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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 제2대 |
엘리자베트 | 치타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관련 직위: 헝가리 왕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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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FFFF><colcolor=#00000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카를 1세의 황후 부르봉파르마의 치타 Zita di Borbone-Parm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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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탈리아어 |
치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아델곤다 미카엘라 라파엘라 가브리엘라 주세피나 안토니아 루이사 아녜세 (Zita Maria delle Grazie Adelgonda Micaela Raffaela Gabriella Giuseppina Antonia Luisa Agnese) |
독일어 |
지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아델곤다 미카엘라 라파엘라 가브리엘라 요제피네 안토니아 루이자 아그네스 (Zita Maria delle Grazie Adelgonda Micaela Raffaela Gabriella Josephine Antonia Luisa Agne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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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2년 5월 9일 | |
이탈리아 왕국 토스카나주 피아노레 | ||
사망 | 1989년 3월 14일 (향년 96세) | |
스위스 지제로스 | ||
배우자 | 카를 1세 (1911년 결혼 / 1922년 사망) | |
자녀 | 오토, 아델하이트, 로베르트, 펠릭스, 카를 루트비히, 루돌프, 샤를로테, 엘리자베트 | |
아버지 |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 | |
어머니 | 포르투갈의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 | |
형제 | 마리아 아델라이데, 시스토, 사베리오, 프란체스카 주세피나, 펠릭스, 레나토, 마리아 안토니아, 이사벨라, 루이지, 엔리케타, 가에타노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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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1세의 아내이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어머니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다.부계쪽으로는 룩셈부르크의 여대공 샤를로트의 부군인 펠릭스 공의 누나이자 장 대공의 고모이다. 루마니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인 미하이 1세의 부인인 부르봉파르마의 안 공녀[1]의 고모(아버지 르네 공자의 누나)이기도 하며, 불가리아 차르 페르디난트 1세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이복동생이자 보리스 3세의 이모이기도 하다.[2] 또한 고모 토스카나 대공비 알리시아의 딸인 토스카나의 루이제와도 사촌이다.[3]
모계 쪽으로는 마리아델라이드, 샤를로트, 바이에른의 왕세자비 안토니아( 바이에른의 왕세자 루프레히트의 두번째 부인)[4], 벨기에의 왕비 엘리자베트[5]와 이종사촌 관계다.
2. 생애
치타 황후의 생애를 다룬 보다 자세한 이야기2.1. 초기 및 결혼 과정
1892년, 파르마-피아첸차 공국의 마지막 공작[6] 로베르토 1세와 두번째 부인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안토니아의 10번째 딸로 태어났다. 참고로 친할머니가 샤를 10세의 손녀인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다. 치타는 샤를 10세의 현손녀인 셈이다.[7] 또한 분열 직전의 위기에 빠졌던 합스부르크 제국을 규합하고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이어지는 발판을 마련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아 아말리아의 내손(5대)이기도 하다. 카를 1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곤손(6대)으로 두사람은 마리아 테레지아 기준으로 12촌 관계이다.[8]1911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추정 왕위 계승자인 카를 대공과 결혼해서 5남 3녀를 두었다.[9] 5살 차이인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서로 알던 사이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관계가 발전해 정략결혼이 일상화된 당시 왕족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연애 결혼을 했다.
게다가 큰시아버지(남편 카를 1세의 백부)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호엔베르크의 여공작 조피와 귀천상혼으로 결혼하여[10] 황실과 사이가 불편했던 것과 달리, 치타는 부르봉 왕조 출신의 공녀였기 때문에 둘의 결혼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도 매우 흡족해 할 정도로 환영받았다.
카를 1세와 치타의 결혼식 사진. 맨 왼쪽에 있는 노인이 큰시할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다. 결혼식에서 찍힌 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근엄한 황제가 싱글벙글 함박 웃음을 짓고 있다.[11] 이 사진 외에도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에서 황제가 계속 함박 웃음을 짓고 있는 걸 보면 정말로 기뻤던 것 같다.
