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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의 주요 역임 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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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cc21><colbgcolor=#f0f0f0> 합스부르크 가문
Haus Habs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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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1] | ||
어기[2] | 가문의 문장[3] | |
창립일 | 1020년대 | |
창립자 | 라트보트 폰 클레트가우 | |
現 수장 | 카를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국가 |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공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티롤 후백국 괴르츠 백국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트란실바니아 공국 트란실바니아 대공국 크로아티아 왕국 슬라보니아 왕국 보헤미아 왕국 모라바 변경백국 스페인 왕국 이베리아 연합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크라쿠프 대공국 부코비나 공국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파르마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독일 연방 멕시코 제2제국 불가리아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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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 (종가) |
합스부르크 스페인 압스부르고[4]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로트링겐[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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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가 |
합스부르크토스카나 합스부르크에스테 합스부르크웅가른 합스부르크멕시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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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라틴어) Bella gerant alii, tu felix austria, nube!
( 독일어) Kriege führen mögen andere, du, glückliches Österreich, heirate!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11]
( 독일어) Kriege führen mögen andere, du, glückliches Österreich, heirate!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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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스부르크 및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가 배출한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1910년작)[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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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립 이후 황실 구성원 |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중부유럽의 패권을 휘어잡았던 가문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세습하면서 근세 유럽의 얼마 안되는 황제 가문으로서 최고의 권위와 영예를 누렸다. 19세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칭제 이전까지 유럽에서 황제가 있었던 국가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 오스만 왕조의 오스만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 뿐이었다.[14]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 동맹국으로 참전했다가 패전함으로 인해 제국이 해체되고 본거지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가 지배했던 모든 나라들이 군주제와 귀족제를 폐지함으로써 모든 제위와 왕위를 상실하고 특권이 소멸했지만,[15] 여전히 유럽인의 향수를 자극하는 선망의 명문가다.[16]
합스부르크라는 명칭은 합스부르크 백작위가 대표적인 작위였던 초창기에나 쓰였고, 이후로는 조상의 뿌리를 기억하는 일이 유행한 18세기~ 19세기에나 나타났다. 특히 프리드리히 실러의 유명한 1803년작 역사 담시 합스부르크 백작에 힘입어 널리 통용되었다. 이전에도 합스부르크라는 명칭을 쓰는 가문은 있었지만, 잉글랜드 워릭셔 출신인 덴비의 백작들이 족보를 위조하면서 쓴 명칭에 불과했다. 그 이전까지는 대표 작위가 오스트리아 공국- 오스트리아 대공국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라는 명칭으로 주로 불렸다. 그러나 합스부르크라는 명칭이 안 쓰였다는 것은 아니다.
2. 과거 작위
볼드체는 핵심 작위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독일왕 (1273 ~ 1292, 1298 ~ 1308, 1438 ~ 1806)
- 오스트리아 황제 (1804 ~ 1918)
- 오스트리아 대공 (1453 ~ 1918),[17] 오스트리아 공작 (1278 ~ 1453)
- 슈바벤 공작 (1268 ~ 1313)
-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1278 ~ 1918)
- 케른텐 공작 (1335 ~ 1918)
- 크라인 공작 (1364 ~ 1918)
- 티롤 백작 (1363 ~ 1918)
- 괴르츠 백작 (1500 ~ 1918)
- 보헤미아 국왕 (1306 ~ 1307, 1438 ~ 1439, 1453 ~ 1457, 1526 ~ 1918)
-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 (1437 ~ 1439, 1440 ~ 1457, 1526 ~ 1918)
- 스페인 국왕 (1516 ~ 1700)
- 포르투갈 국왕 (1581 ~ 1640)
- 지벤뷔어겐 공작 및 대공 (1690 ~ 1867)
- 토스카나 대공 (1737 ~ 1801, 1814 ~ 1860)[18]
-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의 왕 (1772 ~ 1918)
- 부코비나 공작 (1775 ~ 1918)
- 모데나 레조 공작 (1814 ~ 1859)[19]
- 달마티아 국왕 (1815 ~ 1918)
- 롬바르디아-베네치아의 왕 (1815 ~ 1866)
- 독일 연방 의장 (1815 ~ 1866)
- 일리리아 국왕 (1816 ~ 1849)
- 멕시코 황제 (1864 ~ 1867)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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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를 요약한 영상[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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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문의 발상지인 스위스 북부 아르가우의 합스부르크 성채 |
3.1. 합스부르크 가문
3.1.1. 시골의 백작 가문에서 제국의 황실로
지금이야 영세 중립국이지만 당시 스위스는 독립된 구심점을 갖지 못하고, 몇몇 유력 가문이 세력권을 다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까지만 해도 알프스산맥 언저리에 웅거하던 시골 귀족 가문이었다.이 중 브라이스가우 백작 군트람에게 아들 로첼린이 있었다. 1020년경 로첼린의 장남으로, 합스부르크 가의 시조인 라트보트(Radbot)가 오늘날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 하비히츠부르크(매의 성)에 기반을 잡고, 성을 쌓은 이후 백작 노릇을 하면서 비로소 합스부르크 가문이 시작되었다. 이 합스부르크 성(Schloss Habsburg)이 바로 가문명의 유래이다.
정확히 라트보트의 작위명은 클레트가우(Klettgau) 백작이었다. 훗날 그의 손자인 오토[21] 가 처음으로 합스부르크 백작을 칭했으며 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위스 아르가우 주를 벗어나 유럽의 패자로 급부상할 계기가 마련된 것은 13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대공위시대(1254~1273)였다. 강력한 위세를 지닌 교황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잇달아 파문을 날려 버리는 상황 속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후사가 끊겼다. 이후 강력한 교황권 및 제후 간의 권력 다툼으로 약 20년간 황제가 선출되지 못하며 대공위 시대의 혼란한 상황이 이어졌다.
대공위(空位) 시대가 이어지며 독일의 정세가 혼란해지자 이제는 교황이 제발 누구든 황제가 되어달라고 애걸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나, 선거권을 가진 제후들은 내가 황제를 하기는 싫지만 남의 세력이 커지는 것도 원치 않았고 이런 와중에 독일계가 아니라 슬라브계인 보헤미아 왕국의 오타카르 2세가 가장 강력한 황제 후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라이벌 가문도 싫고 슬라브인인 오타카르 2세도 싫은 독일귀족들이 타협책으로 일부러 한미한 가문의 가주를 바지사장 삼아 황제로 옹립하려 했는데, 이때 포착된 것이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세력이 한미한 지방 호족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황제 가문으로 고려되지 않았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 4세에겐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의 '대자'라는 배경이 있었으며, 황제선거가 계속해서 난항을 겪자 마인츠 대주교와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의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22]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위를 생각치도 못했던 루돌프 4세는 자신에게 기회가 생기자 작센과 브란덴부르크의 아스카니아 가문, 라인 궁정백령과 상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 등 선거권이 있는 독일 주요 가문들만 골라 기민하게 혼인 동맹을 맺었다. 그 결과 1273년, 루돌프 4세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황제선거에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고,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러 루돌프 1세로 즉위하여 대공위시대가 종식되었다.
생각지도 않게 아르가우 주의 일개 백작에서 독일왕으로 선출된 루돌프 1세는 주어진 기회를 이용할 줄 아는 야심가였다. 왕위에 오른 루돌프 1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가문의 영지를 적극적으로 확장했다. 협소한 스위스 산골짜기를 벗어나 평야지대로 확장을 모색했던 루돌프 1세가 포착한 곳이 오스트리아 공국이었다. 때마침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 공국에서 분리독립한 이래 오스트리아를 통치해왔던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어 공위 시대(1243~1278)의 혼란기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돌프 1세는 독일왕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1278년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라이벌인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의 오타카르 2세에게 승리, 그를 전사시켰고, 오스트리아 공국과 그 형제국인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차지하여 맏아들인 알브레히트에게 주었다.[23]
한편 루돌프 1세가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사이, 1291년 스위스 4개 주가 스위스 동맹을 결성하여 반란(독립 투쟁)을 일으켰다. 결국 1315년 스위스가 독립에 성공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는 오스트리아가 되었다.[24] 루돌프 1세의 사촌들로부터 기원한 분가들은 여전히 스위스 부근에서 활동하였는데, 본가와는 다른 독자노선을 추구하다 15세기 초쯤에 단절되었다.
3.1.2. 권토중래
루돌프 1세 사후 맏아들 알브레히트 1세가 독일 왕위를 차지했지만[25] 알브레히트 1세는 조카 요한 파리키다에게 암살당했다. 요한 파리키다는 동생 루돌프의 아들이자 오타카르 2세의 외손자로, 상속받아야 했던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알브레히트 1세에게 넘겨주었으나 알브레히트 1세가 약속한 보상을 주지 않자 앙심을 품고 큰아버지를 암살했다. 그 대가로 요한은 가문 족보에서 지워졌으며 제국 추방령을 당해 이탈리아 반도를 전전하다 피사에서 객사했다. 알브레히트 1세 사후 14~15세기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유력 가문인 룩셈부르크 가문과 비텔스바흐 가문이 양분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위에서 한동안 배제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공국을 중심으로 그 인근에서의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져가고 있었다.합스부르크 가문은 독특한 전략인 결혼 동맹을 통해 점차적으로 세력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다른 유럽 각국도 결혼 동맹을 세력 강화의 기본 전략으로 활용했지만 합스부르크는 특히나 결혼을 전략적으로 더 잘 활용했다. 특히 1335년에 케른텐 공국과 크라인 공국[26]이 합스부르크의 직할령으로 반환되면서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다. 기존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에다가 케른텐, 현대 슬로베니아의 전신격인 크라인 공국이 더해졌고 1363년에는 티롤 후백국까지 획득하면서 현대 오스트리아 영토의 근간이 완성되었다.[27] 이로써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비롯한 독일 남동부 일대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반으로 자리잡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막강한 제후 세력으로 도약했다.
다만 가문의 세력이 강해진 반면 그 세력이 한데 통일되지는 못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게르만족의 전통적인 분할 상속을 통해 가문의 영지들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분할 상속을 막으려는 시도 자체는 꾸준히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세력을 나눠 받은 같은 가문의 통치자들은 협력하고 단결하기보다는 반목하고 갈등하기를 택했다. 그렇게 가문 내의 불화는 1세기 가량 지속되었고, 1490년 막시밀리안 1세가 오스트리아 전체를 통일할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략 이 상황을 유지했다.[28] 143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이자 헝가리- 크로아티아 국왕이었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가 대를 잇지 못하고 사망하면서[29] 황제의 사위였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5세가 선출되어 1438년 독일왕 알브레히트 2세가 되면서 비로소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알브레히트 2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 제위를 유지했다.[30]
3.1.3. 최전성기
16세기 카를 5세 대에 마침내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패자로 등극했다. 그 기반을 만든 것은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였다. 막시밀리안 1세는 스스로 최초의 '선출황제'(Electus Romanorum Imperator)[31]임을 선언하면서 황제 선출에서 교황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했다. 본토인 오스트리아에서 완전한 기틀을 닦은 막시밀리안 1세는 적극적인 결혼 정책을 펼쳤다.저지대를 보유하게 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부르고뉴 공국, 이제 막 레콩키스타를 완수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한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연합 스페인 왕국, 그리고 동유럽에서 헝가리 왕국과 그 동군연합인 크로아티아 왕국, 슐레지엔을 포함한 보헤미아 왕국 등 막대한 영토를 보유한 야기에우워 가문와의 혼인을 차례로 성사시켰다. 이런 혼인 동맹 이후에 합스부르크 가문에 기적 같은 행운이 일어났는데 이 가문들의 부계가 끊기면서 그 가문들의 영토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대로 인수했다.[32]
15세기 중반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다시 차지하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쾰른 등의 라인강 유역과 특히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알자스 등지에서 팽창 정책을 펼치던 부르고뉴국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였었다. 그러나 부르고뉴 공작이었던 용담공 샤를이 외동딸 마리 드 부르고뉴를 남긴 채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에 부르고뉴국과 같은 발루아 왕조이자 명목상의 종주국이었던 프랑스가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게 부유했던 부르고뉴를 향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는 용담공 샤를이 전사하자마자 남자 계승자가 없다는 이유로 부르고뉴를 침공했으며, 저지대의 백성들을 선동하여 마리 드 부르고뉴를 겐트 성에 가둬버린 후 자신의 7살 난 아들과의 결혼을 강요했다.
부친의 급사 이후 부르고뉴 여공작이 된 마리 드 부르고뉴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부르고뉴를 지켜줄 힘을 가지고 있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결혼했다. 이를 통해 프랑스가 그토록 군침을 흘리며 노리던 북해 연안 17주, 특히 플란데런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을 장악하는 기틀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명군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가 브르타뉴 공국으로 손을 뻗자 브르타뉴 공국의 상속녀인 안 드 브르타뉴과의 정략 결혼을 추진하려 하는 등 서쪽 국경의 판도를 계속 넓혀나갔다. 이 때 합스부르크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라이벌이었던 잉글랜드 왕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 등까지도 안과의 정략결혼을 추진하면서 프랑스를 견제하려 했으나, 안은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을 선택했다. 그러나 동서로 적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경계한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무력으로 브르타뉴를 침공하고 안과 강제로 결혼하면서 결국 브르타뉴 공국은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무엇보다도 결혼 동맹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아들 필리프를 트라스타마라 왕조 카스티야 왕국의 왕녀 후아나 1세와 결혼시켰고, 딸 마르가레테는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과 결혼시키면서 연합 스페인 왕국과의 결혼 동맹을 결성했다. 기존 후계자였던 후안이 사망하면서 스페인은 일차적으로 필리프와 후아나가, 이차적으로는 둘의 장남 카를 5세가 물려받았다.
또 막시밀리안 1세는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야기에우워 왕조와의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오랜시간 공을 들여 결혼 동맹을 성사시켰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438년 룩셈부르크 왕조가 단절되었을 때,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와 함께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왕위도 일시적으로 차지했으나 당시 두 나라의 현지 귀족이 실권을 쥐고 있어 제대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약 2년만에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를 상실했다.[33] 이후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는 야기에우워 왕조가 차지했는데, 결혼동맹의 대가 막시밀리안 1세는 이 야기에우워 왕조 출신의 울라슬로 2세의 딸 언너와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를, 안나의 동생 러요시 2세와 손녀딸 마리아를 결혼시켰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쉴레이만 1세의 침공으로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전사하여 헝가리-크로아티아-보헤미아의 야기에우워 왕조가 갑작스럽게 단절되었고, 두 나라의 왕위는 페르디난트 1세를 통해 사실상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지위가 되었다.[34]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이자 스페인 가톨릭 부부왕의 손자였던 카를 5세는 부모와 조상의 후광, 특히 할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막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 시대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외형상 최전성기를 맞았다. 카를 5세가 통치하게 된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막 통일을 이루고 대서양 무역을 장악하며 신대륙까지 접수에 들어간 강대국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강대국을 둘이나 차지했다.
이 카를 5세 치하의 제국은 이를 저지하려던 발루아 왕조의 프랑스와 맞붙어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이탈리아 반도를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시켰다. 카를 5세에 의해 처참하게 박살난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까지 맞물리며 30년 전쟁으로 부활을 선언할 때까지 100년 동안 유럽 구석에서 버로우하게 된다.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필요에 따라 양측에 적절히 붙고 배신하면서 자국의 안정을 도모했지만 카를 5세는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 허가조차 좌지우지할 만큼 권력이 막강했다.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던 합스부르크의 패권을 새로 위협하기 시작한 두 개의 변수는 바로 종교 개혁과 오스만 제국이었다. 특히 북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짓밟기 위해 스페인군을 독일로 데려온 것이 정치적인 패착이 되었다. 독일인이 주류인 신성 로마 제국의 일에, 동군연합이라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적인 혈연으로 연결되었을지언정 결국은 외국 군대인 스페인군을 개입시킴으로써 독일어권 세력들 간의 연대의식을 방해했음은 물론, 암묵의 룰을 깼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독일의 제후들은 종교와는 별개로 카를 5세에게 깊은 불신을 가졌다. 그 결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계와 오스트리아계로 갈라졌으며 결과적으로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 개혁은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국가화를 가속화시키며 분열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전성기를 맞은 쉴레이만 1세 치하의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왕국을 무너뜨리고 동쪽 국경을 엄습했다. 내전과 1529년의 제1차 빈 공방전으로 말미암아 합스부르크는 광대한 영토 전면에 걸쳐 전선을 확장시켜야 했다.
