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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3 00:02:36

루이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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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0BF><colcolor=#000> 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제6대 국왕
루이 11세
Louis XI
파일:Louis XI(1423-1483).jpg
왕호 루이 11세 (Louis XI)
출생 1423년 7월 3일
프랑스 왕국 베리 부르주
사망 1483년 8월 30일 (향년 60세)
프랑스 왕국 플레시스레투르 성
재위 프랑스 왕국의 국왕
1461년 7월 22일 ~ 1483년 8월 30일
배우자 스코틀랜트의 마거릿 (1436년 결혼 / 1445년 사망)
사보이아의 카를로타[1] (1451년 결혼)
자녀 안, 잔, 샤를 8세
아버지 샤를 7세
어머니 앙주의 마리
형제 라드공드, 카트린, 욜랑드[2], 잔, 마들렌, 샤를
서명 파일:루이 11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도팽으로서의 활동2.3. 프랑스 축출과 귀환2.4. 프랑스 국왕
2.4.1. 아라곤 내전 개입2.4.2. 공익 연맹과의 대결2.4.3. 용담공 샤를과의 갈등2.4.4. 대영주들을 제압하다
2.5. 말년
3. 가족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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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 왕조의 제6대 왕이며 샤를 7세의 아들이다. 귀족들과 형제들의 저항을 극복하고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반을 닦았다.

2. 생애

2.1. 초년기

1423년 7월 3일 프랑수 왕국 베리 공국의 부르주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와 앙주의 마리[3]의 장남으로 출생한 직후 도팽에 선임되었고, 부르주의 생테티엔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형제로 라드공드[4], 카트린[5], 욜랑드[6], 잔[7], 마들렌[8], 샤를[9]이 있었다.

루이는 어린 시절 대모인 카트린 드 릴부샤르의 양육을 받았으며, 대부는 10촌 할아버지뻘의[10] 방계 왕족인 알랑송 공작 장 2세 달랑송이었다. 그가 태어날 당시 샤를 7세의 입지는 무척 위태로웠다. 그가 출생한 지 몇 주 후인 1423년 7월 31일, 프랑스군은 크라방 전투에서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에게 참패했고, 그 직후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이 부르주 인근을 약탈했다. 샤를 7세는 안전을 위해 아들을 로슈 성으로 보내야 했다. 6살 때부터 파리 대학 총장이자 신학자인 장 르 샤를리에 드 제르송으로부터 법학을 익혔고, 또다른 신학자인 장 마요리스로부터 신학, 라틴어, 역사, 수학 등을 익혔다. 그 외에도 여러 우수한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으면서 통치자로서 익혀야 할 지식을 함양했다.

10살이던 1433년부터 앙부이즈 성에서 어머니 및 누이들과 함께 지냈다. 1436년 6월 24일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의 딸인 스코틀랜드의 마거릿과 결혼했다.[11] 이후 프랑스의 도팽으로서 주민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기 위해 리옹과 비엔을 여행했다.

2.2. 도팽으로서의 활동

1437년 샤토랑동 공방전을 이끌어 공략에 성공했으며, 아버지와 함께 최근에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공략한 파리에 입성했다. 1439년 봄, 샤를 7세에 의해 랑그독의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아버지로부터 어떠한 돈이나 사람을 받지 못했고, 오직 고문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만 부여받았다. 이에 루이는 고문들을 고른 뒤 랑그독 장군 및 귀족들과 협상한 끝에 랑그독을 통치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 1439년 12월 푸아투 보안관에 선임되었지만, 이번에는 실질적인 의사 결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렇듯 자기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주지 않는 아버지에게 깊은 불만을 품은 루이는 1440년 샤를 7세의 왕권 강화 및 사병 해체 정잭에 반감을 품은 알랑송 공작 장 2세 달랑송, 부르봉 공작 샤를 1세 드 부르봉,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 장 드 뒤누아,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 등과 함께 프라그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샤를 7세가 재빨리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앞세워 진압에 나서자, 병사들이 왕에게 맞서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흩어지는 바람에 실패했다. 결국 루이는 반란에 참여했던 귀족들과 함께 항복했고, 샤를 7세는 아들을 용서했다.

1441년 퐁투아즈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1443년 디에프 공방전에도 참여했다. 이때 그는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으로부터 디에프를 구출한 뒤 성모 마리아에게 승리에 감사를 표한 후 부상병들을 구출한 이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얼마 후, 자기 딸 이자벨을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와 결혼시키려는 등 불온한 행보를 보이는 아르마냐크 백작 장 4세 다르마냐크를 응징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어 군대를 이끌고 릴주르댕으로 진군했다. 장 4세는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했고 카르카손 감옥에 수감된 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루이는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 사보이아 공작 루도비코, 알랑송 공작 장 2세 달랑송,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도를레앙,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드 푸아, 멘 백작 샤를 4세,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함께 장 4세를 용서해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한 끝에 장 4세를 사면하겠다는 왕명을 받아냈다.

1444년 칙령군(Compagnies d'ordonnance) 지휘관을 맡은 루이는 샤를 7세의 동맹인 오스트리아 공작 지기스문트의 요청에 따라 스위스 칸톤에 맞서는 임무를 맡았다. 그해 8월 19일 몽벨리아르에 도착한 그의 군대는 도피뉴 상인들이 라인강을 횡단할 때의 요충지인 바젤을 목표로 삼았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 대립교황 펠릭스 5세를 옹립한 공의회가 열린 바젤로 진군하는 루이를 '교회의 수호자'로 지명했다. 그해 8월 26일, 루이는 비르스 전투에서 스위스군 1,500명과 맞붙어 섬멸했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고 바젤 공략을 취소하고 물러났다. 다만 스위스군은 프랑스군의 압박에 위협을 느끼고 취리히 포위를 중단했다.

