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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23:59:19

보로네시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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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강 동안으로 도하하는 독일군 보로네시 시내로 진입하는 독일군 }}}
보로네시 전투
러시아어: Воронежско-Ворошиловградская операция[1]
독일어: Blau I[2]/Unternehmen Braunschweig[3]
영어: Battle of Voronezh
제2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의 일부
청색 상황의 일부
파일:돈강으로 진격하는 독일군_1942.jpg
▲ 청색 상황의 첫 단계로 보로네시와 돈강으로 진군하는 독일군[4]
날짜
1942년 6월 28일 ~ 7월 24일
장소
소련 러시아 SFSR 보로네시 돈강 일대
교전국 [[틀:깃발|]][[틀:깃발|]][[소련|]]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왕국
지휘관 [[틀:깃발|]][[틀:깃발|]][[게오르기 주코프|]]
(총군부사령관)
[[틀:깃발|]][[틀:깃발|]][[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총참모장)
[[틀:깃발|]][[틀:깃발|]][[니콜라이 바투틴|]]
( 스타프카 대리)
[[틀:깃발|]][[틀:깃발|]][[니칸드르 치비소프|
니칸드르 치비소프
]]
(브란스크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필리프 골리코프|]]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세묜 티모셴코|]]
(남서 전선군 사령관)[5]
[[틀:깃발|]][[틀:깃발|]][[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
(B집단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페도르 폰 보크|]]
(남부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알렉산더 뢰어
(제4항공함대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프리드리히 파울루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
(제6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헤르만 호트|]]
(제4기갑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
(제8항공군단 사령관)
결과
소련의 패배
독일 국방군의 보로네시 점령
소련군이 돈강 동안으로 밀려남
영향
1942년 하계 공세의 시작
독일 국방군의 진격로 측면 안전 확보
소련군의 비교적 성공적인 퇴각
전력 군인 1,310,800명
- 브란스크 전선군 169,000명
- 남서 전선군 610,000명
- 남부 전선군 522,500명
군인 975,000명
전차 약 1,500대
항공기 약 1,200기
피해 규모 전사/실종 370,522명[6]
부상 197,825명[7]
야포 13,716문
전차/자주포 2,436대
항공기 783기
전사/실종 19,000명
부상 75,500명
항공기 175기

1. 개요2. 1942년 7월의 남부 전선
2.1. 독일군2.2. 소련군
3. 전투 서열
3.1. 독일군3.2. 소련군
4. 전개
4.1. 브라운슈바이크 작전4.2. 클라우제비츠 작전
5. 결과6. 영향7. 여담

[clearfix]

1. 개요

보로네시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이어지는 청색 작전의 첫 단계로, 독일군은 보로네시를 점령하여 진격로 측면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로네시에서 소련군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센 탓에 예정 시간보다 상당히 지체되었으며 그 결과 보로네시 전선군은 장비와 인력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퇴각시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남서 전선군 역시 포위되는 것을 피해 질서 있게 후방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 남부 집단군은 두 개의 집단군으로 분할되었고 B집단군은 돈강을 따라 스탈린그라드로 진군하는 피슈라이허 작전(Operation Fischreiher)을 진행하고 A집단군은 캅카스로 진군하는 에델바이스 작전(Operation Edelweiß)을 진행하게 된다.

2. 1942년 7월의 남부 전선

2.1. 독일군

청색 상황의 첫 단계는 돈강까지 도달하여 진격로 측면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제4기갑군과 2군은 보로네시로 헝가리 제2군과 6군은 평행하게 돈강으로 진군하게 된다.

2.2. 소련군

소련군은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2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날려버린데다가 전선에 구멍까지 뚫려버려 최악의 상황이었다. 소련군은 3개 전선군 휘하 74개 소총사단과 6개 전차군단, 37개 여단을 비롯해 약 130만 명의 병력을 보유중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대군이지만 대전차포, 대공포, 중포, 항공전력, 기갑전력 등 보병 빼고는 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3. 전투 서열

3.1. 독일군[8][9]

3.2. 소련군[28][29][30]