또한 두 사람의 결혼은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단절과 동맹의 역전 이후 오랫동안 끊어졌던 합스부르크-부르봉 결혼동맹이 마지막 순간에 부활한 것이었다.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외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살리카법으로 인해 후계자가 될 수 없는 딸 엘리자베트 마리만 남긴 채[12] 자살해버렸고,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된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귀천상혼으로 결혼해서 그의 자녀들에겐 계승권 자체가 없었다. 이렇게 후계자가 전무한 상황에서 차순위 계승자가 된 카를이 빨리 자녀를 얻어야 했고, 치타가 다산 가정 출신[13]이라는 점도 맞물려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치타의 위치는 상당히 중요했다.
2.2.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지막 황후
당초 카를보다 앞서 황제로 즉위할 예정이'었'던 프란츠 페르디난트[14]는 카를과 치타가 결혼한 지 3년 뒤에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했다. 1916년 카를 1세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며 치타 역시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새 황제와 황후의 치세는 전 유럽을 뒤흔든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점철되었다.결국 독일 제국과 함께 패전국으로 전락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생제르맹 조약과 트리아농 조약으로 완전히 무너졌고 갈기갈기 찢어지는 한편 오스트리아는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카를 1세도 오스트리아 황제를 포함한 모든 군주직에서 퇴위하면서 유서깊은 합스부르크 가문은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다.
비록 군주정이 폐지되었지만 치타는 이후에도 오스트리아의 황후로 살겠다며 스페인 왕실의 지원 등을 거부한 채 룩셈부르크, 스위스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하지만 카를 1세와 치타는 퇴위 전 오스트리아에서 전 재산을 몰수당한 채 추방당해 생활고에 시달리며 제국의 황제와 황후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힘든 생활을 함께 버티며 정신적으로 큰 위안이 되었던 건지 카를 1세와 치타 부부는 평생 금슬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카를이 죽기 전 자신의 곁을 지키는 치타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도 "나는 당신을 정말 사랑했소."라는 애틋한 한마디였을 정도. 치타도 카를 1세의 사망 이후 남편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여생의 대부분을 검은색 상복을 입고 지냈다.
2.3. 말년
말년의 모습.
공화국으로 바뀐 오스트리아 정부의 규제[15]로 1970년대까지 귀국조차 못하다가 생의 막바지인 198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규제가 풀려 빈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후 1989년 3월 14일, 97번째 생일을 한 달 남짓 남겨두고 삶을 마쳤다.
2주 후인 4월 1일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에 따라 빈의 카푸친 교회에서 장례 미사를 거행하며 안장되었다. 심장은 스위스의 성당에 남편 카를 1세의 심장과 함께 묻혔다.
"Wer begehrt Einlass?“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
"Zita, die Kaiserin von Österreich, gekrönte Königin von Ungarn, Königin von Böhmen, von Dalmatien, Kroatien, Slavonien, Galizien, Lodomerien und Illyrien. Königin von Jerusalem, Erzherzogin von Österreich, Großherzogin der Toskana und von Krakau, Herzogin von Lothringen und Bahr, von Salzburg, Steyer, Kärnten, Krain und der Bukowina, Großfürstin von Siebenbürgen, Markgräfin von Mähren, Herzogin von Ober-und Niederschlesien, von Modena, Piacenza und Guastalla, von Auschwitz und von Zator, Teschen, Friaul, Ragusa und Zara, gefürstete Gräfin von Habsburg und Tirol, von Kyburg, Görz und Gradisca, Fürstin von Trient und Brixen, Markgräfin von Ober-und Niederlausitz und Istrien, Gräfin von Hohenems, Feldkirch, Bregenz und Sonnenberg, Herrin von Triest, von Cattaro und auf der Windischen Mark, Großwojwodin der Woiwodschaft Serbien, Infantin von Spanien, Prinzessin von Portugal und von Parra."
