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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1 00:21:15

야기에우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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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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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 문장
존속년도 1386년 ~ 1572년, 1575년 ~ 1587년
국가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헝가리 왕국[1], 보헤미아 왕국
본가 게디미나스
주요 군주 브와디스와프 2세
지그문트 1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1. 개요2. 역사
2.1.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2.1.1.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2.1.1.1.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2.1.1.2.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동군연합2.1.1.3. 폴란드 단독 군주로서의 치세
2.1.2. 브와디스와프 3세2.1.3.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
2.1.3.1. 폴란드 공위기2.1.3.2. 초기 치세2.1.3.3. 13년 전쟁2.1.3.4. 보헤미아 왕위 계승 전쟁2.1.3.5. 오스만 제국 크림 칸국과의 전쟁2.1.3.6. 헝가리 왕위 계승 전쟁
2.1.4. 얀 1세 올브라흐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2.1.5. 지그문트 1세
2.1.5.1.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전쟁2.1.5.2. 튜튼 기사단과의 전쟁2.1.5.3. 그 외의 외치2.1.5.4. 내치2.1.5.5. 예술 후원
2.1.6.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2.1.6.1. 바르바라의 폴란드 왕비 등극을 위한 정치 투쟁2.1.6.2. 리보니아 전쟁2.1.6.3. 루블린 조약2.1.6.4. 종교 정책2.1.6.5. 예술 진흥 정책
2.1.7. 안나 야기엘론카
2.2.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국
3. 여담4. 역대 왕 목록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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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기에우워 왕조는 1386년 폴란드 왕국 여왕 야드비가 리투아니아 대공국 요가일라의 결혼을 통해 성립된 왕조로, 요가일라를 폴란드어로 읽으면 야기에우워(Jagiełło)가 된다. 가톨릭으로 개종 후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한 요가일라는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동군연합[2]을 구성했다. 이후 야기에우워의 후손들이 폴란드의 왕 겸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 16세기 말까지 통치하게 되는데, 특히 지그문트 1세와 지그문트 2세의 통치 시기는 폴란드 왕국 역사상 최전성기였다. 이후 양국은 1569년 루블린 조약을 통해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거듭나게 된다.

야기에우워 왕가의 왕들은 폴란드 국왕(1386~1572), 리투아니아의 대공(1377~1397, 1440~1572) 외에도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1440~1444, 1490~1526), 보헤미아 왕국(1471~1526)의 왕위에 올랐다.

2. 역사

2.1.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2.1.1.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2.1.1.1.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
야기에우워 왕조의 첫번째 인물인 요가일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전성기를 이끈 11대 대공 게디미나스의 손자이자 12대 대공 알기르다스의 아들이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리투아니아 대공을 자처한 알기르다스와 트라카이 공작을 자처한 켕스투티스 형제에 의해 양분되었다. 알기르다스는 동방 전선을 책임지고 루스 공국들과 킵차크 칸국을 상대로 적극적인 확장 정책을 벌였고, 켕스투티스는 서방 전선을 맡아 헝가리 왕국 러요시 1세, 폴란드 왕국 카지미에시 3세, 튜튼 기사단국,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의 침략으로부터 자국의 영역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면서도 홀로 상대하기에 벅찰 경우 서로 협력해 외적에 맞섰다. 이 시스템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켕스투티스가 서방의 침략자들을 상대로 분전하는 동안, 알기르다스는 루테니아 전역에서 킵차크 칸국을 몰아내고 키예프를 장악하는 등 동방 영토를 크게 늘렸다.

그러나 서방 기독교 세력의 공세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리투아니아는 점점 피폐해졌다.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1362년에서 1370년 사이에 약 20번의 원정을 감행했다. 튜튼 기사단은 카우나스 북쪽과 스벤토지 강 유역을 습격했고,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은 리투아니아 북서쪽 국경지대를 공략했다. 이들은 수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을 사로잡은 뒤 무슬림에게 노예로 팔아넘겨 막대한 이득을 취했으며, 점령지에 요새를 신설해 지배력을 굳혔다. 급기야 1365년, 켕스투티스의 아들 부타우타스가 아버지와 알기르다스가 갈리치아-볼히니아 전쟁에 참여한 형제 나리만타스를 돕기 위해 볼히니아에 가 있는 틈을 타 여러 귀족과 함께 빌뉴스에서 정변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빌뉴스 총독 디르수나스에게 발각되었고, 부타우타스는 추종자들과 함께 튜튼 기사단국으로 망명한 뒤 기독교로 개종하고 헨리크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후 1365년 8월 튜튼 기사단의 리투아니아 침공을 감독해 리투아니아 수도권에 위치한 케르나베와 마이시아갈라를 심각하게 파괴했다.

