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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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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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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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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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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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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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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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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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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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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옥음방송)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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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노르망디 상륙 작전 Invasion of Norman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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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중 서부전선의 일부 | ||
날짜 | ||
1944년 6월 6일 ~ 7월 | ||
장소 | ||
나치 독일 군정하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 | ||
교전 국가 및 세력 |
[[틀:깃발|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틀:깃발| ]][[틀:깃발| ]][[캐나다 자치령| ]] [[틀:깃발| ]][[틀:깃발| ]][[폴란드 망명정부| ]] |
]][[틀:깃발| ]][[미국|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틀:깃발| ]][[틀:깃발| ]][[오마 브래들리| ]] [[틀:깃발| ]][[틀:깃발| ]][[버나드 로 몽고메리|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마일스 뎀프시 [[틀:깃발| ]][[틀:깃발| ]][[트래퍼드 리맬러리|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버트럼 램지 [[틀:깃발| ]][[틀:깃발| ]][[아서 테더| ]] 로베르 조자르[1] |
]][[틀:깃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 [[틀:깃발| ]][[틀:깃발| ]][[에르빈 롬멜| ]] [[틀:깃발| ]][[틀:깃발| ]][[후고 슈페를레| ]] [[틀:깃발| ]][[틀:깃발| ]][[카를 되니츠|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레오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2]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프리드리히 돌만[3] [[틀:깃발| ]][[틀:깃발| ]][[한스 폰 잘무트|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에트가허 포이흐팅어[4] [[틀:깃발| ]][[틀:깃발| ]][[빌헬름 팔리| ]] † [[틀:깃발| ]][[틀:깃발| ]][[에리히 마르크스| ]] † |
]][[틀:깃발| ]][[아돌프 히틀러| ]]
결과 | ||
연합군의 상륙 작전 성공 | ||
영향 | ||
프랑스의 해방 작전 개시 유럽 대륙 본토로의 진출을 위한 초석 마련 유럽의 제2전선 구축 |
||
병력 |
상륙 당시 약 156,000명 6월 24일 약 1,000,000명 7월 24일 약 1,450,000명 8월 말 2,100,000명 |
상륙 당시 약 50,000명 6월 24일 약 350,000명 7월 24일 약 380,000명 |
피해규모 |
D-Day 미군 - 전사/실종/부상 2,499명 영국군 - 전사/부상/포로 2,700명 캐나다군 - 전사 500명 - 포로/부상 621명 총 사상자 10,424명 7월 24일 기준 - 연합군 총 사상자 12만 명 |
D-데이 당일 전사/부상/포로 9천여 명 7월 24일 기준 - 총 사상자 113,059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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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유타 해변의 상륙 전개 |
Under the command of General Eisenhower, Allied naval forces supported by strong air forces began landing Allied army this morning on the northern coast of France.
아이젠하워 장군의 지휘하에, 연합군 해상 병력은 강력한 공중 지원과 함께 오늘 아침 연합군 지상 병력을 프랑스 북부 해안에 상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1944년 6월 6일 오전 10시 BBC 홈 서비스[5]
제2차 세계 대전 중
오버로드 작전의 일환으로서,
연합군이
나치 독일 치하의
프랑스 군정청
노르망디에 1944년 6월 6일에 개시한
상륙작전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자 연합군이 함락당한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유럽을 탈환하는데 발판을 마련한 최초의 작전이었다.아이젠하워 장군의 지휘하에, 연합군 해상 병력은 강력한 공중 지원과 함께 오늘 아침 연합군 지상 병력을 프랑스 북부 해안에 상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1944년 6월 6일 오전 10시 BBC 홈 서비스[5]
원래 작전명은 '해왕성 작전(Operation Neptune)'[6]이지만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는 작전 과정으로 인해 대체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디데이(D-DAY)라는 말은 본래 이 작전의 개시일을 뜻하는 용어였다.
2. 서론
|
<rowcolor=white>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연합군 육해공 장병들에 대한 성명서[7] |
Soldiers, Sailors and Airmen of the Allied Expeditionary Forces!
You are about to embark upon the Great Crusade, toward which we have striven these many months. The eyes of the world are upon you. The hopes and prayers of liberty-loving people everywhere march with you. In company with our brave Allies and brothers-in-arms on other Fronts you will bring about the destruction of the German war machine, the elimination of Nazi tyranny over oppressed peoples of Europe, and security for ourselves in a free world.
연합군의 육해공 장병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가 수 개월에 걸쳐 준비한 위대한 성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세계의 이목이 여러분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과 기도가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용맹한 동맹과 다른 전선의 전우들과 함께 독일의 전쟁 기계를 분쇄하고, 탄압받고 있는 유럽 시민들에 대한 나치의 폭정을 몰아내며, 자유 세계에서의 우리의 안보를 지켜낼 것입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발발한
독소전쟁이 시작된 이후 소련의 서기장인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일군의 전력을 분산시켜 소련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줄곧 서유럽에 제2전선 형성을 요구하는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이에 호응해 1942년에 이미 관련 성명을 발표했으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반대[8]로 인해 미뤄졌다. 그 대신 이미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던
지중해를 통해 공세하기로 결정하였다.You are about to embark upon the Great Crusade, toward which we have striven these many months. The eyes of the world are upon you. The hopes and prayers of liberty-loving people everywhere march with you. In company with our brave Allies and brothers-in-arms on other Fronts you will bring about the destruction of the German war machine, the elimination of Nazi tyranny over oppressed peoples of Europe, and security for ourselves in a free world.
연합군의 육해공 장병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가 수 개월에 걸쳐 준비한 위대한 성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세계의 이목이 여러분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과 기도가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용맹한 동맹과 다른 전선의 전우들과 함께 독일의 전쟁 기계를 분쇄하고, 탄압받고 있는 유럽 시민들에 대한 나치의 폭정을 몰아내며, 자유 세계에서의 우리의 안보를 지켜낼 것입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이후 1943년 중순,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까지 점령하며 추축국을 지중해에서 축출하기 시작했고 같은해 9월에는 마침내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을 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독소전쟁이 진행 중이던 동부전선에서는 소련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하고 하르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등 승전하며 나치 독일에 대한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전황이 바뀌고 동쪽전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나치독일이 서부전선은 지킬 수 있는 병력만 남기면 된다 판단하여 여유분을 동부전선으로 옮기면서 서부전선이 약해졌고 소련측도 서방측 연합군을 향해 빨리 2번째 전선을 열어달라며 독촉하고 있었으니 연합군은 프랑스를 되찾을 절호의 시기라며 프랑스 해안 상륙 작전을 검토했고 위력정찰에 불과했던 디에프 상륙작전을 복기하며 철저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4개의 상륙 지점 후보[9]가 뽑혔으나 여러 지리적 여건[10]을 따져 최종적으로 낙점된 것은 노르망디였다.[11] 연합군 기만술에 속은 독일군은 4개의 상륙 후보 중 파드칼레가 연합군이 상륙하기 가장 유력한 곳이라 여겨 매우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해뒀으나, 혹시 모르니 에르빈 롬멜을 노르망디 방면 수비 사령관으로 임명해 노르망디에도 칼레만큼은 아니지만 기뢰와 지뢰, 상륙정의 접근을 막는 철근 등 유효한 방어선이 존재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지휘 하에 연합군은 오마하와 유타[12], 골드와 소드[13], 주노[14] 해변으로 상륙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독일군에 대한 수많은 폭격이 수반되었다. 작전 자체는 성공했으나 오마하 해변에서 극심한 피해가 발생했으며 때문에 이후 여러 매체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룰 때 가장 인지도 높게 인용이 되고 있다.
노르망디 상륙은 빠르게 상륙 거점을 확보해야 했던 만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상륙작전이었다.[15] 약 16만명의 병력이 작전 당일 영국 해협을 건넜고 이를 위해 총 6,939대의 함정이 동원되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나치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해방의 첫 발걸음이 되었으며, 나아가 이후 서부 전선에서의 연합군 승리로 인해 동부전선의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전투급의 나치 독일의 최종적인 패망에 크게 기여한 전투로 평가된다.
3. 배경
소련은 이미 동부전선에서 큰 피해를 보고 있었고, 유럽에서의 제2전선의 구축을 영미 연합군에게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었다.1942년, 이러한 요구로 인해 결국 정치적인 입장과 국민의 사기 진작, 그리고 독일군의 해안 방어 능력을 시험해 볼 겸 윈스턴 처칠 경이 야심차게 준비한 디에프 상륙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특히 주력이었던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물론 이 작전으로 인해 상륙작전의 기본이 뭔지를 깨닫는 성과도 있었지만,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상륙하면 망한다는 게 분명해졌므로 연합군의 제2전선 형성은 계속 연기된다.
그러자 연합군은 영국의 전략적 이점을 고려, 처칠 경이 아돌프 히틀러의 '부드러운 아랫배'라고 주장한 이탈리아와 남부 유럽에 상륙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1943년, 연합군은 시칠리아 상륙을 위해서 허스키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연합군이 시칠리아, 그리고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겉으로는 히틀러의 편에서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선언을 했지만, 동시에 몰래 연합군과 교섭하고 있었다.[16] 결국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했고,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 케셀링의 G집단군)과 연합군이 이탈리아에서 전투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독일군은 이탈리아의 험한 지형을 이용해 저항에 들어갔고, 연합군은 로마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독일군의 강한 저항에 휘말려 거의 진격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1943년 1월, 연합국 수뇌부가 만난 카사블랑카 회담 뒤 영미 연합군은 프랑스에서 주공을 감행할 연합군의 침공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2달 뒤 트라이단트 회담에서 '오버로드' 라는 암호명의 상륙작전을 1944년 5월 1일에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계획 수립은 연합원정군 최고사령부 참모장 모건 장군이 맡기로 하였으며, 며칠 뒤 연합원정군 최고사령부는 오버로드 작전의 세부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모건의 첫 임무는 침공 장소를 선점하는 일이었는데, 처음에는 프랑스의 파드칼레, 노르망디, 브르타뉴가 제시되었다. 결국 노르망디가 선정되었는데, 파드칼레는 영국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상륙작전을 펼치기에 이상적인 지형이 아닌 데다가 독일군이 이미 요새화를 마친 곳이었으며, 탱크와 중장비가 상륙하기 어려운 지점으로 생각되어 보류되었다. 브르타뉴는 다른 지점에 비해 상륙하기 좋은 해안가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곳으로 상륙하면 연합군의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너무 서쪽에 있어서 독일로 진격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결국 노르망디가 최적의 장소로 뽑혔는데, 이유는 확실한 장점은 없지만 특출난 단점도 없는 무난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상륙지를 노르망디로 결정한 이후에 연합군은 본격적인 작전 계획 수립과 병력 증원, 필요한 물자 생산 등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상륙지점 추측이 가능해질 경우 피해는 물론 실패가 될 확률이 높았기에 연합군은 보디가드 작전, 포티튜드 작전 등 전체적인 병력 규모와 상륙지를 속이기 위한 각종 기만 작전들이 시행되었으며 나치 독일 사령부는 상륙낌새는 보이는데 어딘지 모르게 되어 선택과 집중을 못 하는 상황이었다. 독일군이 매우 두려워한 장군인 패튼이 지휘하는 가상의 1집단군을 만들어 심리전을 거는 등 독일군을 계속해서 오판하게 만들었다.[17] 이렇게 양동작전과 군사물품 생산이 완료되어 언제든지 작전에 착수할 수 있게 된 연합원정군 최고사령부는 D-Day를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D데이(D-day)로 처음 계획된 6월 4일은 파도가 심해 상륙할 수 없었다. 이 당시 날씨는 그냥 파도 좀 친다는 수준이 아니라, 영국 해협 전체에 강력한 한랭전선이 뻗어서 비바람이 불어닥쳤다. D-데이 무렵의 유럽 기상도. 이 때문에 연합군 사령부는 그야말로 초상집 상태였다. 다행히 6월 6일 날씨가 잠깐 갠다는 소식을 들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상륙일을 6월 6일로 결정했다. 이는 천운인데, 당시 병력과 물자의 배치, 상륙작전의 여건(야간 공수부대 투하작전 당시 달빛 조명, 상륙 전에 영향을 끼칠 조수 간만의 차)을 고려해 볼 때 6월 초가 아니면 2개가 모두 최적인 날이 9월 이후에는 없었고, 만약 더 이상 지체할 경우 보안을 위해 2주나 격리되어 있던 몇십 만에 달하는 병사들에게 더 이상의 보안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이젠하워 본인도 이날로 결정하기 전 "총사령관 한 명의 선택에 너무 많은 것의 운명이 걸려 있다"며 고뇌했을 지경이다.[18]
게다가 이 날씨 문제는 독일군이 오판하는 데 약간 도움을 줬다. 독일군도 이때 악천후 상태를 당연히 알고 있었고, 노르망디 방면 수비 지휘관인 롬멜도 '적어도 지금 당장은 상륙할 리 없겠지.'라고 판단[19]을 내릴 정도였기에 아내 생일을 위해 독일로 귀국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4. 기만작전
자세한 내용은 포티튜드 작전 문서 참고하십시오.연합군의 치밀한 작전 준비는 비단 D-DAY 상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수개월 전부터 이어진 기만작전을 포함하고 있었다. 우선 전력 분산을 위해 노르웨이 지역에 상륙한다는 정보를 흘렸고, 어쨌거나 프랑스에 상륙할 것임은 자명했기에 상륙 지점을 오판시키기 위한 기만 역시 실시했다. 그를 위해 연합군은 추축국에서 보낸 간첩을 잡아다가 아예 연합군으로 전향시킨 뒤 잡혔다는 사실을 숨기고 이중간첩으로 만들어서 그들에게 칼레 지역에서 상륙작전을 벌일 것이라는 역정보를 흘렸다.
