7.5.3. 종교 정책2.7.5.4. 유대인 정책
2.8. 내전으로의 길
2.8.1. 옥스퍼드 조례2.8.2. 파리 조약과 귀족들과의 갈등
2.9. 제2차 남작 전쟁2.10. 말년
3. 평가4. 가족 관계
4.1. 자녀
5.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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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플랜태저넷 왕조 제4대 국왕. 9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제1차 남작 전쟁을 극복하고 56년간 장기 집권했지만, 말년에 옥스포드 조례 준수 여부를 놓고 시몽 드 몽포르 등 귀족들과 갈등을 벌이다가 제2차 남작 전쟁을 초래했다.

2. 생애

2.1. 초년기

1207년 10월 1일 잉글랜드 왕국 햄프셔 윈체스터 성에서 존 왕 앙굴렘의 이자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존 왕의 궁정에서 멀리 떨어진 잉글랜드 남부에서 엘렌이라는 유모에게 보살핌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1212년부터 윈체스터 주교 피에르 데 로슈의 가르침을 받았고, 필립 도비니로부터 군사 교육을 받았으며, 샘슨의 기사 랄프로부터 승마를 배웠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눈꺼풀이 처진 외모에 튼튼한 체격을 가졌으며, 가끔 울화통을 터트리는 것 외에는 대체로 온화하고, 느긋하고, 동정심이 많은 성격이었고, 꾸밈없고 정직했으며,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냈고, 종교적인 설교에 눈물을 쉽게 흘렸다고 한다.

1214년, 존 왕은 1204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빼앗긴 노르망디 공국, 멘 백작령, 앙주 백작령을 탈환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 플란데런 백작 페랑, 불로뉴 백작 르노와 연합해 프랑스를 협공했다. 존은 푸아투에 상륙한 뒤 북동쪽으로 파리를 향해 진군하고, 동맹세력인 오토 4세, 불로뉴 백작 르노, 플란데런 백작 페랑이 윌리엄 롱게스피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와 합세한 뒤 플란데런에서 프랑스 북동부를 침공하기로 했다. 작전이 잘 먹히면 필리프 2세는 군대를 양분할 수밖에 없으니, 연합군은 적을 성공적으로 협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존 왕이 루이 왕자의 프랑스군을 상대로 고전하는 사이, 신성 로마 제국, 불로뉴, 플란데런 연합군은 1214년 7월 27일 부빈 전투에서 필리프 2세의 프랑스군에게 완패했다. 결국 그는 필리프 2세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6년간 휴전을 맺는 평화 협정을 맺고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그 직후, 잉글랜드 북부와 동부에서 귀족들이 왕의 무자비한 통치와 무능을 성토하며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연합군을 형성한 뒤 런던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1215년 5월에 노샘프턴에 집결해 존 왕과의 봉건적 관계를 포기하고 에식스주 리틀던모의 봉건 귀족이자 베이너드 성의 치안관인 로버트 피츠월터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 하느님의 군대"라고 자칭하면서 런던으로 진군해 런던시와 링컨, 엑서터를 접수했다. 이에 존을 따르던 왕당파 귀족들이 대거 이탈했고, 존은 별수 없이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에게 반군 귀족들과 평화 회담을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1215년 6월 15일, 존은 윈저성 근처의 러니미드에서 반군 지도자들과 접견했다. 랭턴의 중재 노력으로 제안된 평화 협정을 담은 헌장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마그나 카르타이다. 이 조약은 왕권의 잠재적 남용을 제한하고 반군 군대를 해제하며 권력 공유 협정을 수립했다. 하지만 양자 모두 서로를 불신했기에, 조약은 즉시 이행되지 않았다. 존 왕과 충성파 귀족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반대를 앞세워 마그나 카르타를 단호히 거부했고, 반란 귀족들은 필리프 2세의 아들 루이 왕자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내세우며 맞섰다. 이렇게 벌어진 제1차 남작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헨리 왕자는 도싯의 코프 성에서 어머니와 함께 조용히 지냈다.

2.2. 잉글랜드 왕위 등극

1216년 10월 18일 밤, 존 왕은 노팅엄셔의 뉴어크 성에서 이질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그는 임종 직전에 집행관 13인을 선임해 헨리가 왕국을 되찾을 수 있도록 힘써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초대 펨브로크 백작이자 당대 최고의 기사로 명성이 자자한 윌리엄 마셜을 헨리의 후견인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충성파 지도자들은 즉시 헨리의 대관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윌리엄 마셜은 헨리를 글로스터 성으로 데려온 뒤 기사 작위를 수여했고, 잉글랜드에 파견된 교황 특사인 구알라 비치에리 추기경은 1216년 10월 28일 글로스터 대성당에서 헨리 3세의 대관식을 감독했다.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과 요크 대주교 월터 드 그레이는 참석하지 못했고, 우스터 주교 실베스테르와 엑서터 주교 사이먼이 그들을 대신해 기름 부음을 했으며, 윈체스터 주교 피에르 데 로슈가 왕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기로 했다. 기존에 쓰던 왕관은 내전 중에 분실되어서, 앙굴렘의 이자벨 왕비의 단순한 금 화관을 활용했다.

헨리 3세가 막 등극했을 당시, 잉글랜드 귀족 반란군과 루이 왕자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잉글랜드의 절반 이상을 점거했다. 잉글랜드 정부는 이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교황청에 충성을 맹세하고 교황 호노리오 3세가 헨리 3세의 주군임을 인정했다. 호노리오 3세 역시 헨리 3세가 자신의 가신이며 후견인이며, 교황 특사 구알라 비치에리가 헨리 3세와 그의 왕국을 보호할 전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후 고위 귀족 2명이 헨리 3세의 섭정이 될 후보로 떠올랐다. 첫 번째 인물은 윌리엄 마셜이었고, 두 번째 인물은 가장 강력한 충성파 귀족 중 한 사람인 제6대 체스터 백작 라눌프 드 블론드빌이었다. 라눌프가 딴 곳에 가 있는 사이, 글로스터에 모인 귀족과 성직자들은 윌리엄 마셜을 섭정으로 추대했다. 이에 사람들은 라눌프가 자기가 섭정이 되어야 한다며 반기를 들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지만, 1216년 10월 29일 글로스터에 도착한 라눌프가 마셜이 섭정이 되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밝히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 후 마셜은 윈체스터 주교 피에르 데 로슈를 헨리 3세의 보호자로 선임하고, 본인은 반란군 토벌에 힘을 기울였다.

2.3. 제1차 남작 전쟁의 종결

존 왕이 사망하고 헨리 3세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잉글랜드 전역에 퍼지자, 존 왕에게 반기를 들었던 귀족들은 헨리 3세까지 적대하는 걸 망설였다. 그들은 존 왕을 증오했지만, 잉글랜드 왕실의 피를 물려받은 어린아이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까지 적대하는 건 옳지 않다고 여겼다. 윌리엄 마셜은 이 분위기를 이용해 반군 귀족들에게 땅을 돌려받는 대가로 헨리 3세 편으로 돌아서라고 설득했고, 마그나 카르타 중 교황청에 불리한 조항을 포함한 일부 조항을 삭제한 채 재발행했다.

1217년 2월, 루이 왕자는 지원군을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로 출항했다. 그 사이 루이가 남겨둔 프랑스 장성들과 잉글래드 반란 귀족 사이의 이권 다툼이 벌어졌고, 잉글랜드 추기경 구알라 비치에리는 헨리 3세의 반군에 대한 전쟁은 십자군 전쟁과 동일하다고 선언했다. 이에 많은 반군 귀족이 헨리 3세 편으로 돌아섰다. 그해 4월 말 잉글랜드로 돌아온 루이 왕자는 상황을 반전하기 위해 군대를 두 부대로 나눠서 한 부대는 링컨을 공략하도록 했고, 본인은 두 번째 부대를 이끌고 도버 성 공략에 착수했다. 윌리엄 마셜은 루이의 행보를 전해 듣고 링컨으로 몰려간 적군을 물리치기로 했다. 1217년 5월 20일, 윌리엄 마셜은 링컨 전투에서 완승하고 적장 토마 뒤 페르슈를 사살하고 로버트 피츠월터를 비롯한 반란군 수장들을 대거 생포했다.