가히 호사다마라 할 수 있는 최악의 위기였지만 카를 5세는 군제개혁을 통한 전술상의 성공과 신대륙에서 쏟아져 나오는 부, 그리고 그간 다져온 많은 조력자들의 도움을 등에 업고 겨우 가문의 유산을 지켜냈다. 다만 막시밀리안 1세 이래로 추진되어온 합스부르크 가문의 절대왕정 수립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영방 체제가 계속되었다.
3.1.4. 합스부르크 제국의 출범
유럽 전역을 석권했던 카를 5세의 사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본가인 스페인계 합스부르크와 분가인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로 분열되었다. 카를 5세의 작위 중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동생 페르디난트 1세[35]에게, 스페인, 네덜란드 저지대, 이탈리아 반도 영토,[36] 아메리카 대륙, 필리핀 등 나머지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상속되었기 때문이다. 그 외로 선거군주제였던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 역시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어갔는데, 물론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제위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했으나 당시 독일 제후들의 반발로 불가능했다. 자세한 내막은 카를 5세/생애 문서 참조.카를 5세의 뒤를 이은 페르디난트 1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부유한 저지대와 식민지를 물려줬지만, 형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물려받은 페르디난트 1세는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추진했던 결혼 덕분에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37]라는 막대한 영토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페르디난트 1세 이후 오스트리아는 중부유럽의 최강자로 거듭났다.
그러나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에 귀속되었던 저지대 국가는 펠리페 2세의 가톨릭 고집으로 인해 북부 7주인 네덜란드가 1648년 완전히 독립했다. 한편,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남은 오늘날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에 귀속되어 약 1세기 동안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남았다.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를 지키기 위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얻어야 했기 때문에 종교 문제에는 비교적 관대했다.[38] 그러나 개인적인 이유로 루터교회에 관대했던 막시밀리안 2세 이후 후 계 자들은 갈수록 종교 문제에 완고하게 대처했다. 결국 합스부르크 황제들의 비타협적인 종교관은 30년 전쟁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 독일은 인구가 2/3로 급감하고 국토가 황폐화되는 치명상을 입었으며, 종전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북독일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라는 지위는 사실상 명목상의 작위로 전락했다.
3.1.5. 중흥기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흥은 18세기에 찾아왔다. 레오폴트 1세의 헝가리-크로아티아 귀족 탄압으로 인해 합스부르크 가문 지배에 반감을 품었던 퇴쾨이 임레가 오늘날의 슬로바키아인 상 헝가리(Felvidék )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요청으로 오스만 제국군이 대규모로 침공해와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레오폴트 1세는 독일의 영방 제후들과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우군으로 끌어들여 빈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낸 후 퇴각하는 오스만 제국군을 곧장 추격하여 대튀르크 전쟁을 일으켰다. 사부아 공자 외젠의 맹활약으로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오스만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탈환했고 이후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동유럽을 잠식해 들어갔다. 대튀르크 전쟁으로 자신감을 얻은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후에도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을 통해 동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제2차 빈 공방전에서 도움을 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분할해 냠냠하기도 했다.한편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스페인 왕위를 두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이 서로 왕위를 주장하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년~1714년)이 일어났다. 13년에 걸친 전쟁 끝에 부르봉 가문은 스페인 왕위를 따내는 것은 성공했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을 영원히 합칠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과거 한때 스페인령이었던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의 이탈리아 영토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획득했다. 반면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는 이후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1세기간의 길고 느린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다.
대튀르크 전쟁의 후속전으로 치러진 제6차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1716년 ~ 1718년)에서도 오스만 제국에 승리를 거두어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북부 등을 획득했다.
3.2.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렇게 18세기 전반기에 다시 중흥을 맞이하게 되었만 얘기치 못한 것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상기된 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카를 6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여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카를 6세는 살리카법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문을 물려주기 위해 국사조칙을 공표했다. 그러나 본디 계승 서열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우위에 있었던 형 요제프 1세의 딸들과 사위들의 존재 때문에 카를 6세는 주변국에게 많은 이권을 떼주거나 영토를 양보해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 프랑스와 접하고 있던 로렌 공작 프랑수아 에티엔이었기 때문에 특히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반발이 심했고, 결국 카를 6세는 1736년 로렌 공국을 신성 로마 제국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프랑스로 넘겨주었다. 또 1734년 일어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체결된 빈 조약(1738년)에서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위해 주변국들에게 상당 부분을 양보했고 그 결과 토스카나 대공국과 파르마 공국을 획득하는 대신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내주었다.카를 6세가 이렇게 여러 조치를 취해 두었지만, 그가 사망하자 프로이센 왕국 등 주변 여러 세력들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계승을 반대하며 달려들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 바이에른 선제후이자 요제프 1세의 사위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알브레히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카를 7세가 오래지 않아 사망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계속 이어갔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 이후 왕조는 정식으로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라 칭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합스부르크 가문이라고 불렀다. 한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알짜배기 땅이던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에게 빼앗겼다.[39] 이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동맹의 역전이라는 초강수까지 동원하여 노력하였으나 7년 전쟁에서 패배하여 독일 내에서의 패권을 잃었다. 대신 마리아 테레지아의 치세 동안에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등 반항적이었던 동군연합을 평정하고 북쪽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프로이센, 러시아와 함께 분할, 획득하였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프랑스 혁명이 터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실로 혁명 전파를 두려워한 여러 왕정 국가들과 같이 대프랑스 전쟁을 일으켰으나, 혁명 프랑스군의 놀라운 전투력과 때마침 등장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탈탈 털리고 벨기에와 밀라노 공국마저 뺏겨버렸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자 위기에 처한 프란츠 2세는 그동안 동군연합 상태를 유지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출범시키고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과 손잡으며 공동 전선을 결성했으나 치명타를 입고 1806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자체가 해체되었다.
이어지는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까지 깨지면서 유일한 해안 지역인 달마티아를 뺏기고 프란츠 2세의 장녀 마리아 루도비카를 강제로 나폴레옹에게 시집을 보내는 등 굴욕을 맛보다가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으로 몰락하자 재반격에 나서 프랑스를 핀치로 몰아붙였다.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빈 회의에서 티롤, 달마티아 등 잃었던 영토의 상당수를 회복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인 독일 연방의 의장국이자 빈 체제를 주도하였다. 이후 민족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뒤덮으며, 독일 통일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게 되었고 아울러 그동안 합스부르크 제국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보호자로 여겼던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이 민족의식에 대해 눈 뜨기 시작했다.[40]
이러한 민족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1848년 헝가리 혁명을 제압하는 등 오스트리아 제국은 한동안 버텼으나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결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게 롬바르디아에 이어 베네토 지역을 상실하고, 분가가 통치하던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레조 공국도 멸망하면서[41]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탈리아보다 더 큰 문제는 1866년 독일 통일을 두고 벌어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의 패전이었다. 그동안 자타가 인정하는 독일 내 최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위신은 무너졌으며, 프로이센 왕국이 주도하는 통일 독일에서 강제로 배제되었다.[42] 잇달은 패배의 여파로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제국 내에서 독일인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던 헝가리인들과 타협하여 새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했다.
3.2.1. 몰락
독일 통일에서 배제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수립으로 서쪽으로의 진출이 막히자 대신 남쪽 발칸반도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특히나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환자로 전락하면서 발칸 반도의 수많은 민족들이 독립을 외치는 가운데 세르비아가 남슬라브 민족 통합을 내세우자 세르비아를 견제할 겸 발칸 반도로의 확장을 추구했다.우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일시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었던 독일 제국과 우호관계를 다진 뒤 보스니아를 확보하며 남방 진출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역시 남쪽으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며 끼어들면서 발칸 반도의 판세는 더욱 복잡하게 돌아갔다. 결국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제위 계승자가 암살당하면서 이전에 쌓이고 쌓인 수많은 갈등이 폭발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카를 1세가 퇴위하며 길었던 합스부르크의 시대가 막을 내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등은 귀족제도를 폐지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복위 시도를 아예 차단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중장 출신인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헝가리 왕국을 복원하며 헝가리 왕위는 남아있긴 했지만, 명목상의 복원이었을 뿐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입국을 거부하는 등 섭정 지위로 1인 독재 체제를 유지하였고 이마저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헝가리에 사회주의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군림하는 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일세를 풍미한 이름 높은 가문으로 대접받으며, 근대 유럽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웅변하는 산 증인이다.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으로 전환한지 100년이 넘어가고 있음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주는 비록 이름 뿐이지만 아직 오스트리아 황제,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국왕 등의 작위를 주장한다.
이처럼 군주제의 폐지나 불합리한 승계과정으로 인해 왕위를 빼앗겼다고 주장하거나, 만약 그 왕조가 이어져 왔다면 지금은 누가 왕일까 설정놀이를 하기도 하는데, 그 대상자를 왕위 요구자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이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지금은 명예상의 문제에 불과하고 진지하게 군주로서의 실권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물론 오스트리아도 그렇고 생각이 있는 왕위 요구자들은 실권이 없는 입헌군주제로라도 왕정복고를 원하지만 그것조차 원만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니고, 전쟁 자체도 아무 잘못도 없는 제위 후계자가 암살당해서 일어난 거라 말이 패전국의 황실이라지만 정상참작이 충분히 됨에도 불구하고 공화주의 정권의 황실 배척이 이례적으로 강해서 제정복고의 길이 다른 유럽 국가보다도 요원하다.
4. 구 본가: 스페인 압스부르고
카를 5세가 스페인 왕위를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면서 스페인 왕위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는 분리되었다. 합스부르크 왕조 하면 신성 로마 제국부터 떠올라서인지 부각이 되지는 않지만 단절 전까진 이쪽이 본가였다.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로부터 이어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달리 스페인 압스부르고는 카를 5세의 아들인 펠리페 2세로부터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카를 5세의 작위 대부분[43]을 계승했고, 전성기의 그 위세 역시 동시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보다 강력했다. 이에 대해서는 압스부르고 왕조 참조.5. 분가들
5.1. 합스부르크 가문
5.1.1. 리우펜부르크 백작가와 키부르크 백작가
리우펜부르크 분가와 키부르크 분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다른 분가들과는 달리 합스부르크 가문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에게서 기원한 분가가 아니라 루돌프 1세의 친척들에게서 기원한 분가이다.루돌프 1세(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 4세)의 친할아버지 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 2세는 아들로 합스부르크 백작 알브레히트 4세와 루돌프 3세를 두었다. 알브레히트 4세가 루돌프 1세의 아버지이므로 루돌프 1세에게는 삼촌이 되는 루돌프 3세는 이후 리우펜부르크 분가의 시조가 되었다. 루돌프 3세는 리우펜부르크 분가를 이을 아들 합스부르크리우펜부르크 백작 고트프리트 1세를 낳았으며, 루돌프 3세의 또 다른 아들인 키부르크 백작 에버하르트 1세는 키부르크 가문의 상속녀 안나와 결혼하여 키부르크 분가[44]의 시조가 되었다.
그렇게 루돌프 1세와는 별개로 분가한 리우펜부르크 분가와 키부르크 분가는 현 스위스 부근에서 어느 정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는 했으나 루돌프 1세에게서 기원한 친척만큼의 중요성과 권력은 가지지 못했으며, 루돌프 1세의 아들 알브레히트 1세의 살해에 가담하는 등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노선을 취하기도 하였다.
리우펜부르크 분가는 1408년에, 키부르크 분가는 1414년 혹은 1417년에 대가 끊겼다. 영지와 작위 대부분은 루돌프 1세에게서 기원한 친척들에게 넘어갔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은 1918년 왕정이 끝나기까지 키부르크 백작을 칭했다.
5.1.2. 분할 상속에 따른 구 분가들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렸던 오스트리아 공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등의 영지는 오랜 기간동안 분할 상속되었다. 루돌프 1세가 합스부르크 가문 최초로 오스트리아의 통치자가 된 이후 루돌프 1세의 영지는 아들들인 알브레히트 1세와 루돌프 2세에게 분할 상속되었고, 알브레히트 1세의 영지 역시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그러나 이때까지는 실질적인 분가가 형성되지는 못했는데, 루돌프 1세의 아들인 루돌프 2세는 요절하여 결국 알브레히트 1세가 영지 모두를 차지했고[45],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들 역시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상속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통 합스부르크 가문에 실질적인 분가가 형성된 것은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들인 알브레히트 3세와 레오폴트 3세 대인 것으로 본다.
하오스트리아를 상속받은 알브레히트 3세는 본가인 알브레히트계 합스부르크의 시조가, 내지오스트리아와 외지오스트리아를 상속받은 레오폴트 3세는 분가인 레오폴트계 합스부르크의 시조가 되었다. 또한 레오폴트 3세의 아들들인 에른스트 공작과 프리드리히 4세 대에 다시 영지가 분할 상속되면서 내지오스트리아를 상속받은 에른스트 공작을 시조로 하는 슈타이어마르크 분가와 티롤과 외지오스트리아를 상속받은 프리드리히 4세를 시조로 하는 티롤 분가가 성립되었다.
그렇게 본가인 알브레히트계 합스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분가인 손위의 레오폴트계 합스부르크, 티롤 분가인 손아래의 레오폴트계 합스부르크가 영지를 분할 상속해 다스렸으나 본가는 라디슬라우스 대공이 자녀 없이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대가 끊겼고, 티롤 분가 역시 프리드리히 4세의 아들인 지기스문트 대공이 자녀가 없던데다가 막시밀리안 1세의 협박으로 물러나면서 단절되었다. 본가가 된 슈타이어마르크 분가 내에서도 상속자가 프리드리히 5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 한 명만 남으면서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 대에는 영지가 일시적으로 통일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인 페르디난트 1세 사후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들인 막시밀리안 2세, 페르디난트 2세, 카를 2세에게 다시 분할 상속되었다. 막시밀리안 2세가 니더외스터라이히와 오버외스터라이히[46]를, 페르디난트 2세가 티롤과 외지오스트리아를, 카를 2세가 내지오스트리아를 상속받으면서 이전처럼 오스트리아 본가, 티롤 분가[47], 슈타이어마르크 분가[48]가 분할 상속받았다.
오스트리아 본가인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들은 모두 상속자 없이 사망하였고, 티롤 분가인 페르디난트 2세에게도 상속자가 없었으므로[49] 결국 슈타이어마르크 분가가 오스트리아 본가가 되었다. 카를 2세의 아들들인 페르디난트 3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레오폴트 5세는 마지막으로 영지를 나누었다. 페르디난트 3세는 레오폴트 5세에게 티롤과 외지오스트리아를 떼주어 오스트리아 본가와 별도로 다시 티롤 분가[50]를 성립시켰다. 레오폴트 5세의 아들들인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과 지기스문트 프란츠 대공이 상속자 없이 사망하면서 티롤 분가의 대는 끊겼고, 그 결과 레오폴트 6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 대에 이르러 오스트리아 영지의 분할 상속은 완전히 끝났다.