1444년 9월 5일, 루이는 엔시스하임에 정착한 뒤 스위스 연방과 협상을 시작했으며, 9월 13일 바젤, 베른, 졸로투른과 휴전을 맺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반란을 지원했던 알자스 북부 도시들에 대한 진압 작전에 착수해 알자스 상류 지역을 조금씩 장악하고 통제했다. 그러나 1444년 10월 7일 담바흐를 포위하던 중 무릎에 화살을 맞아 엔시스하임으로 귀환했다. 그해 10월 28일, 루이는 엔시스하임 평화 협약에 서명했다.

그 후 루이는 스위스 연방과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장차 스위스 연방과 동맹을 맺고 알자스 지방에 대한 프랑스의 이권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루이의 행보는 신성 로마 제국 정계를 긴장시켰고, 프랑스 칙령군이 주둔지 주변 일대에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면서 현지민들의 분노가 갈수록 끓어올랐다. 샤를 7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이러다가 신성 로마 제국과 무력 충돌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 1445년 2월 아들을 소환했고, 루이가 점령한 성채들에서 군대를 모두 철수시켰다.

루이의 칙령군은 스위스에서 뛰어난 군사 활동을 보여줬지만, 프랑스와 알자스를 왕복하는 과정에서 그 사이에 끼인 부르고뉴 영지가 약탈당했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가 항의하자, 샤를 7세는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이 재현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1445년 5~6월 샬롱쉬르마른에서 선량공 필리프와 협상했고, 아들에게 1435년에 체결되었던 아라스 조약에 서명해 부르고뉴 공국의 이권을 존중하도록 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45년 5월 26일 대립교황을 세운 바젤 등을 응징한 것에 보답하고자 루이에게 교황령의 수호자 칭호를 수여했다.

이후 루이는 아들이 또다시 자기 뜻과는 무관하게 행동할 것을 경계한 샤를 7세에 의해 뚜렷한 정계 활동을 하지 못하고 궁궐에 조용히 지내야 했다. 루이는 아버지의 애첩인 아녜스 소렐에게 아르마냐크 백작에게 붙잡힌 순결한 수잔의 이야기를 묘사한 태피스트리 6개를 건넸고, 아버지의 총신인 피에르 드 브레제에게도 라인산 와인 25통을 제공함으로써, 두 사람이 아버지의 뜻을 돌려줘서 자신을 중용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별다른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샤를 7세의 총애를 받던 인사들 중 오직 자크 쾨르만이 상업에 관심이 많았던 루이와 친하게 지냈다. 루이는 제노바 공화국에 대한 프랑스의 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원정을 벌이겠다고 아버지에게 제안했지만 기각되었고, 랑그독 보안관으로 재차 부임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으나 역시 거부되었다.

루이는 깊은 환멸을 느끼고, 아버지의 권력을 불안정하게 하기 위해 멘 백작 샤를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루이의 계획은 1446년 9월 앙투안 드 샤반에게 발각되어 왕에게 전해졌고, 루이는 쓸데없는 짓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루이는 이에 분노했고, 중간에서 아버지와 자신을 이간질하는 무리가 있다고 확신했다. 특히 아버지의 애첩 아녜스 소렐이 자기 자식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자신을 음해하려 든다고 의심했다. 급기야 1446년 12월, 루이는 단검을 들고 아녜스 소렐을 해치려 했지만 실패했고, 아녜스는 가까스로 왕의 거처로 도망쳤다. 샤를 7세는 이 일로 크게 분노해 루이를 궁정에서 추방했다. 루이는 도피녜로 피신했고, 처음에는 로망쉬르이제르에서, 그 다음에는 그르노블로 들어간 뒤 도피녜 정부를 이끌었다.

루이는 그르노블의 생안드레 궁전에 자리를 잡고 9년간 통치를 행사했다. 그의 엄격한 통치 하에 도피네는 이전부터 잘 관리되었고, 그르노블 내 외국 장인과 유대인 유대인들은 세금 혜택을 받고 상업 활동을 왕성하게 해 지역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1452년 발랑스 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학문 발전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한 루이는 고문인 마티유 토마생에게 도피네의 고대 권리, 명예 및 특권에 대한 방대한 목록을 작성해 자신의 주권의 법적 기반을 확립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도피네 지방에서 보 복음주의를 신봉하면서 종교재판에 맞서던 발루이즈 농민들을 변호해주기도 했다. 한편, 루이는 겉으로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사죄의 뜻을 밝히고 존경심이 가득한 편지를 연이어 보냈다. 이에 샤를 7세는 아들이 도피녜에서 계속 군림하도록 내버려뒀다.