한편, 루이 왕자는 도버에 사절을 보내 귀순을 권고했지만, 도버 수비대장 휴버트 드 버그는 헨리 3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면서 그를 위해 성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여기에 도버 수비대가 루이 왕자와 프랑스 간의 물자 공급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하자, 루이 왕자는 도버를 기필코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휴버트는 루이 왕자가 다시 포위할 것을 예상하고 캐싱엄의 윌리엄 올리버 피츠레지스와 연락해, 프랑스 수송 함대와 합류해 보급을 받기 위해 이동하던 루이 왕자를 루이스 시 인근에서 매복 공격하게 했다. 루이 왕자는 이 매복 공격으로 상당한 전력 손실을 입고 윈첼시까지 후퇴했다가, 그곳에서 프랑스 함대와 만나면서 기사회생했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1217년 5월 전력을 재편성한 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루이 왕자는 도버 성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그전에 도버 성 외곽에 진영을 세운 프랑스군 분견대가 캐싱엄의 윌리엄과 올리버 피츠레지스의 급습으로 격파당하자, 루이 왕자는 샌드위치 항에 상륙한 뒤 그곳에서 도버 성으로 진군하기로 했다. 5월 12일 도버 공방전을 개시한 루이 왕자는 투석기를 포함한 공성 기계로 성벽을 공격했지만, 휴버트가 이끄는 수비대가 굳건히 버티면서 조기 공략에 실패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병력 손실이 많아지고 잉글랜드 반란 귀족들이 링컨 전투에서 대거 생포되면서 보급 물자를 지원받기 어려워지자, 루이 왕자는 잉글랜드 추기경 구알라 비치에리와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는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자신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땅을 돌려받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며, 구알라도 루이가 전쟁을 그만둔다면 파문을 해제하고 헨리 3세의 정부가 마그나 카르타를 집행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부 충성파가 반란군, 특히 반란에 가담한 성직자들에게 너무 관대하다고 주장하여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루이 왕자는 일단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머물면서 프랑스 왕실에 자신을 지원해달라고 호소했다. 루이 왕자의 아내 카스티야의 블랑카는 남편을 돕기 위해 함대와 구호 물자를 실은 수송선을 조직한 뒤,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사촌인 로베르 1세 드 쿠르트네샹피넬에게 함대 지휘를 맡겼다. 하지만 로베르는 해군 지휘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수도자 외스타슈를 해군 용병대장으로 고용했다. 1217년 8월 24일, 프랑스 함대가 칼레에서 출항했다. 로베르 드 쿠르테네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외스타슈는 부사령관을 맡았다. 기함에는 기사 36명이 탑승했고, 다음 3개 전함에 기사 64~89명이 탑승했으며, 나머지 전함 6척엔 무장병들이 탑승했다. 그리고 수송선 70척이 그 뒤를 따라갔다. 도버 성주 휴버트 드 버그는 이 소식을 사전에 첩보를 통해 파악한 뒤 필립 도비니에게 함대를 맡겨 요격했다. 잉글랜드 측은 전함 16~18척, 소형선 20척으로 구성되었으며, 존 왕의 사생아인 리처드 피츠로이가 전함 한 척을 지휘했다.

잉글랜드 함대는 먼저 샌드위치 항을 접수한 뒤, 적 함대가 샌드위치 항을 지나갈 때 항구에서 출진했다. 템스강 어귀를 향해 긴밀한 대열로 항해하던 프랑스 함대는 처음에는 적의 추격을 따돌리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가 선두에서 추격하던 잉글랜드 함선이 프랑스 함대에 돌진했다가 반격을 받고 방향을 바꿔 물러서자, 로베르는 적이 겁에 질렸다고 간주하고 즉시 추격해 섬멸하려 했다. 외스타슈는 갑자기 항해 방향을 바꿨다간 함대가 뒤엉킬 수 있다며, 항해를 그대로 이어가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로베르는 이 말을 무시하고 전 함대에 방향을 돌려 적 함대를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 함선들이 지시에 따라 방향을 바꾸기 위해 속도를 늦추자, 잉글랜드 함대가 바람의 힘을 받으며 적을 향해 신속하게 돌진했다. 여기에 휴버트 드 버그의 기함이 독립적으로 항해해 프랑스 함대를 후방에서 공격해 수송선 2척을 포획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바람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궁수들이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전에 적 선원과 병사들에게 화살을 퍼부어 상당한 피해를 줬으며, 항아리에 담아뒀던 석회를 적에게 뿌려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다. 외스타슈는 기함을 이끌고 리처드 피츠로이의 배와 교전했다. 이후 많은 잉글랜드 전함들이 하나둘씩 리처드의 배에 합류한 데 비해, 프랑스 함선들은 대열 유지에 신경 쓰느라 기함을 지원하지 못했다.

수 시간에 걸친 해전 끝에, 프랑스 전함 1척과 수송선 64척이 침몰하거나 포획되었고, 나머지는 겨우 탈출했다. 로베르 드 쿠르트네와 프랑스 기사들은 몸값을 위해 포로로 잡혔고, 프랑스 선원과 일반 병사들은 학살당했다. 외스타슈는 기함 구석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끌려온 뒤 몸값으로 1만 마크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리처드 피츠로이 등 잉글랜드 수뇌부는 그가 본래 존 왕에게 고용되었다가 배신한 걸 규탄하고, 그를 체포한 뒤 참수형에 처했다. 이날 확보한 전리품 상당수는 잉글랜드 선원 및 전투원들에게 돌아갔고, 일부는 샌드위치에 성 바르톨로뮤 병원을 세우는 데 사용되었다.

샌드위치 해전에서 프랑스 수송 함대가 궤멸하고 영국 해협이 잉글랜드 해군에게 장악되면서, 루이 왕자는 프랑스 왕국으로부터 더 이상 보급을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가 봐야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헨리 3세 측과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1217년 9월 11일 램버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램버스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존 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던 잉글랜드 귀족 전원을 사면한다.
2. 채널 제도는 잉글랜드 왕국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3. 루이 왕자는 1만 마크를 보상받는 대가로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잉글랜드를 다시는 침공하지 않는다.
4.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2세도 잉글랜드 북부에서 군대를 철수한다.

그 후 루이 왕자는 9월 28일 프랑스로 돌아갔고, 헨리 3세는 잉글랜드의 유일무이한 군주가 되었다.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은 전원 사면되었지만, 성직자들은 사면 대상에서 제외되어 그들의 땅과 직위는 몰수되었다.

2.4. 섭정들의 통치와 분쟁

내전이 끝난 뒤, 윌리엄 마셜은 왕의 권위를 재건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내전이 한창일 때, 반란에 가담한 귀족뿐만 아니라 헨리 3세를 따른 귀족들까지 왕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성을 무분별하게 건설했다. 각 주 보안관은 독립적으로 통치하는 귀족들의 훼방 때문에 제대로 된 통치를 할 수 없었고, 세금을 인상하고 왕실 수입을 징수하는 임무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여기에 귀네드 왕국의 국왕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는 잉글랜드에서 내전이 벌어진 틈을 타 웨일스의 패자로 등극하고 잉글랜드와 웨일스 사이의 변경 지대에 큰 위협을 가했다.

윌리엄은 이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결혼과 후견을 승인하는 왕실의 전통적인 권리를 시행했지만, 귀족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대신, 그는 왕실에 충성을 서약한 순회 판사를 재구성하고, 이들을 전국 각지로 보내서 세금을 거둬들여서 재정을 충당하도록 했다. 또한 정부는 왕실에 속한 숲의 통제를 재개하고자 산림 헌장을 반포했다. 1218년, 윌리엄 마셜은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와 우스터 조약을 체결했다. 마셜은 허웰린이 최근에 정복한 모든 영토를 소유하는 걸 인정했고, 허웰린은 앞으로는 잉글랜드를 침공하지 않고 웨일스 전역을 다스리는 집행관으로서 헨리 3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기로 했다.

헨리 3세의 어머니 앙굴렘의 이자벨은 섭정 정부에서 별다른 역할을 맡지 못하다가 1217년 프랑스로 돌아가서 푸아투 대귀족 위그 10세 드 뤼지냥과 재혼했다. 그 후 윌리엄 마셜이 1219년 4월에 병사하자, 노리치 주교이자 교황 특사 판둘프 베라치오, 윈체스터 주교이자 헨리 3세의 후견자 피에르 데 로슈, 켄트 백작이자 대법원장 휴버트 드 버그가 떠올랐다. 이 세 사람은 옥스퍼드 의회에서 섭정 위원회 대표로 인정되었고, 정부는 세 사람의 의사에 따라 정책을 결정했다. 그 후 휴버트 드 버그와 피에르 데 로슈는 더 많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대립했다. 휴버트는 잉글랜드 귀족들의 지원을 받았고, 피에르 데 로슈는 푸아투와 투렌 출신 귀족들의 지원을 받았다.

1221년 4월, 휴버트는 판둘프와 함께 앵겔라르 드 시고니가 왕실이 소유하던 성의 수입을 횡령하고 부패를 저지른 혐의로 고발했고, 엥겔라르는 이에 따라 1223년 말에 윈저와 오디함의 성주 직위를 상실했다. 또한 1221년 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를 떠난 윈체스터 주교이자 재무부장 피에르 데 로슈가 피에르 드 모레이와 함께 잉글랜드를 프랑스 왕국에 넘기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기소했고, 피에르 드 모레이를 직위에서 해임한 뒤 감옥에 가뒀다. 피에르 데 로슈는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그 혐의가 거짓이라는 걸 입증했지만, 헨리 3세에 대한 후견권은 회복되지 못했다. 1222년 판둘프가 교황청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향하면서, 휴버트는 잉글랜드 왕국 최강의 권력자로 등극했다.

한편, 교황청은 헨리 3세가 새로운 휘장을 사용해 두 번째로 대관식을 치르는 걸 허용했다. 이에 헨리 3세는 1220년 5월 17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두 번째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번 대관식은 왕의 권위를 확인하는 목적으로 거행되었다. 헨리 3세는 이 자리에서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해 주겠다고 약속했고, 귀족들은 왕의 성을 돌려주고 왕실에 진 빚을 갚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휴버트는 1223년 헨리 3세를 대동한 채 웨일스로 진군해 허웰린을 복종시켰고, 본래 왕실의 소유였다가 귀족들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성들을 하나둘씩 회수했다.

1223년 11월, 휴버트의 권세를 질시한 팔케스 드 브레오테, 제6대 체스터 백작 라눌프 드 블론드빌, 제5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런던 탑을 접수하고 휴버트를 타도하려 했다. 새로운 내전은 요크 대주교 사이먼 랭턴의 중재로 벌어지지 않았지만, 12월 양자 간의 협상이 실패하면서 긴장은 다시 고조되었다. 그러다가 교황청으로부터 왕에게 반기를 들려 한다는 이유로 파문을 선고하겠다는 위협을 받자, 라눌프와 길버트는 물러섰고, 팔케스는 12월 30일 궁정으로 복귀하여 허트퍼드 성과 보안관 직책 일부를 내줘야 했다.