1367년,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가 리투아니아인들이 튜튼 기사단의 연이은 침공으로 피폐해진 틈을 타 루테니아를 침공해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그 땅의 주군인 루바트로부터 블라디므르와 루스크를 계속 다스리는 대가로 모든 적에 맞서 자신을 돕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368년, 리투아니아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조프셰를 침공해 프워츠크, 체르빈스크, 비쇼그로드, 풀투스크를 파괴했지만, 폴란드 본토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1370년, 튜튼 기사단의 거듭된 침략에 견디지 못한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는 리투아니아인, 사모기타이인, 루테니아인, 그리고 타타르인으로 구성된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프로이센으로 쳐들어가서 쾨니히스부르크 북쪽의 루다우 일대를 파괴했다. 그러나 이어진 루다우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에게 패배해 막대한 전력을 상실했다. 1376년 11월 카지미에시 3세 사후 폴란드 왕국이 내란에 휘말린 틈을 타 일전에 카지미에시 3세가 빼앗아갔던 루테니아를 탈환한 뒤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 인근까지 진격했지만, 헝가리 겸 폴란드 국왕 러요시 1세의 반격으로 밀려났다. 설상가상으로, 튜튼 기사단이 헝가리의 리투아니아 공세에 가담해 1377년 2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포위했다. 알기르다스는 이를 가까스로 격퇴했지만, 그 과정에서 중병에 걸려 1377년 5월 24일 빌뉴스에서 사망했다. 당시 알기르다스의 다른 아들들은 다른 곳에서 영지를 경영하고 있었고 오직 요가일라만 빌뉴스에 남아있었기에, 그가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지명되었다.

요가일라는 집권 후 숙부인 켕스투티스의 용인을 받으면서 입지가 안정되는 듯 했다. 그러나 1377년 여름, 헝가리 겸 폴란드 국왕 러요시 1세가 이끄는 헝가리-폴란드 연합군이 루테니아로 쳐들어가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하고 헤움과 벨츠를 공략했다. 이후 옛 루테니아 왕국 대부분 지역을 헝가리 왕국에 합병시켰다. 결국 라트노 공작 페도르, 포돌레 공작 알렉산더르와 보리스 등 리투아니아 공작들은 러요시의 패권을 인정했다. 튜튼 기사단도 리투아니아에 습격대를 보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설상가상으로, 1377년 겨울에 알기르다스의 장남이자 프스코프와 폴로츠크 공작 안드레이가 빌뉴스를 기습 공격했다. 요가일라는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망명한 뒤 모스카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로부터 병력을 빌린 뒤 안드레이를 몰아냈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프스코프로 이동한 뒤 드미트리 돈스코이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요가일라는 그런 그를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그후 요가일라는 형제 스키르가일라를 측근으로 삼은 뒤 그의 조언에 따라 서방 기독교 국가들과의 전쟁을 종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1379년 헝가리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으며, 1380년 5월 튜튼 기사단과 도비디슈케스 비밀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르면, 기사단이 켕스투티스를 공격할 경우 요가일라는 숙부를 돕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점점 강성해지는 모스크바 대공국을 경계해 킵차크 칸국의 마마이 칸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마마이 칸은 1380년 9월 8일 쿨리코웨 장대 전투에서 드미트리 돈스코이에게 참패한 뒤 몰락했고, 요가일라는 이로 인해 동맹 세력을 잃었다.

한편, 켕스투티스는 튜튼 기사단과의 전쟁을 힘겹게 치르는 동안 요가일라가 자신을 돕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여러 번 항의했다. 이에 요가일라는 켕스투티스가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면서, 그의 아들 중 한 명에게 군대를 대신 이끌게 하라고 요구했다. 얼마 후 도비디슈케스 조약의 내용이 누설되었고, 켕스투티스는 극도로 분노해 조카를 축출하기로 결심했다. 1381년 요가일라에 의해 빌뉴스의 대리통치자로 선임된 스키르가일라가 폴라츠크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출진했다. 켕스투티스는 이 때를 틈타 군대를 이끌고 빌뉴스에 입성한 뒤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등극했다. 요가일라는 곧 체포되었고, 크레바와 비테브스크에 잇따라 연금되었다가 자유를 대가로 모든 직위를 포기해야 했다.

