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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앙주 왕조 초대 국왕 카로이 1세 I. Káro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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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88년경 |
나폴리 왕국 나폴리 | |
사망 | 1342년 7월 18일 (향년 53~54세) |
헝가리 왕국 비셰그라드 | |
재위 |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트 왕국의 왕 |
1308년 ~ 1342년 | |
배우자 |
갈리치아의 마리아 (불확실함) |
비톰의 마리아 (1306년 또는 1311년 결혼/1318년 이후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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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의 베아트리체 (1319년 결혼/1319년 11월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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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엘즈비에타 (1320년 결혼) |
|
아버지 | 앙주의 카로이 마르텔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클레멘티아 |
형제자매 | 베아트리체, 콘슈탄치어 |
자녀 | 카로이, 라슬로, 러요시 1세, 언드라시, 이슈트반 |
[clearfix]
1. 개요
헝가리 왕국- 크로아트 왕국 카페앙주 왕조 초대 국왕. 1301년 언드라시 3세가 사망한 이래 헝가리 왕좌를 차지하고자 7년간 투쟁한 끝에 1308년 왕위를 쟁취했다. 그 후 헝가리 대귀족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왕권을 강화시키고 국가 질서를 확립했지만, 왈라키아 공국의 바사라브 1세의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포사다 전투에서 패배해 왈라키아의 독립을 막지 못했다.2. 언어별 표기
헝가리어 | Károly Róbert(카로이 로베르트) |
크로아티아어 | Karlo Robert(카를로 로베르트) |
슬로바키아어 | Karol Róbert(카롤 로베르트) |
이탈리아어 | Carlo Roberto(카를로 로베르토) |
프랑스어 | Charles Robert(샤를 로베르) |
3. 생애
1288년경 나폴리 왕국의 왕자 카를로 마르텔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의 딸 클레멘티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이로 베아트리체, 콘슈탄치어가 있었다. 아버지의 외가쪽으로는 헝가리를 수 세기 동안 다스린 아르파드 왕조의 피가 흘렀다. 1270년,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5세는 딸 마리어와 나폴리 왕국의 카를로 왕자와 결혼시켰다. 카를로 왕자는 아버지 카를루 1세의 뒤를 이어 카를로 2세로 왕위에 올랐고, 마리어와의 사이에서 아들 카를로 마르텔을 낳았다.1290년 라슬로 4세가 암살당하자, 카를로 2세의 왕비 마리어가 자신이 이슈트반 5세의 딸인 점을 내세워 헝가리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보니치, 프랑코판, 슈비치 등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의 주요 귀족 가문들이 그녀를 합법적인 군주로 받들었고, 처음에는 언드라시 3세를 따르던 쾨세그 가문도 1292년 봄 언드라시 3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마리어의 아들 카를로 마르텔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쾨세그 가문은 언드라시 3세의 반격을 받아 진압되었으며, 카를로 마르텔을 지지하는 이들은 크로아티아-달마티아 등 이탈리아 반도 맞은편에 있는 연안 지역의 영주들에 국한되었다.
1295년 카를로 마르텔이 사망한 뒤,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헝가리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1300년, 슈비치 가문, 쾨세그 가문, 차크 가문을 포함한 여러 귀족들이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에게 당시 12살이던 그를 헝가리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카를로 2세는 이에 응해 그해 8월 손자를 스플리트에 파견했다. 대부분의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달마티아 영주들은 카로이가 자그레브로 진군할 때까지 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쾨세그 가문과 메테 가문은 곧 마음을 바꿔 언드라시 3세와 화해한 뒤 카로이의 진군을 막았다.