5.2.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5.2.1. 토스카나 대공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이탈리아계 분가 1로, 아버지 프란츠 1세의 토스카나 대공국을 상속받았던 레오폴트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며 차남 페르디난트에게 토스카나 대공국을 물려주며 창설되었다.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패전한 여파로 반외세 혁명이 일어나 페르디난도 4세가 폐위당하면서 명목상 가문만 남았으며, 현 수장은 마지막 대공 페르디난도 4세의 현손인 지기스문트(1966~)이다.5.2.2. 다스부르고에스테 공작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제2의 이탈리아계 분가로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4남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이 마사 여공작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51]와 결혼하면서 창설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페르디난트 대공과 마리아 베아트리체의 장남 프란체스코 4세가 자신의 외할아버지 에르콜레 3세 데스테의 뒤를 이어, 모데나 공국의 공작이 되었으나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패전한 여파로 반외세 혁명이 일어나 프란체스코 4세의 아들 프란체스코 5세가 폐위당하면서 명목상 가문만 남았다. 프란체스코 5세는 아들이 없어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모데나 공위에 대한 권리를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넘겼다가, 그의 사후 카를 1세를 거쳐 그 차남 로베르트 대공에게 상속된 후 로베르트 대공의 후손들이 보유하고 있다. 현 수장은 로베르트 대공의 장남 로렌츠 대공(1955~)으로 벨기에의 아스트리드 공주와 결혼하여 벨기에에서 지내고 있다.왕정복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가장 왕위와 거리가 가까운 합스부르크 분가가 바로 이 에스테 가문이다. 로렌츠 대공의 아내 아스트리드 공주의 계승서열이 오빠인 벨기에 국왕 필리프의 자녀들 다음인 5위이기 때문에, 아주 낮은 가능성이지만 필리프의 자녀들이 미혼이거나 자식이 없거나 한다면 로렌츠와 아스트리드의 자식들이 합스부르크 벨기에 국왕으로 등극할 수도 있다.
5.2.3. 헝가리 궁정백 가문
nádorispán(헝가리어) / Palatin(독일어) / comes palatinus( 라틴어)헝가리 왕국의 궁정백은 헝가리 국왕 다음가는 직위이다.[52] 레오폴트 2세가 넷째아들 알렉산더 레오폴트 대공에게 헝가리 궁정백의 직위를 수여하여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으로는 최초로 궁정백이 되었으나, 자녀가 없어서 레오폴트 2세의 일곱째아들 요제프 안톤 대공이 계승하였으며, 이후 그 아들 슈테판 대공이 계승했으나 1848년 헝가리 혁명으로 헝가리 왕국에서 궁정백이 폐지되자 명목상의 호칭이 되었다.
슈테판 대공이 아들이 없어 상속한 조카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1872~1962)[53] 대까지는 근근히 대를 이어가는 수준이었으나, 그 후손들이 다산해서 친증손자녀만 34명으로 늘어 한 분가를 이루었다. 현 수장은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의 증손 요제프 카를(1960~)이다.[54]
5.2.4. 테셴 공작가(단절)
테셴 공국을 영지로 하는 분가.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4녀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테셴 공작 알베르트 카지미어 부부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자녀가 없었던 알베르트와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조카 카를 루트비히를 양자로 들였고, 카를 루트비히의 장남 알브레히트가 대를 이었으나 1남 2녀 중 맏딸만[55] 무사히 장성해서 1895년에 조카인 프리드리히기 뒤를 이었다. 프리드리히는 1남 9녀를 두었는데 막내인 아들 알브레히트 프란츠가 1955년 세상을 떠나 대가 끊겼다.[56] 그리고 프리드리히의 형제 중에는 카를 슈테판[57]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인 카를 알브레히트와 빌헬름 프란츠 형제는 각각 스스로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자국의 독립 영웅으로서 숭앙받았다.군인으로 유명한 가문으로, 테셴 분가의 일원들은 19세기부터 제국 멸망 때까지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주요 직위를 차지했다. 카를 루트비히 대공부터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호적수로 유명했던 인물이며 그 명성은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 첫째 아들 알브레히트 대공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제국 육군 원수로서 감찰관직에 올라 군 개혁을 지휘했고, 둘째 아들 카를 페르디난트 역시 원수였다. 두 형제는 아버지를 따라 19세기 중반의 혁명 진압에 종군하기도 했다. 한편 카를 페르디난트의 세 아들 역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군의 중책을 맡았다. 장남 프리드리히는 육군 원수로 전군 총사령관직과 란트베어 사령관직을 겸임했으며 차남 카를 슈테판은 대장 계급을 달고 황립 및 왕립 전쟁해군의 감찰관직을 역임했다. 삼남 오이겐 역시 큰형과 마찬가지로 육군 원수였으나 그는 야전 사령관으로 최전선에서 복무하였다.
다만 공식적으로 단절됬지만 생물학적 남계후손은 있다.
6. 특기할 사항
6.1. 근친혼에 따른 흥망성쇠
<colbgcolor=#000000> |
근친혼을 간략하게 정리한 표[58] |
<colbgcolor=#000000>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교 계수(막시밀리안 1세~ 카를 6세)[59][6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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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3[61] |
마리 드 부르고뉴 (Marie of Burgundy) |
0.0766 | 0.0253 | |
안 드 브르타뉴 (Ann of Brittany) |
0.0212 | 0.0154 | |||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 (Bianca Maria Sforza) |
0.0000 | 0.0014 | |||
펠리페 1세 (Felipe I) |
0.0253 |
후아나 1세 (Juana I) |
0.0394 | 0.0375 | |
스페인계 압스부르고 왕조 (Casa de Habsburgo) |
|||||
카를로스 1세 (Carlos I) |
0.0375 |
포르투갈의 이자벨 (Isabel of Portugal) |
0.1006 | 0.1234 | |
펠리페 2세 (Felipe II) |
0.1234 |
마리아 마누엘라 (Maria Manuela of Portugal) |
0.1234 | 0.2111 | |
메리 1세 (Mary I) |
0.0080 | 0.0910 | |||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 (Élisabeth of Valois) |
0.0013 | 0.0089 | |||
오스트리아의 안나 (Anna of Austria) |
0.1064 | 0.2177 | |||
펠리페 3세 (Felipe III) |
0.2177 |
오스트리아슈타이어마르크의 마르가레테 (Margarete of Austria-Styria) |
0.1391 | 0.1145 | |
펠리페 4세 (Felipe IV) |
0.1145 |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Élisabeth of France) |
0.0076 | 0.0504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Mariana of Austria) |
0.1559 | 0.2539 | |||
카를로스 2세 (Carlos II) |
0.2539[62] |
오를레앙의 마리 루이즈 (Marie Louise of Orléans) |
0.0791 | 0.1007 | |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안나 (Maria Anna of Pfalz-Neuburg) |
0.0279 | 0.0508 | |||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왕조 (Haus Habsburg) |
|||||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
0.0375 |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Anna of Bohemia and Hungary) |
0.0070 | 0.0131 | |
막시밀리안 2세 (Maximilian II) |
0.0131 |
스페인의 마리아 (María of Spain) |
0.1234 | 0.1064 | |
루돌프 2세 (Rudolf II) |
0.1064 | ||||
마티아스 (Matthias) |
0.1064 |
오스트리아티롤의 안나 (Anna of Austria-Tirol) |
0.1352 | 0.1407 | |
페르디난트 2세 (Ferdinand II) |
0.1391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Maria Anna of Bavaria) |
0.0294 | 0.1178 | |
엘레오노라 곤차가 (Eleonora Gonzaga) |
0.0676 | 0.1022 | |||
페르디난트 3세 (Ferdinand III) |
0.1178 |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 (María Ana of Spain) |
0.1145 | 0.1559 | |
오스트리아티롤의 마리아 레오폴디네 (Maria Leopoldine of Austria-Tirol) |
0.0109 | 0.1225 | |||
엘레오노라 곤차가 (Eleonora Gonzaga) |
0.0141 | 0.0296 | |||
레오폴트 1세 (Leopold I) |
0.1559 |
마르가리타 테레사 (Margarita Teresa of Spain) |
0.2539 | 0.3054 | |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 (Claudia Felizitas of Austria-Tirol) |
0.1494 | 0.1192 | |||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Eleonore Magdalene of Pfalz-Neuburg) |
0.0280 | 0.0568 | |||
요제프 1세 (Joseph I) |
0.0568 |
빌헬미네 아말리 (Wilhelmine Amalie of Brunswick) |
0.0085 | 0.0177 | |
카를 6세 (Karl VI) |
0.0568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 of Brunswick-Wolfenbüttel) |
0.0167 | 0.0127 |
합스부르크 가문은 결혼을 통해 동맹을 다져서 전쟁을 피하는 방식으로, 이따금은 상속을 통해 작위와 영토를 얻는 방식으로 가문을 번영시켰다.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는 시구가 유명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카를 5세로부터 시작된 스페인 압스부르고는 다른 왕조들처럼 혁명이나 외부의 침입 등으로 단절된 게 아니라 수십~수백 년간 반복된 근친혼의 폐해 때문에 무너졌다. 스페인 압스부르고도 근친혼이 심각하기는 했지만, 스페인 압스부르고의 조상인 트라스타마라 왕조부터 이베리아 왕국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근친혼 전통이 있었다.[63] 스페인을 계승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근친혼이 두드러지게 심하지 않았던[64] 합스부르크는 이러한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근친혼 전통을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계승했다. 위의 그림과 같은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 탓인지 뒤로 갈수록 장애인 왕이 등장했으며 영아 사망률까지 점차 증가함에 따라, 결국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에 이르러서는 카를로스 2세의 형제들이 모두 젊거나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본인도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2세기만에 단절되었다.
카를로스 2세에 이르면 유전자 결함으로 정신적으로 상당히 심약한 것은 물론이고, 보통이라면 외모에 대한 미약한 악영향만 끼치는 주걱턱이 거의 질병 수준으로 악화되면서 음식을 제대로 씹어 삼키지도 못했다. 게다가 말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을 정도로 중증이 되었으며, 생김새도 흉측했다. 뿐만 아니라 불임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 스페인 압스부르고의 대가 끊기면서 카를로스 2세의 유언대로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를 놓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성실하고 선량한 인물이었다.[65]
어째서 합스부르크 가문, 특히 스페인 압스부르고가 그토록 근친혼을 고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당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통념과 다르게 합스부르크 왕조의 근친혼은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근친혼이 극심하던 시절은 스페인 압스부르고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나뉘어져 통치하던 시절로, 이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근친혼을 한 이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페인 압스부르고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같은 가문임에도 다스리는 영토가 다르니 통치에 대한 의견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는데, 혼인 동맹은 왕조 내에서 그 의견 차이를 최대한 수습하고자 한 수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참금과 혼수를 가문 내에서 유통하게 하려는 의도, 살리카 법을 따르지 않는 스페인의 특성상 추후 여왕이 즉위하였을 때 스페인 왕위가 타 가문에 넘어가지 않도록 보존하려는 의도 역시 존재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는 매우 근시안적인 생각이지만, 당시는 근친혼이 누적되었을 때 초래될 수 있는 위험이 충분히 알려지지 못한 시점이었고, 실제로 불임이었던 카를로스 2세의 장애조차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또한 스페인 압스부르고가 재위하던 시기 유럽은 한창 종교 개혁의 바람이 불 무렵으로, 합스부르크 가문과 동등결혼을 할 만한 가문의 다수가 개신교로 개종한 상태였다. 종교가 다른 가문 간의 통혼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66] 까다로운 것이었고 특히 가톨릭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던 스페인 압스부르고로서는 가톨릭 가문과의 통혼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수의 가문들이 개신교로 개종한 상태에서 스페인 압스부르고의 결혼 상대는 종교 개혁 이전에 비해 매우 좁혀질 수밖에 없었고, 불운으로 펠리페 2세의 세 번째 부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나 펠리페 4세의 첫 번째 부인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등 비교적 유전적으로 관계가 먼 프랑스 출신의 가톨릭 왕녀들마저 장성한 남성 후계자를 얻지 못하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출신의 왕녀들과의 재혼으로 눈을 돌린 결과가 바로 중첩된 근친혼이었다.[67] 스페인 압스부르고는 그 이외에도 포르투갈의 아비스 가문과도 통혼하였지만, 중간에 아비스 가문의 대가 끊기면서 이베리아 연합이 형성된데다가, 아비스 가문 역시 이미 기존의 카스티야, 아라곤 왕조인 트라스타마라 가문과 강한 혈연 관계를 지니고 있었기에 유전적으로 가까운 사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교황이 관면을 해주는 근친혼은 3촌까지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근친혼이 대대로 겹쳐서 일어났기 때문에 촌수 역시 중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펠리페 2세가 3촌이자 5촌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안나와 결혼한 것이 그 예시이다. 이렇게 근친혼이 중첩해서 일어나다 보니 4촌혼인데도 3촌혼만큼 유전적으로 가깝거나, 3촌혼인데도 남매혼만큼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카를로스 2세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로, 일반적인 3촌혼이 0.1250 정도의 근교 계수를 가지는 것에 반해 남매혼의 근교 계수를 뛰어넘는 0.2539라는 높은 근교 계수를 지녔다. 하지만 가장 높은 근교 계수를 지닌 인물은 벨라스케스의 걸작인 <Las Meninas>(시녀들)라는 그림의 모델로 유명한 스페인의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68]가 3촌이자 4촌이자 6촌인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여 낳은 딸인 마리아 안토니아[69]로, 무려 0.3054라는 근교 계수를 지녔다.[70]
이처럼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등의 개족보 관계가 계속 잇따르면서 유전적 결함이 중첩되어 문제를 지닌 후손들이 대거 태어났고, 외모적 특성인 합스부르크의 주걱턱이 지속적으로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주걱턱의 별칭이 합스부르크 턱(Habsburg jaw or lip)인 게 괜한 말이 아닐 정도로 주걱턱이 가문의 심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합스부르크 가문이 여러 세대에 걸쳐 주걱턱을 유전한 데에는 근친혼이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나, 통념과는 달리 근친혼이 주걱턱 그 자체의 기원인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71][72] 근친혼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주걱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애초에 막시밀리안 1세가 주걱턱이 있었고 특정 가계에 열성 유전병 인자가 존재할 경우 근친번식을 통해 중첩가능성이 높아지는 경우가 있다. 근친결혼을 해서 주걱턱이 된다면, 굳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니더라도 그시절에는 근친결혼이 자주 일어났기에 그사람들은 모두 주걱턱이어야 한다. 그러나 기원이 어찌되던 근친혼이 지속되면서 주걱턱도 세대를 거듭해지면서 심해졌다.
한편 카를 5세의 동생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로부터 시작되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는 근친혼이 스페인보다는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은 눈에 띄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시밀리안 2세 정도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높은 근교 계수를 유지하였는데, 스페인 압스부르고의 단절 이후 예전만큼 극단적인 근친혼을 할 필요가 줄어들면서 이후로는 완화된 축에 속한다. 그러나 부모인 프란츠 2세와 마리아 테레사가 외사촌 겸 고종사촌이었던 탓에 뇌전증, 수두증, 언어장애, 정신지체 등에 시달린 오스트리아 제국의 페르디난트 1세 같은 사례도 존재했다. 프란츠 2세의 남동생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도 뇌전증에 시달렸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주걱턱이 남아있었다.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의 경우 대체적으로 바이에른 선제후국- 바이에른 왕국의 비텔스바흐 가문과 많이 통혼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어머니와 첫 번째 부인이 모두 바이에른 공국의 비텔스바흐 가문이었다. 레오폴트 1세는 팔츠 계열의 비텔스바흐 가문인 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와 결혼해서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를 얻었고, 프란츠 요제프 1세도 어머니 조피 대공비가 바이에른의 공주였기에 황후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과 이종사촌이었다. 이외에도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보르본 왕조, 작센 선제후국- 작센 왕국의 베틴 왕조, 사보이아 공국- 사르데냐 왕국의 사보이아 왕조, 포르투갈 왕국의 브라간사 왕조 등 가톨릭 가문과 주로 통혼했다. 이외에도 페르디난트 1세의 부인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는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의 야기에우워 왕조이었고, 카를 6세의 황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출신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배우자 프란츠 1세는 로렌 공국 출신이었다.
