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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ral powers
1. 개요
동맹국( 同 盟 國) 또는 중앙(중부)국(열강)(Central powers)이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협상국과 대립했던 세력을 일컫는 단어다.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16년부터 수립되기 시작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수립된 독일의 괴뢰국들이나 독일의 지원을 받는 국가들도 가입하게 되었다.
당시 에티오피아 제국의 느구서 너거스트였던 이야수 5세는 여기에 가입하려 하다가 폐위되었다.
2. 구성 국가
2.1. 독일 제국
삼국 동맹의 일원이며, 7월 위기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지원 의사를 밝히며 전쟁에 참전하였다.2.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삼국 동맹의 일원이며, 사라예보 사건으로 황태자가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하였다.2.3. 오스만 제국
원래는 중립을 지킬 예정이었으나 오스만의 중립을 신뢰하지 못한[1] 영국이 비용까지 지불하여 구매한 오스만 소유가 될 예정이었던 애진코트급 전함 2척을 마음대로 압류하며 반영 감정이 커졌다. 그럼에도 한동안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나 독일이 말도 없이 2척의 전함을 이끌고 흑해로 향해 오스만의 국기를 달고 러시아의 항구를 포격하면서 동맹국으로 참전하게 되었다.2.4. 불가리아 왕국
반오스만-친러 국가였지만 제2차 발칸 전쟁의 패전으로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루마니아에 대한 보복 심리가 팽배하였으며, 왕실은 독일계였기에 친독 성향이 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협상국과 동맹국의 러브콜을 받은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가진 마케도니아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했고, 동맹국이 영유권을 인정해 주겠다고 선언하면서 동맹국으로 참전한다.2.5. 기타 국가
모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1918.03) 이후[5] 독일의 강압으로 수립된 괴뢰국들이거나 독일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국가들이다.
3. 군사력
훗날의 추축국과 달리 동맹국 간의 결속력은 협상국 못지 않게 좋았으며 각 국가는 자신들의 역량 이상으로 선방하였다. 비단 독일 제국 외에도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황혼기에 들었을지언정 ' 제국'이라는 칭호를 절대 노름으로 딴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불가리아 왕국 역시 민족주의적 열망에 불타는 신생국으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들의 전쟁 수행에 독일이 적잖이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독일 역시 동맹국들이 생각외로 분전하며 적절하게 협상국의 전력을 분산시켜 준 덕에 그나마 전선의 소방수 역할만 하면서도 서부/동부전선에서 영프러를 상대로 4년간이나 선전할 수 있었다.때문에 인터넷에 널리 퍼져 있는, 독일 제국이 나머지 국가들의 졸전을 뒷수습하면서 소위 '멱살캐리'했다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이는 국내에서 1차 대전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 유럽을 정복한 '전쟁기계' 나치 독일의 이미지가 독일 제국에 씌인 것으로, 대표적인 오류이자 인터넷 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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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우선 세계 제1위의 육군과 제2위의 해군력을 보유한 독일 제국은 서부전선에서는 독보적인 주력을 담당하며 복수심에 불타는 프랑스군과 그를 보좌하는 영국군을 전쟁 내내 홀로 상대했다. 동부전선에서도 러시아를 상대로 오헝 제국군과 함께 쌍두마차로 활약했다. 러시아 붕괴 이후에는 전 동유럽을 석권하며 로스토프나도누와 핀란드까지 진출했다. 그 외 알프스나 발칸 등의 여러 전선에서도 독일 원정군이 동맹국 군대들을 지원하며 전선의 소방수로 투입되기도 하였다. 해군 전력에 있어서도 동맹군의 약 70% 이상을 차지하며 북해에서 세계 1위의 영국 해군과 일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참호전 고착 상황에서 알 수 있듯 서부전선의 협상국 전력을 압도한다고 보기는 힘들었으며 해군 역시 영국의 봉쇄를 뚫는 데 실패했다. 결국 1918년 내부적인 역량이 고갈되며 붕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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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오헝 제국이 이탈리아와 세르비아를 압도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독일의 절반 정도 국력으로 3면 전쟁을 수행하는 바람에 전력이 이리저리 분산되어 어느 한쪽에 역량을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 그리고 그런 것 치고는 4년 간 무너지지 않고 잘 버텨내며 협상국에 소모를 강요했다. 알프스 전선의 경우 전반적으로 오스트리아가 우세했다. 러시아 전선에서도 1915년의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나 1917년의 케렌스키 공세 때처럼 전술적으로 밀리지 않았다. 해전에서도, 압도적인 협상국 해군력을 홀로 맞아야 했음에도 열세한 전력을 잘 보전하며 4년 내내 해안을 방위하고 지중해의 협상국 보급선을 뒤흔드는 데 성공했다. 서부전선에도 종종 지원을 나가 독일의 진격을 돕기도 했다.[6]