독일군은 이를 확인하고자 영국의 도버항[20]을 정찰해 봤더니 진짜로 막사와 각종 군용 차량, 선박, 항공기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하지만 이게 모두 다 가짜였으며 군용 장비들은 진짜가 아닌 고무와 나무로 만든 영화 소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은 영화 강국이었는데 이걸 전쟁에 아주 잘 활용한 것이었다. 게다가 거기에 지휘관을 당대의 명장인 조지 S. 패튼으로 세워 놓는 바람에 독일군은 철석같이 믿었다. 연합군은 일부러 그렇게 했는데 공격하기 쉬운 곳에 공격한다고 하는 거짓말에 되려 잘 속는다는 것을 역이용했다.
그리고 연합군은 작전 당일에도 추가적으로 페이크를 쳤는데, 손바닥만한 크기의 은박지를 대량으로 모아다가 수송기에 싣고는 칼레 상공을 날면서 마구 퍼부어 댔다.[21] 이에 독일군 레이더에는 마치 거대한 편대군으로 이뤄진 항적군이 나타난 것처럼 잡혀서 독일군이 칼레에 출동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나중에 땅바닥에 대량의 은박지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사전준비는 D-DAY 당일 독일군이 상륙 지점을 오판하게끔 만들었고, 또 기습적이고 대대적인 상륙은 독일군에게 추가적인 혼란을 야기했다. 노르망디가 연합군의 주공임을 인지한 시점에서 해안교두보를 걷어내는 것은 이미 늦어버렸고, 노르망디 지역으로 이동하는 기갑군의 행렬은 연합군에게 좋은 표적지로 전락했다.
5. D-day
|
<rowcolor=white>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작전해안지도 왼쪽부터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소드 순서 |
|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전개 |
5.1. 공수작전
D-day의 서막을 알린 것은 공수부대였다. 6월 6일 새벽에 미합중국 육군 제82공수사단과 101공수사단, 영국 육군 제6공수사단은 해안포 진지나 교량 등을 점령하기 위해 가장 먼저 노르망디에 강하했는데, 0시 15분에 본대에 착지 지점을 표시할 선도 부대(패스파인더)들이 강하됐고, 뒤이어 새벽 2시에 본대가 강하한다. 폭발물이 든 인형을 매단 낙하산을 대량 투하해 독일군의 주의를 일부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대공포로 인해 피해를 입는다.
또한 이들이 오기 전에 롬멜이 일부 지역을 강을 이용해 늪이나 호수로 만들어놓았는데, 비록 이 늪들의 깊이는 대충 무릎 깊이 즉 50~60cm밖에 되지 않았지만 몇십 kg에 달하는 무거운 군장과 강한 바람에 낙하산에 끌려다녀서 상당히 많은 수의 인원이 강하 후 낙하 장비를 풀다가 익사했다고 한다. 이때 미군 공수부대의 군장은 벨트를 세 개나 풀어야 하는 복잡한 구조 때문에 버튼 하나로 한 번에 장비 해제가 가능한 영국 공수부대보다 사상자가 많았다고 한다.[22] 그리고 당시 노르망디에는 강한 바람과 독일군이 발포해대는 대공포의 저항으로 인해 수송기가 제대로 된 지역에 병사들을 떨구지 못해 거의 제대로 집결하지 못했다. 물론 대공포화로 추락한 연합군측 수송기도 많았다. 그래서 공수부대원들이 제대로 부대를 정식 편성하지 못하고, 중간에 만나는 장병들끼리 모인 뒤 소부대를 임의 편성해서 임무를 수행한 경우가 많았다. 이 중에는 아예 소속 사단이 다른, 그러니까 101사단 소속 대원과 82사단 대원이 합류해서 소부대를 편성하는 사례나 영국 제2공수사단과 미국 101사단 소속 대원이 합류해서 소부대를 편성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또한 강습용 글라이더[23] 또한 많은 사고를 낳는다. 이 중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최고위 전사자까지 발생했다. 101사단의 부사단장인 돈 프랫 준장은 글라이더를 타고 강하했는데 지상에서 제때 멈추지 못해 나무 울타리에 충돌했고 이 충격으로 싣고 있던 지프와 충돌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5.2. 피의 오마하 해변
|
<rowcolor=white> 오마하 해변으로 상륙하는 수많은 미군들 |
이 해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이미 죽은 자와 곧 죽을 자이다.
미군 제1보병사단 16연대장 조지 A. 테일러
오마하를 수비하던 독일군 제352 보병사단은 원래 태생이
동부전선에 투입될 보병사단으로 창설되었다가 임시로 방어 임무를 맡은 것이었던 만큼 전력 면에서 정예라고 할 수 있었다.[24] 또한
이탈리아에서 연합군이 상륙한 지형과 노르망디의 지형이 비슷한 것을 알아본
에르빈 롬멜의 혜안으로 인해 해안 방벽이 그나마 제대로 설치된 곳에서 방어를 하고 있었다.미군 제1보병사단 16연대장 조지 A. 테일러
미 육군의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사전 포격으로 해안의 독일군을 가루로 만들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그러면서 "제군은 특등석 링 앞자리에 앉아서 관람하는 셈"이라는 식의 호기로운 말을 했는데, 정작 해군 측 존 홀 소장의 의견은 전혀 달랐다. 그는 이때 행해진 사전 포격과 공습이 매우 부족한 규모라 생각하여 불만스러워했고, 역사상 가장 큰 상륙작전에 이처럼 부족한 함포 사격을 지원한다는 것은 범죄 행위라는 말을 했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이건 미친 짓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미친 짓이었죠. 그리고 우리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전차 26대가 차례로 가라앉았으니까요. 누가 그따위 명령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비겁한 짓이었습니다.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결정이었으니까요. 그들은 해변까지 전차를 싣고가는 게 겁이 났던 겁니다.
영국군 해군 소령 로건 스콧 보덴
상륙 당시 미군 병사들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자면, 몇백 미터를 넘는 거리에 각종 해안 방어 장애물들인
체코 헷지호그나 벨지안 게이트, 철조망에 1700개의 대인 지뢰까지 설치된 해안을 수천의 병력이 득실거리면서
MG42와 105mm 포 사격 등 무차별적인 사격을 뒤집어쓰고 지나가야 했던, 그야말로
헬게이트였다. 썰물 시 상륙을 진행한 것은 독일군이 상륙주정에 피해를 주기 위해 밀물 시 딱 수면 높이까지 오는 위치의 나무 말뚝이나 체코 헤지호그를 심고 그 위에 지뢰를 설치해 놓았기에 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는 독일군의 해안 벙커가 무력화되었을 시를 가정한 것이었다. 실제로 연합군은 해군 함정과 공군 폭격기를 동원해서 독일군의 해안 거점에 공습을 퍼붓고 포격을 가했지만 큰 피해를 주지 못했기 때문에 도리어 상륙 병력들의 돌파 거리만 늘어나게 되었다. 오마하의 경우 썰물에 상륙했음에도 수많은 보병과
전차가 해변에 수장된 건 덤이다. 그 때문에 화력 지원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보병들이 큰 피해를 봤다. 그나마 보병과 동시에 상륙할 능력이 있었던
수륙양용전차(DD 전차) 서른 대도 전차 양륙함들이 포격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해안에서 먼 곳에서 전차들을 보낸 바람에 스물일곱 대의 DD 전차들이 상륙도 못하고 가라앉아 버렸다.[25] 이로 인해 연합군의 전략이 동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전차 상륙에 실패했고 캐나다군은 성공했다. 골드 해변에 상륙한 영국군은 한 시간 늦게 밀물 때 상륙한 덕에 오마하 해변의 1/10도 안 되는 피해로 상륙에 성공할 수 있었다.영국군 해군 소령 로건 스콧 보덴
미군 지휘부는 오마하[26] 해변을 서쪽부터 동쪽으로 에이블, 베이커, 찰리, 도그 그린, 도그 화이트, 도그 레드, 이지 그린, 이지 레드, 폭스 그린, 폭스 레드로 구성된 총 10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병력을 상륙시켰는데[27], 이 중 폭스 그린과 이지 레드 구역에 상륙했던 미육군 29보병사단 116연대가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일단 상륙 전에 각종 고기, 소시지, 계란 등 사기를 높이려고 제공한 고열량 아침 식사가 안 그래도 잔뜩 긴장감에 찌들어있던[28] 병사들에게 파도가 심한 바다에서 심각한 멀미를 유도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상륙 직전 장면에서 몇몇 병사들이 토하는 장면의 원인이다. 그러다 상륙주정의 문이 열리자마자 엄청난 기관총 세례를 버티지 못하고 옆의 바다로 뛰어내린 병사들은 멀미에 체력이 바닥이 난 데다가 무거운 군장을 매고 있었기에 익사한 사례가 많았다. MG42[29]의 화력을 참고한다면 많은 병력이 한 번에 돌격해도 돌파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독일군 토치카 정면에 상륙하는 불운을 떠안았던 미 29보병사단 116연대는 상륙주정의 문이 열리자마자 기관총 세례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어떤 중대는 중대원 198명 중 상륙 개시 5분 뒤 단 두 명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실제로는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최초 상륙주정의 인원들은 문이 열리고 내려서 어느 정도 걸을 때까지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그건 사정거리 내에 미군이 들어올 때까지 독일군이 기다렸던 것이고, 이윽고 사정거리에 도달하는 순간 수많은 소총과 기관총, 그리고 방어선 양단에 각각 설치된 단 2문의 8,8cm 포의 일제 사격에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곧이어 바로 후속 상륙주정들을 보내는데, 그때부터 위의 사례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지옥이 펼쳐졌다. 상륙 직전 함포의 지원 사격과 폭격기의 폭격이 가해졌지만 큰 효과를 내지 못한 바람에[30] 독일군에게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고 진지의 피해도 거의 없었지만, 미군이 이 사실을 전혀 몰랐던 바람에 이런 일이 생겨버린 것이다. 사실 알았어도 별 도리가 없었다. 무조건 정시에 정해진 인원을 상륙시켜 점령하는 것이 작전의 주안점이었으니까.
그 결과 이날 미군은 오마하 해변에서만 약 3,000여 명의 사상자(전사, 부상, 실종)를 내고 말았다. 엄청난 전사자를 낸 미군은 정말로 어찌저찌하여 도달한 독일군 벙커 앞에서 포기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으나, 살아남은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모아 해안 출구를 공략하고 제16연대 연대장이었던 조지 A. 테일러(George A. Taylor) 대령이 상륙하여 지휘권을 잡고 해군의 포격 지원을 받아가며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후에도 내륙 지역과 해안 출구에서 전투가 이어졌으며, 최종적으론 상륙 당일에 원래 계획했던 8km에 훨씬 못미치는 2.5km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때 상륙작전의 지휘를 맡은 오마 브래들리는 오마하 해변에서의 엄청난 피해로 인해 이곳을 포기하고 유타 해변 등에 상륙을 집중시키는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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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연합군 수뇌부는 항공 정찰이나 레지스탕스의 보고 등으로 오마하 해변이 방어 준비가 비교적 잘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캉을 공략할 예정인 영연방군의 상륙 지점과 코탕탱 반도를 차단할 미군의 상륙 지점 사이가 너무 벌어질 경우 독일군이 그 사이로 파고들어 해변을 노릴 수 있었기에 손실을 감수하고 오마하 해변에 병력을 밀어넣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5.3. 프앙트 뒤 오크(Pointe du Hoc) 전투
한편 수만의 병력이 물밀듯이 상륙하는 동안 오마하 해변의 도그 그린에서는 225명의 미군 2 레인저 대대[31] 소속 병사들이 절벽에 도착한다. 이들은 오마하 상륙 부대를 위해 이 절벽 부근에 배치된 독일군의 직/곡사포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절벽 위로 특수한 박격포를 쏘아 로프를 걸친 뒤 상륙했다.[32] 그러나 바닷물에 젖은 로프 상당수가 절벽 위에 걸쳐지지를 못했고, 29개의 로프를 겨우 연결하고 20명 남짓 되는 사상자를 내면서 절벽 위로 올라간 그들은 독일군이 이미 진짜 포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가짜 포를 설치한 것을 발견했다. 그 와중에도 해변의 미군은 포격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다.사실 지휘부 입장에서는 투입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상륙작전 직전에 기상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추가 정찰을 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가진 정보를 기반으로 작전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 시점에 가진 정보들 상으로는 작전을 속행할 수밖에 없던 면이 있다.