중고등학교나 교양서에서 배우는 세계사에서 오스트리아의 비중이 낮은 것도 혼인으로 번성했던 가문의 역사와 연관 지을 수 있다. 세계사에서 가르치는 교양이나 교육 목적은 민주 시민의 양성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중세 봉건주의적 제도를 극한으로 활용했던 오스트리아보다는 봉건적 질서를 극복하고 근대적 세계를 수립한 영국, 미국, 그리고 프랑스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독재국가들의 세계사 과목에서 상대적으로 오스트리아에 큰 비중을 두는 것과는 대조적이다.[73] 또한 현대 세계는 영국, 미국, 그리고 낮은 비중으로 프랑스가 세운 체계 아래에서 움직이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흔적은 동유럽 및 중부유럽 일부밖에 남아있지 않으며 이들은 국력이 떨어져 영향력이 적기 때문에, 일부 왕조 호사가들 이외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6.2. 가풍
중세 이래 현대까지 수백년 동안 지속된 가문이기 때문에 가풍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쉽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면과 진보적, 실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면이 공존하고 있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는 다소 보수적이었지만, 정치와 문화에서는 실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특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스페인 압스부르고가 갈라진 후 상대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는 실리적인 면모가 부각되었다. 이는 가문의 분할 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시조가 된 페르디난트 1세와 스페인 압스부르고로 적통이 이어진 카를 5세 형제의 성향 차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합스부르크 가문은 종교적 측면에서 보수적인 면모를 보일 때도 있었지만[74] 이를 제외하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체적으로 동시대의 다른 가문에 비해 현실적,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면모를 보일 때가 많았다. 이러한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면모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스페인 압스부르고는 오스트리아계에 비해서는 보수적인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웃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 비해서는 매우 관용적인 정치를 펼쳤다. 사실 스페인은 국가 자체가 레콩키스타로 탄생했기 때문에, 가톨릭의 영향력이 오스트리아보다 훨씬 강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오스만 제국에게 수도 빈이 포위된 게 2번이고, 스페인은 통째로 이슬람에게 탈환한 다음에도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맞부딪쳤으니 종교색을 안 띄는게 불가능한 지형이기도 했다.
16세기 이래 합스부르크 가문은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정책이 대성공을 거두어 유럽 각지에 걸친 다민족의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합스부르크는 이웃 프랑스 왕국과는 달리 합병된 소수민족 영토를 일방적으로 찍어누르는 대신 해당 지역의 문화, 언어를 상당히 존중해 주는 관용적인 통치를 펼쳤다. 이는 비슷한 문화권을 통합한 프랑스와 달리 완전히 문화권이 다른 여러 나라들을 통치하게 된 점과 더불어 무력을 통한 합병이 아닌 결혼을 통한 상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는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전까지 선출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현지 귀족들의 권한과 관습을 존중하면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민족적 관용 정책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몰락하는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지속되었다. 비록 사라예보 사건 때문에 빛을 못 보았으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도 합스부르크식 유연함을 잘 보여준다.
이런 합스부르크의 민족적 관용 정신은 시대를 앞서 나간 것이었는데, 덕분에 다민족 국가인 합스부르크 제국이 꽤 오랜 동안 별 잡음 없이 굴러갈 수 있었다. 오늘날 잘못 알려진 것과는 달리 합스부르크 제국 하에서 비독일계 민족들의 불만은 크지 않았고 오히려 대체로 그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긍정하고 그들의 지배를 환영했다.[75] 합스부르크 가문은 형식상 지배자라는 타이틀만 가져갔을 뿐 보헤미아 왕국을 제외하면 그들의 고유 문화와 제도에 거의 터치하지 않았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했다.
크로아티아인처럼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이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원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오스만 제국의 위협 때문이었다. 동유럽인들은 언제 있을지 모를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항상 두려워했고, 합스부르크를 그들을 지켜줄 구원자로 여기기까지 했다. 게다가 독일계가 아니라고 해도 본토 오스트리아인에 비해 딱히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는 독일계와 헝가리인을 포함한 여러 민족이 다양하게 활동했다.
이런 민족적, 문화적 관용은 오스트리아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스페인 압스부르고에서조차도 나타나는데, 일례로 카탈루냐에 대해서 압스부르고 왕조는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하였지만 압스부르고 왕조가 단절되고 들어선 프랑스계 보르본 왕조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했다. 현재 카탈루냐가 스페인에 합병되었다고 말하는 1714년이 바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고 보르본 왕조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다. 이말은 역으로 그전 합스부르크 시절에는 카탈루냐가 거의 독립국 수준의 자치를 누렸음을 뜻한다. 물론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관용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만큼 전면적인 것은 아니어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온건한 성향은 봉건주의가 마지막까지 건재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프랑스 등 다른 봉건국가들이 차례차례 내부의 개혁-혁명 압력에 붕괴되거나 굴복할 때, 합스부르크 왕조는 건재했다는 것 자체가 피지배 계층의 지지-동의를 받았다는 걸 뜻한다. 결국 합스부르크는 자본주의, 민족주의, 공화주의, 산업혁명 등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이를 무너뜨리려면 세계대전의 패배가 필요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경우도 그렇고, 스페인도 사실 종교 개혁, 교파화(confessionalization) 시대 유럽 열강 정치판의 중심에 있어서 종교적인 면에서 워낙 독선적이었던 것이지, 종교를 뺀 세속 정치문화면에선 상당히 관용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스페인 본토의 경우만 하더라도 전임 가톨릭 부부왕의 문화, 교육 진흥 정책을 이어받아 인문주의에 기반한 대학 설립을 통한 관리, 공무원, 법률 전문계층 양성을 통해 드넒은 스페인 제국을 성공적으로 통치했고, 당장 안방인 카스티야의 1520년 코무네로스 봉기부터 강제 개종당한 그라나다 왕국의 무어인 봉기, 17세기 중반 포르투갈과 카탈루냐의 쌍방울 반란 등을 겪으면서도 역시 종교문제가 걸려 대학살과 무어인 추방으로 끝난 무어인 문제만 빼곤 대부분 패배한 반란 세력을 주동자 몇몇만 처형하고, 압류된 재산이나 작위도 한세대 뒤에 복권시켜주는 등 관대한 처분을 통해 국내 안정을 이루었다.
신대륙 정복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참극의 역사속에서, 사실 톨레도, 세비야, 마드리드에 소재한 본토 왕실과 정부는 1512년 부르고스 칙령, 1542년 원주민 신법안, 1550년 바야돌리드 논쟁 등을 통해 엄연한 스페인 왕실의 신하로서 원주민들에게 일정한 권리와 자치권을 부여하고, 콩키스타도르와 엔코미엔다 지주들로부터 보호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 시기 벌어진 신대륙 원주민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은 대부분 현지 콩키스타도르, 엔코미엔데로(Encomiendero, 말그대로 엔코미엔다를 소유한 지주)들의 사적 탐욕 등에 의해 벌어졌고, 원주민들이 어마어마한 숫자로 죽어나긴 했으나 이건 구대륙과의 접촉으로 인한 전염병 문제가 훨씬 더 컸고, 원주민들을 절멸이 아니라 개종, 노동력 징발의 대상으로 보았던 스페인 당국은 오히려 선교사들을 통한 구호 활동을 통해 토착민 숫자를 보전하려고 했다.
스페인의 식민지 행정 체계 수립 노력도 16세기 후반쯤 되면 제대로 된 성과를 발휘, 현지 부왕령에서 직접 다스리는 식민 거점 도시들을 제외한 농촌과 밀림의 원주민들은 공물과 노동 징발 대신 현지 자치를 인정 받는 원주민 영방 (República de indios) 체제가 자리잡았다.
현실 정치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대 통치자들은 매우 현실적, 실리적 면모를 보일 때가 많았는데, 합스부르크의 황제들은 새로운 제도와 문물을 앞서 수용하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실리적인 면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 더욱 부각된다. 초장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푸거 가문으로부터 자금을 융통하여 신성 로마 제국 제위의 세습을 굳히는 등 가문을 확장하는데 적극 이용하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 경제사학계에서도 금융의 선진화를 앞당긴 사례로 평가받기도 한다.
다른 가문이 영토를 넓히기 위해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막시밀리안 1세 등 합스부르크의 군주들은 결혼 정책을 통해 손쉽게 가문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는데, 이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실리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물론 합스부르크의 이런 결혼 정책도 공짜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자존심을 굽히고 수십년 동안 타가문과 유대관계를 지속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합스부르크에서 고지식했던 통치자에 속했던 카를 5세도 화승총 부대를 도입하여 유럽 전쟁사에서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다.
근대에는 계몽군주인 요제프 2세가 나타나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하며 신기술과 제도를 도입하는데 앞장섰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를 취했으나, 사회문화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시대를 앞서나가는 굉장히 리버럴한 분위기의 나라였다. 빈 체제로 인해 보수주의자로 평가되는 프란츠 2세는 비록 정치체제와 종교에서는 보수적이었지만, 과학과 예술을 적극 후원했고 신기술도 적극 도입해 도나우 강에 증기선을 띄우고 철도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합스부르크의 문화 덕분에 19세기 빈은 유럽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예술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파리에 비해 화려함은 조금 떨어졌지만 시대를 앞서나가는 진보적인 예술 풍토를 특징으로 했다.
반면 보수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 보수적인 측면이 나타난다. 이는 종교 개혁기의 카를 5세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카를 5세 등 합스부르크 군주들은 속권의 문제에서 교황과 멱살은 잡았을지언정 교권에서는 교황과의 관계가 좋았으며, 사코 디 로마로 유명한 카를 5세 역시도 교권에서는 교황에게 추호의 적의도 품지 않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76] 그의 아들 펠리페 2세 역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아버지와 성향이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당대 유럽 왕실들과 비교할 때 합스부르크 군주들은 (상대적으로) 성생활도 깔끔하고 사생활 스캔들도 적은 편이였다.[77]
다만 이러한 신념형 보수주의 정책은 그만큼이나 호불호도 많이 갈려서,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교회의 보호자'로 칭송되었으나, 개신교 측에게는 악의 축 취급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78] 다만 이런 신념형 보수주의는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 전체에서 볼 때 그렇게 두드러진 특징은 아니며 고지식했던 카를 5세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이었다.
빈 체제를 들면서 정치 체제에 대한 보수성을 얘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 유럽의 세습 지배 가문 중에 정치체제적으로 보수적이지 않았던 가문은 없었다. 오히려 합스부르크는 동시대의 타 가문에 비해서 정치적으로도 상대적으로 관용적이고 리버럴한 편이었다. 동시대의 영국이나 프랑스의 근대사가 중세 질서에서 벗어나 민주적 국가를 수립하는 길을 걸었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은 봉건 영주 간의 혈연 관계와 작위에서 인위적으로 탄생한 나라였기 때문에 국가 자체가 태생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띌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통성은 오스트리아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역사적, 민족적 경험이라기보다는 합스부르크 군주가 갖고 있는 작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구상했었던 동등한 민족들의 연방 국가라는 비전이 현실화됐다면 민족국가보다도 더욱 진보적인 나라가 탄생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라 자체가 망해버렸기 때문에 어떻게 됐을지는 알 수 없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이되 제도와 기술에서는 실리적인 통치로 요약할 수 있다.
이렇게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가풍은 이후 오토 폰 합스부르크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과 히틀러와의 대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출신 신분부터가 하늘과 땅 차이로 격차가 컸지만, 무엇보다 지독하게 편협한 히틀러의 인종, 문화관과 합스부르크의 이 가풍은 절대로 원만하게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
참고로 역사학자 Peter Marshall은 그의 저서 「종교개혁」에서 17세기 후반 유럽이 종교개혁의 '교파화' 시대가 끝났다는 예시로, 합스부르크를 거론했다.
17세기 후반에 국내외 정치에서 헌신적인 신앙의 역할이 줄어들고 종교 전쟁의 시대, 종교 개혁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 견해는 어느 정도 참이다. 일례로 당대의 정치적 거물인 프랑스의
루이 14세(제위 1656~1715)가 팽창주의 야망을 드러내자 지난날 신념 정치의 기수였던 가톨릭권 오스트리아는 그에 맞서 연합한 신교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다.
Peter Marshall, 「종교개혁」 中
Peter Marshall, 「종교개혁」 中
6.3. 가문의 사병
자세한 내용은 황제군 문서 참고하십시오.6.4. 근황
상술했다시피 프랑스의 발루아 가문 및 부르봉 가문과는 몇 세기에 걸친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21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차지하고 있는 왕위가 없는 데에 비해 부르봉 가문은 스페인 왕위[79]를 가지고 있다. 정작 본가인 프랑스[80]에서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축출당했기에 20세기까지 제위를 유지한 합스부르크 가문보다 사정이 딱히 낫다고 보긴 힘들지만 말이다.2010년, 합스부르크 가문 관련의 뉴스가 나왔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전현직 통치자 가족이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손은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기 때문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조카 울리히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 이는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으로 전환된 이후 1919년 4월 3일 제정된 합스부르크 법(Habsburgergesetz) 때문인데 이 법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입국 금지와 재산 몰수, 오스트리아 대통령 출마 금지에 관한 내용이 있다. 2011년 6월 이후 문제의 조항은 철폐되어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도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법 자체는 지금도 남아있으나 합스부르크 가문 재산 몰수와 관련된 조항이 아니면 사실상 사문화된 법이다.
1989년 3월 14일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부르봉파르마의 치타가 96세의 일기로, 2011년 7월 4일에는 마지막 황태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이 9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스스로 '공화국 시민'으로 자처하며 세간의 존경을 받았던 오토 대공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누리던 시절을 경험한 마지막 인물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81] 영상의 의식에 대해선 후술. 초를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신을 안장하는 카푸친 교회의 수도자들이다. 카를 1세의 자녀들은 모두 사망했지만, 배우자 자격으로 황실 봉안당에 안장될 수 있는 인물은 아직 있다.
현재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은 오토 대공과 작센마이닝겐의 공녀 레기나의 아들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며, 프란체스카 폰 티센보르네미서[82]와의 사이에서 총 1남 2녀(총 3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 중 둘째이자 유일한 아들이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이다. 참고로 이 사람은 2018년까지 포뮬러 3 드라이버로 활동했고 GT를 거쳐 2022년 현재는 월드 인듀어런스 챔피언십의 LMP2 클래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페르디난트 대공의 누나이면서 모델이자 보석 디자이너인 엘레오노르 여대공은 과거 2011년 포뮬러 1에 참가한 적 있는 제롬 담브로시오와 2020년에 결혼한 상태인데 유럽의 탑엔드 레이싱이 얼마나 귀족 스포츠에 가까운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2018년부터 페르디난트는 유튜브를 시작했다. 2021년에는 WEC에서 LMP2 부문 우승을 차지하였고, 현재는 내구레이스를 전문으로 활동, 유로피언 르망 시리즈에서는 프레마 레이싱으로, WEC에서는 알핀 엘프 팀 소속으로 참가한다.
2020년 12월에 주 프랑스 헝가리 대사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차남 게오르크가 임명되었다.
공식 홈페이지도 있다. #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했던 나라들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대한 평가는 천차만별이다.
- 오스트리아: 노년층 일부에서나마 강대한 제국의 향수를 그리워하지만, 청년층을 중심으로 예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상관없는 일에까지 휘말렸었는데 이제는 그럴 일이 없어져서 현재의 공화정이 더 낫다는 의견이 다수다.
- 체코: 민족문화의 발전을 억제하고 동등한 주권에 대한 목소리를 무시한 압제자로 평가하며 합스부르크 가문 지배기를 흑역사 취급하는 경향이 강하다.
- 슬로바키아: 헝가리인의 압제를 방조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 헝가리: 대타협 이전의 합스부르크 지배기는 암흑기 취급하며 보치커이 이슈트반, 퇴쾨이 임레, 라코치 페렌츠 2세, 코슈트 러요시 등 민족운동가들을 더 띄워주는 경향이 강하지만 대타협으로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라는 준주권국가가 된 이후로는 나쁘지 않게 보는 편이다.
- 폴란드: 기본적으로는 좋지 않지만 민족문화를 파괴하려 했던 독일이나 러시아보다는 그나마 낫다고 평가한다.[83]
- 크로아티아: 오스만 제국의 외침과 헝가리의 압제로부터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배를 받은 기간은 짧지만 보슈냐크인들은 보스니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에 학살을 당한 여파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 이탈리아: 통일을 방해하고 사사건건 간섭한 압제자 취급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이 직할 지배했던 롬바르디아나 베네토,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역사 일부로 간주하며 독일어권인 쥐트티롤에서는 긍정적인 시각이 강하다.
