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카를 5세의 생애에 대해 다루는 문서이다.2. 유년 시절
카를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계자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스페인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공주 후아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미남공 필리프는 어머니(카를의 할머니)인 마리 드 부르고뉴가 죽은 후 그 영지를 물려받아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고, 막시밀리안 1세의 뒤를 이어 장차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인물이었다. 카를의 어머니 후아나 공주는 아라곤 및 나폴리 국왕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국왕인 이사벨 1세의 딸이었다.카를은 아버지인 필리프가 부르고뉴 공국과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를 다스리고 있던 시절인 1500년 부르고뉴 공국의 영지인 플란데런의 겐트(Ghent)에서 태어났다. 카를이 네 살 때인 1504년 외할머니인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카를의 부모는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후아나의 광기가 심했기 때문에 막시밀리안 1세는 카를과 그의 누나 레오노르, 여동생인 이사벨과 마리아 4남매를 부모와 함께 스페인으로 보내지 않고 플란데런에 남겨 고모인 마르가레테(독일어: Margarete von Österreich, 네덜란드어: Margaretha van Oostenrijk[1]가 양육하도록 했다.
스페인에 도착한 카를의 부모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공동왕이 되었지만 아버지 필리프는 카스티야 국왕으로 등극한 지 2년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고[2], 카를의 모친인 후아나 역시 정신병이 악화되어 외할아버지인 페르난도 2세에 의해 스페인 현지에 유폐되고 말았다. 때문에 카를은 어렸을 때 양친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이 자랐다. 그래도 플란데런에서 고모 마르가레테의 보살핌 속에 누이들 및 사촌들과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부족함 없는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부친의 사망으로 부르고뉴 공국을 물려받았는데, 당시 부르고뉴 공국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영토인 부르고뉴와 프랑슈콩테 지역 외에도 비옥한 저지대 베네룩스 지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를이 아직 성년이 아니었으므로 부르고뉴 의회는 그의 고모 마르가레테를 섭정으로 선출했다. 그리하여 카를이 15세가 될 때까지는 마르가레테가 섭정으로 부르고뉴를 다스렸다. 카를은 그 지역 관행으로 성년이 된 1515년 마침내 성년이 되어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년 후 스페인을 다스리기 위해 떠나게 되었다. 이후 부르고뉴 공국은 마르가레테가 계속 대리로 통치했다. 마르가레테는 이 땅을 호시탐탐 노리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도발에도 당당히 대응했다.
1507년에는 브뤼셀 교외에 새로 지어진 메헬렌 궁전(Palais de Marguarette d'Autriche)으로 친남매 및 고모 가족들과 함께 이주했다. 17세 때 스페인 국왕이 되어 떠날 때까지 카를은 메헬렌 궁전에서 살았다. 고모 마르가레테는 카를에게 사실상 부모와 같은 존재였고 그의 인격과 장차 제국을 다스릴 지도력을 형성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마르가레테는 장차 합스부르크 가문과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자가 될 카를의 양육에 각별한 신경을 쏟았다. 그녀는 카를에게 직접 읽기, 쓰기, 역사, 통치학, 종교, 언어를 가르쳤으며, 당대의 대석학인 에라스뮈스와 아드리안 주교 등을 가정교사로 들여 카를이 착실하게 제왕학 수업을 받도록 했다.
마르가레테는 카를에게 현실정치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술을 전수해 주는 역할도 했다. 그 한 단면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카를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선거에서 나갔을 때였다. 프랑수아 1세와 경합을 하고 있던 카를은 독일의 대상인인 푸거 가문을 통해 거액의 자금을 융통하여 선제후들을 매수해 황제가 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실제로 카를의 배후에서 이러한 전략을 획책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바로 고모 마르가레테였다. 그녀가 직접 푸거 가문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융자해와서 선제후들에게 뇌물로 뿌렸던 것이다. 사실 전쟁이나 선거 등 큰 일이 있을때마다 푸거 가문에서 자금을 융통하여 통치에 활용하는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으로 카를의 선조들이 이용했던 방법이었다. 또 마르가레테는 카를이 스페인 왕위에 오를 때도 큰 역할을 했다. 레콩키스타를 거치며 유럽의 그 어느 지역 보다도 민족 의식이 높았던 스페인에서는 스페인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생 페르난도 왕자를 차기 왕으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고 스페인의 왕위가 비었을 때, 마르가레테는 가문의 힘을 동원하여 발빠르게 움직여 카를이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했다. 페르난도 2세가 죽었고 후계자 문제로 잠시 혼란을 겪을 때 합스부르크 가문이 재빨리 개입하지 않았다면 스페인 왕위는 페르난도 왕자에게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대략 17세까지)의 카를 5세를 만난 대신들과 각국 대사들이 그를 관찰하고 남긴 기록에서 3가지의 특징이 일관적으로 나타난다. 말수가 적고, 매우 독실하며[3], 턱이 매우 길다는 점[4]이 그것이었다. 이중 말수가 적은 것은 그의 주위에 어린 그를 쥐고 조종하는 목소리 큰 신하들이 많았던 탓도 있었고, 그가 점차 성장하여 자신을 조종하려는 대신들을 쳐내면서 자기 주장이 강해지게 된다. 다른 두 특징은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카를 5세는 머리가 나쁘고, 공부보다 체육을 훨씬 잘하고 또 좋아했다. 오죽하면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카를이 사냥을 잘해서 다행이다. 아니면 나는 그 아이가 빡대가리인 줄 알았을 것이다."라 말했을 정도. 특히 언어 습득력이 지지리도 없어서 언어 천재였던 할아버지에게 더 안 좋게 보였을 것이다.[5] 그러나 사냥과 기마술 등에는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그 탓에 그는 평생 두 취미에 매진하게 된다. 이는 훌륭한 군인의 덕목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존경을 샀고 카를 5세가 호전적인 성격을 기르는 요인이 된다.[6]
3. 스페인 왕위 계승
카를의 외조모인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하면서 두 나라는 동군연합을 이뤘으나, 각자 통일은 하지않고 기존의 독립적인 정치 제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 역시 두 나라 각각 별개로 이루어졌다.이후 1504년 이사벨 1세가 서거하며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자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인 후아나 공주가 왕위를 이었어야 했으나, 후아나 공주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던지라 그녀의 남편인 브루고뉴 공작 필리프와 이사벨 1세의 부군이자 연합의 양대 수장중 한 명인 페르난도 2세가 후아나 공주의 정신이상 을 명분으로 각자 공동 지배/섭정 통치를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2년간의 논의 끝에 남편인 필리프가 명분상 합당하다 여겨 필리프는 펠리페 1세로 즉위했다. 상술한대로 후아나는 즉위 이후로도 정신이상으로 제대로 국정을 돌볼 수 없었기에 펠리페 1세의 재위기간은 사실상 그 홀로 카스티야를 실효지배했다. 그러나 펠리페 1세가 즉위 2달만에 급사하면서[7] 다시금 계승권 문제가 터졌다.
후아나 공주는 사랑하던 펠리페 1세의 사후 정신이상 증사가 훨씬 악화되어 제대로 통치를 할 수 없는 처지였고, 이대로라면 펠리페 1세의 장남인 카를(훗날 카를 5세)가 펠리페 1세의 계승권을 이어받아 후아나와 함께 공동왕이 되었어야 했지만, 카를이 아직 성년이 지나지 않은데다가 명목상의 왕이나마 남아있는 상태에서 굳이 급하게 왕위 계승을 이룰 필요도 없다는 논의 결과를 통해 결국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의 섭정이 되면서 카스티야-아라곤을 포함한 스페인 전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사실상 스페인 전역의 지배자가 된 페르난도 2세는 이사벨라 여왕 사후 새롭게 왕비를 들여와 그녀와 자신 사이의 아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지만, 노년때까지 후사가 생기지 않자[8] 결국 그에게 남은 두 외손자인 카를과 페르난도 왕자중 한 명을 선택해야만 했는데, 플란데런 지방에서 나고 자란 첫째 손자 카를보다는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데다가 자기가 직접 키웠던 페르난도에게 왕위를 계승시켜주고자 했으나 계승 1순위는 장남인 카를이었고, 무엇보다 페르난도는 아직 성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페인 내의 지지도를 고려하더라도[9] 이 즈음에 성년이 된 카를과 달리 물려줄만한 명분이 없었다.[10] 결국 페르난도 2세또한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고 말년에 카를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로 결정한다.
1516년 페르난도 2세가 서거하자 자연스레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카를이 카스티야 - 아라곤의 왕위를 이어받았어야 했으나 현실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카를 입장에선 양국의 왕위를 동시에 물려받는게 제일 편했겠으나, 외지인에 스페인어조차 모르는 카를에 대한 스페인 내부의 반발과 '그래도 후아나 여왕이 살아계시지 않냐'라는 나름의 명분,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각자의 통치 체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등의 이유로 인한 복잡해진 왕위 계승 절차등의 난항을 겪고 결국 카스티야는 후아나 여왕만이 군림하는, 사실상 공위 시대를 맞게 된 상황에서 당장 아라곤 국왕으로만 즉위하게 된다.
그리고 훗날 페르난도 2세의 장례식 때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부르고뉴 공국, 그리고 교황 레오 10세 등 막강한 세력이 후광을 등에 업고 스페인의 귀족들을 압박해 끝내 공동왕으로 등극하는데 성공, 페르난도 2세를 이어 사실상 스페인 전역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론이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카를 본인부터가 이를 잘 알고 있던지라 스페인 국왕으로 지명되고 나서도 스페인에 가지 않고 1년 반 동안 고향 플란데런에 거주한 채 스승인 아드리안 주교를 왕의 대리인 자격으로 스페인에 파견해 현지 상황을 수습시키고 안정화시키도록 했다.
4. 스페인 통치
1517년 9월 외조부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한 지 1년 반이 지나서야 카를은 드디어 네덜란드 저지대를 떠나 스페인의 왕으로서 스페인으로 향했다.[11]다만 아무리 공동왕 자격으로 카스티야 왕국의 왕권을 얻었다 해봤자 후아나 여왕이 일단은 멀쩡히 살아있었으므로, 공동 통치자 형태라도 그녀가 공식적으로 양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의 아들인 카를이 스페인 국왕이 된다는 것은 현지인들의 반감을 살 수 있었다는 명목으로 바야돌리드의 카스티야 왕국 의회에서 그의 왕위 승계를 계류시켰다.
스페인에 도착한 카를은 의회와 교섭하여 '카스티야어를 배우고, 외국인을 국정에 끌어들이지 않으며, 카스티야의 문화재를 보존하고, 어머니를 존중한다'는 조건 하에 공동 통치자로 승인을 받았다.[12]
이렇게 어렵게 카를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페인 국민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왜냐면 그가 프랑스와의 전쟁 과정에서 별 관련이 없는 스페인에 까지 전비를 충동하고자 큰 과세를 부과했고, 그와 반대로 고향의 플란데런인에게 여러 이권을 나눠준 것에 거부감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는 곧장 납세 거부 운동이 일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급 귀족과 도시민들의 꼬뮤네로스 반란이, 이어서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투표를 위해 스페인을 비운 틈을 타 톨레도 반란이 연이어 터졌다.
마냥 카를 5세에 호의적이지 않던 궁정 귀족들은 처음에 이들의 반란을 어느 정도 방조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그러나 반란이 예상보다 급진적 기류로 흘러가자 군대를 편성해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선거 및 뒤이은 대관식, 제국의회 소집(보름스 제국의회) 등으로 계속 독일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스페인에서의 상황이 악화일로를 걷는걸 알면서도 함부러 귀국할 수 없었고 대신 대리인을 파견해 반란 진압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결국 보름스 국회가 끝나고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어 반란군 소탕을 하게 된다. 1521년 4월 비야리르 전투에서 반군의 주력이 궤멸당했고 1522년에는 반란의 수도인 톨레도까지 협상으로 항복을 받아 스페인을 상속 받자마자 빈집털이 당하는 사태는 면했다.[13]
그래도 꼬뮤네로스 봉기를 겪은 카를 5세는 뒤늦게나마 스페인 내 외세에 대한 반발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절절히 느끼면서 단순히 외지인을 통한 통치를 강요하는 것 만이 아니라 자신이 등극한 이후 사실상 외면해오던 전국 의회(코르테스 헤네랄레스)를 3년마다 주기적으로 개최할 것을 지시하고 반란또한 주동자 50명 정도만 처형 및 감금시킨뒤 나머지는 일괄사면, 이후 자기가 보름스 국회등의 이유로 자리를 비워 섭정이나 행정 요직등에 인력이 필요하면 반드시 현지인을 기용하고 도시 통치또한 일부 핵심적인 부분 외에는 자치권을 인정해주는등 스페인 민심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5. 아메리카, 필리핀 정복
한편 본국의 이런 사정과는 별개로 아메리카 정복 사업을 물리지 않았고,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이룩하기도 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던 카를 5세는 가톨릭과 스페인의 이름하에 신대륙에서 영토를 확장하는게 가톨릭을 전파하는 길로 이어지게 하는 중임이라고 여겼고 콩키스타도르의 분전을 거듭해 1520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군대가 아즈텍 제국을 무너뜨리고 현재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일대를 장악하고 1533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의 수도 쿠스코를 함락시켜 인근지역을 점거하며[14] 몰락한 옛 제국의 수도들 대신 연안에 신도시 리마를 건설하고 이를 거점삼아 남아메리카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그렇게 정복사업이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역으로 자만심과 업적에 취한 일부 콩키스타도르 상층부가 하극상같은 오만한 태도를 보이자[15] 이들을 대거 파면시키고 새로 임명시킨 총독들을 파견해 식민지를 다스리게 했다.
카를 5세는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콜럼버스나 코르테스 등 콩키스타도르들이 벌인 잔혹한 만행과 대규모 학살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했다.[16] 스페인 국내와 유럽의 지식인들이 이러한 만행을 규탄했지만, 카를 5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말년인 1550년에 이르러서야 바야돌리드 회의를 열어 식민지에서 인디오를 무차별 살육하는 것을 억제하려 했는데, 이는 인디오의 생명과 인권에 대한 존중 때문이 아니라 무차별 학살로 인해 스페인 제국의 자산인 인디오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인디오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광산에서 일할 노동력이기도 했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마구 들여오는 금과 은으로 가격 혁명이 일어났고, 동방과의 교역도 순조로워, 스페인은 순식간에 유럽 제일 가는 부국이 되었다. 카를 5세는 신대륙에서 막대한 양의 금, 은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여겼다.
