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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2:39:30

벨리키예루키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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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키예루키 전투
러시아어: Великолук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1]
독일어: Schlacht von Welikije Luki[2]
영어: Battle of Velikiye Luki
제2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의 일부
파일:1942년 겨울 동부전선.jpg
▲ 지도 좌측, 벨리키예루키를 포위한 소련군
시기
1942년 11월 24일 ~ 1943년 1월 20일
장소
소련 러시아 SFSR 벨리키예루키
교전국 [[틀:깃발|]][[틀:깃발|]][[소련|]]
지휘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쿠즈마 갈리츠키
(제3충격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쿠르트 폰 데어 슈발레리
(제59군단 사령관)
결과
소련군이 벨리키예루키 탈환
영향
제3기갑군이 르제프 돌출부에서 철수
독일 국방군이 르제프 돌출부와 데미얀스크 돌출부 포기
전력 86,700명
피해 규모 전사/실종 31,674명
부상 72,348명
독일 측 기록
전사/실종 2,150명
부상 8,711명
소련 측 기록
17,000명[3]/60,000명[4]

1. 개요2. 전투 서열
2.1. 독일군2.2. 소련군
3. 1942년 가을의 동부 전선4. 요충지 벨리키예루키5. 전개
5.1. 벨리키예루키 포위5.2. 독일군의 첫 번째 구호 시도5.3. 토틸라 작전 : 독일군의 두 번째 구호 시도
6. 결과

[clearfix]

1. 개요

벨리키예루키 전투는 화성 작전의 조공 느낌으로 계획된 공세이며 소련군이 벨리키예루키 탈환에 성공하면서 독일군은 데미얀스크와 르제프의 돌출부를 모두 포기하고 전선을 단축하게 된다.

2. 전투 서열

2.1. 독일군[5]

2.2. 소련군[15]

3. 1942년 가을의 동부 전선

1942년 11월이 되자 남부 전선에서 공세를 펼치던 독일군의 공세가 추진력을 잃었고 전선이 고착화되고 있었다. B 집단군이 스탈린그라드에 발목이 붙잡히면서 독일군은 온 역량을 이곳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A 집단군도 더 이상 진격할 여력을 상실했다.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천왕성 작전과 토성 작전[16]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소련군은 독일군과 달리 스탈린그라드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시에 소련군은 르제프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해 화성 작전[17]과 목성 작전[18]을 준비했다. 화성 작전의 규모는 천왕성 작전과 비교해봐도 비슷한 규모였으며 이 두 공세가 1942년을 마무리지을 소련군의 주공이었다.

거기에 추가로 소련은 수많은 조공을 준비했다. 북부 전선에서는 레닌그라드, 볼호프 전선군이 레닌그라드 봉쇄를 풀기 위해 18군을 상대로 공세를 준비했으며 북서 전선군이 16군을 상대로 데미얀스크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해 계속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중부 전선에서는 서부, 브랸스크 전선군이 2기갑군과 2군 상대로 진행할 여러가지 공세[19]가, 남부 전선에서는 천왕성 작전이 성공할 경우 보로네시, 남서 전선군이 B 집단군을 상대로 진행할 보로네시-하리코프 공세와 스탈린그라드, 북코카서스, 트랜스코카서스 전선군이 A 집단군을 상대로 진행할 북캅카스 공세가 준비중이었다.

이 중에서도 이번 전투의 격전지가 될 16군과 9군 사이에는 슈발레리 집단이라 불리던 59군단이 북부 집단군 소속 브란덴베르거 그룹의 몇 개 사단과 함께 홀름- 벨리키예루키- 네벨- 벨리즈로 이어지는 긴 전선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1.5개 야전군으로도 모자랄 곳을 1.5개 군단이 지키고 있으니 전선 형성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소련군도 이 곳에 그다지 많은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다른 전선에서는 전선군이 담당할 영역을 3충격군 혼자서 담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선이 1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은 이유는 이 구역이 드넓은 습지대였기 때문에 여름에는 공세가 불가능했고 소련군 입장에서도 데미얀스크와 르제프가 여전히 독일군의 수중에 있는 상태에서 더 파고들기 부담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홀름, 벨리키예루키를 비롯한 주요 거점을 위주로 방어 작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42년 겨울에 데미얀스크 공세 당시 포위했던 홀름에서의 포위전이 결국 독일군의 승리가 되면서 소련군은 좀 더 남쪽의 벨리키예루키로 눈을 돌렸다. 소련군은 화성 작전에서 독일군을 분산시킬 겸 중부 집단군과 북부 집단군의 연결을 끊고 목성 작전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 겸 해서 벨리키예루키를 점령하기로 한다.