-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문제에서 헝가리인의 압제로부터 루마니아인을 보호하고 교육의 보급과 인권 상향을 위해 노력한 점을 들어 나쁘지 않게 평가하지만, 몰다비아 공국으로부터 부코비나를 빼앗고 이 지역에 우크라이나인이 이주한 것을 방조하여 궁극적으로 소련에게 북부 부코비나를 빼앗겼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 슬로베니아: 가장 오랜 지배를 받은 것 치고는 그냥 자신들의 역사 일부로 간주할 뿐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데 보통은 슬로베니아어의 아버지로 알려진 프리모시 트루바르가 활동했던 종교 개혁 시기의 페르디난트 1세, 막시밀리안 2세나 빈- 류블랴나- 트리에스테로 이어지는 산업 도로를 발전시킨 카를 6세, 마리아 테레지아, 제국의 황혼기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 우크라이나: 갈리치아 지역을 중심으로 민족주의가 각성했다 보니 정치, 사회적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이 경제적으로 원체 낙후된 지역이었다보니 경제, 문화적으로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 세르비아[84]: 세르비아인 주도의 범슬라브주의를 억압하고 1차대전 기간 동안 세르비아 민족문화를 파괴하려 한 악의 축으로 평가한다.
사실 1919년에 완전히 군주제가 폐지되어 공화국이 되어 100년이 넘었는데도 본국에서 노년층에서나마 제국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걸 생각하면 군주제가 폐지된 공화국 치고는 명망과 신뢰가 분명 많이 있었다는 건 부정할수 없다. 심지어 식민지 수준이었던 폴란드는 오히려 긍정적인 편에 속한 것까지 감안하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 자체가 오늘날 기준으로도 대단히 비합리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상술한 체코와 세르비아처럼 적대적인 경우도 있지만 체코는 중세부터 오 랜 악 연이 쌓인 역사가 따로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며 세르비아는 원래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가 근현대에 들어서 독립한 후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받은데다 원래 보스니아를 포함한 다른 발칸반도 영토를 세르비아가 차지하는걸 방해했다는 이유로 적대적이게 되었다. 오히려 세르비아를 제외한 다른 발칸반도 국가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최소 중립이거나 세르비아보다는 훨씬 우호적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불가리아 왕국을 제외하고 모두 세르비아를 포함한 협상국 편에 서서 오스트리아와 싸운 것도 동맹국에 하필 옛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이 있던데다 그런 뒤에도 전쟁의 승리 내지 대세는 이미 미국 참전 이전부터 협상국에게 꽤 기울어있던 상황이란 걸 감안해야 한다.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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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엔촐레른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 |
독일 역사에서 라이벌인 이미지와 다르게 호엔촐레른 가문과는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의 즉위를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가 도운 것도 그렇고, 싸운 기간보다는 오히려 협력한 기간이 더 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호엔촐레른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영향력이 거의 닿지 못하던 북독일에서 황제를 대표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충견(...)을 자처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될 때 오스트리아 대공국-보헤미아 왕국과 함께 마지막까지 남은 나라가 프로이센 왕국이었다. 또한 민족주의가 발흥하여 1848년 혁명이 일어났을 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로이센 국왕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 황제의 선봉장 역할이면 충분하다.'는 입장이었으며, 동생인 빌헬름 1세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형과 똑같은 입장을 견지했다.
국내에서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와 함께 '한때 유럽에서 잘 나갔던 옛날 왕조' 정도로 기억되는데, 주로 빈을 비롯한 오스트리아의 지배자로만 아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인 프라하, 부다페스트, 브라티슬라바, 류블랴나, 자그레브, 클루지나포카, 크라쿠프, 르비우 및 체르니우치, 비교적 최근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밀라노,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 드 부르고뉴의 결혼으로 합스부르크령이 되었다가 스페인 합스부르크를 거쳐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지배당했던 벨기에의 브뤼셀, 오스트리아의 오랜 월경지였다가 바덴 대공국에게 넘겨준 독일 프라이부르크를 비롯하여 현재의 오스트리아 국경을 훨씬 넘어선 지역을 여행하다가 이들의 역사, 문화적 영향, 흔적들을 보면서 놀라기도 한다.
2022년 11월부터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합스부르크 왕조 특별 전시회가 열렸다. 빈 미술사 박물관이 소장중인 합스부르크 가문 소유 왕실 유물, 수집 예술품 등이 다수 포함되어 주목을 받았다. 본래 2023년 2월 말까지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인기가 많아 3월 15일까지 2주 연장되었다. 결국 32만명이 넘는 누적 관람객수를 기록하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뮤지컬 팬들에게는 19세기를 풍미한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통칭 '씨시') 황후를 주인공으로 한 '엘리자벳'이 유명하다.
만화 봉신연의의 극중극인 '국립 앙뉘 학원'의 주인공도 합스부르크 출신으로 설정되어 있다.
미국 드라마 30 Rock에도 한 에피소드에 이 가문의 후손이 등장한다. 잭 도너기의 소개로 리즈 레몬과 제나 마로니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손이라는 공작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게 되었는데, 제나 마로니는 동화속 왕자님을 상상하며 그를 유혹하여 팔자를 고칠 생각이 부풀었지만 막상 만나보니 휠체어에 앉아 있고 그 외에도 몸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고 정신지체까지 있는 심각한 수준의 장애인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전병을 풍자한 것으로 추정되나 정작 합스부르크를 상징하는 주걱턱은 재현하지 않았다. 제나 마로니는 그래도 굴하지 않고 공작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하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생일 축하 노래와 함께 상태가 별로 안 좋았던 공작은 사망해버리고,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던 집사가 공작이 사망하여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끝났다고 선언하며 제나의 꿈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실제로는 물론 극중 설정과 정반대로, 실존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구 왕실들 중에서도 상당히 큰 가문에 속한다.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의 친손자만 해도 13명이나 되고, 분가인 토스카나 대공가의 일원이나 다른 먼 친척들도 여럿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백작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의 신성 그리핀 제국의 전신인 신성 팰컨 제국이 건국된 후부터 황가와 6개의 대공가가 중첩적인 혼인관계를 맺어 사촌 이상의 근친혼 관계가 되었다는 설정이 있는데 모티브가 된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패러독스사의 게임들에도 등장한다.
- 크루세이더 킹즈 2, 크루세이더 킹즈 3: 1066년 시나리오 기준으로 알프스 아래 아르가우 백작령 하나만 점유하고 있는 애처로운 합스부르크 가문을 발견할 수 있다. 867년 시나리오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뿌리가 되는 에티호넨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창립자 라트보트의 조상은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가문이라 몰입하기도 좋고 봉신 플레이와 신성 로마 제국 특유의 시스템을 익힐 겸 해보기도 괜찮다.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는 오스트리아 지역 공작령들을 장악하면 공작령들을 왕국급 작위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묶을 수 있다. 역사적인 흐름도 따라갈 수 있고 장자 상속제를 훨씬 빨리 얻을 수 있는 성능적으로도 훌륭한 결단이니 목표로 삼기 적합하다. 아니면 카페 왕조를 몰락시키고 프랑스의 왕위를 찬탈하거나 북독일로 진출해 북방 십자군을 주도하며 프로이센 지역에 자리를 잡는 흥미로운 대체역사를 써내려가도 상관없다. Tours & Tournaments DLC가 추가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시작하는 도전과제 A.E.I.O.U. & Me가 생겼는데,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5번 이상 대규모 결혼식을 치르고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통치해야 클리어할 수 있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 초기 시나리오에서는 프리드리히 5세가, 중기 시나리오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인 카를 5세가 등장한다. 하지만 99%의 유저는 초반부 시나리오를 선택하며, 오스트리아는 강국이긴 하지만 매우매우매우 복잡한 외교능력을 필요로 하기에 초보자에게는 어렵다.
-
빅토리아 2,
빅토리아 3:
오스트리아 제국이 등장하지만, 빅토리아 2는 캐릭터들을 아예 배제시킨 철저한 국가 중심 게임이므로 사실상 공기에 가깝다. 빅토리아 3의 경우 크루세이더 킹즈 3의 3D 포트레잇을 도입하고 캐릭터들에게 이해 집단이나 성격 같은 개성을 주어 정부 정통성[85]이나 국가 포인트[86]에 영향이 가서 이전 작들에 비해서는 비중이 있다.
- 하츠 오브 아이언 4: Death or Dishonor DLC가 있고 헝가리로 플레이할 때 합스부르크 가문 복귀 루트로 진행하면 오토가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다시 세울 수 있다. 그리고 Waiking the Tiger DLC를 가지고 있으면 나치 독일로 시작한 플레이어가 히틀러 축출 후 카이저라이히의 귀환 중점으로 제정 복고시킨 다음일 때[87] '제국의 정서를 통한 화해'를 통해 오스트리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재수립시킬 수 있다. 이로써 아예 미래 우주 시대 배경인 스텔라리스를 제외하고 모든 패러독스 역사 게임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등장했다. 스텔라리스에서도 커스텀 국가를 만들 때 인간형 이름의 3, 4번째 목록을 고르고 랜덤으로 이름을 돌리면 지도자의 성으로 합스부르크가 나올 때가 있으며, 대군주 DLC에서 제국 영지 기원을 선택하면 종주국의 이름이 신성 ~ 제국으로 나오고 종속국의 이름이 ~ 선제후국으로 나오는등 합스부르크 가문이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연이 깊은 신성 로마 제국 컨셉을 즐길 수 있다.
- 카이저라이히: 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 진영이 승전하였을때를 주제로 한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의 대표격 모드이다. 동맹국이 승전하였기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멸망하지 않고 카를 1세가 카이저로 계속 제국을 통치하고 있다. 민족주의로 인한 문제의 고증을 살려 전후 민족 분포에 따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을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보헤미아,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일리리아로 나누어 자치권을 준다는 설정이다. 이로 인해 게임 내에서는 세력상으로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틀이 유지되고 사실상 5개의 국가로 분단된 것이나 마찬가지로 나온다. 게임 진행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조가 통치하는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을 실현시키며 영토를 통합할 수도 있고 내전에서 패배하여 독일 제국에 합병되어 독일 연방에 소속된 왕조로 전락할수도 있다. 게임이 진행되다 보면 카를 1세 다음으로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오토 1세라는 이름의 카이저로 즉위한다.
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로트링겐 공작가일 시절의 조상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가 있어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핏줄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에 이어지고 있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4남 테오도로 팔레올로고[88]가 이탈리아 북부의 몬페라토를 다스리던 알레라미치 가문 출신의 어머니 이레네[89]로부터 몬페라토 변경백 작위를 물려받았는데, 그의 후손이 만토바 공국의 곤차가 가문에 시집을 갔고, 곤차가의 후손이 로렌 가문으로 시집을 가서 이어진 후손인 프란츠 1세가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함으로서 비록 직계는 아니긴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합스부르크 가문에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90]
여러 역사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싸우지 말고 합스하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인공지능이 발전함에 따라 인공지능이 인공지능이 만든 콘텐츠를 학습하는 현상을 반복하면 열화되거나 엉뚱한 결과물을 내놓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합스부르크가의 근친혼에 빗대어 속칭 '합스부르크 인공지능'(Habsburg AI)[91]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7.1. 장례 의식
가문의 장례식이 유명한데, 카푸친 교회에서 특유의 봉안 의식을 거침으로써 마무리된다.첫 번째로 장례 행렬의 선두가 장례식장의 문을 두드리고 고인이 황족으로서 가지고 있던 작명들을 말하지만 교회 관계자는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라고 하며 문을 열어주지 않고, 두 번째로 문을 두드리고 고인이 가지고 있던 직업과 공훈들을 말하지만[92] 역시 똑같은 말을 하며 문을 열어주지 않고,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고는 "[고인의 이름], 한낱 죄 많은 자입니다."라고 말하면 그제서야 문을 열어준다. 링크
불교 문화권에서도 비슷한 선문답이 있다.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옛 친구인 고명한 스님을 보러 절에 찾아가, 시중 드는 동자에게 "이러이러한 관직의 아무개가 스님을 뵙고자 한다고 전해라"고 하자 그 말을 전해 들은 스님은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고 대답할 뿐 얼굴도 내밀지 않는다. 그 대답에 관리가 이번엔 자기소개에서 관직을 빼고 "그냥 아무개가 찾아왔다고 다시 한번 전해다오"라고 말하면 그제서야 스님이 "오, 나도 그 친구가 한번 보고 싶었지"라며 반겨준다는 내용이었다.
양쪽 모두 제아무리 명예와 지위가 드높은 자라고 한들 죽어서까지 그것을 가지고 갈 수는 없으니 겸손을 잊지 말아야 할 한낱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8. 관련 문서
- 오스트리아/역사
- 오스트리아 공국
- 오스트리아 대공국
- 합스부르크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슈테판 대성당[93]
- 카푸친 교회
- 합스부르크
- 호프부르크
- 신성 로마 제국
- 압스부르고 왕조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장.