한편으로는 포르투갈과의 사라고사 조약을 통해 1529년 필리핀도 손에 넣었다. 필리핀은 1521년 마젤란이 발견하고 원주민에게 살해당한 후 포르투갈이 영유 중인 섬이었다. 본래는 그 전 세기의 토르데시야스 조약 때문에 아시아의 포르투갈령을 건드릴 수 없었지만 이 조약을 거쳐 중국 가까이에 발을 걸치게 됐다. 대신 몰루카 제도를 포르투갈에게 양도했으나, 위약금까지 챙겨 결과적으로 훨씬 남는 장사였다. 이후 필리핀은 스페인의 아시아 진출 거점이 되어 명나라와도 교역을 트게 된 것이다. 이 때 신대륙의 무진장한 은이 중국으로 흘러갔다. 다만 필리핀 자체의 정복은 총 5번의 원정대를 파견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1565년에 가서야 6번째 원정이 성공하여 본격적인 식민 지배가 시작된다. 이후 필리핀 도독령은 1898년까지 근 4세기에 걸쳐 스페인의 통치를 받는다.
6.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
1519년 1월 21일 카를의 조부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했다. 이로서 다음 황제를 선출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선제후들이 소집되었으며, 카를 또한 계승 후보로서 참가했다.
독일왕 알브레히트 2세 사후 신성 로마 제국 제위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사실상 독점적으로 상속하다시피 했으므로, 관례대로라면 유일한 합스부르크 출신 후보인 카를이 선출되는 것이 맞았다. 문제는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 정책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이 부르고뉴, 네덜란드, 스페인과 이탈리아 일부에 이르는 막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카를 5세의 서방 진출로 아메리카 식민지까지 대거 생기는등 카롤루스 대제 이후 유례없는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나타나자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나치게 강해지는걸 우려하는 세력이 생겨났으며, 카를은 오늘날의 베네룩스 3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독일 선제후들에 의해 외국인 취급을 받았다.[17]
스페인 왕위 계승의 후원자로 나섰던 당대 교황인 레오 10세 마저 이 건에 대해서는 등돌린 와중 여러 선제후가 카를을 견제했고 이를 위해 여러 후보군[18]이 거론된 끝에 프랑스의 젊은 야심가 프랑수아 1세가 후보로 나섰다. 합스부르크를 견제하기 위한 입장에선 카를과 악연[19]인 프랑수아 1세가 스스로 나서주니 나쁠게 없었고 프랑수아 1세 또한 잘하면 프랑스 최초의 황제가 될 수 있는데다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시작으로 한창 잘 나가는 스페인을 견제함과 동시에 유럽의 제패를 노렸다.
처음엔 레오 10세가 프랑수아를 지지하며 성직 선제후 3인( 마인츠, 쾰른, 트리어)가 나란히 프랑수아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며 프랑수아 1세가 유력 후보로 떠올랐으나, 고모 마르가레테가 오랜 기간 거래를 해왔던 독일의 금융 거부인 푸거 가문[20](Fuggers)및 벨저 가문(Welsers)에게 총 85만 두카트의 자금을 빌려와[21] 선제후들에게 뇌물로 뿌리는 압도적인 돈지랄을 필두로 외국인을 뽑으면 독일인의 국가가 핍박받는다는 연설을 통해[22] 선제후 대부분을 매수하는데 성공,[23] 결국 1519년 6월 28일 황제선거에서 만장일치로 황제에 당선되었으며, 1520년 10월 23일 쾰른 대주교에게 대관을 받았다.[24]
애초에 역사상 프랑스, 잉글랜드처럼 신성 로마 제국의 회원국이 아닌 국가의 군주가 황제가 된 전례가 한 번도 없었음에도,[25] 그런 이들이 후보로 옹립되고 교황부터가 앞장서서 프랑수아 1세를 지지한 것은 그만큼 카를 5세의 성장성과 그를 견제하기 위한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 이때 카를은 황제가 되기 위해 수많은 공약을 내걸었다가 정작 황제가 된 이후엔 멋대로 파기하곤 했는데, 이 때문에 독일 선제후들 사이에선 그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으며, 이것은 나중에 그에게 독으로 돌아오게 된다.
7. 신성 로마 제국 통치 - 페르디난트 1세의 대리 통치
당시 카를 5세는 각국 여러 지방의 통치권자나 왕을 겸직하고 있었는데,[26] 이렇다보니 그가 다스려야할 땅은 유럽의 군데 군데 떨어져있었다. 당시의 열악한 교통사정,[27] 나라간의 문화 차이등으로 인하여 카를 본인이 각 국을 전전하여 통치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또한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고 모든 정치적 문제가 해결된게 아니었고, 여전히 스페인 내의 그의 여론은 안좋았다. 당장 윗 문단에서 나온 스페인의 대규모 반란이 이를 증명했다. 반란 진압 이후 스페인에 정착하게 되면서 자신의 다른 통치권역을 방치할 수도 없다 여긴 카를은 결국 동생인 페르디난트에게 황제의 대리인이자 제국의회평의장이라는 감투와 그가 다른 제후들에게 밀리지 않도록 가문의 본령이자 황제직의 근거이기도 했던 오스트리아 대공직까지 물려주면서 독일을 맡겼다.
어찌보면 동생을 과하게 믿은 것 같지만 사실 이는 역으로 동생이 스페인만 다스리지 않으면 자신이 제어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근원이었다. 페르디난트는 자신과 달리 스페인에서 나고자란 순혈 스페인 사람으로, 외조부인 페란도 2세조차 나이 문제만 아니었으면 카를 대신 그를 스페인 왕으로 밀려고 했을 정도로 스페인 국내의 여론이 그에게 매우 호의적이었고, 그런만큼 스페인의 군주로서 페르디난트의 존재는 언제나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공포심을 주었다.[28] 반대로 스페인에서만 활동했던 페르디난트의 외국 여론은 좋다고는 볼 수 없었기에 스페인과는 달리 자신의 대리인으로서만 활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한마디로 나름대로 믿을만한 사람에게 중임을 맡기는 한편 제일 위험한 정치적 라이벌까지 제거한 셈.
이런 뒷사정과는 별개로 페르디난트 본인은 독일에 도착후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매우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독일어를 배우고 독일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통치에 대해서도 큰 흐름은 철저하게 형이자 황제인 카를의 의중을 따르되 그 외 자잘한 부분은 현지 사정에 맞게 완화시키거나, 아예 유보시키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과 독일의 전쟁 역시 그가 직접 제후들과 황제군을 이끌고 승리를 거둔 것으로, 카를은 군사나 지휘관, 물자등의 지원만 해준 스폰서에 가까운 위치였다.
뿐만 아니라 페르디난트는 합스부르크 가문 특유의 혼인정책을 통해 형과는 별도로 아내의 가문과 연결된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29]을 물려받았다.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토착 세력의 반발 세력이 있었지만 몇 차례의 전쟁을 통해 이들을 완전히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1520년대 중후반에 카를 5세가 이탈리아 등지에서 프랑스, 교황청 등과 싸우느라 바쁜 시기를 보내는 동안, 페르디난트 또한 독일에서 종교 개혁과 농민전쟁, 제1차 빈 공방전을 포함한 헝가리와의 전쟁,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의 큰 전쟁을 치렀다. 이들 독일과 동유럽에서의 전쟁은 모두 페르디난트 1세의 주도하에 진행된 것으며, 카를 5세는 빈 포위 당시 지원군을 보낸 것 말고는 독일 내외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두 형제가 분할 통치를 한지 10년 가량이 지났을 때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상황은 이제 안정되어 가고 있었지만, 독일의 종교 문제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카를 5세가 약속을 번복한게 문제였는데, 1526년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막기 위해 모인 슈파이어 제국 회의에서 개신교 측의 지지를 얻고자 개신교 세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겠다고 약조했으나, 정작 오스만 제국 격파 이후 1529년 다시 개최된 슈파이어 제국 회의에서 이를 번복한 것이었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개신교 제후들은 적극적으로 저항 의사를 표출했고 그리하여 개신교들은 프로테스탄트라 불리게 되었다. 개신교 제후들은 결집하여 1531년 군사동맹인 슈말칼덴 동맹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사실상 제국이 분할된 것이다.
이처럼 독일에서 상황이 악화일로를 치닫자, 카를은 독일에서 페르디난트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기 위해 마침내 그를 차기 황제로 지명했다. 1530년 미리 치러진 차기 황제선거에 단독 출마한 페르디난트는차기 황제로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30]
이때까지도 카를 5세는 페르디난트를 스페인에 영향력만 끼치지 않으면 별 상관없는 존재라 여겼으나, 그의 통치가 말년에 접어들자 형제간의 협력 통치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카를 5세가 자신의 아들인 펠리페에게 페르디난트가 통치하는 독일을 포함한 영토까지 포함된 제국 전체를 그에게 물려주려 하고 싶었으나, 페르디난트는 카를의 생각과 달리 이미 독일과 그 일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확고한 기반을 다진 상태였고, 차기 황제이자 독일왕으로 선출된지 20년이 지난 덕분에 아무리 카를이라도 쉽사리 페르디난트를 축출할 수 없었다. 결국 '스페인만 아니면 된다'라 여긴 카를의 방만함이 말년에 스스로의 목을 조른 것이다.
이후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었는데,[31] 가톨릭 신자로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격분하는 카를의 반응을 무시하며 오로지 독단으로 현실적으로 더이상 화의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단 판단 하에 페르디난트의 이름으로 화의를 체결했다. 이전까지도 견제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를 통해 사실상 페르디난트가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음을 카를에게 선전포고한 것이나 다름없고, 그의 의도를 알아챈 카를 또한 분노와 무력감 속에서 결국 스스로 퇴위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8. 이탈리아 정복과 대프랑스 전쟁
▲엘 그레코가 그린 판화. 카를 5세가 중앙 옥좌에 올라앉아 자신이 예전에 군사를 이끌고 패퇴시킨 정적들을 조소하는 그림인데, 그의 주위 인물들은 왼쪽부터 순서대로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 교황 클레멘스 7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클레베 공작 빌헬름,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32],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이다. 당시 유럽의 패자로서 군림했던 카를 5세의 위엄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그의 정적들이 많고도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1520년 약관의 나이에 황제로 선출되어 부르고뉴(+ 베네룩스 저지대), 스페인(+식민지 아메리카와 북아프리카일부), 독일을 지배하게 된 카를의 다음 관심사는 이탈리아 반도였다.
이에 그렇잖아도 선대 막시밀리안 1세 때부터 제국과 앙금이 있었던 데다 황제선거에서 카를에게 패배하여 앙심이 있던 프랑수아 1세는 당시 지중해에서 마지막 끗발을 부리던 베네치아와 손잡고 공동 대항 전선을 폈다. 이탈리아 반도를 둘러싼 전쟁은 1521년부터 시작되었고, 카를은 스페인 본국의 내전과 프랑스와의 전쟁 모두를 신경쓰게 되었다. 이에 카를은 친분이 있던 교황 및 프랑스에 반감이 있던 잉글랜드를 우군으로 끌어들였다.
국면 전환은 1525년의 파비아 전투였다. 여기서 대승을 거둔 카를은 밀라노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심지어 국왕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기사왕으로 불리던 프랑수아 1세는 감옥 안에서 옥살이를 하면 했지 영토만은 내줄 수 없다며 1년 가까이 버텼지만 결국 막대한 배상금 지불 및 전 이탈리아와 부르군디를 넘기겠다는 굴욕적인 마드리드 조약에 조인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렇게 결국 이탈리아 북부마저 카를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러나 프랑스는 곧 조약을 파기하고 복수하겠다며 다시 전쟁에 돌입했다. 카를의 힘이 지나치게 막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잉글랜드의 헨리 8세도 프랑스 쪽으로 기울었으며, 1523년 카를과 친분이 돈독하던 교황 레오 10세의 사망 이후 하드리아노 6세를 거쳐 교황에 오른 클레멘스 7세는[33] 막강한 카를의 권력에 경계심을 가졌다. 이들의 이해가 일치하면서 카를에게 대항하는 코냑 동맹이 결성되었다.
1527년 2번째 전쟁에서 카를은 적대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었다. 로마가 황제의 군대에게 초토화되고 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하여 7개월간 사실상 구금당했다. 쓴맛을 본 교황도 결국 항복하여 황제의 영향권에 포섭되었다.
같은 해, 헨리 8세는 첫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교황에게 결혼을 무효화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잉글랜드는 스페인을 배신하고 프랑스가 결성한 코냑 동맹에 참가한 상태였고, 캐서린은 카를의 이모이기 때문에 카를은 크게 분노해 불허하도록 교황에게 압박을 가했다. 그 결과 잉글랜드는 교황에게 등을 돌리고 국교로 성공회를 내세운다.
그러나 부모님의 이혼 문제 때문에 고생해야 했던 메리 공주는 여러 차례 도움을 준 사촌오빠 카를을 아버지처럼 의지하게 되며, 나중에 왕으로 즉위한 후 카를의 아들 펠리페 2세와 결혼해 잉글랜드는 다시 국교를 가톨릭으로 바꿨다. 이게 다 유럽의 패권자인 카를이 알게 모르게 끼친 영향이다. 메리 1세의 뒤를 이은 메리의 이복동생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훗날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를 격파했으니, 실로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할 수 있다.
1529년 카를의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모후 사보이아의 루이사 사이에 비밀 교섭이 성사되어 부르고뉴와 밀라노, 나폴리가 맞교환되는 캉브레 조약을 통해 가까스로 전쟁은 수습되었다. 역사적으로 꾸준히 독립된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부르고뉴는 비로소 프랑스령으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프랑수아 1세는 불리한 조건에서 진행된 이 조약에 승인하고서야 볼모로 잡혀간 아들들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수아 1세의 장남은 돌아온지 얼마 안되어 사망했는데, 이때 프랑스 전체가 비탄에 잠겼고 심지어 카를 5세가 은밀히 독살했다는 음모론까지 파다했다고 한다.
1536년에는 카를 5세가 먼저 선수를 쳐 로마에서 선전포고를 한 후 프랑스의 프로방스를 침공했다. 전황 자체는 카를 5세한테 유리하게 돌아갔지만 프랑스군이 워낙 강하다보니 프로방스를 점령도 못해서 작전 경과가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게다가 북쪽 플랑드르에서 봉기 조짐이 있어 양국은 전쟁 2년 만에 교황의 중재로 강화 협상에 들어갔다.
1542년 다시 전쟁이 터졌다. 밀라노 공작이 직계 후계자가 없는 상태에서 사망하자 카를은 자신의 어린 아들인 펠리페(훗날의 펠리페 2세)를 그 자리에 앉혔다. 프랑스는 즉각 이것을 구실로 재차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자존심을 접고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아 니차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이에 발끈한 카를 5세는 잉글랜드와 다시 손을 잡고 직접 전선에 뛰어들어 프랑스 북부를 공략하고 밀라노 역시 사수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카를 5세의 처제와 결혼했던 카를로 2세는 프랑스군에게 대패하여 사보이아 공국은 프랑스에 점령당했고 1559년까지 프랑스의 간접 통치를 받았다. 전쟁은 크레피 강화를 통해 3년만에 종식되었다.