팔케스의 나머지 직책 및 성채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1224년 1월 18일 휴버트와 그의 동료들로부터 베드퍼드와 플림튼 성까지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았다. 팔케스는 두 성이 아내의 지참금 일부라며 항의했지만 무시당하자 두 성을 내주길 거부했다. 이에 헨리 3세의 궁정은 1224년 6월 20일 팔케스를 반역자로 성토하고 군대를 일으켜 베드퍼드 성을 포위했고, 사이먼 랭턴은 팔케스와 그의 모든 군대 구성원을 파문했다. 공방전은 8주간 지속되다가 결국 수비대 전원이 항복 후 처형되었다. 이후 팔케스는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8월 19일 모든 재산을 내주는 대가로 사면을 요청했다. 8월 25일 자신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재판에 회부되는 대신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렇듯 강대한 권세를 누리던 휴버트였지만, 그의 독단적인 태도는 수많은 적을 양산했을 뿐만 아니라 헨리 3세의 불만까지 샀다. 게다가 이 시기에 프랑스 국왕으로 갓 등극한 루이 8세가 위그 10세 드 뤼지냥과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왕실의 영지인 푸아투와 가스코뉴를 침공했다. 푸아투에 있는 헨리 3세의 군대는 보급이 부족했고, 푸아투 영주들도 피에르 데 로슈 실각 후 헨리 3세 정권이 자신들을 소외한다고 여겨 제대로 지원해 주지 않았다. 결국 푸아투는 속절없이 공략되었고, 잉글랜드에서 지원군이 파견되지 않으면 가스코뉴도 넘어갈 게 분명했다.

1225년 초, 의회는 세금 4만 파운드의 세금을 승인했다. 이후 편성된 군대는 가스코뉴로 파견되어 프랑스군의 침공을 격퇴했다. 이때 영주들은 헨리 3세를 지원하는 대가로 마그나 카르타와 삼림 헌장을 재발행해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헨리 3세는 마그나 카르타가 자신의 "자발적이고 자유의지"로 발행되었다고 선언하고 왕실 인장으로 확인했으며, 이전보다 훨씬 많은 권한을 귀족들에게 수여한다는 내용으로 새 산림 헌장을 발행했다. 그 후 1227년 1월, 헨리 3세는 자신이 성인이 되었으니 친정을 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휴버트가 섭정으로서 통치한 것에 대해 후하게 보상하고자 켄트 백작에 정식으로 선임하고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걸쳐 광대한 영지를 수여했다.

2.5. 1230년 프랑스 원정

헨리 3세는 친정을 시작한 뒤 프랑스 왕국에 빼앗긴 조상들의 영지를 되찾겠다는 열망에 불탔다. 그는 외교 서신에서 "상속 재산 회수", "권리 회복", "영토에 대한 법적 권리 방어" 같은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여기에 프랑스 왕실이 통제력을 강화하는 것에 반감을 품은 노르망디와 앙주 귀족들이 헨리 3세에게 비밀리에 사절을 보내 경의를 표하면서, 가급적 빨리 자기들 영지에 군대를 이끌고 와달라고 호소했다.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 드 브르타뉴도 잉글랜드 왕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왕국의 통제에서 벗어나길 희망했다. 1226년 10월 19일, 잉글랜드로 파견된 브르타뉴 사절이 웨스트민스터에서 "대륙 공통의 적"에 대한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여기에 그의 딸 욜랑드와 헨리 3세 사이의 결혼도 고려되었다. 1226년 11월 8일, 루이 8세가 급사하고 12살밖에 안 된 루이 9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그 후 1227년 프랑스 각지의 대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피에르 1세는 즉각 참여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반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브르타뉴를 압박하자 즉각 항복했다. 이후 프랑스 당국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생잠 요새, 벨렝 요새, 라 페리에르 요새를 양도하는 방돔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피에르 1세는 여전히 독립할 때를 노렸고, 1229년 10월 포츠머스로 가서 헨리 3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1230년 4월 30일, 헨리 3세는 휴버트 드 버그. 라눌프 드 블론드빌, 길버트 드 클레어, 윌리엄 2세 마셜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포츠머스에서 출항했다. 잉글랜드군은 5월 2일 건지 섬에서 휴식을 취한 뒤 5월 3일 생 말로에 상륙했다. 당시 헨리 3세는 왕관과 홀, 흰색 비단 망토를 착용했고,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의 영접을 받았다. 이후 노르망디로 진군해 프랑스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속한 현지 귀족들과 합세하려 했지만, 휴버트 드 버그가 프랑스군과 정면 대결해서는 곤란하다며, 대신 남하하자고 진언하자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잉글랜드군은 5월 8일 디낭으로 진군했고, 뒤이어 낭트에 입성해 헨리 3세의 어머니 앙굴렘의 이자벨과 그녀의 새 남편인 위그 10세 드 뤼지냥과 재회했다.

한편, 프랑스 동부에서는 불로뉴 백작 필리프 1세, 쿠시 남작 앙게랑 3세가 섭정단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스 주력군은 이들을 토벌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잉글랜드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프랑스군은 앙제에 주둔한 일부 병력뿐이었다. 헨리 3세는 낭트 인근의 우동에서 귀족들이 가세하기를 기다렸지만, 프랑스 동부와는 달리 프랑스 서부에서는 공개적인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많은 브르타뉴 귀족은 그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일부는 그에 맞서 성을 요새화했다. 푸아투 영주들은 일반적으로 그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라마르슈 백작 위그 10세는 주저했고, 투아르 자작 기 1세는 루이 9세 편을 들었다.

1230년 6월 말, 헨리 3세는 앙주 백작령을 거쳐 진군해 7월 말 미르보 성을 점령하고 푸아투 백작령으로 들어간 후 가스코뉴로 진입해 가스코뉴 귀족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이후 브르타뉴로 돌아와 낭트에서 몇 주를 머문 후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에게 체스터 백작 라눌프 드 블론드빌과 윌리엄 2세 마셜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 1500명을 넘긴 뒤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1230년 10월 27일 포츠머스에 상륙했다. 그 사이, 루이 9세의 어머니이자 섭정 카스티야의 블랑카는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를 반역자로 규탄하고 그의 직위를 박탈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피에르 1세에게 반감을 품었던 아보구르 영주 앙리 1세, 비트레 자작 앙드레 3세, 푸제르 자작 라울 3세, 샤토브리앙 영주 조프루아 4세, 코부르 영주 겔두인 2세, 디낭 영주 리샤르, 레옹 자작 기요마르크 4세 등 주요 영주들이 그로부터 이탈해 프랑스군에게 가담했다.

프랑스군은 1231~1232년 브르타뉴 원정을 단행해 국경 요새들을 공략했고, 생토뱅코르미에까지 진군했다. 게다가 1231년 윌리엄 2세 마셜이 급사하면서 잉글랜드군 단독 지휘관이 된 라눌프 드 블론드빌은 프랑스군과 대결하길 기피하다가 프랑스 측과 1234년까지 이어지는 휴전 협약을 맺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결국 피에르 1세는 프랑스 왕국에 항복했고, 앙주와 푸아투 귀족들은 루이 9세에게 재차 복종했다.

2.6. 휴버트 드 버그의 실각과 리처드 마셜의 반란

1231년 7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제6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 잉글랜드로 귀환한 윈체스터 주교 피에르 데 로슈는 최근에 벌인 잉글랜드군의 프랑스 원정을 실패로 간주하면서, 왕에게 잘못된 조언을 한 휴버트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헨리 3세에게 새로운 재정 전략을 채택하고 통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라고 촉구했다. 헨리 3세는 1231년 크리스마스에 윈체스터에 찾아가는 등 피에르를 극진히 총애했고, 1232년 1월에 피에르를 왕실 재무부장으로 선임했다.

그 후 피에르는 휴버트의 영향력 감소를 이용해 친척 피에르 드 리보를 왕실의 일원으로 편입했다. 피에르 드 리보는 1232년 여름에 여러 수익성 있는 부동산에 대한 많은 직위와 관리권을 받았다. 휴버트는 이에 대응해 1232년 7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대법원장으로서의 임를 보장하는 왕실 헌장을 발행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휴버트가 잉글랜드 내 외국 성직자들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공모했다는 비난이 일었고, 헨리 3세는 7월 29일에 휴버트를 직위에서 해임하고 스티븐 세그레이브를 새 대법원장으로 선임했다.

새로운 왕실 관리들은 곧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용병 부대를 고용했고, 피에르는 제3대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마셜과 함께 이들을 진두지휘했다. 1232년 말, 휴버트는 반역을 꾸민 혐의로 긴급 체포되어 모든 직위에서 해임된 뒤 데비지스 성에 투옥되었다. 뒤따른 숙청 과정에서 휴버트의 지지자들은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피에르의 추종자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또한 1233년 초에는 친척 피에르 드 리보 재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 헨리 3세는 피에르의 조언에 따라 휴버트에게 토지와 지위의 영구 소유를 보장하는 여러 헌장을 취소했다.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피에르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모델로 삼고 잉글랜드에서 폭정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숙청을 자행하는 와중에 피에르의 동맹자였던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마셜의 가까운 동료인 길버트 바셋이 해임되자, 리처드 마셜은 이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그는 여러 귀족과 함께 헨리 3세가 1225년 마그나 카르타에서 정한 자신들의 합법적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고 영지가 불법적으로 몰수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1233년 봄 길버트 바셋이 반란을 일으켰고, 리처드 마셜도 곧 합류했다. 피에르 데 로슈가 아일랜드와 사우스 웨일스에 있는 리처드 마셜의 영지에 군대를 파견하자, 리처드 마셜은 이에 대응해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와 동맹을 맺었고, 마셜 가문의 추종자들도 각지에서 봉기했다.