4. 요충지 벨리키예루키

기계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독일군과 미국의 엄청난 랜드리스 덕에 무한한 트럭을 보유하고 있던 것처럼 여겨지는 소련군이 맞붙은 동부 전선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철도가 매우 중요했다. 트럭은 전쟁 시작부터 끝까지 보급의 주가 되지 못했다. 전선이 넓어도 너무 넓었고 기후 마저도 습지에 라스푸티차와 매우 추운 겨울이 겹쳐 철도에서 먼 구역은 보급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 동부 전선에서 보급의 기본은 철도를 따라 최대한 최전선으로 이동하고 거기서 트럭 혹은 마차로 전선까지 이동했다. 따라서 공세 작전은 무조건 철도를 차지하기 위한 것에서 시작했으며 한 번쯤 들어본 독소전쟁의 격전지는 하나도 빠짐없이 철도가 지나는 교충의 요충지였다.

벨리키예루키는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곳 중 하나인데 아무것도 없는 이 조그만 농촌이 레닌그라드- 오데사를 남북으로 잇는 철도와 리가- 모스크바를 동서로 잇는 철도가 만나는 교차점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데미얀스크의 16군과 르제프의 9군 사이에는 사실상 병력이 거의 없고 거점만 지키는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급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벨리키예루키를 상실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르제프의 9군과 3기갑군이 붕괴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련 제3충격군은 벨리키예루키를 점령하기 위한 공세를 준비했고 독일 제59군단은 어떻게든 이 작은 농촌을 지켜야만 했다.

5. 전개

5.1. 벨리키예루키 포위

소련군은 우선 도시를 포위하기로 하고 도시 북쪽으로 381소총사단, 남쪽으로 5근위소총군단의 4개 소총사단을 투입했다. 11월 24일에 공세가 시작됐고 독일군은 강력히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이로 인해 결국 밀려났다. 27일이 되자 277척탄병연대를 포함한 약 8천명 정도의 병력이 도시에 포위됐다. 그나마 83보병사단과 3산악사단 사이로 파고든 2기계화군단을 2개 연대가 간신히 막아내면서 일단 첫 번째 전투가 일단락됐다.

슈발레리 그룹에는 당장 동원 가능한 예비대라고는 방금 막 18군에서 차출되어 노보소콜니키(Novosokolniki)에서 철도역을 지키고 있던 291보병사단 뿐이었다. 이 철도역은 포위된 도심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15km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남북철도와 동서철도가 지나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중부 집단군 사령관 클루게는 아예 벨리키예루키 도심을 포기하고 철도역 근방까지 전선을 우선 뒤로 물리고 그 다음에 전선을 재구축한 뒤 반격하기를 원했다. 소련군이 화성작전을 시작하면서 중부 집단군 자체도 여유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OKH 역시도 이 의견에 찬성했고 가능하면 데미얀스크나 르제프의 돌출부를 줄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11월 30일에 히틀러는 후퇴를 불허했고 그 시점에서 59군단과 포위된 277척탄병 연대 사이에는 약 5km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히틀러가 후퇴를 금지한 상황에서 독일군은 중부 집단군에서 예비인 20차량화보병사단을, 북부 집단군에서는 16군 우익에서 홀름 일대를 지키던 브란덴베르거 그룹에서 8기갑사단을 차출해서 각각 남서쪽과 북서쪽에서 반격을 가했으나 제8에스토니아 소총군단을 증원받은 소련군에게 오히려 밀려나면서 12월 초가 되자 포위망과 본대와의 거리는 10km로 더 멀어졌다.

5.2. 독일군의 첫 번째 구호 시도

파일:벨리키예루키 구호 작전.jpg
▲ 도시 북서쪽에서 공격을 시작한 8기갑사단과 20차량화보병사단

12월의 첫 3주간 독일군은 포위망을 구하기 위해, 소련군은 철도역을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독일군의 전선은 점점 밀려났고 철도역까지 접근한 적을 가까스로 격퇴했다. 그 사이 소련군은 포위된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6일부터 3충격군으로 이관되어 도시 포위를 맡게 된 제8에스토니아 소총군단은 13일부터 4개 소총사단과 1개 기갑여단을 동원해 도시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그리고 도시를 두고 10일 간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그 사이 59군단의 전선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독일군은 오토 뵐러 중장의 지휘 아래 291보병사단과 6공군야전사단 그리고 8기갑사단과 근처의 돌격포 및 전차 부대들의 잔존병력을 모아 뵐러 집단을 만들어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12월 21일에 시작된 공세는 이틀만에 끝나버렸다. 독일군이 증강되는 속도보다 소련군이 증강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포위망 구호를 위한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도시의 방어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미 도시 내의 독일 군은 처음의 절반으로 줄어 있었고 소련군은 25일부터 도시에 대한 공세를 재개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도시는 점차 소련군에게 넘어갔고 1943년이 되자 독일군은 서쪽 요새의 500명과 동쪽 벨리키예루키 철도역의 1,000명 정도로 줄어있었다. 이 역은 노보소콜니키와 모스크바를 잇는 철도가 지나기 때문에 중부 집단군의 보급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5.3. 토틸라 작전 : 독일군의 두 번째 구호 시도

