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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코치 페렌츠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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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헝가리의 잡지 물트코르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명단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마차시 1세 무명용사 어틸러 요제프 라코치 페렌츠 2세 센트죄르지 얼베르트
6위 7위 8위 9위
민트센티 요제프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라슬로 1세 코슈트 러요시 쾨뢰시 초마 샨도르
9위 10위
후녀디 야노시 퍼프 라슬로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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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20대 공
라코치 페렌츠 2세
II. Rákóczi Ferenc
파일:II._Rákóczi_Ferenc_Mányoki.jpg
이름 라코치 페렌츠
(Rákóczi Ferenc)
출생 1676년 3월 27일
헝가리 왕국 보르시
사망 1735년 4월 8일 (향년 59세)
오스만 제국 테키르다
재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작
1704년 ~ 1711년
배우자 헤센반프리트의 샤를로테 아말리
(1694년 결혼 / 1722년 사망)
자녀 리포트, 요제프, 죄르지, 셔롤터
아버지 라코치 페렌츠 1세
어머니 옐레나 즈린스카
형제 죄르지, 율리언너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라코치 페렌츠 2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3. 가족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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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르데이 공국의 제20대이자 마지막 . 헝가리 독립운동가.

2. 생애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 산하 헝가리 왕국 영토였던 보르시(Borsi)[1] 태생으로 부친은 에르데이 공국의 공을 역임했던 라코치 페렌츠 1세(I. Rákóczi Ferenc 1645~1676)이고, 모친은 크로아티아 왕국의 명문 귀족 가문인 즈린스키 가문 출신으로 합스부르크 제국 장성으로 활약했던 페타르 즈린스키의 딸인 옐레나 즈린스카(Jelena Zrinska 1643~1703)[2]이다. 부계인 라코치 가문은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도 헝가리인의 자치가 보장되었던 에르데이 공국 군주 작위를 역임한 옛 헝가리 왕국 동부 지역의 명문가였다.

라코치 페렌츠 2세가 태어나기 5년 전인 1671년, 엘레나 즈린스카의 아버지이자 그의 외조부인 페타르 즈린스키가 합스부르크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인 레오폴트 1세를 축출하고 크로아티아를 독립시키려는 음모를 주동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때 아버지 라코치 페렌츠 1세도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큰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그 후 생후 4개월 만인 1676년 7월 8일에 부친이 급사하면서,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엘레나 즈린스카는 그와 딸 라코치 율리안너(Rákóczi Julianna, 1672 ~ 1717)를 시어머니 바토리 조피아의 집이 있는 문카치 성으로 이주했다. 라코치 페렌츠 2세는 3살 때부터 말을 타는 법을 배웠고, 5살 때부터 우수한 가정교사들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온유하고 관대한 성품이었지만, 항상 권위를 유지하려는 성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682년, 어머니가 오늘날 슬로바키아에 해당하는 상 헝가리 지역의 귀족인 퇴쾨이 임레(Thököly Imre 1657~1705)와 재혼했다. 퇴쾨이 임레의 목표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상 헝가리를 해방시키고 군주가 되려는 것이었고, 어린 라코치 페렌츠 2세의 교육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종종 계부의 숙영지를 방문해서 계부를 따르는 쿠루츠 군인들의 일상 생활을 지켜봤고, 퇴쾨이 임레로부터 반 합스부르크와 헝가리 독립에 대한 의지를 이어받았다. 1683년 퇴쾨이 임레가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메흐메트 4세와 대 와지르 카라 무스타파 파샤(Merzifonlu Kara Mustafa Paşa 1634~1683)에게 헝가리의 독립을 요청하면서 제2차 빈 공방전이 발생했다. 이 함락되기 바로 직전 폴란드-리투아니아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끌고 온 가톨릭 동맹군이 도착하면서 제2차 빈 공방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어서 발생한 대 튀르크 전쟁에서 퇴쾨이 임레는 수세에 몰렸고, 어머니는 가족들을 데리고 문카치(Munkács)[3]의 팔라노크 성에서 항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3년 동안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보급이 한계에 다다르자 1688년 결국 투항했고, 어린 라코치와 형제자매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레오폴트 1세의 후견을 명목으로 빈으로 끌려가 사실상의 연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레오폴트 1세는 라코치 가문의 재산을 돌려주었으나 라코치 형제들을 합스부르크 가문이 동군연합으로 다스리는 또다른 국가인 보헤미아 왕국에 있는 예수회대학에 다니면서 오스트리아식 교육을 받게 했다. 1694년 헝가리로 돌아온 그는 헤센-반프리트 가문 방백 카를의 딸 샤를로테 아말리에(Charlotte Amalie von Hessen-Wanfried 1679~1722)와 결혼했으며 합스부르크 헝가리에서도 부유하고 중요한 귀족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696년 첫 아들이 태어났을 때, 합스부르크 황제 레오폴트 1세 대부로 삼고, 아들의 이름을 레오폴트의 헝가리식 이름인 리포트로 정했다.