리처드 마셜의 반란은 1년간 이어졌고, 왕실군은 승기를 좁처럼 잡지 못했다. 여기에 피에르 드 리보가 재무부장으로서 몹시 무능한 바람에, 내전에 쓰이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결국 캔터베리 대주교 에드먼드 리치 및 여러 잉글랜드 주교가 헨리 3세에게 리처드 마셜과 협상하라고 권고했고, 헨리 3세는 그들의 조언에 따르기로 했다. 1234년 4월 초, 피에르는 왕실 업무에 간섭하지 말고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고, 몇 주 후 피에르 드 리보도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왕실과 반란군 간의 평화 협상이 개시되려던 그때, 리처드 마셜이 아일랜드로 원정을 떠난 뒤 버그 가문과 전쟁을 치르다가 커리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생포된 뒤 1234년 4월 15일 부상이 악화하여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후 펨프로크 4대 백작이 된 남동생 길버트 마셜은 5월 말에 헨리 3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헨리 3세는 반란을 일으킨 이들을 사면하며, 영지와 직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자신에 대한 충성 서약을 갱신하도록 했다. 그 후 헨리 3세는 고위 장관들에게 정치를 더 이상 맡기지 않고 본인이 직접 통치하기로 했다.

2.7. 헨리 3세의 치세

2.7.1.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와의 결혼

헨리 3세는 친정을 행사한 직후부터 결혼 대상을 물색한 끝에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를 적합한 결혼 상대로 낙점했다. 엘레오노르는 예의 바르고 교양이 있으며 언변이 유창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아버지는 프로방스 백작 레몽 베랑게르 4세이고, 어머니는 사보이아의 베아트리스였기에, 그녀와 결혼한다면 프랑스 남부 지역의 강력한 영주인 프로방스와 사보이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결혼 계약은 1235년에 확정되었고, 엘레오노르는 헨리를 처음 만나기 위해 잉글랜드로 여행했다. 두 사람은 1236년 1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결혼했고, 엘레오노르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왕비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결혼 당시 헨리 3세는 28세였고 엘레오노르는 겨우 12세였다. 하지만 그는 어린 왕비를 무척 총애해 많은 선물을 주었고, 가정을 세우고 꾸리는 데 개인적인 관심을 두었다. 또한 엘레오노르를 자신의 신앙생활과 참회왕 에드워드에 대한 자신의 헌신에도 참여시켰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수년간 태어나지 않았기에, 엘레오노르가 불임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엘레오노르는 1239년 첫아들을 낳는 데 성공했고, 헨리 3세는 자신이 존경하는 참회왕 에드워드의 이름을 따서 에드워드라고 지었다. 헨리 3세는 아들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 거대한 축하 행사를 열었고,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기부하면서 하느님이 어린 아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 후 엘레오노르는 다섯 자녀를 잇달아 낳았고, 헨리 3세는 아내의 건강을 걱정해 임신한 기간 내내 교회에 많은 돈을 기부해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했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극도로 애착을 가졌고, 가족과 한시도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강인한 성격이었던 엘레오노르는 그런 남편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곤 했다. 여기에 사보이아, 부르고뉴, 플랑드르 출신의 친지들을 대거 불러들였는데, 그 숫자는 적어도 170명에 달했다. 헨리 3세는 이 중 많은 이를 요직에 앉혔고, 잉글랜드 귀족과 결혼시켰으며, 각종 특권을 부여했다. 이들은 점차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면서 엘레오노르의 중요한 권력 기반이 되었다. 이에 기존의 잉글랜드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축소된 것에 반감을 품었으며, 외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런던 시민들은 엘레오노르가 마차를 타고 궁 밖으로 나오면 돌이나 썩은 채소를 던지며 왕비를 욕하곤 했다.

2.7.2. 생통주 전쟁

1241년 말, 푸아투의 대귀족인 라마르슈 백작 위그 10세 드 뤼지냥이 카페 왕조의 통제로 자치권을 점점 상실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푸아투 귀족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루이 9세는 이에 대응해 1242년 1월 5일 쉬농에서 푸아티에의 알퐁스 백작 초대로 모여든 푸아티에 귀족들을 포섭해 지지를 확보한 뒤, 4월에 대군을[1] 집결한 후 반란 진압에 착수했다. 위그 10세는 압도적인 군세로 몰아붙이는 프랑스군에 대응하기 위해 헨리 3세에게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헨리 3세는 1242년 5월 20일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 남서부의 항구 도시 루아양에 상륙한 뒤 반란을 일으킨 푸아투 귀족들과 합세해 병력 3만 명가량을 편성했다. 이후 헨리 3세는 루이 9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화해를 물색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해 7월 21일, 양자는 샤랑트강의 주요 다리 근처에 있는 타이부르에서 다리를 사이에 둔 채 대치했다. 루이 9세와 푸아티에 백작 알퐁스는 샤랑트 강 위의 다리를 내려다보는 샤르텐 성에 주둔했다. 헨리 3세와 라마르슈 백작은 강 반대편에 주둔했다. 샤랑트강은 북쪽으로는 생장당젤리와 푸아투, 남쪽으로는 생트와 아키텐을 잇는 전략적 통로였다.

7월 22일,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이 샤랑트강을 건너는 걸 막기 위해 2개의 석궁대를 다리 양옆에 배치한 가운데 다리 입구에 상당한 보병대를 편성했다. 루이 9세는 기사와 무장병들에 적을 돌파하라고 명령했지만, 3차례 공격에도 잉글랜드군이 돌파되지 않자, 최고의 기사 8명과 함께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서 선봉대를 이끌고 재차 공세를 개시했다. 프랑스군은 앞장서서 돌격하는 왕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고 거세게 몰아붙였고, 잉글랜드군은 결국 다리에서 밀려나 본대로 퇴각했다. 기어이 다리를 돌파한 프랑스군의 기세에 짓눌린 헨리 3세는 생트로 퇴각하기로 했다.

루이 9세는 생트로 퇴각하는 적을 즉시 추격했고, 선봉대가 투르네 마을에서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았다. 잉글랜드 측은 수백 명의 플란데런 출신 프랑스 경보병대만 현장에 도착했고, 자신들은 약 20미터 높이의 고원에 자리잡고 있기에, 적이 추가 부대가 올 때까지 가만히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플란데런인들은 오히려 경사면을 올라가 잉글랜드군을 정면에서 공격했다. 적군이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방심했던 잉글랜드군이 크게 당황해서 쩔쩔매는 사이, 프랑스 지원군이 현장에 도착한 뒤 즉각 전투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잉글랜드군의 수적 우위는 상쇄되었고, 전투는 그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잉글랜드군은 최선을 다해 항전했지만, 헨리 3세가 포로나 전사의 운명을 피하고자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생트로 도망치자,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왕의 뒤를 따라갔다. 잉글랜드군은 생트 성벽으로 후퇴했다가 프랑스 기병대의 추격으로 수많은 사망자와 포로가 발생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와해하여 각지로 흩어졌고, 헨리 3세는 생트마저 공격당하게 생기자 7월 28일 밤에 생트를 떠나 블레이로 피신했다. 다음 날 아침, 루이 9세는 생트 시민들로부터 도시의 열쇠를 받고 생트에 무혈 입성했다. 한편, 위그 10세 드 뤼지냥은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7월 24일에 아내와 세 아들과 함께 루이 9세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했다. 루이 9세는 그의 생명을 보장해 줬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푸아티에 성은 몰수되었다.

헨리 3세는 루이 9세가 여세를 이어가 아키텐과 가스코뉴를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는 걸 막기 위해 해군을 통해 항구 도시인 라 로셸을 봉쇄했다. 그러나 라 로셸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반란에 가담했던 툴루즈 백작 레몽 7세마저 푸아 백작 로제 4세의 훼방에 시달리다가 루이 9세가 이끄는 왕실군의 강력한 압박에 직면한 끝에 1243년 1월에 항복했다. 헨리 3세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1243년 3월 12일 루이 9세와 5년간 휴전을 맺자고 요청했다. 루이 9세는 마침 군중에서 이질이 창궐했기 때문에 이에 응하기로 했다. 휴전 협약은 1243년 8월 1일 퐁스에서 체결되었다.

생통주 전쟁은 헨리 3세의 위신에 큰 타격을 입혔다. 헨리 3세가 생트로 철수하던 중에 후위대를 이끌었던 시몽 드 몽포르는 그의 무능과 비겁함에 분노해, 헨리 3세가 10세기 카롤루스 왕조 샤를 3세처럼 유폐되어야 한다는 극언을 퍼붓기도 했다. 그렇게 잉글랜드로 쓸쓸히 돌아간 헨리 3세는 1247년 푸아투 출신 친지들이 잉글랜드로 망명하는 걸 허용했고, 잉글랜드 귀족들의 영지 일부를 회수한 뒤 그들에게 넘겨줬다. 그 결과 약 100명이 잉글랜드에 정착했고, 그중 2/3가 헨리 3세로부터 66파운드 이상의 수입을 받았다. 이때 잉글랜드로 건너간 뤼지냥 가문의 많은 인사들은 그의 아들 에드워드와 친분을 맺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존의 잉글랜드 귀족 및 사보이아 가문 인사들과 잦은 반목을 일삼았고, 국법을 여러 번 위반했다. 헨리 3세는 이들을 제지하기 위한 조치를 거의 하지 않았고, 잉글랜드 귀족들은 이런 상황에 깊은 반감을 품었다.