요가일라는 곧 반격을 준비했다. 당시 켕스투티스가 오랜 적인 튜튼 기사단에 맞서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일으키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특별세를 부과하자, 리투아니아 주민, 특히 상인들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요가일라가 대공에 복위하기를 희망했다. 요가일라는 이러한 민심을 등에 업고 두 형제 스키르가일라, 카리부타스와 동맹을 맺고 반격을 준비했다. 1382년 튜튼 기사단장 윈리히 폰 크니포르데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켕스투티스는 이 때를 틈타 튜튼 기사단의 본거지인 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그바르데이스크에 이르렀다. 이에 튜튼 기사단은 요가일라에게 사절을 보내 사모기티아의 영토를 양보해주면 그가 집권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고, 요가일라는 이에 힘입어 트라카이를 공략한 뒤 리투아니아 심장부를 향해 진격했다. 빌뉴스 주민들은 리가의 상인 하눌의 선동을 받고 요가일라의 군대가 빌뉴스에 은밀하게 진입하는 것을 받아들었다.

나중에 빌뉴스가 요가일라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켕스투티스는 회군했지만, 대규모 내전을 피하고 싶었기에 아들 비타우타스와 함께 요가일라와 만나서 협상했다. 그러나 협상 도중에 요가일라의 명령을 받은 전사들에 의해 생포되었고, 그 후 크레바 성내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요가일라가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복위했고, 켕스투티스는 1382년 8월 15일에 사망했다. 그가 자연사했다는 기록과 자살했다는 기록, 요가일라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이 제기되었지만 이 중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분명하지 않다. 비타우타스는 얼마 후 감옥에서 탈출한 뒤 튜튼 기사단장 콘라트 폰 발렌로드에게 의탁했고, 콘라트는 이를 빌미삼아 요가일라와 맺었던 합의를 파기하고 리투아니아에 대한 습격전을 이어갔다.

하지만 상황은 요가일라에게 유리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 헝가리와 폴란드 국왕이었던 러요시 1세가 1382년 9월 10일에 사망했고,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이끄는 모스크바 대공국은 킵차크 칸국의 새 칸 토크타미쉬 칸의 기습 공격으로 모스크바가 함락된 뒤 킵차크 칸국의 봉신으로 돌아갔다. 두 강적이 저절로 사라지자, 요가일라는 튜튼 기사단과 평화 협약을 맺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1382년 11월 1일 기사단이 프로이센 리보니아를 연결하는데 필요한 사모기티아 영토를 가지도록 허용하며, 4년 이내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대가로 휴전을 맺는다는 내용의 두비샤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은 휴전 협정을 맺어놓고도 꾸준히 습격대를 보내 리투아니아인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넘기는 짓을 반복했고, 요가일라는 이들을 막는 데 전념하기 위해 1383년 드미트리 돈스코이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1383년 7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튜튼 기사단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9월 초, 튜튼 기사단과 비타우타스는 트라카이를 잠시 장악하고 빌뉴스를 공격했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1383년 10월 21일, 비타우타스는 타파아와(현재 그바르데이스크)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은 뒤 위간다(Wiganda)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후 네만강 어귀의 영지를 수여받았고, 그곳에서 요가일라에 의해 추방된 자신의 가족 및 추종자들과 재회했다. 1384년 1월 30일, 비타우타스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조약을 체결해 튜튼 기사단의 가신이 되었고, 네비자강 일대까지 이르는 사모기티아 당 일부를 튜튼 기사단에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해 5월, 튜튼 기사단은 카우나스에 '누베 마리엔베르더(Neue Marienwerder)'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성채를 건설했다.