[2]
신성 로마 제국 문장의 검은 쌍두독수리와 황금색 깃발에서 비롯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수립 후 국기로도 사용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흑황백 삼색기처럼 국기와 어기가 같다. [3] 가문 자체의 문장은 좌측의 노란 바탕에 붉은 사자 문장이다. 가운데의 문장은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의 문장이며, 오른쪽의 노란 바탕의 새가 그려진 붉은 줄의 문장은 로렌 공작으로서의 문장이다. [4] 카를로스 2세의 사망 이후 단절되기 전까지는 본가였다. [5] 카를 6세의 사망 이후 합스부르크의 본가가 되었다. [6] 분할 상속에 따라 형성된 분가로,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4세를 시조로 하여 한 번,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2세를 시조로 하여 두 번, 오스트리아 대공 레오폴트 5세를 시조로 하여 세 번 형성된 합스부르크티롤 분가를 통틀어 칭한다. 비슷하게 에른스트 공작을 시조로 하여 한 번,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를 시조로 하여 두 번 형성된 합스부르크슈타이어마르크 분가가 있으나 본가가 단절되면서 둘 다 본가화했다. [7] 레오폴트 2세의 아들 요한 대공이 안나 플로흘과 귀천상혼을 하면서 형성되었다. [8] 레오폴트 2세의 십남 라이너 요제프 대공의 차남 에른스트 대공이 헝가리 하급 귀족과 귀천상혼하여 형성된 가문이다. [9] 라이너 요제프 대공의 오남 하인리히 안톤이 평민과 결혼하면서 형성 된 가문이다. [10]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아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조피 초테크 폰 초트코바와 귀천상혼을 하면서 형성되었다. [11] 표어는 아니고 유명한 시구다. 뒤에 이어지는 문장은 'Nam quae Mars aliis, dat tibi regna Venus(마르스 신이 다른 왕국들에게 선사하는 것을 그대는 베누스 여신이 선사하므로)'이다. [12] 합스부르크 가문의 표어(motto)이자 프리드리히 3세의 서명.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의 유명 모드인 Meiou & Tax, 일명 메죽 모드의 모드명이 여기서 따온 것이다. [13] 자세히 보면 프란츠 2세와 오스트리아 제국 페르디난트 1세의 초상화가 바뀌어 그려져 있다. [14] 유럽에서 황제, 제국을 칭하려면 로마 제국의 후예여야 한다.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로마 제국의 동쪽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후예임을 자처했다. 대영제국으로 전세계를 호령할 당시의 영국도 정작 공식 국호는 제국이 아닌 그레이트 브리튼 연합왕국이었으며, 영국 국왕의 공식 칭호도 황제가 아닌 왕/여왕(King/Queen)이었다.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보다 더 강한 국력을 자랑한 프랑스 왕국의 태양왕 루이 14세조차도 끝까지 왕으로 남았고, 황제를 칭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면 프랑스 왕국의 국교였던 가톨릭 교회가 인정하는 서유럽의 유일한 황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뿐이었기 때문에 실제 국력이 어떻든 가톨릭 교회 중심 구체제하의 프랑스 왕국은 죽었다 깨어나도 제국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가톨릭 교회 중심의 구체제가 한번 무너지고 난 후에 집권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등장하고 나서야 프랑스는 비로소 황제를 칭했다. 황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이 몰락한 이후 다시 돌아온 부르봉 왕조의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의 칭제를 무르고 다시 왕을 칭했는데 기껏 올라갔던 프랑스의 황제국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고 다시 왕국/왕으로 돌아간다는, 동양적 시각으로는 너무나 이상하게 보이는, 이런 부르봉 왕조의 행동은 옛 질서를 복구시키고자 했던 그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의 프랑스도 여전히 엄연한 유럽 강대국의 한 축이었으나 부르봉 왕조가 신봉한 가톨릭 교회 중심 유럽 구체제 질서의 세계관에서는 실제 자신들의 국력과는 무관하게 프랑스는 황제국이 아닌 왕국이어야 했던 것이다. 다만 이와 별개로 프랑스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국력과 맞먹거나 더 강했고 뿌리가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프랑크 왕국이기 때문에 프랑스 국왕은 황제만 아닐 뿐이지 역사, 정통성, 권위면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도 별로 꿀리지 않았다. [15] 다만 헝가리의 경우 명목상 왕국으로 남았기 때문에 카를 1세가 헝가리 왕위라도 되찾으려고 했으나 섭정을 자처하던 호르티 미클로시가 정작 합스부르크 가문이 돌아오는 것은 막아버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공산화되어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되었기에 무산되었다. 또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자신의 사후에 과거 스페인의 왕실이었던 합스부르크의 후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를 스페인 국왕으로 추대하는 것을 고려해보기도 했지만 오토 폰 합스부르크 본인이 거부했고 스페인계 부르봉 왕조의 복고가 이루어졌다. [16] 군주국에서 공화국이 된 다른 유럽의 왕가들은 대부분 입헌군주제가 된 뒤에도 왕가 구성원들의 실책이 명확하게 커서 공화국이 된 것이라 유구한 역사의 왕가라도 대중적으로나 학계적으로나 인식이 그닥 좋지 않아 향수가 옅지만 합스부르크 왕가는 황위 후계자이자 온건파 및 평화주의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한 사라예보 사건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인해 국가 경제 파탄과 국제외교의 냉혹한 힘의 논리로 책임을 지고 역사적으로 다소 억울하게 폐위를 당한 케이스라서 향수를 자극하는 면모가 더 있다. [17] 신성 로마 제국과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제후국으로서의 대공국이지만, 오스트리아 대공국 자체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성들이 대대로 유럽의 다른 왕실 귀족들과 차별화되는 ' 대공'(Erzherzog)이라는 특별한 작위를 자칭한 것도 위조문서를 앞세워 오스트리아 공국을 멋대로 격상시킨 데에서 비롯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성립된 이후에 다른 공국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대공국도 1918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18] 프란츠 1세(토스카나 대공으로는 프란체스코 2세)는 토스카나 대공도 겸임했으나, 1765년 그가 사망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위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요제프 2세에게, 토스카나 대공국은 레오폴트 2세에게 따로 상속되며 토스카나 대공국은 합스부르크 제국과 별도로 상속되었다. 뒷날 레오폴트 2세가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속받으며 차남 페르디난트가 토스카나 대공국을 물려받은 뒤로는 분가가 세습하는 작위로 굳어졌으나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토스카나 대공국이 폐지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법에 따라 1866년 이후 출생한 마지막 공작 페르디난도 4세의 자손들은 '오스트리아 대공/대공녀(Erzherzog/in von Österreich)' 칭호만 사용하고 있다. [19] 위의 토스카나 대공위와 마찬가지로 분가가 보유한 작위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4남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이 모데나 공국의 상속녀 마리아 베아트리체와 혼인한 것을 계기로 1814년 그 아들인 프란체스코 4세가 모데나 공국의 공작으로 즉위하면서 분가에서 세습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4세의 아들인 프란체스코 5세의 대에서 이탈리아 통일로 공국이 멸망하면서 모데나 공작위는 2대에 그쳤다. 프란체스코 5세가 자녀를 두지 못해 남계는 끊어졌고, 이후 이 가문에 대한 권리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카를 1세를 거쳐 카를 1세의 차남 로베르트 대공에게 상속되어 그 후손들이 보유하고 있다. [20] 국립중앙박물관이 2022년 11월~2023년 2월 주최한 합스부르크 600년 특집 미술품 전시회에 맞춰 제작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유튜브 영상은 나무위키에서 재생이 불가능해 해당 영상을 제작한 지식해적단 채널의 해당 영상 링크로 대체한다. [21] 참고로 그는 모계로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 인데 그의 할아버지인 라트보트와 결혼한 그의 할머니 로렌의 이다의 아버지는 카롤루스 대제의 증손인 서프랑크의 루이 2세의 외손녀의 아들이고, 외할아버지는 카롤루스 대제의 6대손이며, 외할머니는 모계로도 부계로도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인 위그 카페의 아버지인 파리 백작 대 위그의 딸이다 [22] 루돌프 1세의 첫 부인인 호엔베르크의 게르트루데가 호엔촐레른 가문 슈바벤계의 후손이라 먼 친척이었다. 참고로 이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라는 인물은 독일을 통일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프로이센 왕국 호엔촐레른 가문 프랑켄계의 직계조상으로, 호엔촐레른 가문의 초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고조할아버지이다. [23] 원래는 알브레히트와 그의 동생 루돌프에게 나눠주었으나 마음을 바꾸어 알브레히트에게 몰아주고 둘째에게는 이름만 남은 슈바벤 공작위를 하사했다. [24] 이후 스위스와 합스부르크는 시시때때로 충돌하고 영합하며 처음의 종속구도에서 차츰 지분을 양보해주는 식으로 변모해갔고 스위스의 독립 달성은 수세기 후 30년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성취되었다. 참고로 네덜란드 또한 합스부르크 속령화와 독립 과정에 있어 스위스와 싱크로가 상당히 맞아 떨어진다. 차이점이라면 400년 정도 시간차가 난다는 정도이다. [25] 원래 루돌프 1세는 생전에 알브레히트를 독일왕으로 선출하여 제위를 세습하기를 원했으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강세를 우려한 선제후들은 이를 거부하고 루돌프 1세가 죽자 나사우 가문의 아돌프를 선출했다. 알브레히트는 무력 행사끝에 괼하임 전투에서 아돌프를 전사시키고 나서야 명실상부한 독일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26] 루돌프 1세가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에게 승리한 후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는 자신이 가져가고, 케른텐과 크라인은 자신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괴르츠-티롤 백작 마인하르트에게 양도했는데, 마인하르트의 직계가 단절되면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반환하는 것을 조건으로 걸고 넘겨주었다. [27] 다만, 현대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영토는 오스트리아 공국, 케른텐 공국의 90%,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60%, 티롤 북부와 동부, 잘츠부르크, 과거 헝가리 왕국 영토 중 독일인이 많았던 부르겐란트로 구성되어, 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티롤 백국, 괴르츠 백국, 트리에스테, 알자스와 슈바벤 일대의 월경지 외지오스트리아로 구성되었던 합스부르크 가문 본령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28] 막시밀리안 1세는 부황 프리드리히 3세가 살아있을 적에 친척인 티롤의 지기스문트를 쫓아내고 본인이 부유한 외지오스트리아와 티롤을 차지했다. [29] 동유럽을 호령하던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지 대를 잇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합스부르크 가문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라 희극적이기까지 하지만, 역사에서 이런 일은 제법 흔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조선 말기에 가면 왕실이 자주 단절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유럽에선 그럴 경우 딸에게도 어느 정도 상속권이 인정되어 사위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동양의 경우엔 아무리 딸의 상속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서자를 왕위에 올리거나 방계 왕족을 찾아 선왕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왕위에 올렸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30] 엄밀하게는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7세가 잠시 황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자 후사가 끊겼기 때문에 생긴 일인데,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황제로 선출되었다. [31] 독일어로는 Erwählter Römischer Kaiser. [32] 정확히는 발루아 가문 내에서도 부르고뉴 공국을 다스리던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야기에우워 가문 내에서도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을 다스리던 야기에우워 가문 한정이다. 다만 프랑스 왕국을 다스리던 발루아 가문과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다스리던 야기에우워 가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부계가 끊겼다. [33]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를 얻은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요절했기 때문이다. 보헤미아에서는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를,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서는 후녀디 야노시의 차남이었던 마차시 1세를 선출했고, 후스파 문제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보헤미아에서는 이르지의 사후 라디슬라우스의 누나 엘리자베트와의 혼맥을 이유로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통치하고 있었던 야기에우워 왕조를 옹립했다. [34] 엄밀히 말해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는 1918년까지 선거군주제를 유지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와 헝가리 귀족들의 반란 시도를 모두 좌절시키고 왕권을 공고히 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만 왕위 후보자가 나올 수 있도록 준세습화되었다. [35] 카를 5세의 생전인 1521년부터 주권자로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다스렸으며, 카를 5세를 대신하여 독일의 종교 개혁 문제를 처리했다. [36]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 [37] 다만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오스만 제국 때문에 1/3 정도만 차지했다. [38] 어디까지나 신성 로마 제국 영방제후들에게 관대했을 뿐, 본토인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예수회를 초빙하는 등 대항종교개혁을 실시해 개신교를 억압했다. [39]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파르마 공국도 스페인 부르봉 왕조에게 빼앗겼으나 이곳을 잃은 타격은 슐레지엔에 비해 크지 않았다. [40] 오스만 제국이 슬슬 망조가 보이니 필요 없어진 합스부르크를 손절하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41] 모데나 공작가는 마지막 공작 프란체스코 5세가 사망한 후 남계가 단절되었고, 토스카나 대공가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42]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한 대독일 연방을 결성하길 원했지만,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굴욕적인 통일에다가 헝가리-크로아티아 같이 독일 연방에 포함되지 않는 국가를 포기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반대했다. 즉 누가 독일 통일에서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주체인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있다. [43]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은 카를 5세와 별도로 페르디난트 1세의 아내인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에게서 계승된 셈이라 실질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카를 5세로부터 계승한 작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하나뿐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원칙상 선거군주제였던 데다가, 카를 5세가 제위에 오를 시점만 하더라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실질적 세습은 공고하지 못했다. 당장 카를 5세부터가 거액의 선거자금을 동원해 어렵사리 제위에 올랐고, 본디 제위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계승할 수도 없었다. [44] 부계는 로트링겐 가문이지만 모계인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인식되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과 비슷한 케이스로, 부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지만 모계인 키부르크 가문의 특징이나 정체성이 강하여 새로운 키부르크 가문이라는 의미로 노이키부르크라고도 한다. [45] 루돌프 2세에게는 요한이라는 아들이 한 명 있었지만 알브레히트 1세는 조카인 요한을 무시하고 전권을 손에 쥐었다. 이후 알브레히트 1세는 분노한 요한에게 살해당했으나 요한은 족보에서 파였고 후임 독일왕 하인리히 7세에게 제국추방령까지 당해 이탈리아반도까지 도망쳐 유랑하다 피사에서 객사했다. [46] 추가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더불어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47] 신성 로마 제국 마티아스 황제의 황후 안나가 이 티롤 분가 출신이다. [48] 스페인 왕국 펠리페 3세의 왕비 마르가레테가 이 슈타이어마르크 분가 출신이다. [49] 첫 번째 결혼은 귀천상혼이었고, 두 번째 결혼에서는 아들이 없었다. [50] 신성 로마 제국 페르디난트 3세의 황후 마리아 레오폴디네, 신성 로마 제국 레오폴트 1세의 황후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가 이 티롤 분가 출신이다. [51] 모데나 레조 공국 에스테 왕조의 마지막 공작 에르콜레 3세 데스테의 딸이자 유일한 적자. 상속받을 영지가 없는 셋째 이하의 아들들을 상속녀와 결혼시켜 막대한 재산을 물려주려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결혼이었으나, 정작 모데나를 통치했던 에스테 가문은 살리카 법을 적용했기 때문에 페르디난트 대공이 모데나 공국을 상속받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도 나폴레옹 전쟁으로 전 유럽에 깽판난 여파로 페르디난트 대공의 아들 프란체스코가 신생 모데나 레조 공국의 프란체스코 4세로 즉위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노력은 결실을 보았다. [52] 참고로 헝가리 궁정백은 세습제가 아니다. 원래 헝가리인 대귀족들이 임명되는 작위였으나 헝가리인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 국왕들이 가문의 일원중에서 궁정백을 임명했다. [53] 제1차 세계 대전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1919년 8월 헝가리 왕국 섭정, 1936~1944년 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총재 [54]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의 장남 요제프 프란츠 대공(1895~1957)의 장남 요제프 아르파드 대공(1932~2017)의 차남이다. 