"치타, 오스트리아의 황후이시자, 웅가른, 뵈멘, 달마티엔, 크로아티엔, 슬라보니엔, 갈리치엔, 로도메리엔과 일리리엔, 예루살렘의 왕비이시며, 오스트리아, 토스카나와 크라카우의 대공비이시며, 로트링겐과 , 잘츠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크라인, 부코비나의 공비이시며, 쥐벤뷔어겐의 대공비이시며, 메렌의 변경백 부인이시며, 오버·니더슐레지엔,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 구아스탈라, 아우슈비츠, 차토어, 테셴, 프리아울, 라구자, 차라의 공비이시며, 합스부르크와 티롤, 키부르크, 괴르츠와 그라디스카의 후백작 부인이시며, 트리엔트와 브릭센의 후작 부인이시며, 오버·니더라우지츠 그리고 이스트리엔의 변경백 부인이시며, 호에넴스, 펠트키르히, 브레겐츠, 조넨베르크의 백작 부인이시며, 트리에스트, 카타로, 빈디셰마르크의 주인이시며, 보이보디엔과 제르비엔의 대공비이시며, 스페인의 공주이시자, 포르투갈과 파르마의 공주이시다."
"Wir kennen ihn nicht!"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모른다!"
(다시 한 번 문을 3번 두드린다)
"Wer begehrt Einlass?“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
"Zita, ihre Majestät, die Kaiserin und Königin!"
"치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후이시다!"
"Wir kennen ihn nicht!"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모른다!"
(다시 한 번 문을 3번 두드린다)
"Wer begehrt Einlass?“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
"Zita, ein sterblicher, sündiger Mensch."
"치타, 한낱 죄 많은 인간입니다."
"So komme sie herein!"
"그렇다면 들어오라!"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
"Zita, die Kaiserin von Österreich, gekrönte Königin von Ungarn, Königin von Böhmen, von Dalmatien, Kroatien, Slavonien, Galizien, Lodomerien und Illyrien. Königin von Jerusalem, Erzherzogin von Österreich, Großherzogin der Toskana und von Krakau, Herzogin von Lothringen und Bahr, von Salzburg, Steyer, Kärnten, Krain und der Bukowina, Großfürstin von Siebenbürgen, Markgräfin von Mähren, Herzogin von Ober-und Niederschlesien, von Modena, Piacenza und Guastalla, von Auschwitz und von Zator, Teschen, Friaul, Ragusa und Zara, gefürstete Gräfin von Habsburg und Tirol, von Kyburg, Görz und Gradisca, Fürstin von Trient und Brixen, Markgräfin von Ober-und Niederlausitz und Istrien, Gräfin von Hohenems, Feldkirch, Bregenz und Sonnenberg, Herrin von Triest, von Cattaro und auf der Windischen Mark, Großwojwodin der Woiwodschaft Serbien, Infantin von Spanien, Prinzessin von Portugal und von Parra."
"치타, 오스트리아의 황후이시자, 웅가른, 뵈멘, 달마티엔, 크로아티엔, 슬라보니엔, 갈리치엔, 로도메리엔과 일리리엔, 예루살렘의 왕비이시며, 오스트리아, 토스카나와 크라카우의 대공비이시며, 로트링겐과 , 잘츠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크라인, 부코비나의 공비이시며, 쥐벤뷔어겐의 대공비이시며, 메렌의 변경백 부인이시며, 오버·니더슐레지엔,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 구아스탈라, 아우슈비츠, 차토어, 테셴, 프리아울, 라구자, 차라의 공비이시며, 합스부르크와 티롤, 키부르크, 괴르츠와 그라디스카의 후백작 부인이시며, 트리엔트와 브릭센의 후작 부인이시며, 오버·니더라우지츠 그리고 이스트리엔의 변경백 부인이시며, 호에넴스, 펠트키르히, 브레겐츠, 조넨베르크의 백작 부인이시며, 트리에스트, 카타로, 빈디셰마르크의 주인이시며, 보이보디엔과 제르비엔의 대공비이시며, 스페인의 공주이시자, 포르투갈과 파르마의 공주이시다."
"Wir kennen ihn nicht!"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모른다!"
(다시 한 번 문을 3번 두드린다)
"Wer begehrt Einlass?“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
"Zita, ihre Majestät, die Kaiserin und Königin!"
