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토프나도누 전투 Битва за Ростов-на-Дону Schlacht von Rostow am Don Battle of Rostov-on-D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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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의 일부 | |||
날짜 | 1941년 11월 초 ~ 12월 초 | ||
장소 | 소련, 로스토프나도누 일대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세묜 티모셴코 |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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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독소전쟁에서 독일의 첫 패배 | ||
피해 | 3만 사상 | 2만 사상 |
1941년 11월 로스토프 일대에서 일어난 전투. 끝없는 질주를 이어가던 독일군이 첫 패배를 당하며, 진격이 중지되었고 이후 모스크바 공방전까지 겹치면서 전선이 고착화 된다.
1. 전투 이전
라스푸티차 때문에 진격에 어려움을 겪는 독일군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와 함께 독소전쟁의 막이 올랐다. 북, 중, 남부 3개 집단군으로 구성된 독일군은 말 그대로 폭풍처럼 소련을 밀어붙였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향해 진격해나갔고 주공인 중부집단군은 경이로운 포위섬멸전을 펼치며 스몰렌스크에서 소련의 3개 야전군을 갈아버리고 50만명의 포로를 잡았고, 민스크 일대에서는 4개 야전군을 소멸시키면서 40만에 육박하는 전력손실을 입히면서 밀어붙였다. 개전 후 가장 전과가 부족했던 남부집단군 또한 우만에서 30만의 소련군 중 대부분을 분쇄하면서 앞으로 진격했다.
결정적으로 스탈린의 고집 때문에 키예프에 70만의 병력이 고립되었고 이들은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집단에 의해 난도질 당하고 사라졌다. 게다가 크림반도에서 마저 스탈린의 아집 때문에 만슈타인의 11군에 의해 13만의 병력이 쓸려나가면서 도네츠크- 돈 강 라인이 개방되면서 크림반도는 독일군의 놀이터가 될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키예프 전역과 크림반도에서의 서전이 마무리되자 남부집단군의 관할은 수미-크라스노그라드-마리우폴 라인으로 정리되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남부집단군은 하르코프를 공격, 점령한다.
그런데 당시 남부집단군은 지칠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6월 작전 개시 이후 끝없이 앞으로 달려나가 수백km를 진격한 현재까지 단 한번도 쉬지 못했다. 더욱이 보급과 충원도 충분히 이뤄지지 못해 공세종말점에 다다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결정적으로 라스푸티차가 절정에 이르면서 진격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당시 남부집단군은 하르코프-도네츠크 서부-타간로그 라인을 담당하면서 전선 형태도 그다지 웃지 못했다.
그런데 OKH는 남부집단군에게 보로실로프그라드, 스탈린그라드, 코카서스를 먹으라는, 말도 안되는 지시를 하달한다. 사령관 룬트슈테트는 이것이 히틀러의 지시임을 직감하고, 어쩔 수 없이 전진에 나섰다.
2. 전투 전개
2.1. 제1기갑군의 전진, 소련의 대응
룬트슈테트는 로스토프 방면으로 전진할 구상을 했다. 로스토프는 당시 소련의 젖줄인 코카서스 일대의 자원이 지나는 통로로써 이곳이 막히면 소련은 굶어 죽을 수 있었다. 룬트슈테트는 집단군의 선봉인 제1기갑군을 이곳으로 보냈다. 하지만 제1기갑군은 제대로 쉬지 못한데다 보급마저 부실했다. 더욱이 라스푸티차의 존재는 기갑군 운용을 어렵게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총통의 명령은 지엄했고 결국 제1기갑군은 로스토프로 향한다. 소련은 이를 막기위해 다 망가진 남부전선군을 부랴부랴 재건시켜 전선에 재배치시키는 한편, 새로 창설한 56군과 키예프에서 박살났던 37군까지 이곳에 투입했다.
독일 제1기갑군은 노보샤틴스크로 향한 제14장갑군단이 간신히 진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스푸티차가 심화되면서 전차와 차량의 바퀴는 빙빙 헛돌기만 했고 진격 속도가 다 죽어버렸다. 다행히 11월 중순 한파로 땅이 굳으면서 전진할 수 있었지만, 한파가 왔다는 것은 지옥의 러시아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했다. 결국 기갑군 사령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빨리빨리 나서서 로스토프 외곽을 둘러싸기로 한다. 이후 17일까지 제1기갑군은 250km를 전진했다.