1697년 7월, 퇴쾨이 임레를 추종하는 농노들이 라코치 가문의 영지인 헤갈자 일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토카이, 사로스파타크, 사토랄랴우헤이 성을 점령한 뒤 라코치 페렌츠 2세를 지도자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훈련받지 못하고 무질서한 그들을 이끌고 제국군에 대적해서 이길 가망은 없다고 여기고, 서둘러 으로 향한 뒤 레오폴트 1세에게 자신은 이번 봉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맹세했다. 그 후 농노 봉기는 헝가리 귀족들에게 철저하게 진압되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이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넘겨주었다. 그동안 오스만 제국군에서 활동하던 퇴쾨이 임레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고, 어머니 옐레나 즈린스카도 퇴쾨이 임레를 따라 오스만 제국으로 떠나면서 양아버지, 친어머니와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는 레오폴트 1세가 갈수록 개신교 신자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헝가리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헝가리 귀족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면서, 자기도 부모처럼 합스부르크 가문에 지배에 맞서 헝가리의 독립을 꾀하기로 마음먹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700년 가을, 프랑스 왕국의 국왕 루이 14세가 페리올 백작 샤를을 라코치 페렌츠 2세에게 파견했다. 샤를은 그가 봉기를 일으킨다면,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재정 및 군사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라코치 페렌츠 2세는 그 해 11월 1일 루이 14세에게 아래의 편지를 보냈다.
프랑스의 복지와 이익은 헝가리의 복지와 이익과 같습니다. 빈 궁정의 불법적 절차에 대한 불만이 심해지고 있으며, 프랑스가 헝가리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지 않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서신을 가져가던 장교가 도중에 배신해 빈 궁정에 전달하고 말았다. 추종자들은 속히 탈출하라고 권했지만, 병에 걸린 샤를로테 아말리를 놔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며 거부했다. 결국 1701년 4월 18일에 긴급 체포된 뒤 에페르헤스로 이송된 후 커셔, 미슈콜츠, 부더 및 모손마자로바르를 거쳐 비너노이슈타트 성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신사들로 이뤄진 임시 재판소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의 아내 샤를로테 아말리는 즉시 빈으로 가서 남편을 용서해달라고 청원했고, 예수회도 레오폴트 1세에게 그를 용서해달라고 청했다. 이에 레오폴트 1세가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고심하던 11월 7일 밤, 추종자들이 기병 제복을 입은 채 비너노이슈타트 성으로 잠입해 간수들을 제압한 후 라코치 페렌츠 2세를 구출했다. 그 후 라코치 페렌츠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로 피신한 뒤, 자기 친척이자 폴란드 원수의 아내인 엘즈비에타 루보미르스카의 궁정에 숨었다.