이후 긴 시간 프랑스와의 국경 문제는 안정국면에 접어들었으나, 1547년 슈말칼덴 전쟁이 종결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카를 5세가 승리하면서 이제 유럽에서 황제에게 대항하는 세력은 완전히 소멸했다. 이 승리에 도취된 카를 5세는 그때까지 이어오던 최소한의 이성적인 정신줄을 놓아가며 막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을 위협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안도감과 자만감으로 그 스스로 망가지기 시작한 것.
작센의 모리츠는 개신교도였지만 슈말칼덴 전쟁 초기에 중립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카를 5세가 자신을 도와주면 나중에 각종 영토로 보답하겠다는 감언이설로 그를 꼬드겼다. 황제의 말을 믿은 모리츠는 개신교도들로부터 배신자로 불리는 것을 감수하고서 황제의 편에서 싸웠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황제가 입을 딱 씻어버린 것. 물론 황제는 작센 영토의 일부를 모리츠에게 주었으나, 이것은 애초에 황제가 약속했던 영토의 1/n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 더이상 황제를 거역할 자는 없다는 생각에 황제는 자신이 했던 말과 약속들을 종이장처럼 뒤집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 시작했다. 영토 보상 문제는 돈 드는 문제라 그렇게 짜게 나온다 쳐도, 모리츠의 장인인 헤센 방백 필리프를 석방시켜 주겠다던 약속조차도 무턱대고 씹고 있는 카를 5세의 모습에 모리츠는 완전히 빡돌아 버리고 말았다. 모리츠 뿐만 아니라 과거 카를 5세와 동맹을 맺었던 여러 가톨릭 제후들도 차츰 황제의 모습에 실망감을 느끼고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더이상 견제 세력이 없어진 황제가 이제 고삐 풀린 듯 스스로 이랬다 저랬다 자신의 말을 스스로 뒤집으며 막나가는 모습을 보이자 독일의 제후들은 차츰 황제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편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모리츠는 프랑스의 젊은 왕 앙리 2세와 접촉해 그의 지원을 이끌어냈고 모리츠가 프랑스로부터 자금을 얻게 되자 한때 완전히 패망한 것처럼 보였던 개신교 세력은 빠른 속도로 복구되었다.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 알브레히트 알키비아데스 등도 모리츠가 이끄는 개신교 동맹에 가담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마지막 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에서 앙리 2세는 독일의 내분 국면을 교묘히 활용해 다른 독일 제후들도 교사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부추겼다. 때를 맞춰 제국의 서쪽이자 프랑스의 동쪽 국경인 로렌에서도 교전이 있었다. 1552년 앙리 2세는 프랑스-독일 접경 지역인 로렌을 대규모로 침공했고, 앙리 2세의 지원을 받은 모리츠의 개신교 동맹군은 황제가 웅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에 은밀히 접근하여 황제를 급습했다. 급습을 당한 카를 5세는 인스브루크에서 하마터면 포로로 잡힐 뻔 하기도 했으나 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황제는 간신히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도망가는 데 성공했다.
황제가 급습을 당하고 굴욕적인 도주를 했지만, 아무도 나서서 황제를 도와주지 않고 팔짱만 끼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가톨릭 동맹의 가장 핵심 국가였던 바이에른과 동생의 오스트리아조차도 가만히 있었다.
피신한 카를 5세는 보복전을 위해 병력을 증강하고 있었지만, 독일 제후들은 가톨릭, 개신교 할 것 없이 더이상 황제가 일으키는 명분 없는 전쟁에 말려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페르디난트 1세도 보복전을 준비하는 황제의 의사에 반해 개신교 동맹과 파사우 조약을 맺고 휴전해 버렸고, 이로써 독일에서 종교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제후들이 모두 등을 돌린 이상 황제의 권위는 더이상 독일에서 먹혀들지 않았고 이로써 설욕전을 꿈꾸던 황제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독일에서의 사정과 달리 남쪽 이탈리아 전선에서 카를 5세는 계속 선전했다. 이후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2세기에 걸쳐 합스부르크 치하로 편입되었다. 반면 프랑스의 앙리 2세는 합스부르크에 참패하여 결국 부왕의 한을 설욕하는 데 실패하고 1559년 스페인과 카토-캉브레지 평화 협정을 맺었으며, 같은 해 궁정에서 마창시합 도중 사고로 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직후 프랑스는 자신들이 독일을 분열시킨 것 이상으로 격심한 분열 국면에 빠져들어 위그노 전쟁이라는 내전이 발생한다.
9.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세계사에서 카를 5세가 가장 주요하게 언급되는 분야는 바로 종교개혁과 관련된 부분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을 계기로 급물살을 타며 전 유럽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이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한복판에 카를 5세가 있었으니 그는 종교개혁을 저지하는 세력의 가장 선봉에 있었다.카를 5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어린 시절 가톨릭 개혁파에 해당하는 아드리안 데달 신부(훗날의 교황 하드리아노 6세)에게 교육을 받았기에 교회 개혁의 필요성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신앙과는 별개로 카를 5세는 교황과의 관계가 껄끄러웠다. 교황 레오 10세는 카를이 스페인 국왕 제위에 오를 때는 지지를 보냈지만, 황제선거에서는 카를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그의 경쟁자인 작센 선제후 겸 튀링겐 방백 프리드리히 3세와 프랑수아 1세를 차례로 밀어 줬다. 후임 교황인 클레멘스 7세 때는 교황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는데, 클레멘스 7세가 카를 5세에 대항하기 위해 코냑 동맹을 결성했을 때 황제는 그때까지 생애에서 최고로 격분했다.
카를 5세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종교 문제는 그의 생애에 일어난 그 어떤 문제보다 오래 지속된 문제였고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이 종교 문제는 결국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좌절을 안겨주었다. 이전까지 그를 향한 모든 도전들은 타고난 막강한 부와 권력에 의해 모두 비교적 손쉽게 해결되었지만, 개인의 신념과 관련된 종교 문제만큼은 결코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에게 종교 문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 문제는 그가 가진 모든 직위 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있었던 황제의 자격으로 처리를 진행한 문제였다. 때문에 만년에 종교 문제 처리의 실패가 그에게 안겨준 좌절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종교 문제에서의 실패는 종교적 신념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황제로서의 권위 및 물리적인 힘의 실추와도 직결되었다. 종교 문제에서의 좌절은 결국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던 카를 5세에게 극도의 분노와 무력감을 안겨주었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스스로 퇴위를 선언하며 모든 권력에서 물러난 카를 5세는 완전히 종교에 의탁하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
9.1. 보름스 회의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부터 촉발된 종교개혁은 1519년 6월 27일∼7월 16일에 진행된 라이프치히 논쟁 이후 독일 전역으로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한편 라이프치히 논쟁이 진행되고 있던 와중인 1519년 6월 28일 황제선거에서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새 황제로 선출되었다. 카를 5세가 새 황제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틴 루터는 신임 황제가 교황과 사이가 안 좋은 데다가 개혁적인 성향의 아드리안 주교에게 교육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처음에는 카를 5세에게 기대를 품기도 했다. 그러나 루터의 기대는 완전히 헛된 것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는 비록 교황과의 관계는 껄끄러웠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해서 만큼은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 이후 종교개혁의 불길이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교황 레오 10세는 카를 5세와 불편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황제에게 종교개혁을 탄압해줄 것을 요청했다.
1521년 1월 21일 교황 레오 10세는 마침내 루터에게 파문을 내렸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의 파문 칙령을 불태워 버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때 젊은 플랑드르 출신 황제 카를 5세가 스스로 종교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며 나서기 시작했다. 카를 5세는 1521년 1월 27일 보름스에서 제국회의(보름스 국회)를 소집했다. 카를 5세는 루터에게 보름스 회의에 출석하여 소명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카를 5세는 애초에 루터의 소명 따위는 들어볼 생각이 없었다. 오로지 힘과 권위로 굴복시켜 루터가 종교개혁을 철회하도록 만들어 종교개혁 문제를 종식시키겠다는 것이 카를 5세의 의도였다. 회의가 소집되자 루터의 보호자였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중재자로 나서 황제 카를 5세에게 루터가 출석에 응하는 대신 그의 신변을 보장해 줄 것을 요청했고, 카를 5세가 이를 받아들였다. 3월 6일 카를 5세는 루터에게 신변을 보장해준다는 조건으로 국회에 출석할 것을 명했다. 황제의 소집 명령에 대해서 루터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만류했다. 루터 본인도 신변을 보장해주겠다는 황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하지만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중재에 힘입어 목숨을 걸고 제국회의에 출석하여 4월 16일 2만여 명이 넘는 환영 인파 속에 보름스 회의장에 도착했다. 루터는 회의에서 최선을 대해 자신의 주장을 설파했다. 그러나 황제는 루터에게 종교 개혁과 관련된 주장을 모두 철회하려고 강요했다.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루터를 압박했다.
“형제 한 사람이 고립되어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의 여론을 거역할 때 그가 오류를 범하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교 세계가 천 년 전 혹은 그 이전부터 오류에 빠져 있었던 셈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왕국들과 소유물들, 나의 친구들, 나의 육체와 피, 나의 목숨과 영혼을 모두 바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시대에 우리의 태만으로 인해서 그리스도교에 누를 끼치는 그 둘도 없는 이단의 조짐이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파고들게 된다면 이것은 숭고한 게르만 국가의 구성원인 우리에게나 당신에게나 수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는 단 한글자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수 없다면서 황제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회의장 내의 많은 사람들이 루터를 그 자리에서 붙잡아 죽이자면서 여론을 조성했다. 그러나 이미 루터는 독일 전역에서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고, 황제인 카를 5세도 그러한 루터를 함부로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카를 5세는 당초에 자신이 약속했기 때문에 회의 기간 동안 자신의 군대로 루터의 신변을 보호해 줬다. 그러나 회의기간 중 카를 5세는 루터를 정죄받은 이단자로 선언했다. 카를 5세와 가톨릭 세력은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루터를 도중에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예견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조치로 루터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훗날 카를 5세는 "루터는 악마의 하수인이기 때문에 그 약속은 지키지 말아야 했다!!!"고 말하면서 보름스 회의 기간 동안 자신이 루터를 보호했던 사실을 크게 후회했다.
보름스 회의가 폐회된 직후인 5월 카를 5세는 보름스 칙령을 내려 루터를 이단자로 선고하고, 그의 저서를 소각할 것과 그에 대한 원조 금지하고, 그를 따르는 자를 모두 불법자로 규정하여 엄벌에 처할 것 등을 포고하였다. 그러나 직할 영지 이외의 영토에 대해서 황제에게 행정권이 없었기 때문에 카를 5세는 프리드리히 3세의 영지인 작센에 머물며 보호받고 있는 루터를 체포할 수가 없었다.
카를 5세는 황제선거 당시 제국추방령 남발을 자제하고 적법절차에 따른 공소권 없이는 제국추방령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초 약속과 달리, 400여 명의 제국 의회 의원들의 대부분 뜻과 상관없이 이단 명목으로 루터와 루터 추종자들에게 제국추방령을 내렸다. 당연히 신교도 제후들은 카를 5세의 제국추방령에 반발하여 추방령을 쌩깠고, 제국의 분열은 촉진되었다.[34] 그러나 1521년 스페인 반란 진압을 위해 카를 5세가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곧 레오 10세가 사망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일단 흐지부지 되었다.
1521년 12월 교황 레오 10세가 사망하고 후임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로마에서 개최되었는데 스포르차 추기경과 메디치 추기경[35](훗날 클레멘스 7세)의 표가 비슷하여 수십 일간 교황 선출이 무산되었다. 그러자 카를 5세가 자신의 스승 아드리안 주교를 추천하는 추천장을 보냈고, 타협으로 그가 교황 하드리아노 6세로 선출되었다.
하드리아노 6세는 가톨릭 교회의 개혁파였지만, 마르틴 루터의 교리는 단호히 반대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명분인 가톨릭 교회의 타락에 대해선 "교회가 죄를 지었다"며 개혁 의지를 드러냈었다. 그러나 황제가 꽂아준 비 이탈리아인 낙하산 교황이라는 인식 때문에 하드리아노 6세는 이탈리아인에게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다. 20개월의 기간 중 로마에서 통치는 겨우 1년이 조금 넘는 데다가 거의 왕따를 당했기 때문에[36] 평화적으로 종교개혁이 마무리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9.2. 슈파이어 항의와 슈말칼덴 동맹
카를 5세가 장기간 독일을 비우고 있는 동안 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제국통치평의회 의장이자 황제의 대리인으로 실질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1526년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침공하여 초토화시키며 독일까지 위협하자, 개신교 제후들의 지원이 필요해진 카를 5세는 1526년 1차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1521년 내려진 보름스 칙령의 실행을 유보하며 개신교를 인정하며 타협했다.그런데 오스만 제국군은 1526년 8월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완전히 개발살냈음에도 의외로 추가적인 침략없이 신성 로마 제국 목전에서 자진해서 조용히 돌아가버렸다[37]. 게다가 카를 5세의 군대는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프랑수아 1세의 프랑스군을 연신 처발랐고, 이어 1527년에는 코냑 동맹으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던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응징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로마 대약탈을 자행한 후 교황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1529년 8월 캉브레 조약이 맺어지며 프랑스와의 전쟁이 일단락되었고, 이어 1530년에는 볼로냐에서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치르는 등 카를 5세는 한동안 기세 등등한 시기를 보냈다.
이처럼 판세가 황제에게 매우 유리하게 돌아가자 카를 5세는 1529년 3월 다시 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를 열어 1526년 1차 회의에서 내려진 결정을 전부 백지화했다. 그러자 1529년 4월 5명의 신교도 제후와 14개 제국 도시들은 카를 5세의 약속 파기에 분개하여 3년전(1526년 1차 슈파이어 제국회의) 결의 사항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항의 서한(Letter of Protestation)을 작성했다(Protestation zu Speyer). 이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유래가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가 열린 후인 1529년 8월 오스만 제국이 다시 유럽 침공을 감행했다. 오스만군은 헝가리에서 합스부르크군에 승리를 거두고 그 길로 오스트리아까지 진격하여 빈을 포위하는 사태(1차 빈 포위)가 벌어졌다. 이에 황제 측은 오스만 제국을 격퇴하기 위해 다시 개신교측과 일시적으로 협력해야 했다. 개신교측의 지원 속에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가까스로 빈 포위를 격퇴했지만, 이후에도 오스만 제국의 추가적인 공세 위협이 계속되었다.