}}} }}} }}}

4. 전개

4.1. 브라운슈바이크 작전

6월 28일, 독일군은 작전을 개시했다. 4기갑군과 2군은 브란스크 전선군과 4기갑군은 보로네시를 향해 쾌속으로 진군했고 소련군은 곧바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7월 5일부터 8일까지 리쥬코프 소장이 5전차군이 반격을 개시했으나 600대의 전차를 보유한 소련군은 전면의 독일군의 절반정도밖에 안 되는 전력을 보유중이었고 경험 부족으로 예비대를 축차적으로 투입했다.[47] 9기갑사단은 소련군 2개 전차여단을 괴멸시키고 진격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작전이 진행되면서 독일군은 소련군이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파악했다. 소련군은 적에게 포위되는 것을 피해 일부 후위 병력이 적을 막고 나머지 주력병력만 퇴각하고 있었다. 이런 낌새를 눈치챈 야전 사령관들은 적을 포위하는 대신 추격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사령부에선 계획대로 하라며 거절했다. 결국, 40기갑군단이 4기갑군과 만나 형성한 포위만 안은 텅 비어있었다. 7월 4일, 독일군은 돈강에 도달했다. 7월 5일, 독일군은 돈강 너머 교두보를 확보했고 6일부터 보로네시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총통사령부에서는 적이 포위되지 않고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보로네시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히틀러는 2군이 보로네시를 점령하고 4기갑군을 남쪽으로 보내 적을 추격하라고 명령했으나 보크는 재량권을 활용하여 보로네시를 완전히 점령하고 진군하기로 한다.[48] 7월 7일 소련은 브란스크 전선군을 두개로 분할했고 보로네시 전선군은 도시 방어를, 브란스크 전선군을 독일군의 측면 공격을 담당했다. 같은 날, 독일군은 도시를 점령했다고 선언했으나 모스크바와 코카서스 사이의 철도를 차단하는 데 실패했으며 시가전은 일주일 더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동성이 빈약한 6군은 적을 추격하는 데 실패하게 되고 분노한 히틀러는 13일, 보크를 해임하고 바익스를 B집단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7월 9일에는 독일 남부집단군이 두 개의 집단군으로 분할되고 B집단군은 돈강을 따라 스탈린그라드로, A집단군은 코카서스로 진군하게 된다.

4.2. 클라우제비츠 작전

4기갑군 우익의 6군은 30일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벨고르드 남동쪽의 소련군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7월 5일까지도 이곳에서의 공세가 독일군의 주력이라고 확신하지 못했고 여전히 많은 예비대가 모스크바 근처에 배치되어 있었다. 스타브카는 포위를 피하기 위해 6일부터 남서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에 전면적인 후퇴를 명령했다. 독일군은 보급 문제가 심각했다. 최우선적으로 연료가 보급되는 기갑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제1기갑군은 16일에 편제의 30%정도의 전력만 보유중이었다. 기갑사단들의 전차 전력은 1개 전차대대 수준이었다. 히틀러의 명에 따라, 40기갑군단은 다시 남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로소쉬에 있던 티모셴코의 남서 전선군 사령부는 독일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6군의 기동 전력만으로는 적을 추격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6군은 적을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고 히틀러는 7월 17일, 4기갑군을 A 집단군 지원을 위해 남쪽으로 이동시켜버렸다.[49] 그 결과, 안 그래도 위태롭던 보급라인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칼라치 전투에서 독일군은 2주 넘게 멈춰있어야 했다. 그래도 그 전까지 진격은 이어졌고 14일에 보로실로프그라드를 점령하고 23일에는 로스토프에 도달했다.

5. 결과

독일군이 대승을 거두고 보로네시를 점령했으며 돈강을 따라 스탈린그라드와 로스토프를 넘어 코카서스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돌파당한 소련 전선은 300km에 달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진격 계획이 상당히 지체되었으며 보로네시 전선군은 돈강 동안에 전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소련군은 전력을 보존하며[50] 돈강 너머로 퇴각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6. 영향

독일군이 보로네시에 발이 묶인 동안 소련군은 후퇴하는 데 성공했고, 적이 질서있는 후퇴가 아니라 붕괴되고 있다고 판단한 히틀러는 보로네시에서 빠져나온 4기갑군을 A집단군으로 보내고 6군만으로 스탈린라드를 점령하려 시도한다.[51] 결과적으로 독일군은 보로네시에서 전력을 분산하여 도시를 점령하기에도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 되었던 것처럼 또다시 스탈린그라드를 차지하기에도 코카서스를 차지하기에도 애매한 전력이 되어버리고 만다. 더군다나 4기갑군과 6군은 동일한 진격로와 보급로를 사용한 탓에 6군은 연료 부족으로 2주 넘게 진격이 멈춰버렸고 4기갑군도 당연히 A집단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7. 여담