그 후 프랑스 궁정과 연락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라코치 페렌츠 2세는 1703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한 뒤 대부분의 제국군이 헝가리에서 라인 강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기회를 잡았다. 먼저 문카치에서 쿠루츠 무리가 봉기를 일으킨 뒤 그를 지도자로 추대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인 뒤 5월 12일 베르체니 미클로시와 함께 헝가리 귀족과 비귀족 시민들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의 압제에 맞서 전쟁을 일으키길 촉구하는 브레즈나 선언을 반포했다.
우리는 모든 참된 헝가리인, 애국자, 우리 사랑스러운 조국의 옛 영광스러운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 교회와 세속, 고귀함과 이방인, 무기를 들고 고향에 거주하는 참된 헝가리인들이 되기를 하느님에게 기원한다. 지금까지 헝가리에서 신과 정의에 반하여 불법적으로 통치하고 불가능한 방법으로 모든 질서를 탄압하고 분할에 대한 괴롭힘과 무능함을 억압해 온 외국의 잔인함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헝가리인일 수 없다. 우리는 세금, 자유법 위반, 국가와 자유에 대한 경멸, 이미 발 아래 놓인 사람들에 대한 경멸을 이해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머물고 질서를 혐오하지 않고 나라를 신뢰하며 가난의 완전한 비참함을 바꾸려고 약탈하는 것을 미리 단호히 금지한다. 개별적으로든, 조직으로든, 군대와 함께든,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인, 교회, 회랑, 회랑, 귀족 주민, 귀족 집, 성, 여행자, 상인을 방해하지 말고, 오히려 윗사람에게 주어진 방법과 전달받은 방법에 따라 원수를 찾고, 그들 자신과 나라의 유익을 위해 조용하고 경건한 한마음으로 모든 일에 참여하라!

브레즈나 선언문은 5월 17일 폴란드와 헝가리 국경지대에 있는 타르파 마을에 이르렀고, 얼마 후 헝가리 각지에 전파되었다. 이후 에제 타마슈(Esze Tamás, 1666 ~ 1708)이 이끄는 쿠루츠군이 가담했고, 베르체니 미클로시는 프랑스가 보내준 자금과 폴란드 용병 600명을 거느리고 라코치 페렌츠 2세에게 가담했다. 당시 그가 확보한 총병력은 3,000명에 달했다. 하지만 대다수 귀족들은 그의 봉기를 농노들의 폭동으로 간주하고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귀족들을 달래기 위해 그들의 재산이 약탈되는 일은 일절 없으며, 그들의 특권은 그대로 인정받을 것을 약속하는 내용의 바사로스나메니 선언을 반포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래도 초기에는 이렇다할 저항을 받지 않고 승승장구했고, 1703년 9월 말에 이르면 트란스다누비아(서부 헝가리) 대부분을 장악했다. 당시 프랑스군을 상대로 고전하던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라코치 페렌츠 2세를 물리칠 엄두를 못 냈고, 그와 협상을 이어갔다.

그러나 1704년 8월 13일, 블렌하임에서 프랑스군이 잉글랜드-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그 후 프랑스의 지원은 사실상 끊겼고, 그는 군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백성들에게 특별세를 부과했다간 민심이 급격히 이반할 수 있었기에, 그는 그 대신 많은 양의 구리 동전을 주조해 재정을 충당하려 애썼지만, 동전 유통이 잘 되지 않으면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그의 대의를 받드는 헝가리군 중 장비가 잘 갖춰진 정규군은 7,000명도 채 안 됐고, 민병대는 그 10배에 달했다. 적합한 지휘관, 장교, 말, 무기는 모두 부족했다. 여기에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한 크로아티아인, 루마니아인은 레오폴트 1세를 지지했고, 황제군은 상당수의 덴마크, 프로이센, 바덴 용병 부대를 헝가리에 배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독립을 쟁취하고 싶었던 헝가리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투쟁을 꿋꿋이 이어갔다.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다고 보고, 큰 전투는 최대한 피하고 유격전을 전개했다. 황제군은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헝가리인들은 황제군이 타 지역으로 이동할 때마다 다시 봉기를 일으키며 항전했다. 또한 일부 프랑스 장교들이 헝가리로 파견되어 헝가리 봉기군에게 군사 기술을 전수했다. 이렇듯 헝가리 봉기군이 저항을 꿋꿋이 이어가던 1705년 5월 15일, 레오폴트 1세가 사망하고 요제프 1세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 요제프 1세는 레오폴트 1세와는 달리 헝가리 봉기군과 평화 협약을 맺는 걸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이를 호기로 여기고 빈에 잇달아 사절을 파견해 협상을 이어갔다.