어쨌든 다행히 정확히 이곳 지역에 있어야 했던 포들은 저어기 후방에 떨어진 공수부대가 발견하고, 포의 회전을 담당하는 구동부와, 부앙각 조절을 담당하는 부분에 테르밋 수류탄을 넣고 기폭시켜 용접시켜 버렸다. 테르밋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는 일반적인 수류탄 처럼 펑 하고 터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시간 동안 고온을 내며 비교적 조용히 타오르는 병기였던지라 이러한 은밀성이 요구되는 작전에 적합했다. 실제로 100여명의 독일군이 주변에 있었던 만큼 통상적인 폭약을 사용했다면 들킬 여지는 충분했다.
관광지에서 안내로 해주는 얘기에 따르면, 상륙부대의 한 장교가 소수의 부대만을 데리고 전방으로 정찰을 갔는데, 우연히 포들이 숨겨진 지역을 찾았다고 한다. 이때 독일군이 기막힌 우연으로 포들을 지키지 않고 잠시 철수해있었다고 한다. 이때 본대로 복귀하여 소정의 폭약을 갖고 포들을 무용지물로 만들고서 안전하게 철수했다. 돌아온 독일군들은 잠시의 시간 동안 고철이 되어버린 포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 일화의 경우 아래에서 언급되는 콜 오브 듀티 2 미션에서 포를 파괴하는 것까지 아주 충실히 재현되어 있다.
푸앙트 뒤 오크에는 독일군 사령부 건물 등이 있었던지라, 연합군 입장에서는 이들의 공격이 그리 큰 헛수고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상륙작전이 급했던 연합군은 반격한 독일군에게 포위된 이들을 제때 구원해 주지 못했고, 결국 이들은 81명의 전사자와 55명의 부상자 등 부대원의 절반 가까이를 잃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해당 지역은 현재 관광지로 사용되고 있는데, 엄청난 수의 포탄 구멍과 그 사이사이의 콘크리트 벙커가 있는 풍경이 밀덕, 역덕이라면 둘러볼 가치가 있다.
5.4. 유타 해변의 미군
오마하 해변의 미군들이 피와 살점을 깔아가며 겨우겨우 상륙에 성공한 것과 달리, 유타 해변에 상륙한 미군들이 맞닥뜨린 저항은 훨씬 덜했다.이곳을 방어하고 있던 독일 육군 제709보병사단은 오마하 해변의 제352보병사단이 동부전선에서 돌아온 정예부대였던 것과 달리 상당수가 투항한 소련군 포로들로 구성된 동방부대 출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어 사기도 낮고 부대원 간 의사소통 문제가 심각하였다. 노르망디의 한국인으로 잘 알려진 동양계 독일 병사도 여기서 미군 포로가 되었다. 게다가 이곳에 상륙한 미 육군 제4보병사단은 해류에 밀려 원래 상륙지점보다 남쪽에 상륙하게 되었는데, 운 좋게도 이곳의 독일군 방어거점은 사전폭격에 제대로 당해서 매우 허술한 상태에 있었고 제4보병사단 부사령관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33] 준장이 이 지점을 현장에서 제대로 찾아 돌파하였다. 또한 상륙부대를 지원할 전차들도 상당수 제대로 상륙할 수 있었다.
독일 국방군은 원격조종 주행지뢰 골리아트까지 사용하며 방어에 나섰지만, 미군은 이 해변에서 197명이라는 비교적 소수의 사상자를 내면서 해변을 점령했다. 이때 독일군이 사용한 골리아트들은 죄다 미군의 훌륭한 RC카 신세이자 조롱거리로 전락하였다.
다만 유타 해변은 작전 구역의 서쪽 끝부분인데다가, 작전이 수행된 다른 해변들과는 카랑탕 운하로 분리되어 있었고, 바로 동쪽 상륙 지점이 격전으로 인해 진격이 심하게 지체된 오마하 해변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동쪽으로의 연결을 위해 운하의 도강을 놓고 카랑탕에서 격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유타 해변의 후방에 공수된 101공수사단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5.5. 골드 해변의 영국군
오마하 해변에서의 참혹한 전투에 가려 별달리 주목받지는 못하였지만, 골드 해변에 상륙한 영국군 역시 꽤나 거센 독일군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영국군은 골드 해변을 킹, 지그, 아이템으로 구성된 세 개의 섹터로 구분하여 병력을 상륙시켰는데, 기상 때문에 전차를 바로 상륙시키지 못하여 초반에는 독일군의 반격에 꽤나 고전하였다. 그러나 코만도 부대의 활약 및 전차들의 상륙[34]에 힘입어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15분 만에 주노 해변을 확보한 캐나다군이 곧장 우회하여 달려와 독일군의 배후에서 접근해 소탕해 준 덕분에 오히려 한 시간 일찍 상륙한 옆 해변의 미군보다 더 빨리 주변을 장악할 수 있었다.골드 해변에서의 영국군은 약 4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은 359명의 전사자와 574명의 부상자를 기록하였다. 소드 해변의 영국군 및 프랑스군은 683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으며, 유타 해변에서는 고작 200여 명의 사상자만이 나온 것을 보면 오마하 해변의 참혹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미 1군이 오마하 해변에서만 기록한 사상자 수가 3천여 명이고, 다른 해변의 사상자 수를 모두 합해 보았자 2천 명이 조금 넘을 정도다.
5.6.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
미군이 담당한 오마하 해변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주노 해변에 상륙한 캐나다군은 상륙한 지 불과 15분 만에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하여 해변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우회기동하여 영국군이 고전하고 있던 골드 해변의 후방을 차단하고 조여들어가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였다. 이 덕분에 영국군은 1시간이나 먼저 상륙을 시작한 미군보다 더 빨리 해변을 장악할 수 있었다.하지만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 전사자는 359명에 부상자가 574명이었고, 이는 오마하 해변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 수인 걸 감안하면 캐나다군이 상륙한 주노 해변의 방어가 운 좋게 허술해서 15분 만에 장악한 게 아니라 적의 거센 저항을 적절히 지원된 중장비들과 캐나다 병사들의 용맹으로 돌파한 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5.7. 소드 해변의 영국군
DD 전차 25대중 21대가 상륙에 성공하며 스타트를 끊었다. 바람이 많이 불고 지뢰가 많아 애를 먹었지만 오전 9시 30분경 공병대가 지뢰를 대부분 제거하였다. 이어서 사이먼 프레이저 준장이 제1코만도여단을 이끌고 도착했고 제4코만도대대가 위스트르앙을 거쳐 해안에 있는 독일군 포대를 관제탑을 우회하여 후방에서 덮쳤다. 자유 프랑스군은 필리프 키퍼 사령관의 지휘 하에 리바 벨라 카지노의 거점을 정리하였다.1,0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6. D-day 이후
6.1. 멀베리항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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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골드 해변에 지어진 멀베리 B 사진 |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계획할 때 직면한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상륙 이후 군수물자를 공급할 항구[35]를 얼마나 빨리 점령하느냐였다. 노르망디 해안에 직접 선박을 정박시키고 물자를 하역하는 작업은 속도가 너무 느렸다. 더군다나 노르망디는 날씨가 험하기로 유명한 만큼 악천후로 물자 상륙이 중단될 가능성도 컸다. 그렇다고 노르망디 인근의 다른 항구를 점령하는 안을 채택할 경우 엄중한 독일군의 방어를 격파하고 기뢰를 제거해 안전을 확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상륙작전 이후 유럽 본토 내부로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진공을 위해서는 군수물자의 원활한 보급이 필수였다. 결국 연합군 수뇌부는 여러 가지 변수와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노르망디에 인공 항구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942년 초 처칠은 연합작전본부장인 해군중장 루이 마운트배튼 제독에게 편지를 보낸다. 내용인 즉 바다 위에 떠 있을 수 있는 부두 시설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처칠은 "가능성 여부를 두고 논쟁하지 말고 어려움은 스스로 풀어나가라"고 하면서 부두 개발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밝힌다. 명령을 받은 마운트배튼 중장과 예하 참모진은 그런 시설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만 1년 이상을 보냈다. 당시 마운트배튼 제독의 참모였던 존 휴즈-할렛 해군 대령이 노르망디 해안 밖에 블록십(blockship, 항구 등을 막기 위해 침몰시키는 폐색선)들을 이용해 인공항을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인공항 건설은 실마리를 찾는다. 우선 12척의 낡은 수송선을 썰물 때 해변에서 가까운 4.5m 깊이의 바다에 일렬로 가라앉혀 1.5km에 이르는 방파제를 만들었다. 또 암호명 '피닉스'로 명명된 거대한 콘크리트 상자를 썰물 때 바다에 빠트려 방파제를 조성했고, 암호명 '봄바르돈'인 물에 뜨는 방파제를 항구의 또 다른 보호막으로 삼았다.
상륙직후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2개의 정박지를 건설하였다. 오마하 해변에는 미군이 건설한 멀베리 A, 그리고 골드 해변에는 영국군이 건설한 멀베리 B를 각각 미국과 영국이 관리하였다. 그리고 '웨일'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25톤 중량의 잔교들을 배열해 잔교마다 한 척의 전차상륙함을 접안시키거나 40톤짜리 처칠 전차를 올려놓을 수 있게 했다. 멀베리 항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된 후 6월 9일 건설되었는데, 2주도 안 지난 6월 19일에 노르망디에 심한 폭풍이 불어서 멀베리 A가 부서져 버렸다. 그래도 멀베리 B는 살아남아서 약 6달 뒤 안트베르펀 항구를 점령할 때까지 연합군의 거의 유일한 항구였고, 안트베르펀 점령 이후에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10개월 동안 약 250만 명의 장병과 50만 대의 차량, 400만 톤의 물자를 하역시킴으로써 연합군 승리의 초석을 마련한다.
6.2. 독일군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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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카랑탕에서 연합군의 M7 프리스트 자주포 |
그러나 독일군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서부전선 독일군의 지휘를 육군 B집단군사령관 롬멜과 서부방면사령관 육군 원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두 사람이 함께 맡고 있었고,[36] 또한 연합군 공군의 폭격으로 대부분의 도로가 파괴되어 독일군의 이동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D-데이 오후까지도 OKW는 상륙 지점을 놓고 설왕설래가 오가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상륙 작전 얼마 전에 각종 통신 장비와 철로를 파괴하기도 했는데, 물론 이들은 가차 없이 처형당하긴 했지만 이는 작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독일군이 첫 반격에 나선 것은 12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세밀하게 계획되지 않은 명령, 실타래처럼 엉킨 지휘권으로 인해 휘하 사단들은 자기가 B집단군인지, 서부방면군인지 소속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었고, 당연히 명령권자가 없으니 사단들은 그 자리에 발이 묶여 있었다. 결국 D-데이 첫날 반격에 나선 부대는 캉으로 출동한 육군 제21기갑사단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반격도 단 하루 만에 보유전차 146대가 76대로 줄어드는 막심한 피해를 입고서 캉에 틀어박혀야 했다.
D+1일 무장친위대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37]가 캉으로 증원되었다. 그리고 D-Day+2일 캉 북서부에 위치한 소도시 베이유(Bayeux)가 영국군에 함락되면서 캉을 중심으로 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한편, D-데이 당일 서부전선 최강의 부대였던 육군 기갑교도사단이 노르망디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무려 160km 밖에 주둔하고 있던 기갑교도사단은 연합군 공군의 폭격에 벌벌 떨면서 야밤에 전차가 자력주행으로 노르망디까지 이동해야 했다. 결국 이들이 노르망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독일군 병력은 내륙으로 밀려나 지연전을 벌이고 있었고, 기갑교도사단도 그쪽에 합류해야 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분전도 있었다. 6월 13일 캉으로 가는 시골마을 빌레르보카쥬를 통과하던 영국 육군 제7기갑사단이 빌레르보카쥬 전투에서 미하엘 비트만 SS기갑중위가 이끄는 101전차대대 소속의 티거 아홉 대에게 기습을 받아 28대의 전차를 잃어버렸다. 덕분에 연합군의 캉 진격은 또 다시 늦춰지게 되었다.