그러나 제국의 체급을 한참 상회하는 전선의 압박 때문에 전략적인 주도권을 쥐지는 못했다. 1916년 러시아의 브루실로프 공세를 맞아 전쟁수행능력이 급감하였으며, 결국 소모전에 시달린 끝에 1918년 말 내부적인 모순과 균열이 터져버리며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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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오스만은 전선에서 버티는 것 이상의 군사적인 능력 자체를 기대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고 예상되었으나 실제로는 가진 역량 이상으로 선방했다. 갈리폴리 전투 당시에는 수도 코앞까지 쳐들어온 협상국 군대 50만 명을 기어이 물리치면서 그들을 ' 유럽의 환자'라고 얕잡아봤던 영국군에게 엄청난 굴욕을 선사해 주었고, 1916년까지는 중동 전선에서 영국군과 협공해 오는 아시르-이드리드 토후국군이나 헤자즈 왕국군, 리야드 토후국군을 상대로 악착같이 맹공을 주고받았다. 중동 전선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이긴 적도 꽤 많으며 한때는 영국의 생명줄인 수에즈 운하를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스스로가 주 전선으로 생각한 러시아와의 캅카스 전선에서 참패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고 전쟁 막판 러시아가 러시아 혁명으로 자멸하면서 캅카스를 차지하러 진격하는 사이 겨우 버티던 중동 전선이 무너지는 바람에 결국 패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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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왕국
국토면적이 작은 약소국이었으나 국력에 비하면 정말 잘 싸웠다. 제2차 발칸 전쟁에서의 수모를 갚아주기 위하여 정말 독이 오를대로 올라서 세르비아, 루마니아 왕국, 원정 온 프랑스군과 영국군까지 가리지 않고 전부 다 격파하고 다녔다.
그러나 불가리아의 선방은 근본적으로 상대한 적들이 그리스와 세르비아, 루마니아 등 제2선급 약소국가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들이 열강 군대인 독일과 오스트리아군이 쇄도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대부분의 전력을 오스트리아 국경에 전개한 틈을 타서 불가리아가 그들의 텅 빈 후방을 깊게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불가리아 덕에 발칸 전선에서의 전황이 급격하게 동맹국 쪽으로 기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불가리아는 이 역할을 수행한 것만으로도 소임을 충분히 다했다.
3.1. 정복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추축국만큼은 아니지만 동맹국도 점령한 협상국이 여럿 있다.대표적으로 1914년 일찌감치 독일 제국에게 병합당한 룩셈부르크와 벨기에가 있고, 191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불가리아 왕국에게 점령당한 세르비아 왕국, 1916년 몬테네그로 왕국과 알바니아 공국 역시 오헝 제국에게 점령당한다. 1918년에는 독일+오헝+불가리아 연합 병력이 루마니아 왕국을 점령하여[7] 부쿠레슈티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라 루마니아는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에게 자원과 돈, 농산물을 바치면서
또한 러시아 제국 역시 동맹국에게 사실상 항복했다고 봐야 한다. 러시아 혁명 때문이기는 했으나 독일 제국과 체결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영토 할양을 포함하고 있어 항복이나 다름이 없다. 조약으로 인해 러시아는 국토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희귀자원과 20%에 달하는 인구를 고스란히 독일에게 잃었다.[9]
4. 전쟁 이후
협상국 입장에서는 동맹국 때문에 4년 간이나 고생을 했기 때문에 이들이 아예 전쟁 자체를 일으키지 못하게 하려고 이런저런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동맹국들은 역사상 듣도보도 못할 정도로 치욕스러운 패배를 맛봐야 했다.[10] 그런데 치욕스러워도 너무 치욕스러웠기 때문에 동맹국들, 특히 독일과 헝가리는 오히려 협상국에 대한 증오가 더 높아져서 반항하게 되고, 결국 협상국의 너무 가혹한 압박은 동맹국들이 더욱 막나가는 결과를 낳게 만든다.[11]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협상국은 국제연맹을 만들고, 우드로 윌슨은 14개조 평화원칙을 제시한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인한 여파와 구 동맹국들의 복수의 칼날과 파시즘의 확산으로 인해 국제연맹은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더 큰 비극을 낳고 만다.