1301년 1월 14일, 카로이를 막으려던 언드라시 3세가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카로이는 즉각 에스테르곰으로 가서 에스테르곰 대주교의 추대를 받아 헝가리 왕을 칭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군대는 1,000명도 채 안 됐고,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대관식이 관례적으로 행해지는 세케슈페헤르바르나 헝가리의 수도 부더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나폴리 왕국은 교황청으로부터 카로이가 헝가리 왕이 되는 것을 승인받은 뒤 이를 헝가리 귀족들에게 홍보했지만, 이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야기했다. 그들은 교황청이 지지하는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면 자신들이 교황청의 간섭에 시달릴 것을 우려했기에 추대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이 치러지지 않았다는 명목을 내세우며 그의 집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바츨라프 2세의 아들 바츨라프 3세가 헝가리 의회에서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다수의 헝가리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카로이 로베르트만을 왕으로 모셨다. 이에 1301년 8월 말, 이반 쾨체그가 이끄는 왕실군이 출진해 에스테르곰을 공략했고, 카로이는 헝가리 남부로 피신했다. 하지만 카로이를 따르는 주들을 본격적으로 정벌하려는 시도는 이뤄지지 않았고, 헝가리는 카로이를 지지하는 세력과 바츨라프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나마도 강력한 권세를 떨치는 귀족들이 국정을 주도했고, 바츨라프와 카로이 모두 별다른 실권이 없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2세에게 자신의 허락 없이 아들을 헝가리 왕으로 세운 것에 항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1301년 9월 헝가리를 방문한 교황 사절 니콜로 보카시니는 헝가리 고위 성직자들에게 교황이 헝가리 왕으로 인정한 카로이를 지지하라고 설득했다. 이에 보헤미아 왕국은 헝가리 귀족들을 묶어두기 위해 그들에게 큰 영지와 높은 관직을 주었다. 그 결과, 바츨라프 3세를 헝가리 왕으로 세우는 데 일조했던 컬로처 대주교 이슈트반을 포함한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1302년 상반기에 카로이 지지로 돌아섰지만, 귀족들은 바츨라프 3세를 계속 왕으로 모셨다.
1302년 9월, 카로이가 바츨라프가 있던 부더를 포위했다. 그는 부더 시민들에게 바츨라프를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수비대와 시민들은 끝까지 바츨라프를 지지했다. 그 사이, 이반 쾨체그가 이끄는 군대가 도착하여 포위를 풀었고, 카로이는 어쩔 수 없이 달마티아로 철수했다. 교황 사절 니콜로 보카시니가 부더에 성무를 집행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선언하자, 부더 신부들은 교황과 모든 헝가리 고위 성직자들을 파문했다. 1303년, 보니파시오 8세는 바츨라프 2세에게 로마로 출두해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바츨라프 2세가 응하지 않자, 그해 5월 31일에 바츨라프 왕의 헝가리 왕 선출은 무효이며 카로이야말로 헝가리 왕이 되어야 한다는 교령을 반포했다. 여기에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도 바츨라프 2세에게 아들을 헝가리에서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많은 헝가리 귀족들이 카로이 편에 돌아갔고 바츨라프 3세의 세력은 부더와 그 주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바츨라프 2세는 아들을 구하고 카로이를 무찌르기 위해 1304년 5월 대군을 이끌고 헝가리로 진군했다. 그의 군대는 슬로바키아 서부 일대를 행진하며 무자비하게 약탈한 뒤 에스테르곰을 공략하고 에스테르곰 주교 에호르를 생포했다. 그러나 카로이를 지지하는 영주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데다, 아들을 왕으로 받든 영주들도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고 자기들 권익을 챙기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자, 그는 아들이 헝가리에 계속 체류했다간 위험해지겠다고 판단했다. 이에 아들을 보헤미아로 데려가되 헝가리 왕위는 계속 유지하고 이반 쾨체그를 왕을 대신하여 헝가리를 이끌 통치자로 세웠다. 이때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 역시 보헤미아로 이송되면서, 헝가리 민심이 악화되었다.
1305년 6월 21일 바츨라프 2세가 사망하면서 보헤미아와 폴란드 왕위를 물려받은 바츨라프 3세는 헝가리 왕을 겸임하는 것은 재정이 빚더미에 짓눌리고 있고 폴란드 통제에 애를 먹는 상황에서 무익한 짓이라고 판단하고, 그해 10월 9일에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에게 성 이슈트반 왕관과 보석을 포함한 헝가리 왕좌에 대한 권리를 넘겼다. 오토는 헝가리로 이동해 1305년 12월 6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왕위에 올랐다.
