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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22:23:34

주앙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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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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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포르투갈의 공영방송국(RTP)이 포르투갈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포르투갈인 100명'을 선정. 단, 중복 투표가 포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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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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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제4·6대 국왕
주앙 2세
João II
파일:D._João_II_half-length_–_Museu_de_Marinha.jpg
출생 1455년 3월 3일
포르투갈 왕국 상조르즈 성
사망 1495년 10월 25일 (향년 40세)
포르투갈 왕국 알가르브 알보르
재위 포르투갈 왕국의 왕
1차 1477년 11월 11일 ~ 1477년 11월 15일
2차 1481년 8월 28일 ~ 1495년 10월 25일
배우자 비제우의 레오노르 (1470년 결혼)
자녀 아폰수, 주앙(사생아), 브리테스 아네스(사생아)
아버지 아폰수 5세
어머니 코임브라의 이사벨
형제 주앙, 주아나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3.1. 자녀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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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4·6대 국왕. 별호는 '완전왕(Príncipe Perfeito)'이다.

2. 생애

1455년 3월 3일 포르투갈 왕국 상조르즈 성에서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5세와 코임브라 공작이자 아폰수 5세의 섭정이었던 페드루 왕자의 딸 이사벨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 주앙은 1451년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기에, 그가 일찌감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누나로 1693년 교황 인노첸시오 12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된 주아나가 있었다. 유년기 때 리스본에서 우수한 교육을 받았고, 아버지의 아프리카 원정에 동행했다. 1470년 비세우 공작이자 두아르트 1세의 아들인 페르난두의 딸 레오노르와 결혼했으며, 1471년 8월 21일 아르질라 공략에 성공한 뒤 아버지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1475년 아폰수 5세가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의 유일한 딸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와 결혼한 뒤 엔리케 4세의 이복 누이인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자 페르난도를 상대로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을 벌일 때 참여했다. 1476년 3월 1일 토로 전투에서 우익 부대를 이끌고 카스티야군 측면을 돌파했지만, 그 사이에 아군 중앙 부대가 무너지고 아버지가 달아나버리는 바람에 패배를 막지 못했다. 1477년 포르투갈 왕국과 연합해 카스티야 왕국과 전쟁을 치르던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아폰수 5세의 동의도 받지 않고 카스티야 왕국과 종전 협약을 맺고 물러나자, 아폰수 5세는 깊은 환멸을 느끼고 그 해 11월 11일 왕위를 아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토레스 베드라스에 있는 바라토호 수도원에 은거했다. 그러다 주앙 2세와 신하들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을 돌이켜 그해 11월 15일에 복위했다.

1481년 8월 28일 아폰수 5세가 사망한 뒤 26세의 나이에 정식으로 포르투갈 국왕이 되었다. 그는 즉위 직후 대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를 내렸다. 이보다 앞서, 아폰수 5세는 아프리카 원정과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브라간사 공작 아폰수 등 대귀족들에게 국정을 일임하고 수많은 특권을 하사했다. 이 때문에 브라간사 공작, 비세우 공작 등 대귀족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해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힘들었다. 그는 대귀족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그들을 숙청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브라간사 공작 페르난두 2세는 왕이 자신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부부왕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포르투갈을 공격해서 주앙 2세를 타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주앙 2세를 타도할 음모를 꾸미던 이들 몇 명이 도중에 배신하고 주앙 2세에게 페르난두 2세가 카스티야 왕국에 보낸 서신을 보여줬다. 1483년, 주앙 2세는 페르난두 2세를 긴급 체포한 뒤 22일간 카펫이 깔린 방에서 21명의 판사, 귀족, 기사들로 구성된 약식 재판을 거행한 후 사형을 선고했다. 페르난두 2세는 판결이 내려진 이튿날인 6월 20일에 에보라 광장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되었다.

1484년, 주앙 2세의 왕비 레오노르의 형제이자 비세우 공작인 디오구는 왕이 세루발 해변으로 행차했을 때 등 뒤에서 단검으로 찌를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왕이 해변이 아닌 육지로 여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작전은 무산되었고, 기밀이 샐 것을 우려한 공모자 몇 명이 왕에게 밀고했다. 주앙 2세는 디오구를 궁전에 소환한 뒤 그를 단검으로 직접 찔러 죽였다. 그 후 비세우 공작의 어머니 베아트리스에게 두 명의 사절을 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대로 알리게 했고, 디오구의 형제인 마누엘 1세에게도 서신을 보내 "그를 죽이고 싶었기 때문에 찔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들 아폰수가 죽고 더 이상 합법적인 자녀가 없다면 마누엘이 국왕 직위를 상속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후 음모에 관련된 80명 이상의 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하거나 카스티야로 추방했는데, 그 중엔 에보라 주교인 가르시아 데 메네세스도 있었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사건을 정리한 뒤 귀족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하인의 하인이 아니라 주군의 주군이다."