2.7.3. 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와의 정책

1240년 웨일스를 통합한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가 사망한 후, 헨리 3세는 웨일스에 대한 군사 원정을 3차례 벌였다. 그 결과 체스터 백작령의 왕령지가 확장되어 웨일스 군주들에 대한 헨리 3세의 통제력이 강해졌다. 허웰린의 아들 다비드는 이에 저항했지만 1246년에 사망했고, 헨리 3세는 이듬해 허웰린의 손자인 오와인과 허웰린 압 그루퍼드와 우드스톡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그들은 헨리 3세에게 땅을 양도하면서도 웨일스 공국의 중심지는 귀네드 왕국에 계속 두고, 자치권을 허용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후 웨일스에 대한 원정은 더 이상 추진되지 않았고, 웨일스인들은 이때를 틈타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1256년 허웰린 압 그루퍼드가 반란을 일으켜 웨일스 전역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헨리 3세는 신속한 군사적 대응을 벌이겠다고 선언했지만, 귀족들이 옥스퍼드 조례를 맺을 것을 강요하는 등 왕권에 도전하는 태도를 보이자, 자연히 웨일스를 더 이상 신경 쓰지 못했다.

한편, 아일랜드는 헨리 3세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매년 평균 수입 1150파운드나 왕실에 전해졌고, 지지자들에게 부여할 수 있는 영지의 원천으로서 중요하기도 했다. 1240년대에는 영주들의 죽음으로 인해 토지 소유권이 크게 격변했고, 헨리는 아일랜드 영지를 그의 지지자들에게 재분배할 수 있었다. 1250년대, 헨리 3세는 아일랜드 국경을 따라 지지자들에게 수많은 토지를 하사하여 토착 아일랜드인에 대한 완충 지대를 만들었다. 1254년, 헨리 3세는 아일랜드를 아들 에드워드에게 수여했다.

헨리 3세는 치세 내내 스코틀랜드 왕국과 평화를 유지했으며,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2세의 주권자 노릇을 했다. 알락산더르 2세는 제1차 남작 전쟁 때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해 한때 장악했다가 전쟁이 끝나자 철수한 적이 있었지만, 1221년 헨리 2세의 여동생 조안과 결혼했고, 1237년 헨리 3세와 요크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알락산더르 2세는 노섬벌랜드, 컴벌랜드, 웨스트모어랜드 주에 대한 조상의 권리를 포기하고 잉글랜드 국왕이 가지는 걸 허용하고, 일리엄 1세가 존 왕에게 지불한 은화 1만 5천 마크를 존 왕이 지키지 않은 특정 관습에 대한 보상으로 포기하며, 헨리 3세는 알락산더르 2세에게 노섬벌랜드와 컴벌랜드 내의 특정 토지를 부여하고, 세금과 군역을 쥘 의무를 면제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 국왕에게 노섬벌랜드와 컴벌랜드 내 영지에 대한 충성서약을 바치기로 했다.

헨리 3세는 1251년 스코틀랜드의 새 국왕 알락산더르 3세 기사로 선임하고 딸 마거릿과 결혼시켰으며, 알락산더르 3세가 스코틀랜드 군주로서 헨리 3세에게 충성을 바치길 거부한 뒤에도 대체로 화기애애하게 지냈다. 1255년, 헨리 3세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반란으로 에든버러성에 감금되었던 알락산더르 3세와 마거릿을 구출했고, 알락산더르 3세가 어린아이로 지낸 나머지 기간에 그의 정부를 관리하기 위한 추가적인 조치를 했다.

2.7.4. 대외 정책

생통주 전쟁에서 실패하면서 자력으로 조상의 영지를 되찾을 길이 없자, 헨리 3세는 외교로 승부를 보기로 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포섭해 자기편을 들거나 그의 귀족들이 자신의 작전에 가담하도록 허용하기를 바랐다. 다만 1248년 루이 9세가 이집트를 향한 제7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했을 때 교황청의 요청에 따라 프랑스를 치지 않았고, 1250년 루이 9세가 원정에 실패하고 쓸쓸히 귀환하자 자기가 그를 대신해 십자군 원정을 단행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레반트 주변의 우호적인 통치자들과 통행 협상을 맺었고, 선박과 수레를 대거 준비했다.

그러나 헨리 3세의 십자군은 출항하지 못했다. 부관인 시몽 드 몽포르의 가혹한 정책으로 인해 1252년 가스코뉴에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0세의 지원을 받고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궁정은 이 문제로 분열되었다. 헨리 3세는 뤼지냥 가문의 지원을 받고 시몽 드 몽포르의 잘못된 정책에 비판을 퍼부었고, 시몽 드 몽포르와 엘레오노르 왕비는 가스코뉴 귀족들의 불충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헨리 3세와 엘레오노르는 이 문제로 말다툼했고, 이듬해까지 화해하지 못했다. 그 후 헨리 3세는 뤼지냥 가문의 지원을 받고 가스코뉴 공국을 겨우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 후 헨리 3세는 가스코뉴 공국을 장남 에드워드에게 줬고, 에드워드는 알폰소 10세의 이복누이 레오노르와 결혼해 카스티야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헨리 3세는 십자군 원정과 가스코뉴 원정에 들어간 자금 때문에 막대한 재정 손실을 보았고, 빚더미에 올라서 동생 리처드와 뤼지냥 가문에게서 빌린 돈에 의존해야 했다.

헨리 3세는 십자군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진 않았지만, 둘째 아들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국왕에 앉히려는 계획을 고려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와 협의한 끝에, 1254년 시칠리아 왕위 찬탈자 만프레디를 타도하는 대가로 원정 비용을 지원받고 에드먼드가 시칠리아 왕위에 오르는 걸 승인받기로 했다. 그러나 원정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인노첸시오 4세가 사망했고, 그 뒤를 이은 알렉산데르 4세는 헨리 3세의 원정군 비용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는 헨리 3세가 십자군 원정 준비를 위해 교황청으로부터 빌렸던 9만 파운드를 보상해 달라고 요구했다. 헨리 3세는 어떻게든 이 돈을 마련하려고 1255년 의회를 소집한 뒤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에도 1257년까지 매년 계속 요청했지만, 얼마 안 되는 지원금만 받을 수 있었다.

알렉산데르 4세는 헨리 3세가 돈을 지불하는 게 차일피일 미뤄지자 불만을 품고, 1258년 잉글랜드에 사절을 보내 헨리 3세가 빚을 갚고 약속한 군대를 시칠리아로 보내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헨리 3세는 재차 의회를 소집했지만, 귀족들은 이번에도 거부했다. 이에 헨리 3세는 백지 헌장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은 고위 성직자들에게서 왕의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사실상 무제한의 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 4만 파운드를 모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원정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고, 잉글랜드 성직자들은 헨리 3세의 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한편, 헨리 3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차기 황제 선거에 개입해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 독일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제국 내 잠재적인 지지자들에게 기부금을 지불했다. 리처드는 1256년 독일왕에 선출되는 데 성공했고, 독일에 종종 들렀지만,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0세와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헨리 3세는 동생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면 프랑스를 압박해서 잃어버린 조상의 영지를 되찾는 길이 될 거라 믿었지만, 잉글랜드 귀족들은 그가 공연한 일에 막대한 재원을 낭비하고 자기들의 재산에 손을 댄다고 여겨 반감을 품었다. 그 결과, 귀족들은 1258년부터 헨리 3세를 상대로 항쟁하기 시작했다.

2.7.5. 내치

2.7.5.1. 행정 체계
잉글랜드 정부는 전통적으로 강력한 영주들이 대법원장 등 주요 직책을 맡아서 각지를 통제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헨리 3세는 어린 시절부터 고위 관직에 오른 대영주들이 권력 다툼을 일삼으면서 왕권이 실추된 걸 똑똑히 지켜봤고, 친정을 선포한 뒤 왕권 강화에 몰두했다. 그는 대법원장을 공석으로 두었고, 국가의 행정을 관리하던 재무장관이 재정만 관리하는 것으로 국한했다. 또한 대규모 위원회가 아닌 소규모 왕립 위원회를 두었는데, 헨리 3세의 직속 고문들만 그 자리에 세워졌다. 이에 따라 헨리 3세의 최측근에 속하지 않은 외부 인사들이 정책에 영향을 미치거나 왕의 친구들에 대한 합법적인 불만을 제기하는 게 훨씬 어려워졌다.

