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로버트 카파 Robert Cap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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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프리드먼 엔드레 에르뇌 Friedmann Endre Ernő |
출생 | 1913년 10월 22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 |
사망 | 1954년 5월 25일 (향년 40세) |
베트남국 타이빈성 | |
국적 |
[[헝가리| ]][[틀:국기| ]][[틀:국기|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1946~) |
직업 | 사진가, 종군기자 |
묘소 | 미국 뉴욕 주 아마워크 힐 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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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종군 기자로 매그넘 포토스의 설립자이자 20세기 최고의 저널리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스페인 내전부터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인도차이나 전쟁 등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쟁터의 최전선에 섰던 기자였다. 일반인에게는 스페인 내전 때 찍은 <어느 병사의 죽음> 사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사진은 종군기자로서 단연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의 역사, 특히 사진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보도사진의 역할을 정립한 사진기자의 선구자다.2. 생애
2.1. 유년기와 청년기 시절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부모에게서 프리드먼 엔드레 에르뇌(헝가리어: Friedmann Endre Ernő)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1931년에 좌익학생운동을 하였고, 호르티 미클로시 당시 헝가리 섭정의 정치적 압제를 피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망명하여 사진 에이전시 겸 통신사 데포트의 암실 보조원으로 취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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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가 찍은 레프 트로츠키의 연설 장면 |
그리고 1932년 11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망명 중인 러시아 혁명가 레프 트로츠키의 연설장면을 촬영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첫 사진으로 그는 사진 실력을 인정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곧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하고 나치당이 권력을 잡자, 프랑스의 파리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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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게르타 타로와 함께 | 게르타 타로가 로버트 카파를 찍은 사진 |
그는 그곳에서 동료 기자이자 첫 사랑인 독일계 유대인 게르타 타로(Gerda Taro)와 만나게 되었으며, 게르타의 권유로 이름도 로버트 카파로 바꾼다. 왜냐하면 헝가리계라는 이유로 자신의 사진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2.2. 스페인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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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23살인 그는 연인인 게르타 타로와 함께 스페인 제2공화국으로 가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그의 아프리카파 반란군이 일으킨 스페인 내전의 상황을 필름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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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36년에 공화파 알코이 민병대원 페데리코 보렐 가르시아(Federico Borrell García)의 전사 장면을 찍은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Spanish Loyalist at the Instant of Death)>로 종군기자로서의 명성을 쌓는다.
하지만 카파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이 사진은 죽을 때까지 조작 논란에 시달리게 된다. 상당히 극적인 사진이었고, 사진 어디에도 총에 맞은 흔적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쓰러지는 사람'을 찍었다거나, 연출을 했다는 것이 대표적인 논란이었다. 그리고 카파는 이런 논란에 대해서 아예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논란에 어느정도 신빙성이 더해졌다. 물론 카파의 생애를 비춰볼 때 '조작 같은 걸 할 사람인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조작이 아니라는 측은 1990년대 사진 속 남자의 신원이 밝혀지면서 조작설은 거짓인 게 밝혀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훗날 카파의 지인을 통해 카파가 사진의 조작설에 대해서 별달리 왈가왈부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전선은 교착상태에 총격전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참호 속에서 지루해하던 카파와 병사들은 장난삼아 참호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근데 운이 나쁘게도 그 순간에 총격전이 벌어져서 병사들이 죽고 다쳤다. 다 같이 장난삼아 벌인 일이었지만 자신이 어느 정도 부추긴 일이기도 하기에 역사에 남을 사진을 찍었지만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다.
조작이라는 측은 2009년 카파가 남긴 소위 mexican briefcase에서 공개되지 않은 사진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그 사진 중 Falling Soldier가 연출이라는 증거가 담긴 7장의 사진이 발견된다. 이 7장의 사진은 Falling Soldier가 찍힌 곳에서 같은 날 찍힌 사진들로 7장의 사진 중 Falling Soldier은 6번째에 해당된다. 7번째의 사진은 같은 장소에서 다른 인물로 다른 포즈로 찍힌 사진이다. # 이로써 Falling Soldier는 연출된 사진임이 명백해진다는게 조작설을 주장하는 측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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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그의 여인인 게르타 타로는 그가 잠시 파리로 간 사이에 브루네테 전투를 촬영하다 후퇴하는 공화국군의 전차에 치여 중상을 입는다. 엘 골로소 잉글리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
2.3. 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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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있던 그는 1938년에 중국국민당과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수장인 장제스가 선전영화 '4억의 민중' 촬영을 위하여 그에게 사진을 의뢰한 것을 받아들여 중국 한커우에서 중일전쟁의 모습을 취재한다. 물론 촬영이 다 끝난 후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2.4. 제2차 세계 대전
전쟁 당시에 찍힌 그의 모습.