4.1. 패전 후의 조약
||<-7><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tablealign=center><bgcolor=#000>
제1차 세계 대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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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독립 전쟁을 통해 재협상 ii : 협상국의 일원이었으나 단독 평화 협정을 맺음 같이 보기: 파리 강화 회의, 베르사유 조약, 빅4 |
- 베르사유 조약( 독일국) - 독일이 다시 깽판 치는 걸 막기 위한 조약으로 배상금이 무려 1320억 마르크. 현재 한화로 따지면 거의 10경(!)에 달하는 배상금이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후 도스 안, 영 안 등으로 제법 삭감해주긴 했다. 독일은 이 배상금을 92년후인 2010년에 지불을 마쳤다. 사실 나치 독일이 일방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했기에 공식적으로 나치를 부정하는 현 독일 입장에서 무시하기는 꺼림칙했을 것이다. 그래도 독일은 사실상 독일인 위주 단일민족국가여서 영토도 많이 잃었으나[12] 민족 자결주의의 이름으로 나라 자체가 공중분해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제국보다는 나았다. 결국 국력을 많이 보존하게 된 독일은 훗날 다시한번 세계대전을 일으켜버린다.
- 생제르맹 조약( 오스트리아 제국), 트리아농 조약( 헝가리 왕국) - 사실 어떻게 보면 베르사유 조약보다 가혹한 조약들이었다. 왜냐하면 저 두 조약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영토를 많이 날려먹은 것도 모자라[13] 완전히 공중분해되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으로 갈갈이 찢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두 번 다시 강대국이 될 수 없었다.[14]
- 세브르 조약( 오스만 제국) - 오스만 제국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처럼 완전히 공중분해되어 갈갈이 찢기고 두번 다시 강대국이 될 수조차 없는 위기에 빠졌지만 아타튀르크가 튀르키예 독립 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해 그나마 본토는 건사했다. 그리고 로잔 조약을 새로 체결하면서 세브르 조약은 파기되었다.
- 뇌이 조약( 불가리아 왕국) - 일부 영토를 그리스 왕국과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게 잃은 정도였고 정권도 패전 후 군주제가 몰락하고 공화국으로 바뀌었던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튀르키예와 달리 군주제가 폐지당하지 않고 군주제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지중해로 통하는 해안선을 그리스에게 넘기게 되어 이때부터 불가리아는 루마니아처럼 흑해를 통해서만 해상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독일과 오스만, 불가리아는 본토를 거의 지켜냈고 분단되지도 않았다. 이후 독일은 여전히 강대국이고 튀르키예도 지역 강국 지위를 지키게 된다. 반면 분리된 이후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강대국의 지위를 상실하고 불가리아와 같은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5. 전쟁 범죄
5.1. 오스트리아
5.1.1. 세르비아 점령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인들이 황태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인해 세르비아인들의 민족성을 말살하는 정책을 점령지에서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자세한 증거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당대의 상황을 재구성하는 것은 매우 힘들지만, 체트니크에 대한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수만의 세르비아인 주민들이 살해당한 것은 확실하다.사라예보 사건 후 분노에 찬 오스트리아에서는 "세르비아는 죽어야만 한다(Serbien muss sterbien!)"는 극단주의적 구호가 만연했다. 이는 단순히 구호로만 남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세르비아 영내로 진군하며 조직적인 학살과 강간을 저질렀다. 당연히 게릴라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으나 오스트리아는 다시 총칼로 보복했다. 오스트리아 점령지 내의 세르비아 민간인들은 민간인으로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으며 경미한 문제만으로도 약식 재판을 거쳐 처형대로 보내졌다. 크로아티아인과 보슈냐크인, 헝가리인 등 세르비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웃 민족들의 자발적 테러 역시 횡행했다.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보스니아 총독은 보슈냐크인들을 중심으로 보안대를 조직하여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키릴 문자를 비롯한 세르비아 민족의 문화 요소들 역시 금지되었으며 각종 자원 및 노동력 착취로 인해 기근도 만연했다.