1306년 말, 카로이는 달마티아에서 북상을 시작해 헝가리의 수도 부더를 압박했다. 여기에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카로이를 지지하면서 오토가 헝가리 왕을 칭하는 것을 금지했다. 오토는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1307년 봄 에르데이를 순행하다가 그해 6월 오토와 카로이 둘 다 왕으로 인정하지 않던 에르데이의 보이보드(Voivode) 란슬로 칸에게 체포되었다. 1307년 10월 10일 라코스에서 열린 긴급 회의에서, 귀족들은 카로이를 헝가리 왕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헝가리의 가장 강력한 귀족들인 차크 마테 3세(Csák Máté 1265~1321), 어버 어머데, 라슬로 칸은 카로이의 권위를 무시했다. 1307년 말에 석방된 오토는 헝가리에 정나미가 떨어졌고, 1308년 헝가리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카로이를 왕으로 인정한 뒤 바이에른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카로이만 남았지만, 많은 헝가리 귀족들은 여전히 카로이를 왕으로 받들려 하지 않았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새로운 교황 사절인 젠틸레 포르틴노 다 몬테피오레를 헝가리에 파견했다. 1308년 여름에 헝가리에 도착한 몬테피오레는 헝가리의 가장 강력한 영주들을 차례로 설득해 카로이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했다. 그 결과 1308년 11월 27일, 부더의 도미니카 수도원에서 열린 의회에서 카로이가 만장일치로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일전에 오토 3세를 억류할 때 성 이슈트반 왕관을 탈취했던 라슬로 칸은 왕관을 카로이에게 넘겨주라는 교황 사절의 요구를 무시했다. 결국 교황 사절은 카로이를 위해 새로운 왕관을 제작해야 했다.
1309년 6월 15일 또는 16일 부더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대관식이 치러졌다. 그러나 대다수 헝가리인들은 성 이슈트반 왕관이 아닌 다른 왕관으로 대관식을 치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교황 사절이 라슬로 칸에게 파문을 선고하자, 라슬로 칸은 할 수 없이 성 이슈트반 왕관을 카로이에게 넘겼다. 1310년 8월 27일, 에스테르곰 대주교 토마스가 세케스페헤르바르에서 성 이슈트반 왕관을 카로이에게 씌워줬다. 이로써 카로이가 헝가리 왕으로 인정받았지만, 헝가리의 대귀족들은 그의 권위를 우습게 여겼다.
한편, 세르비아 왕국에서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을 상대로 내전을 벌이고 있던 스테판 드라구틴은 아들 블라디슬라프가 헝가리 왕족인 콘스탄차 모로시니와 결혼한 터라서 헝가리에서 벌어지는 내전에도 개입해 상당수의 병력을 그 쪽으로 보냈다. 그러다가 카로이가 최종적으로 헝가리 왕이 되자, 드라구틴은 그에게 아들 블라디슬라프를 후계자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카로이가 이를 거부하자, 이번에는 그를 실각시킬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카로이는 이 음모를 간파하고 정적들을 모조리 숙청하였고, 이로 인해 드라구틴과의 관계가 매우 안 좋아졌다.
1311년 상반기, 카로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점거하고 있던 자다르 공략에 착수해 베네치아 수비대를 축출하고 믈라덴 2세 수비치를 자다르의 백작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해 6월, 차크 마테 3세가 부더를 습격해 포위 공격했다. 카로이는 라슬로 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는 마테를 성공적으로 격퇴한 뒤 그해 9월 군대를 파견해 차크 마테 3세의 영지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1312년 봄 의회를 소집해 지방 영주들에게 반역자 차크 마테 3세를 토벌하는 데 힘을 보태라고 촉구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 사이에 베네치아가 자다르를 도로 탈취하자, 그는 베네치아와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베네치아인이 자다르 백작에 선임되는 것을 용인하되 헝가리 왕이 명목상으로나마 자다르 백작의 주군이 되는 것을 인정받았다.
한편, 공식적으로 카로이를 지지했던 어버 어머데는 1311년 9월 왕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커셔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곳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다가 커셔 주민들의 습격을 받고 피살당했고, 그의 두 아들 야노시와 데메테르가 카사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에 카로이가 카사로 와서 양자를 중재했고, 어버 가문은 10월 3일에 야노시와 데메테르가 석방되는 대가로 아바우지와 젬플렌 주를 왕실에게 돌려주고 커셔 시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석방되자, 어버 가문은 합의를 어기고 차크 마테 3세에게 군대 지원을 받는 대가로 어바우지와 젬플렌을 넘기기로 했다.