독일군의 아이를 낳은 한 프랑스 여성이 삭발을 당한 채 쫓겨나고 있다. 프랑스 샤르트르, 1944년 8월 18일.
독일 국방군의 프랑스 침공으로 38년에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가족들에게 간다. 이후에 북아프리카 전선을 시작으로 모든 전장에서 사진을 남겼다.
특히나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엔 오마하 해변[1]에 상륙하는 제1파 부대와 함께 움직이며 전장을 사진에 담았고. 해변에까지 올라섰다가 간신히 되살아왔다! 이 사진들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만드는 데 참고하기도 했다.
그는 군인들의 팔다리가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두 대의 콘탁스 II 카메라를 들고 106여 장의 사진을 찍은 후 겨우 살아남아 미국의 라이프(Life)지에 필름을 우송했으나 35mm 필름 네 롤, 120mm 필름 대여섯 롤을 받은 암실 담당자가 마감에 쫓긴 나머지 건조 도중 필름의 감광유제가 녹아버려 11장의 사진이 남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카파의 스토리는 비운이 아닐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를 종군기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만들어 주었고, 이 11장의 사진을 "The Magnificent Eleven"이라 부른다.
스페인 내전 당시의 "쓰러지는 병사"와 더불어 카파의 명성을 대표하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사진들 (The Magnificent Eleven) 역시 카파 사후 논란에 사로잡힌다. 카파는 당초 D-Day에 오전 6시 30분에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하여 90분간 106장의 사진을 촬영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가 탑승하였던 상륙정은 오전 8시 15분에 해변에 도착하였으며, 카파는 불과 15분정도, 길어야 30분 정도의 시간만을 해변에서 머문 뒤 다시 철갑으로 보호되는 상륙정 안으로 돌아가 나오지 않았으며 카파를 태운 상륙정은 오전 9시경 오마하 해변을 떠난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카파가 도착한 해변은 노르망디 해변에 주둔한 독일군 병력 중 가장 방어력이 약한 부대였고 연합군 상륙 당시 치열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으며 카파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대부분의 전투는 종료된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링크 또한 당시 사진 필름의 건조에 사용되던 기계는 카파의 변명처럼 필름을 녹아내릴 정도로 뜨겁게 가열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밝혀졌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카파의 노르망디의 사진이 왜 11점 뿐이고, 11장의 사진들에 날아가는 포탄이나 총알, 또는 물 위에 떠다니는 시체와 같은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찍혀 있지 않은 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 시켜 준다.
위 사진은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라는 카피와 함께 라이프지에 게재된, 오마하 해변에 상륙 중인 미군 공격 제1파 부대 병사의 얼굴이다. 사진 속의 인물은 제116보병연대 K중대 소속의 '에드워드 리건'으로 한때 알려졌으나 이 또한 잘못된 것으로, 리건은 본인이 사진에 찍힌 적이 없다고 증언하였으며, 카파가 상륙한 해변과 리건의 부대가 상륙한 해변은 전혀 다른 해변으로 드러났다. 관련링크 뒤로 보이는 흐릿한 철 구조물들은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장군의 발명품이다.
2.5. 종전
전쟁이 끝난 후, 1946년에 미국 시민권을 받는다. 그는 이후에도 모스크바와 키예프 등 당시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소련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으며 제1차 중동전쟁의 현장에 가서 취재하였다.
1947년에는 유명인사들과 함께 매그넘 포토스를 설립하고, 1951년에는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메카시즘으로 과거 좌익 운동 전력으로 인해 FBI의 감시를 받기도 하였다.
2.6.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사망
그가 죽기 전에 찍은 마지막 사진.
