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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 ||이름 |
라틴어: Berengarius I / Perngarius I / Berengarius Foroiuliensis 이탈리아어: Berengario I / Berengario del Friuli 베렝가리오 1세 / 프리울리의 베렝가리오 |
제호 |
베렝가리우스 임페라토르 (BERENGΛRIVS IMPEARATOR) |
출생 | 840년 |
프리울리 | |
사망 | 924년 1월 7일 (향년 83세) |
베로나 | |
재위기간 | 887년 12월 26일 ~ 924년 1월 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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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울리 변경백국의 변경백, 중세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 신성 로마 황제.2. 생애
베렝가리오 1세는 운루오히(Unrochingi) 가문 출신이었으며 아버지는 프리울리 변경백으로 성인으로 시성된 에베르하르트이며, 어머니는 카롤루스 왕조의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와 그의 계후인 유디트의 딸이자 샤를 2세의 동북 누이인 기셀라다. 즉 그에게도 샤를마뉴 대제의 피가 흐르고 있다.형인 프리울리 변경백 운로우크 3세가 죽자 베렝가리오 1세가 프리울리 변경백국을 물려받았다. 프리울리는 발칸반도의 슬라브족들과 경계를 접하고 있어서 프랑크 왕국에서 중요한 지역이었고, 베렝가리오 1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거물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루도비쿠스 2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 계승자로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아들인 카를로만을 지지하자, 베렝가리오 1세는 친외삼촌인 대머리왕 카를 2세( 샤를 2세)대신 카를로만의 편에 섰다. 이후 베렝가리오는 계속 카를로만을 지지했고, 나중에는 카를로만의 동생인 비만왕 카를을 지지했다.
887년 즈음 비만왕 카를 3세의 사망 직전 베렝가리오 1세가 이탈리아의 군주가 되었다. 888년 카를 3세가 사망하고 리베몽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베렝가리오 1세가 이탈리아 왕국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의 이탈리아 왕위는 여러 경쟁자로 인해 방해받았다. 먼저 베렝가리오 1세는 스폴레토 공작 귀도 3세와 겨뤄야 했다. 서프랑크의 왕위 획득에 실패한 귀도 3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군사를 모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노렸고, 이에 베렝가리오 1세는 귀도 3세와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여 889년, 이탈리아의 왕위를 귀도 3세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그리고 891년 교황 스테파노 5세가 귀도 3세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했다.
베렝가리오 1세는 귀도 3세를 싫어했던 교황 포르모소와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와 손을 잡고, 베르가모에서 전투를 벌여 귀도 3세를 몰아냈지만, 이번에는 아르눌프가 이탈리아에 집권하게 되었고, 베렝가리오 1세는 그저 그의 봉신이 되었다. 귀도 3세의 아들 람베르토가 교황 포르모소를 감금하자 아르눌프가 다시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람베르토를 내쫓고, 포르모소를 구출하여 황제 대관을 받았다. 아르눌프가 동프랑크로 돌아간 뒤 베렝가리오 1세는 람베르토와 함께 아르눌프의 그늘에서 벗어나 이탈리아에서 다시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 우선 아르눌프가 임명한 관리들을 다 학살하고, 아르눌프의 아들인 이탈리아 부왕 라톨도를 내쫓았다. 베렝가리오 1세와 람베르토는 함께 협약을 맺어 이탈리아를 분할하여 통치했고, 베렝가리오 1세는 그의 딸 기셀라를 람베르토에게 시집보내 혼인 동맹까지 시도했다.
그러던 중 베렝가리오 1세는 람베르토와의 협정을 깨고,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인 파비아를 점거했지만, 람베르토에게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혔다. 그 와중에 람베르토가 사냥 중에 낙마하여 죽자 베렝가리오 1세가 이탈리아의 단독 국왕이 되었다.
하지만 베렝가리오 1세의 단독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마자르족이 이탈리아를 침략해오자 베렝가리오 1세의 능력을 의심한 이탈리아 귀족들은 프로방스( 저지 부르군트)의 국왕인 루이 3세(프로방스의 루이)에게 대신 이탈리아 국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베렝가리오 1세는 이탈리아로 진군한 루이 3세에게 패배하여 900년에 이탈리아 왕위를 내주었다. 그후 루이 3세는 로마를 순례하고, 교황 베네딕토 4세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대관받았다. 하지만 루이 3세 역시 마자르족들을 막는 데는 무능력했고, 귀족들은 다시 베렝가리오 1세를 지지했다. 베렝가리오 1세는 루이 3세를 물리치고 프로방스로 내쫓으며 다시는 이탈리아에 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귀족들은 또다시 베렝가리오 1세의 통치에 싫증을 느끼고, 루이 3세에게 이탈리아를 정복하라며 다시 꼬드겼다. 루이 3세는 약속을 어기고 이탈리아를 침범하여 다시 베렝가리오 1세를 몰아내고 파비아와 베로나를 확보했지만, 베렝가리오 1세는 전투에서 이겨 루이 3세를 생포하고, 약속을 어긴 대가로 그의 양 눈을 뽑아버렸다. 눈알 두 개와 함께 이탈리아 왕위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잃어버리고, 프로방스로 돌아온 루이 3세는 '맹인왕 루이(루트비히)'라고 불리게 되었다.
915년 무슬림들이 남이탈리아를 침략해왔을 때 베렝가리오 1세는 가릴리아노 강에서 사라센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동년에 베렝가리오 1세는 교황 요한 10세로부터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받았다. 그의 오랜 집권이 이제야 빛을 보게 되었다.
베렝가리오 1세는 황후였던 스폴레토의 베르틸라가 독살당하자 '안나'라는 여자와 재혼했는데, 이 '안나'는 프로방스의 루이 3세와 동로마 제국의 레온 4세의 딸 안나 황녀 사이에서 나온 딸이라는 설이 있다.
베렝가리오 1세가 마자르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보이자, 이에 불만이 생긴 귀족들은 고지 부르군트의 국왕 루돌프 2세에게 이탈리아의 국왕이 되어 달라고 청했다. 심지어는 베렝가리오 1세의 외손자인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베렝가리오 2세)마저 루돌프 2세 편을 들며 반란을 일으켰다. 베렝가리오 1세는 루돌프 2세에게 패배하여 이탈리아를 넘겨주게 되었다. 이후 924년 베렝가리오 1세는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962년 오토 1세가 등극할 때까지 38년 동안 공위 시대를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