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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7 08:25:23

타란토 공습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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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토 공습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nte_di_Cavour_Taranto_1940.jpg
좌초한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 콘테 디 카보우르
명칭 영어: Battle of Taranto
이탈리아어: Notte di Taranto
날짜 1940년 11월 11일
장소 이탈리아, 아풀리아 타란토
교전국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이탈리아 왕국|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지휘관
파일:영국 국기.svg 앤드루 커닝엄
파일:영국 국기.svg 럼리 라이스터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니고 캄피오니
전력
항공모함 1척[1]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4척
뇌격기 21기
전함 6척[2]
중순양함 7척
경순양함 7척
구축함 13척
결과
영국 해군의 승리, 하지만 이탈리아 해군 무력화에는 실패
피해규모
전사 2명
포로 2명
뇌격기 2기 격추
전사 59명[3]
부상 600명
전함 3척 무력화[4]
중순양함 1척 손상
구축함 2척 손상
전투기 2기 파괴
1. 개요2. 배경3. 과정
3.1. 양측의 상황3.2. 작전 계획 수립 및 공습 준비3.3. 타란토 공습3.4. 공습 결과
4. 이후5. 결과
5.1. 공습 자체는 성공!5.2. 반쪽짜리 승리
6. 매체에서의 모습7.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1940년 11월 11일 영국 해군 이탈리아 해군의 모항이었던 타란토에 공습을 가한 전투이다.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퓨리어스가 1918년 7월 19일에 감행한 톤더른 공습의 확장판이며, 역사상 최초로 항공기와 전함이 맞붙은 사건이었다.

타란토 공습은 항공어뢰를 사용한 공습이 전함을 상대로 대단히 유효함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손상을 입은 전함들을 빠르게 복구시켰고, 얼마 안 가 영국 역시 이탈리아의 인간어뢰 공격으로 전함 2척이 대파되는 피해를 입으면서 정작 이 공습 자체는 전쟁에서 그리 큰 전략적 의의는 가지지 못했다.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지중해에서는 영국 해군 지중해함대, 프랑스 해군 지중해함대, 이탈리아 해군 3강 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 1940년 6월 프랑스 전투가 끝나면서 이 구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독일이 서유럽을 거의 석권하여 영국 본토가 침공 위험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영국 본토 해역 함대가 지중해 함대를 증원하기 곤란한 상황이 닥쳐왔다. 게다가 유사시 지중해에서 영국과 협력하며 이탈리아를 견제할 수도 있었던 프랑스 해군마저 독일에 항복하면서 영국의 지중해 함대가 이탈리아 해군에 대해 전력의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마침내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가 추축국에 가담하여 영국에 선전포고를 해왔다. 당시 이탈리아 해군은 전함 6척[5], 순양함 21척, 구축함 52척, 잠수함 106척 등을 보유하여, 앤드루 커닝엄 제독의 영국 지중해 함대(전함 4척, 항모 1척, 순양함 9척, 구축함 25척, 잠수함 10척)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

당시 이집트의 영국군은 전적으로 바다를 이용한 보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몰타섬을 둘러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오는 해로가 최단 거리의 보급로였다. 대안으로 희망봉을 경유하면서 아프리카 대륙을 한 바퀴 도는 항로도 있었지만 이 경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효과적인 보급이 어려웠다. 그 때문에 아주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지브롤터 ↔ 몰타 ↔ 알렉산드리아로 이어지는 항로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중해 항로를 수호해야 할 영국 해군은 상대인 이탈리아 해군에 비해 수적 열세에 몰렸을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 및 몰타 섬을 중간에 두고 지브롤터와 알렉산드리아 양쪽의 세력이 분리되어 서로 작전 협조가 어려운 상태였다. 또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서 불과 8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몰타 기지의 영국군은 오직 구축함1척, 잠수함6척, 대공포42문과 전투기12대만을 보유했을 뿐이었고, 따라서 예상되는 이탈리아 해공군의 집중 공격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저항력을 결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이탈리아군이 함대를 투입하여 깽판이라도 부리는 날에는 몰타 기지는 물론 이집트 주둔 영국군에게까지 위기에 처할 상황이었다.

3. 과정

3.1. 양측의 상황

파일:external/www.geocities.ws/mussolini_fleet.jpg
함대를 사열하는 베니토 무솔리니.