"치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후이시다!"
"Wir kennen ihn nicht!"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모른다!"
(다시 한 번 문을 3번 두드린다)
"Wer begehrt Einlass?“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
"Zita, ein sterblicher, sündiger Mensch."
"치타, 한낱 죄 많은 인간입니다."
"So komme sie herein!"
"그렇다면 들어오라!"
장례 미사의 마무리 모습. 48초 쯤에서 그녀의 아들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나온다.
사후 20년 만인 2009년에 생전의 독실한 신앙 생활에 관한 공로가 인정되어[16] 가경자(하느님의 종. 복자 전 단계)로 선포되었다. 남편 카를 1세도 5년 앞선 2004년 천주교회에 의해 복자로 선포된 바가 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외아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루돌프의 죽음[17]에 대해 자살이 아닌 암살이라고 주장한 인물이다. 어떤 이유나 배후인지는 감추고 증거가 남아있다고만 주장했지만, 치타의 장남 오토 황태자는 평생 가타부타 말도 없어서 진실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루돌프의 죽음이 자살이라기엔 수상한 정황이 많은 것도 사실이기에 주목 받는 부분.
치타의 장례식(위의 영상)을 주관한 고트프리트 운데서 수사(2017년 선종)는 그로부터 20여년 후인 2011년, 그녀의 아들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장례식도 맡았다.
3. 가족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부르봉파르마의 치타 (Zita di Borbone-Parm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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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 (Roberto I, duca di Parm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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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 (Carlo III, duca di Parm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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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 공작 카를로 2세 (Carlo II, duca di Parm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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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Principessa Maria Teresa di Savo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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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 (Louise Marie Thérèse d’Arto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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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 (Charles Ferdinand, duc de Ber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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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18] (Principessa Maria Carolina delle Due Sicili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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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 (Infanta Maria Antónia de Portug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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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1세 (Rei Miguel I de Portug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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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앙 6세 (Rei João VI de Portug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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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Carlota Joaquina de Españ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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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의 아델하이트 공녀 (Prinzessin Adelheid von Löwenstein-Wertheim-Rosen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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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의 공세자 콘스탄틴 (Fürst Konstantin zu Löwenstein-Wertheim-Rosen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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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마리 아그네스 공녀 (Prinzessin Marie Agnes Prinzessin zu Hohenlohe-Langenberg)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황태자 오토 (Kronprinzen Otto) |
1912년 11월 20일 | 2011년 7월 4일 |
작센마이닝겐의 레기나 공녀 슬하 2남 5녀[19] |
1녀 |
아델하이트 (Adelheid von Habsburg-Lothringen) |
1914년 1월 3일 | 1971년 10월 2일 | |
2남 |
로베르트 (Robert Habsburg-Lothringen) |
1915년 2월 8일 | 1996년 2월 7일 |
사보이아아오스타의 마르게리타[20] 슬하 3남 2녀 |
3남 |
펠릭스 (Felix Habsburg-Lothringen) |
1916년 5월 31일 | 2011년 9월 6일 |
아렌베르크의 안나 오이게니 공녀 슬하 3남 4녀 |
4남 |
카를 루트비히 (Carl Ludwig Habsburg-Lothringen) |
1918년 3월 10일 | 2007년 12월 11일 |
리뉴의 욜란다 슬하 2남 2녀 |
5남 |
루돌프 (Rudolph Habsburg-Lothringen) |
1919년 9월 5일 | 2010년 5월 15일 |
크세니야 체르니셰프베소브라소프 여백작 슬하 3남 1녀 |
브레데의 안나 가브리엘레 공녀 슬하 1녀 |
||||
2녀 |
샤를로테 (Charlotte Habsburg-Lothringen) |
1921년 3월 1일 | 1989년 7월 23일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게오르크[21] |
3녀 |
엘리자베트 (Elisabeth Habsburg-Lothringen) |
1922년 5월 31일 | 1993년 1월 7일 |
리히텐슈타인의 하인리히 공자 슬하 4남 1녀 |
[1]
1923~2016, 보통은 안 왕비라고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루마니아의 왕정이 폐지된 후에 미하이 1세와 결혼했기 때문에, 왕의 부인/배우자는 맞지만 왕비라고 하기에는 약간 애매한 점도 있다.