계속되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개신교가 계속해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존엄한 황제의 명에 항의(프로테스트)까지 하며, 오스만 제국의 위협까지 가중되자 카를 5세는 억압만으로는 개신교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개신교에게 눈속임용 당근을 제시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카를 5세는 종교 일원화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즉 개신교와 가톨릭이 서로의 교리를 조금씩 양보하여 다시 교회의 통합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통합론을 내세워 개신교를 가톨릭에 흡수시키겠다는 의도였다. 황제는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를 소집하여 자신이 주창한 제국의 종교 일원화를 논의하도록 지시했다. 일단 황제의 통합론을 믿은 루터파는 자신들의 교리를 일부 양보하여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제출[38]했다. 그러나 가톨릭 강경파 때문에 회의는 공전으로 흘렀고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는 가톨릭 세력은 결국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채택을 부결시켰다. 신교와 가톨릭 양측이 조금씩 양보하며 타협이 이루어져 갔지만 5개의 핵심 사항에 가톨릭과 신교 양측이 끝내 합의하지 못했다. 이에 다수파인 가톨릭측은 일방적으로 폐회를 선언하고 개신교 측에 5개 사항에 대해 가톨릭 교리를 따를 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에 루터파는 크게 실망했고 자신들의 종교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실력 대결밖에는 없음을 깨달았다. 마르틴 루터는 그동안은 자신의 신학 이론에 따라 신교도 제후들에게 일단 황제에게 순종할 것을 권고했지만 1530년에 이르자 "독일에 더이상 지도자가 없다"며 황제에 대해 깊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1531년 2월 27일 마침내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와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주도하에 개신교측 제후들과 제국 도시들은 군사적 동맹인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 Schmalkaldic League)'을 맺어 황제와 가톨릭 세력에 대해 저항하기로 결의했다. 가톨릭 제후들도 개신교의 군사 동맹에 대응하는 안할트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제국이 분열되었고 전쟁의 기운이 고조되었다.
독일에서 종교 갈등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시점 이웃 스위스에서도 종교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울리히 츠빙글리가 이끄는 스위스의 종교 개혁은 큰 호응을 얻어 스위스의 가장 큰 두 도시인 취리히와 베른이 개신교화 되었다. 스위스에서 개신교 세력이 확산되자 독일에서 루터파 개신교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헤센 방백 필리프 1세가 츠빙글리에게 독일 개신교와의 연합을 제의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일부 교리 차이를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말았다. 1531년 마침내 스위스의 종교 갈등이 폭발해 본격적인 내전이 터졌다. 스위스의 가톨릭파는 자존심을 접고 오스트리아에 손을 내밀었고, 카를 5세는 기꺼이 병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이미 독일 개신교의 연합 제의를 거절했기 때문에 외부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1531년 10월 카펠 전투에서 울리히 츠빙글리가 이끄는 스위스 개신교군은 병력의 열세로 패전하고 말았고 츠빙글리 본인도 전사했다. 이후 10여 년에 걸쳐 스위스는 다시 가톨릭이 장악하게 된다.
9.3. 소강기
1531년 2월 27일 마침내 슈말칼덴 동맹이 맺어지며 종교개혁은 이제 종교전쟁 국면으로 전환되었으나, 오스만 제국 등의 위협이 높은 상황이라 당장 무력 대결이 일어나지는 않고 한동안 소강 상태가 지속되었다.종교 문제가 해결되긴커녕 양측이 각각 군사 동맹인 슈말칼덴 동맹과 안할트 동맹을 맺으며 제국이 분열되어 버렸고, 바깥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계속되는 외우내환의 상황 속에서 카를 5세는 제국에서의 통치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차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선거를 미리 실시하기로 결정하고[39] 동생 페르디난트를 단독 출마시켰다. 오스만의 침공을 방어하고 페르디난트의 로마왕(차기 황제) 당선을 위해서 신교도 제후들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카를 5세는 일시적으로 신교도 탄압을 완화했다. 선제후 7명중 가톨릭 성직자가 3인이고 개신교 선제후는 작센 선제후 하나였지만[40] 황제선거 시 공약과 대관식 때 "세습은 포기한다"고 선언해 놨기 때문에 차기 황제선거까진 일단 조용히 지내야 했다. 1531년 1월 페르디난트 1세가 로마왕에 당선되면서 이후 차기 황제의 자격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지배권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1532년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가 또다시 빈을 침공하기 위해 12만 대군으로 침공하면서 중부 유럽에 전운이 고조되었다. 카를 5세는 합스부르크 제국하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8만 대군을 동원했으나 이로는 역부족이었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선 개신교측과 또다시 일시 화해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카를 5세는 뉘른베르크 칙령을 내려 신교도 제후들에게 종교상의 자유를 인정했다. 그 결과 뉘른베르크 종교 강화회의가 열려 개신교 세력과 가톨릭 세력 간에 휴전 및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신교도 제후들이 협력하는 것이 합의되었다(Peace of Nuremberg). 이에 오스만 제국이 철군하면서 2차 빈 교전은 무산되었다.
1534년 종교개혁의 회오리 속에서 황제에게 치이고 개신교에게도 치이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했다. 새 교황 바오로 3세는 종교개혁에 비교적 유화적이었다. 덕분에 교황령은 격렬한 저항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교황은 시간이 지나면서 보수화하여 후에 적극적인 이단 심문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이때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 의해 예수회라는 수도회가 창설되어, 스페인의 국력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 가톨릭을 전파한다.[41]
1539년 카를 5세의 고향인 겐트(헨트, Gent)에서 가혹한 세금 징수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자신의 고향까지 반발하는 것은 상징성 면에서도 묵과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카를 5세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프랑스에 양해를 구하고 프랑스를 횡단하여 겐트에 도달했다. 카를 5세는 무자비하게 고향의 반란을 진압했다. 13명의 주동자가 모두 처형되었으며, 지역 유지들에게 굴욕을 주었다. 그리고 새로 요새를 구축했다. 이후 한동안 플랑드르의 소요는 멎게 되었다.
1541년 카를 5세는 레겐스부르크 제국 회의를 소집했다. 카를 5세는 다시 한번 신교 측과 구교 측의 양보로 화해를 이루고 통합안을 이루자고 했다. 카를 5세가 이렇게 나선 것은 오스만 제국과의 다시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신교도 측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였다. 신교도측은 다시 한번 카를 5세의 평화시도를 믿고 회의에 참여했다. 이에 구교 측 황제의 특사가 신교도 의중을 반영한 '레겐스부르크 메모'를 제안했으나 신교, 구교 양측 모두 이를 거절했다. 신교도 측의 지원을 얻기 위해 다급해진 카를 5세는 양측이 동의한 내용만 추려내어 '레겐스부르크 임시선언'을 발표하여 당분간만이라도 이것을 따르자고 제안했으나 제국의회는 이를 부결시켰다.
그런데 이후 상황이 카를 5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1541년 카를 황제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신교도 측의 양대 지도자 중 하나인 헤센 방백 필리프 1세가 2번째 장가(중혼)를 가고 싶어했던 것이다. 당시 귀족 층에서 중혼을 하는 경우는 드문 일은 아니었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는 1532년 자신이 반포한 카롤리나 법전에서 중혼을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해 버렸다. 이에 마르틴 루터와 루터교회 측에서 1539년 이혼보단 중혼이 낫다고 말하면서 필리프 1세의 중혼을 용인했지만, 뒤가 매우 찜찜했던 필리프 1세는 카를 황제에게 면책 당하는 조건으로 신교도 동맹에서 빠져버린 것이다.[42]
1542년 카를 5세는 교황청에 트리엔트(트렌토)에서의 공의회 소집을 요청한다. 종교개혁 논리에 방어하기 위함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아울러 프랑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교황청을 단속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카를 5세가 공의회의 장소를 트리엔트( 트렌토)로 정한 것도 그곳이 이탈리아 권역에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할 영지[43]였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체면을 살리면서도 황제가 직접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종교개혁을 막기 위한 목적의 공의회였지만 황제의 영향력이 너무 강하게 들어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공의회 소집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신교도 측 역시 가톨릭 주도의 교리 통합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에 공의회를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공의회의 소집은 또다시 불발되었다.
한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독일 내 신교도 제후들과 가까워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카를 5세는 이미 개신교 국가가 된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손을 잡고[44] 프랑스로 쳐들어 갈 계획까지 세웠다.
1544년 카를 5세는 슈파이어 제국 회의를 소집했다. 이번에 카를 5세가 제국 회의를 소집한 것은 프랑수아 1세의 프랑스와 쉴레이만 1세의 오스만 제국이 연합을 맺고 전쟁이 발발하여 신교도 측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카를 5세는 1531년 이후 신교도 측의 종교개혁 결과를 인정하고 신교도들로부터 지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1544년 카를 5세는 프랑스와 다시 한번 일전을 치러서 또다시 승리를 거두고, 크레피 조약을 맺으며 마침내 프랑스와의 오랜 분쟁을 종식했다.[45] 이어 1545년 오스만 제국과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서 독일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전쟁들은 일단락되었다. 게다가 마르틴 루터가 1546년에 사망하면서 독일 개신교의 구심점이 흔들렸고, 평생 카를 5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도 이때쯤부터 노환에 시달리다가 1547년 잇달아 사망하게 된다.
9.4. 슈말칼덴 전쟁
전쟁에 나서는 카를 5세.
이렇게 외부의 위협 세력들이 모두 정리되었고 카를 5세의 권위는 정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카를 5세에게 남은 유일한 문제는 종교개혁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개신교 박멸을 위한 마지막 총력전에 들어간다.
이를 위한 전초 작업으로 1545년 12월 13일 카를 5세는 오랜 숙원이었던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했다. 종교개혁에 따른 교회 분열을 수습하기 위한 명분으로 소집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가톨릭측의 일방적인 회의였고, 프로테스탄트 측은 사실상 배제되었다. 공의회가 개최된 사실상의 이유는 이단( 개신교)의 근절이 주목적이었다. 이에 더해 개신교의 확산을 막기 위한 가톨릭 자체의 정화를 위한 노력도 있었다. 1차 공의회는 1547년까지 지속되었다. 프랑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종식한 카를 5세는 그동안 필요에 의해 다소 유화적이던 태도를 버리고 개신교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다시 한번 전환했다. 카를 5세는 이단 척결 명목으로 신교도 제후들에게 제국 추방령을 내리고 신교도 세력의 중심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46]에게는 궐석 재판서 사형을 선고했다(1546년 7월).
1546년말 카를 5세는 독일인 2만, 이탈리아인 1만 2천, 스페인인 1만, 네덜란드인 1만 명으로 구성된 5만 2천의 대군을 친히 이끌고 개신교를 끝장내기 위해 독일에 입성했다. 그러나 이는 독일 국내분쟁에 외국군대로의 해결을 금지한다는 제국법은 물론이고 황제선거 때 카를 5세 본인이 내세운 공약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카를 5세의 권세가 거의 정점에 이르렀던 때라 대놓고 이를 지적하는 이는 없었지만,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 독일 국내 제후들과 싸우는 황제에 대해서 독일 국내 여론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동안 카를 5세와 한편이었던 가톨릭 제후들마저 이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황제의 결정적인 약속 뒤집기가 시전되자 가톨릭 제후들 조차 다음은 내가 당할 차례 아닌가 하면서 황제에게 깊은 불신과 반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황제의 무소불위적 행동은 결국 나중에 극렬한 저항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어쨌든 카를 5세의 다국적 군대가 독일에 당도하면서 슈말칼덴 전쟁이 벌어진다. 객관적인 전력에 있어서 슈말칼덴 동맹군의 전력은 황제쪽의 전력보다 처참하게 열세에 있었다. 정예군으로 구성되어 일사불란한 체계를 갖고 있던 황제군에 비해 슈말칼덴 동맹군은 각 제후들의 이해관계가 제각각 얽히면서 지휘권도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고 오합지졸을 넘어서서 난장판 일보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특히 당시 신교도 동맹측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작센은 당시 내분 상황에 처해 있었다. 작센 선제후국은 15세기 때 지배 가문인 베틴 가문이 에른스트계와 알브레히트계로 분열되어 공국을 양분하여 통치하고 있었는데, 당시 종가로서 선제후직을 보유하고 있던 에른스트 계열 군주는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였고, 방계인 알브레히트 계열 군주는 작센-마이센 공작[47] 모리츠였다. 작센 내부 영토 문제를 놓고 둘은 대립하고 있었는데,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모리츠와의 공동 통치 지역인 부르첸을 일방적으로 점령하면서 둘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는 신교도였고 공국 내부에서는 종교 개혁을 실시했지만, 외교적으로는 신하 게오르크 폰 카를로비츠의 조언을 받아들여 국익을 위해서 구교 세력의 중심인 카를 5세 및 페르디난트 1세와 연합하는 실리 외교를 펼쳤다. 그리하여 합스부르크가 1542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1543년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작과의 전쟁, 1544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를 때, 모리츠는 합스부르크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전공을 쌓았다. 모리츠는 자신의 영지에서는 종교개혁을 추진하여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이 자금으로 각지에 공립학교를 세워 공국 내 백성들에게 신망이 높았다.
1546년 슈말칼덴 전쟁이 터지자 모리츠는 신교도였지만 불구대천의 원수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신교도측 지도자였기 때문에 슈말칼덴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중립을 선언했다. 이때 카를 5세가 모리츠에게 접근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에게 작센 선제후 자리를 주고 헤센 방백 필리프 1세를 처벌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헤센 방백 필리프 1세는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신교도측 양대 지도자였는데, 필리프와 모리츠는 장인, 사위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평생 우정을 함께한 절친한 사이였다. 모리츠는 고심 끝에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여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는다.[48]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 군대는 남부 독일을 휩쓸며 신교도 제후들을 하나씩 굴복시켰고, 마침내 최후의 보루인 신교도 동맹의 지도자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격파하기 위해 작센 공국을 침공했다. 1547년 4월 24일 작센 선제후령 비텐부르크 부근에 있는 뮐베르크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의 군대를 포함하여 두배가 넘는 병력의 황제군은 1만 5천의 신교도 동맹을 격파하며 대승을 거뒀다. 카를 5세는 곧 비텐베르크에 입성했다.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영지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성문 밖으로 나왔다. 그가 항복문서에 서명하자 카를 5세는 그 자리에서 그를 체포하여 끌고 갔다. 카를 5세는 종교 재판을 열어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영지 대부분을 몰수하고 선제후직을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놀란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 등이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사형을 철회해달라고 탄원했고, 이에 황제는 관대하게도(?) 사형을 취소했다.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더불어 신교도 동맹의 지도자였던 헤센 방백 필리프 1세도 자진출두해서 나란히 수감되었다. 두 제후는 수감되어 카를 5세의 고향인 네덜란드로 압송되었다. 두 제후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카를 5세의 개종 회유와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두 제후는 5년 후 카를 5세가 인스브루크 전투(1552년)에서 패하여 사실상 실권을 상실한 후 모리츠를 비롯한 제후들의 요구로 풀려나게 된다.