당시 이탈리아 해군의 전력은 전함이 6척[6], 중순양함이 무려 8척[7]으로, 정면 결전을 펼칠 경우 영국 지중해 함대까지도 압도할 정도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리비아 주둔 이탈리아 육군은 아직 물자와 장비 양면에서 적절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고, 특히 무솔리니의 이집트 침공 준비를 위해 추가적인 대규모 보급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이탈리아 해군은 당분간 리비아의 트리폴리와 벵가지 행 보급선단의 호위에만 전념해야 했다. 그런데 마침 알렉산드리아 주둔 영국 지중해 함대도 몰타 기지의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기 위한 호송 선단을 호위하여 서로 진로가 엇갈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1940년 7월 9일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 반도 근해에서 푼타 스틸로 전투(Battle of Punta Stilo, 영국 측 기록)- 칼라브리아 해전(Battle of Calabria, 이탈리아 측 기록)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전투 자체는 양측이 수송선단을 호위하고 각각의 목적지로 가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사건이었지만, 이탈리아 공군 폭격기 72대가 투입되고 순양함과 전함들이 서로 포격을 교환하는 등 대규모 해전으로 발전했다. 이탈리아는 전함 줄리오 체사레(Giulio Cesare) 소파, 중순양함 볼차노(Bolzano)가 대파되었으며, 영국은 경순양함 넵튠(HMS Neptune), 글로스터(HMS Gloucester), 구축함 헤리워드(HMS Hereward), 디코이(Decoy)가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전함 줄리오 체사레와 영국 전함 워스파이트는 서로 역사상 최장거리의 포격전 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26,000야드(24km) 거리에서 줄리오 체사레가 워스파이트를 상대로 지근탄 2발을 내고, 워스파이트의 15인치 포탄1발이 줄리오 체사레의 후방 갑판에 명중했다.

이후에도 이탈리아 해군은 리비아의 자군에게, 영국 해군은 몰타 기지를 위한 재보급에 집중하면서 가끔씩 조우전이 발생할 뿐이었다. 그러나 본토에 안전한 항구 타란토를 보유한 이탈리아와 달리, 영국 측은 알렉산드리아 해군 기지 자체가 이탈리아 육군의 침공 위협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영국 지중해 함대에게 더욱 불리한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의 주력 함대(전함 6척, 중순양함 7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8척)가 집중 배치되어 있는 타란토 항을 직접 공격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타란토 항은 대공포101문, 기관총 193정의 막강한 화력을 위시하여, 서치라이트22대, 저공 비행하는 항공기의 기습을 저지하기 위한 방공기구(barrage balloon) 87대, 어뢰 공격을 막기 위한 대어뢰 저지용 그물망 4.2km등이 설치되어 있는 등, 이탈리아 해군 나름대로 철저한 방호책을 강구해둔 상태였다.[8]

3.2. 작전 계획 수립 및 공습 준비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ROYAL%20NAVY%20Illustrious-prewar%20view,%20Swordfish%20biplane%20torpedo-aircraft%20on%20flight%20deck.jpg
1938년 뮌헨 위기 당시 이탈리아 해군에 의해 영국 해군 항모의 생존이 위협받을 가능성을 우려한 지중해 함대 사령관 해군 대장 더들리 파운드 제독이 대책을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림에 따라, 지중해 함대의 항공모함 글로리어스 전단장 리스터 소장(Sir Arthur Lumley Lyster)이 이러한 상황에 대비한 해법을 제시한 바 있었다. 바로 항공모함의 함재기 소드피시를 이용하여 야간에 뇌격을 가하고 함재기를 수용한 후에 전속력으로 후퇴하는 기습작전이었다.[9] 파운드 제독은 이 조언을 받아들이고 1939년에 후임으로 부임한 지중해 함대 사령관 앤드루 커닝엄 제독에게 전언하여, 저지먼트Judgment 작전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게 되었다.[10]

그리고 프랑스의 몰락과 더불어 프랑스의 해군이 동맹군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저지먼트(Judgment) 작전이 필요하게 되었다. 작전에 나설 항모로는 다소 낡았지만 함재기가 모두 소드피시로 구성된 항모 이글(HMS Eagle)이 선택되었다. 그러나 확정적인 계획은 9월 16일 이탈리아 육군이 시디 바라니(Sidi Barrani)에서 정지하여 영국 지중해 함대에게 운신의 자유가 확보된 후에나 작성될 수 있었다.