1312년, 어버-차크 연합군은 카사를 포위 공격했다. 이에 카로이가 왕실군을 이끌고 이들을 요격하여 1312년 6월 15일 로스고니(현재 슬로바키아의 로자노브체) 전투에서 이들을 격파했다. 그동안 어버 가문을 섬겼던 귀족 중 절반 가량이 전투가 끝난 뒤 카로이에게 귀순했다. 그해 7월, 카로이는 어버 가문의 여러 요새를 공략한 뒤 차크 마테 3세를 향한 원정을 개시해 1313년 너지솜바트, 1315년 비셰그라드를 공략했다. 1315년 초 부더에서 테메슈바르로 이동한 그는 1316년 상반기에 트란스다뉴비아와 슬라보니아에서 쾨세그 가문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그동안 쾨세그 가문의 압제에 시달렸던 소영주들이 대거 가담했고, 쾨세그 가문은 왕실군에게 연전연패해 헝가리 남부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빠르게 상실했다.
이렇듯 왕권이 갈수록 강해지자, 이에 불안감을 느낀 보르사 자캅(Borsa Jakab 1260~1332)은 1315년 라슬로 칸이 사망한 뒤 영지를 물려받은 두 아들 라슬로 4세 칸, 라슬로 5세 칸과 아코시 모이시(Ákos Mojs ?~1320) 등 여러 영주들과 연합해 카로이에 대적했다. 그들은 갈리치아의 왕 안드레이 유리에비치를 헝가리 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보르사 가문의 추종자였지만 이제는 카로이 편에 선 데브레첸의 도저(Debreceni Dózsa 1291~1322)가 이끄는 왕실군이 1316년 6월 말에 데브레첸에서 이들을 격파했다. 이후 2달 동안 보르사의 많은 요새들과 영지들이 비하르, 솔노크, 보르쇼드, 그리고 클루지 주에 속한 왕실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렇듯 헝가리 대귀족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군사 원정을 이끈 카로이는 1314년 2월 시르미움에서 스테판 드라구틴과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316년 3월 12일, 세르비아 왕국 북부 지역인 스렘의 왕을 칭하던 스테판 드라구틴이 사망하고 장남 스테판 블라디슬라프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숙부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은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군사를 일으켜 스렘으로 쳐들어갔다. 카로이는 스테판 블라디슬라프가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인정하고 병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은 블라디슬라프를 성공적으로 격파하고 스렘을 포위했다. 카로이는 사바강을 건너 반격을 개시해 마초 요새를 공략했다.
1317년 5월, 어버 가문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곧바로 진압하고 운그바르, 네비츠케(Nevicke: 현재 우크라이나 네비츠키) 성을 공략했다. 1317년 11월 3일, 카로이는 차크 마테의 영지를 침공해 코마롬(Komárom, 현재 슬로바키아 코마르노)를 점령했다. 1318년 카로이가 차크 마테 3세가 강제로 탈취했던 교회 재산을 돌려주는 정책을 속행하지 않자, 고위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이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연합했다. 그들의 거센 요구에 직면한 카로이는 그해 여름에 의회를 열었지만, 언드라시 2세의 금인칙서를 재확인하라는 요구는 거부했다. 고위 성직자들은 교황에게 카로이가 교회 재산을 자기 것으로 가져가고 있다며 파문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런 상황에서 카로이가 중병에 걸리자, 파문 여부를 심사하던 교황 요한 22세는 카로이가 죽음이 임박했으니 참회한다면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카로이는 곧 회복되었다.
1319년, 데브레첸의 도저는 라슬로 4세, 라슬로 5세 형제 및 그들의 동맹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공세를 이어갔고, 쾨치키 샨도르(Köcski Sándor ?~1328)는 쾨세그 가문의 6개 요새를 공략했다. 1319년 여름, 카로이는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로틴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해 난도르페헤르바르와 마츠바 등지를 공략했다. 2년 후인 1321년 3월 18일, 그동안 카로이를 상대로 항전하던 차크 마테 3세가 사망했다. 카로이는 이 때를 틈타 차크 가문의 영지를 공격해 별다른 저항 없이 순조롭게 공략했다. 이때 카로이는 차크 가문의 핵심 도시인 트렌첸을 포위하여 8월 8일에 함락시켰다. 3개월 후, 왕실군은 라슬로 칸 아들들의 마지막 요새인 키소(Csicsó, 오늘날 루마니아 키케우-코라비아)를 공략했다.