한편 D-Day 당일 및 그 이후 상륙 교두보가 만들어질 당시, 교두보에 대한 독일 공군의 공격은 거의 없었다.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논쟁 작전 등을 통해 독일 공군의 항공기 생산력은 크게 떨어진 데다 연합군 공군의 압도적인 물량으로 인해 독일 공군은 교두보 공격은커녕 당장 동부전선과 서부 점령지에 배치된 항공기 및 기지의 방어에도 허덕일 지경이었다. 그나마 알려진 사례로 D-Day 당일, 단 2대의 Fw190이 기총 소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이 Fw190 중 1대를 조종한 사람이 독일 공군의 에이스인 요제프 프릴러[38] 소령이었다. 노르망디 상공을 꽉 채운 연합군 항공기들을 피해서 살아 돌아온 건 프릴러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말 천운에 가까웠고, 그 천운 덕인지 프뢸러 소령은 종전시까지 살아남았다. 프릴러 외에도 제10 고속폭격비행단 등의 소규모 공격이 있었지만 프릴러의 예와 마찬가지로 거의 의미없는 출격이었다.
6.3. 연합군의 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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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노르망디를 포함한 북프랑스의 보카쥬 지대 |
그럼에도 연합군에게는 압도적인 항공 전력과 포병이 있었기 때문에 화력을 앞세워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하는 것이 가능은 했고, 보카쥬 지형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법도 고안되었다. 처음에는 공병들로 하여금 가방에 폭탄을 가득 넣어 뿌리째 날리게 하는 방법을 쓰다가 위험하기도 하고 폭탄 낭비도 심해서, 한 병장의 아이디어를 적극 수용해 해안가에 버려진 체코 헷지호그(노르망디 하면 떠오르는 철골로 이루어진 그것)[39]를 날카롭게 잘라 전차 앞에 용접, 말 그대로 잡목들을 벌목하면서 돌파할 수 있었다. 덕분에 독일 전차들이 길로만 다닐 때 연합군 전차들은 나무를 헤치며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6월 22일 미 육군 선발대가 셰르부르에 도착했고, 25일에는 치열한 시가전 끝에 셰르부르 수비대 사령부가 함락되고 사령관인 육군 중장 카를-빌헬름 폰 쉴리펜(Karl-Wilhelm von Schlieben) 장군 (709보병사단 사단장. 첫날부터 격전을 벌여 사단이 와해수준의 피해를 입어서 남은 병력이 있는 셰르부르로 쫒겨온 후 수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과 해군소장 발터 헤네케(Walter Hennecke) 제독이 항복, 30일에는 잔여 병력의 저항이 중지되어 셰르부르가 완전히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다만 항복 전에 헤네케 제독의 명령에 따라 해군 폭파반들이 항구를 박살내 놓아서 항구 복구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특히 해군 폭파반이 숨겨둔 부비트랩은 부설한 포로들을 직접 동원해 해체했음에도 끝내 발견 못한 것들이 수시로 폭발하며 연합군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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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항복을 위해 미 육군 지휘소에 나타난 쉴리펜 장군[40]과 헤네케 제독[41] 높으신 분들 임에도 코트가 진흙에 절어 있는 것이 이들이 항복 직전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했는지 알려준다. |
7월 11일, 히틀러 유겐트 사단을 중심으로 완강하게 버티던 독일군에 대해 영국 공군은 500여 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아예 캉을 들어엎는 대폭격을 감행해 먼지구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캉에는 70년 넘는 건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폭격의 피해가 심했으나, 여전히 영국군은 캉을 돌파하지 못했다.
한편, 셰르부르를 점령한 미군은 셰르부르 남부의 생로를 점령하기 위해 또다시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고, 7월 18일 결국 생로를 점령해 노르망디 지역을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까지 연합군이 낸 사상자는 무려 12만 2,000명[42]에 달했다. 사실상 상륙시 별로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을 그동안의 전투에서 날려먹은 셈으로, 연합군의 주요 수뇌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6.4. 굿우드 작전
6.4.1.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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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영국군과 캐나다군을 주축으로한 연합군의 캉 공세 |
그만큼 캉 전투(Battle for Caen)는 말 그대로 혈전이었다. Operation Perch를 통해 캉의 서쪽 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것을 시도했고, 뒤이은 Operation Epsom은 우선 캉의 서쪽 부근을 점령한 후 동쪽으로 진격해 독일군을 몰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저항은 상상 이상으로 거세었고, 연합군은 전략을 수정한다. Operation Charnwood는 이전까지의 포위 시도가 아닌 전선에 대한 전면 공세로, 운하 윗쪽 도시를 우선 점령하고자 했다. 항공폭격을 통해 여태까지의 포위 시도로 인해 돌출된 형태가 된 도시 중앙부의 전선을 압박했고, 이틀 사이 연합군은 3800여명, 독일군은 2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다. 결과는 연합군의 승리였는데, 독일군을 오른 강 이남으로 후퇴했고 오돈 강의 교두보는 작전 이튿날에 확고해졌다. 그럼에도 연합군의 피해는 컸는데, 이 때문에 몽고메리는 오른 강 방어선에 대한 공세는 취소시킨다.
이후 몽고메리는 도시 중앙의 독일군 방어선에 대한 기갑부대 주도의 대대적인 공세안을 구상한다. 굿우드 작전(Operation Goodwood)는 오른 강의 방어선을 꿰뚫는 교두보를 이용해 남하, 캉의 나머지 부분를 점령하고 Bourguébus Ridge 너머까지 진출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 자체로 한달이 넘게 이어진 캉 전투(Battle for Caen)의 종지부를 찍을 공세이자[43] 독일군 방어선 좌익에서 이루어질 미군 주도의 야심찬 공세안인 코브라 작전을 위한 발판이 될 예정이었다.
6.4.2. 전개
7월 18일 영국군이 굿우드 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영국군의 조급증이 병크를 불러왔다. 딱 3km짜리 진격로에 3개 사단을 밀어넣은 탓에 교통 정체가 발생해 진격로가 꽉 막혀버렸고, 은근히 많은 독일군이 8천톤의 융단폭격에도 살아남아[44] 모든 방어 전력을 가동, 정면의 영국군을 물고 늘어지자 진격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이때 노르망디 전역에서 88mm 대공포하면 소개되는 4문의 대공포의 분전이 일어난다. 기록 주체마다 다른데 21기갑사단의 루크 중령은 자신이 권총으로 위협한 끝에 공군이 대전차임무를 수행했다고 기록하였지만 공군측에서는 해당 방공포장이 눈 앞에 밀려오는 영국군 전차들에게 자의적으로 대전차 작전을 실시했다고 되어있다. 이런 상황은 20일까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20일 폭우가 쏟아져 진격로가 진창이 되면서 딱 3일 만에 작전이 취소되고 말았다. 그동안 영국군은 300~500대의 전차와 4,000여명의 병력을 잃는 손실을 입었고, 독일군은 100여대의 전차를 손실했고 2,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
6.4.3. 여파
Operation Goodwood는 비록 이래저래 욕을 쳐먹고 계획부터 실행단계 내내 삐그덕거리다가 끝내는 저지당했지만 성과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굿우드 작전으로서 연합군은 캉의 대부분 지역을 확보했고, 캉을 가로지르는 캉 운하 이남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곧 독일군의 하천 방어선을 돌파해냈다는 의미였다. 뿐만아니라 Charnwood 시기까지 독일군은, 방어선 동쪽에 위치한 캉에 대한 캐나다/영국군의 대대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위치한 방어선 서쪽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충원하는 등 충분한 주의를 쏟고 있었는데, 굿우드를 통해 거하게 밀어붙이자 서쪽 방어선은 얇아지게 되었고 이는 곧이은 코브라 작전의 단초가 되었다.Goodwood와 동시에 시작되었던 Atlantic을 끝으로 캉 전투(Battle for Caen)은 종결된다. 영국군 전차 300여대와 독일군 전차 100여대의 교환은 분명 전술적인 실패로 비춰질 수 있지만, 독일군의 빈약한 보급역량과 연합군의 압도적인 물량을 고려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뿐만아니라 이 100여대의 전차 손실이 주로 SS Panzer Division 과 기갑교도사단(Panzer-Lehr-Division) 등의 독일군 정예 병력에서 나온 만큼 독일군의 방어역량을 최종적으로 고갈시킨 것 또한 사실이다.
비록 몽고메리를 까면서 마켓 가든 다음으로 못해도 네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빈번히 언급되는 썩 성공적이지는 못한 공세이나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고, 이러한 혈전을 통해 확보한 도시 캉은 기대만큼이나 훌륭한 공세 거점으로서 기능했으며 이는 곧 팔레즈에서의 승리에 톡톡히 기여한다. 실제로 코브라 작전이야 원체가 항공폭격으로 방어선을 두드리다 못해 다져버리고 뚫었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을지라도, 패튼의 제 3군의 센강까지의 진출이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북쪽에서 캉을 중심으로 착실히 독일군을 밀어냈기 때문도 있었다.
6.5. 독일군의 퇴각
7월 24일, 굿우드 작전에 뒤이어 개시될 예정이었던 미군의 코브라 작전이 개시되었다. 작전 개시 시점에는 맑은 하늘이 보여 작전을 속행했는데, 출발지에 해당하는 공항의 하늘과 달리 목표지점은 구름이 끼어있었고, 이들 구름이 점점 짙어지자, 오폭의 위험이 있다고 여긴 트래퍼드 리맬러리 장군이 공군의 폭격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이 명령은 미 8공군 폭격기부대 전체에 전달된 것은 아니었고, 300여대에 달하는 B-17 중폭격기를 포함한, 대다수가 B-17이나 B-24같은 중폭격기로 구성된 1500여대의 폭격기가 그대로 폭격에 나섰다. 하지만 폭격 결과는 영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앞써 언급했다시피 폭격기 행해지는 지역의 기상은 좋지 않았음을 고려하더라도 일부는 목표지점으로부터 1마일 이상 차이나는 곳에 폭탄을 떨구기도 했고, 또 오폭에 의한 사상자도 나왔다. 레슬리 맥네어 장군을 포함하여 20여명의 사망자와 140여명에 이르는 부상자가 발생했고, 이에 분개한 지상군 측에서는 아군 폭격기를 향해 발포하는 일도 있었다. 오폭이 있든 없든 육군 쪽에서는 폭격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작전이 예정대로 진행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나왔는데, 이들은 소규모의 산발적인 공세에 나섰다가 독일군의 야포에 의해 저지당하고 별다른 소득도 없이 물러난다.독일군 입장에서는 이와같은 대규모 공습을 연합군 공세의 징후라고 받아들여도 이상할것은 없었다. 따라서 코브라 작전을 담당한 미 제 1군의 오마 브래들리는 아이젠하워에게 기습공격의 효과가 약해질 것이라는 우려를 표함과 동시에 공격을 취소하거나, 최소한 연기해달라고 요청한다. 아이젠하워는 브레들리의 우려에 공감하지 못할 것은 없었으나, 이미 부대도 배치해놓고 이런저런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에서 작전 개시 하루 전에 취소하는 것도 쉽사리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따라서 작전 속행을 명령했고,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정확했다.
독일군이 24일 폭격으로 입은 피해는 연합군의 예측 이상이었다. 특히 사전 폭격의 목표지역에 위치했던 기갑교도사단(Panzer-Lehr-Division)의 피해가 컸는데, 40대의 전차 중 7대만 기능하고 나머지는 격파되거나 심한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손상된 전차 중 일부는 24일과 25일 사이의 밤 중에 수리되어 25일 연합군의 진격에 대한 방어에 투입되었다.
25일의 날이 밝고, 600여대의 전폭기의 선행 폭격이 있은 후 1,800여대의 미 8공군 소속 중폭격기들의 융단 폭격이 이어졌다. 폭격의 표적이 된 St. Lô 지역의 독일군 방어부대는 이틀에 걸친 1,000대 이상의 폭격기에 의해 진작에 다져졌을 터였고, 이들 병력은 이미 작전 개시 나흘전에 실시된 기갑부대를 주축으로 한 영국군의 대대적인 공세인 굿우드 작전에 의해 축소되어 있을 터였다.
이후 미군은 브르타뉴 지역으로 진출했고, 결국 패잔병들만 남은 독일군은 이 날을 기점으로 노르망디 지역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다. 하지만 히틀러는 현지 사수 및 오히려 반격을 통해 돌파한 미군을 차단하고 다시 연합군을 노르망디 교두보에 묶으라는 현실성 없는 명령을 내려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해당 공격이 바로 '모르탱 공세'로도 알려진 뤼티히 작전(Operation Lüttich)이다. 이에 관해선 팔레즈 포켓 문서에서 간단히나마 다룬다.