이후 대귀족들은 주앙 2세를 두려워해 감히 도전하거나 음모를 꾸미지 못했다. 그리하여 강력한 왕권 확보에 성공한 그는 아버지가 중단했던 해양 탐사 사업을 재개했다. 기니 만에 대한 탐사와 무역을 집중적으로 추진했는데, 특히 이 지역의 층적층에 매장된 사금을 다룬 교역소를 건설하게 했다. 아울러 인도로 향하는 바닷길 탐색을 자기 대에 이루기로 마음먹고 여러 탐험가들을 물신양면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 그의 치세 동안 아래의 발견이 이뤄졌다.

한편, 제노바 공화국 출신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포르투갈 궁정에 방문해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한다면 아프리카 대륙 해안을 돌아서 가는 것보다 인도로 빨리 도착할 수 있다며 자신의 항해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주앙 2세는 단호히 거절했다. 일부 학자들은 포르투갈 항해자들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지만 스페인 왕국이 개입할 것을 우려해 비밀에 붙였을 것이라고 추정[1]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2]되지 않았다. 만약 아메리카 대륙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다면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하는 게 보다 빨리 인도로 갈 수 있다는 콜럼버스의 주장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을 간파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아프리카를 우회해 인도에 도달하는 항로 개척을 오랫동안 추진하여 이제 결실을 거둘 기미가 보이는데 이제와서 새 항로 탐색에 돈을 쓸 이유는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렇듯 해양 탐사에 열을 올리던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종종 스페인 측 탐험가들과 충돌했고, 급기야 해상 전투가 벌어지기까지 했다. 이에 1494년 6월 6일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에 따라 스페인 서부의 토르데시야스 시에서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당시 구대륙의 끝이라 여겨지던 카보베르데 섬과 신대륙의 시작이라 여겨지던 히스파니올라 섬 사이의 정가운데를 관통하는 경선 서경 43도 37분을 기준선으로 삼고, 새로 발견한 미개척지의 서쪽은 에스파냐가, 동쪽은 포르투갈에게 돌아가기로 했다.

이렇듯 포르투갈 왕국은 주앙 2세의 치세에 해양 탐사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며 국력이 날로 신장되고 있었지만, 그는 후계자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유일한 아들이었던 아폰수는 1491년 타구스 강을 따라 산책하던 중 낙마한 여파로 사망했다. 이후 사생아인 조르즈를 합법화하고 후계자로 삼으려 노력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1493년 비세우 공작 마누엘에게 히베이라 왕궁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누엘은 자신을 죽이려는 게 아닐까 염려했지만, 주앙 2세는 그를 양자로 삼고 왕위 계승자로 확정지었다. 이후 1495년 10월 25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세간에는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포르투갈 귀족들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진위 여부는 불명확하다. 사후 마누엘 1세가 주앙 2세의 양자로서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

3. 가족 관계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비제우의 레오노르(1458 ~ 1525)[3]
1남 포르투갈 공 아폰수
(Afonso, Hereditary Prince of Portugal)
1475년 5월 18일 1491년 7월 13일 아스투리아스 여공 이사벨[4]

4. 여담



[1] 아직 아프리카 남단부를 탐사하던 시절부터 포르투갈 항해자들은 아프리카 연안보다는 대서양 먼바다로 나오는 것이 항해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도 인도로 가던 중의 일이었다. 하지만 공식화 된건 그때가 처음이지만, 포르투갈인들이 실제로 브라질에 처음으로 닿은 것은 그 전에 대서양 먼바다의 항해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이미 일어난 일이 아니었냐는 주장도 있다. [2] 당연하지만 이 당시 탐사 중인 곳들에 대한 정보는 극비로 취급되었고, 포르투갈은 항해도를 대외 반출하는 자를 극형에 처했다. 문제는 리스본 대지진으로 인해 왕실 문서고를 비롯해 과거 문서들을 담은 서고들이 파괴되는 바람에 지금 시점에서 이러한 주장을 입증해줄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작성한 극비 자료는 사실상 남아있지 않다. [3] 두아르트 1세의 아들인 비제우 공작 페르난두의 딸이자 마누엘 1세의 누나. [4] 이사벨 1세 페란도 2세의 장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