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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11:06:24

라코치 페렌츠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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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헝가리의 잡지 물트코르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명단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마차시 1세 무명용사 어틸러 요제프 라코치 페렌츠 2세 센트죄르지 얼베르트
6위 7위 8위 9위
민트센티 요제프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라슬로 1세 코슈트 러요시 쾨뢰시 초마 샨도르
9위 10위
후녀디 야노시 퍼프 라슬로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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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페렌츠 2세
II. Rákóczi Ferenc
파일:II._Rákóczi_Ferenc_Mányoki.jpg
이름 라코치 페렌츠
(Rákóczi Ferenc)
출생 1676년 3월 27일
헝가리 왕국 보르시
사망 1735년 4월 8일 (향년 59세)
오스만 제국 테키르다
재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작
1704년 ~ 1711년
배우자 헤센반프리트의 샤를로테 아말리
(1694년 결혼 / 1722년 사망)
자녀 리포트, 요제프, 죄르지, 셔롤터
아버지 라코치 페렌츠 1세
어머니 옐레나 즈린스키
형제 죄르지, 율리언너
서명 파일:라코치 페렌츠 2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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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르데이 공국 헝가리인 공작이자 헝가리의 독립 운동가.

2. 생애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 산하 헝가리 왕국 영토였던 보르시(Borsi)[1] 태생으로 부친은 에르데이 공국의 라코치 페렌츠 1세(I. Rákóczi Ferenc 1645~1676), 모친은 크로아티아 왕국의 명문 귀족 가문인 즈린스키 가문 출신의 옐레나 즈린스카(Jelena Zrinska 1643~1703)[2]이다. 부계인 라코치 가문은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도 헝가리인의 자치가 보장되었던 에르데이 공국 군주 작위를 역임한 옛 헝가리 왕국 동부 지역의 명문가였다. 생후 4개월만에 부친이 급사하는 바람에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1682년 어머니가 오늘날 슬로바키아에 해당하는 상 헝가리 지역의 귀족인 퇴쾨이 임레(Thököly Imre 1657~1705)와 재혼했다. 퇴쾨이 임레의 목표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의 헝가리 해방이었기 때문에 어린 라코치 페렌츠 2세의 교육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어린 그는 퇴쾨이 임레로부터 반 합스부르크와 헝가리 독립에 대한 의지를 이어받았다. 1683년 퇴쾨이 임레가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메흐메트 4세와 대 와지르 카라 무스타파 파샤(Merzifonlu Kara Mustafa Paşa 1634~1683)에게 헝가리의 독립을 요청하면서 제2차 빈 공방전이 발생했다. 이 함락되기 바로 직전 폴란드-리투아니아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끌고 온 가톨릭 동맹군이 도착하면서 제2차 빈 공방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어서 발생한 대 튀르크 전쟁에서 퇴쾨이 임레는 수세에 몰렸고, 어머니는 가족들을 데리고 문카치(Munkács)[3]의 팔라노크 성에서 항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3년 동안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보급이 한계에 다다르자 1688년 결국 투항했고, 어린 라코치와 형제자매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레오폴트 1세의 후견을 명목으로 빈으로 끌려가 사실상의 연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레오폴트 1세는 라코치 가문의 재산을 돌려주었으나 라코치 형제들을 합스부르크 가문이 동군연합으로 다스리는 또다른 국가인 보헤미아 왕국에 있는 예수회대학에 다니면서 오스트리아식 교육을 받게 했다. 1694년 헝가리로 돌아온 그는 헤센-반프리트 가문 방백 카를의 딸 샤를로테 아말리에(Charlotte Amalie von Hessen-Wanfried 1679~1722)와 결혼했으며 합스부르크 헝가리에서도 부유하고 중요한 귀족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한편 퇴쾨이 임레는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이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넘겨주면서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고, 어머니 옐레나 즈린스카도 퇴쾨이 임레를 따라 오스만 제국으로 떠나면서 양아버지, 친어머니와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반 오스트리아 전쟁을 거치며 자란 그는 헝가리 귀족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면서 헝가리 민족운동의 대의에 관한 신념을 갖게 되었으며, 마침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동료 귀족들과 함께 프랑스 왕국 루이 14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한 중재자의 배신으로 투옥되었다가 감옥을 탈출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1703년에 다시 돌아와 쿠루츠 봉기로 알려진 농민반란을 이끌었으며 초기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듬해 블렌하임에서 프랑스가 잉글랜드-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프랑스의 지원은 사실상 끊겼다.

그후 헝가리에서의 싸움은 계속되었으나 루마니아인 농민병을 이끈 친 합스부르크 헝가리 귀족들에게 막혀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심지어 1708년 트렌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라코치 페렌츠 2세는 말에서 떨어지며 정신을 잃었고, 쿠르츠 병사들은 그가 도망쳤다고 생각해 대부분 전열에서 이탈했다. 친 합스부르크 헝가리 귀족이었던 팔피 야노시(Pálffy János 1664~1751)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을수 없다 생각한 라코치 페렌츠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망명했고, 결국 그와 함께 저항했던 카로이 산도르(Károlyi Sándor 1669~1743)가 버티지 못하고 1711년 4월 29일 자트마르(Sathmar)[4]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하며 항복하며 쿠루츠 봉기는 종결되었다.

라코치 페렌츠 2세는 그단스크와 프랑스 디에프(Dieppe)를 거쳐 오스만 제국 겔리볼루로 망명하였으며 테키르다에서 말년을 보내다 사망했다. 유해는 코스탄티니예 갈라타 지구에 매장되었다가 헝가리 왕국 대타협으로 주권을 되찾은 이후인 1906년 커셔의 성 에르제베트 대성당(Szent Erzsébet-dóm)[5]으로 이장되었다.

3. 여담

헝가리 500 포린트 지폐의 인물이다.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Hősök tere) 14인의 동상 위인 중 1명이다.

헝가리 독립 정신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헝가리를 여행하다보면 그의 동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6]
[1] 슬로바키아 보르샤(Borša). [2] 크로아티아인이나 보통은 헝가리어인 즈리니 일로너(Zrínyi Ilona)로 더 잘 알려져있다. [3] 우크라이나 무카체보. [4] 현 루마니아 사투마레. [5] 슬로바키아어로는 성 알쥬베티 대성당(Dóm svätej Alžbety). [6] 당장 부다페스트만 하더라도 영웅 광장 외에도 헝가리 국회의사당 앞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