7. 결과
연합군은 노르망디 지역에서 무려 두 달을 묶여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두 달간의 혈전 끝에 미하엘 비트만을 비롯한 서부전선 독일군의 정예 병력이 녹아버림과 동시에 전투 경험이 전무하던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연합군 장병들이 정예병으로 거듭났으며, 히틀러의 사수 명령으로 인해 현지에 묶인 서부전선의 독일군 잔존 전력을 팔레즈에 몰아넣어 섬멸하였다. 이를 팔레즈 포켓이라고 부른다.이후 프랑스 해방까지 독일군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패주를 거듭하게 되었다. 하지만 드라군 작전으로 남부 프랑스에서도 전선이 열렸음을 감안할 때, 각개격파당하는 것보다는 대규모 후퇴를 감행해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게 나음을 알고 후퇴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1944년 8월에 안트베르펜과 로렌 인근까지 진격한 연합군은 발터 모델 장군의 완강한 방어로 인해, 아르덴에서 독일군이 서부전선 주력을 날려먹을 때까지 서부방벽에서 고전했다.
8. 양측의 부대 구성
8.1. 연합군
연합군은 미군, 캐나다군, 영국군, 프랑스군, 자유 폴란드군, 기타 영연방 소속 연합군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D-Day 하루 동안에 병력 8만 7천여 명이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후 3주 동안 노르망디를 통하여 연합군 병력 156만 명과 차량 33만 3천 대가 프랑스로 쏟아져 들어왔으며,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의 숨통을 죄기 시작하였다. 당시 상륙부대의 배치는 아래와 같다. 좀 더 자세한 편제를 보고 싶다면 연합원정군 최고사령부의 편제를 참조하라.아래를 보면 미군 병력은 모두 육군 소속인 것을 알 수 있다.[45] 당시 미합중국 해병대는 대부분 태평양 전선에 투입되었고 육군이 유럽 전선을 맡았다. 해병대는 본래 규모가 큰 조직이 아니다 보니,[46] 독일 다음 순위로 지정된 일본군을 상대로 지연전이 진행되던 태평양에서만 싸우기도 벅찼다. 태평양에서조차 실제 투입된 병력 숫자는 육군이 더 많았고 더 많은 상륙전을 감당했다. 영국에 주둔 중인 미 해병대는 모두 영국에 설치된 미 해군기지 경계 병력 및 함정 승조원 등이었다.
원정연합군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장
- 제21집단군 사령관 버나드 몽고메리 대장
- 미국 육군
8.2. 독일군
B집단군의 사령관 겸 대서양 방벽의 책임자를 맡고 있었던 육군 원수 에르빈 롬멜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경험을 살려, 1943년 말 서부전선에 부임하면서부터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연합군 상륙부대를 저지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대규모의 지뢰 지대와 해안 장애물, 해안가 벙커, 육해군 해안포[52] 및 야포 진지 및 공수부대의 강하와 공수를 방해하는 늪지대 생성과 장비들을 설치했다. 롬멜의 방침에 따라 프랑스 해안 등지에 설치하게 될 지뢰는 약 2천만 개 정도가 될 것이며, 프랑스 내 여러 방어선을 구축하며서 매설할 양은 계획상 총 2억 개에 달하였다.[53] 실제로 1944년 5월 20일까지 해안에 설치한 지뢰의 수는 4,193,167개에 달하였으며, 이 중 2,672,000개가 롬멜의 지휘하에 매설되었다. 이외에도 일부 지뢰는 공수부대를 우려해 후방에 매설했다. 또한 5월 13일까지 총 517,000개의 수중 장애물이 프랑스 해안에 설치되었으며 그 중 31,000개는 기뢰였다.이외에도 롬멜은 수도 없이 많은 장애물을 해안에 깔아두었는데, 해안 장애물의 목적은 연합군의 상륙주정들을 파괴시키는 목적이며, 썰물시에는 상륙하는 적의 전차를 저지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방해물들 중에는 기뢰나 폭탄이 장착되어 강한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도록 설치된 장애물도 있었으며, 이들은 상륙 작전 당시 톡톡히 제 몫을 다했다. 그리고 후방에 만들어둔 늪지대는 공수부대원들이 낙하했을 때 늪지대에 떨어진 병사들은 그대로 익사하는 등 피해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장애물을 설치하기로 한 해변의 4개 구역 중 2개 구역만 상륙 개시일까지 완료되었고, 나머지 공사중이던 구간도 상륙 당일날 상륙부대보다 앞서 출발한 영국 해군 코만도들에 의해 폭파되었다. 이 외에도 공수부대를 막을 목적으로 롬멜은 공수부대의 글라이더가 착지할 만한 지점에 30m 간격으로 높이 3m의 말뚝을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말뚝만으로는 글러이더에 타격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말뚝과 말뚝에 전기가 통하는 선을 설치해 글라이더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게 했다. 또한 말뚝 위에 달아놓아 글라이더를 폭파시킬 폭탄 100만 개를 준비했지만, 정작 상륙 당일까지 말뚝 설치가 완료된 곳은 거의 드물었다. 당시 독일군 방어부대의 배치는 아래와 같다.
- 유타 해변 - 육군 제709보병사단
- 오마하 해변 - 육군 제352보병사단,[54] 제726척탄병연대의 일부
- 골드 해변 - 육군 제716보병사단,[55] 제352보병사단
- 주노 해변 - 육군 제716보병사단
- 소드 해변 - 육군 제716 보병사단, 제711보병사단
9. 관련 어록
가을 날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 끊기지 않는 우수로 내 마음 괴롭히네.
종소리 울릴 때 창백하고 곧 숨막혀 옛날들 기억나 눈물 흘리네.
그리고 휩쓸어 가는 모진 바람에 이끌려 가네 여기저기로 낙엽처럼.
BBC 방송을 통해 프랑스 레지스탕스에게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작전 개시를 알린 신호
종소리 울릴 때 창백하고 곧 숨막혀 옛날들 기억나 눈물 흘리네.
그리고 휩쓸어 가는 모진 바람에 이끌려 가네 여기저기로 낙엽처럼.
BBC 방송을 통해 프랑스 레지스탕스에게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작전 개시를 알린 신호
세계의 이목이 여러분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온 세상 사람들의 희망과 기도가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이제 전세는 역전되었습니다. 전세계의 자유 시민들이 우리와 함께 승리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용맹과 임무에 대한 헌신성, 그리고 전투 수행능력에 대해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여러분의 무운을 빕니다. 그리고 이 고귀한 임무를 수행하는 우리에게 전능하신 신의 가호가 있기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1944년 6월 6일 일일명령(June 6, 1944, order of the day)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1944년 6월 6일 일일명령(June 6, 1944, order of the day)
- [연설 전문]
- >Soldiers, Sailors and Airmen of the Allied Expeditionary Force!You are about to embark upon the Great Crusade, toward which we have striven these many months.
The eyes of the world are upon you. The hopes and prayers of liberty-loving people everywhere march with you. In company with our brave Allies and brothers-in-arms on other Fronts, you will bring about the destruction of the German war machine, the elimination of Nazi tyranny over the oppressed peoples of Europe, and security for ourselves in a free world. Your task will not be an easy one. Your enemy is well trained, well equipped and battle-hardened. He will fight savagely.
But this is the year 1944! Much has happened since the Nazi triumphs of 1940-41. The United Nations have inflicted upon the Germans great defeats, in open battle, man-to-man. Our air offensive has seriously reduced their strength in the air and their capacity to wage war on the ground.Our Home Fronts have given us an overwhelming superiority in weapons and munitions of war, and placed at our disposal great reserves of trained fighting men. The tide has turned! The free men of the world are marching together to Victory! I have full confidence in your courage, devotion to duty and skill in battle. We will accept nothing less than full Victory!
Good Luck! And let us all beseech the blessing of Almighty God upon this great and noble undertaking.
- [번역 전문]
- >연합군의 육해공 장병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가 수 개월에 걸쳐 준비한 위대한 성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세계의 이목이 여러분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전세계 사람들의 희망과 기도가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용맹한 연합군과 다른 전선의 전우들과 함께 독일의 군사력을 격파하고, 탄압받고 있는 유럽 시민들에 대한 나치의 폭정을 몰아내며, 자유 세계에서의 우리의 안보를 지켜낼 것입니다. 여러분의 임무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적은 고도의 훈련을 받았으며, 높은 수준의 장비를 갖추었고 전투 경험 또한 풍부합니다. 적들은 무자비하게 싸울 것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1944년입니다! 나치의 승전이 있었던 1940년과 1941년 이후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연합국은 적들에게 대등한 규모의 전면전에서도 수차례 참혹한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우리의 공습은 적들의 공군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으며, 그들의 전쟁 수행 능력을 저하시켰습니다. 우리의 후방에서는 우리에게 무장과 탄약 면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안겨주었으며, 다수의 훈련된 예비대를 보내주었습니다. 이제 전세는 역전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자유 시민들이 우리와 함께 승리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용맹과 임무에 대한 헌신성, 그리고 전투 수행능력에 대해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여러분의 무운을 빕니다! 그리고 이 고귀한 임무를 수행하는 우리에게 전능하신 신의 가호가 있기를!
10. 매체
- <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유일하게 격전이 벌어졌던 오마하 해변의 상황을 처절할 정도로 실감나게 연출해놨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대히트를 친 이후로 배틀필드 1942, 메달 오브 아너 [57],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등 2차 대전을 다룬 게임에서는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 < 밴드 오브 브라더스> 2화에도 이지 중대의 첫 전투로 등장한다. 이쪽은 공수부대를 초점으로 맞추고 있기 때문에 강하작전을 묘사하고 있다. 상술하듯 노르망디의 열악한 기상 조건과 독일군의 대공포에 격추되어 기체 통째로 추락하는 장면이 나오며 실제로 그랬듯 이지 중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타 부대와 함께 하다 모이는 장면이 연출된다.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의 마켓 가든 작전을 제외한 5개의 캠페인은 모두 노르망디 상륙부터 팔레즈 포켓까지의 시점을 다룬다. 문서 참조.
-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상단의 연설문 영상이 특정 조건에서 나타나는데, 독일이 점령한 유럽 지역의 승점지역과 같은 거점을 상륙을 통해 연합군이 점령할 경우 나온다. [58]
- 울펜슈타인 시리즈 세계관에서는 나치가 시대를 벗어나는 오버 테크놀러지로 무장하고 있기에, 반대로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패배한 것으로 나온다. 그것도 연합군 측에서 156,000명이 전사한 반면, 독일군 측에서는 겨우 89명만 전사하는 참패로 이 사상자수 때문에 이 세계관에선 D-day에서 D가 dead를 뜻하며, 이후 독일은 1946년 3월 15일 이 전승을 기념하는 박물관을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투입된 연합군 포로들을 동원해 파리에 건립함으로써 당시 아직 남아 있었던 연합군에게 빅엿을 선사한다. 소련도 독일의 오버 테크놀로지 덕분에[59] 쿠르스크 전투에서 참패한 탓인지 바그라티온 작전은 딱히 언급이 안 되었다. 물론 9개월 뒤 모스크바는 함락된다.
- 전함소녀의 사상최대 작전 이벤트의 모티브이다. 이벤트 예고부터 아이젠하워의 D-DAY 연설문 패러디였다.
- < 발리언트>는 이 작전을 성공시킨 부분을 다룬 내용이다.
- 테일즈런너의 개발자 감사제 이벤트에서 해당 사건이 배경이 된 것으로 추측되는 노르망디 맵이 공개되었는데, 해골이 총을 쏘며 유저의 진로를 방해해 한낱 방해물에 지나지 않게 설계되는 등, 해당 사건을 비하하는 게 아니냐며 논란이 짙어지고 있다.
- 워킹데드 데릴 딕슨 - 딕슨이 조부가 묻힌 노르망디의 미군 묘지를 찾는다.
- Gates of Hell의 Liberation과 Airborne DLC에서 노르망디 캠페인을 플레이할 수 있다.
- Steel Division: Normandy 44의 캠페인에서 미군과 독일군 캠페인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11. 당시 영상물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실제 촬영이라고 올라오는 영상물의 상당수는 독일 주간 뉴스나 영국, 미국 측 선전 뉴스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1차 사료 영상물 대부분은 안타깝지만 당시 실제 전투 영상이 그대로 반영된 것은 아니다.존 포드가 직접 촬영한 영상물의 경우 기밀로 분류되었으나 현재 전해지고 있지 않고 있다. 연합군의 대부분 상륙 장면들은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상륙 초기가 아닌 어느정도 해안 방어선의 독일군을 몰아내고 난 이후 촬영된 것이다.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당시 기록 영상물로는 1944년 6월 14일 방영된 독일 주간 뉴스 719호분이 있는데 상륙 제대에 대한 전투 영상들의 경우 이전 영상들이 상당히 짜집기되어 있다.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독일 주간 뉴스 719호.[60]
12. 기타
- D-Day의 어원은 departed, decision, 여러 가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모두 틀린 것이다. 1944년 6월에 침공을 하려는 중, 6월의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아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다. 당시 종군 기자의 말에 의하면 (정해지지 않은) Day-(정해진 침공 날짜) Day가 합쳐져 D-Day가 된 것이다. 관련 서적만 읽어봐도 결행이니 결정이니 뭐니 하는 거 증언해준 영국, 프랑스, 캐나다 병사들부터 지휘관 입에서도 그런 말은 안 나온다. Day-Day가 맞는 표현이다. 같은 의미로 날짜가 아닌 특정 일의 개시 예정 시각은 시각을 뜻하는 Hour에서 따와 H-Hour라고 한다.