2.3. 프랑스 축출과 귀환

루이는 도피녜에서 알프스 산맥 양쪽에 광대한 영지를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고 사보이아 공작 루도비코와 동맹을 맺고, 루도비코의 딸 카를로타와 결혼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음모를 지속했고, 아버지가 정부 아녜스 소롈에게 푹 빠져서 도덕적으로 너무나 해이해졌고 방탕을 일삼고 있다고 비방하는 선전 활동을 주변국에 퍼뜨렸다. 1456년, 샤를 7세는 루이가 도피네에서 자신에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확신하고 앙투안 드 샤반 앙드레 드 라발몽모랑시에게 아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두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루이는 급히 그리노블에서 피신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이런 맹세를 남겼다고 한다.
"나를 내 집에서 쫓아낸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

루이는 1456년 8월 30일 프랑슈콩테로 피신한 뒤, 다시 부르고뉴 공국의 루뱅으로 도피했다. 이후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브뤼셀에서 20km 떨어진 작은 성 제나프를 거주지로 삼고 연간 연금 36,000 파운드를 받다가 나중에는 48,000 파운드를 받았다. 일설에 따르면, 아들이 부르고뉴 공국으로 도주했다는 소식을 접한 샤를 7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르고뉴 출신의 사촌이 집에 여우 한 마리를 사육했군. 그 여우는 언젠가 그의 닭을 잡아먹겠지."

1458년, 샤를 7세는 다리에 생긴 궤양이 심해지면서 열병에 시달렸다. 그는 부르고뉴에 망명 생활 중이던 아들 루이를 불러들였지만, 루이는 함정일 거라 의심하고 거부했다. 일설에 따르면, 루이는 점성술사를 불러 아버지가 죽을 정확한 날짜와 시각을 예언하게 했다고 한다. 1461년 7월경, 병들고 지친 왕은 자신이 아들에게 충성하는 반역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가 입에 농양이 생기더니 너무 커져서 생애 마지막 주 동안 음식이나 물을 삼킬 수 없었다. 결국 1461년 7월 22일 므욍쉬르예브르에서 병사했다.

그때까지 부르고뉴에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루이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부르고뉴군의 호위를 받으며 프랑스로 귀환했고, 1461년 8월 15일 랭스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한 뒤 8월 30일 파리에 입성했다. 그 후 루이는 지난날 자신을 체포하려 했던 앙투안과 앙드레 등 아버지의 총신들을 모조리 해임하고, 도피네 시절부터 자신을 따랐던 측근들을 그 자리에 앉혔다. 다만 피에르 드 브레제는 잠시 옥고를 치르다가 그의 군사적 재능을 아까워한 루이 11세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게 한 뒤 1462년 초에 석방한 후 중용했다.

2.4. 프랑스 국왕

2.4.1. 아라곤 내전 개입

루이 11세가 왕위에 오를 무렵, 아라곤 왕국에서는 추안 2세와 카탈루냐 반란군간의 내전이 격화되고 있었다. 추안 2세는 아라곤, 발렌시아, 시칠리아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낸 뒤 카탈루냐 정벌에 나섰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추안 2세는 외세를 끌여들어 반란을 진압하기로 했고, 루이 11세는 이 때를 틈타 아라곤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했다. 1462년 초, 루이 11세는 추안 2세의 사위인 푸아 백작 가스통 4세의 중재하에 추안 2세와 협약을 맺었다. 추안 2세는 프랑스로부터 나바라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가스통 4세는 그의 후계자로서 나바라를 통치할 권리가 주어졌다. 그 대신, 루이 11세는 추안 2세로부터 루시용과 세르당을 받아냈다.

한편, 카탈루냐 반란군은 팔라스 소비라 백작 로제 3세의 지휘하에 후아나 엔리케스 왕비와 페르난도 왕자를 지로나 요새에 몰아넣고 공성전을 벌였다. 하지만 후아나 왕비가 철저히 방어해 공략에 실패했고, 4개월 후 프랑스군이 인근에 당도하자 곧바로 철수했다. 카탈루냐인들은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에게 바르셀로나 백작에 추대할 테니 구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엔리케 4세는 굳이 프랑스와 싸울 이유를 못 느끼고 개입하지 않았다. 1463년, 카탈루냐인들은 코임브라 공작 페드로를 왕으로 추대했다. 페드로는 카탈루냐 대부분과 바르셀로나, 아라곤 일부 지역을 다스리며 후안 2세에 대적했다. 여기에 프랑스 왕국과 대립하던 부르고뉴 공국의 이사벨라가 프랑스군과 맞서는 카탈루냐인들을 지원했다. 루이 11세는 상황이 복잡해지자 추안 2세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을 중단했다.

2.4.2. 공익 연맹과의 대결

1463년, 루이 11세는 1435년 아라스 조약 때 부르고뉴 공작에게 양도되었던 솜 마을을 다시 매입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샤롤레 백작이자 부르고뉴 공작 후계자인 용담공 샤를은 이에 반감을 품고 다른 대귀족들과 연합해 루이 11세와 대결하기로 했다. 당시 루이 11세는 왕권 강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대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그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대귀족들이 향유하던 명예직을 상당수 없앴으며, 여러 마을을 여행하면서 지방 정부를 조사하고, 박람회를 열고, 무역 규정을 장려했다. 여기에 솜 마을을 400,000 에퀴로 매입한 뒤 이를 메우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각지에 특별세를 매겼다. 대귀족들은 루이 11세의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자치권이 제약당하고 막대한 돈을 바쳐야 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끝에, 루이 11세를 폐위하고 그의 형제이자 베리 공작 샤를을 새 국왕으로 옹립하기로 마음먹었다.