이때 소련 남서전역 사령관 티모셴코는 제1기갑군만 날뛰고 나머지 남부집단군은 드러누웠음을 알게된다. 이에 티모셴코는 제37, 56군을 전방 배치하는 한편 나머지 남부전선군을 정비하면서 반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17일, 제1기갑군의 북쪽 날개가 완전히 노출되었고 티모셴코는 남부전선군을 동원해 날개쪽을 때려버린다. 독일 제4항공군은 남부전선군과 소련 공군의 공격에서 1기갑군을 훌륭히 방어해냈지만, 마리우폴과 타간로그의 보급기지까지는 지키지 못했다. 결국 독일 제14장갑군단과 제49산악군단의 진격은 멈추고 말았다. 제3장갑군단만이 간신히 전진해 로스토프로 진입, 돈 강 하구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2.2. 히틀러의 고집, 독일의 후퇴
하지만 이미 사방에 소련군이 모여들고 있어 언제 로스토프가 뚫릴지 모를 상황이었기에 룬트슈테트는 심각하게 후퇴를 고민했다. 그런데 베를린에서 등따뜻하고 배불렀던 히틀러는 로스토프 점령에 크게 고무되어 OKH를 통해 마이코프로 계속 진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하지만 소련군의 반격은 이어지고 있었고 도심 점령지로 향한 독일군의 보급은 완전히 차단되다시피 하였다. 클라이스트는 만일을 대비하여 제3장갑군단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일단 좌측에 있던 제14장갑군단을 뒤로 후퇴시켰다.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빡쳐서 길길이 날뛰었다. 룬트슈테트는 그런 히틀러를 설득하려 했지만 히틀러는 공중 보급 줄테니 버티라는 명령만 반복했다.
그 사이 소련 제56군은 돈 강을 건너 로스토프 남부로 치고 들어왔다. 물량에서 현저히 밀린 독일군은 점차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결국 28일 클라이스트는 히틀러의 명령을 상큼히 무시하고 직권으로 철수를 지시했다. 제3장갑군단이 탈출하자 나머지 기갑군 또한 후퇴했다. 소련의 추격이 계속되자 룬트슈테트는 클라이스트에게 제1기갑군을 안전지대인 미우스 강까지 완전히 후퇴하도록 조치하였다. 놀란 히틀러는 즉시 현지를 사수할 것을 명령했지만, 룬트슈테트는 이를 씹고 사령관직에서 사퇴하는 것으로 항명했다.
빡친 히틀러는 남부집단군 소속 6군을 이끈 발터 폰 라이헤나우에게 집단군 사령관직을 겸임시키는 한편 조인트를 까기 위해 친히 마리우폴까지 날아갔다. 하지만 라이헤나우와 현장을 직접 겪은 제1친위사단 지휘관 제프 디트리히의 보고를 받고 정신을 차려, 미우스 강을 경계로 전선 구축 후 부대를 재편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전투는 종료되었다.
3. 결과 및 의의
로스토프 전투는 소련이 승리하였지만 단지 공간을 탈환하였을 뿐이지 독일군을 궤멸시키거나 격파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줄곧 때리던 독일이 지쳐서 더 이상 싸우기 어려워 스스로 물러난 것이었다. 하지만 로스토프 전투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 소련이 거둔 최초의 전략적 승리였다. 계속된 참패로 사기가 떨어졌던 지도부는 물론 소련군과 인민에게도 커다란 용기를 심어주었다. 특히 당시는 모스크바를 사수하기 위해 동부전선 중앙부가 거대하게 불타오르고 있던 시점이라서 전쟁에 끼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반면 독일에게는 암울한 미래의 시작이었다. 개전 후 독일은 막대한 소련 땅을 점령하고 400만에 육박하는 소련군을 붕괴시켰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몰려드는 소련군 때문에 전쟁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소련이 반격에 성공하면서 언제까지 싸움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