한편, 요가일라는 디미트리 돈스코이의 딸인 소피아와 결혼하고 정교회로 개종해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원을 받아내려 했다. 그러면서도 비타우타스에게 볼히니아와 루츠크를 줄 테니 내전을 끝내고 화해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비타우타스는 아버지 켕스투티스가 생전에 이끌었던 트라카이를 포함한 영지 전체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요가일라는 켕스투티스 사후 트라카이를 다스리던 스키르가일라를 폴로츠크로 보낸 뒤 트라카이를 양도하겠다고 약속했다. 때마침 튜튼 기사단의 지나친 횡포에 사모기타이인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자신에게도 온갖 간섭과 차별이 가해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비타우타스는 요가일라와 화해하고 튜튼 기사단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1384년 7월, 비타우타스는 네만 강 어귀에 세워진 2개의 튜튼 기사단 성을 기습 점령하고 파괴한 뒤 요가일라와 합류했다. 이후 두 사람은 누베 마리엔베르더 성을 6주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켰다.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로 돌아온 뒤 그로드노, 브레스트, 포들라시에, 볼로비스크를 수여받고 발트 신화로 복귀했다. 다만 트라카이는 스키르가일라가 종전대로 계속 맡았다. 튜튼 기사단은 비타우타스의 이같은 행위에 격분해 그를 배신자라고 규탄하고 리투아니아를 향한 대대적인 보복 공세를 준비했다.
2.1.1.2.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동군연합
요가일라는 튜튼 기사단을 자력으로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라고 여기고 동맹국을 물색했다. 당초에 동맹국으로 고려했던 모스크바 대공국은 토크타미쉬 칸의 침략으로 인해 피폐해져 그를 도울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폴란드 귀족들이 그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야드비가 여왕의 결혼 상대로 정해진 오스트리아 공자 빌헬름보다는 그와 결혼시키는 편이 자국에 유익하다고 여겼다. 요가일라는 이에 반색했고, 양자는 1385년 8월 14일 크레보에서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요가일라는 야드비가와 결혼하는 대신 다음과 같은 조건을 준수해야 했다.

세 번째 조건을 제외하고 모두 리투아니아와 요가일라에게 무리한 조건이었지만, 요가일라는 폴란드에서 요구한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리하여 크레보 조약이 성립된 뒤, 크라쿠프의 영주 도비에스와프 쿠르즈벤츠키는 야드비가가 있던 바벨 성으로 들어오려던 빌헬름을 문전박대했다. 1386년 1월 11일, 폴란드 귀족들은 볼로비스크에서 빌헬름과 야드비가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파기한다고 선언하고 20만 골드 플로린을 오스트리아에 보내겠다고 밝혔다. 그 후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에게 여왕이 그의 아내가 되기로 동의했다고 알렸다. 요가일라는 즉시 크라쿠프로 가서 1386년 2월 15일에 세례를 받고 '브와디스와프 2세'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 사흘이 지나 2월 18일, 바벨 대성당에서 야드비가와 요길라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2주 뒤인 3월 4일에는 요가일라의 폴란드 국왕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리하여 요가일라는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로 등극했다.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로 등극하고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자, 오랜 세월 이교도를 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전쟁을 벌였던 튜튼 기사단은 이 소식에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이대로는 리투아니아를 공격할 명분을 잃게 되고, 장차 자신들의 입지가 위협받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폴란드 영주와 성직자들이 야드비가를 협박해 요가일라와 결혼시키게 했다고 비난했고, 요가일라는 폴란드를 가로채기 위해 기독교로 거짓 개종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교황 우르바노 6세는 교황 특사 람푸냐노의 마피올루스를 크라쿠프로 파견해 요가일라와 야드비가의 결혼에 대해 조사하게 한 뒤, 마피올루스의 보고를 접수한 후 두 사람의 결혼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선포했다.

폴란드 국왕으로서 브와디스와프 2세가 수행해야 할 첫번째 과제는 러요시 1세 치세 때 헝가리에 넘어간 루테니아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1387년 봄, 폴란드 왕국은 헝가리 왕국이 내분에 휩싸인 틈을 타 루테니아를 공략했다. 이때 야드비가 본인이 원정군과 함께 가서 현지 총독들로부터 별다른 무력 충돌 없이 항복을 받아냈다고 전해진다. 1387년 3월 8일에는 리비프 시의 특권을 확인했다. 1387년 9월 26일, 몰다비아 공국의 공작 표트르 1세는 그동안 주군으로 모셨던 헝가리 왕국과의 관계를 끊고 야드비가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스몰렌스크 공작 스뱌토슬라프 4세가 리투아니아를 침공하자, 그는 스키르가일라를 파견해 이들을 물리치도록 했다. 이때 리투아니아에 들린 브와디스와프 2세는 리투아니아 귀족들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명령하고 빌뉴스에 주교구를 설치했다. 여기에 이교 사원과 신들의 형상을 파괴했으며, 기독교로 순순히 개종한 귀족들에게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후 스키르가일라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섭정으로서 그를 대신해 리투아니아를 이끌었다.