1465년 3월 4일, 샤를은 음모에 가담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루이 11세의 체포령을 피해 브르타뉴로 피신한 후 3월 10일 "무질서하고 불행한 정부"를 바로잡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반포했다. 이에 샤롤레 백작 용담공 샤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로렌 공작 장 2세, 느무르 공작 및 라 마르쉐 백작 자크 다르마냐크느무르, 아르마냐크 백작 장 5세 다르마냐크, 생폴 백작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 뒤누아 백작 장 드 뒤누아, 도매르탱 백작 앙투안 드 샤반, 알브레 백작 샤를 2세 달브레, 피에르 당부아즈, 앙드레 드 라발몽모랑시 등 프랑스 대귀족들이 대거 가담했으며, 클레베 공작 요한 1세와 라인강 팔라티노 백작 프리드리히 1세 등 외부 세력도 가담했다.

루이 11세는 이에 대응해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드 푸아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냈고,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15,000 가량의 병력을 모집한 그는 1465년 6월 부르봉 공국으로 진격해 물랭을 공략했고, 부르봉 가문은 즉시 국왕에게 복종했다. 얼마 후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가 이끄는 부르고뉴군과 용담공 샤를이 이끄는 부르고뉴군이 파리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이들이 생드니에서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하기로 마음먹었다. 1465년 7월 16일, 루이 11세는 몽레리에서 용담공 샤를이 이끄는 14,000명의 군대와 맞붙었다.

이후 벌어진 첫번째 교전에서, 부르고뉴 선봉대 지휘관인 생폴 백작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 피에르 드 브레제가 이끄는 왕실군 선봉대를 격파한 뒤 그에게 전령을 보내 승리를 알렸다. 이후 생폴 백작의 기병들은 전리품을 확보하거나 몸값을 받을 수 있는 포로를 잡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말에서 내려 이리저리 흩어졌다. 이때 피에르 드 브레제가 병사들을 수습한 뒤 반격에 착수했고, 생폴 백작의 기병대는 순식간에 압도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피에르 드 브레제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부르고뉴 본대로 쳐들어갔다. 당시 샤를은 생폴 백작이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을 전하자 안심하고 천천히 진군하고 있었다. 피에르 드 브레제는 방심하고 있던 적 본대를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고, 부르고뉴군은 여러 분대로 분열되어 일부는 후퇴하고 다른 일부는 전장을 완전히 이탈했다. 그러나 피에르 드 브레제는 적을 추격하던 중 전사했고, 지휘관이 사라진 프랑스 기병대는 부르고뉴 수송대를 약탈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

그 사이, 생폴 백작이 군대를 수습한 뒤 반격을 가해 이들을 몰아냈다. 이후 본대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한 루이 11세의 프랑스군과 부르고뉴군이 본격적으로 맞붙었는데, 좌익 부대를 이끌고 있던 루이 11세의 삼촌인 멘 백작 샤를 3세가 용담공 샤를이 몸소 이끄는 부르고뉴 우익 부대의 기세에 짓눌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전체 병력의 1/3과 함께 도주했다. 용담공 샤를이 멘 백작의 군대를 추격하는 사이, 루이 11세는 공작이 떠나고 없는 부르고뉴군과 혈투를 치렀다. 이때 루이 11세가 타고 다니던 말이 총에 맞는 바람에 왕이 쓰러지면서 왕실군이 한때 동요했지만, 루이 11세는 새 말을 타고 군대 대열을 돌며 독려해 혼란을 잠재웠다. 이후 부르고뉴군이 왕실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후퇴했지만, 루이 11세는 후퇴하는 적을 쫓지 않고 군대를 재편성한 뒤 몽레리 고지로 철수한 뒤 멘 백작이 도망친 남쪽으로 기병대를 보내 멘 백작에게 자신과 합류하라고 알리게 했다.

한편, 용담공 샤를은 부관들의 연이은 간언에 굴복해 멘 백작에 대한 추격을 중단하고 전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곧 자신의 다른 부대가 흩어졌으며, 왕실군이 몽레리 언덕에 자리잡은 걸 알게 되자, 부대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던 중 프랑스 기병대가 그를 도중에 습격하면서 기병전이 벌어졌는데, 샤를은 격투 도중에 칼에 맞아 목을 다쳤지만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7월 16일 밤 선량공 필리프의 사생아이자 주요 부르고뉴 장성인 앙투안 드 부르고뉴, 루이 드 뤽상부르가 이끄는 군대와 연합하면서 전투 현장에 부르고뉴군의 숫자가 훨씬 많아지자, 루이 11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능선을 따라 불을 피우게 한 뒤 코르베유를 경유해 파리로 철수했다. 다음날 몽레리 고지로 진격한 부르고뉴군은 왕실군이 어젯밤에 철수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용담공 샤를은 자신이 전장을 장악했으므로 승리를 거뒀다고 선언했다. 플란데런 출신의 연대기 작가 필리프 드 코미네스에 따르면, 샤를은 몽레리 전투 후 자신의 탁월한 전술적 능력 덕분에 몽레리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확신해, 이후 어떤 조언도 듣기를 거부하고 자기 뜻만 밀어붙였다고 한다.