세르비아인 학살의 가장 대표적인 증거는 인구 통계 자료이다. 1차 대전 당시 세르비아는 인구 대비 가장 큰 인명 피해를 기록했다. 전쟁 전 인구 대비 무려 25%에 달하는 1백만 명이 오스트리아의 침공과 지배를 겪으며 사망했고, 그 중 과반 이상은 민간인이었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군이 세르비아인들을 처형하는 모습을 찍은 여러 사진들 역시 지금까지 남아있다.
5.1.2. 우크라이나 점령
1918년 파우스트슐라그 작전을 통해 독일군과 함께 유럽 러시아 일대를 점령한 오스트리아 뵘에르몰리 집단군은 우크라이나에서 폭력적인 물자 징발을 단행했다.5.2. 오스만: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
아르메니아 학살은 여러가지 원인과 이유가 있다. 오스만군이 러시아군에게 지속적으로 패배하자 러시아 인근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군과 내통했다고 생각하였다는 주장도 있고,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그랬다는 주장도 있고, 또한 그냥 화풀이로 죽였다는 주장도 있다.중요한 것은 오스만군에 의해 100만 명이나 되는 아르메니아인 및 아시리아인 등 여러 민족들이 제노사이드로 죽었다는 것. 이것은 1차 세계 대전에서는 유례가 없는 대학살이다. 심지어 '아르메니아 학살을 최초의 홀로코스트'라고 평가하는 사학자들도 있을 정도이다.
오늘도 UN과 유럽 연합은 아르메니아에게 사과할 것을 튀르키예에게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튀르키예 정부는 여전히 사과를 거부하고 있고, 자신들의 과거사를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
5.3. 독일
5.3.1. 벨기에 학살
벨기에 학살은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여 점령한 이후, 벨기에 빨치산들이 원인이 되었는데 밤에 독일군의 야영지 근처에 있는 성당에서 총알이 날아와 독일 병사 몇 명을 죽인 것이 원인이 되었다. 누가 쐈는지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독일군 병사의 오발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독일군은 빨치산이 한 일이라고 단정하고 빨치산으로 의심되는 모든 민간인들을 잡아서 남자, 여자, 노인, 아이 할 것없이 학살한다. 루뱅에서는 300여명이 살해당했고 디낭에서는 674명이 살해당했으며, 벨기에 전역에서 총 천 여명(최대 6천 여명이라는 주장도 있다.)이 독일군에 의해 학살당하였다. 독일 정부는 2001년 이 만행에 대하여 벨기에 정부에게 공식으로 사과하였다.5.3.2. 화학무기 사용
이 외에도 독일 제국의 1899년에 헤이그 조약으로 국제법으로 금지된 독가스(염소가스)를 선제 살포한 행위, 파리와 런던을 선제 폭격하여 수많은 민간인들을 죽게 한 행위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범죄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5.3.3. 러시아군 포로 대상 생체실험
1917년 당시, 러시아 제국 포로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자행하기도 했다. 그 포로수용소는 쾨니히스베르크에 있었으며, 이름은 뮌스터 수용소. 그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하루가 멀다하고 제국군들의 구타와 가혹행위가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독일군은 각 인종 별로 발성의 방법이 분명히 다를 거라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포로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였고 그것을 녹음하였으며, 포로들의 얼굴을 석고로 뜨기까지 했다.당시 러시아군 포로들 가운데에는 일본 제국의 압박을 피해 러시아 제국으로 망명하여 러시아군에 입대한 고려인들도 있었다. 때문에 당시 고려인들이 한국말로 부른 아리랑이나 민요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1차 대전이 끝난 이후, 러시아군 포로들과 고려인들의 행방은 묘연하였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추측되는 바로는 열악한 수용소 생활로 인해 병사하였거나, 제국군의 생체실험에 이용당해 죽었을 거라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현재 독일 동부지역에는 당시 러시아군 포로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이름 없는, 정확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포로들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막대한 양의 곡물과 생필품을 민간인들로부터 수탈하였고, 우크라이나인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기까지 했다.