1705년 9월,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세체니에서 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에는 영주와 평민뿐만 아니라 교회 신자들도 많이 모였다. 그들은 라코치 페렌츠 2세가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등극하는 걸 확인했고, 위원 24명으로 구성된 평의회가 국가를 통치하도록 했다. 그의 군대는 갈수록 불어나서 1705년에는 100,000명에 달했으며, 52개 기병 연대와 31개 보병 연대로 구성되었다. 그는 이 압도적인 군대를 동원해 트란실바니아에서 합스부르크군을 몰아내려 했지만, 1705년 11월 11일 즈시보 전투에서 패배한 뒤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잉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의 주도로 헝가리 봉기군과 합스부르크 제국 사이의 평화 협상이 이어졌다. 양측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군사 상황에 맞게 협상안을 조정했지만, 양자 모두 트란실바니아를 포기하길 원하지 않았기에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707년 6월 13일, 오노드에서 소집된 의회는 라코치 페렌츠 2세의 제안을 받아들여 요제프 1세를 더 이상 헝가리 왕으로 섬기지 않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 왕이 되는 걸 금지하기로 결의했다. 그 후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자기가 헝가리 왕이 되는 대신 외국에서 왕이 되어줄 사람을 물색했다. 이는 그 사람이 속한 열강의 지원을 받아냄으로써 합스부르크 제국이 더 이상 헝가리를 공략하려는 엄두를 못 내게 하려는 계산이었다. 지원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루이 14세 마저 헝가리 봉기군과 직접적인 동맹을 맺기를 꺼렸다.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최후의 희망으로 러시아 제국에 의뢰해 봤지만, 차르 표트르 1세 대북방전쟁을 치르느라 정신 없었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708년 8월 3일, 라코치 페렌츠 2세는 트렌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말에서 떨어지며 정신을 잃었고, 쿠르츠 병사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해 대부분 전열에서 이탈했다. 이후 정신을 차린 라코치 페렌츠 2세는 군대가 와해된 걸 알게 되자 문카치 및 사트마르 주변 지역으로 후퇴했다. 이후 그곳에서 군대를 재건한 뒤 다시 맞서 싸우려 했지만, 무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민병대로 항전을 이어가는 건 무리였다. 이에 프랑스, ​​​​폴란드, 스웨덴 용병을 모집하여 군대를 어떻게든 재편했다. 1710년 1월 22일, 그는 롬하니와 바드케르트 시 인근 평원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황제군을 상대로 회전을 벌였다. 이때 스웨덴군이 오스트리아군 일부 부대를 포위하고 분쇄하자, 승리를 확신한 그는 장병들이 적진을 약탈하는 걸 허용했다. 그 사이에 전열을 재정비한 오스트리아군이 맹렬한 반격을 가해 스웨덴군을 물리쳤고, 전의를 상실한 그의 군대는 퇴각했다.

그 후 라코치 페렌츠 2세의 폴란드 용병대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남아있던 군대 역시 전염병에 시달렸다. 결국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요제프 1세에게 평화 협상을 간청했다. 요제프 1세는 친 합스부르크 헝가리 귀족이었던 팔피 야노시(Pálffy János 1664~1751)에게 그와 협상하도록 했다. 양자는 1710년 말부터 협상을 시작했고, 1711년 1월 31일 바야 성에서 팔피 야노시와 라코치 페렌츠 2세간의 면담이 이뤄졌다. 협상 도중인 1711년 4월 17일 요제프 1세가 사망한 후 빈에서 헝가리 반란군을 무력으로 소탕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협상이 파토나는 듯 했지만, 팔피 야노시가 협상을 도중에 끝내 버리고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간 헝가리인들의 분노에 직면하고 말 거라고 강력히 경고하자, 스페인에 있던 새 황제 카를 6세를 대신해 국정을 이끌던 황태후 엘레오노레 막달레네는 협상을 계속 이어가도록 했다.

하지만 라코치 페렌츠 2세는 팔피 야노시가 자기를 지켜주겠다고 설득하는 걸 믿을 수 없다고 여겼고, 설령 그가 약속을 지킨다고 해도 합스부르크 궁정이 나중에 자기를 해코지할 거라고 여겼다. 결국 그는 카로이 산도르(Károlyi Sándor 1669~1743)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떠났다. 이후 카로이 산도르가 팔피 야노시와 협상을 이어간 끝에, 1711년 4월 29일 사트마르(Sathmar)[4]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합스부르크 제국은 라코치 페렌츠 2세와 반란군을 사면했고, 3주 안에 충성 맹세를 하면 재산을 지킬 수 있으며, 만약 합스부르크 제국 치하에 있고 싶지 않다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떠날 수 있었다. 4월 30일, 카로이 산드로는 반란군 12,000명과 함께 황제군에 무기를 반납했다. 이리하여 헝가리 봉기는 진압되었다.