당초 작전은 10월 21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소드피시의 화재 사고가 번져 항모 이글의 연료 시스템까지 파손되는 재난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작전 시행일이 11월 11일로 연기되었을 뿐 아니라, 항모 이글이 작전 참가를 포기하고 항모 일러스트리어스에게 소드피시 5대를 인계하여, 항모 일러스트리어스(HMS Illustrious) 전단(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이 호위)이 공습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작전 계획에 따라 몰타 섬에서 마틴 메릴랜드 폭격기를 동원하여 타란토에 대한 사전정찰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일러스트리어스 호의 정보 장교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방공 기구(barrage balloon)를 발견하여, 공격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이 무렵 이탈리아 측도 영국측 정찰 비행을 목격하고 경보를 울렸으나, 이탈리아군은 레이더를 보유하지 않아 공습에 사전 대비를 갖출 시간 여유를 갖지 못했다. 또한 영국 해군이 타란토 공습과 동시에 MB8 작전을 실행하면서 몰타로 대규모 함대가 호위하는 호송선단을 파견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측은 평상시의 호송 작전이 진행 중일 뿐이라고 단정짓고 말았다.

3.3. 타란토 공습

파일:external/www.directart.co.uk/dhm2174.jpg
작전 계획에 따라 1940년 11월 11일 밤 9시에 일러스트리어스에서 윌리엄슨(M.W. Williamson) 해군 중령이 이끄는 815비행중대의 소드피시12대가 출격하였다. 6대가 대함공격용 어뢰를 장착하였고, 나머지 6대는 폭탄을 장착한 상태였다.

그리고 1시간 30분 뒤에 819비행중대의 소드피시 9대가 2차 공격대로 출격하였다. 4대는 폭탄을, 5대는 어뢰를 탑재한 상태였다.

1차 공격대는 밤10시 58분에 타란토에 도착하였으며, 플레어를 투하하고 유류저장탱크에 급강하폭격을 가하는 것으로 공습을 시작하였다. 곧 윌리엄슨의 편대가 전함 콘테 디 카보우르(Conte di Cavour)에 어뢰를 명중시켜 흘수선 아래 측면에 직경 8.2미터의 구멍을 뚫었다. 윌리엄슨 중령은 즉시 이탈리아측 대공포에 격추당했고 탑승원 2명 모두 포로가 되었다. 뒤이은 편대는 전함 리토리오(Littorio)에 어뢰 2발을 명중시키고, 순양함 2척에 폭탄을 명중시켰다.

이어서 헤일(J.W.Hale) 해군 중령이 이끄는 2차 공격대가 진입하여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어뢰1발이 전함 리토리오에 명중했다. 한 소드피시는 대공포에 2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함 비토리오 베네토(Vittorio Veneto)에 어뢰를 겨냥했으나 빗나가고 말았다. 다른 소드피시는 전함 카이오 두일리오(Caio Duilio)에 어뢰를 명중시켜 선체에 큰 구멍을 뚫고 전방 화약고를 침수시켰다. 그러나 베일리(G.W.L.A.Bayly) 해군 대위의 소드피시가 중순양함의 대공포탄에 맞아 격추당하여 탑승원 2명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15분 늦게 도착한 마지막 공격기는 순양함에 급강하 폭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한 뒤, 새벽 2시39분 일러스트리어스 호에 안전하게 도착했다.[11]

이탈리아 군의 입장에서 평가하면, 타란토의 막강한 대공포대는 공습 도중 총 13,489발의 대공포탄을 퍼부었고, 여기에 함선들도 수천 발의 대공포탄을 추가하여 막강한 탄막을 형성했다. 그러나 방공기구 87대 중 60대는 전날 불어닥친 강풍으로 날아가버린 상태였으며, 어뢰 방지용 그물을 12.8km에 걸쳐 설치해야 완전한 방호가 가능하지만, 4.2km만 설치하는 등 어뢰에 대한 방호책에서 헛점이 존재했다. 또한 일러스트리어스 함장 데니스 보이드(Denis Boyd)는 "2회에 걸친 공습 중 적군이 서치라이트를 전혀 쓰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라는 보고를 올렸다. 이탈리아가 서치라이트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를 추정해 보자면 서치라이트를 쓰면 자신들의 위치가 더 쉽게 발각될 수 있다는 단점때문에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등화관제가 왜 있는지 생각해보면 꽤나 그럴싸한 이유. 하지만 문제는 영국은 항구안에 있는 배를 공격하러 온 것이라 찾는게 크게 어렵지 않았다(...)