사흘 후 브르타뉴군, 로렌군과 합세한 용담공 샤를은 한달 후 파리를 포위했다. 그러나 몇 주 후 공익 연맹 측이 식량 부족에 시달린 데다 타 지역의 왕실군이 접근해오는 것에 압박감을 느낀 끝에, 그들은 루이 11세에게 평화 협상을 맺자고 요청했다. 루이 11세 역시 협상을 받아들였고, 양자는 1465년 10월 5일 콩플랑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공익 연맹 참가자들은 루이 11세를 국왕으로 계속 받들기로 했고, 루이 11세는 그들을 사면하기로 했다. 또한 루이 11세는 솜 마을을 부르고뉴 공국에 반환했고, 그 외에도 불로뉴, 긴, 로에, 페론, 몽디디에르를 내줬다. 또한 노르망디를 형제 샤를에게 양도하기로 했으며, 로렌 공작 장 2세는 무종, 생트므누, 네프샤토를 획득했고, 생폴 백작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은 프랑스 무관장에 선임되었으며, 부르봉 공작 장 2세는 동쉐리, 오베르뉴의 봉건권 및 랜스 300개, 그리고 100,000 크라운을 얻었고, 느무르 공작 자크 다르마냐크는 파리 및 일드프랑스의 행정권을 받았고, 장 5세 다르마냐크는 루에르그 일대의 여러 성들을 얻었다. 1465년 12월 23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프랑수아 2세와 캉 조약을 별도로 체결해, 몽모르와 에탕프를 넘기는 대가로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하지만 루이 11세는 이대로 공익연맹 가담자들에게 끌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먼저 공익연맹을 지원한 부아즈 가문을 벌하기 위해 피에르 당부아즈의 쇼몽 성을 파괴했다.[12] 1465년, 파리와 바스티유 감독관 샤를 드 믈룅은 드 라 리비에르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공익동맹의 지도자들과의 연결로 인한 유죄 판결을 받아, 1468년 앙들리에서 처형당했고 그의 재산은 몰수되어 앙투안 드 샤반에게 주어졌다. 1466년 노르망디 공작에 부임한 동생 샤를이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불화를 빚는 데다 노르망디 귀족들을 복종시키는 데 실패해 통치에 애를 먹자, 루이 11세는 왕실군을 파견해 노르망디를 순식간에 석권했다. 샤를은 브르타뉴 공국으로 도망친 뒤 프랑수아 2세와 화해했다. 1469년 9월 2일, 루이 11세는 군대를 일으켜 브르타뉴 공국을 침공해 앙센을 포위해 5일간의 공방전 끝에 9월 7일에 함락했다. 그 후 9월 10일에 교황청의 중제하에 프랑수아 2세와 동생 샤를로부터 "왕의 훌륭한 종이 되겠다"는 서명을 받아낸 뒤 두 사람을 사면하기로 한 앙센 협약을 체결했다.

2.4.3. 용담공 샤를과의 갈등

1467년 6월 15일 선량공 필리프가 사망한 뒤 부르고뉴 공작이 된 용담공 샤를 저지대 국가와 부르고뉴 본토를 완전히 연결하고, 오래전에 무너진 중프랑크 왕국을 부활시켜 국왕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행정기관과 법원을 개편하여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해 세수입을 대폭 늘린 후, 이를 발판삼아 군사력을 대대적으로 키웠다. 그는 부르고뉴 중기병, 플랑드르 중보병, 이탈리아 경무장 보병 및 석궁병, 독일 아커비저(arquebusier: 화승총병), 잉글랜드 장궁병 및 하마기사로 구성된 혼성군을 갖췄는데, 그 수는 30,000명에 달했다. 여기에 1470년대 초부터 대포로 무장한 포병대를 양성하여 적을 화력으로 압도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렇게 강화된 군대를 이끌고 1466년 리에주 전투와 1467년 브뤼템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잇따라 승리했다.

1468년, 샤를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의 여동생 마거릿과 결혼했다. 이후 에드워드 4세가 노르망디를 침공하도록 부추기고, 프랑스군이 노르망디를 방어하러 진격했을 때를 틈타 파리를 공격해 루이 11세를 압박해 부르고뉴국의 완전 독립을 받아들이게 하려 했다. 그러나 루이 11세의 지원을 받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반란을 일으켜 1469년 7월 에드워드 4세를 사로잡는 바람에,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루이 11세는 강력한 위세를 떨치는 용담공 샤를이 잉글랜드와 손잡으면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 여기고, 프랑스 추기경 장 드 라 발뤼를 파견해 용담공 샤를과 협상하도록 했다. 이에 용담공 샤를은 루이 11세를 페롱에 초대했고, 루이 11세는 즉시 소규모 호위대와 함께 페롱으로 향했다.

샤를은 페롱에서 루이 11세와 접견한 뒤 평화 협정을 맺는 대가로 솜 지역과 프랑스 영토에 대한 주권을 확인받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루이 11세가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협상이 거의 타결되는 듯 했으나, 샤를은 리에주가 프랑스 사절들의 부추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그는 루이 11세를 페롱에 감금한 뒤 협박을 가한 끝에 1468년 10월 14일에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평화 협약을 맺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이후 루이 11세를 대동한 채 리에주 토벌에 나서 1468년 10월 30일 밤에 600명의 용병대와 함께 리에주를 기습 공략한 뒤 철저히 약탈했다. 이 소식을 접한 라인강 연안 도시들은 자신들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교류를 하던 리에주를 동정했고, 샤를에 대한 반감을 품었다. 1468년 12월, 브뤼셀에서 페롱 조약이 최종적으로 발효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부르고뉴 공작은 1435년 아라스 조약과 1465년 콩플랑 조약의 유효성을 확인받는다.
2. 부르고뉴 공작은 아미앵 대표를 임명할 권리가 있다.
3. 부르고뉴 공작의 영지는 삼부회 관할권에서 분리된다.
4. 마코네 지역에 대한 삼부회의 항소권은 포기된다.
5. 샹파뉴와 브리는 프랑스 내 샤를의 영지로 주어진다.
6. 미래에 프랑스 왕이 아라스, 콩플랑, 페롱 조약을 위반하고 그 적용을 막거나 약속을 포기한다면, 프랑스 왕국의 모든 영토에 있는 그의 모든 신하는 왕관으로부터 해방되며, 부르고뉴 공작은 프랑스 왕의 후계자로 인정받는다.