5.3.4.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조력
콜마르 폰 데어 골츠 원수를 비롯한 독일 파견군과 군사 고문단 역시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적극 조력했다. 특히 골츠 원수는 아르메니아인 강제이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마련했던 인물로, 엔베르 파샤가 하달한 추방령을 실행했다. 독일 군사고문 중 학살을 반대하고 강제 이주를 막으려고 시도했던 유일한 인물은 오토 리만 폰 잔더스 원수뿐이었다. 그러나 오스만 군 내에 정적이 많았던 그의 노력은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2015년,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은 아르메니아 학살에 독일이 조력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5.3.5. 무제한 잠수함 작전
영국의 해상봉쇄를 풀기 위해 헤닝 폰 홀첸도르프 원수가 추진한 무차별적인 잠수함 공격은 수많은 민간 선박들을 침몰시키고 민간인들을 살상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이다. 이는 결국 간접적으로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여 독일의 패망을 앞당기는 결과로 돌아온다.5.3.6. 발트 지역 식민화
1915년 독일 제국은 러시아군에 반격을 가하는 과정에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의 쿠를란트 일대와 폴란드 비아위스토크 일대를 점령하여 군정구역을 설치한다. 독일은 과거 동방식민운동의 역사적 사례에 착안하여 해당 지역의 주민들을 독일화시키고 지역의 물산을 전쟁 경제에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정책을 추진한 독일 병참감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발트 지역 주민들은 너무나 다양하게 섞여 있어 독립적인 문화를 이루어낼 수 없으므로 다시 폴란드에 예속될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발트 지역 주민들의 터전을 빼앗고 독일인들을 이주시킬 계획을 마련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20년 뒤와 달리 유대인들은 협력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독일어를 사용한다는 이유에서였다.독일이 패망한 후 발트 군정 역시 해제되었으나 이는 독일인들의 역사적 기억에 깊게 남아 훗날 나치당의 동방정책에 다시 악용된다. 발트 지역에서 복무하였던 뤼디거 폰 데어 골츠 중장은 전후 우익 정치깡패 집단인 자유군단에서 활동하며 발트 지역 점령 경험에 대해 강연을 하고 다녔는데, 이때 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은 이 중 하나가 바로 그 하인리히 힘러다.
5.4. 불가리아
불가리아 역시 정복한 세르비아 지역에[15] 철권 통치를 자행하며 수많은 주민들을 학살한 바 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16년부터 이듬해까지 약 2000~4000명 가량이 살해된 수르둘리카 학살이다.그 외에도 불가리아는 점령지에 강압적인 불가리아화(българизация) 정책을 추진하며 세르비아인들의 민족정체성을 말살하고자 시도했다. 당시 불가리아 국왕 페르디난트 1세는 공공연하게 "내 꿈은 세르비아를 절멸시키는 것"이라 말하고 다녔고 불가리아 군대 역시 잔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불가리아 점령지역의 세르비아 지식인들과 군인들은 훗날 카틴 학살에서 폴란드인들이 소련에게 당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운명을 맞았다. 대부분 살해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고 세르비아 정교회 성직자들 역시 불가리아인들로 교체되었다. 불가리아화를 위한 조직적 강간 역시 만연했다. 이는 불가리아 정부가 19세기 말부터 오스만에 대항하는 독립 전쟁과 발칸 전쟁에서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숱하게 벌였던 인종청소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범죄 행위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6. 관련 이미지
《승리 만세! (Heil und Sieg!)》 |
Vereinte Kräfte führen zum Ziel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동맹국들" |
[1]
사실 이는 당시
덴마크의 행보 때문이었다. 덴마크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지만 어느 한 쪽이 자국 영해를 이용할 수 없게 만든다는 명분으로
발트해로 통하는 입구인 자국 영해에
기뢰를 잔뜩 뿌려놓았고, 그래서 영국 해군은 발트해로 진입해 러시아 해군과 공동 작전을 펼치려 해도 전혀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반면
독일 제국 해군은 이미
킬 운하를 건설해뒀기 때문에 발트해와
북해를 오가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중립국도 결국에는 한쪽 편을 들게 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졌고, 그래서
전간기 동안 중립국을 침공해 억지로라도 자국 편으로 만든다는 계획을 여럿 수립했다.
[2]
독일 제국과 오헝 제국이 함께 지배했다.