초년기에 벌어진 제1차 남작 전쟁에 깊은 인상을 받은 헨리 3세는 전임자들이 교회 의례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 권위가 쇠퇴하도록 내버려뒀다고 여기고, 이를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그는 참회왕 에드워드 수호성인으로 삼고, 에드워드가 잉글랜드에 평화를 가져다주고 그의 백성을 질서와 조화 속에 재통합한 방식을 본받고자 했다. 또한 왕의 권위를 관대하게 사용해 자신에게 적대적인 영주들을 달래고 잉글랜드에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 결과, 헨리 3세의 통치는 비교적 제한적이고 합법적이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마그나 카르타의 조건 내에서 행동했으며, 귀족에 대한 사법 이외의 조치를 취하는 걸 기피했다. 그러나 마그나 카르타는 왕실 고문의 임명과 후원 분배 문제를 다루지 않았기에, 이 문제는 전적으로 헨리 3세의 의사에 맡겨졌다. 성품이 너그러웠던 헨리 3세는 총애하는 사람들에게 후하게 베풀었지만, 자신의 행위가 다른 귀족들이 소외감을 느끼게 할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

왕의 재판에 대한 규정은 일관되지 않았고 정치 상황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포되었다. 때로는 합법적인 귀족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고, 다른 경우에는 문제가 단순히 무시되기도 했다. 지역 수준에서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는 판사는 일반적으로 주요 영주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는 하위 귀족과 신사 계층에게 유리한 조치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주요 영주가 지역 사법 제도를 지배할 수 있었다. 각 지역에서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했던 왕실 보안관의 권력도 쇠퇴했다. 이제 그들은 중요한 지역 가문 출신이 아니라 재무부에서 임명한 하급 인력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왕을 위해 수입을 창출하는 데 주력했다. 벌금을 강제하고 빚을 징수하려는 그들의 강력한 시도는 하층 계급 사이에서 반감을 품게 했다.
2.7.5.2. 궁정 운영
왕실 궁정은 헨리 3세가 신뢰하는 친구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는 기존의 잉글랜드 귀족에 유럽 대륙에서 찾아온 인사들을 대거 끌어들였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자매 엘레노어와 결혼한 프랑스 기사 시몽 드 몽포르도 있었다. 궁정은 유럽의 전통을 따랐으며, 구사 언어는 프랑스어였고, 프랑스, 카스티야, 신성 로마 제국 및 시칠리아 궁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다른 유럽 통치자들처럼 저명한 문인들을 후원했다. 그는 이전 왕들과는 달리 여행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고, 한 궁전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평화롭고 차분한 삶을 추구했다.

그는 궁전과 주택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특히 가장 좋아하는 집인 웨스트민스터의 왕궁과 수도원을 5만 5천 파운드에 달하는 비용을 들여 확장했다. 또한 런던 탑, 링컨, 도버에 대규모 공사를 실시했으며, 왕실 성 재건축에 5만 8천 파운드를 지불했다. 그 결과, 이 성들의 군사적 방어와 내부 숙박 시설은 모두 상당히 개선되었다. 특히 윈저 성을 대대적으로 개조해 호화로운 왕궁을 세웠으며, 그 스타일과 세부 사항은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건설될 후대 왕궁들에 영감을 주었다. 한편, 그는 런던 탑에 동물원을 두었는데, 거기엔 코끼리, 표범, 낙타가 포함되었다.
2.7.5.3. 종교 정책
헨리 3세는 진정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화려한 전례를 장려했고, 하루에 한 번 이상 미사에 참석했다. 또한 매일 빈민 500명에게 음식을 제공했고, 고아들을 도왔다. 참회왕 에드워드의 축제를 거행하기 전에 금식했고, 한센병 환자들의 발을 손수 씻었으며, 브롬홀름, 세인트 앨번스, 월싱엄 수도원을 정기적으로 순례했다.

동시대의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도 경건한 왕으로 유명했는데, 두 사람은 이 점을 놓고 경쟁을 벌였던 듯하다. 그는 치세 말기에 괴혈병 환자를 만져서 치료하는 관행을 실시했는데, 이는 루이 9세가 먼저 한 것이었다. 루이 9세는 파리의 생트샤펠에 보관한 예수의 수난 관련 유물들을 지녔고, 1241년 성십자가 행차를 파리에서 개최했다. 헨리 3세는 1247년에 성혈 유물을 손에 넣고 웨스트민스터를 가로질러 행진해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치하면서, 이를 생트샤펠의 대안으로 홍보했다.

헨리 3세는 탁발 수도회를 선호했다. 그는 캔터베리, 노리치, 옥스퍼드, 레딩, 요크에 탁발 수도회를 지었으며, 인구가 많은 마을과 도시에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한 귀중한 공간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1235년 튜튼 기사단의 후원자가 되는 등 무슬림에 맞서는 십자군 기사단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새로 생겨난 신학을 중시하는 옥스퍼드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도 그의 관심을 받았다. 헨리 3세는 이들의 권한을 강화했으며, 파리 학자들을 초빙해 그곳에서 가르치도록 격려했다.

이렇듯 신앙심이 두터웠던 헨리 3세는 교황청의 자금 요청을 가능한 한 들어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는 민중의 반감을 사는 결과를 초래했다. 1240년 교황사절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잉글랜드 전역에 세금을 징수하자, 민중은 분노해 폭동을 일으켰다. 헨리 3세는 폭동을 철저하게 진압하고, 사절들이 세금을 무사히 거둬갈 수 있게 해줬다. 1250년대에는 헨리 3세가 교황청의 기대에 부응해 레반트를 향한 십자군을 단행하고자 세금을 십일조를 대거 거둬들여 여론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2.7.5.4. 유대인 정책
잉글랜드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왕실의 재산으로 간주하였으며, 왕이 반유대주의에 시달리는 그들을 보호해 주는 대가로 자금을 저렴하게 대출해 주고 세금을 순순히 지불해야 했다. 헨리 3세 치세 초기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잉글랜드에서 크게 번영했다. 섭정 윌리엄 마셜은 유대인들의 지원을 받아야만 왕실의 재정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겼기에,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강력한 반유대주의 정책을 반포한 교황청의 뜻을 무시하고 유대인들을 굳건히 보호했다.

헨리 3세도 성인이 된 뒤 수년간 유대인들을 딱히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1239년, 그는 루이 8세의 정책을 모방해 반유대 정책을 실시했다. 잉글랜드 전역의 유대인 지도자들을 투옥하고, 재산의 3분의 1을 벌금으로 내도록 강요했으며, 그들에게 빌려놓고 아직 갚지 않았던 대출금은 면제되었다. 1244년, 왕실은 유대인들에게 4만 파운드를 지불하라고 요구했고, 그중 3분의 2가 5년 이내에 회수되었다. 이 때문에 유대인 공동체가 돈을 빌려줄 수 있는 능력이 파괴되었다. 그들은 헨리 3세가 가한 재정 압박에 대처하고자 자기들에게 돈을 빌렸던 이들에게 빚 독촉을 심하게 했고, 이는 유대인에 대한 민중의 반감을 부추겼다.

헨리 3세는 유대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런던에 도무스 콩베르소룸(Domus Conversorum: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 공동으로 거주하는 집단주택)을 1239년 이후 전국 각지에 건설했다. 1250년대 후반까지 잉글랜드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 10%가 개종했는데, 이는 헨리 3세의 재정 압박으로 인한 경제력 악화 때문이었다. 1255년 링컨에 살던 어린이 휴가 유대인들에게 납치된 뒤 온갖 고문을 받은 끝에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우물에 던져져 살해되었다는 고발이 들어왔다. 헨리 3세는 곧바로 링컨으로 가서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살인을 자백한 코팽을 처형하라고 명령하고, 유대인 90명을 무작위로 체포해 런던 탑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의식적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이중 18명은 그리스도교도 배심원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기를 거부하며 재판에 참석하기를 기피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나머지 죄수에 대한 재판은 2월 3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렸는데, 이들은 배심원 48명에게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나중에 사면받은 후 풀려났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 왕실이 인정한 최초의 반유대주의 고발로서 역사학자들에게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한다.

1253년, 헨리 3세는 유대교 법령을 통과했다. 이에 따르면, 유대교 회당 건설은 금지되고, 유대인들은 배지를 착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 법령이 어느 정도까지 시행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러한 헨리 3세의 과도한 유대인 세금, 반유대주의 법률, 선전 정책은 유대인의 잉글랜드에서의 지위와 안전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많은 유대인이 박해를 피해 잉글랜드를 등졌으며, 잉글랜드 상업 경제가 악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2.8. 내전으로의 길

2.8.1. 옥스퍼드 조례

1258년, 잉글랜드 귀족들은 왕의 관리들이 자금을 강압적으로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영지에 손을 함부로 대고, 뤼지낭 가문 등 푸아투 출신 귀족들이 궁정에서 설치며, 시칠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 문제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쓰고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유대인들에게 과도한 재정 압박을 가해 그들이 빚 독촉을 심하게 하게 한 것에 반발했다. 여기에 잉글랜드 고위 성직자들도 왕이 자기네 교구 자금을 무제한으로 각출하는 현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 결국 그해 4월, 시몽 드 몽포르, 로저 비고드, 존 피츠조프리, 피에르 드 몽포르, 피에르 드 사보이, 리처드 드 클레어 등 대영주 7명이 왕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뤼지냥 가문을 타도하기 위한 동맹을 결성했다.

1258년 4월 30일, 로저 비고드는 공모자들의 지원을 받아 의회가 열리던 웨스트민스터로 진군했다. 이러다가 체포될 걸 두려워 한 헨리 3세는 그들과 협상한 끝에 왕의 자의적인 통치를 중지하고, 그 대신 국왕이 절반을, 귀족들이 절반을 선출한, 귀족과 성직자 24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통해 통치하자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뤼지냥 가문 인사들이 왕의 선택을 받고 의회에 자리를 계속 잡자, 공모자들은 더 많은 조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해 6월, 새 의회가 소집되어 <옥스퍼드 조례>로 알려진 일련의 조치를 통과했으며, 헨리 3세는 압력에 직면한 끝에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했다.

이제 귀족에서만 선출되는 15명의 소규모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사법관, 수상, 재무관을 임명할 권한이 있었고 3년마다 열리는 의회를 통해 감시되었다. 옥스퍼드에 있는 하급 귀족과 신사들의 압력은 헨리 3세의 관리들과 대귀족들의 권력 남용을 제한하기 위한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선출된 위원회에는 사보이아 출신 인사들이 포함되었지만, 푸아투 출신 인사는 없었다. 그 후 위원회는 주요 뤼지냥파 인사들을 궁정에서 추방하고 전국의 주요 요새를 확보했다.