뮐베르크에서 대승을 거두고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필리프 1세를 굴복시킴으로써 슈말칼덴 전쟁은 카를 5세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전후 조치로 1548년 아우구스부르크 잠정화의(Augsburger Interim, Augsburg Interim)'가 맺어진다. 프로테스탄 세력은 완전히 궤멸되었고 카를 5세는 종교전쟁의 최종 승자가 된 것으로 보였다. 이 때가 카를 5세의 권위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카를 5세의 몰락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9.5. 개신교 동맹의 역습 (Fürstenaufstand)
슈말칼덴 전쟁에서 승리한 카를 5세는 전후 처리를 위해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카를 5세는 가톨릭 중심의 종교일원화를 선언하였고 이를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화의(Augsburg Interim)'라 부른다. 카를 5세는 이미 1545년 가톨릭 중심의 종교일원화를 목적으로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했지만 신교측의 지지와 참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의회가 별 진전없이 계속 미적거리고 심지어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산으로 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공의회에 대한 희망을 접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에 이어 슈말칼덴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지상 최고의 권력자가 된 카를 5세는 마침내 본인이 직접 나서 그동안 자신이 구상해왔던 방식대로 종교일원화를 선언하여 강요했던 것이다.이 교리의 주요 내용이라 할 만한 것은 대충 가톨릭 기존 교리에 영성체 중에 평신도가 성혈(포도주)까지 영하는 것[49] 허용, 사제의 결혼 허용 등을 복합한 것이었다.
1548년 아우구스부르크 잠정화의로 인해 표면적으로 대립이 소강국면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이는 강력한 카를 5세의 강력한 권세에 의한 것일 뿐 개신교, 가톨릭 양측 모두 카를 5세의 통일안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신교도들은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화의를 군말없이 따르는 시늉을 했지만, 가톨릭과 사실상 차이가 없는 이 통일안에 대해서 내심 분개하고 있었다. 가톨릭교회 역시 많은 희생을 치르고 신교도를 제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단 한 자라도 개신교와 타협할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다.(가톨릭 제후인 바이에른 공작마저 회의적으로 바라봤다.) 강력한 황권으로도 신앙만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슈말칼덴 전쟁(1546년~1547년)에서 신교도 제후들이 궤멸당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신교도 지역에서 황제에게 굴복하고 1548년의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화의를 따랐다. 그러나 아직도 북쪽의 몇몇 지역의 개신교 지역은 황제에게 격렬히 반발하고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북독일의 마그데부르크였다. 황제는 작센의 모리츠에게 마그데부르크 토벌을 명령한다. 원래 작센-마이센 공작이었던 모리츠는 슈말칼덴 전쟁 후 작센 선제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작센 선제후 모리츠는 슈말칼덴 전쟁이 끝난 후 황제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그는 황제의 약속을 믿고 신교도임에도 불구하고 황제 편에 가담하여 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전쟁이 끝나자 황제는 모리츠에게 약속했던 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모리츠는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차지하고 있던 작센 선제후직을 얻게 되었고, 에른스트 계열이 소유하고 있던 영지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긴 했으나 카를 5세는 모리츠에게 작센 공국 영토 전체를 주지는 않았다. 때문에 가문과 작센 공국을 완전히 통일하려던 모리츠의 꿈은 무산되었다. 게다가 황제가 신교도측 지도자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모리츠는 깜짝 놀라 황제에게 목숨만을 살려줄 것을 탄원했다. 비록 요한 프리드리히와 견원지간이었지만 그의 목숨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 황제는 모리츠의 장인이자 오랜 벗인 헤센 방백 필리프 1세를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전쟁에서 끝나자 약속을 깨고 필리프 1세를 투옥하여 네덜란드로 끌고 갔다. 모리츠는 약속대로 필리프를 석방해 줄 것을 거듭 간청했지만 황제는 계속 이를 씹고 필리프를 석방하지 않았다. 또 황제는 마그데부르크를 탈환하면 모리츠에게 주기로 했지만 이 역시 씹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호엔촐레른 가문 방계에게 돌려주었다. 게다가 슈말칼덴 전쟁 후 신교들을 강력하게 탄압하고 가톨릭화하려는 조치가 이어지자 모리츠는 황제에게 분개하게 되었다.
만년에 이르러 더욱 꼬장꼬장해진 카를 5세는 슈말칼덴 전쟁에서 모든 신교도 제후들을 굴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신앙이 더욱 확산되며, 심지어 자신의 고향인 플랑드르에서도 크게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개신교에 대해 더욱 극단적인 강경책을 펼치며 탄압했다. 카를 5세는 1550년 4월 29일 '피의 칙령(Blood Edict, Bloedplakkaat)'을 내려, 루터파 신자들은 누구나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등 개신교 탄압의 강도를 더욱 높여갔다.
이때 황제의 결정적인 패착이 또 하나 나오는데 그것은 30년 동안 자신을 대리해서 독일을 다스리던 동생 페르디난트 1세를 토사구팽하고 자기 아들 펠리페( 펠리페 2세)에게 자신의 모든 영토를 물려주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이러한 시도에 대해 독일 제후들은 모두 반발했다. 독일 제후들은 신교 구교할 것 없이 한결 같이 펠리페 2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이방인인 데다가 독선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제후들은 펠리페 2세가 황제가 되면 독일이 스페인에 종속되지 않을까 크게 우려했다. 이미 슈말칼덴 전쟁 때 카를 5세가 스페인 군대를 끌고 독일 내에서 전쟁을 치른 것에 대해 독일 내부의 반발이 상당했었다. 이는 명백한 외세의 간섭으로 제국법에도 어긋나는 행위였다. 애초에 1519년 황제선거 때도 이런 우려가 재기되었고 카를 5세는 절대로 스페인 세력을 독일 국내 정치에 개입시키지 않겠다고 공약한 바 있었다. 게다가 슈파이어 제국 회의나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회의 등에서 황제가 여러 차례 자신의 약속을 번복하는 행태가 반복되자 개신교는 물론 가톨릭 제후들까지 황제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를 5세가 또 차기 황제선거까지 치러 당선된 페르디난트 1세를 물리고 펠리페 2세에게 제국을 물려주려고 시도하자 신교도 제후들은 물론이고 가톨릭 제후들 마저 모두 반발하며 황제에게서 돌아서게 된다.
제후들은 독일왕 페르디난트 1세에게 훨씬 우호적이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형인 카를 5세에 비해 훨씬 융통성 있는 정치력을 갖춘 데다가 인간성도 좋았다. 페르디난트는 스페인 출신으로 독일을 대리 통치해야한다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독일의 언어와 문화를 습득했을 뿐만 아니라 원만한 제국 통치를 위해 제후들과의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가톨릭 제후들 뿐만 아니라 개신교 제후들과도 개인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을 때 신교도 제후들이 페르디난트를 지원하기도 했다. 카를 5세가 후계자를 바꾸려하자 독일 제후들은 신교, 구교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이미 선출된 합법적 차기 황제이자,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을 지켜낸 업적이 있는 페르디난트가 황제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처럼 카를 5세의 신교 탄압의 수위가 연일 높아지면서 신교도 사이에서 불만이 팽배해졌고, 동시에 카를 5세의 약속 불이행 및 무리하게 펠리페 2세에게 황제위를 물려주려는 시도 때문에 구교 세력 역시 황제에 대한 불신이 높아졌다. 이때 독일에서 신망이 높은 제후였던 작센 선제후 모리츠가 배후에서 신교도 세력을 다시 결집했다. 1551년 5월 22일 신교도 제후들 간에 '토르가우 동맹(Alliance of Torgau, Vertrag von Torgau)'이 맺어졌고 작센-마이센 선제후 모리츠가 동맹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한편 프랑수아 1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이 된 앙리 2세는 아버지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합스부르크와 전쟁(이탈리아 전쟁, 1551~1559)를 일으켰다. 토르가우 동맹을 체결한 독일 신교도 제후들은 카를 5세와 전쟁 중에 있는 프랑스 앙리 2세와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다. 토르가우 동맹 측은 앙리 2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로트링겐(로렌) 지역의 프랑스어권 3 주교령인 메츠, 툴, 베르됭의 할양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동맹을 제안했고, 이에 1552년 1월 15일 독일 신교도 세력과 프랑스 앙리 2세 간에 '샹보르 조약(Treaty of Chambord)'이 체결되어 반합스부르크 동맹이 맺어지게 된다.
샹보르 조약이 맺어진 직후 샹보르 동맹은 곧바로 황제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Fürstenaufstand). 작센 선제후 모리츠가 이끄는 개신교 군대가 남부 독일을 휩쓸었고, 앙리 2세의 프랑스 군이 라인강변으로 진주했다. 1552년 5월 모리츠는 신교도 군대를 이끌고 티롤을 점령한 후 황제가 있던 인스브루크를 급습했다. 황제는 포로로 사로잡힐 뻔 했으나 가까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소수의 측근만 대동한 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알프스산을 넘는 개고생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수모를 겪었다.
알프스를 넘어 가까스로 도피한 황제는 오스트리아 최남단 국경에 위치한 필라흐에서 설욕전을 위해 다시 군대의 소집을 명했다. 그러나 이미 황제에게 등을 돌린 가톨릭 제후들은 다들 소닭 보듯 수수방관하며 황제의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한때 황제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었던 바이에른 공작과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조차도 황제의 소집에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페르디난트 1세는 황제의 명에 반하여 신교도측 대표인 작센 선제후 모리츠와 강화를 추진했다.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1552년 8월 개신교 제후군과 가톨릭 제후군 간의 강화(파사우 조약/화의 Passauer Vertrag)가 체결되었다. 파사우 조약을 통해 페르디난트 1세는 개신교를 인정했고, 슈말칼덴 전쟁 이후 수감되어 5년째 개종을 강요받으며 고통당하고 있던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와 작센 공작[50]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석방되었다.
가까스로 탈출한 후 설욕전을 준비하던 황제는 가톨릭 제후들 마저 자신의 명에 응하지 않자 그제서야 제후들의 민심 이반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카를 5세는 제후들의 마음을 다시 돌리기 위해 지난날 자신이 씹었던 약속들을 뒤늦게라도 이행하는 모양새를 취하기 시작했다. 파사우 조약에서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와 작센 공작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석방하기로 한 결정에 동의했다. 이어 1553년 황제는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에 대한 펠리페 2세의 승계권을 완전히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미 돌아선 제후들의 마음을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황제는 겉으로는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파사우 화의가 맺어진 후 신교도 측 제후였던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 '벨라토르(Bellator, 전쟁광)' 알브레히트 2세(알브레히트 2세 알키비아데스, Albrecht II. Alcibiades)[51]가 독단적으로 2차 변경백 전쟁(Zweiter Markgrafenkrieg)을 일으켰다. 그러자 카를 5세는 벨라토르 알브레히트 2세에게 접근하여 군사적 지원 및 영토 보상을 제안했고 이에 카를 5세와 벨라토르 알브레히트 2세 간에 동맹이 맺어졌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벨라토르 알브레히트 2세를 진압하기 위해 페르디난트 1세와 모리츠가 이끄는 신구교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1553년 모리츠가 전사하였으나 1554년 제국의회는 벨라토르 알브레히트 2세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결국 벨라토르 알브레히트 2세는 패퇴하여 물러났고, 이로써 카를 5세의 마지막 시도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9.6. 카를 5세의 좌절과 평화의 도래
이후 개신교, 가톨릭 양측 모두에서 진정한 평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페르디난트 1세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적극 추진했다. 카를 5세는 개신교를 인정하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추호도 용인할 생각이 없었지만, 이미 그에게는 더이상 이를 저지할 힘이 없었기에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1555년 9월 25일 마침내 신교도 제후들의 영지 내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 아우크스부르크 화의(Augsburger Religionsfrieden, The Peace of Augsburg)'가 체결되었다. 가톨릭 측의 체결 당사자는 로마왕 페르디난트 1세였다. 카를 5세가 완강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의는 황제의 이름으로 선포되었다. 이는 카를 5세의 권위와 실권이 완전히 유명무실해졌음을 보여준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체결 소식을 들은 카를 5세는 극도의 분노와 무력감을 느꼈다.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치욕이라 여겼다.
10.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1535년 튀니스 원정에 나선 카를 5세
카를 5세의 치세에 오스만 제국은 쉴레이만 1세의 최전성기였다. 비단 그리스도교 세계의 수장[52]과 이슬람 세계의 수장[53] 간의 격돌로 치부할 것 없이, 서유럽 최강국과 동방 대제국 간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카를 5세가 프랑스와의 전쟁과 반란 수습, 종교 갈등으로 분주한 와중에, 쉴레이만 1세는 동유럽으로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오스만군이 발칸반도를 장악한지 얼마 되지 않아 1526년 중부 유럽의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이 결정적으로 패배해 국왕 러요시 2세[54]가 죽고 나라가 무너졌다. 헝가리 왕실의 정통성은 훗날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차지했지만 헝가리 영토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에 편입당했다.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의 중핵인 빈은 오스만군의 바로 코 앞에 있었다. 쉴레이만 1세는 12만의 대군으로 1529년 최초로 빈 포위를 시도했다. 이때 오스만군과 맞서 싸운 이는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신성 로마 제국에서 황제의 대리인을 겸하고 있던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였다. 페르디난트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내 제국들의 지원을 받아 결사적인 수성전을 벌인 끝에 겨우 격퇴에 성공했다.
1532년 카를 5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뉘른베르크 칙령을 내려 개신교의 환심을 샀다. 그만큼 오스만군이 입힌 후유증은 대단했다. 이 해 그는 결전을 벌일 태세로 친히 8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해 이끌고 빈에 진주했으며, 마침 오스만 측도 쉴레이만 1세 본인이 다시 헝가리로 직접 나서 임전태세로 대치하고 있었다.
사실상 황제의 최종 교전 승인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스페인에서 불온한 기미가 돈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카를 5세는 지휘권을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기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이후 쉴레이만 1세 또한 겨울을 지탱하기 힘들다고 판단해 군을 철수시켜 2차 교전은 무산되었다.