[3]
조약상으로는
보호국 취급이었다.
[4]
괴뢰국으로 분류하는 의견도 있다.
[5]
다만 폴란드 섭정왕국은
1917년에 세워졌다.
[6]
특히 오스트리아 중포병대는 최신식의
스코다제 305mm 중곡사포와 당대에 가장 성능 좋은 포병 견인 장비였던 오스트로-다임러제 M12 트랙터로 무장했기에 화력과 운용탄력성이 좋았다. 이들은 독일군이 가장 자주 요청했던 오스트리아군 부대로, 1914년 당시에는 슐리펜 계획에 따라 독일군과 함께 진군하며 나무르의 벨기에군 요새들을 파괴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1916년
베르됭 전투와 1918년의
춘계 공세 때도 그들은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을 지원했다. 보병대의 경우 합동육군 1사단과 35사단이 파견되어 춘계 공세에 가담했다.
[7]
당시 루마니아는 동맹국이 사방에 둘러싸인 상황에도 어렵게 버텼다. 하지만 당시 루마니아는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카르파티아산맥을 낀 오헝 제국을 공격하고 불가리아 전선에서는 방어만 하는 최악의 전략을 택한데다가 제대로 된 병력 충원과 이동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8]
러시아에게서
베사라비아도 받았지만 베사라비아는 1940년에
소련에게 강탈당해 잃고 훗날
소련 붕괴 후
몰도바로 독립한다. 1차대전이 끝난 직후가 루마니아의 영토가 가장 넓었던 때였다.
[9]
소련 수립 후 2차대전을 거쳐
발트 3국과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소련이 다시 점령해 망할 때까지 계속 차지했지만 나중 일이다.
[10]
라이프치히에서 털리고 파리가 점령당한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 제1제국이나
스당에서 털리고 파리가 마찬가지로 점령당한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국도 이 정도로 수치스러운 조약을 맺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본토가 점령당한 것도 아니고 동부 전선은 동맹국이 결국 승리한 것이나 다름 없었고 특히 1차대전의 주력 독일은 국체와 국민은 온전히 보전 받은 상태에서 이런 치욕적 조약을 강요받았으니. 2차대전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심지어 이후의 2차 대전의 패전국도 이런 수준의 대우를 받진 않았다. 이는 물론 1차 대전에 대한 반성의 영향도 있다.
[11]
독일과 헝가리는 대전쟁의 불만으로 훗날 협상국의 일원이었던
일본 제국,
이탈리아,
루마니아와 함께 추축국을 결성하였으며, 불가리아는 나치에 의해 반강제로(...) 추축국에 가입했으며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에
안슐루스로 병탄되고,
튀르키예만이 실질적으로
중립국으로 남았다가 대전 말기 명분상으로만 연합국에 참전한다.
[12]
단치히,
서프로이센,
포젠, 고지
슐레지엔이 새로 독립한
폴란드 제2공화국으로 넘어갔으며 고지 슐레지엔의 한 귀퉁이가 새로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 북부
슐레스비히가
덴마크,
엘자스-로트링겐이 프랑스,
오이펜-
말메디가 벨기에로 넘어갔다.
[13]
이탈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새로 독립한 폴란드에 영토를 할양했다.
[14]
이후 이들의 역사는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병합당했다가 독일의 패망으로 해방되었고, 헝가리는
제2차 세계 대전때
독일과 동맹을 맺고 과거의 영토를 일부 수복했으나 도중에 전쟁에서 이탈하려다
괴뢰국으로 전락해 버렸고, 전쟁 이후
소련의
위성국이 되어 1980년대 후반까지 소련의 간접적 공산 통치 아래 살아야 했다.
[15]
산 스테파노 조약 당시 보장받은 강역을 획득하고자 했던 불가리아는 현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 동남부 지역을 병합했다. 이 영토는 개전 당시 세르비아 왕국 면적의 약 70%에 달한다. 오스트리아는 나머지 부분을 가져갔으나 이 지역은 수도
베오그라드를 포함한 세르비아의 핵심적인 영토였다.
[16]
흔히 알려진 깃발
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기가 아닌 상선기다.
[17]
빌헬름 2세에겐 독일 제국의 국기 뒤에 하나의 깃발이 더 보이는데 이는
독일 제국군 군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