[2]
1894년생인 보리스 3세와 나이가 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나서 의아할 수도 있지만, 보리스 3세는 치타의 조카가 맞다. 이는 치타의 이복언니인 마리아 루이사와 치타의 나이 차이가 22살이나 나기 때문이다.
[3]
루이제도 치타보다 22살이나 연상이다.
[4]
마리아델라이드, 샤를로트, 안토니아 모두 이모 룩셈부르크 대공비 마리아 아나의 딸들.
[5]
이모 바이에른에서의 공작부인 마리아 주제의 딸.
[6]
이미 로베르토 1세는 치타가 태어나기 한참 전인 1859년,
이탈리아 통일운동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의해 파르마-피아첸차 공국을 잃었다. 로베르토 1세가 파르마 공작에서 폐위당했을 때 나이가 11세였다.
[7]
직계 조상은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시조이자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첫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4남인
필리포 1세.
[8]
한편 포르투갈 국왕
주앙 6세 기준으로 하면 카를 1세가 치타 황후의 8촌 손자뻘이다. 치타 황후는 주앙 6세의 3남
미겔 1세의 외손녀이고, 카를 1세는 주앙 6세의 친손녀
마리아 2세의 외외증손이다.
[9]
이들 중 장남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참고로 이들 중 1남 2녀는 제정 폐지 후에 태어나서 공식적으로 황족은 아니었다. 막내딸 엘리자베트는 카를 1세의 사후에 유복녀로 출생.
[10]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조카이자 추정 왕위 계승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일개 백작의 딸 조피의 혼인은 명백한
귀천상혼이였다.
[11]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 부부의 결혼식에는 참석조차 하지 않은 것과는 대조된다.
[12]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엄격한
살리카법을 지키고 있었다. 이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있긴 하지만 이것도 그녀의 아버지
카를 6세가 계승을 할 남자 후손이나 조카가 방계와 직계 모두 아예 없어서 불가피했고 이조차도 인정받지 못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루돌프 황태자 사망 당시에는 방계로나마 남자 계승자가 많이 있었기에 직계라도 딸인 엘리자베트 마리는 계승 서열에서 밀린 것이다.
[13]
아버지 로베르토 1세가 두 번의 결혼에서 무려 24명의 자식을 낳았다.
[14]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큰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추정 상속자였기에 단 하루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였던 적이 없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황태자라고 칭하면 잘못된 호칭이다.
[15]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귀족 제도를 폐지하는 한편 반 합스부르크 법(Habsburgergesetz)을 시행해 합스부르크 가문을 철저하게 배척했다. 오스트리아 뿐만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소속 국가들은 귀족 제도를 폐지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정복고 가능성을 차단했다.
[16]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매년 수 개월씩 프랑스의 수녀원에서 생활했는데, 이곳에는 수녀가 된 자신의 자매들이 있었다.
[17]
대외적으로나 세간에나 애인 마리 폰 베체라와
동반자살했다고 알려져있으며 이 사건을 통칭 마이어링 사건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후술하다시피 합스부르크 황실측이 필사적으로 마이어링 사건에 대한 진실을 은폐해서, 제대로 된 진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현재까지도 자살인지 타살인지 의혹이 분분한 사건이다.
[18]
양시칠리아 왕국 2대 국왕
프란체스코 1세의 장녀.
[19]
카를 폰 합스부르크,
게오르크 폰 합스부르크 등
[20]
3대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의 장녀. 재미있는 사실은 마르게리타의 할아버지인
2대 아오스타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이탈리아 왕국군 제3군 사령관으로 전쟁에 참전한 고위 장성이었다. 그러니까 과거에 군대를 이끌고 자기 아버지를 상대로 전쟁에서 싸운 사람의 손녀와 결혼한 셈이다.
[21]
게오르크에게는 재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