- 몇몇 사람들은 오버로드 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노르망디 상륙(넵튠 작전)[61]을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으나, 실제로 공식적인 분류에서는 각각 'Battle of Normandy', 'Invasion of Normandy', 'Normandy Landings(Operation Neptune)'으로 구분하고 있다. 각각 오버로드 작전은 북부 프랑스에 상륙하여 파리까지 진격, 팔레즈 포위전을 마치는 8월 말~9월까지의 모든 작전을 통틀어서 말하는 작전이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이 오버로드 작전의 하위 작전으로 7월 말 캉까지 진출하는 노르망디 지역의 작전이다. 노르망디 상륙 또는 해왕성 작전은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는 1일차 작전만으로 한정해서 사용한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전적지 여러 곳을 여행할 수 있다. 노르망디 여행에 관심 있다면 여행기 링크를 참고하자. 대중교통이 불편한 지역이라 렌터카를 빌리는 것이 낫다.
- 노르망디에서 미군에 포로로 잡힌 한국인의 사진인 노르망디의 한국인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 상륙작전을 실시하기 직전인 1944년 5월에 발생한 에피소드. 영국 신문인 데일리 텔레그래프 지에 십자말풀이 문제가 올라왔는데, 여기에는 ' 유타', ' 오마하', ' 오버로드', ' 골드', ' 주노' 등의 용어가 등장했다. 이는 상륙작전 및 주요 상륙지 등의 암호명이었다. 연합군 사령부는 발칵 뒤집혔고, 문제의 출제자인 학교 교사 레너드 다우와 신문 편집 담당자를 MI5가 잡아가 심문했지만 결과는 무혐의였다. 기밀 유출과는 무관한 우연의 일치였던 것. 훗날 1984년에 이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는데, 당시 그 교사의 학생 중 한명이 근처의 군기지를 돌아다니다가 군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이 의미심장한 단어들을 들었고, 그 교사가 십자말 풀이에 쓸만한 단어를 찾을 때마다 이 단어들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2015년 6월 1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 2007년 3명만으로 오마하 비치를 재현한 인물들이 화제가 되었다. CG의 힘은 위대했다. 정확히는 BBC 역사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타임워치(Timewatch)> 시리즈 제작진의 용자짓. 노르망디 상륙작전 특집편 <피의 오마하> 촬영 때의 일이다. 이 때 해설자는 탑기어 호스트인 리처드 해먼드. #
- 히틀러는 연합군의 상륙 작전이 계획되기 전에는 노르망디가 연합군의 상륙 지점이 될 것이란 걸 예측했다고 한다. 물론 옛날에도 노르망디는 영국군의 주요 상륙지였다. 하지만 노르망디가 칼레보다 전략적으로 떨어지는 위치였던 데다 히틀러는 전략 전술과 관련된 군 관련 지식은 전무했기 때문에 독일군 수뇌부는 그럴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히틀러 자신도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전사한 프랑스군 제1해병코만도대대(1er bataillon de fusiliers marins commandos) 소속 오귀스탱 위베르(Augustin Hubert) 해군 중위의 이름은 프랑스 해군 특수부대 중 하나인 코만도 위베르에 이어진다.
- 2011년 11월 29일 이란 시위대가 테헤란 주재 영국 대사관을 습격했을 때, 영국 대사관은 빅토리아 여왕과 에드워드 8세의 유화 초상화 같은 역사적 유물이 파손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 문서가 도난당했다. 이 문서의 도난에 대해 영국 외교관들은 "혁명수비대의 번역사들이 충분히 오랜 시간을 들여 이것이 70년 전 프랑스에서 있었던 침공 작전임을 깨닫기를 바란다"고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고, 다른 이들은 혁명수비대가 이 문서들과 다른 문서들로 인해 혼란을 겪길 원한다고 대꾸했다. 출처: 서방의 대규모 침략계획, 유출되다.
- 20세기 최고의 사진 작가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상륙정에 직접 타서 다른 현역 병사들과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오마하 해변의 지옥도를 생생히 촬영했다. 하지만 운이 없게도 촬영 이후 필름을 현상, 인화하는 과정에서 기술자가 실수로 온도를 너무 높게 맞추는 바람에 대부분의 필름이 녹아 버렸고, 남아 있는 사진은 10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카파의 이 사진들은 오마하 해변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해 주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라고 오늘날 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다. 하지만 카파 사후 카파가 오마하 해변에서 직접 독일군 총격을 받으며 오마하 해변에서 찍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실제 장소 조차도 오마하 해변이 아닌것으로 밝혀졌고 100여장의 사진을 찍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격전이 벌어지지 않은 곳에서 15분여간 11장의 사진을 찍고 상륙정을 타고 다시 복귀했다
- 다만 로버트 카파의 사진 이외에도 다른 기록은 존재했다. 서부극의 거장으로 유명한 감독 존 포드[62]와 그의 촬영팀 역시 최전선에 뛰어들어 당시 현장을 총천연색 동시 녹음 영상(!)으로 담아두었다. 그러나 영상 속 장면들이 편집을 거쳤음에도 너무나도 끔찍해, 영상의 대부분은 공개되지는 못했다. 1964년 'The American Legion's Megazine' 잡지에 실린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영상들 모두 정부 기밀자료로 분류됐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보존 와중에 생긴 착오로 인해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로 유명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또한 종군 기자로 이 전투에 직접 참전하였는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골 때리게 하는 일화가 여럿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시되기 전 5월 25일, 런던에서 등화관제 중에 차를 몰다가 물탱크를 들이받아 뇌진탕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나흘 뒤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하고자 병원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그 뒤에 작전을 준비하는 연합군을 동행 취재하면서 그가 소속되어 있는 소대가 가장 먼저 노르망디 땅을 밟아야 한다고 부추겨 소대장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며, 종군 기자는 총을 휴대할 수 없음에도 작전 때 총을 들고 독일군 몇몇을 직접 사살하기도. 그 이후로도 건물 안에서 포격을 당하는 와중에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려 몸을 보호했는데, 헤밍웨이 혼자서 아무렇지 않게 포격을 당하는 건물 내부를 돌아다녀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연실색시킨 등, 무모하고 객기 어린 행동을 자주 했다고 한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 66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오마하에 상륙한 보병, 유타 해안에 상륙한 보병, 그리고 해변 방어에 참전한 독일군 생존자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방송 후반에 이 셋이 만나자 '우리가 그날 같은 곳에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 스웨덴의 파워메탈밴드 Sabaton의 'Primo victoria'가 이것을 배경으로 한 노래다.
- 출처에 따르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독일군 병사들이 받은 충격도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에 해안선 벙커에서 연합군 함대를 목격한 독일군 병사가 "그것은 독일의 종말이었다."라고 말했을 정도. 사실 당시 독일군 병사들에게 서부전선은 비록 상륙작전을 대비해야 하긴 했지만, 소련과 섬멸전을 벌이던 동부전선에 비하면 꽤 널널했고 파리로 휴가를 가서 프랑스 아가씨랑 놀 수도 있는 꿀 빠는 곳으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그런 곳이 갑자기 전쟁터가 되었으니 상륙한 연합군을 막기 위해 출동한 전차부대 장교도 한 손엔 프랑스 아가씨를, 다른 손엔 술병을 들고 취한 채 군가를 고래고래 부르며 퇴각하는 병사들을 보고 "이제 독일은 끝났다."고 절망했을 정도. 사족으로 이 전차부대는 연합군 부대를 막으려 진격했다가 영국군의 대전차포 세례를 맞고 후퇴해야만 했다.
- 이날 투하된 제101공수사단 인원들 중 조셉 베얼 하사라는 인물은 무기를 모두 분실한 채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합류해 사보타주를 벌이다 발각, 체포당해 독일-폴란드 국경까지 끌려가 수용소에 수감됐는데, 여기서 두번의 시도 끝에 탈출 성공해 한참이나 떨어진 바르샤바까지 가서 소련군에 합류해 다시 교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심지어 그런 그를 받아들인 사람은 인류 최초의 여성 전차장 알렉산드리나 그리고리예브나 사무센코였다.
- 2021년 6월 6일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전몰한 연합군 장병을 기리는 동상의 제막식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 마을 베르쉬르메르에서 열렸다. #
-
상륙 75주년을 기념하는 미 육군 레인저.
- 당시 암구호는 '플래시(Flash)/썬더(Thunder)'였다. 이는 독일어에 'Th'발음이 없다는 것에 착안해 답어에 넣은 것이다.
- 이른바 '모히칸 스타일'이 유행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상륙작전 당시101공수사단은 작전 투입을 앞두고 장병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머리를 모히칸식 헤어스타일로 깎았는데, 이를 계기로 민간에도 모히칸 스타일이 퍼지게 된것.
- 202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는 기간에 낙하산을 타고 프랑스에 착지한 영국 군인들이 브렉시트로 인해 낙하 장소에 차려진 입국 심사장에 줄지어 입국 심사를 받는 웃지 못할 광경이 벌어졌다. # 당시 낙하 행사에 참석한 병력은 영국군 외에 미군, 벨기에군이 있었는데 벨기에는 같은 EU회원 국가라서 입국 심사가 필요없었고, 미군은 이미 프랑스에 사전 입국한 뒤 비행기에 탑승해서 강하한 형태라서 마찬가지로 입국 심사가 필요없었다.
13. 둘러보기
[1]
Robert Jaujard(1896. 3. 6 ~ 1977. 1. 25): 오마하 해변 포격에 투입된 자유 프랑스 해군 함대의 지휘관으로, 당시 해군
준장.
라 갈리소니에르급 경순양함 조르주 레이그와 몽칼름 등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었으며, 작전 이후
지중해로 이동해 남프랑스 탈환전에도 참가한다. 전후에도 해군에 남아
중장까지 진급했다.
[2]
제5기갑군 사령관
[3]
제7군 사령관
[4]
제21기갑사단장.
[5]
1939년부터 1967년까지 운영된 영국의 라디오 방송국.
[6]
참고로
동부전선의 분수령이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반격 작전명이
천왕성 작전이다.
[7]
연합군 장병들의 사기를 돋구기 위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작성한 성명서로 작전 전날 175,000 여명의 장병들에게 배포되었다.