파일:토틸라 작전.png
▲ 마지막 돌파를 시도하는 제331보병사단

독일의 마지막 구호 작전은 1월 4일에 시작됐다. 12월 20일에 화성 작전이 완벽한 실패로 끝나면서 조금의 여유가 생긴 중부 집단군은 205,331보병사단과 OKW에서 증원받은 제1SS차량화보병여단, 덴마크자유군단[20]을 벨리키예루키로 증원했다. 뵐러 그룹은 '토틸라 작전'이라 이름 붙은 마지막 공세를 시작했다. 독일 공군은 도시 구호를 위해 슈투카까지 동원해 공수 작전을 펼치고 있었지만 도시의 방어대는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독일군은 5개 사단을 동원해 다시 도시로부터 10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다. 여기서 331보병사단이 1월 9일에 5km지점까지 가까스로 진격했으나 그게 한계였다. 독일군은 10일에 전차, 돌격포, 장갑차 등 차량을 모두 긁어 모아 최후의 돌파를 시도했다. 목적은 단순히 포위망 도착으로 아군이 공격받아도 절대 신경쓰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덕분에 몇 대가 서쪽 포위망의 요새에 도달하기는 했으나 포위망이 풀린 것이 아니고 같이 포위되어버렸다. 이렇게 포위망 구호는 완벽히 실패했고 소련군은 14일에 최후의 공세를 시작했다. 뵐러는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고 포위망 안에 갇힌 병력에게 본대를 향해 탈출할 것을 명령했으나 겨우 수십명만이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전투 시작 시점에서 포위망에는 9,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있었으나 탈출에 성공한 것은 200명 뿐이었다.

6. 결과

소련군은 비록 노보소콜니키의 철도역을 탈환하는 데는 실패했지만[21] 벨리키예루키를 탈환하면서 목표를 달성했다. 이로 인해 중부 집단군과 북부 집단군 사이에는 엄청난 틈이 생겼으며 당장 르제프의 9군과 3기갑군은 보급에 큰 차질이 생겼다. 벨리키예루키는 비록 작은 도시였으나 벨리키예루키의 상실은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군이 토로페츠 돌출부[22]에서도 공세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독일군은 르제프 돌출부의 우익을 담당하던 3기갑군을 9군 좌익으로 재배치하여 네벨-비텝스크 방면으로 이동시켰으며 이미 철수 준비중이었던 데미얀스크의 16군과 함께 르제프의 9군과 4군 역시도 철수 준비를 시작했다.

벨리키예루키 전투는 데미얀스크 전투, 홀름 포위전, 르제프 공방전 등 북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 사이의 전역에서 벌어진 전역 중에 거의 유일하게 소련군이 전술적으로 승리한 전투였다. 벨리키예루키를 탈환하여 전술적 목표를 달성했고 전략적으로도 르제프와 데미얀스크로 가야할 예비대를 전부 불러들여 독일군이 데미얀스크 돌출부를 포기하도록 강요했으며 비록 실패했지만 화성 작전에도 도움을 줬다. 궁극적으로는 르제프 후방을 위협해 르제프 돌출부 포기에도 일부분 기여했고 소련군은 그동안 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철도 보급망을 구축하지 못해 대규모 공세를 벌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벨리키예루키 탈환과 함께 드디어 철도 보급이 제대로 되기 시작하면서 중부 전선에서 승기를 잡게 된다.


[1] 벨리키예루키 공세 작전 [2] 벨리키예루키 전투 [3] 포위망 내부 5,000명, 외부 12,000명 [4] 포로 4,000명 [5] 전투 시작 시점 [6] 나중에 증원된 부대만 작성 [7] 볼호프 강에 배치되어 있다가 벨리키예루키로 증원 [8] 홀름 남쪽에 배치되어 있다가 벨리키예루키로 증원 [9] 집단군 직할 [10] 벨리키예루키 방어 [11] 노보소콜니키에서 철도역 방어 [12] 네벨에 배치 [13] 벨리즈에 배치 [14] 포메른에 주둔하다가 1월에 벨리키예루키로 증원 [15] 12월 1일 기준 [16] A 집단군 전체를 코카서스에 가두고 섬멸하기 위한 공세 [17] 독일 9군을 섬멸하기 위한 공세 [18] 혹은 해왕성 작전, 화성 작전이 실패함에 따라 취소됐다. [19] 말로아르한겔스크 공세, 지즈드라 공세, 드미트리예프-셉스크 공세 [20] 무장친위대 소속으로 실제 규모는 1개 연대급이었다. [21] 1944년 1월에 탈환한다. [22] 데미얀스크와 르제프 사이 소련군의 거대한 돌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