1322년, 달마티아의 두 도시인 시베니크와 트로기르가 카로이의 봉신인 믈라덴 2세 수비치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두 도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믈라덴의 친동생인 팔 2세 수비치를 포함한 많은 크로아티아 영주들도 믈라덴에게 등을 돌렸다. 카로이는 그해 9월 크로아티아로 진군해 크닌에서 믈라덴에 반대하던 영주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믈라덴은 카로이를 상대로 2차례 맞서 싸웠으나 모두 패배한 뒤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자 출두했지만, 곧 체포된 뒤 헝가리로 끌려갔으며, 모든 영지와 작위를 박탈당했다.
이리하여 헝가리를 그동안 지배하던 대귀족들을 모조리 제압함으로써 왕권을 카르파티아 산맥과 도나우 강 하류 사이의 헝가리 전역에 떨칠 수 있게 된 카로이는 1323년 상반기에 수도를 왕국의 중앙에 있는 비셰그라드로 천도했다. 같은 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들은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카로이에게 병력 지원을 받는 대가로 지난 수십년간 지배했던 프레스부르크를 넘겼다. 1325년, 카로이는 그동안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던 슬라보니아를 왕실에 귀속시키고 심복 아코시 믹치(Ákos Mikcs ?~1343)를 슬라보니아 반(Ban, 특정 지역의 최고 행정관)으로 세웠다. 믹치는 헝가리 정부의 통제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크로아티아를 침공했지만, 1326년 크로아티아 영주들 중 한 사람인 이반 넬리피치에게 패배했다. 결국 크로아티아 지역 만은 카로이의 치세 동안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났다. 바보니치와 쾨세그 가문은 크로아티아의 패전으로 왕실군의 위세가 꺾인 틈을 타 1327년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고, 카로이는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슬라보니아와 트란스다뉴비아의 요새 8개를 몰수했다.
카로이는 대귀족들이 그동안 불법적으로 취득한 왕실 재산을 철저히 조사하고 이를 강제 환수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특정 기간 동안 해당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가질 권한"을 주면서도 그것을 영원히 소유하지 못하게 했다. 여기에 더해 교황만이 주교 선임권을 가질 수 있다는 교령을 무시하고 헝가리의 고위 성직자들을 마음대로 임명했다. 당시 교황청은 아비뇽 유수로 인해 프랑스 왕국에 예속된 터라 카로이의 이러한 행동에 어떠한 제지도 하지 못했다.
1326년, 카로이는 성 지외르지 훈장을 제정하고 자신만 따르는 세속적인 기사단을 창설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마상창시합을 개최하고 "왕의 수행원", "왕의 기사"라는 새로운 직책을 설립했다. 여기에 더해, 충직한 신하들에게 투구 문장을 수여하고 특별대우를 해줬다. 그의 치세 동안 동전 주조, 관세, 소금 독점으로 인한 왕실 수입을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행정 기관들이 각지에서 설립되었다. 또한 카로이는 1327년 새로 문을 연 광산에서 추출한 금의 3분의 1을 광산이 발견된 땅의 소유자에게 넘긴다고 선언했다. 이에 사람들이 금광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면서, 쾨르뫼츠바녀(현재 슬로바키아 크렘니차), 너지바녀(현재 루마니아 바이아마레), 어러뇨슈바녀(현재 루마니아 바이아 데 아리에슈) 등 여러 곳에서 금광이 새로 개발되었다. 그는 이를 토대로 금화를 대거 주조할 수 있었고, 자연히 헝가리의 경제는 크게 발전했다.
경제 발전을 이룩하면서 국고가 풍부해지자, 카로이는 군대를 강화한 뒤 대외 원정에 착수했다. 1328년 여름, 보헤미아 왕 요한 1세와 연합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레이타 강둑에서 적군을 격파했다. 1328년 9월 21일, 오스트리아의 세 공작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오토는 헝가리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프레스부르크와 무러쾨즈(현재 크로아티아 메지무레주)의 영유권을 헝가리에게 넘겼다. 1329년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가 파견한 세르비아군이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포위했지만, 카로이가 파견한 구원군에게 패퇴했다.
