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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23대 국왕 이슈트반 5세 V. Istvá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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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39년경 |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 |
사망 | 1272년 8월 6일 (향년 32~33세) |
헝가리 왕국 부더 체펠섬 | |
재위 |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의 왕 |
1270년 ~ 1272년 8월 6일 | |
배우자 |
쿠만의 에르제베트 (1253년 결혼) |
아버지 | 벨러 4세 |
어머니 | 마리아 라스카리나 |
형제 | 벨러, 쿠니군다, 머르기트, 언너, 커털린, 에르제베트, 콘슈탄치어, 욜란, 머르기트 |
자녀 | 라슬로 4세, 언드라시, 커털린, 마리어, 에르제베트, 헝가리의 언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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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제23대 국왕.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췄지만 권력욕이 강하여 아버지와 형제들을 상대로 갈등을 벌인 끝에 내전을 벌였고, 나중에는 국가를 아버지와 양분했다. 1270년 왕위에 오른 뒤 형제들을 숙청하고 보헤미아 왕국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1272년 자기 아들 라슬로 4세를 감금하고 반란을 일으킨 영주를 징벌하러 출전했다가 도중에 병사했다.2. 생애
1239년경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벨러 4세와 니케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1세의 딸 마리아 라스카리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쿠만인들이 몽골 제국군의 침략을 피해 헝가리로 이주했다. 벨러 4세는 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몽골 제국군이 침략할 때 헝가리군과 함께 싸우는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쿠만족 지도자 쾨텐의 딸 에르제베트와 이슈트반을 약혼시켰다.1241년 4월 10~11일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군이 몽골 제국군에게 참패한 뒤, 벨러 4세는 가족과 함께 달마티아로 피신했다. 몽골 추격대가 다가오자, 그는 가족들을 클리자 성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아드리아 해 연안의 트로기르로 피신했다. 추격대 지휘관 카단 칸은 곧 트로기르에 도착한 뒤 포위 공격했지만, 1242년 봄 수부타이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을 접수받자 곧바로 돌아갔다. 이후 몽골 제국군이 오고타이 칸의 사망으로 바투 칸이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물러나자 벨러 4세는 가족들을 데리고 수도로 귀환했다.
1246년경 슬라보니아 공작으로 선임되었고, 1253년에 에르제베트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1253년 오스트리아 공국 제머링 계곡 남쪽 영토의 관리인으로 발탁되었지만, 1258년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슈트반을 축출한 뒤 보헤이마 왕 오타카르 2세에게 합류했다. 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을 진압했고, 1259년 봄 케른텐 공작 울리히 3세가 슈타이어마르크의 반란군을 지원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케른텐으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나 슈타이어마르크 영주들은 그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감을 품었고,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의 후원에 힘입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페타우 일대만 보존할 수 있었다.
이에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다. 헝가리는 쿠만, 키예프 루스, 폴란드 왕국, 세르비아 공국, 불가리아 제2제국,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았고,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지원을 받았다. 1260년 6월 25일, 이슈트반은 모라바 강을 건너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7월 12일 모라비아의 크레센브룬 전투에서 아버지가 지휘하는 주력 부대가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적의 집중 공격을 받고 패퇴했다. 결국 1261년 3월 31일, 양국은 평화 협약을 체결했고, 벨러 4세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영토 관할권을 포기했다.
1261년, 벨러 4세는 이슈트반 왕자에게 군대를 맡겨 불가리아 제2제국을 공격하게 했다. 이슈트반 왕자는 불가리아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도나우 강 하류의 룸과 비딘을 공략했다. 당시 내전이 한창이던 불가리아로서는 이에 대항할 수 없었고, 콘스탄틴 아센 1세는 헝가리가 그 지역을 가지는 것을 용인해야 했다. 그러나 이 무렵 벨러 4세가 막내동생 벨러를 슬라보니아 공작으로 임명하고 편애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슈트반 왕자는 아버지가 자신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벨러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이리하여 양측간에 관계가 악화되었고, 1261년 가을에 양측 군대간에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여러 대주교들이 중재하자, 양자는 도나우 강을 따라 국가를 분할하기로 했다. 강 서쪽의 땅은 벨러 4세가 직접 통치하기로 했고, 동부 영토는 이슈트반이 다스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양자의 갈등은 깊어졌다. 급기야 1264년 이슈트반이 도나우 강 동쪽에 있는 모후 마리아와 누이 언너의 영지를 몰수하자, 언너는 아버지를 부추겨 그해 여름에 이슈트반을 공격하게 했다. 언너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어 샤로슈퍼터크를 점령하고 그곳에 있던 이슈트반의 아내와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왕실군은 여세를 몰아 이슈트반 왕자를 몰아쳐서 그가 에르데이의 동쪽 끝에 있는 페케테할롬 요새까지 도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슈트반이 지지자들을 끌어모아서 병력을 추스린 뒤 반격을 가했고, 1265년 3월 이사제그 전투에서 벨러 4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1266년 3월 23일 부더의 토끼 섬[1]에 있는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서 양자는 다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도나우 강을 따라 국가를 양분하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슈트반 왕자가 세금 징수권과 평민 통제 등 국왕의 권리 상당수를 공유하는 것 역시 허용되었다.