1388~1390년 튜튼 기사단이 리투아니아를 침공하는 것을 격퇴한 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일시적으로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 공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스키르가일라가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신망을 점점 잃는 반면에 비타우타스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면서,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은 자신들을 위한 독자적인 정부가 세워지기를 원했고, 비타우타스가 그 정부를 이끌 수장으로 적합하다고 여겼다. 이 상황을 파악한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빌뉴스에 폴란드 수비대를 주둔시켜 억제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욱 심한 반발을 샀다.

1389년 5월, 브와디스와프 2세는 루블린에서 스키르가일라와 비타우타스를 불러들인 뒤 비타우타스에게 스키르가일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를 지원하겠다고 선언하는 공식 문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비타우타스는 어쩔 수 없이 서명했지만, 내심 깊은 불만을 품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 출석한 튜튼 기사단 측 대표단의 주장에 따르면, 비타우타스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이용해 고기, 건초 및 기타 물품을 가득 실은 마차를 보내면서, 전사들이 이를 호위하는 척하다가 빌뉴스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장악해버릴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발각되었고, 공모자들이 모조리 처형되었으며, 비타우타스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타우트빌라스 켕스투타이티스와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 형제가 영지를 박탈당했다.

비타우타스는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고, 포로로 잡혀 있던 튜튼 기사 마르콰르 폰 잘츠바흐를 튜튼 기사단국에 돌려보내면서 협상을 시작했다. 1390년 1월 19일, 비타우타스는 지난날 튜튼 기사단과 협의했던 쾨니히스베르크 조약을 따르겠다는 내용의 리크 조약에 서명했다. 튜튼 기사단은 비타우타스가 또다시 배신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타스, 타우트빌라스 켕스투타이티스, 비타우타스의 아내 오나, 딸 조피아, 여동생 림가일레, 그리고 여러 추종자들을 인질로 받아냈다. 그 해 5월, 사모기티아 귀족 대표단 31명이 쾨니히스베르크에 도착한 뒤 비타우타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프랑스, 독일, 잉글랜드 출신의 자원병 및 용병들도 여기에 가담했는데, 1399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 즉위하게 될 더비 백작 헨리, 프랑스 원수 장 르맹그레도 원정군에 가담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비타우타스의 이같은 움직임을 전해듣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의 군대는 포들라시에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폴란드 수비대를 남겨둔 뒤 흐로드나를 6주간 포위 공격한 끝에 1390년 4월에 함락시켰다. 튜튼 기사단과 비타우타스의 연합군은 1390년 여름이 끝날 무렵에 반격에 착수해 리투아니아의 첫번째 수도였던 케르나베 성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러나 그들이 게오르겐부르크를 포위 공격하던 중 튜튼 기사단장 콘르트 쇨너 폰 로텐슈타인이 사망하면서, 연합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그들은 게오르겐부르크 공략을 포기하고 빌뉴스로 방향을 돌렸다. 1390년 9월 11일, 연합군은 빌뉴스에 도착한 뒤 5주간 포위 공격했다. 튜튼 기사단은 빌뉴스 외곽 마을 대부분을 폐허로 만들었고, 빌뉴스 외성을 허물었다.

그러나 스키르가일라가 이끄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루테니아 연합군이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바람에 빌뉴스 공략에 애를 먹었다. 여기에 비타우타스의 형제 타우트빌라스가 전사했고, 화약 공급이 줄어들고 날씨가 악화되었으며, 서유럽에서 온 자원자들 대부분의 복무 기간이 만료되면서 많은 이들이 이탈하려 했다. 그리고 튜튼 기사단은 속히 프로이센으로 돌아가서 새 기사단장을 세우려 했다. 결국 연합군은 빌뉴스 공략을 포기하고 프로이센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후 양자간의 소규모 접전이 이어졌지만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392년, 브와디스와프 2세는 많은 폴란드 귀족들이 리투아니아 내전 때문에 병력을 계속 차출해야 하는 것에 불만을 드러내는 데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가 황폐해지고, 리투아니아 주민들의 여론이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에 심한 부담감을 느꼈다. 그는 리투아니아인들의 반감을 사고 있는 스키르가일라를 또다른 형제이며 케르나베 공작인 비긴타스로 교체하려 했지만, 비긴타스는 돌연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비긴타스는 비타우타스 또는 스키르가일라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한다. 결국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비타우타스와 화해하기로 하고, 플로츠크 주교인 마조프셰의 헨리크를 비타우타스에게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 이에 따르면, 비타우타스는 브와디스와프 2세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받든다면 리투아니아 총독으로서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할 수 있었다.