이 때문에 쉴레이만 1세는 유럽 장악의 목전에서 좌절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영민한 그는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가 대립하는 정세를 읽고 그것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그는 카를 5세의 숙적인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체결하고 1535년 지중해의 합스부르크 식민지를 겨냥해 함대를 보냈다.[55][56] 스페인의 북아프리카 거점 튀니지에서 교전이 벌어졌으나 이번에도 카를 5세는 오스만군을 격퇴하여 승리했다. 그 결과 튀니스와 할크알와디가 스페인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튀니지는 반세기 뒤인 1574년까지도 계속 스페인령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은 교황과 베네치아가 주축이 된 신성동맹 함대를 물리치고 다시 지중해 패권을 장악했다. 카를 5세는 날로 강성해지는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고자 1538년 적국인 베네치아와도 연합했다. 뒤에 쉴레이만 1세와 휴전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간신히 오스만 제국과의 화평이 맺어졌고 이는 1683년 2차 빈 포위까지 1세기 이상 불안하게 지속되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사는 이런 아버지보다도 아들인 펠리페 2세가 더 유명하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투입해 오스만 제국에게 대승을 거둔 것 때문인데, 빈 포위전이 수동적 방어전이었다면 레판토 해전은 능동적 반격전의 성격이라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레판토 해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쉴레이만 1세의 아들 셀림 2세의 통치 아래에 있었는데 어찌 보면 세기의 대결 구도가 아들한테까지 물려받은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아들들이 아버지의 위업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펠리페 2세나 셀림 2세나 판박이일 것이다.[57]
11. 카롤리나 법전 공포
라이벌이자 '입법자'라는 별칭을 보유한 쉴레이만 1세를 의식해서인지 카를 5세는 재위 초부터 법에 관심을 갖고 이를 정비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유럽 본토만 해도 서쪽으로는 스페인부터 동쪽으로는 오스트리아에 달하는 광대한 땅을 직접 경영하는 제국의 지배자로서,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법이었기 때문이다.그리하여 1532년, 마침내 역사적인 그 유명한 카롤리나 법전(Constitutio Criminalis Carolina)이 카를 5세에 의해 공포된다. '카롤리나' 법전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카를 5세의 적극적인 주도로 작업된 이 법전은 법 제도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로마법과 독일법을 망라한 통일법전으로서 무려 219개 조항을 담고 있었다. 현대 형법의 근본적인 기틀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법전의 중요한 의의는 개인의 복수권을 공권력에 위임한다는 형법의 근본 이념을 역사상 처음으로 함의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법은 너무 가혹한 처벌과 중세적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법에서 규정한 범죄의 종류는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든 것이 많고, 처벌 방식도 잔혹하며, 오늘날에는 경범죄조차도 성립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사형을 때리는 등 너무 가혹한 법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고지식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던 카를 5세의 성향이 크게 반영된 법전이라 할 수 있다.
이 법전은 이후 나폴레옹 법전이 나타나기 전까지 3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법전으로 여겨졌으며, 또 신성 로마 제국이 18세기 초까지 3세기를 더 지탱하는 과정에서 치안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도움을 주었다. 이후의 형법은 사실상 이 법전을 개수한 것에 가까우며, 이러한 영향력은 진정한 근대법이자 대륙법인 나폴레옹 법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2. 르네상스
카를 5세는 공교롭게도 경쟁자인 예술광 프랑수아 1세, 쉴레이만 1세처럼 그 자신 또한 엄청난 예술 마니아였다. 어쩌면 이런 경향은 르네상스 말기인 16세기 초 군주들의 공통적인 특성일지도 모르지만, 당대 군주들 중 예술적 후원이 후대에 끼친 영향은 카를 5세가 가장 강력했다.카를 5세 이전의 스페인은 사실상 예술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58] 등 이웃 나라들이 막대한 후원과 부를 바탕으로 르네상스기 예술사에 한 획을 긋는 찬란한 문예부흥을 뽐내고 있었던 반면, 수세기에 걸친 레콩키스타로 전 국토가 전장이나 다름없었던 15세기까지의 스페인은 그야말로 예술의 깡촌이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중세 시대까지 고대 로마의 건축 유적 말고는 도무지 볼 것 없던 나라가 스페인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예술적 빈곤함이 카를 5세 치세에 획기적인 전환을 맞았다.
일단 카를 5세가 예술사적으로 행한 최고의 업적은 말살 위기에 처했던 이슬람 문화재를 보존한 것이다. 16세기 초 당시 장기간의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스페인 국민들의 이슬람에 대한 악감정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이미 북부 스페인에 남아있던 이슬람 유물들은 엄청난 파괴와 훼손이 가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스페인은 종교개혁 당시 유럽에서도 최강급의 열렬 가톨릭 신봉국가였다. 이교도의 유산은 파괴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으며 이슬람을 믿는 무어인들은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심지어 카를 5세 자신조차도 재위 초 알함브라 궁전 일부를 훼손시키고 그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딴 별궁(카를로스 5세 궁전)[59]을 건립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카를 5세는 이슬람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자신도 열혈 가톨릭 교인이었지만, 신앙과는 별개로 이슬람 예술의 깊이에 매혹된 것이다. 그 결과 카를은 알함브라에 건립된 자신의 별궁을 끝으로 더이상 이슬람 문화재를 훼손하지 말라는 칙명을 내렸다. 이러한 왕명 때문에 당시 이단심문관들을 비롯해 종교열이 둘째가라면 서러운 스페인 사람들도 이슬람 문화 훼손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이후로도 가톨릭의 이교도 박해가 지속된 스페인이었지만, 중세까지 만들어진 무수한 이슬람 유적들은 왕가의 비호 덕에 잘 보호될 수 있었다. 이슬람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도 카를 5세의 보호 조치가 아니었으면 지금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60] 카를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는 아버지보다 훨씬 강경한 가톨릭 광신도였지만, 그도 결국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이슬람 문화재를 잘 보존했다.
유럽 회화-건축 예술의 중심이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간 계기도 카를 5세 때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플란데런 출신으로 대륙 본토의 휘황찬란한 예술 붐과 달리 정작 스페인 내에서 볼 만한 작품이 드물어 아쉬워하던 카를 5세는 적극적으로 유럽 각지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을 초빙했는데, 이들이 바로 근현대 내내 예술 강국으로 꼽히게 될 스페인의 예술인 1세대로서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훗날 유럽의 문예사조를 휩쓰는 바로크 예술이 첫 싹을 틔운 것도 이 시기이며, 절대왕정기 유럽 각국의 왕실은 스페인 궁정의 후원을 그 본보기로 삼았다. 이처럼 후원 정책으로 단기간에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급성장을 이룬 케이스는 스페인이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카를 5세의 예술적 심취와 이해도가 높았던 것이다. 회화계 최고 거장 파블로 피카소, 건축계 최고 거장 안토니오 가우디가 모두 스페인 출신이라는 점도 이런 역사적인 토대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12.1. 티치아노와의 인연
카를 5세가 스페인에 초빙했던 여러 예술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인물은 당대의 대표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다. 티치아노는 본래 베네치아 태생이었지만, 그 활동 영역이 유럽 각지에 걸쳐져 있었던 세계 최초의 국제 화가였다.[61] 즉 그 당시 유럽을 대표하는 진정한 월드스타가 바로 티치아노였다.피렌체 회화와 쌍벽을 이루는 베네치아 회화의 최고 대표 작가로서 그는 독특한 유화 기법으로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했다. 그 뛰어난 화풍 덕에 각국 군주들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카를 5세는 물론이고 프랑수아 1세를 비롯해[62] 여러 굵직굵직한 군주들로부터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아 일감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 명성이 얼마나 자자한지 위로는 황제와 왕들부터 아래로는 총독, 제후들에 이르기까지 권력 깨나 쓰는 이들이라면 티치아노에게 의뢰하려 안간힘을 썼으며 실제로 지금 남아있는 작품들도 대부분 그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처럼 유럽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빽이었기 대문에 티치아노는 반농담조로 '재야의 권력자'로까지 불렸다. 실제로 16세기 유럽에서 이 정도로 부와 명성을 쌓아 출세한 화가는 없다. 그렇게 일생을 유럽 각지에서 활약하면서도 누군가의 전속 궁정화가로 한 곳에 매이길 거부해온 티치아노였지만, 그런 그도 자신의 최대 후원자인 카를 5세와는 매우 각별한 관계를 맺는다.
1532년 첫 만남 이후 몇 차례 초상화 작업으로 카를 5세와 인연을 맺으면서 티치아노는 차츰 카를 5세의 예술적 열정에 감화되었는데, 그것을 극명히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언젠가 한번 티치아노가 카를 5세의 초상화를 그리는 중 그만 실수로 붓을 땅에 떨어뜨리자 화가인 자신보다 모델인 황제가 먼저 몸을 숙여 떨어진 붓을 줍고서는 그것을 건네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티치아노 정도의 거장이라면 기꺼이
황제로부터 시중을 받을 자격이 있지!"
(리돌피, 티치아노 전기 中)
(리돌피, 티치아노 전기 中)
이 때 티치아노가 느꼈을 정신적 감명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이후 지금까지도 줄곧 미술가들에게 후원자의 가장 모범적인 전형으로 통하고 있다. 카를은 티치아노를 극진히 총애하여 화가인 그에게 기사 작위와 백작 작위까지도 수여했다.
이런 까닭인지 말년의 티치아노는 자주 스페인에 왕래하며 거의 궁정화가나 다름없는 예우를 받게 된다. 특히 카를 5세와는 교분이 두터웠기에 소싯적 카를 황제가 자신의 애견과 같이 노는 사사로운 모습부터 제후 반란을 진압하고 위풍당당하게 개선하는 영예로운 모습까지 온갖 초상화를 전담하여 도맡다시피 화폭에 옮겼다. 위에 올려져 있는 카를 5세의 이미지 상당수가 바로 티치아노의 솜씨다. 물론 군주의 초상화로만 작품을 한정한 것도 아니라서, 걸작 <신성과 세속의 사랑>을 비롯해 대담함이 넘치는 풍속화와 종교화, 누드화를 그려내기도 했다.
카를 5세 사후 티치아노는 카를의 아들 펠리페 2세의 후원 하에서 노년을 보냈다. 사이가 친밀하여 자주 만났던 카를 5세와 달리 궁정 안에 틀어박힌 펠리페 2세와는 평생 단 2번밖에 만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잦은 편지 교환을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청년 시절 펠리페 2세의 모습도 티치아노가 작업한 초상화이다.
이렇듯 티치아노는 회화의 불모지인 스페인의 예술 환경을 대폭 업그레이드시킨 1세대 화가로서 후대 스페인 화가들의 영원한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으며, 피터 폴 루벤스를 비롯한 바로크 화가들은 국적을 초월하여 이 티치아노를 자신들의 교범으로 삼고 흠모했다.
당연히 스페인 내에서의 상징성은 말할 필요도 없고, 특히 스페인 미술사학자들은 오히려 벨라스케스나 고야, 피카소 같은 화가들보다 스페인 회화의 근본적 뿌리인 티치아노를 더 중요시 여길 정도다. 이 티치아노의 화풍은 이후 다음 세대의 거장인 엘 그레코에게 계승되어 본격적인 스페인 바로크의 포문을 연다.
13. 후계자 문제 및 퇴위
1547년 슈말칼덴 전쟁에서 승리하며 그는 진정한 유럽의 최고의 지배자로 등극하며 생애 최고의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그의 몰락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만년에 잇따른 병크를 저지른 덕분에 신성 로마 제국의 모든 제후들이 그에게 등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결국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실권을 잃어버렸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제위를 물려주고 은퇴하여 은둔한 채 쓸쓸히 남은 여생을 보내고 만다.1546년에는 카를에게 가장 큰 짐을 지워주었던 마르틴 루터가 사망했고, 1547년에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2달 간격으로 연달아 사망했다. 루터의 사망으로 개신교 세력의 구심점이 약해지고,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가 노환으로 드러누워 두 나라가 간섭하기 힘든 상황이 되자, 마침내 황제는 이것을 일생일대의 기회로 여기고 군대를 소집하여 장장 16년만에 독일로 돌아왔다. 황제는 이 기회에 신교파를 완전히 박살내어 종교전쟁을 완전히 종식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슈말칼덴 전쟁이 시작되었고, 1년여간의 전쟁 끝에 개신교 세력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말았다. 이 슈말칼덴 전쟁에서의 승리로 그는 종교전쟁의 최종 승자가 된 것으로 보였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짐이자 가장 큰 목표가 해결되고 나자 그는 나사가 풀어져 버렸고, 이제는 더이상 자신을 견제할 세력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한 그는 막나가기 시작했다. 슈말칼덴 전쟁이 끝나자 자신을 도왔던 제후들에게 약속했던 것을 멋대로 파기하는 일이 다반사여서 제후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특히 그때까지 헌신적으로 자신을 도왔던 동생 페르디난트와 나중에 그에게 치명타를 날리게 될 작센공 모리츠와의 약속을 씹은 것은 크나큰 실수였고, 나중에 부메랑으로 돌아와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
만년에 그가 몰락한 결정적인 계기는 후계자 문제였다. 이미 카를은 오래 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제위를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주기로 약속했다. 1531년 미리 황제 선거를 치러 페르디난트가 이미 황제의 후계자로 공인받은 지 20년 가까이 지난 상황이었다. 카를이 페르디난트에게 신성 로마 제국 통치를 맡긴 것은 제위 초기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외부에서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이 침공하던 어수선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조치였다. 카를 5세가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싸우는 동안, 독일에서는 페르디난트가 훌륭히 제국을 이끌고 있었다. 그의 온건한 통치 방식은 제후들의 호감을 사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슈말칼덴 전쟁에서 승리한 후 더이상 유럽에서 그에게 대적할 세력이 없어지고 나자 황제는 페르디난트를 폐하고 장남 펠리페 2세에게 황제 제위를 넘겨주기 위한 절차에 들어간다. 페르디난트가 이미 20년 전에 황제 선거에서 차기 황제로 선출되었지만 카를 5세는 힘으로 이를 뒤엎는 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실제 그런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후계자를 바꾸는 것은 카를이 생각했던 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카를 5세가 과거 황제에 당선될 때 독일 제후들이 가장 우려했던 문제 중 하나는 스페인 국왕이었던 카를이 황제가 되고 나서 스페인 세력을 독일 국내 정치에 끌어들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카를 5세는 황제 선거와 대관식에서 절대로 외세(특히 스페인)를 독일 정치에 개입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재차 공약해야만 했다. 카를 5세가 페르디난트에게 대리 통치를 맡긴 채 독일 내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거의 직접 개입하지 않은 것은 본인이 프랑스, 교황청 등과의 전쟁 때문에 바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외세를 독일 정치에 개입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한 황제 선거에서의 공약 때문이기도 했다. 황제가 자신의 주력군인 스페인 군대를 이끌고 독일 전쟁에 참전한다면 이것은 명백한 공약 위반 사항이었다.