이 무렵, 헝가리의 봉신이었던 야코프 스베토슬라프가 불가리아로 귀순했다. 1265년, 불가리아 차르 콘스탄틴 아센 1세는 스베토슬라프와 함께 도나우 강을 건너 헝가리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아들과 화해한 벨러 4세는 자신의 영지인 에르데이에 피해를 입힌 불가리아에 역공을 가하기로 하고, 이슈트반에게 군대를 맡겼다. 1266년 6월 비딘이 함락되었고, 뒤이어 불가리아 수도 벨리코 터르노보까지 진격하여 그 주변을 파괴하였고, 플레벤을 함락한 뒤 돌아갔다. 이에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는 다시 불가리아를 버리고 헝가리의 봉신이 되었다.
1269년 여름, 벨러 4세의 총애를 받던 막내아들 벨러가 사망했고, 1270년 1월 18일에 막내딸 머르기트도 사망했다. 이에 깊은 슬픔에 잠긴 벨러 4세는 곧 중병에 걸렸다. 자기가 죽고 나면 이슈트반 왕자가 가족들을 해칠 것을 우려한 그는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에게 아내 마리아와 딸 언너를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1270년 5월 3일 사망했고, 이슈트반이 이슈트반 5세로서 헝가리 왕위에 올랐다.
그동안 이슈트반과 심한 갈등을 벌였던 언너는 아버지가 죽고 이슈트반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아버지의 심복들과 함께 보헤미아로 도주했다. 이때 그들은 헝가리 서쪽 국경 지대의 여러 요새를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에게 넘겨줬다. 이슈트반 5세는 중신들이 떠난 자리에 심복들을 앉힌 뒤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270년 8월 말에 크라쿠프 공작 볼레스와프 5세와 동맹을 맺었고, 포조니 인근의 도나우 강 유역의 한 섬에서 오타카르 2세를 만나 땅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오직 휴전 협정만 맺어졌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70년 12월 21일, 이슈트반 5세는 습격대를 오스트리아에 파견해 약탈을 자행하게 했다. 이에 오타카르 2세는 1271년 4월 도나우 강 북쪽 지역을 공격하여 데베니, 포조니, 너지솜버트를 포함한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5월 15일 모숀머저로바르 전투에서 이슈트반 5세의 헝가리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병력을 수습한 이슈트반 5세가 반격을 가했고, 5월 21일 라이카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격멸했다. 이후 그는 소수의 추종자만을 이끌고 달아나는 오타카르 2세를 맹추격해 빈까지 이르렀다. 이후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슈트반 5세는 오타카르 2세의 적들을 돕지 않기로 했고, 오타카르 2세는 언너와 추종자들이 넘겨줬던 요새들을 헝가리에 돌려주기로 했다.
1272년 늦봄, 이슈트반 5세는 자신과 결혼동맹을 맺은 나폴리 왕국의 카를로 2세를 만나기 위해 달마티아로 떠났다. 그런데 그해 6월 말 독일계 크로아티아인 영주 요아킴 펙타르(Joakim Pektar ?~1277)가 태자 라슬로를 납치하여 코프리브니차 성에 연금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코프리브니차 성으로 달려갔지만, 도중에 중병에 걸렸다.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도나우 강변의 체펠 섬으로 간 뒤 1272년 8월 6일에 사망했다. 유해는 여동생 머르기트가 묻힌 부더의 머르기트 섬에 안장되었다. 사후 라슬로 왕자가 요아킴 펙타르의 인도하에 세케슈페헤르바르로 이동한 후 라슬로 4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이슈트반 5세는 쿠만의 에르제베트 왕비와의 사이에서 2남 4녀를 낳았다. 장녀 카테리나는 1256년생으로, 1268년경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1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스테판 드라구틴과 결혼했다. 차녀 마리어는 1257년경에 태어났고, 1270년 훗날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가 되는 카를로 왕자와 결혼했다. 카를로 2세와 마리어의 손자 카로이 로베르트는 언드라시 3세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 되었다. 셋째 딸 에르제베트는 체펠 섬에 있는 성모 마리아 수도원의 도미니코회 수녀가 되었고, 1277년 사제로 임명되었지만 라슬로 4세에 의해 수녀원에서 나온 뒤 팔켄슈타인의 자비스와 결혼했다. 막내딸 언너는 1260년경 태어났고,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의 장남 안드로니코스 2세와 결혼했다. 장남 라슬로 4세는 1262년에 태어났고 1272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 되었다. 둘째 아들 언드라시는 1268년에 태어나 1278년에 10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1]
현재 부더페슈트의 머르기트 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