3.4. 공습 결과

4. 이후

항구의 착저한 이탈리아 전함 2척(카이오 두얼리오, 리토리오)는 반년에 걸쳐 수리되었고 1척(콘테 디 카보우로)은 끝내 복귀하지 못했다. 그리고 공습 다음 날 이탈리아 해군은 피해를 입지 않은 함선을 좀 더 안전한 나폴리 항으로 이동시켰다.

5. 결과

5.1. 공습 자체는 성공!

하룻밤 사이에 영국이 뇌격기 2기를 잃는 동안 이탈리아 해군은 전함 3척을 잃었고, 일시적으로 영국의 지중해 함대 쪽으로 세력 균형이 이동했다. 덕분에 영국 해군은 이탈리아의 주력함대에 대비해서 단일 부대를 편성하여 뭉쳐다녀야 했던 처지에서 벗어나 각각 항모 1척, 전함 2척으로 구성된 2개 전투단을 구성하여 좀 더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영국은 공습 바로 다음날인 11월 12일, 경순양함 3척과 구축함 2척으로 이루어진 X 함대를 주축으로 호위전력이 마비된 이탈리아 수송대를 기습, 상선 4척을 가라앉히고 어뢰함 1척에 손상을 입히는 전공을 세웠다.(오타란토 해협 해전)

5.2. 반쪽짜리 승리

그러나 영국 해군은 당초 기대했던 목표, "이탈리아 해군의 활동 위축"을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다.[12] 대표적으로 타란토 공습 이후 불과 5일 만에 이탈리아 해군의 노련한 제독 이니고 캄피오니(Campioni) 제독이 전함 2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4척의 대함대를 꾸려 출격. 몰타행 영국 호송선단을 방해하는데 성공했다.(스파르티벤토곶 해전) 결과적으로 타란토 공습은 추축국의 아프리카 호송선단 저지 임무에도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탈리아는 리비아 행 호송선단을 증가시켰다.[13]

또한 이탈리아는 1년 뒤 이탈리아 해군 잠수정 쉬레(Scire)에 탑승한 제10강습부대가 알렉산드리아 해군 기지에 침투하여 영국 지중해 함대의 전함 퀸 엘리자베스(HMS Queen Elizabeth)와 밸리언트(HMS Valiant)를 대파하여 복수를 성공한다. 이게 바로 인간어뢰 작전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습격 사건이다. 이후 두 전함은 각각 9달, 6달씩 전투불능에 빠지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영국군은 타란토 공습의 실패보다 이 알렉산드리아 습격(Raid on Alexandria)가 더 뼈아프다고 보았다. 비록 타란토에서 이탈리아 전함을 주저앉게 만들었지만 자신들의 전함도 똑같이 무력화되면 전략적 우위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실제 타란토 공습 이후 이탈리아는 패기 넘치게 계속 북아프리카 전선에 대한 보급을 하면서도 몰타섬으로 가는 영국 수송선단을 잡아내기도 하는 여유있는 척을 했지만, 반대로 영국은 항구에서 무력화된 전함 2척이 멀쩡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14]

결국 이탈리아가 항복할 때까지 영국은 지중해 전체의 제해권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그나마 1941년 마타판곶 해전에서 중순양함 3척과 구축함 2척을 거의 손실없이 잡는 대승을 거두면서 2개월 정도의 평화(?)를 얻긴 하였다. 하지만 그 직후 크레타 섬 전투 북아프리카 전역, 몰타 항공전을 통해 독일군이 개입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고, 이탈리아 해군도 자국 공군과 독일군과 협력하여 영국군의 호송 작전을 다시 방해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영국 해군 당국은 타란토 공습이 지중해에서 이탈리아 해군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녹아웃을 먹이는데는 실패했다고 평가한다.[15] 그리고 1년 뒤, 영국 해군은 Z 함대를 싱가포르에 보내기 위해 함대를 구성하면서, 타란토 공습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탓에 지중해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할 수 없어 처칠의 안을 수용하고, 이로 인하여 영국 해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 중 하나인 말레이 해전이 벌어진다. 이에 격분한 영국 수뇌부는 지중해 항로를 다시 열기 위해 몰타를 사수하라고 지시하였고, 제 3차 몰타 항공전의 막이 열리게 된다. 그리고 처칠은 3차 몰타 항공전 내내 북아프리카에서 방어전을 고수하던 오킨렉을 잘라버리고[16] 해롤드 알렉산더와 버나드 몽고메리를 부임시킨다.[17]

