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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클레멘트 애틀리, 해리 S. 트루먼, 이오시프 스탈린 | ||||
영국 | 미국 | 소련 | ||
영어 | Potsdam Conference | |||
러시아어 | Потсдам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 | |||
독일어 | Die Potsdamer Konferenz, Konferenz von Potsdam | |||
중국어 | 波茨坦會議 | |||
일본어 | ポツダム会談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2],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이 참석하였다.
중국 대표 장제스는 중일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독일 영토인 포츠담까지 가기엔 무리라고 판단, 이후에 서명한다는 양해를 얻어 불참했다. 이 때문에 포츠담 회담은 미/영/소가, 회담 중인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미/영/중의 서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련이 제외된 이유는 당시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1945년 8월 8일)를 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고등학교 교과서 중에는 포츠담 회담을 미/영/중끼리 했다는 서술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정확히는 회담장에 참석한 것은 미영소였고 일본에 대한 대외 압박이었던 선언에 참석한 것은 미영중이었다.[3]
2. 결과
2.1. 합의 사항
- 일본
- 독일 / 오스트리아
전쟁 배상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독일은 대략 230억 달러 정도의 전쟁 배상금을 연합군에게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상금은 주로 산업시설과 기계류들을 뜯어가는 것으로 이루어졌으며[10] 소련의 점령 지역이 작센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산업화가 덜 이루어진 동부 지역이었기 때문에 서방 연합국은 자신의 몫으로 가져갈 산업 시설 중 10%를 소련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연합국은 독일의 전쟁 도발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독일에서 나치 세력 일소, 무장 해제[11], 민주화, 비중앙집권화 등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리는 것이 결정되었으며 탱크, 항공기 등을 생산해낼 수 있는 중공업 산업 시설들 역시 해체된다. 연합국은 아예 '독일의 경제력은 유럽 평균치를 넘지 못하게 한다.'라고 결정짓고 독일을 경공업, 농업 기반 국가로 만들려 했다. 물론 이런 조치는 냉전으로 인해 백지화된다.[12]
- 그 외
덧붙여서 인도차이나 일대에서도 전후 질서가 계획되는데, 베트남의 분리가 최초로 결정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북위 16도를 기준으로 이북은 장제스의 국민정부군이 진주하기로 결정됐으며, 이남은 영국군이 진주해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담당하기로 결정됐던 것. 하지만 전쟁 직후 제 코가 석자라 베트남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중국과 영국은 일찍이 동남아에서 세력을 구축했던 프랑스에게 이 지역을 맡겼고, 점령군으로 다시 들어온 프랑스가 베트남의 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찍어누르면서 베트남은 30년 가까이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14]
2.2. 냉전의 시작
"
대영제국의 총리와
스탈린 대원수에게
핵실험의 성공을 알려주었다. 영국의 총리는 그를 이해하며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스탈린 서기장은 미소를 지으며 폭발을 보고해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 했지만, 그
중요성을
이해하지는 못함이 확실했다."
- 해리 S. 트루먼, 포츠담 회담에서. #
- 해리 S. 트루먼, 포츠담 회담에서. #
이미 5개월 전이었던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부터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냉전은 포츠담 회담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발칸반도를 비롯한 동부 유럽 곳곳에 소련은 자신의 위성국가들을 세웠고, 특히나 자유 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던 얄타 회담에서의 약속을 뒤집어버리고 스탈린이 폴란드에 공산당 통치 체제를 세운 사실은 서방측의 불신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스탈린에게 우호적[15]이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1945년 4월 뇌출혈로 사망한 이후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한 것[16] 역시 서방과 소련 사이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는 영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처칠은 원래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유명한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소련을 견제하는데 힘을 쏟았고, 처칠의 후계자였던 클레멘트 애틀리는 노동당 출신임에도 스탈린을 '악의 화신'으로 여기며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고 시도했다.[17]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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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같이보기
[1]
독일 제국의 황태자인
빌헬름 황태자 부부의 거주를 위해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지은 궁전으로 궁전의 이름은 빌헬름 황태자의 아내인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비 체칠리에(Cecilie)에서 유래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의 왕가인
호엔촐레른 왕조가 지은 마지막 궁전으로 1990년 "베를린과 포츠담의 궁전과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2]
처음에 참석한 건
윈스턴 처칠이다. 당시 영국은 1940년 5월 이래 대독 전시 거국 내각으로서 보수-노동 연립정권이 유지중이었으나 독일의 항복 이후 자연스레 연립 내각이 해체되고 7월 5일 총선을 치렀다. 그러나 개표결과는 처칠이 포츠담으로 출발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는데 유럽 대륙에 주둔중이거나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있는 장병들의 투표권 문제를 위해 개표가 매우 지연되었기 때문. 처칠은 당연히 자신이 속한 보수당이 승전의 주역이었기 때문에 선거에서 이길 것이라 생각하며 포츠담 회담에 참석했는데 포츠담에서 그만 선거에서 패했다는 뉴스를 듣고는 사진 하나만 찍고 영국으로 돌아와야 했고 승리 결과를 들은 애틀리가 7월 26일 총리에 취임하여 급히 포츠담으로 날아갔다.
[3]
소련은 이때까지만 해도 형식적으로 일본과의 중립 조약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내부에서는 대일전 준비가 발빠르게 진행 중이었으나 소련의 기습 참전을 일본에 알리면 안 되었기 때문에 포츠담 선언에 불참했다.