1954년 5월 25일 오후 2시 55분, 프랑스군의 행군을 취재하다 지뢰를 밟아 사망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카메라를 움켜쥐고 있었다.[2]
2.7. 그의 유산
그는 죽었으나 그가 인류에 남긴 유산은 엄청나다. 그의 동생 코넬 카파는 1966년, 관심있는 사진을 위한 국제 기금(International Fund for Concerned Photography)'을 설립하였고, 1974년에는 카파가 촬영했던 사진을 보관할 목적으로 국제사진센터(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을 설립하였다. 또한 그의 정신을 기려, 투철한 기자정신의 대명사가 되는 '카파이즘'이 생겨났다.2.8. 사생활 그리고 여성
그에게는 많은 여성들이 따랐는데, 이는 그의 외모와 함께 그의 기자 정신도 한몫을 하였다. 대표적으로 앞에서 나온 게르타 타로의 원래 이름은 게르다 포호릴레스(Gerda Pohorylle)였으나 카파처럼 이름을 바꾸었다. 공산주의자였던 게르타는 남성 편력이 화려했지만 카파는 그녀와 결혼까지 생각했고 사진을 가르쳐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청혼을 거절했고, 두 사람은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며 사진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지만 게르타가 공화국의 탱크에 치여 사망했고 그후 그 누구와도 결혼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 외에도 일레인 저스틴(일명 핑키), 윈스턴 처칠의 며느리인 파멜라 처칠, 헤밍웨이의 부인이었던 마사 겔혼[3], 그리고 카사블랑카로 유명한 잉그리드 버그만 등 많은 여자들을 만났다.
2.8.1. 잉그리드 버그만과의 사랑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은 당시 연합군 병사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었고, 군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유럽 순회 위문 공연 중이었다. 파리 리츠 호텔에서 버그만을 본 로버트 카파와 작가 어윈 쇼는 버그만에게 한눈에 반했고, 대담하게도 바로 그녀의 방으로 초대장을 보냈다.주제: 저녁식사, 프랑스 파리, 6일 6시 45분
수신: 잉그리드 버그만
1. 이것은 공동의 노력이다.
2. 우리는 오늘 저녁 당신을 초대하는 이 초대장과 함께 꽃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의논해본 결과, 꽃값이나 저녁식사 비용을 지불할 수는 있으나 그 둘을 모두 지불할 여력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투표를 했고 근소한 차이로 저녁식사가 선정됐다.
3. 저녁식사 생각이 없으면 꽃을 보낼 수도 있다는 제안이 있었다. 이 안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4. 꽃 말고도 우리에게는 어정쩡한 재료들이 많다.
5. 우리의 매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더 자세히 쓰면 정작 해야 할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것이다.
6. 우리는 6시 15분에 당신에게 전화를 할 것이다.
7. 우리는 잠을 자지 않는다.
- 로버트 카파와 어윈 쇼가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보낸 초대장
수신: 잉그리드 버그만
1. 이것은 공동의 노력이다.
2. 우리는 오늘 저녁 당신을 초대하는 이 초대장과 함께 꽃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의논해본 결과, 꽃값이나 저녁식사 비용을 지불할 수는 있으나 그 둘을 모두 지불할 여력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투표를 했고 근소한 차이로 저녁식사가 선정됐다.
3. 저녁식사 생각이 없으면 꽃을 보낼 수도 있다는 제안이 있었다. 이 안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4. 꽃 말고도 우리에게는 어정쩡한 재료들이 많다.
5. 우리의 매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더 자세히 쓰면 정작 해야 할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것이다.
6. 우리는 6시 15분에 당신에게 전화를 할 것이다.
7. 우리는 잠을 자지 않는다.
- 로버트 카파와 어윈 쇼가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보낸 초대장
"호텔 방에 앉아 꽃병을 바라보느니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초대를 받아들였다."
- 잉그리드 버그만
- 잉그리드 버그만
"어머니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카파를 만났고, 아주 멋지고 놀라운 그분과 사랑에 빠지게 됐죠."
- 버그만의 딸 이사벨라 로셀리니, < 로버트 카파 다큐멘터리 > 중에서.
- 버그만의 딸 이사벨라 로셀리니, < 로버트 카파 다큐멘터리 > 중에서.