그러나 공모자들 사이에서 개혁의 방향을 놓고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시몽 드 몽포르는 대영주와 왕실의 권위와 권력에 더 많은 제한을 가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선호했고, 로저 비고드는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으며, 리처드 드 클레어 등은 왕의 권력을 지나치게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한편, 헨리 3세의 장자 에드워드는 왕에게 반기를 든 공모자들에게 반감을 품었지만, 나중에 입장을 바꿔서 시몽과 동맹을 맺고, 1259년 대영주와 지방 왕실 관리들에게 더 많은 제약을 도입한 <윈체스터 조례>를 통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2.8.2. 파리 조약과 귀족들과의 갈등

1259년, 헨리 3세는 왕권이 귀족들에게 휘둘리는 현 상황에서 프랑스 왕국과 갈등을 이어가는 건 아무 소용 없고, 도리어 유럽 대륙에 그나마 간직하고 있는 가스코뉴마저 프랑스에 빼앗기게 될 거라 여기고, 프랑스 왕실과 종전 협약을 맺기로 마음먹었다. 그해 말, 헨리 3세와 엘레오노르 왕비는 시몽 드 몽포르와 귀족 위원회의 많은 인사들의 호위를 받고 파리로 향했다. 그 후 루이 9세와 평화 협상을 이어간 끝에, 1259년 12월 4일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루이 9세는 잉글랜드 왕실의 영지인 샤랑트강 남쪽의 리무쟁, 페르고르, 기옌, 케르시, 아제네 및 생통주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2. 헨리 3세와 후계자들은 이 영지들의 영주로서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며, 매년 임대료를 파리에 바친다.
3.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이 노르망디 공국과 투렌, 앙주, 푸아투, 멘 일대의 지배권을 그대로 가지는 걸 인정한다.
4. 잉글랜드 국왕이 보유해야 할 섬은 프랑스의 귀족이자 아키텐 공작으로서 잉글랜드 국왕의 소유물이 된다.

이리하여 카페 왕조 플랜태저넷 왕조간의 백여 년간 이어진 갈등은 일시적으로 종식되었고, 헨리 3세는 루이 9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의 호의를 얻었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는 잉글랜드로 돌아갔지만, 헨리 3세는 엘레오노르와 함께 파리에 남아서 귀족 위원회와는 독립적으로 자신의 명령을 내려서 왕권을 재건하려 노력했다. 그 후 1260년 4월 잉글랜드로 돌아온 헨리 3세는 리처드 드 클레어와 시몽 드 몽포르 및 에드워드 왕자의 갈등이 고조되어 내전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상황을 목격했다. 헨리 3세의 동생 리처드가 당사자들을 중재해 화해시킴으로써 분쟁은 수그러들었지만, 불씨는 여전히 잔존했다.

헨리 3세는 옥스퍼드 조례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지만, 비밀리에 교황 우르바노 4세에게 옥스퍼드 조례를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청원했다. 1261년 6월, 헨리 3세는 교황이 자신을 맹세에서 풀어주었다고 선언하고, 즉시 에드워드 왕자의 지원을 받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공모자들을 보안관 직위에서 해임하고 여러 왕궁의 통제권을 탈환했다. 시몽과 리처드가 이끄는 반대 세력은 일시적으로 연합해 왕으로부터 독립된 자신들만의 의회를 소집해 잉글랜드 전역에 경쟁적인 지방 정부 체계를 세웠다. 헨리 3세는 아내 엘레오노르의 협조를 받아 프로방스에서 대규모 용병대를 데려와서 이에 맞섰다. 이제 내전이 벌어지는 듯했지만, 왕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게 몹시 껄끄러웠던 귀족들은 한 발 물러섰다. 리처드 드 클레어는 헨리 3세 편으로 돌아섰고, 시몽은 프랑스로 자진해서 망명했으며, 귀족 위원회는 붕괴하였다.

이리하여 왕권 회복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악화했다. 헨리 3세는 귀족들에게 <킹스턴 조례>에 동의하라고 강요했다. 이 조약은 콘월 백작 리처드를 감독관으로 선임하고, 리처드가 타협을 끌어내지 못하면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지원하는 중재 시스템을 도입해 왕과 귀족들 간의 미해결 분쟁을 해결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귀족들이 이렇게 하면 프랑스 왕실의 간섭이 심해지니 철회해달라고 청하자, 헨리 3세는 킹스턴 조례를 완화할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곧 인기 없는 시칠리아 정책을 재개했고, 자기에게 대항했던 귀족들에게서 자금을 뜯어내려 했다. 이에 귀족들은 왕에게 강한 불신을 품었다.

그러던 1262년 7월 14일, 리처드 드 클레어가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인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는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끌었던 급진파 편을 들었다. 여기에 웨일스인들이 대거 봉기하면서 헨리 3세가 웨일스 일대에 확보했던 영토의 통제력을 상당히 잃어버렸고, 교황청마저 입장을 뒤집어서 옥스퍼드 조례가 합법적이라고 판정해 버리면서, 헨리 3세의 입지가 난처해졌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가 1263년 4월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옥스퍼드에서 왕실에 대항하는 귀족 의회를 소집한 후 푸아투 인사를 추방하는 안건을 제시했다. 헨리 3세가 이에 응하길 거부하고, 양자가 군대를 동원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2.9. 제2차 남작 전쟁

시몽 드 몽포르는 왕이 푸아투 출신 간신들에게 휘둘려서 국정을 잘못 이끌었으니, 자신이 바로 잡겠다고 선언하고, 길버트 드 클레어 등 급진파 인사들과 함께 런던을 향해 진군했다. 이때 그와 함께 한 반란군은 유대인 대출자에게 진 빚 기록을 고의로 파괴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1263년 6월, 런던 시민들이 반란에 호응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유대인 500명을 학살했다. 헨리 3세와 엘레오노르는 반란군에 의해 런던 탑에 갇혔다. 엘레오노르는 윈저에 있는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템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탈출을 시도했지만, 도중에 런던 군중에게 발각되어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1263년 7월 15일, 시몽 드 몽포르는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런던에 입성했다. 그는 헨리 3세와 엘레오노르를 억류한 뒤, 헨리 3세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시몽 드 몽포르의 급진 정책에 반발한 귀족들의 항의가 이어지면서 통치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런던 탑에서 풀려난 헨리 3세는 킹스턴 조약에 규정한 대로 루이 9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자신은 킹스턴 조례를 받아들인 적 없다며 이를 따르길 기피했지만,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건 싫었기에 프랑스의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의 사절단[2]과 함께 루이 9세가 있던 아미앵에 친히 찾아갔다.

헨리 3세는 아미앵에서 자신이 장관과 관리를 임명할 권리가 있는데 귀족들이 이를 거부했으며, 왕의 성이 파괴되고 왕의 땅이 황무지로 변해버렸다고 호소했다. 그는 귀족들이 자신에게 끼친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30만 파운드를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교황이 맹세를 취소해도 좋다는 칙령을 내린 바 있으니, 귀족들이 조항을 강요하는 걸 못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응해, 귀족들은 분쟁의 배경을 설명했고, 헨리 3세 본인이 옥스퍼드 조례를 수락했다는 사실을 강조했으며, 자신들이 실시한 개혁은 왕국에 전적으로 유리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헨리 3세 본인이 과세를 지나치게 많이 거둬들이는 바람에 왕의 영지가 황폐해지고 성이 파괴된 것이며, 교회의 자유를 침해하고, 마그나 카르타를 위반했으며, 정의를 타락시켰다고 규탄했다.

루이 9세는 1264년 1월 23일에 판결을 내렸다. 그는 잉글랜드가 지난 몇 년 동안 겪었던 어려움을 언급하며 결의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교황이 이미 조항들을 무효로 했기에, 왕이 이를 고수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귀족들에게 넘겨진 성은 왕에게 돌려줘야 하며, 헨리 3세는 장관들을 자유롭게 임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다만 갈등에 연루된 귀족들은 전원 사면받고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루이 9세는 귀족들이 왕의 권한을 침해하는 선례가 세워진다면 자신과 후손들에게도 좋은 일이 되지 않을 거라 보고, 헨리 3세 편을 들기로 했다.

그러나 시몽 드 몽포르 등은 루이 9세의 판결이 왕에게 유리하고 귀족에게 불리한 일방적인 결정이라고 여기고,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해 반기를 들기로 작정했다. 1264년 2월, 시몽 드 몽포르는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와 동맹을 맺었고, 그의 아들 앙리와 시몽이 마르케에 있는 왕당파 귀족 로저 모티머의 영지를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헨리 3세는 잉글랜드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자, 엘레오노르를 파리에 남겨둬서 용병 지원군을 추가로 모집하게 한 뒤, 본인은 잉글랜드로 급히 돌아갔다.

1264년 4월, 헨리 3세는 군대를 이끌고 미들랜드에 있는 시몽 드 몽포르의 영지로 쳐들어가서 노샘프턴을 포위 공격한 끝에 시몽 드 몽포르의 아들 시몽을 생포했다. 이후 프랑스로 가는 중요한 항구를 점거하기 위해 남동쪽으로 진군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이에 대응해 로체스터 성을 포위했지만 8일 만에 왕실군이 접근하자 철수했다. 그 후 양자는 5월 14일 루이스에서 격돌했다. 왕실군이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전투 결과는 왕실군의 완패였다. 콘월 백작 리처드는 그날 생포되었고, 헨리 3세와 에드워드 왕자는 현지 수도원으로 후퇴했다가 다음 날 항복했다.

