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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8대 국왕 페드루 1세 Pedro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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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페드루 아폰수 Pedro Afonso |
출생 | 1320년 4월 8일 |
포르투갈 왕국 코임브라 | |
사망 | 1367년 1월 18일 (향년 46세) |
포르투갈 왕국 이스트레모스 | |
재위 | 포르투갈 왕국의 왕 |
1357년 5월 28일 ~ 1367년 1월 18일 | |
배우자 | 빌레나의 콘스탄사 마누엘 (1340년 결혼 / 1349년 사망) |
이네스 데 카스트로 (1354년 결혼 / 1355년 사망) | |
자녀 | 마리아, 페르난두 1세, 베아트리스, 주앙, 디니스, 주앙 1세(사생아) |
아버지 | 아폰수 4세 |
어머니 | 카스티야의 베아트리스 |
형제 | 마리아, 레오노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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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8대 국왕. 별칭은 정의왕(o Justiceiro) 혹은 잔혹왕(o Cruel)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조카이자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인 페드로 또한 '잔혹왕'(el Cruel) 또는 '정의왕'(el Justo) 이란 별칭으로 불렸다.2. 생애
1320년 4월 8일 포르투갈 왕국의 코임브라에서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4세와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의 딸인 베아트리스 사이에서 출생했다. 형제로 마리아, 아폰수, 디니스, 이사벨, 주앙, 레오노르가 있었지만, 대부분 유년기 때 사망했고 마리아[1], 레오노르[2]만 성인으로 성장했다. 이렇듯 남자 형제들이 유년기에 죽었기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으며, 15세 전후에 궁궐을 따로 보유했다고 전해진다.1340년, 아폰수 4세는 카스티야의 대귀족 후안 마누엘의 딸인 콘스탄사 마누엘과 아들을 결혼시키기로 했다. 콘스탄사 마누엘은 9살 때인 1325년에 14살의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와 결혼했지만, 1327년 알폰소 11세가 아폰수 4세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하기로 결정하면서 결혼 무효를 선고받고 은거하고 있었다. 두 부부의 결혼식은 1340년 8월 24일 리스본에서 거행되었고, 콘스탄사는 지참금으로 몬테모로노보, 알부케르케, 비세우 일대를 수여받았다.
콘스탄사는 여러 시녀를 데리고 포르투갈로 왔는데, 그 중에는 이녜스 데 카스트로가 있었다. 그녀는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의 사생아이자 알폰소 11세의 수석 궁재인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카스트로와 알폰소 6세의 후손인 포르투갈 귀족 알돈차의 사생아 딸이었다. 페드루 왕자는 이녜스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렸고, 아내를 거들떠보지 않고[3] 이녜스와 사랑을 나누었다. 아폰수 4세는 카스티야 대귀족의 딸인 며느리를 홀대하는 아들을 훈계하기도 하고 사랑이 식을 때까지 기다려보기도 했지만 아들이 이녜스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자, 1344년 이녜스를 카스티야 국경 지대에 있는 알부케르케 성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페드루는 이녜스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속삭였고, 그런 남편 옆에서 가슴앓이를 하던 콘스탄사는 1349년 결혼 9년 만에 출산 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페드루는 콘스탄사가 죽자마자 이녜스를 리스본으로 데려와서 사랑을 나누었고, 이녜스의 친족들과 그녀와 관련있는 카스티야 망명 귀족들은 페드루가 베푼 특권을 토대로 포르투갈 궁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포르투갈 귀족들은 이에 반감을 품고 아폰수 4세에게 조치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아폰수 4세는 아들을 왕족 혈통의 여인과 재혼시켜 상황을 개선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페드루는 이녜스가 아니면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왕족 출신이라고는 하나 사생아에 불과하며[4] 포르투갈 귀족들의 반감을 사고 있는 이녜스를 며느리로 맞이할 수 없었던 아폰수 4세는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 지 고심했다. 그러던 중 이녜스의 친가인 카스트로 가문까지 페드루와 이녜스의 장남에게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을 주기 위해 콘스탄사 왕비의 아들인 페르난두 왕자를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아폰수 4세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녜스의 죽음>
1355년 1월 7일 페드루 왕자가 사냥하러 가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아폰수 4세는 페드로 코엘호, 알바로 곤살베스, 디에고 로페스 파체코와 함께 빌라 두 자르멜로에 머물던 이녜스를 긴급 체포한 뒤 사형을 선고했다. 이녜스는 어린 자식들을 왕 앞에 내밀며 아이들을 봐서라도 용서해달라고 빌었지만 아폰수 4세는 이를 묵살하고 처형을 감행했다. 일설에 따르면 이녜스의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의 목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이녜스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페드루는 격분해, 이녜스의 친정인 카스트로 가문과 연합하여 아버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2주 동안 포르투를 포위 공격하며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가 아폰수 4세가 급파한 토벌대에 패배했다.
1355년 8월 아폰수 4세의 아내이자 페드루의 어머니인 베아트리스의 중재로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 후 페드루는 갈리시아 출신의 여인 테레사 로렌수를 정부로 두었다. 이 여인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일부 기록에서는 리스본 상인 로렌코 마르틴스가 그녀의 아버지라고 주장했고, 다른 기록에서는 이녜스의 측근이 그녀의 아버지라고 기술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리스본 상인 공동체에 맡겨졌는데, 훗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포르투갈 병탄 시도를 물리치고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로 등극했다.