1392년 여름, 비타우타스는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밀 협의를 맺은 뒤 튜튼 기사단에게 인질들을 풀어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아냈다. 이후 자신의 본부인 네만 강 섬에 있는 리터스베르더 성에 기사들을 초대했다. 별다른 의심 없이 초대에 응한 기사 대부분은 생포되었고, 비타우타스의 군대는 흐로드나 인근의 리터스베르더, 메텐부르크 및 노이가르덴 성을 파괴했다. 1392년 8월 4일,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는 오스트루프 협정을 체결하면서 비밀 협의를 비로소 공식화했다. 비타우타스는 자신의 영지를 되찾고 리투아니아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고, 스키르가일라는 키예프 대공으로 부임한 뒤 1397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통치했다. 튜튼 기사단은 비타우타스에게 두 번이나 배신당한 것에 분노해 리투아니아를 반드시 무너뜨리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1395년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내 야드비가의 누이 마리어가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야드비가는 자신이 헝가리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이를 무시하고 마리어의 남편이자 룩셈부르크 가문의 일원이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아들인 지기스문트를 헝가리 국왕으로 받들었다. 그녀는 한동안 "헝가리의 상속자"라는 칭호를 채택했지만, 남편이 헝가리 왕위를 되찾게 해주는 데 별 관심이 없는 데다 교황청이 오스만 술탄국을 상대로 일어난 십자군에 가담한 지기스문트를 지지하자, 어쩔 수 없이 뜻을 거두었다. 1397년, 야드비가와 브와디스와프 2세는 지기스문트와 만나 협의한 끝에 지기스문트가 갈리치나 루테니아 일대를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영구적으로 양도하는 대가로 몰다비아에 대한 주권을 헝가리에게 반납했다. 이후 야드비가는 이노브로츠와프에서 튜튼 기사단장 콘라트 폰 융잉겐과 만나서 도브진을 폴란드 왕국에 반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튜튼 기사단이 이 지역을 포기할 의향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2.1.1.3. 폴란드 단독 군주로서의 치세
1399년 7월 17일 야드비가가 사망했다. 이리하여 폴란드의 단독 국왕이 된 브와디스와프 2세는 1400년 7월 26일에 카지미에시 3세 시절 건설되었다가 방치되었던 크라쿠프 대학을 재건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야기엘론스키 대학교로 명명했다. 1400년 겨울 비타우타스와 만난 뒤 공식적으로 리투아니아 대공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 결의는 1401년 3월 11일 라돔에서 체결된 협정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의 오랜 앙금이 비로소 해소되었다. 1401년 말에는 튜튼 기사단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사모기티아인들을 지원했다.