그러던 와중 프랑스, 교황청을 차례로 제압하는 데 성공한 카를 5세는 마침내 최후로 남아 있는 적인 독일의 신교도 세력을 궤멸시키기 위해 1546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16년 만에 독일로 행차했다. 그리고 마침내 개신교 세력을 초토화시키고 독일에서 종교 개혁을 박멸하는데 (일시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이 슈말칼덴 전쟁에서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인으로 구성된 황제의 5만 대군이 독일 강토를 휩쓸고 다니자 독일 제후들 사이에 외세의 개입에 대한 우려와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가 동생에게 넘기기로 약속하고 황제선거까지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파기하고 황제 자리를 아들에게 넘기려고 하자 제후들이 집단 반발하게 된다. 황제선거 결과를 물린다는 것은 카를 4세가 공포한 금인 칙서에 명문화되어 있는 선제후들의 권한과 역할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였고, 이는 제국의 질서를 흔드는 행위였다. 게다가 페르디난트에게 폐위당할 만큼 결격 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페르디난트는 능력있는 군주였고, 쉴레이만 대제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업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업적은 제후들이 페르디난트 1세를 옹립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게다가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는 황제가 되기에는 여러가지 결격 사유를 갖고 있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완전한 스페인 사람으로 독일어도 전혀 할 줄 몰랐고 독일과는 문화적 접점이 없었다. 게다가 펠리페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 영지도 없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는 자격으로 작용했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이미 1521년 페르디난트 1세가 물려받았다. 신성 로마 제국내에 있던 또다른 합스부르크의 영지인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물론 신성 로마 제국 내에 영지가 없더라도 혈통을 이유로 황제선거에 출마한 경우는 있었지만 실제로 당선된 사례는 단 한번도 없었다. 애초에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 제도가 시작된 것 자체가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었을 때 서프랑크 왕 샤를 3세가 혈통을 내세워 독일 왕위에 오르려 하자 독일 5대 공국 제후들이 샤를의 즉위를 막고 독일인 중에서 왕을 세우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이처럼 펠리페 2세는 황제로 선출되기에는 여러 가지 결격 사유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독일 제후들은 펠리페 2세가 황제가 된다면 독일이 스페인에,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과 제후들 자신들이 합스부르크 왕조에 완전히 예속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페르디난트 1세는 30년간 독일을 통치하며 독일 제후들의 민심을 얻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독일어를 할 줄 몰랐지만 오스트리아에 도착하자마자 열심히 독일어를 배우고 독일 문화를 받아들여 1550년대에는 독일인이 되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형의 의중에 따라 제국을 통치했지만 강압적이고 독단적인 황제의 지시를 현지 사정에 맞게 융통성있게 적용하는 완충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신교도에게 강경하게 대응하라는 황제의 지시를 완화하거나 그 시행을 유보시켰다. 또 원만한 성격의 페르디난트는 독일의 여러 제후들과 친분을 쌓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구교파는 물론 적대 세력인 신교파 제후들과도 교류를 이어갔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을 때 신교 제후와 도시들도 그를 도와주었다.
이처럼 능력도 있고, 사실상의 황태자로 지명된 후계자를 뒤바꾸는 건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후계자는 당연하게도 왕과는 별도로 자신만의 세력을 쌓게 되며, 이는 사실상 독일 내의 통치권을 동생에게 위임한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의 경우엔 더욱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만년에 경쟁 상대가 없어진 카를 5세가 지나치게 완고해진 데다가 자기 마음대로 약속을 씹어버리는 행동을 반복한 끝에 후계자마저 자신의 입맛에 걸맞게 갈아치우겠다 사실상 선언하자, 제후들은 당연히 황제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황제가 제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유럽의 봉건제는 동양적인 전제적 군주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중세 시대 유럽의 봉건제는 동아시아와 달리 근본적으로 주군과 봉신 간의 상호간 계약에 기반한 것이었다. 서로간의 계약이 지켜지지 않으면 봉신은 언제든지 영주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다른 영주와 계약을 맺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카를 5세가 제후들과의 약속을 자꾸 뒤집는 것이 결국 스스로의 권력과 권위를 갉아 먹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제후들이 반기를 들 수 있었던 정당한 이유를 제공했던 것이었다. 카롤루스 대제 이후 유럽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기세 등등했던 카를 5세는 나중에 실권을 잃은 후에야 이를 뉘늦게 자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제후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을 지켜낸 공로가 있는 페르디난트 1세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제후들과 황제의 대립이 정점에 있던 상항에서, 황제에게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작센 선제후 모리츠는 슈말칼덴 전쟁으로 완전히 와해된 신교세력을 다시 규합했다. 1552년 그가 이끄는 신교군은 인스브루크에 있는 황제를 급습했고 황제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여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도망가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황제를 돕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조차도! 제위 계승문제로 형과 감정이 상한 페르디난트 1세는 다시 군대를 모아 재기를 노리던 황제의 의사와 관계없이, 신교파의 모리츠와 단독으로 휴전 협정(파사우 조약)을 맺었다. 이는 황제가 독일에서 실권을 잃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인스브루크에서 간신히 탈출하는 데 성공한 황제는 다시 군대를 모아 재기를 노렸으나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파사우 조약이 맺어졌고 이에 독일의 종교전쟁은 휴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파사우 조약의 체결로 황제의 복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한 황제는 아들에게 제위를 넘기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또 과거의 자신이 씹었던 제후들과의 약속들을 뒤늦게 이행하는 등 제후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그는 이미 제후들은 황제에 대한 신뢰와 지지를 완전히 거두었고, 아무도 황제의 말을 듣지 않았다.
황제는 독일에서 개신교도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전쟁하길 원했지만, 독일의 제후들은 이제 소모적인 종교 전쟁을 종식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원했다. 그리하여 페르디난트 1세의 주도하에 신구교 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카를 5세에게 있어서 사탄인 개신교도들과의 타협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를 5세는 신구교간 평화를 이루기 위한 화의를 격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1555년 화의가 체결되자 카를 5세는 이제는 황제로서 더이상 영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퇴위하고 은둔하고 만다.
신성 로마 제국 제위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돌아갔고[63], 나머지 영토인 스페인과 네덜란드, 아메리카 식민지, 이탈리아, 필리핀 식민지는 펠리페 2세에게 돌아갔다. 카를 5세는 특히 마지막에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네덜란드를 기필고 펠리페 2세에게 넘겨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 땅은 그의 고향이었으며, 황제가 되기 전에 요절했던 아버지 미남왕 필리프가 직접 다스렸던 영토였고, 또한 카를 5세 본인이 성년이 되어 최초로 다스렸던 영토였다. 결과적으로는 그 아들이 물려받긴 했으나 다 말아먹었으니(…).
1555년에는 어머니인 후아나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카를은 네 살 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자랐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없이 고모에 의해 자랐다. 그는 정신병자인 어머니를 싫어했고, 젊은 시절 아직 자신의 입지가 불안할 때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어머니를 방문했던 것을 제외하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 동안 평생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고, 늙은 어머니를 계속 유폐시켰다.[64]
가족사적으로 카를 5세에게 실망감과 고통을 안겨주었던 일은 1556년에 11살의 장손 돈 카를로스를 처음 보았을 때였다. 손자 돈 카를로스는 수두증에 곱사등에 다리까지 절었으며, 외모뿐만 아니라 지능도 모자랐고 정신병까지 갖고 있었다. 미래에 스페인 제국을 이어받을 장손의 실체를 보았을 때 카를 5세가 느꼈을 슬픔과 고통은 이제까지의 어떤 실패보다도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1556년 수개월에 걸쳐 카를 5세는 자신의 제위를 하나하나씩 아들과 동생에게 양위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물려받은 페르디난트 1세는 살아있는 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의 생전에는 대관식을 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국의회에다가 카를 5세의 퇴위 가결을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사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자의로 퇴위하는 것은 그동안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카를 5세가 퇴위하고도 2년 동안 제국 의회에서는 그의 퇴위를 승인하지 않고 있다가 1558년 초에서야 승인했다.
14. 말년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파사우 조약이 맺어진 후 카를 5세는 고향인 네덜란드에게 은거했다. 퇴위 후인 1556년 카를은 네덜란드를 떠나 스페인으로 가서 1557년 겨울 자신이 마지막으로 머물 곳이라 낙점한 유스테 수도원에 입소했다. 말이 수도원이지 왕궁 못지 않은 화려한 곳이었다.예수회를 창설한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카를의 퇴위를 이렇게 평했다. "황제께서는 이리하여 후계자들에게 귀중한 모범을 실천하셨다. …황제께서는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입증하셨다. …주님께서 이제 황제께 자유를 주실 것이리라 믿는다."
카를 5세는 수도원에서 취미삼아 시계를 수리하고 시간을 맞추는 일을 시작했는데[65][66] 모든 시계가 동시에 같은 시각을 가리키게 하고 싶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시계 몇 개도 시각을 일치시키지 못하면서 제국의 모든 백성을 통솔하려 했으니 내 얼마나 주제넘었던가."
물론 퇴위 후에도 정치를 놓은 것은 아니어서, 아들
펠리페 2세가 프랑스와의 전투에 필요한 지원을 해주고 포르투갈을 스페인 왕가로 끌어들여 이베리아를 통일시키기 위한 물밑 작업 등 뒷바라지도 아끼지 않았다. 당시 포르투갈의 섭정인 카타리나가 바로 카를의 누이였기 때문에 친밀한 교류가 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아들 펠리페가 스페인을 떠나 네덜란드에 머무르는 기간에도 그는 당시 스페인 임시 섭정이었던 딸 후아나를 실질적으로 보조했다.퇴위 2년 후인 1558년, 카를 5세는 유스테 수도원에서 조용히 사망했다. 향년 58세. 기록에 따르면 카를은 통풍으로 거동이 불편해져 휠체어를 타고 다녔지만, 수도원 제단에서 풍겨오는 향 냄새를 맡을 때엔 그 어느 때보다도 기뻐했다고 한다.
카를 5세는 재위 중에 권력이 분산된 독일을 강력한 중앙집권으로 이끌려 했으나 종교 개혁이라는 흐름에 거스르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교황과 갈등을 빚으면서도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고, 즉위 후 10년이 지난 뒤에서조차 억지로 교황의 인가를 받아내고야 말 정도로 신앙에 열중했던 카를 5세는 종교 문제를 정치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정치적 수단을 이용해 탄압하려고 했고, 이로 인해 독일의 절대왕정은 이웃인 프랑스보다 한참 뒤쳐져 영방국가로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로 인해 그의 사후 두 개로 갈라진 제국은 얼마간 유럽의 패권을 노리다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으며, 베스트팔렌 조약과 위트레흐트 조약을 거치며 프랑스에 패권을 내주었다. 동생 페르디난트가 계승한 신성 로마 제국은 이후 30년 전쟁으로 유명무실해지다가 3세기 뒤에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하고야 말았으며[67], 카를 치세에서 유럽 최강의 국력을 구가하던 스페인도 반대로 황제의 치세에서 발생한 막대한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는다.
[1]
필리프의 여동생이다. 마르가레테는 여걸 기질이 강해서,
프랑스가
플란데런을 깔보고 조공을 요구하자 전쟁을 벌여
프랑스군을 발라버리기도 했다.
[2]
물을 잘못 마시고 앓다가 6일 만에 사망했다. 당시 사위인 필리프가 자신 대신 아내의 왕국을 물려받게 된 상황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국왕이 사위를 암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나, 오늘날 암살보다는 티푸스 감염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더 높게 보긴 하지만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
어느 정도냐면, 매년 성주간에는 모든 공무를 무시히고 수도원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기도만 했다. 가톨릭은 카를 5세의 가장 큰 정체성 중 하나였다. 그는 본인이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상속을 받고 태어난 것을 신의 덕으로 돌렸고, 하느님이 분열된 기독교 세계를 통합하고 이교도들에게 맞서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이 세상에 보냈다고 굳게 믿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매우 겸손한 동시에 매우 오만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가 평생 수많은 요행의 덕을 본 탓에, 그의 신민들과 주변 사람들 다수가 진지하게 그가 신이 보호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4]
키도 컸고 꾸준한 사냥과 기마 시합으로 다부진 몸을 기른 카를은 중년에 통풍을 얻어 평생 안고 간 것을 제외하면 신체적 결함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턱 때문에 음식을 씹기 힘들어 평생 소화 불량으로 고생해야 했다. 그는 이에 대한 콤플렉스가 커서 자신이 먹는 모습을 보이기를 꺼렸고, 늘 혼자서 식사했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식사할 때 광대를 들이기 시작했다. 또 사냥할 때 활시위에 턱이 부딪혀서 사고가 일어나는 일도 잦았다.
[5]
다행히도 점점 크면서 그의 유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중년에 이르러서는 7개 국어를 제법 구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중년이 되어서도 책은 잘 안 읽었다고 한다.
[6]
그는 프랑스와 분쟁이 생길 때마다 프랑수아 1세에게 기마술 시합으로 결정하자고 도발했다. 또 전쟁 때마다 전투에 직접 출격하여 지휘하기를 좋아하여 많은 신하들을 곤란하게 했고, 눈앞에 포탄이 떨어져도 아랑곳않는 강심장까지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오히려 참모들로 하여금 최대한 안전하고 성공률 높은 돌격을 하게 만들어 전투의 승률을 높였고, 그의 그런 당당한 태도가 군의 사기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7]
펠리페 1세의 사인에 대해선 밝혀진 바가 적어서 그가 진짜 병사나 자연사로 죽었는지 훗날 페르난도 2세에게 유리하게 흘러간걸 근거로 그가 독살했다는 의견이 맞는지는 불분명하다.
[8]
정확히는 왕자 한 명이 태어났지만 요절한 뒤 아이를 보는 걸 포기했다.
[9]
이즈음 스페인은 한창 레콩키스타를 완수해 당대 유럽중 제일 민족 의식이 강했던 시기라 귀족/평민 할 것 없이 타지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카를보다는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페르난도를 선호하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10]
심지어 카를을 제치고 자신이 섭정이 될 수 있었던 제일 큰 명분 중 하나가 카를이 미성년이라는 사실인지라 미성년인 페르난도에게 물려줄려고 한다는건 무리를 넘어서 자신이 섭정으로서 등극한 것에 대한 정통성을 부정당할수 있는 행위였다.
[11]
이 와중 페르난도 2세를 이어 후아나 여왕을 대신해 섭정해오던 프란시스코 추기경은 카를 5세를 맞으러 가다가 병사하였다거나 배를 타고 북부 스페인으로 향하다가 강한 풍랑에 휩쓸려 표류한 탓에 목적지와 좀 떨어진 시골 마을에 상륙하게 되었는데, 이때문에 시골 마을 사람들이 상상치도 못한 상황에서 왕을 알현했다고 기뻐했다는 일화가 있다.
[12]
그러나 그가 신성 로마 제국 제위까지 차지함으로써 발생한 전비 지출 문제로 인해 부분적인 저항은 이후로도 이어졌고, 결국 그는 어머니 후아나가 사망할 때까지 완전하게 스페인을 통치하지는 못했다.
[13]
꼬뮤네로스 반란은 그저 그런 하급 귀족과 시민들만이 뭉쳐 일으킨게 아니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거대 귀족과 지연, 혈연, 학연등으로 엮인 고위층도 다수 존재했다. 심지어 이들의 반란은 단순히 역성형명이 아니라 토르데시야스의 성스러운 대표회 (santa junta)라는 지도부의 통솔하에 공동왕인 후아나를 강압적으로 모셔온 뒤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서류에 도장 찍게 만들려 했으나 후아나의 반대로 협상이 결렬되었고, 결국 카스티야 전국 의회에 투표권을 가진 18개 도시중 과반수를 넘는 13개 도시가 자신들의 편이라는 민주적 논리에 입거해 정부를 꾸리려 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이들은 단순한 반란이 아닌 르네상스 공화주의적 사상을 등에 업은 '혁명'을 시도한 것이다. 결국 이들이 패배해 단순한 반란 취급받긴 했으나 상술한대로 수뇌부 다수가 거대 귀족과 커넥션이 있어서 반란을 넘어 스페인 왕조 자체를 부정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중 다수는 적극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다.
