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 작전 러시아어: Операция «Кольцо» 독일어: Operation Kolzo 영어: Operation Ring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의 일부 청색 상황 중 스탈린그라드 전투 의 일부 |
||
▲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독일 6군[1] | ||
날짜 | ||
1943년 1월 10일 ~ 1943년 2월 2일 | ||
장소 | ||
소련 스탈린그라드 | ||
교전국 | 소련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루마니아 왕국 |
지휘관 |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돈 전선군 사령관) 표도르 톨부힌 (제57군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 (제62군 사령관) 파벨 바토프 (제65군 사령관) |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제6군 사령관) 한스 발렌틴 후베 (제14기갑군단 사령관) 에르빈 야넥케 (제4군단 사령관) |
결과 | ||
독일 6군의 전멸 | ||
영향 | ||
스탈린그라드 전투 종료 | ||
병력 |
병력 282,000명 포 7,300문 전차 260대 항공기 300기 |
병력 250,000명 포 4,100문 전차 300대 항공기 100기 |
피해 규모 |
전사/실종 25,727명 부상 78,240명 |
전사/실종 147,000명 포로 91,000명 |
[clearfix]
1. 개요
콜초 작전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마지막 단계로 스탈린그라드 도심에 갇혀있는 독일 제6군을 소련 돈 전선군이 포위 섬멸하는데 성공하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마무리되었다.2. 1943년 겨울의 스탈린그라드 전선
겨울폭풍 작전이 소토성 작전으로 인해 실패하고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6군 구출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남부 전선의 무게추는 소련군에게로 완전히 넘어갔다. 그렇지만 아무 의미 없는 6군 포위를 위해 7개의 야전군이 스탈린그라드에 묶여 있었으며 비록 토성 작전 자체는 실패했지만 차후 공세를 이어나기기 위해 소련군은 6군을 정리하고 돈 전선군을 하리코프 방면 공세에 투입하기로 했다.3. 전투 서열[2]
3.1. 독일군
-
B 집단군 ( 사령관 :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상급대장[3]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6군 ( 사령관 :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상급대장[4]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예비
- 제14기갑군단 ( 사령관 : 한스 발렌틴 후베 기갑대장[5] )
- 제3차량화보병사단
- 제29차량화보병사단
- 제8군단 ( 사령관 : 발터 하이츠 포병대장[6] )
- 제44보병사단
- 제384보병사단
- 제376보병사단
- 제76보병사단
- 제113보병사단
- 제51군단
- 제389보병사단
- 제305보병사단
- 제79보병사단
- 제100보병사단
- 제295보병사단
- 제71보병사단
- 제11군단 ( 사령관 : 카를 스트레커 보병대장 )
- 제60차량화보병사단
- 제16기갑사단
- 제24기갑사단
- 제94보병사단
- 제4군단 ( 사령관 : 에르빈 야넥케 공병대장[7] )
- 제371보병사단
- 제297보병사단
- 루마니아 제20보병사단
}}}
}}}
3.2. 소련군
-
돈 전선군 ( 사령관 :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중장[8]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전선군 직할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19중포병사단
-
제121전차여단
}}} -
제21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51근위소총사단
- 제52근위소총사단
- 제96소총사단
- 제120소총사단
- 제252소총사단
- 제277소총사단
- 제293소총사단
- 제298소총사단
- 제4포병사단
- 제1대공포사단
-
제17근위박격포여단
}}} -
제24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49소총사단
- 제84소총사단
- 제260소총사단
-
제273소총사단
}}} -
제57군 ( 사령관 :
표도르 톨부힌 소장[9]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15근위소총사단
- 제38소총사단
- 제422소총사단
- 제235전차여단
-
제254전차여단
}}} -
제62군 ( 사령관 :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13근위소총사단
- 제39근위소총사단
- 제45소총사단
- 제95소총사단
- 제138소총사단
- 제284소총사단
- 제92소총여단
- 제124소총여단
-
제149소총여단
}}} -
제64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7소총군단
- 제93소총여단
- 제96소총여단
- 제97소총여단
- 제29소총사단
- 제157소총사단
- 제169소총사단
- 제204소총사단
- 제36근위소총여단
- 제143소총여단
- 제66해병소총여단
- 제154해병소총여단
- 제90전차여단
-
제38차량화소총여단
}}} -
제65군 ( 사령관 :
파벨 바토프 중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27근위소총사단
- 제23소총사단
- 제24소총사단
- 제173소총사단
- 제214소총사단
- 제233소총사단
- 제304소총사단
- 제1포병사단
- 제4포병사단
- 제18대공포사단
-
제91전차여단
}}} -
제66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64소총사단
- 제99소총사단
- 제116소총사단
- 제226소총사단
- 제299소총사단
-
제343소총사단
}}} -
제16항공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2폭격항공군단
- 제223폭격항공사단
- 제285폭격항공사단
- 제220전투항공사단
- 제283전투항공사단
- 제228돌격항공사단
-
제271야간폭격항공사단
}}}
}}}
4. 전개
1월 9일에 파울루스가 로코솝스키의 최후 통첩을 거부하자 10일에 소련군의 마지막 공세가 시작됐다. 공세는 서쪽의 65군, 21군, 57군으로부터 시작됐으며 첫 날에 거의 전진하지 못했음에도 독일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2일에 14기갑군단은 동쪽의 로소시카 강까지 후퇴해 새로운 방어선에서 적을 막았으나 북쪽에서 24군이, 남쪽에서 64군이 공세를 시작하자 16일에 피톰니크 비행장을 잃었고 17일이 되자 포위망의 서쪽 절반이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 시점에서 소련군은 공세를 잠시 멈추고 5일간 재편을 실시했다. 콜초 작전은 원래 1주일 길이의 계획이었으나 여전히 포위망 동쪽 절반에서 독일군은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공세가 지지부진한 이유로는 약 8만명 정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련군의 예상과 달리 독일군은 20만 명이 넘었으며 기갑 전력이 서쪽에서의 공세를 위해 남서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에 집중되어 보병만으로 공세를 이어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재편을 마친 소련군은 22일에 다시 한번 항복을 권유했으나 히틀러의 불허로 파울루스는 또다시 항복을 거부했다. 공세가 재개된 22일에 굼라크 비행장이 함락되면서 독일군에게는 이제 스탈린그라드 비행학교 임시 비행장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23일에 마지막 비행 이후 25일에 이 비행장도 소련군에게 넘어갔고 26일에 마마이 언덕에서 서쪽의 21군과 동쪽의 62군이 만나면서 포위망은 남북의 둘로 나눠졌다. 북쪽에는 11군단과 8군단, 51군단이 있었고 지휘권은 11군단 사령관 카를 스트레커 보병대장에게 넘어갔다. 남쪽에는 6군 사령부와 14기갑군단, 그리고 거의 괴멸된 4군단이 있었다. 28일에 북쪽 그룹은 또다시 둘로 나눠져 이제 포위망은 3개가 되었으며 남쪽 그룹의 14기갑군단과 6군 사령부를 지휘하던 파울루스는 30일에 원수로 진급했으나 31일에 사령부가 함락당하면서 항복했고 중부 그룹의 8군단과 51군단을 이끌던 8군단 사령관 발터 하이츠 포병대장 역시 30일에 상급대장으로 진급했으나 31일에 항복했다. 북쪽의 11군단은 이틀을 더 버텼으나 2월 2일에 항복하면서 작전이 종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