버그만은 그들의 초대에 응했고, 두 젊은 종군기자는 금방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버그만의 두둑한 지갑 덕분에 바에서 나이트클럽으로 옮기며 파리의 밤을 달구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버그만은 영화 촬영을 위해 할리우드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후 카파는 버그만의 청에 못 이겨 잠시동안 할리우드에서 일했다. 카파는 둘의 관계를 들키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했고, 기자들의 눈을 피해 어윈 쇼의 별장에서 만나기도 했다. 또한 버그만이 출연한 알프레드 히치콕[4] 감독의 스릴러 영화 '오명'과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의 비극적인 멜로 영화 '개선문'의 스틸 촬영을 카파가 맡은 이유로, 촬영장에서 만나는 일도 잦았다.
잘생겼고, 유머 감각이 넘치는 유명 인사였던 카파는 할리우드 사교계에 쉽게 발을 붙일 수 있었다. 덕분에 일도 수월했다. 비록 종군 사진기자 출신이었지만, 버그만이 추천한 작가가 스틸 컷을 찍는 데에 반대하는 감독은 없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예측할 수 없었던 전선에서 생생한 현장 사진을 담아냈던 그에게는 잘 짜인 대본처럼 돌아가는 할리우드는 영 매력이 없었다. "할리우드는 내가 발을 들여놓은 곳 중 가장 최악이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카파는 당시의 안정적인 생활을 끔찍해했다. 버그만 역시 자서전을 통해 "카파와의 사랑은 매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버그만은 카파와 결혼할 준비[5]가 되어 있었지만 카파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카파는 버그만의 청혼을 거절[6]하고, 할리우드를 떠나 터키에 터전을 잡고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나섰다. 이후 버그만과 몇 번 조우했지만 결국 자신의 길을 가며 전후(戰後) 구 소련을 촬영하고 대문호 존 스타인벡과 함께 '러시아 기행'을 출간했으며, 국제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을 창설, 그의 사지가 된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까지 떠나게 된다.
3. 기타
국내에 발간된 관련 서적으론 자서전인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와 알렉스 커쇼가 지은 '로버트 카파 : 그는 너무 많은 걸 보았다'가 있다.2022년, 한국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한 창작 뮤지컬 < 카파이즘>이 초연했다. 파리 망명부터 게르타와의 만남, 스페인 내전 종군 취재 및 게르타와의 사별까지를 다루며 주로 젊은 시절 이야기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2인극인 소극장 뮤지컬로 유승현, 안재영, 김준영이 더블캐스팅으로 카파(앙드레)를 맡았으며, 상대역인 게르다 타로는 최연우, 정우연, 김이후가 연기했다.
4. 명언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7]
"스페인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기교가 필요 없다. 카메라를 배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스페인 자체가 사진이고, 당신은 그저 찍기만 하면 된다. 진실이야말로 최선의 사진이며 최대의 프로파간다이다."
- 1937년 스페인 내전 중 뉴욕 월드 텔레그램과의 인터뷰 중
- 1937년 스페인 내전 중 뉴욕 월드 텔레그램과의 인터뷰 중
"전쟁에서는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사랑해야 한다. 어떤 입장에든 있지 않으면 상황을 견뎌낼 수 없다."
[1]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상륙작전이 이루어진 곳들 중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곳이다.
[2]
여담으로 이때 손에 쥐고 있었던 카메라는 Contax II였고, 충격을 받아 멀리 날아간 카메라는
니콘I. 위의 사진도 니콘 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3]
새벽 4시에 호텔방에 같이 있었다고... 카파가 거기에 왜 있었는지는 아직도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4]
후에 히치콕 감독은 제임스 스튜어트와
그레이스 켈리 주연의 '이창'을 찍었는데, 이는 카파와 버그만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다.
[5]
사실 카파와 사랑에 빠졌을 당시 버그만은 혼인한 상태였다. 이후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려 했지만 오히려 카파가 이혼을 말렸다고.
[6]
버그만은 카파가 떠난 후 남편과 이혼하고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재혼했다
[7]
요즘 시대에도 통하는 명언이다.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가까이 가서 찍으면 만족스러울 것이다. 스티븐 맥커리라는 유명한 사진작가도 마지막 필름 한 롤가지고 촬영할 때 주로 가까이 가서 찍거나 아니면 아예 안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