1329년 말, 카로이의 장인이자 폴란드 왕국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가 보헤미아 왕국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와 튜튼 기사단 연합군에게 패배한 뒤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아들이자 후계자인 카지미에시 왕자를 헝가리로 보냈다. 카지미에시는 카로이의 궁정에 머무는 동안 카로이의 아내인 폴란드의 엘즈비에타의 시녀 클라라 자(Clara Záh)에게 외설스러운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클라라 자의 아버지 펠리키안 자(Felician Záh)는 딸이 모욕당하는 와중에 왕족들이 만류하지 않는 것에 격분했고, 그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1330년 4월 17일, 펠리키안 자는 왕궁 식당에 칼을 들고 난입하여 카로이와 왕비의 오른손에 상처를 입힌 뒤 카로이의 두 아들 러요시와 언드라시를 죽이려 했다가 왕실 근위대에게 사살되었다. 클라라를 제외한 펠리키안 자의 아이들은 고문을 당해 죽었고, 클라라는 입술과 손가락 여덟 개가 잘린 뒤 말에 묶인 채 여러 마을에서 조리돌림 당했다.
1330년, 왈라키아 공국의 프린스 바사라브 1세가 헝가리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카로이는 그해 9월 왈라키아로 쳐들어가 세베린(오늘날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투르누 세베린) 요새를 점령한 뒤 바사라브 1세의 협상 요청을 거부하고 그가 숨은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Curtea de Argeș)로 진군했다. 그러나 적군이 청야 전술을 사용하는 바람에 식량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바사라브 1세와 휴전 협약을 맺고 철수길에 올랐다. 1330년 11월 9일 카르파티아 산맥 남부를 가로지르는 좁은 통로를 행진하던 헝가리 왕실군은 포사다에서 왈라키아인의 습격을 받았다. 카로이는 데시데리우스 헤데르바리(Desiderius Hédervári)라는 이름의 기사와 옷을 바꿔 입은 후 전장에서 탈출했다. 데시데리우스는 카로이로 자처하며 적의 시선을 잡아끌면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카로이는 왈라키아 침공을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고, 왈라키아는 헝가리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폴란드 쪽으로 눈길을 돌린 카로이는 보헤미아-튜튼 기사단 연합군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는 폴란드에 증원군을 보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얀 루쳄부르스키가 중재를 요청하자, 그는 기꺼이 받아들여 폴란드와 보헤미아가 1332년에 평화 협약을 맺게 해줬다. 한편, 교황청이 사절을 보내 교황들의 곤궁한 처지를 호소하며 십일조를 거둬들이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카로이는 교황청이 징수한 돈의 3분의 1을 자신에게 주는 대가로 받아들였다.
이후 내치에 전념하고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데 힘을 기울이던 그는 말년에 중병에 걸려서 대외 활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1340년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헝가리를 공격해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함락했지만, 몸져누워 있던 그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1342년 7월 16일 비셰그라드에서 눈을 감았고, 유해는 세케스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당시 장례식에는 처남인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3세와 모라비아 변경백 카를이 참석했다.
카로이는 생전에 여러 차례 결혼했다. 왕이 되기 전에 갈라치아 공작 레우 2세의 딸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일부 기록이 전해지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1306년 또는 1311년 상반기에 비톰 공작 카지미르의 외동딸 마리아와 결혼했다.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자식이 없다고 나와 있지만, 일부 사료에서는 두 딸 커털린[1], 에르제베트[2]를 낳았다고 기술했다. 1318년 이후에 비톰의 마리아가 사망한 뒤 1319년 2월 하인리히 7세의 딸인 베아트리체와 결혼했지만, 그해 11월 초에 베아트리체가 출산 도중 사망하면서 홀아비가 되어버렸다. 1320년 폴란드 왕 브와디스와프 1세의 딸 엘즈비에타와 재혼했다.
공식 기록에서 카로이의 자식으로 인정된 다섯 자식은 모두 폴란드에서 온 엘즈비에타의 소생이다. 첫번째 아들인 카로이는 1321년에 태어났으나 그 해 또는 1323년에 사망했다. 둘째 아들 라슬로는 1324년에 태어나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딸 안나와 약혼했지만, 1329년에 사망했다. 1326년에 태어난 러요시 1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헝가리 왕이 되었다. 1327년에 태어난 언드라시와 1332년에 태어난 이슈트반은 형 러요시 1세의 휘하에서 공직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