1357년, 아폰수 4세는 페드루에게 권력의 상당 부분을 위임하는 대가로 페드루와 화해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1357년 5월 28일에 리스본에서 사망했고, 페드루가 페드루 1세로서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 초기에 이녜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용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360년 6월 12일 페드루 1세는 칸탄헤데 예배당에서 자신이 이녜스와 실제로 결혼했다고 선언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베아트리스, 주앙, 디니스를 합법적인 아들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자들을 끝까지 추적해 주살하겠다고 발표했다.
피에르 샤를 콤테, <1360년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대관식>
일설에 따르면 페드루는 이녜스의 유해를 무덤에서 꺼낸 뒤 왕비의 복장을 갖추게 해서 옥좌에 앉히고는 신하들에게 이녜스의 손등에 키스하며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고 한다. 이는 스페인 극작가 헤로니모 베르무데스(Jerónimo Bermúdez)가 1577년에 발표한 비극 작품 < Nise Laureada>에서 유래한 것으로, 현재 학계에서는 후대에 꾸며진 이야기로 간주한다.
한편 이녜스를 죽였던 페드로 코엘호와 알바로 곤살베스는 카스티야로 피신했다가 카스티야에서 도망친 망명자들과 교환하자는 페드루의 제안을 받아들인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에 의해 포르투갈로 송환되었다. 페르난도 로페스의 <페드루 1세의 연대기>에 따르면, 페드루 1세는 이들 둘에게 이녜스의 죽음으로 자신이 겪은 고통을 느끼게 해주겠다며 본인이 직접 그들의 심장을 칼로 적출해 죽였다고 한다. 페드루 1세는 복수를 완수한 뒤 알코바사 수도원에 자신과 이녜스가 묻힐 석관을 만들게 했다. 둘의 무덤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관에는 "세상이 끝나는 그 날까지...(Até o fim do mundo...)"이란 글귀가 쓰여 있다.
그 후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 왕국을 무난하게 통치했다. 그는 법률을 위배한 자들을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엄격하게 처벌했으며, 죄질이 조금이라도 나쁘다 싶으면 사형을 가차없이 내렸다. 귀족들은 그의 이같은 엄격한 판결에 두려움을 느끼고 감히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반면 평민들에게는 너그럽게 대했기에 백성들의 열띤 지지를 받았다. 페르난도 로페스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포르투갈에서 페드루 왕의 10년 치세와 같은 시기는 없었다"고 호평했다. 한편, 그는 카스티야 내전에 개입해 엔리케 2세와 투쟁하는 조카 페드로를 지원했으며 1366년 내전에서 패배하고 포르투갈로 망명하려는 엔리케 2세를 받아주지 않았다.
1367년 1월 18일, 페드루 1세는 이스트레모스에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이녜스의 처형자 3인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아비뇽에 숨어 있었던 디에고 로페스 파체코를 용서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디에고 로페스는 이 덕분에 포르투갈로 귀환했고, 페드루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페르난두 1세 치세 때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페르난두 1세와 레오노르 텔레스의 결혼에 반대했다가 보복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카스티야로 망명해 엔리케 2세의 측근이 되어 포르투갈 왕국과의 전쟁을 부추겼다. 1385년 후안 1세의 포르투갈 원정에 참여했으나 알주바호타 전투의 참패를 막지 못했고, 이후로는 카스티야 왕국에서 조용히 지내다 1393년에 사망했다.
3. 가족관계
- 부친 : 아폰수 4세 (1291.02.08~1357.05.28)
- 모친 : 카스티야의 베아트리스 (1293.03.08~1359.10.25)
- 부인 : 비예나의 콘스탄사 마누엘 (1315/1323~1345.11.13, 1340년 결혼)
- 마리아 (1342.4.6~1367년 말): 토르토사 후작 페르난도 데 아라가오와 결혼.
- 루이스 (1344): 요절
- 페르난두 1세 (1345.10.31~1383.10.22): 포르투갈 국왕.
- 부인 : 이네스 데 카스트로 (1325-1355.1.7, 1354년 결혼(?))
- 아폰수 (1350) : 출생 직후 사망
- 주앙 (1349/1352~1396년경) : 발렌시아 드 캄푸스의 공작. 1383-1385년 내전 동안 포르투갈 왕위를 주장.
- 디니스 (1353/1354~1403년경) : 빌라르-돔파르두의 영주. 1383-1385년 내전 동안 포르투갈 왕위를 주장.
- 베아트리스[5](1354~1381.07.05): 초대 알부케르케 백작이며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1세의 사생아인 산초 알폰소의 부인. 베아트리스와 산초 알폰소 사이의 외동딸 알부케르케의 엘레노어는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란도 1세의 왕비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유럽의 많은 왕실 선조가 되었다. 엘레노어의 증손녀인 프리드리히 3세의 황후 포르투갈의 레오노르를 통해서 합스부르크 왕조 후손들에게도 베아트리스의 피가 흐른다.
- 애인 : 테레사 로렌수 (1330~?)
- 주앙 1세 (1357.04.01~1433.08.14) : 아비스 기사단장. 1383-1385년 내전 이후 주앙 1세로 포르투갈 왕위 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