요제프 카를 위로 장남이 1명 있긴 했었는데 태어나서 하루만에 죽는 바람에 요제프 카를 대공이 사실상의 장남 역할을 하였다. [55] 이 맏딸인 마리아 테레사 여대공은 후에 뷔르템베르크의 필리프 공작에게 시집을 가 뷔르템베르크 공작 알브레히트를 비롯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56] 세 번 결혼해서 1남 2녀를 봤지만, 전부 귀천상혼이라 자녀들이 합스부르크가의 수장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내려준 합스부르크 백작/백작부인 칭호만 쓸 수 있었을 뿐 테셴 공작은 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브레히트의 사촌형제인 카를 알브레히트와 레오 카를도 결혼해서 각각 2남 2녀, 2남 3녀를 두었지만 둘 다 귀천상혼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아들들도 테셴 공작위를 습작할 수 없었다. [57] 레오폴트 2세의 증손자이며, 테셴 공작 카를 대공의 손자이다. [58] 합스부르크 가문의 철자가 Habsburg가 아닌 Hapsburg로 되어 있다. [59] 근교 계수(Inbreeding coefficient)란 어떤 개체가 가지고 있는 한 쌍의 대립유전자가 선조가 가진 한 유전자의 복제본일 확률을 의미한다. 부친과 모친이 공통조상으로부터 각각 동일한 복제 유전자를 유전받고 이를 자녀에게 각각 하나씩 물려주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므로 부모가 유전적으로 가까울수록 근교 계수도 높아진다. 일반적으로 4촌혼일 경우 0.0625, 3촌혼일 경우 0.1250, 남매혼일 경우 0.2500의 근교 계수를 가진다. [60] 출처: Gonzalo Álvarez; Francisco C. Ceballos, Human Heredity 2015 Vol. 80 No. 2, Royal Inbreeding and the Extinction of Lineages of the Habsburg Dynasty, 2015, 3p [61] 표의 군주들 중 가장 근교 계수가 낮다. [62] 표의 군주들 중 가장 근교 계수가 높다. 대대로 반복된 근친혼으로 인해 3촌혼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남매혼보다 높은 근교 계수를 지녔다. [63] 가톨릭 부부왕으로 유명한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란도 2세도 6촌지간이었다. [64] 물론 스페인 계승 이전의 합스부르크 가문도 귀천상혼을 지키기 위해 어느 정도의 먼 근친혼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이는 스페인계 합스부르크처럼 유럽 내에서도 두드러지게 극단적인 수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다른 유럽 가문들과 엇비슷한 수준에 불과했다. 알브레히트 2세,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 프리드리히 3세, 막시밀리안 1세 등이 그 예이다. [65] 단 그렇다고 선대 왕들이 마냥 막장이라는 애기는 아니다. 어쨌거나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는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스페인의 전성시대를 이끌었고, 그리고 최근에는 쇠락해가는 스페인의 현실을 깨닫고 개혁도 시도해보고 노력도 했다고 평가받는 펠리페 4세도 존재하는 등, 파도파도 그냥 암군인 펠리페 3세를 제외하면 마냥 막장 왕만 있는 것도 아니다. [66] 실제로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 요제프 1세의 부인과 카를 6세의 부인 역시 개신교 신자였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결혼한 바가 있고, 테셴 공작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부인도 개신교 신자였다. 개신교는 아니지만 요제프 안톤 대공의 첫 번째 부인이 정교회 신자이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결혼은 소수였으며, 절대다수는 가톨릭 신자와 결혼했다. [67] 단, 프랑스 역시 통혼 상대를 따져야 했던 건 마찬가지라 비교적 멀다는 것이지 친척이기는 했다. 예를 들어 펠리페 4세와 프랑스의 엘리자베트는 페르디난트 1세를 기준으로 6촌이었다. 그 외로도 모계를 통해 얽힌 혼맥이 많아 어찌되었든 친척이었다. [68] 펠리페 4세와 그의 두번째 왕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의 딸. 참고로 마리아나는 펠리페 4세의 외조카였다. [69] 22살의 나이에 사망한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낳은 자녀들 중 유일하게 요절하지 않은 자식이다.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 선제후와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고 심지어 폭행까지 당했다고 한다. [70] 다만 마리아 안토니아와 마리아 안토니아의 자녀들 모두 이른 나이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기에 스페인의 국왕으로 즉위하는 일은 없었다. [71] In the absence of inbreeding, if the trait is not inherited then it is not to be passed on to the descendants of the individual However, if this individual marries another affected member of the family, the trait will be reintroduced and likely passed on to his/her offspring, decreasing the possibility of extinguishing the trait. Despite this, while inbreeding clearly played a role in perpetuating the Habsburg lip trait throughout generations, it probably did not play a significant role in its origin, as frequently stated. [72] 출처: Rafael E . Jimenez, The Habsburg Lip: a dominant trait of a dominant family [73] 아이러니하게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봉건주의 영향이 남아있던 것과는 별개로 정치적으로는 황제의 권한이 다소 있었던 점을 제외하면 자유민주주의에 가까웠다. [74]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경우는 이것은 특히 종교 전쟁기에 국한되어 있다. 이는 어릴 적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았던 페르디난트 2세의 개인적인 성향과 황제의 자금줄 역할을 했던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75] 물론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싫어하는 민족들도 있었다. 가령 폴란드인들은 오스트리아가 자국을 멸망시키는 데 일조했기에 합스부르크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그래도 크라카우에 합스부르크 황제가 방문할 때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독일령 폴란드나 러시아령 폴란드의 폴란드인들보다는 불만이 덜했다. 체코인은 30년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었지만 실패한 이후에는 제국 내에서 동등한 주권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선회했다가 자신들의 자치권 요구가 계속 묵살당하자 결국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의 주도로 독립을 선언했으며, 현재 체코 사학계에서는 합스부르크 지배를 암흑기 취급한다. 헝가리인은 현재 루마니아 영토인 트란실바니아에 기반을 두었던 동부 귀족들을 계속 반항했다. 라코치 페렌츠 2세의 쿠루츠 봉기나 1848년 헝가리 혁명은 대부분 트란실바니아나 현재 헝가리 북동부가 주요 전쟁터였다. [76] 사코 디 로마만 하더라도 카를 5세는 세속군주로서 교황을 찍어누르는 정도를 원했지, 사코 디 로마급의 막장을 원한건 아니었다. [77] 반면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나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는 문란한 성생활로 유명했다. 사실 부르봉의 프랑스 통치는 프로테스탄트인 앙리 4세가 프랑스를 지배하려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시작되었기에, 합스부르크 입장에서 보자면 기도 안찼을 것이다. 또한 이때 교황들은 마누라를 한 다스씩 챙기던 시대였다. [78] 당장 인터넷에서 네덜란드 독립사 관련 글을 아무거나 읽어보면 십중팔구는 합스부르크 왕조는 악의 축으로 나온다. [79] 현 룩셈부르크 대공가가 부계로는 부르봉 왕조의 이탈리아계 방계인 보르보네파르마 분가 출신이기는 하지만 장 대공 아들들의 귀천상혼 문제로 대판 싸운 여파로 모계인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을 유지하고 있다. [80] 카페 왕조의 방계로 시작되었고, 16세기에 나바르 여왕 잔과의 결혼으로 나바라 왕위를 획득했다. [81] 사실 마지막 인물은 카를1세의 3남 펠릭스 폰 합스부르크였으나 역시 2개월 후 사망하였다. [82] 남작 가문 출신이라 옛날 같으면 빼박 귀천상혼이었고, 오토 대공의 차남 게오르크는 구 올덴부르크 대공국 가문 딸과 결혼해서 후계자 교체도 가능했지만 오토 대공이 동등결혼으로 인정해 주었다. 사실 구왕실들이 작위가 낮거나 없는 부르주아 가문과 혼사를 맺어 재정적 안정을 바라는 경우가 많은데 프란체스카의 친정은 티센크루프로 잘 알려진 재벌가문이다. 참고로 근대 들어 부르주아 가문들이 남작 같은 하급귀족 작위를 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오토 대공은 까다로웠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귀천상혼에 대한 규율을 완화시켜, 1918년 군주제 붕괴 이후 귀족 여성과의 결혼으로 귀천상혼이 된 후손들에 대한 계승권도 소급해서 인정시켰다. 현재는 수장의 승인과 가톨릭 혼인성사만 올리면 평민과 결혼했다 할지라도 동등결혼으로 인정된다. # [83]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래도 폴란드에 대한 인식이 독일과 러시아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를 점령하여 합스부르크 가문 황제가 폴란드 국왕을 겸하는 방식으로 폴란드 왕국의 부활을 계획했으나 독일 제국의 반대로 최종적으로는 무산되었다. [84] 왜 세르비아가 있냐면 1차대전 시기 잠깐 동안 오헝 제국 지배 지역이 오헝 제국에 편입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85] 지도자가 속한 이해집단이 여당이 아니면 정통성이 깎인다. [86] 지도자 성격에 따라 세수가 줄거나 연구 포인트를 추가적으로 얻기도 한다. [87] 모든 전쟁을 끝낼 대전쟁에 참여한 빌헬름 2세 혹은 적합한 호엔촐레른 후보 중 하나인 빌헬름 3세가 복위한다. [88] 1291~1338, 그리스어로는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 [89] 그리스어로는 이리니 [90] 다만 동로마 황실과의 혈연을 근거로 로마의 계승을 주장했던 러시아 제국과 달리 오스트리아는 혈연을 로마 계승의 근거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91] AI Inbreeding이라고도 함 [92] 과거에는 직위명과 본성만을 사용했지만,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경우 제정 폐지 뒤 정치계의 거물로 활동했기에 학위를 비롯해 그가 거쳤던 숱한 훈장과 여러 직함들을 읊었다. [93] 카푸친 교회 이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들이 안장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문장의 검은 쌍두독수리와 황금색 깃발에서 비롯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수립 후 국기로도 사용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흑황백 삼색기처럼 국기와 어기가 같다. [3] 가문 자체의 문장은 좌측의 노란 바탕에 붉은 사자 문장이다. 가운데의 문장은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의 문장이며, 오른쪽의 노란 바탕의 새가 그려진 붉은 줄의 문장은 로렌 공작으로서의 문장이다. [4] 카를로스 2세의 사망 이후 단절되기 전까지는 본가였다. [5] 카를 6세의 사망 이후 합스부르크의 본가가 되었다. [6] 분할 상속에 따라 형성된 분가로,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4세를 시조로 하여 한 번,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2세를 시조로 하여 두 번, 오스트리아 대공 레오폴트 5세를 시조로 하여 세 번 형성된 합스부르크티롤 분가를 통틀어 칭한다. 비슷하게 에른스트 공작을 시조로 하여 한 번,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를 시조로 하여 두 번 형성된 합스부르크슈타이어마르크 분가가 있으나 본가가 단절되면서 둘 다 본가화했다. [7] 레오폴트 2세의 아들 요한 대공이 안나 플로흘과 귀천상혼을 하면서 형성되었다. [8] 레오폴트 2세의 십남 라이너 요제프 대공의 차남 에른스트 대공이 헝가리 하급 귀족과 귀천상혼하여 형성된 가문이다. [9] 라이너 요제프 대공의 오남 하인리히 안톤이 평민과 결혼하면서 형성 된 가문이다. [10]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아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조피 초테크 폰 초트코바와 귀천상혼을 하면서 형성되었다. [11] 표어는 아니고 유명한 시구다. 뒤에 이어지는 문장은 'Nam quae Mars aliis, dat tibi regna Venus(마르스 신이 다른 왕국들에게 선사하는 것을 그대는 베누스 여신이 선사하므로)'이다. [12] 합스부르크 가문의 표어(motto)이자 프리드리히 3세의 서명.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의 유명 모드인 Meiou & Tax, 일명 메죽 모드의 모드명이 여기서 따온 것이다. [13] 자세히 보면 프란츠 2세와 오스트리아 제국 페르디난트 1세의 초상화가 바뀌어 그려져 있다. [14] 유럽에서 황제, 제국을 칭하려면 로마 제국의 후예여야 한다.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로마 제국의 동쪽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후예임을 자처했다. 대영제국으로 전세계를 호령할 당시의 영국도 정작 공식 국호는 제국이 아닌 그레이트 브리튼 연합왕국이었으며, 영국 국왕의 공식 칭호도 황제가 아닌 왕/여왕(King/Queen)이었다.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보다 더 강한 국력을 자랑한 프랑스 왕국의 태양왕 루이 14세조차도 끝까지 왕으로 남았고, 황제를 칭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면 프랑스 왕국의 국교였던 가톨릭 교회가 인정하는 서유럽의 유일한 황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뿐이었기 때문에 실제 국력이 어떻든 가톨릭 교회 중심 구체제하의 프랑스 왕국은 죽었다 깨어나도 제국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가톨릭 교회 중심의 구체제가 한번 무너지고 난 후에 집권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등장하고 나서야 프랑스는 비로소 황제를 칭했다. 황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이 몰락한 이후 다시 돌아온 부르봉 왕조의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의 칭제를 무르고 다시 왕을 칭했는데 기껏 올라갔던 프랑스의 황제국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고 다시 왕국/왕으로 돌아간다는, 동양적 시각으로는 너무나 이상하게 보이는, 이런 부르봉 왕조의 행동은 옛 질서를 복구시키고자 했던 그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의 프랑스도 여전히 엄연한 유럽 강대국의 한 축이었으나 부르봉 왕조가 신봉한 가톨릭 교회 중심 유럽 구체제 질서의 세계관에서는 실제 자신들의 국력과는 무관하게 프랑스는 황제국이 아닌 왕국이어야 했던 것이다. 다만 이와 별개로 프랑스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국력과 맞먹거나 더 강했고 뿌리가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프랑크 왕국이기 때문에 프랑스 국왕은 황제만 아닐 뿐이지 역사, 정통성, 권위면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도 별로 꿀리지 않았다. [15] 다만 헝가리의 경우 명목상 왕국으로 남았기 때문에 카를 1세가 헝가리 왕위라도 되찾으려고 했으나 섭정을 자처하던 호르티 미클로시가 정작 합스부르크 가문이 돌아오는 것은 막아버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공산화되어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되었기에 무산되었다. 또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자신의 사후에 과거 스페인의 왕실이었던 합스부르크의 후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를 스페인 국왕으로 추대하는 것을 고려해보기도 했지만 오토 폰 합스부르크 본인이 거부했고 스페인계 부르봉 왕조의 복고가 이루어졌다. [16] 군주국에서 공화국이 된 다른 유럽의 왕가들은 대부분 입헌군주제가 된 뒤에도 왕가 구성원들의 실책이 명확하게 커서 공화국이 된 것이라 유구한 역사의 왕가라도 대중적으로나 학계적으로나 인식이 그닥 좋지 않아 향수가 옅지만 합스부르크 왕가는 황위 후계자이자 온건파 및 평화주의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한 사라예보 사건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인해 국가 경제 파탄과 국제외교의 냉혹한 힘의 논리로 책임을 지고 역사적으로 다소 억울하게 폐위를 당한 케이스라서 향수를 자극하는 면모가 더 있다. [17] 신성 로마 제국과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제후국으로서의 대공국이지만, 오스트리아 대공국 자체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성들이 대대로 유럽의 다른 왕실 귀족들과 차별화되는 ' 대공'(Erzherzog)이라는 특별한 작위를 자칭한 것도 위조문서를 앞세워 오스트리아 공국을 멋대로 격상시킨 데에서 비롯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성립된 이후에 다른 공국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대공국도 1918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18] 프란츠 1세(토스카나 대공으로는 프란체스코 2세)는 토스카나 대공도 겸임했으나, 1765년 그가 사망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위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요제프 2세에게, 토스카나 대공국은 레오폴트 2세에게 따로 상속되며 토스카나 대공국은 합스부르크 제국과 별도로 상속되었다. 뒷날 레오폴트 2세가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속받으며 차남 페르디난트가 토스카나 대공국을 물려받은 뒤로는 분가가 세습하는 작위로 굳어졌으나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토스카나 대공국이 폐지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법에 따라 1866년 이후 출생한 마지막 공작 페르디난도 4세의 자손들은 '오스트리아 대공/대공녀(Erzherzog/in von Österreich)' 칭호만 사용하고 있다. [19] 위의 토스카나 대공위와 마찬가지로 분가가 보유한 작위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4남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이 모데나 공국의 상속녀 마리아 베아트리체와 혼인한 것을 계기로 1814년 그 아들인 프란체스코 4세가 모데나 공국의 공작으로 즉위하면서 분가에서 세습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4세의 아들인 프란체스코 5세의 대에서 이탈리아 통일로 공국이 멸망하면서 모데나 공작위는 2대에 그쳤다. 프란체스코 5세가 자녀를 두지 못해 남계는 끊어졌고, 이후 이 가문에 대한 권리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카를 1세를 거쳐 카를 1세의 차남 로베르트 대공에게 상속되어 그 후손들이 보유하고 있다. [20] 국립중앙박물관이 2022년 11월~2023년 2월 주최한 합스부르크 600년 특집 미술품 전시회에 맞춰 제작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유튜브 영상은 나무위키에서 재생이 불가능해 해당 영상을 제작한 지식해적단 채널의 해당 영상 링크로 대체한다. [21] 참고로 그는 모계로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 인데 그의 할아버지인 라트보트와 결혼한 그의 할머니 로렌의 이다의 아버지는 카롤루스 대제의 증손인 서프랑크의 루이 2세의 외손녀의 아들이고, 외할아버지는 카롤루스 대제의 6대손이며, 외할머니는 모계로도 부계로도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인 위그 카페의 아버지인 파리 백작 대 위그의 딸이다 [22] 루돌프 1세의 첫 부인인 호엔베르크의 게르트루데가 호엔촐레른 가문 슈바벤계의 후손이라 먼 친척이었다. 참고로 이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라는 인물은 독일을 통일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프로이센 왕국 호엔촐레른 가문 프랑켄계의 직계조상으로, 호엔촐레른 가문의 초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고조할아버지이다. [23] 원래는 알브레히트와 그의 동생 루돌프에게 나눠주었으나 마음을 바꾸어 알브레히트에게 몰아주고 둘째에게는 이름만 남은 슈바벤 공작위를 하사했다. [24] 이후 스위스와 합스부르크는 시시때때로 충돌하고 영합하며 처음의 종속구도에서 차츰 지분을 양보해주는 식으로 변모해갔고 스위스의 독립 달성은 수세기 후 30년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성취되었다. 참고로 네덜란드 또한 합스부르크 속령화와 독립 과정에 있어 스위스와 싱크로가 상당히 맞아 떨어진다. 차이점이라면 400년 정도 시간차가 난다는 정도이다. [25] 원래 루돌프 1세는 생전에 알브레히트를 독일왕으로 선출하여 제위를 세습하기를 원했으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강세를 우려한 선제후들은 이를 거부하고 루돌프 1세가 죽자 나사우 가문의 아돌프를 선출했다. 