샤를은 페롱 조약을 통해 강대한 권세를 확보했지만, 프랑스 왕을 모욕하고 포로로 가두기까지 한 일로 인해 루이 11세를 비롯한 프랑스 왕실의 반감을 샀다. 루이 11세는 기회만 되면 페롱 조약을 깨뜨리고 부르고뉴 공작과 맞서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파리로 귀환한 뒤 프랑스 추기경 장 드 라 발뤼가 용담공 샤를과 내통해 왕을 함정에 몰아넣은 혐의로 반역죄로 기소했고, 장 드 라 발뤼는 유죄 판결을 받고 여러 성을 전전하다가 로슈 성 지하감옥에서 11년간 사슬에 묶인 채 지내야 했다. 또한 1470년 12월 3일 앙부아즈에서 프랑스의 가장 강력한 영주, 고위 성직자, 군사 지도자로 구성된 삼부회를 소집해, 부르고뉴 공작이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노르망디 해안을 습격하라고 부추겼으며, 프랑스 본토를 침략할 태세를 보이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에 삼부회는 페롱 조약을 무효로 처리하기로 결의했다.

루이 11세가 페롱 조약을 무효로 처리했다는 소식을 접한 용담공 샤를은 프랑스 왕이 페롱 조약의 적용을 포기하면, 부르고뉴 공작은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협약 내용에 따라 프랑스를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1471년 1월, 그의 군대는 피카르디와 마코네에서 공세를 개시해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이에 프랑스군이 반격을 가해 피카르디를 침공하고 아미앵을 공략했다. 샤를은 루이 11세에 대항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동맹을 맺었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의 복위를 지원했다. 1471년 11월, 샤를은 페롱 조약에 포함된 '불이행 조약'에 따라 자신은 프랑스 왕의 종주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을 신의 권리에 의한 주권자라고 선언하고, 모든 영지를 통일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전환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샤파이어, 루비, 진주로 장식된 금 왕관을 특별히 제작하도록 했다.

1472년,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가 앙센 협약을 파기하고 용담공 샤를과 동맹을 맺었다. 루이 11세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그해 6월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브르타뉴로 진격했다. 프랑수아 2세는 용담공 샤를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샤를은 이에 부응해 피카르디를 전격 침공했다. 샤를이 이끄는 부르고뉴군은 네슬레 시를 공략한 뒤 그곳의 수비대장 프티 피카르를 교수형에 처했으며, 궁수들의 손을 자르거나 눈을 뽑거나 물에 빠뜨려 죽였고, 주민들을 대거 학살했고, 도시 전체를 방화했다. 네슬레 시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이와 몽디디에 시민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그 후 샤를은 1472년 6월 27일에 보베로 진군한 뒤 항복을 권했지만 거절당하자 7월 22일까지 공성전을 벌였지만 보베 수비대와 주민들의 처절한 저항에 가로막혀 큰 피해만 입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루이 11세가 급파한 구원군이 당도하자 보베 공략을 포기하고 피카르디로 철수했다. 이후 1472년 11월 3일, 샤를과 루이 11세는 새로운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1474년 7월 25일, 용담공 샤를은 프랑스 무관장을 역임하면서도 루이 11세에 대한 음모를 꾸미던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의 중재하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와 런던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두 사람은 루이 11세를 처단한 뒤 프랑스를 생폴 백작, 부르고뉴 공작, 브르타뉴 공작, 부르봉 공작, 느무르 공작, 멘 백작, 에드워드 4세의 주도하에 분할하기로 했다. 여기에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은 에드워드 4세에게 피카르디를 침공한다면 생캉탱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으며, 프랑스의 여러 거물을 음모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1475년 7월 4일, 에드워드 4세는 칼레에 11,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상륙했다. 그러나 정작 용담공 샤를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다른 영주들에게서도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에드워드 4세는 전쟁을 이어가봐야 소용없겠다고 판단하고 루이 11세와 회담을 가진 끝에 1475년 8월 29일 파퀴니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두 왕은 7년간 휴전을 맺고 자유 무역을 하기로 했으며, 루이 11세는 에드워드 4세에게 선불로 75,000 크라운을 지불하고 연간 50,000 크라운을 분할 납부하며, 에드워드 4세에게 구금된 폐위된 잉글랜드 왕비 앙주의 마르그리트의 몸값 50,000 크라운을 지불하기로 했다. 여기에 두 왕 중 한 왕이 반란에 직면하면 다른 왕이 이를 물리치기 위해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고,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성년이 되면 도팽 샤를과 결혼시키기로 했다.

파퀴니 평화 협약 소식을 접한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은 격분한 나머지 경솔하게도 에드워드 4세에게 "비겁하고 불명예스럽고 거지같은 왕"이라고 비난하는 서신을 보냈다. 에드워드 4세는 즉각 이 서신을 루이 11세에게 전달했다. 이에 루이 11세는 루이를 체포하기 위해 생캉탱으로 진군했고, 루이는 급히 몽스로 피신해 용담공 샤를의 보호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용담공 샤를은 그를 체포한 뒤 루이 11세에게 인도하기로 했다. 그렇게 파리로 보내진 루이는 바스티유 감옥에 갇혔고, 1475년 11월 26일부터 3주간 재판을 받았다. 그는 삼부회에서 자신이 영주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라고 호소했지만, 루이 11세는 프랑스의 적대국인 잉글랜드의 국왕과 손잡은 건 명백한 반역이라고 규탄했다. 결국 루이는 1475년 11월 27일 사형을 선고받았고, 12월 19일 파리 그레브 광장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유해는 생클레어 교회에 안장되었다.