[4]
정확히 말하면 눈치보다 이미 못 멈추는 폭주기관차에 일본 군부가 타고 있었다. 차라리 카이로 회담 이후로 조건부 항복 협상이라도 시도했다면 모르지만 그걸 무시한 이상 답이 없었다. 결국 항복 이후 체포된
도조 히데키는 감옥에서 자살시도까지 했으나 미국은 그를 기어코 살려내 교수대에 올려놓았다.
[5]
여담으로 트루먼은 회담 도중 스탈린에게
강력한 신무기를 미국이 가지고 있다고 넌지시 알려주었는데, 이미 각종 스파이를 통하여 미국이 원폭을 개발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스탈린은 '그 무기를 일본에 적절하게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적당히 받아쳤다.
[6]
히로히토에 대한 처벌이 논의되었지만 쇼와를 전범으로서 처벌하는 문제와 천황제 유지와는 별개였는데 천황 개인과 제도로서의 천황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일본이 목맸던 것도 히로히토 개인이 아닌 유구한 역사의 천황제 전통이었다.
[7]
참고로 만약 천황제를 유지를 허용할 것임을 일본에 내비쳤다면 일본이 7월에 항복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패전이 명확한 상황에서 일본이 끝까지 강화 교섭에 목맸던 이유도 다름아닌 천황제의 유지였다. 일본에 있어 천황제 유지가 최우선 조건이었고 조선, 대만 등 식민지는 차선이었으며 만주국, 동남아, 중국 점령지는 최후 순위였다.
[8]
베를린,
빈은 한 나라의 수도라는 위상을 고려해서 따로 4등분된다.
[9]
오데르-나이세 선으로 독일이 잃은 영토는 1937년(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기 이전) 독일 영토의 25% 가량이었다. 이로써 독일은 양차대전의 결과 1914년 이전
독일 제국 영역의 1/3을 상실했다.
[10]
물론 강철의 대원수 스탈린은 돈되는 거라면 싹 다 털어가려고 했지만
베르사유 조약으로 지나치게 가혹하게 패전국을 대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윈스턴 처칠이 뜯어말렸다. 이 때 처칠이 스탈린에게 했던 말이 '말에게 채찍질을 하려면 적어도 말이 먹을 건초는 남겨둬야 하잖소'.
[11]
그러니까 아예 군대를 해체시키는 조치를 강구했다. 베르사유 조약에선 10만 명의 보유를 허용했지만, 이번에는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12]
독일 뿐 아니라 일본에 대한 조치 역시 이와 비슷했는데, 추축국이었던 이들에 대한 공업 대국화를 철저하게 막으려 했던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겠다 공언했다. 하지만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이는 몽땅 백지화되고 대신 산업시설이 마구 들어섰다. 다만 일본은 독일과 달리 미국에 의해 일방점령된 상황이라서 소련의 입김은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결국 미국에게 각을 세우며 독자적인 열강으로 남으려던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무역망에 편입된 서독과 일본에게 추월당했다.
[13]
냉전의 종식 이후 수립된 현재 폴란드의 헌정체제(즉, 폴란드 제3공화국)는 자신들이 폴란드 망명 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규정하며, 냉전 시대 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소련의 괴뢰국이자 비정통 국가로 분류한다. 폴란드 망명 정부가 1990년 자발적으로 해체한 것도 폴란드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14]
월남전 탓에 잘 알려진 남베트남, 북베트남이 세워지게 된 것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참패한 이후 미국이 이 일대에 개입하면서 부터였다. 포츠담 회담과는 별개의 일이다.
[15]
덕분에 냉전 기간 내내 루스벨트는 정계, 학계를 가리지 않고 스탈린의 야망을 과소평가해서 냉전을 불러일으켰다고 가열차게 비난당했다. 루스벨트는 워싱턴, 링컨 다음으로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이면서도 여전히 그를 저평가하는 사람들은 그의 대소 유화책이 냉전이라는 파멸적인 양상을 불러왔다고 이야기할 정도이다. 한반도 얘기로 넘어오면 결과론적인 시각이지만 원폭의 개발로 구태여 필요없었을 소련의 대일 참전을 쓸데없이 종용한 측면이 있다. 물론 원폭 개발은 7월이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결과론이지만 어쨌든 정치인은 결과로 평가받으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미국 학계에서는 세계대전 수행에 루스벨트가 큰 공헌을 했음을 부정하진 않으면서도 그의 대소 유화책은 재앙이었으며 그가 시의적절하게(?) 죽었다고 평가한다.
[16]
해리 트루먼은 전반적으로 반공적인 성향이 1944년 대선의 러닝메이트였던 루스벨트보다 훨씬 강했으며, 소련의 공격적인 팽창주의 대외 정책에 철저히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포츠담 회담 이후의 일이지만
트루먼 독트린이 가장 좋은 예이다. 사실 트루먼은 독소전 초기에도 미국은 독소 그 어느 편을 들어서도 안된다고 주장했을 정도로 소련을 추축국과 같은 악의 축으로 여겼는데 결국 이러한 트루먼의 판단은 선견지명이었던 셈이었다.
[17]
다만 애틀리 정권하의 영국이 소련에 제트엔진을 제공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긴 했다. 여기서 영국이 제공한 제트엔진을 복제한 엔진을 사용한 전투기가
MiG-15이고 이 기체는 한국전쟁 중 UN군에게 매우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