[8] 해당 시기에는 미국의 도움이 있더라도 그런 거대한 작전을 감당할만한 병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9] 브르타뉴, 코탕탱, 파드칼레, 노르망디 [10] 브르타뉴와 코탕탱은 상륙할 경우 적의 보급로가 온전한 것과 공격 진로가 한정적이라 막힐 가능성이 높았으며 파드칼레는 영국에서 가장 최단거리로 상륙이 가능한 곳이라 상륙여건이 좋다면 기습적인 가장 큰 이점을 지녔지만 나치 독일도 바보가 아닌지라 파드칼레 상륙지 방비를 튼튼히 해놨다. [11] 일단 노르망디도 방어선 구축이 되었지만 칼레에 비하면 강도가 매우 약했고 특히 노르망디 상륙지 인근 도시 캉이 교통의 중심지라 후일 병참기지로 이용하기에도 매우 적절했다. [12] 미군 담당. [13] 영국군 담당. [14] 캐나다군 담당. [15] 시칠리아 상륙작전인 허스키 작전에 동원된 사단이 2개 더 많긴 하였으나, 연합군의 해군 및 공군의 상당수가 이 작전에 참가했고, 연합군의 서부전선 주공은 이날 노르망디에 상륙한 군인들이었다. 존 키건에 따르면 이탈리아 전역 등이 사실상 이 서부전선을 보조하기 위한 조공이었으며 언론들은 이탈리아 반도 전황이나 수복보다는 디데이 상륙작전을 대서특필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훗날 서부전선을 이끌 군인들을 이 해안에 다 투입했다. [16] 참고로 이탈리아군은 연합군 포로에도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17] 나치 독일은 이런 기만 작전에 휘둘려서 상륙 당일까지도 파드칼레와 노르망디 사이에서 계속 갈팡질팡하게 되었으며 의혹 중에는 연합군과 추축군 이중스파이의 정보에 속아 파드칼레가 상륙지라고 오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8] 아이젠하워는 5일 밤 작전 개시를 위해 자신이 격려한 미 육군 제101공수사단 대원들을 실은 수송기가 프랑스를 향해 날아오르자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19] 악천후 상태라면 상륙정이 파도에 거꾸로 뒤집힐 위험도 있거니와 공수부대인 경우 강한 바람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합군사령부도 날씨를 예의주시하며 날씨가 악천후로 보이면 바로 취소하기도 하였다. [20] 영국의 항구도시 도버와 프랑스의 파 드 칼레는 영프가 사이에 둔 바다 중 가장 짧은 길이를 자랑하는 도버 해협이 위치한 곳이었던 만큼 상륙 예정지로의 우선순위가 높을 것임은 쉽사리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디에프에서 피를 봤던 연합군은 칼레지역의 방어상의 난점을 재껴두고 애초에 항구도시에 상륙한다는 생각 자체를 접어두고 있었다. [21] 사실 이는 1942년 중반부터 야간폭격 시 독일군의 대공 레이더를 기만시키고자 활용해온 바 있었고, 애초에 이를 위해서 고안된 것이기도 하다. 현대 전투 항공기들이 탑재하고 다니는 이른바 채프와 플레어의 원형인 셈이다. [22] 대신 영국 공수부대에겐 보조 낙하산이 지급되지 않아서, 낙하산이 펴지지 않는 불상사가 일어나더라도 살 확률이 있는 미군과는 다르게 낙하산이 안 펴지면 그냥 끝장이었다. [23] 수송기 정도 크기에 20~30명 정도가 탑승했다. [24] 다만 전투 경험이 부족해 표면적인 전력에 비해 전투력이 높은 사단은 아니었다. 352 보병사단은 1943년 11월 창설된 이후로 부대 편성과 훈련에 상당한 시간을 소모했고, 부대 편성과 훈련이 어느 정도 완료되자 바로 해안 방어 임무에 임시로 투입된 사단이라 대규모 전투에 참전한 적이 없는 상태였다. 물론 이미 해체된 321 보병사단의 잔존 병력 상당수가 352 보병사단에 합류했고 다른 사단에서 전출되어온 인원들도 있어 베테랑 병사들도 일부 있기는 했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전투 경험이 상당히 부족한 상태였다. [25] 사실 해상에서도 기동이 가능하게 전차 주위에 캔버스로 만든 공기 튜브와 프로펠러까지 장착하였으나, 오마하 해변의 강한 파도로 인해 캔버스 튜브가 찢어져 침몰해 버렸다. 그래도 무사히 상륙한 세 대의 DD 전차들은 보병들의 방패막 역할을 해주며 독일군의 참호와 벙커에 포격을 가해 제 역할을 충분히 다했다. 상륙했던 보병들도 "그 전차들이 우리들을 구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26] 본래 오마하는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한 도시 이름으로, 원래 그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의 이름이었다. 흔한 미국 도시 이름으로 남을 뻔했지만 코드네임 하나 때문에 피로 물든 전장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여담으로 당시 핵폭격기 생산 기지 역시 진짜 오마하에 있었다. [27] 이때 오마하 해변의 강한 조류와 파도 때문에 대부분의 상륙정이 목표 지점과 동떨어진 곳에 상륙하여 작전에 혼선이 가중되었다. [28]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에선 공세 직전에 몇몇 병사들이 극도의 긴장감으로 인해 토하기도 했다. 죽음의 공포만으로도 병사들이 토할 수 있는 것이다. [29] 기본 세팅 분당 1,200발의 연사력. 즉 1초에 스무 발. 거기에 스프링식 완충 장치가 달린 전용 삼각대 라페테 42에 올리면 반동까지 지극히 적어진다. [30] 함포 사격은 포격 시간 자체가 너무 짧았던데다 화력 자체도 불충분했고, 폭격기는 방어진지를 한참 지나 후방에다 폭격을 해버렸다. [31]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주인공 밀러 대위의 소속 부대이다. 대부분의 레인저 중대들은 프앙트 뒤 오크에 상륙 했으나 C 중대는 116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해변 남서쪽에 보병대와 상륙했다. 아마도 16연대가 속한 제1보병사단은 횃불 작전부터 구른 베테랑들과 달리 주방위군 사단인 제29보병사단 소속 116연대는 훈련을 막 마치고 첫 실전에 투입되는 부대임을 고려하여 따로 투입한 것으로 보인다. [32] 이는 콜 오브 듀티 2와 1962년작 지상 최대의 작전 그리고 마크 해밀 주연의 영화 지옥의 영웅들 초반부에 묘사된다. [33] 상륙 제1진의 최고령, 최선임 장군.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장남이며 당시 하딩- 쿨리지 정권에서 해군성 차관, 필리핀 총독, 푸에르토리코 총독을 역임하고 공화당의 거물급 정치가였다. 사후 명예 훈장 추서. [34] 미군과 달리 영국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전차가 침몰하지 않을 만한 위치까지 접근하여 전차를 상륙시켜서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퍼니전차들이 박격포로 토치카를 박살내는 등 큰 활약을 하였다. [35] 그래서 연합군의 주력 미군은 육상 교통의 중심지 캉은 영국군에게 맡기고 카랑탕을 확보하자마자 항구도시 셰르부르를 공략해 항구를 확보하는 것을 0순위로 하였다. [36] 롬멜과 룬트슈테트는 같은 계급이었지만 지휘권 측면에서는 룬트슈테트가 롬멜의 직속 상관이었다. 상륙 작전이 벌어지기 이전에 발생한 논쟁으로 기갑부대를 상륙 예상지에 분산 배치하느냐, 아니면 후방에 집중 배치하느냐에 대한 것이었으며, 히틀러가 중재에 나서 일부는 분산 배치, 일부는 집중 배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 이미 재배치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룬트슈테트는 후자를 지지했으므로, 그나마 논쟁 덕에 노르망디에 1개 기갑사단이라도 배치될 수 있었던 셈이다. [37] 히틀러 유겐트 사단은 동부전선에서 많은 병력이 소모되던 전쟁 중반(1943년)에 급조된 사단이었으며, 이름 그대로 히틀러 유겐트 출신들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보니 초급 장교의 평균 나이가 20세를 못 넘었고 병사들 역시 거의 모두 소년병이어서 경험이 부족했다. 다만 병사들 대부분이 모두 히틀러 유겐트 출신이라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과 세뇌된 정도가 유별났던 데다, 부사관과 장교 대부분이 여러 정예 사단에서 차출된 베테랑들이 많았으며, 훈련 강도도 센 편이고(상징적인 의미가 큰지라 히틀러가 큰 관심을 보인 덕이었다) 보급 우선순위도 높은 편이었기에 전투력 자체는 낮지 않았다. 전쟁 후 연합군은 히틀러 유겐트 출신 군인들을 일반 포로 수용소에 집어넣지 않고 세뇌에서 벗어나도록 특별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보살펴줄 정도였다. [38] 격추 기록 101대. 그중 스핏파이어만 68기로, '스핏파이어 킬러' 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스핏파이어 격추 기록 1위에 해당한다. [39] 라이언 일병 구하기 회상 직후 맨 처음 나오는 것이다. 해변에 있으면서 상륙 초기 병사들이 엄폐물로 썼던 것. [40] 앞, 철모 착용자 [41] 바로 뒤, 정모 착용자 [42] 이 사상자의 대부분은 6월 7일부터 7월 24일까지 발생한 것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의 생지옥이었던 오키나와 전투 3개월 동안 발생한 미군 사상자가 5만명이 넘는 것에 비해 1개월 반 동안 발생한 이 사상자 수치는 연합군 수뇌부에 경종을 울리기 충분했다. [43] 사실 Caen 전투를 종결시킨 작전이라고 평해지는 것은 Goodwood와 동시에 진행된 Atlantic 작전이지만, 편의상 이리 적었다기 보다는 누가 독일군의 방어를 결정적으로 소모시키고 누가 잔여세력을 정리하여 종결시켰냐의 문제이기에 어느쪽을 우선시해도 별 무리는 없다. [44] 특히 진격에 있어서의 가장 위협적인 방해물중 하나인 야포가 살아남은 게 문제가 됐는데, 연합군의 예상과 달리 이들 야포가 방어선 바로 뒤가 아닌, 더 후방에서 간접사격으로 화력투사에 나서서 폭격이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45] 사실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하여 전선돌파를 하는 부대라는 것은 2차 대전 이후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해군 함선 및 기지 경비, 갑판에서의 전투가 역할이었다. [46] 2차대전 중에 확장되어 오늘날에 이르러 거대화된 모습을 보면 상상하기 힘들지만, 개전 이전 해병대는 최고 사령관이 소장에 불과할 만큼 영세했다. 일본을 공략하던 이오지마 전투부터 본격적으로 대규모 상륙전 전담부대가 되었다. [47] 당시 코만도는 육군소속이었다가 공군, 해군, 해병에도 창설되었다. 이후에 창설된 타군 코만도도 육군 코만도의 예하에 배속되었다. [48] 제3, 4, 6, 45코만도대대 지휘. 이중 4대대는 기존 인원에다 프랑스인으로 이루어진 10코만도대대 1중대 176명이 추가로 배속되어있었다. [49] 제4코만도여단은 대대별로 흩어져 41대대는 소드, 46대대와 48대대는 주노, 47대대 골드 해변에 상륙하였다. [50] 퍼니전차 사단. [51] 레인저 대대들은 오마하와 유타 해변 사이의 푸앙트 뒤 오크를 공격할 예정이었으나 2대대와, 5대대 A, B, C 중대는 유타 해변에 상륙. [52] 독일의 해안포는 육군과 해군이 양분해 운용했다. 노르망디 해안의 해안포는 육군 소관이었다. [53] 독일 육군 B집단군 공병사령관 마이제 장군의 1944년 3월 17일자 편지에서 발췌. [54] 단대호 100단위 부대치곤 동부전선에서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정예부대였다. 당시 연합군은 5일까지도 오마하에서 32km 떨어진 셍-로에 주둔 중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엄청난 사상자를 내게 된다. [55] 소련군과 폴란드군 포로 출신으로 구성. 영화 마이웨이로 유명한 동방부대로 이루어진 사단이라 전투력은 미미했고, 실제 상륙 당시 일부 부대원들이 자진해서 투항하고 정보를 줬다. [56] 원제: The Longest Day. [57] 메달 오브 아너: 얼라이드 어썰트의 경우 아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영화의 대사도 사용하였다. [58] 즉, 1944년이 되기 전에 영국군이 아무데나 지들 맘대로 상륙해도 저 연설이 나온다는 소리다. [59] 이미 1943년 시점에 나치는 현실 세계에서도 웬만한 성인 남성 몇 명도 겨우 드는 미니건을 무려 개인화기로 경량화한 베놈건을 개발해서 인민 웨이브에 대처할 사기적 화력을 얻었고, 1946년이 되면 연합군과 독일군 간의 무기 수준 격차는 더 급격히 벌어진다. 슈퍼 솔저 등 강력한 무기를 차치하더라도 보병 장비부터가 저 시점 되면 StG46이 Kar98k, MP40 등을 완벽히 대체한 상황이었다. [60] 연합군 해군과 격렬한 포격전을 벌이는 장면과 상륙제대를 향해 육군 병사들이 공격을 가하는 장면 대부분은 연출되거나 이전에 촬영된 장면을 짜집기 한 것이다. [61]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 전에 영국 해협의 기뢰를 제거하고 조류를 파악해 최적의 이동 루트를 만들고 제해권을 장악하고 10,000척에 달하는 배들을 해상에서 정리하는 작업. [62] 해군 예비역 소령으로서 OSS에 배속하여 활동했다. [63] 올린 시기가 개전 75주기임을 감안하면 전사한 병사들을 애도할 목적으로 넣었을 가능성이 유력하다.