용담공 샤를은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을 넘긴 대가로 생캉탱, 함, 보앵을 루이 11세로부터 넘겨받았고, 로렌 공국을 정복하는 사업을 단행하는 것 역시 암묵적인 동의를 받아냈다. 하지만 루이 11세는 은밀히 스위스 연맹에 자금을 보내주며 용담공 샤를과 대적하도록 부추겼고, 이 때문에 샤를은 로렌을 공략하던 중 스위스 연맹과 부르고뉴 전쟁을 치러야 했다.

2.4.4. 대영주들을 제압하다

1469년 8월 19일, 아르마냐크 백작 장 5세 다르마냐크는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드 푸아의 딸인 잔 드 푸아와 결혼해, 루이 11세가 자신을 칠 경우 공동으로 대적하기로 했다. 이에 경계심을 품은 루이 11세는 장 5세가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으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서신 한 장을 증거로 제시했다. 이후 담마르탱 백작 앙투안 드 샤반이 이끄는 군대가 레크투르 성으로 피신한 장 5세를 포위했다. 그는 왕에게 사절을 보내 그 편지는 위조되었다고 주장하려 했지만, 왕은 그의 사절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이후 레크투르 성이 몇 주만에 함락되자, 그는 아내 잔과 함께 간신히 탈출한 뒤 바스크 지방의 푸엔테라비아 시에 피신했다. 이후 루이 11세는 그가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모든 재산을 몰수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1472년 5월 28일, 루이 11세에 의해 기옌 공작에 선임되었던 형제 샤를이 사망했다. 샤를은 자기 영지를 장 5세 다르마냐크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즉시 기옌으로 가서 영지를 관리하려 했지만, 왕실군이 투입되자 항복하고, 토벌대 지휘관 피에르 드 보주로부터 파리로 가서 왕에게 용서를 구할 때까지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대로 가면 루이 11세가 자신을 살려줄 것 같지 않다고 여기고 도중에 방향을 틀었다. 1472년 10월 19일, 그는 레크투르 시를 급습해 내부의 호응에 힘입어 탈환하고 피에르 드 보주 및 장교들을 생포했다.

그 후 장 5세는 4개월간 왕실군의 공세로부터 레크투르 시를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1473년 3월 4일 아라스 주교 장 주프루아가 이끄는 군대에게 함락될 위기에 몰렸다. 이때 장 주프루아는 루이 11세가 장 5세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칙령을 내렸다고 전했고 장 5세는 이를 믿고 항복하기로 했다. 다음날 장 5세는 일전에 사로잡았던 포로들을 풀어주고 레크투르 성채를 왕의 부하들에게 넘겼다. 그러나 그해 3월 6일에 왕실군이 도시에 들어와 참혹한 학살을 자행했고 장 5세 역시 피살되었다. 이후 장 주프루아는 왕명을 어기고 살육을 자행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왕을 상대로 반기를 일으킨 페르피냥 시를 공략하는 대가로 사면받았다.

1474년, 앙주의 르네는 엑상프로방스로 은퇴한 뒤 외손자 르네 2세 드 로렌에게 바르를, 조카 샤를 4세에게는 앙주와 프로방스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장을 기술했다. 루이 11세는 이 정보를 입수한 뒤, 유언장이 집행되기 전에 앙주 공국을 회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순방이라는 명목으로 군대와 함께 앙주 공국의 수도인 앙제로 향한 뒤, 앙제 성에 수비대를 즉시 배치하고 기욤 드 세리세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뒤이어 바르 역시 무력으로 점령한 뒤, 르네에게 거액의 돈을 줄 테니 두 영지를 프랑스 국왕의 직할지로 삼는 것에 동의하라고 압박했다. 르네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루이 11세의 거센 압박에 끝내 굴복했다. 그 대신 앙주 공작들은 왕위 계승권이 있음을 인정받았고, 프로방스 합병은 르네가 사망할 때까지 연기되었다.

1475년 피퀴니 조약이 체결된 후, 루이 11세는 런던 탑에 갇혀 있던 앙주의 마르그리트를 석방하기 위해 50,000 크라운을 지불했다. 1479년 1월 29일 루앙으로 돌아온 마르그리트는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아버지 르네와 합류하기 전에 앙주 상속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프랑스 국왕이 앙주를 물려받는 걸 인정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하도록 강요받았다. 그 후 그녀는 앙제 성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482년 8월 25일에 사망했다. 르네가 1480년 7월 10일에 사망한 뒤, 르네의 조카 샤를 4세가 앙주 공작을 이어받았지만 자식을 보지 못한 채 1481년 사망했고, 앙주 공국은 프랑스 국왕의 직할지가 되었다.

1476년, 느무르 백작 자크 다르마냐크는 1472년에 사망한 기옌 공작 샤를, 피카르디 백국의 여러 귀족들, 사촌 장 5세 다르마냐크, 무관장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과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면서 루이 11세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는 고발을 받았다. 그해 2월 9일 오베르뉴의 칼랏 성에서 포위된 자크는 3월 9일 보주 영주 피에르 드 부르봉이 서명하고 왕의 승인을 받은 조약에 따라 모든 재산을 사위와 총독에게 양도하고 항복한 뒤 바스티유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 후 파리 의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1477년 8월 4일 파리 광장에서 참수되었다.