그 후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와 협의한 끝에 합의안에 서명했다. 그는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사면하고, 옥스퍼드 조례를 복원해야 했다. 이후 그는 꼭두각시로 전락했고, 시몽 드 몽포르는 유대인들에게 지니고 있던 많은 빚과 이자를 모조리 취소했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는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모든 주에 평화 유지군을 보냈고, 1264년 6월 23일에 런던에서 새 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에는 귀족과 성직자뿐만 아니라 각 주의 기사 4명과 전국의 모든 공동체 대표단도 참석했다. 그는 왕과 국민 사이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향후 의회에서 3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선출하고, 9명으로 구성된 감독기관을 구축하여 왕을 대신해 법령을 내리도록 했으며, 오직 의회 만이 이들 위원회 인사를 변경할 수 있었다. 위원회에는 시몽 드 몽포르 본인 외에도 체스터 주교 스티븐 버스티드 주교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시몽 드 몽포르는 자신의 승리를 공고히 하지 못했다. 당초 그와 함께 왕실에 대항했던 길버트 드 클레어는 시몽이 웨일스 내 자기 영지를 침탈하는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와 동맹을 맺은 것에 반감을 품었으며,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에서 루이 9세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 침공 계획을 세웠다. 이에 시몽 드 몽포르는 캔터베리 근처에 군대를 모집했고, 불로뉴에서 프랑스 사절단과 접견해 새 정부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교황청은 1264년 10월 20일 시몽 드 몽포르와 길버트 드 클레어, 그리고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를 파문했다. 1264년 겨울, 웨일스의 변경지대에 배치된 일부 기사가 월링포드 감옥에 갇혀 있던 에드워드 왕자를 구출하려 시도했지만 시도했다. 이에 시몽 드 몽포르는 에드워드를 케닐워스로 이송해 자기 아내의 감독을 받게 했다.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의 압력을 받고 1265년 1월 20일에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새 의회를 소집하는 데 동의했다. 의원들은 주로 교회의 성직자들로 구성되었지만, 요크와 링컨의 각 주와 도시에서 각각 백작 5명과 기사 2명, 그리고 다른 모든 '자치지역'에서 각각 시민 2명이 선임되었고,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에서 각각 4명이 선임되었다. 잉글랜드 의회에서 귀족과 성직자 외에 하급 기사 및 평민들이 활동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역사가들은 이를 '하원'의 창립으로 간주한다. 이 의회는 포로 상태에 놓인 에드워드 왕자의 석방 문제를 다뤘다. 3월 31일, 에드워드 왕자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과 런던 시민들을 사면하고 향후에 보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헨리 3세, 에드워드 왕자, 주교 10명 등은 더 이상 외국인 남자를 고문으로 두지 않으며, 교황이 잉글랜드 문제에 개입하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1265년 5월 28일, 에드워드 왕자는 길버트 드 클레어의 도움으로 케닐워스 성에서 탈출했다. 그 후 길버트 드 클레어와 함께 군대를 소집한 그는 런던으로 진군해 케닐워스에서 시몽 드 몽포르의 아들 시몽을 격파했다. 시몽 드 몽포르도 이에 맞서 군대를 일으켰고, 양자는 8월 4일에 이브샴에서 격돌했다. 그 결과 에드워드 왕자가 완승하였고, 전사한 시몽 드 몽포르의 유해는 승자들에 의해 훼손되었다. 당시 시몽 드 몽포르의 군대에 사실상 포로로 끌려왔던 헨리 3세는 빌린 갑옷을 입고 있다가 하마터면 그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에드워드의 장병들에게 사살될 뻔했지만, 그를 감시하던 반군 측 기사 로저 드 레이본이 그의 정체를 밝힌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뒤 에드워드 왕자 앞으로 모셔졌다. 반란군은 이후에도 저항을 이어갔지만 1266년 케닐워스 공방전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고, 엘리 섬에 숨은 잔존 반군은 1267년 7월에 항복했다.

2.10. 말년

헨리 3세는 자신에게 굴욕을 안긴 귀족들에게 강렬한 원한을 품었다. 그는 모든 반군 귀족의 영지를 압류하라고 명령했고,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약탈의 물결이 휘몰아쳤다. 그러다가 1266년 교황 특사 오토부오노 데 피에스키의 설득을 받아들여 반란에 가담한 정도에 따라 벌금을 납부하는 대가로 영지를 돌려준다는 내용의 케닐워스 칙령을 반포했다.

1266년 말, 길버트 드 클레어는 반군 귀족들에게 온건한 처분을 내리자고 주장했다가 로저 모티머의 위협을 받자 영지로 돌아가서 군대를 소집했다. 1267년 1월 20일, 외국 고문을 추방하고, 옥스퍼드 조례를 이행하며, 반군 영주들에게서 몰수한 땅을 돌려주라는 요구서를 헨리 3세에게 발송했다. 아무런 응답도 없자, 길버트는 4월에 군대를 이끌고 런던을 점거했고, 정부에 불만을 품던 귀족들이 대거 합류했다. 이후 헨리 3세와 길버트가 협상한 끝에, 6월에 칙령의 조건이 완화되어 반군 귀족들은 사면되었으며, 영지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1267년 11월에는 말버러 법령이 반포되었는데, 그 내용은 지방 왕실 관리와 주요 영주의 권한에 제한을 두지만 왕의 권한은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전 때 해외로 피신했던 푸아투 인사 대부분은 전쟁이 끝난 뒤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1267년 9월, 헨리 3세는 허웰린 압 그루퍼드를 웨일스 공으로 인정하고 상당한 토지 양보를 제공한다는 내용의 몽고메리 조약을 체결했다.

그 후 헨리 3세는 신체적으로 허약해졌고, 장남 에드워드에게 전권을 맡기고 본인은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1268년 에드워드 왕자가 십자군에 가담하겠다고 선언한 뒤 새로운 세금을 걷기로 하자, 헨리 3세는 그랬다간 반란이 또 터질 수도 있다며 우려를 표했지만, 아들이 의사를 굽히지 않자 2년간 의회와 협상해 자금을 모았다. 또한 헨리 3세는 유대인에게 빚진 것이 증명될 경우 이를 반환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포함해 시몽 드 몽포르의 반유대 정책을 뒤집으려 노력했다. 1269년에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을 허물고 최신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해, 참회왕 에드워드의 유해를 모신 성당을 더욱 장엄하게 장식하도록 했다.

1271년,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걸 직감한 헨리 3세는 당시 레반트로 가서 십자군 활동 중인 에드워드에게 복귀해달라고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예루살렘을 탈환할 때까지 싸우겠다며 거절했고, 헨리 3세는 약간 회복되자 장차 아들과 함께 십자군에 가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1272년 말에 병세가 급격히 나빠졌고, 그해 11월 16일 저녁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엘레오노르 왕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참회왕 에드워드의 옛 안식처인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높은 제단 앞에 안장되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이 소식을 접하자 귀환길에 올랐고, 1274년 8월 도착한 뒤 에드워드 1세로 등극했다.

3. 평가

킹스 칼리지 교수이자 영국 중세사 연구가 데이비드 A. 카펜터(David A. Carpenter, 1947~)는 헨리 3세는 개인적으로 선량하고 온화하며, 존경할 만한 성품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순진함과 현실적인 계획을 수립하지 못하는 무능함 때문에 통치자로서 실패했다고 평했다. 옥스퍼드 대학 역사 교수 휴 리지웨이도 이에 동의하면서, 헨리 3세는 궁정을 관리하는 능력이 부족했고 지나친 신앙심으로 문제를 초래했지만, 본질적으로 평화롭고 친절하며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학계에서는 그에게 한계가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특정 측면에서 지혜와 결단력이 있었기에 56년간 장기집권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반면, 잉글랜드 내 유대인들의 삶을 연구한 역사가들은 링컨에 살던 어린이 휴가 유대인에게 잔혹하게 살해되었다는 거짓 고발을 믿고 무고한 유대인들을 처참하게 살해한 악행을 저질렀으며, 과도한 과세와 그의 신민들로부터 토지를 차용하기 위해 대출 제도를 악용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을 증오하도록 부추겼다며, 그를 선량한 사람으로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시몽 드 몽포르의 유대인 학살과 에드워드 1세의 1290년 유대인 추방령이 벌어지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비판한다.

4. 가족 관계

4.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에드워드 1세
(Edward I)
1239년 6월 17일 또는 6월 18일 1307년 7월 7일 카스티야의 레오노르[3]
슬하 3남 5녀[4]
프랑스의 마르그리트[5]
슬하 2남
1녀 스코틀랜드의 왕비 마거릿
(Margaret, Queen of Scots)
1240년 9월 29일 1275년 2월 26일 알락산더르 3세
슬하 1남 1녀[6]
2녀 브로타뉴 공작부인 베아트리스
(Beatrice, Duchess of Brittany)
1242년 6월 25일 1275년 3월 24일 브로타뉴 공작 장 2세
슬하 3남 3녀
2남 제1대 랭커스터 백작 에드먼드
(Edmund, 1st Earl of Lancaster)
1245년 1월 16일 1296년 6월 5일 아벨린 드 포르즈
아르투아의 블랑카
슬하 2남
3녀 잉글랜드의 캐서린
(Katherine of England)
1253년 11월 25일 1257년 5월 3일

5. 그 외



[1] 동시대 연대기 기록에는 5만 명에 달했다고 기술되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2만 5천 명이었으리라 추정한다. [2] 시몽 드 몽포르 본인은 낙마 사고로 중상을 입어서 함께 하지 못했다. [3] 페르난도 3세의 고명딸이다. [4] 에드워드 2세 [5] 필리프 3세의 차녀. [6] 노르웨이의 왕비 마르그레트(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의 어머니), 스코틀랜드의 왕세자 알락산더르 [7] 정치 43, 전투 53, 지모 46. 내정특기로 등용만 있고, 전투특기가 전혀 없다. 정말 기대하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