기술적인 관점에서 보면, 타란토 공습 이전 항공 어뢰 전문가들은 적어도 수심 23미터가 확보되어야 선박에 대한 어뢰 공격이 가능하다고 평가했었다. 타란토 항구의 수심은 12미터에 불과했으나, 영국 해군은 어뢰가 지나치게 잠수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후 일본 제국 해군은 타란토 공습을 면밀히 연구해서 이듬해 미 해군을 겨냥한 진주만 공습에 백분 활용했다. 특히 어뢰가 과도하게 잠수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나 미국 해군의 예상 출격범위 밖에서 출격을 감행한 것 등등. 다만 진주만 공습은 미군의 삽질도 어느정도 적용했다. 문서 참조.

6. 매체에서의 모습

7. 같이 보기


[1]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 [2] 리토리오, 비토리오 베네토, 콘데 디 카보우르, 줄리오 체자레, 카이오 두일리오, 안드레아 도리아. [3] 전사자 중 27명은 콘테 디 카보우로에서 나왔고 나머지 32명은 리토리오에서 나왔다. [4] 콘테 디 카보우르는 착저, 카이오 두일리오는 좌초, 리토리오는 선수부분만 착저. 이 중 카이오 두일리오와 리토리오는 수리 후 현역에 복귀하나 손상이 심했던 콘테 디 카보우르는 이탈리아 항복 전까지 수리되지 못하고 영구적으로 현역에서 제외되었다. [5] 카보우르급 2척, 카이오 두일리오급 2척, 리토리오급 2척. 3번함 로마와 4번함 임페로는 아직 한창 건조중이었다. [6] 콘테 디 카보우르급 2척, 카이오 두일리오급 2척, 리토리오급 2척. 리토리오급 3번함 로마는 1940년 시점에서는 미완공이었으므로 제외. [7] 트렌토급 3척, 차라급 4척, 그리고 구식 방호순양함이기는 하지만 체급상 중순양함인 산 조르지오급 1척. [8] Santoni, Alberto (November 1990), "L'attacco inglese a Taranto" The English attack on Taranto, Rivista Italiana di Difesa (in Italian): 88–95 [9] 타격력의 주력은 뇌격기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영국해군이 운용하던 뇌격기는 페어리 소드피시 복엽기인데다가 순항속도가 200km가 안될 정도로 느린 기체라서 낮에 투입했다가는 죄다 털릴 것이 자명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야간공습으로 작전을 결정하였으며, 혹시 있을 정찰을 고려하여 이탈리아 공군의 활동범위 밖에서 출격하는 계획을 입안하였다. [10] Stephen, Martin (1988). Grove, Eric, ed. Sea Battles in Close-up: World War 2. Volume 1. Shepperton, Surrey: Ian Allanm. pp. 34–38. [11] Sturtivant, Ray (1990). British naval aviation: the Fleet Air Arm 1917–1990. London: Arms & Armour Press. pp. 48–50 [12]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비록 전함 3척이 날라갔다고는 해도 전함은 아직 3척이 남았고 무엇보다 중순양함이 6척이나 살아있었기에 이탈리아 해군의 활동은 그다지 위축되지 않았다. [13] Bragadin, Italian Navy in World War II, p. 356. [14] 다만 이탈리아는 바로 위의 본토에서 수리하면 되지만 영국은 일단 지중해에서 벗어나 수리를 해야하니 상황이 같다고 볼 수 없긴 하다. [15] Caravaggio, A.N, Lieutenant Colonel, 'THE ATTACK AT TARANTO: Tactical Success, Operational Failure', Naval War College Review, 1997. [16] 군인으로서는 좋은 판단이었을지 모르나, 지중해 항로를 다시 열어야하는 전시 내각 입장에서는 복장이 터질 일이었다. [17] 그리고 처칠이 깨달은 것은 몽고메리 또한 오킨렉 못지 않은 옹고집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