[8] 해당 시기에는 미국의 도움이 있더라도 그런 거대한 작전을 감당할만한 병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9] 브르타뉴, 코탕탱, 파드칼레, 노르망디 [10] 브르타뉴와 코탕탱은 상륙할 경우 적의 보급로가 온전한 것과 공격 진로가 한정적이라 막힐 가능성이 높았으며 파드칼레는 영국에서 가장 최단거리로 상륙이 가능한 곳이라 상륙여건이 좋다면 기습적인 가장 큰 이점을 지녔지만 나치 독일도 바보가 아닌지라 파드칼레 상륙지 방비를 튼튼히 해놨다. [11] 일단 노르망디도 방어선 구축이 되었지만 칼레에 비하면 강도가 매우 약했고 특히 노르망디 상륙지 인근 도시 캉이 교통의 중심지라 후일 병참기지로 이용하기에도 매우 적절했다. [12] 미군 담당. [13] 영국군 담당. [14] 캐나다군 담당. [15] 시칠리아 상륙작전인 허스키 작전에 동원된 사단이 2개 더 많긴 하였으나, 연합군의 해군 및 공군의 상당수가 이 작전에 참가했고, 연합군의 서부전선 주공은 이날 노르망디에 상륙한 군인들이었다. 존 키건에 따르면 이탈리아 전역 등이 사실상 이 서부전선을 보조하기 위한 조공이었으며 언론들은 이탈리아 반도 전황이나 수복보다는 디데이 상륙작전을 대서특필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훗날 서부전선을 이끌 군인들을 이 해안에 다 투입했다. [16] 참고로 이탈리아군은 연합군 포로에도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17] 나치 독일은 이런 기만 작전에 휘둘려서 상륙 당일까지도 파드칼레와 노르망디 사이에서 계속 갈팡질팡하게 되었으며 의혹 중에는 연합군과 추축군 이중스파이의 정보에 속아 파드칼레가 상륙지라고 오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8] 아이젠하워는 5일 밤 작전 개시를 위해 자신이 격려한 미 육군 제101공수사단 대원들을 실은 수송기가 프랑스를 향해 날아오르자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19] 악천후 상태라면 상륙정이 파도에 거꾸로 뒤집힐 위험도 있거니와 공수부대인 경우 강한 바람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합군사령부도 날씨를 예의주시하며 날씨가 악천후로 보이면 바로 취소하기도 하였다. [20] 영국의 항구도시 도버와 프랑스의 파 드 칼레는 영프가 사이에 둔 바다 중 가장 짧은 길이를 자랑하는 도버 해협이 위치한 곳이었던 만큼 상륙 예정지로의 우선순위가 높을 것임은 쉽사리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디에프에서 피를 봤던 연합군은 칼레지역의 방어상의 난점을 재껴두고 애초에 항구도시에 상륙한다는 생각 자체를 접어두고 있었다. [21] 사실 이는 1942년 중반부터 야간폭격 시 독일군의 대공 레이더를 기만시키고자 활용해온 바 있었고, 애초에 이를 위해서 고안된 것이기도 하다. 현대 전투 항공기들이 탑재하고 다니는 이른바 채프와 플레어의 원형인 셈이다. [22] 대신 영국 공수부대에겐 보조 낙하산이 지급되지 않아서, 낙하산이 펴지지 않는 불상사가 일어나더라도 살 확률이 있는 미군과는 다르게 낙하산이 안 펴지면 그냥 끝장이었다. [23] 수송기 정도 크기에 20~30명 정도가 탑승했다. [24] 다만 전투 경험이 부족해 표면적인 전력에 비해 전투력이 높은 사단은 아니었다. 352 보병사단은 1943년 11월 창설된 이후로 부대 편성과 훈련에 상당한 시간을 소모했고, 부대 편성과 훈련이 어느 정도 완료되자 바로 해안 방어 임무에 임시로 투입된 사단이라 대규모 전투에 참전한 적이 없는 상태였다. 물론 이미 해체된 321 보병사단의 잔존 병력 상당수가 352 보병사단에 합류했고 다른 사단에서 전출되어온 인원들도 있어 베테랑 병사들도 일부 있기는 했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전투 경험이 상당히 부족한 상태였다. [25] 사실 해상에서도 기동이 가능하게 전차 주위에 캔버스로 만든 공기 튜브와 프로펠러까지 장착하였으나, 오마하 해변의 강한 파도로 인해 캔버스 튜브가 찢어져 침몰해 버렸다. 그래도 무사히 상륙한 세 대의 DD 전차들은 보병들의 방패막 역할을 해주며 독일군의 참호와 벙커에 포격을 가해 제 역할을 충분히 다했다. 상륙했던 보병들도 "그 전차들이 우리들을 구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26] 본래 오마하는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한 도시 이름으로, 원래 그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의 이름이었다. 흔한 미국 도시 이름으로 남을 뻔했지만 코드네임 하나 때문에 피로 물든 전장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여담으로 당시 핵폭격기 생산 기지 역시 진짜 오마하에 있었다. [27] 이때 오마하 해변의 강한 조류와 파도 때문에 대부분의 상륙정이 목표 지점과 동떨어진 곳에 상륙하여 작전에 혼선이 가중되었다. [28]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에선 공세 직전에 몇몇 병사들이 극도의 긴장감으로 인해 토하기도 했다. 죽음의 공포만으로도 병사들이 토할 수 있는 것이다. [29] 기본 세팅 분당 1,200발의 연사력. 즉 1초에 스무 발. 거기에 스프링식 완충 장치가 달린 전용 삼각대 라페테 42에 올리면 반동까지 지극히 적어진다. [30] 함포 사격은 포격 시간 자체가 너무 짧았던데다 화력 자체도 불충분했고, 폭격기는 방어진지를 한참 지나 후방에다 폭격을 해버렸다. [31]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주인공 밀러 대위의 소속 부대이다. 대부분의 레인저 중대들은 프앙트 뒤 오크에 상륙 했으나 C 중대는 116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해변 남서쪽에 보병대와 상륙했다. 아마도 16연대가 속한 제1보병사단은 횃불 작전부터 구른 베테랑들과 달리 주방위군 사단인 제29보병사단 소속 116연대는 훈련을 막 마치고 첫 실전에 투입되는 부대임을 고려하여 따로 투입한 것으로 보인다. [32] 이는 콜 오브 듀티 2와 1962년작 지상 최대의 작전 그리고 마크 해밀 주연의 영화 지옥의 영웅들 초반부에 묘사된다. [33] 상륙 제1진의 최고령, 최선임 장군.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장남이며 당시 하딩- 쿨리지 정권에서 해군성 차관, 필리핀 총독, 푸에르토리코 총독을 역임하고 공화당의 거물급 정치가였다. 사후 명예 훈장 추서. [34] 미군과 달리 영국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전차가 침몰하지 않을 만한 위치까지 접근하여 전차를 상륙시켜서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퍼니전차들이 박격포로 토치카를 박살내는 등 큰 활약을 하였다. [35] 그래서 연합군의 주력 미군은 육상 교통의 중심지 캉은 영국군에게 맡기고 카랑탕을 확보하자마자 항구도시 셰르부르를 공략해 항구를 확보하는 것을 0순위로 하였다. [36] 롬멜과 룬트슈테트는 같은 계급이었지만 지휘권 측면에서는 룬트슈테트가 롬멜의 직속 상관이었다. 상륙 작전이 벌어지기 이전에 발생한 논쟁으로 기갑부대를 상륙 예상지에 분산 배치하느냐, 아니면 후방에 집중 배치하느냐에 대한 것이었으며, 히틀러가 중재에 나서 일부는 분산 배치, 일부는 집중 배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 이미 재배치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룬트슈테트는 후자를 지지했으므로, 그나마 논쟁 덕에 노르망디에 1개 기갑사단이라도 배치될 수 있었던 셈이다. [37] 히틀러 유겐트 사단은 동부전선에서 많은 병력이 소모되던 전쟁 중반(1943년)에 급조된 사단이었으며, 이름 그대로 히틀러 유겐트 출신들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보니 초급 장교의 평균 나이가 20세를 못 넘었고 병사들 역시 거의 모두 소년병이어서 경험이 부족했다. 다만 병사들 대부분이 모두 히틀러 유겐트 출신이라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과 세뇌된 정도가 유별났던 데다, 부사관과 장교 대부분이 여러 정예 사단에서 차출된 베테랑들이 많았으며, 훈련 강도도 센 편이고(상징적인 의미가 큰지라 히틀러가 큰 관심을 보인 덕이었다) 보급 우선순위도 높은 편이었기에 전투력 자체는 낮지 않았다. 전쟁 후 연합군은 히틀러 유겐트 출신 군인들을 일반 포로 수용소에 집어넣지 않고 세뇌에서 벗어나도록 특별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보살펴줄 정도였다. [38] 격추 기록 101대. 그중 스핏파이어만 68기로, '스핏파이어 킬러' 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스핏파이어 격추 기록 1위에 해당한다. [39] 라이언 일병 구하기 회상 직후 맨 처음 나오는 것이다. 해변에 있으면서 상륙 초기 병사들이 엄폐물로 썼던 것. [40] 앞, 철모 착용자 [41] 바로 뒤, 정모 착용자 [42] 이 사상자의 대부분은 6월 7일부터 7월 24일까지 발생한 것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의 생지옥이었던 오키나와 전투 3개월 동안 발생한 미군 사상자가 5만명이 넘는 것에 비해 1개월 반 동안 발생한 이 사상자 수치는 연합군 수뇌부에 경종을 울리기 충분했다. [43] 사실 Caen 전투를 종결시킨 작전이라고 평해지는 것은 Goodwood와 동시에 진행된 Atlantic 작전이지만, 편의상 이리 적었다기 보다는 누가 독일군의 방어를 결정적으로 소모시키고 누가 잔여세력을 정리하여 종결시켰냐의 문제이기에 어느쪽을 우선시해도 별 무리는 없다. [44] 특히 진격에 있어서의 가장 위협적인 방해물중 하나인 야포가 살아남은 게 문제가 됐는데, 연합군의 예상과 달리 이들 야포가 방어선 바로 뒤가 아닌, 더 후방에서 간접사격으로 화력투사에 나서서 폭격이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45] 사실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하여 전선돌파를 하는 부대라는 것은 2차 대전 이후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해군 함선 및 기지 경비, 갑판에서의 전투가 역할이었다. [46] 2차대전 중에 확장되어 오늘날에 이르러 거대화된 모습을 보면 상상하기 힘들지만, 개전 이전 해병대는 최고 사령관이 소장에 불과할 만큼 영세했다. 일본을 공략하던 이오지마 전투부터 본격적으로 대규모 상륙전 전담부대가 되었다. [47] 당시 코만도는 육군소속이었다가 공군, 해군, 해병에도 창설되었다. 이후에 창설된 타군 코만도도 육군 코만도의 예하에 배속되었다. [48] 제3, 4, 6, 45코만도대대 지휘. 이중 4대대는 기존 인원에다 프랑스인으로 이루어진 10코만도대대 1중대 176명이 추가로 배속되어있었다. [49] 제4코만도여단은 대대별로 흩어져 41대대는 소드, 46대대와 48대대는 주노, 47대대 골드 해변에 상륙하였다. [50] 퍼니전차 사단. [51] 레인저 대대들은 오마하와 유타 해변 사이의 푸앙트 뒤 오크를 공격할 예정이었으나 2대대와, 5대대 A, B, C 중대는 유타 해변에 상륙. [52] 독일의 해안포는 육군과 해군이 양분해 운용했다. 노르망디 해안의 해안포는 육군 소관이었다. [53] 독일 육군 B집단군 공병사령관 마이제 장군의 1944년 3월 17일자 편지에서 발췌. [54] 단대호 100단위 부대치곤 동부전선에서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정예부대였다. 당시 연합군은 5일까지도 오마하에서 32km 떨어진 셍-로에 주둔 중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엄청난 사상자를 내게 된다. [55] 소련군과 폴란드군 포로 출신으로 구성. 영화 마이웨이로 유명한 동방부대로 이루어진 사단이라 전투력은 미미했고, 실제 상륙 당시 일부 부대원들이 자진해서 투항하고 정보를 줬다. [56] 원제: The Longest Day. [57] 메달 오브 아너: 얼라이드 어썰트의 경우 아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영화의 대사도 사용하였다. [58] 즉, 1944년이 되기 전에 영국군이 아무데나 지들 맘대로 상륙해도 저 연설이 나온다는 소리다. [59] 이미 1943년 시점에 나치는 현실 세계에서도 웬만한 성인 남성 몇 명도 겨우 드는 미니건을 무려 개인화기로 경량화한 베놈건을 개발해서 인민 웨이브에 대처할 사기적 화력을 얻었고, 1946년이 되면 연합군과 독일군 간의 무기 수준 격차는 더 급격히 벌어진다. 슈퍼 솔저 등 강력한 무기를 차치하더라도 보병 장비부터가 저 시점 되면 StG46이 Kar98k, MP40 등을 완벽히 대체한 상황이었다. [60] 연합군 해군과 격렬한 포격전을 벌이는 장면과 상륙제대를 향해 육군 병사들이 공격을 가하는 장면 대부분은 연출되거나 이전에 촬영된 장면을 짜집기 한 것이다. [61]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 전에 영국 해협의 기뢰를 제거하고 조류를 파악해 최적의 이동 루트를 만들고 제해권을 장악하고 10,000척에 달하는 배들을 해상에서 정리하는 작업. [62] 해군 예비역 소령으로서 OSS에 배속하여 활동했다. [63] 올린 시기가 개전 75주기임을 감안하면 전사한 병사들을 애도할 목적으로 넣었을 가능성이 유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