그 후 라코치 페렌츠 2세는 한동안 폴란드에 머물면서 자기가 헝가리 공으로 복위하는 걸 도와주길 희망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1712년 11월 16일 잉글랜드로 향했다. 그러나 앤 여왕으로부터 입국을 불허한다는 통보를 받자 프랑스로 방향을 돌려 1713년 디에프(Dieppe)에 상륙했다. 그 해 4월 27일, 루이 14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그를 위해 헌신했음을 강조하며, 합스부르크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을 때 헝가리를 잊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1713년과 1714년에 위트레흐트와 라슈타트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라코치 페렌츠 2세나 헝가리는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래도 프랑스 궁정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1715년 9월 1일 루이 14세가 사망하자 더 이상 프랑스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여겼다.

1717년, 합스부르크 제국과 전쟁을 치르던 오스만 제국 파디샤 아흐메트 3세가 그에게 밀사를 보내 군사 지원과 250만 골드를 지원할 테니 헝가리로 가서 봉기를 일으키라고 권유했다.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40명의 호위대를 이끌고 출항해 10월 10일 겔리볼루에 상륙했다. 이후 쿠루츠를 선동해 봉기를 일으키려 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1718년 7월 21일 파사로비츠 조약이 체결된 뒤, 오스트리아 특사는 오스만 제국에 망명한 인사들을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오스만 궁정은 파디샤의 명예와 쿠란의 교리를 언급하면서, 그러한 부정직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테키르다 지방의 로도스토로 이송된 뒤, 추종자들과 함께 그곳에 집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이곳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매일 미사를 드렸고, 아침에는 글을 쓰고 읽었으며, 오후에는 가구를 뚫고 조각하고 개조했다. 가끔 사냥하러 가거나 새로 합류한 동포와 회포를 푸는 것 외에는 수도자같은 삶을 살았다. 1735년 4월 8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오스만 대재상과 코스탄티니예 주재 프랑스 대사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가 죽은 후에도 자기 가족과 동료들을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유해는 로도스토에 있는 정교회 성당인 그로스부아 성당의 카말두스 수도원 묘지 정원에 묻혔으며, 그 위에는 라틴어로 아래의 문구가 새겨졌다.
이 수도원의 묘지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왕자이자 트란실바니아의 왕자이자 헝가리 왕국 일부의 영주이자 세켈리스 백작인 라코치 페렌츠가 묻혔다. 삶의 다양한 우여곡절을 통한 섭리는 그의 생애 60세인 1735년 4월 8일 보스포러스 해협 옆 로도스토에서 주님의 품에 안식했다.

1735년 7월 6일, 그의 충실한 시종이었던 마이크스 켈레멘은 오스만 궁정의 허가를 받은 뒤 그의 유해를 코스탄티니예로 데려간 뒤 예수회에 넘겼고, 예수회는 그가 유언장에서 소망한 대로 코스탄티니예 갈라타 지구의 성 베네딕토 교회에 안장된 어머니 옐레나 즈린스카의 묘비 옆에 안장되었다. 이후 라자르 선교단은 예수회로부터 성 베네딕토 교회의 관리권을 넘겨받았다. 헝가리 왕국 대타협으로 주권을 되찾은 이후인 1906년, 어머니 옐레나 즈린스카와 함께 커셔의 성 에르제베트 대성당(Szent Erzsébet-dóm)[5]으로 이장되었다.

3. 가족

4. 여담

파일:attachment/포린트/forint212.jpg
헝가리 500 포린트 지폐의 인물이다.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Hősök tere) 14인의 동상 위인 중 1명이다.

헝가리 독립 정신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헝가리를 여행하다보면 그의 동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6]
[1] 슬로바키아 보르샤(Borša). [2] 크로아티아인이나 보통은 헝가리어인 즈리니 일로너(Zrínyi Ilona)로 더 잘 알려져있다. [3] 우크라이나 무카체보. [4] 현 루마니아 사투마레. [5] 슬로바키아어로는 성 알쥬베티 대성당(Dóm svätej Alžbety). [6] 당장 부다페스트만 하더라도 영웅 광장 외에도 헝가리 국회의사당 앞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