알브레히트는 무력 행사끝에 괼하임 전투에서 아돌프를 전사시키고 나서야 명실상부한 독일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26] 루돌프 1세가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에게 승리한 후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는 자신이 가져가고, 케른텐과 크라인은 자신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괴르츠-티롤 백작 마인하르트에게 양도했는데, 마인하르트의 직계가 단절되면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반환하는 것을 조건으로 걸고 넘겨주었다. [27] 다만, 현대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영토는 오스트리아 공국, 케른텐 공국의 90%,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60%, 티롤 북부와 동부, 잘츠부르크, 과거 헝가리 왕국 영토 중 독일인이 많았던 부르겐란트로 구성되어, 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티롤 백국, 괴르츠 백국, 트리에스테, 알자스와 슈바벤 일대의 월경지 외지오스트리아로 구성되었던 합스부르크 가문 본령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28] 막시밀리안 1세는 부황 프리드리히 3세가 살아있을 적에 친척인 티롤의 지기스문트를 쫓아내고 본인이 부유한 외지오스트리아와 티롤을 차지했다. [29] 동유럽을 호령하던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지 대를 잇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합스부르크 가문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라 희극적이기까지 하지만, 역사에서 이런 일은 제법 흔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조선 말기에 가면 왕실이 자주 단절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유럽에선 그럴 경우 딸에게도 어느 정도 상속권이 인정되어 사위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동양의 경우엔 아무리 딸의 상속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서자를 왕위에 올리거나 방계 왕족을 찾아 선왕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왕위에 올렸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30] 엄밀하게는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7세가 잠시 황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자 후사가 끊겼기 때문에 생긴 일인데,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황제로 선출되었다. [31] 독일어로는 Erwählter Römischer Kaiser. [32] 정확히는 발루아 가문 내에서도 부르고뉴 공국을 다스리던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야기에우워 가문 내에서도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을 다스리던 야기에우워 가문 한정이다. 다만 프랑스 왕국을 다스리던 발루아 가문과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다스리던 야기에우워 가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부계가 끊겼다. [33]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를 얻은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요절했기 때문이다. 보헤미아에서는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를,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서는 후녀디 야노시의 차남이었던 마차시 1세를 선출했고, 후스파 문제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보헤미아에서는 이르지의 사후 라디슬라우스의 누나 엘리자베트와의 혼맥을 이유로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통치하고 있었던 야기에우워 왕조를 옹립했다. [34] 엄밀히 말해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는 1918년까지 선거군주제를 유지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와 헝가리 귀족들의 반란 시도를 모두 좌절시키고 왕권을 공고히 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만 왕위 후보자가 나올 수 있도록 준세습화되었다. [35] 카를 5세의 생전인 1521년부터 주권자로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다스렸으며, 카를 5세를 대신하여 독일의 종교 개혁 문제를 처리했다. [36]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 [37] 다만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오스만 제국 때문에 1/3 정도만 차지했다. [38] 어디까지나 신성 로마 제국 영방제후들에게 관대했을 뿐, 본토인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예수회를 초빙하는 등 대항종교개혁을 실시해 개신교를 억압했다. [39]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파르마 공국도 스페인 부르봉 왕조에게 빼앗겼으나 이곳을 잃은 타격은 슐레지엔에 비해 크지 않았다. [40] 오스만 제국이 슬슬 망조가 보이니 필요 없어진 합스부르크를 손절하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41] 모데나 공작가는 마지막 공작 프란체스코 5세가 사망한 후 남계가 단절되었고, 토스카나 대공가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42]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한 대독일 연방을 결성하길 원했지만,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굴욕적인 통일에다가 헝가리-크로아티아 같이 독일 연방에 포함되지 않는 국가를 포기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반대했다. 즉 누가 독일 통일에서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주체인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있다. [43]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은 카를 5세와 별도로 페르디난트 1세의 아내인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에게서 계승된 셈이라 실질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카를 5세로부터 계승한 작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하나뿐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원칙상 선거군주제였던 데다가, 카를 5세가 제위에 오를 시점만 하더라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실질적 세습은 공고하지 못했다. 당장 카를 5세부터가 거액의 선거자금을 동원해 어렵사리 제위에 올랐고, 본디 제위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계승할 수도 없었다. [44] 부계는 로트링겐 가문이지만 모계인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인식되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과 비슷한 케이스로, 부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지만 모계인 키부르크 가문의 특징이나 정체성이 강하여 새로운 키부르크 가문이라는 의미로 노이키부르크라고도 한다. [45] 루돌프 2세에게는 요한이라는 아들이 한 명 있었지만 알브레히트 1세는 조카인 요한을 무시하고 전권을 손에 쥐었다. 이후 알브레히트 1세는 분노한 요한에게 살해당했으나 요한은 족보에서 파였고 후임 독일왕 하인리히 7세에게 제국추방령까지 당해 이탈리아반도까지 도망쳐 유랑하다 피사에서 객사했다. [46] 추가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더불어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47] 신성 로마 제국 마티아스 황제의 황후 안나가 이 티롤 분가 출신이다. [48] 스페인 왕국 펠리페 3세의 왕비 마르가레테가 이 슈타이어마르크 분가 출신이다. [49] 첫 번째 결혼은 귀천상혼이었고, 두 번째 결혼에서는 아들이 없었다. [50] 신성 로마 제국 페르디난트 3세의 황후 마리아 레오폴디네, 신성 로마 제국 레오폴트 1세의 황후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가 이 티롤 분가 출신이다. [51] 모데나 레조 공국 에스테 왕조의 마지막 공작 에르콜레 3세 데스테의 딸이자 유일한 적자. 상속받을 영지가 없는 셋째 이하의 아들들을 상속녀와 결혼시켜 막대한 재산을 물려주려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결혼이었으나, 정작 모데나를 통치했던 에스테 가문은 살리카 법을 적용했기 때문에 페르디난트 대공이 모데나 공국을 상속받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도 나폴레옹 전쟁으로 전 유럽에 깽판난 여파로 페르디난트 대공의 아들 프란체스코가 신생 모데나 레조 공국의 프란체스코 4세로 즉위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노력은 결실을 보았다. [52] 참고로 헝가리 궁정백은 세습제가 아니다. 원래 헝가리인 대귀족들이 임명되는 작위였으나 헝가리인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 국왕들이 가문의 일원중에서 궁정백을 임명했다. [53] 제1차 세계 대전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1919년 8월 헝가리 왕국 섭정, 1936~1944년 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총재 [54]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의 장남 요제프 프란츠 대공(1895~1957)의 장남 요제프 아르파드 대공(1932~2017)의 차남이다. 요제프 카를 위로 장남이 1명 있긴 했었는데 태어나서 하루만에 죽는 바람에 요제프 카를 대공이 사실상의 장남 역할을 하였다. [55] 이 맏딸인 마리아 테레사 여대공은 후에 뷔르템베르크의 필리프 공작에게 시집을 가 뷔르템베르크 공작 알브레히트를 비롯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56] 세 번 결혼해서 1남 2녀를 봤지만, 전부 귀천상혼이라 자녀들이 합스부르크가의 수장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내려준 합스부르크 백작/백작부인 칭호만 쓸 수 있었을 뿐 테셴 공작은 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브레히트의 사촌형제인 카를 알브레히트와 레오 카를도 결혼해서 각각 2남 2녀, 2남 3녀를 두었지만 둘 다 귀천상혼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아들들도 테셴 공작위를 습작할 수 없었다. [57] 레오폴트 2세의 증손자이며, 테셴 공작 카를 대공의 손자이다. [58] 합스부르크 가문의 철자가 Habsburg가 아닌 Hapsburg로 되어 있다. [59] 근교 계수(Inbreeding coefficient)란 어떤 개체가 가지고 있는 한 쌍의 대립유전자가 선조가 가진 한 유전자의 복제본일 확률을 의미한다. 부친과 모친이 공통조상으로부터 각각 동일한 복제 유전자를 유전받고 이를 자녀에게 각각 하나씩 물려주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므로 부모가 유전적으로 가까울수록 근교 계수도 높아진다. 일반적으로 4촌혼일 경우 0.0625, 3촌혼일 경우 0.1250, 남매혼일 경우 0.2500의 근교 계수를 가진다. [60] 출처: Gonzalo Álvarez; Francisco C. Ceballos, Human Heredity 2015 Vol. 80 No. 2, Royal Inbreeding and the Extinction of Lineages of the Habsburg Dynasty, 2015, 3p [61] 표의 군주들 중 가장 근교 계수가 낮다. [62] 표의 군주들 중 가장 근교 계수가 높다. 대대로 반복된 근친혼으로 인해 3촌혼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남매혼보다 높은 근교 계수를 지녔다. [63] 가톨릭 부부왕으로 유명한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란도 2세도 6촌지간이었다. [64] 물론 스페인 계승 이전의 합스부르크 가문도 귀천상혼을 지키기 위해 어느 정도의 먼 근친혼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이는 스페인계 합스부르크처럼 유럽 내에서도 두드러지게 극단적인 수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다른 유럽 가문들과 엇비슷한 수준에 불과했다. 알브레히트 2세,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 프리드리히 3세, 막시밀리안 1세 등이 그 예이다. [65] 단 그렇다고 선대 왕들이 마냥 막장이라는 애기는 아니다. 어쨌거나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는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스페인의 전성시대를 이끌었고, 그리고 최근에는 쇠락해가는 스페인의 현실을 깨닫고 개혁도 시도해보고 노력도 했다고 평가받는 펠리페 4세도 존재하는 등, 파도파도 그냥 암군인 펠리페 3세를 제외하면 마냥 막장 왕만 있는 것도 아니다. [66] 실제로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 요제프 1세의 부인과 카를 6세의 부인 역시 개신교 신자였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결혼한 바가 있고, 테셴 공작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부인도 개신교 신자였다. 개신교는 아니지만 요제프 안톤 대공의 첫 번째 부인이 정교회 신자이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결혼은 소수였으며, 절대다수는 가톨릭 신자와 결혼했다. [67] 단, 프랑스 역시 통혼 상대를 따져야 했던 건 마찬가지라 비교적 멀다는 것이지 친척이기는 했다. 예를 들어 펠리페 4세와 프랑스의 엘리자베트는 페르디난트 1세를 기준으로 6촌이었다. 그 외로도 모계를 통해 얽힌 혼맥이 많아 어찌되었든 친척이었다. [68] 펠리페 4세와 그의 두번째 왕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의 딸. 참고로 마리아나는 펠리페 4세의 외조카였다. [69] 22살의 나이에 사망한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낳은 자녀들 중 유일하게 요절하지 않은 자식이다.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 선제후와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고 심지어 폭행까지 당했다고 한다. [70] 다만 마리아 안토니아와 마리아 안토니아의 자녀들 모두 이른 나이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기에 스페인의 국왕으로 즉위하는 일은 없었다. [71] In the absence of inbreeding, if the trait is not inherited then it is not to be passed on to the descendants of the individual However, if this individual marries another affected member of the family, the trait will be reintroduced and likely passed on to his/her offspring, decreasing the possibility of extinguishing the trait. Despite this, while inbreeding clearly played a role in perpetuating the Habsburg lip trait throughout generations, it probably did not play a significant role in its origin, as frequently stated. [72] 출처: Rafael E . Jimenez, The Habsburg Lip: a dominant trait of a dominant family [73] 아이러니하게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봉건주의 영향이 남아있던 것과는 별개로 정치적으로는 황제의 권한이 다소 있었던 점을 제외하면 자유민주주의에 가까웠다. [74]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경우는 이것은 특히 종교 전쟁기에 국한되어 있다. 이는 어릴 적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았던 페르디난트 2세의 개인적인 성향과 황제의 자금줄 역할을 했던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75] 물론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싫어하는 민족들도 있었다. 가령 폴란드인들은 오스트리아가 자국을 멸망시키는 데 일조했기에 합스부르크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그래도 크라카우에 합스부르크 황제가 방문할 때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독일령 폴란드나 러시아령 폴란드의 폴란드인들보다는 불만이 덜했다. 체코인은 30년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었지만 실패한 이후에는 제국 내에서 동등한 주권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선회했다가 자신들의 자치권 요구가 계속 묵살당하자 결국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의 주도로 독립을 선언했으며, 현재 체코 사학계에서는 합스부르크 지배를 암흑기 취급한다. 헝가리인은 현재 루마니아 영토인 트란실바니아에 기반을 두었던 동부 귀족들을 계속 반항했다. 라코치 페렌츠 2세의 쿠루츠 봉기나 1848년 헝가리 혁명은 대부분 트란실바니아나 현재 헝가리 북동부가 주요 전쟁터였다. [76] 사코 디 로마만 하더라도 카를 5세는 세속군주로서 교황을 찍어누르는 정도를 원했지, 사코 디 로마급의 막장을 원한건 아니었다. [77] 반면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나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는 문란한 성생활로 유명했다. 사실 부르봉의 프랑스 통치는 프로테스탄트인 앙리 4세가 프랑스를 지배하려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시작되었기에, 합스부르크 입장에서 보자면 기도 안찼을 것이다. 또한 이때 교황들은 마누라를 한 다스씩 챙기던 시대였다. [78] 당장 인터넷에서 네덜란드 독립사 관련 글을 아무거나 읽어보면 십중팔구는 합스부르크 왕조는 악의 축으로 나온다. [79] 현 룩셈부르크 대공가가 부계로는 부르봉 왕조의 이탈리아계 방계인 보르보네파르마 분가 출신이기는 하지만 장 대공 아들들의 귀천상혼 문제로 대판 싸운 여파로 모계인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을 유지하고 있다. [80] 카페 왕조의 방계로 시작되었고, 16세기에 나바르 여왕 잔과의 결혼으로 나바라 왕위를 획득했다. [81] 사실 마지막 인물은 카를1세의 3남 펠릭스 폰 합스부르크였으나 역시 2개월 후 사망하였다. [82] 남작 가문 출신이라 옛날 같으면 빼박 귀천상혼이었고, 오토 대공의 차남 게오르크는 구 올덴부르크 대공국 가문 딸과 결혼해서 후계자 교체도 가능했지만 오토 대공이 동등결혼으로 인정해 주었다. 사실 구왕실들이 작위가 낮거나 없는 부르주아 가문과 혼사를 맺어 재정적 안정을 바라는 경우가 많은데 프란체스카의 친정은 티센크루프로 잘 알려진 재벌가문이다. 참고로 근대 들어 부르주아 가문들이 남작 같은 하급귀족 작위를 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오토 대공은 까다로웠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귀천상혼에 대한 규율을 완화시켜, 1918년 군주제 붕괴 이후 귀족 여성과의 결혼으로 귀천상혼이 된 후손들에 대한 계승권도 소급해서 인정시켰다. 현재는 수장의 승인과 가톨릭 혼인성사만 올리면 평민과 결혼했다 할지라도 동등결혼으로 인정된다. # [83]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래도 폴란드에 대한 인식이 독일과 러시아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를 점령하여 합스부르크 가문 황제가 폴란드 국왕을 겸하는 방식으로 폴란드 왕국의 부활을 계획했으나 독일 제국의 반대로 최종적으로는 무산되었다. [84] 왜 세르비아가 있냐면 1차대전 시기 잠깐 동안 오헝 제국 지배 지역이 오헝 제국에 편입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85] 지도자가 속한 이해집단이 여당이 아니면 정통성이 깎인다. [86] 지도자 성격에 따라 세수가 줄거나 연구 포인트를 추가적으로 얻기도 한다. [87] 모든 전쟁을 끝낼 대전쟁에 참여한 빌헬름 2세 혹은 적합한 호엔촐레른 후보 중 하나인 빌헬름 3세가 복위한다. [88] 1291~1338, 그리스어로는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 [89] 그리스어로는 이리니 [90] 다만 동로마 황실과의 혈연을 근거로 로마의 계승을 주장했던 러시아 제국과 달리 오스트리아는 혈연을 로마 계승의 근거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91] AI Inbreeding이라고도 함 [92] 과거에는 직위명과 본성만을 사용했지만,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경우 제정 폐지 뒤 정치계의 거물로 활동했기에 학위를 비롯해 그가 거쳤던 숱한 훈장과 여러 직함들을 읊었다. [93] 카푸친 교회 이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들이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