[14]
다만 아예 멸망한 아즈텍과 달리 잉카는 일부 왕족이 살아남아 피신해 항전을 계속했으며 수십년 뒤 1572년이 되어서야 마지막 황제가 사망하며 후손이 끊기자 완전히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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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대표적인 이가 바로 아즈텍을 멸망시킨 일등공신인
에르난 코르테스. 하극상을 비롯해 카를 5세를 향한 월권행위를 다수 저질렀기에 결국 파면시킨 뒤 본국으로 압송시켰고 곧 다시 복직시켰지만 행정권을 박탈시키는등 사실상 허수아비로 세웠 1540년 다시 고국으로 복귀한 에르난은 어떻게든 과거의 과오를 덮어보고자 남미에 있던 초콜릿을 가져와 진상하거나 무리하게
북아프리카 튀니지 전역을 공략하다 해군 지휘중 태풍에 스페인 함대 다수가 침몰하고 병사들이 익사하는등 부대가 궤멸되며 참담한 패전을 거둔 뒤 결국 왕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한채 쓸쓸하게 과거의 명예와 부귀를 되찾지 못하고 1547년에 사망했다.
[16]
다만 라스 카사스 신부가 콩키스타도르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인 잔혹한 만행을 고발한 책을 썼을 때, 카를 5세는 이 책의 출판을 허가해주었다. 또한 라스 카사스 신부의 주장에 맞서 "인디오들은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에 가까운 열등하고 미개한 족속이니 그들을 스페인이 지배하거나 노예로 부리는 것은 정당하다. 아울러 원주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노예로 태어났으며, 성경에서도 불평등을 용인하는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라는 주장을 한 스페인의 지식인 후안 지네스 데 세풀베다의 반박 내용은 카를 5세로부터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았다. 출처: 불의 기억 1/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박병규 번역/ 194~195쪽
[17]
독일 선제후들은
프랑스를 위시한 외세가 신성 로마 제국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나중에 카를 5세가 뮐베르크 전투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모리츠의 제후반란으로 쫓겨난 것도
슈말칼덴 전쟁에서 스페인군을 대동한 것이 큰 문제로 작용했을 정도였다.
[18]
처음엔 작센 선제후국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거론되었으나 프리드리히 3세는 자진 사퇴했고 이후 거론된
잉글랜드 왕국의
헨리 8세도 고민 끝에 제안을 거절했다.
[19]
이전부터 플란데런과 부르고뉴 공국의 통치권을 두고 충돌을 빚었었다.
[20]
증조부
프리드리히 3세 시절부터 거래를 해왔던 그 당시 독일의 대상인이자 대귀족 가문으로 슈탄데스헤어 공작이 가주로 있었다.
[21]
정확히는 푸거 가문에게 50만 두카트, 벨저 가문에게 30만 두카트를 빌렸다. 그 대가로 푸거 가문에게 은광, 구리광산 채굴권을 하사했다. 안그래도 가주인
야코프 푸거는 막시밀리안 1세 시절 이탈리아 원정군 자금 15만 두카트를 대출해줘서 그 공로로 제국백작이 되었고,
종교 개혁시기 교황청과 독일 가톨릭 교구 사이에서 송금 역할을 맡아 중개료로 떼돈을 벌었다. 이렇게 쌓은 영향력을 토대로 카를 5세의 면전에 "제가 없었다면 폐하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라는 패기넘치는 발언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업보인지 이후 펠리페 2세 시대에 스페인에 자금을 대부해줬다가 잉글랜드에서 거액의 차관을 들여온 스페인이 금과 은을 대량으로 방출한 탓에 주 사업중 하나인 광산업이 부도가 나 파산한 탓에 빚을 갚아줄 수 없다고 선언해버려 이 쪽도 큰 손해를 본 뒤 이후 금융업을 접고 평범한 귀족으로서 살았다.
[22]
카를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났고 스페인 국왕이다보니 본인도 외국인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파악하여 자신이 조부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이니 독일인의 혈통을 이었다는 사실을 선제후들에게 강조했다.
[23]
85만 두카트를 동원했던 카를 파벌과 달리 프랑수아 파벌이 매수에 동원한 자금은 1/3가량인 30만 두카트였다. 말그대로 압도적인 돈지랄로 제위를 사들인 것이다.
[24]
원래라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교황의 대관이 필요했으며 대관을 받지 못하면 황제에 오르고도 공식 직위는 로마왕, 독일왕에 머무르는 경우도 있었으나(대표적인 사람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조인 조상
루돌프 1세와 그 맏아들
알브레히트 1세.) 선황인 막시밀리안 1세가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반목으로
로마로 가는 것이 불가능해지면서 관례를 바꾸고 교황의 대관 없이 스스로 황제를 자칭한 이후부터 선제후 선거에서 선출되면 선출된 로마 황제(Erwählter Römischer Kaiser) 라는 칭호를 쓰게 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카를 5세의 경우 추기경으로부터의 대관 이후 약 10년 뒤인 1530년 2월 24일에 기어코 교황으로부터도 대관을 받았긴 했는데, 이 때는 2차례에 걸친 프랑스와의 전쟁과
사코 디 로마로 프랑스 편을 든 교황을 포로로 잡다시피 모셔온 상황이라 사실상 누워서 절받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나마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막시밀리안 이후 카를 5세가 유일해서 관례가 바뀐 뒤 유일하게 교황에게 대관을 받은 황제가 되었다.
[25]
대공위시대 때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와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가 대립왕으로 추대된 적은 있다. 둘 다 전 왕조인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모계 친척이라 최소한의 명분은 있었긴 했다.
[26]
당장
스페인 국왕이 되기 전부터 그는 이미 부르고뉴 공작이기도 했다.
[27]
실제로 카를은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플란데런에서 스페인에 도착할때도 바다위에서 풍랑으로 다른 시골마을에 상륙하는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28]
카를이 스페인 왕위를 계승받고자 스페인에 도착한 직후 가장 처음 한 일이 어머니인 후아나 여왕을 찾아가 동생 페르디난트를 왕으로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하는 것이었다.
[29]
다만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의 영향력으로 2/3이 넘어간 탓에 1/3만 실효 지배했다.
[30]
이후 황제직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대대로 세습하게 되면서 황제 생전에 차기
황제선거를 실시하여 아들을 독일왕에 임명하는 전통이 이어지게 된다. 때문에 이후 독일왕은 제국의
황태자를 뜻하게 되었다.
[31]
카를 5세의 업적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가톨릭 신자로서 이를 반대했고 이 화의를 추진한건 페르디난트 1세였다.
[32]
보름스 제국의회 당시 작센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3세의 조카.
[33]
북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부 역할을 했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이다.
[34]
아이러니하게도 교황
레오 10세는 1521년에야 황제 즉위를 승인할 정도로 카를 황제에 비협조적이었고, 루터는 처음에 카를 황제가 당선되자 기대감을 드러낼 정도였지만 그 입장이 바뀌게 되었다.
[35]
전임
레오 10세의 조카이다.
[36]
이탈리아인은 정치적으론
독일인(?)의 지배는 받아도 이탈리아인이 아닌 야만인(?) 취급을 했고, 막상
하드리아노 6세가 로마에 오자 "
이탈리아어를 못하는 데에 경악하고,
라틴어 발음은 끔찍하다"며 후회했다고 한다. 부패한 이탈리아인은 참아도, 청렴한 야만인(?)은 못 참는다는 신조.
하드리아노 6세는 금방 사망했고, 그 후
비 이탈리아인 교황이 뽑히는 건 대략 460년이 걸렸다.
[37]
이는 1526년 원정의 목적이 헝가리 정복이었지, 신성로마제국 공격이 아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3년 뒤인 1529년에 벌어진
제1차 빈 공방전도 헝가리 왕국령을 두고 벌어진 오스만과 합스부르크 제국 간의 분쟁이 시작이었지, 처음부터 빈을 치겠다고 들어왔던 것이 아니다.
[38]
가톨릭 교회와 교리가 같은 내용을 주로 만들고
교황권 비난은 일체 적지 않았다.
[39]
신성 로마 제국에서 차기 황제 선출을 미리 실시하는 것은 오랜 관행이었다. 특히 황권이 안정되어 있을 때는 조기에 선거를 실시하여 후계자(주로 아들)를 미리 확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황권이 불안정한 상황일 때는 조기 선거가 실시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40]
팔츠 선제후는 카를 황제가 페르디난트와 함께 제국평의회를 공동으로 운영하고 제국섭정으로 지정할 정도로 오른팔이었다.
[41]
심지어
명나라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예수회 선교사제들이 중국에 들여온
성경과 교리서를 조선 사신들이 접하게 되어, 선교사가 한 번도 들어온 적 없는 조선 땅에서
가톨릭 교회가 자생하게 된다.
[42]
그러나 필리프 1세는 나중에 결국 다시 신교도 동맹으로 돌아와 슈말칼덴 전쟁 때 신교도 동맹을 이끌었고 전쟁에서 패한 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나란히 투옥되어 네덜란드로 끌려가 개종을 강요받으며 오랜 고초를 겪었다.
[43]
트렌토는 티롤 백국에 속한 도시였으며, 1364년부터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했다.
[44]
이미 수장령으로 가톨릭은 떠난 상태였지만 가톨릭 국가 프랑스를 치기 위해 손잡았다.
[45]
프랑스에서
밀라노 공국과
저지대 등 영토와 종주권 주장을 모두 포기했다.
[46]
루터를 보호했으며 신교도 중 가장 큰 세력이었다.
[47]
작센 공작 겸 마이센 변경백
[48]
일각에서는 모리츠가 종가를 배신하고 선제후직을 얻었다 하여 마이센의
유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모리츠는 당대에 가톨릭과 신교도 양측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인물로, 전쟁 후엔 신교도 측 지도자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사형을 막고,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49]
대개
미사 중의
영성체 때,
사제는 성체(밀떡)와 성혈(포도주)을 모두 영하고 신자들은 성체만 영한다. 단 특별한 경우에는 신자들도 성체와 성혈을 모두 영하는데, 이를 '양형 영성체'라 한다.
[50]
슈말칼덴 전쟁 후 선제후직이 모리츠에게 넘어가면서 그는 작센 선제후에서 작센 공작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51]
초대
프로이센 공국 공작
알브레히트의 조카.
[52]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명목상으로 전 유럽을 세속적으로 통치하는 자로서 교황과 함께 그리스도교 유럽의 투 톱이라 할 수 있었다.
[53]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 왕조를 멸한 후 카이로 칼리파로부터 칼리파 직위를 받아내었다.
[54]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세의 여동생 마리아와 결혼했다.
[55]
사실 프랑스도 당시 종교문제로 인한 내부적인 갈등이 심했다. 종교를 우선하자면 사실 프랑스는 카를과 협력해야 하는데, 카를을 싫어한 나머지 반대로 행동했다. 자국의 내분보다 카를 5세에 대한 앙금이 더 클 정도로
트라우마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56]
실제로 "쉴레이만이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대립을 이용하려 했다" 라기보다도 "신성로마제국에 밀리는 프랑스가 종교 그런 거 안 따지고 오스만과 손을 잡으려 했다" 라는 쪽이 실상에 더 가깝다. 애초에 양국의 동맹부터가
파비아 전투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포로로 잡히자 프랑스 궁정에서 이교도고 뭐고 모르겠으니 도와달라는 요청을 오스만에 보낸 것이 기원이며, 오스만은 프랑스에 사절 몇 번 보내고 말았던 반면 프랑스는 사절을 잇따라 보내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콘스탄티노플 주재 대사까지 임명해 보냈다. 구체적인 사례로 보더라도 오스만이 프랑스의 요청에 응하여 함대를 보내 구원하거나 어디를 공격하거나 한 적이 몇 번 있는 반면, 프랑스가 오스만에 준 도움이라곤 콘스탄티노플 주재 대사가 쉴레이만의 페르시아 친정에 동행하며 조언 몇 마디 한 정도다.
[57]
그러나 군주로서의 자질과 능력은 펠리페가 훨씬 더 낫다. 펠리페는 아버지만큼은 아니었고 간혹 큰 실책도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명군으로서의 능력은 갖추고 있고 군주로서의 책임감은 대단한 편이었다. 반면 셀림은 능력도 자질도 책임감도 거의 없다시피한 암군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주정뱅이 셀림이었을 정도.
[58]
특히
토스카나 대공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59]
정작 자신의 스페인 왕명은 카를로스 1세였지만...이후에 그라나다에 스페인 국왕이 오면 머무는 궁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60]
하지만 카를로스 5세 궁전으로 인해 알함브라 궁전의 지반에 영향이 간다고 한다. 조금만 일찍 깨달았어도 더는 손상을 입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61]
지금이야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등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이름을 덜치지만, 당대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들로 활동 영역이 한정되어 있었으며
프랑수아 1세 정도의 예술 마니아 외엔 타국 군주들에게 특별히 주목받지 않았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말년에 자신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재정난에 시달렸다.
[62]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도 티치아노가 그린 것이다.
[63]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이미 1521년에 물려줬다. 본인의 오스트리아
대공은 작위만 달고 있었던 셈.
[64]
먼나라 이웃나라 에스파냐편에서도 카를이 후아나를 계속 유폐했다고 설명하면서 "어머니라고? 여섯 살 때 헤어져 추억도, 미련도 없다! 당연히 정도 없다..."고 카를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65]
웬 뻘짓인가 싶지만,
기계식 시계밖에 없던 당시
시계는 첨단 공학의 산물이었다. 현대 감각으로는 3D 프린터에 재미를 붙였다는 정도로 비유할 수 있을 듯하다.
[66]
그는 직접 시계를 만들어 주변인에게 선물하기도 즐겼는데, 여기서 말하는 시계는 'microcosm'이라 불리는, 시간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천체의 운행과 위치까지 나타내는 사실상 태엽으로 작동하는 정교한 천체 모형이었다. 단순한 공학적 지식뿐 아니라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해박한 이해가 필요했다.
[67]
사실 페르디난트의 초기 독일 내 권력은 어디까지나 카를 5세의 임명에 의한 것이었으며, 반대로 현장에서의 실권을 구축하기 위해 맡은 제후들간의 중재역은, 당연하지만 최종적으론 제후들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양상을 불러왔다. 하물며 카를 5세가 퇴위한 이후 페르디난트의 권력 기반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업적과 선출 등 제후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유능하고 정치적 감각이 탁월한 페르디난트의 치세까지는 괜찮았어도 그렇다는 보장이 없는 이후의
군
주들의 치세에선 필연적으로 권력의 약화를 불러왔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도
30년 전쟁 이후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영향력 행사를 사실상 포기하고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크로아티아 왕국 같은 동방 영토에 집중하면서
본인들의
정체성을 형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