1477년 1월 5일, 부르고뉴 전쟁을 치르던 용담공 샤를이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다. 당시 용담공 샤를에게는 오직 외동딸 마리 드 부르고뉴만 있었다. 이에 루이 11세는 "신하가 후사 없이 죽었으니 영지를 회수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부르고뉴를 침공했고, 저지대 주민들을 선동해 당시 7살된 아들 샤를 8세와의 결혼을 거부한 마리를 겐트 성에 가두고 굶겨죽이려 했다. 이에 마리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외아들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심복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막시밀리안은 즉시 사비를 털어 1,200명의 기사를 동원하여 겐트로 가서 마리를 구출한 뒤 그녀와 결혼했다. 이후 루이 11세와 막시밀리안의 전쟁이 이어진 끝에, 1480년 8월 21일 휴전 협약이 체결되었다. 막시밀리안은 피카르디 프랑슈콩테를 제외한 부르고뉴 지방을 프랑스에게 넘기고 저지대 일대와 프랑슈콩테 일대를 아내에게 넘기는 것으로 정리했다.

1482년 3월 27일 마리 드 부르고뉴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자, 루이 11세는 이 때를 틈타 저지대 영주들을 선동하는 한편 피카르디와 프랑슈콩테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1482년 7월 28일 아르투아 전역을 확보한 루이 11세는 막시밀리안과 협상한 끝에 1482년 12월 23일에 아라스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루이 11세의 아들 샤를 8세는 막시밀리안의 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 결혼하고, 아르투아 백국, 오세르 백국, 부르고뉴 백국, 샤롤레 백국, 마코네 백국, 샤토 시농, 쇼생, 라페리에르, 누아와 살랭 등지가 지참금 형식으로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했다. 또한 플란데런, 브라반트, 림부르크, 룩셈부르크, 에노, 나무르, 홀란트, 질란트 영지는 막시밀리안과 마리의 아들인 펠리페 1세가 가지되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했다. 하지만 나중에 왕위에 오른 샤를 8세가 브르타뉴 공국의 영지를 얻기 위해 브르타뉴 여공작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하면서, 마르가레테와 샤를 8세의 결혼 계약은 파기되었다.

2.5. 말년

루이 11세는 1478년부터 뇌졸중을 비롯한 숱한 질병에 시달렸다. 그러던 1481년, 프랑수아 드 파울라라는 은둔자가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궁정에서 기적적인 치료를 행한다는 이야기를 나폴리 상인들로부터 접한 루이 11세는 교황 식스토 4세에게 편지를 보내 그 은둔자가 프랑스로 가는 걸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식스토 4세는 프랑수아에게 프랑스로 가라고 명령하는 교서를 내렸고, 프랑수아는 즉시 배를 타고 마르세유로 간 뒤 주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론 강으로 이동했다. 1483년 3월 27일 파리에 도착한 프랑수아는 루이 11세의 영접을 받았다. 루이 11세는 그의 발 앞에 몸을 던지고 그의 축복을 간청하면서, 그가 자신을 낫게 해준다면 수녀원 2개를 건설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은둔자는 조용히 루이 11세를 지켜본 뒤, 그의 죽음은 이미 예정되었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권고한 후 파리를 떠났다.

루이 11세는 말년에 암살당할 것을 우려해 병사 400명을 동원해 밤낮으로 성을 지키게 했으며, 미신을 극도로 신봉해 점성술사들을 옆에 두고 자신의 생애를 조금이라도 연명할 방안을 마련하도록 촉구했으며, 자신 앞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던 1483년 8월 30일, 샤토 드 플레시스레투르 성에서 60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노트르담 드 클레리 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당시 13세였던 아들 샤를이 샤를 8세로서 프랑스 국왕에 등극했다.

3. 가족

4. 여담



[1] 사보이아 공작 루도비코의 딸. [2]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9세와 결혼. [3] 앙주 공작이자 나폴리 왕국의 명목상 국왕인 루이지 2세와 아라곤의 욜란데의 딸 [4] 1425/1428 ~ 1445, 오스트리아 대공 지기스문트의 부인 [5] 1428 ~ 1446,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부인 [6] 1434 ~ 1478,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9세의 부인 [7] 1435 ~ 1482, 부르봉 공작 장 2세 드 부르봉의 부인 [8] 1443 ~ 1495, 비아나 공 가스통 드 푸아의 부인. 푸아 백작이자 나바라 왕국의 국왕 프란치스코 페부스와 푸아 여백작이자 나바라 여왕 카탈리나의 어머니. [9] 1446 ~ 1472, 베리 공작, 노르망디 공작, 아키텐 공작 [10] 루이 11세는 필리프 6세의 5대손이고, 장 2세 달랑송은 필리프 6세의 동생인 초대 알랑송 공작의 증손이다. [11] 이때 결혼식에 참석한 샤를 7세는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회색 승마 바지"를 입었고, "박차를 제거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왕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스코틀랜드 손님들을 오래 접대하지 못하고 돌려보냈고, 스코틀랜드인들은 프랑스인들이 조국을 우습게 여겨서 이런다고 여겨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12] 루이 11세는 4년 후에 그들을 용서했고, 쇼몽 성을 재건하는 비용을 지원해주었다. [13] 초대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와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인 마거릿 홀랜드의 딸. [14] 키프로스 왕국의 국왕 야뉘와 라마르슈 백작 장 1세 드 부르봉라마르슈의 딸인 부르봉의 샤를로테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