[1] 보로네시-보로실로프그라드 작전 [2] 청색 상황 1단계 [3] 브라운슈바이크 작전 [4] 독일군의 진격로 북쪽 강 너머 철도의 교차점이 보로네시다. 보로네시에서 철도를 따라 쭉 내려오면 독일군의 진격로에 로소쉬가 있고 더 내려오면 밀레로보가 있다. [5] 6월 21일까지는 남부 전구의 전선군들을 담당하는 남서방면군 사령관도 겸하고 있었다. [6] 브랸스크 전선군 36,883명, 남서 전선군 161,465명, 남부 전선군 128,460명 [7] 브랸스크 전선군 29,329명, 남서 전선군 71,276명, 남부 전선군 64,753명 [8] 6월 27일 기준, 공군과 예비대를 제외한 사단급 이상 제대들의 순서는 북쪽부터 남쪽순이다. [9] 공세 시작 시점에서 기동군단들의 명칭은 차량화군단이었으나 연말까지 기갑군단으로 개칭된다. [10] 7월 9일부터는 B 집단군 사령관이었고 7월 14일 해임된다. [11] 7월 14일까지 [12] 군집단은 집단군과는 다른데 쉽게 말하면 야전군 사령부가 집단군 규모의 부대를 지휘하는 것이다. 분견군, 분견군단과 비슷하다. [13] 2군 예비 [14] 7월 14일까지 [15] 군단 예비 [16] 군단 예비 [17] 군단 예비 [18] 군단 예비 [19] 군단 예비 [20] 군단 예비 [21] 군단 예비 [22] 군단 예비 [23] 나중에 훌리트 분견군과 재건된 6군의 사령관을 맡게 된다. [24] 군단 예비 [25] 군단 예비 [26] 7월 20일부터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상급대장 [27] 6월 30일까지 [28] 7월 4일 기준 [29] 이 시점에서 소련군은 소총군단이 없었고 야전군이 직접 소총사단들을 지휘했다. [30] 전투 기간동안 니콜라이 바투틴이 스타브카 대리로 파견되어 전선군들의 작전을 조율했다. [31] 7월 7일, 보로네시 전선군이 새로 편성되며 필리프 골리코프가 사령관으로 부임 [32] 7월 7일, 신편된 보로네시 전선군에 배속 [33] 전선군 예비, 전투 시작 후 13군과 보로네시 전선군 사이에 배치 [34] 7월 9일, 보로네시 전선군에 배속 [35] 7월 11일부터 [36] 7월 7일 새로 편성 [37] 아래 편제는 8월 1일 기준이다. [38] 7월 10일, 스타브카 예비인 제6예비군으로부터 편성 [39] 7월 10일, 스타브카 예비인 제3예비군으로부터 편성 [40] 7월 7일, 브란스크 전선군으로부터 이동 [41] 7월 9일, 브란스크 전선군으로부터 이동 [42] 7월 12일,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으로 개편되고 바투틴의 지휘 하에 남서 전선군이 10월 25일에 새로 편성된다. [43] 7월에 제4전차군으로 개편, 10월에 제65군으로 개편 [44] 7월에 제1전차군으로 개편, 8월에 스타브카 예비인 제4예비군으로 38군을 재편성한다. [45] 7월 28일 해산되고 북캅카스 전선군에 편입 [46] 북캅카스 전선군의 사령관은 세묜 부됸늬 소연방 원수 [47] 나중에 쿠르스크 전투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48] 사실 이 시점에서는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과 기갑사단들이 이미 시가전에 말려든 상황이었다. [49] 히틀러는 13일에 처음으로 로스토프에 기갑 전력을 집중하겠다고 선언했고 할더가 강력히 반대했으나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다. [50] 물론 병력은 절반가까이 날렸으나 중장비를 대부분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보병포 말고 중곡사포나 대전차포 전력이 매우 절실했던 소련군에게는 아주 큰 성과다. [51] 애초 계획은 도시 점령이 아닌 무력화였다. 이는 전력을 분산하지 않고 스탈린그라드에 집중했다면 어렵지 않은 작전이었다. 물론 이 작전이 성공했다 해도 코카서스 점령이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