1402년 1월, 리투아니아 공자 스비트리가일라가 튜튼 기사단으로 망명한 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비타우타스를 타도하고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차지하려 했다. 1402년 3월, 스비트리가일라는 말보르크에서 자신을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언하고 튜튼 기사단이 사모기티아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프스코프에 대한 그들의 소유권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후 리투아니아 내 정교회 신자들의 지원을 받아낸 뒤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함께 리투아니아를 침공해 빌뉴스를 위협했지만, 폴란드군의 지원을 받은 비타우타스의 반격에 직면하자 철수했다. 1402년 7월 기사단이 재차 원정을 벌였지만 비타우타스를 물리치지 못했다. 1403년 2월, 튜튼 기사단과 스비트리가일라는 공세를 재개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3년 브와디스와프 2세가 교황청으로 파견한 사절단은 튜튼 기사단의 리투아니아 공격을 금지하는 교서를 교황으로부터 받아냈다. 이로 인해 휴전이 성립되었고, 튜튼 기사단은 1404년 스비트리가일라와의 동맹을 파기했다. 이후 튜튼 기사단과 브와디스와프 2세, 비타우타스간의 협상이 이어진 끝에 라치용제크(Raciążek)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브와디스와프 2세는 1년 6주 이내에 5만 헝가리 플로린을 튜튼 기사단에게 주고 도브쥔을 구입한다.
2. 브와디스와프 2세는 1년 6주 이내에 2400 프라하 그로센을 지불하고 즈워토리아 성을 구매한다.
3. 비타우타스는 튜튼 기사단이 사모기티아를 소유하는 걸 확인한다.
4. 튜튼 기사단장 콘라트 폰 융잉겐은 리투아니아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포기한다.
5. 콘라트 폰 융잉겐은 폴란드 왕국의 왕관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들과 동맹을 맺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6. 브와디스와프 2세와 튜튼 기사단장은 카지미에시 3세와 튜튼 기사단이 서명한 1343년 칼리슈 평화 협약을 확인한다.
7. 비타우타스는 협의를 위반하면 기사단과의 전쟁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을 받아들이며, 폴란드 왕국은 그를 돕지 않는다.
8. 비타우타스는 자신의 대표자들과 기사단 측 사절들 사이의 협의가 있기 전에 자신의 나라에 망명해온 사모기티아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는 이 협약을 그대로 준수할 생각이 없었고, 서로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해 전력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1408년 사모기티아에서 또다시 튜튼 기사단의 지배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는 이를 지원했다. 튜튼 기사단은 1409년 봄 이를 보복하기 위해 리투아니아로 향하던 폴란드 선박들을 나포하고 곡물을 압수했다. 비타우타스는 이에 대응해 자신의 군대를 사모기티아로 보내 반군을 지원했다. 튜튼 기사단은 즉시 폴란드에 사절을 보내 항의했지만, 브와디스와프 2세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발뺌했다. 이에 당시 튜튼 기사단장 울리히 폰 융잉겐은 헝가리 국왕이자 독일왕 지기스문트와 동맹을 맺고 포메라니아의 여러 공작들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내며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그는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도 가담해주길 바랐지만, 이들은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의 공격을 우려했기 때문에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 역시 튜튼 기사단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력을 끌어모았고, 각지에서 용병들을 데려왔다. 특히 보헤미아에서 이름을 한창 날리고 있던 용병대장 얀 지슈카가 비타우타스에게 고용되었다. 1410년 전반기,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는 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체르빈스크 근처에 건설된 다리를 건너 비스툴라 강을 건넜다. 1410년 7월 15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1만 6천~3만 9천 명과 튜튼 기사단군 1만 1천~2만 7천 명이 그룬발트 전투에서 격돌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이 전투에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지만 끝내 대승을 거두었고, 튜튼 기사단장 울리히 폰 융잉겐을 비롯한 수많은 튜튼 기사들이 전사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튜튼 기사단의 수도인 말보르크를 포위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양자는 1411년 2월 1일 토룬 평화 협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폴란드 왕국은 즈워토리아와 보브로니키 등 도브쥔 일대를 즉시 되찾는다.
2. 튜튼 기사단은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가 살아있는 동안 사모기티아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한다.
3. 마조프셰 공국은 조크레를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돌려받는다.
4.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에게 점령된 토룬과 헤움노를 튜튼 기사단에게 돌려준다.
5. 양측 상인들은 고대 관습에 따라 육로와 수로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6. 튜튼 기사단은 1천만 프라하 그로센을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포로들을 넘긴다.
7. 양측이 점령한 땅, 도시, 성은 이전 통치로 돌아가고, 전쟁 중 폴란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은 맹세를 준수할 의무에서 풀려난다.

이리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튜튼 기사단간의 평화 협의가 이뤄졌지만, 양자간의 분쟁은 여전히 이어졌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지기스문트와 튜튼 기사단간의 동맹을 깨뜨려서 튜튼 기사단을 좀더 옥죄기로 마음먹고, 1412년 3월 15일 루보울라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지기스문트와 브와디스와프 2세는 서로를 더 이상 적대하지 않기로 했고, 루테리아와 포돌리아는 지기스문트와 브와디스와프 2세 중 한 명이 사망할 때까지 폴란드의 일부로 인정되며, 통치자 한 명이 사망한 후 폴란드와 헝가리 영주들의 공동 위원회가 그들의 추가 운명을 결정하기로 했다. 또한 몰도바는 폴란드 왕국의 영토로 남게 되고, 폴란드는 그 대가로 지기스문트가 오스만 술탄국에 대항하는 것을 지원하기로 했다. 또한 포란드는 헝가리가 왈라키아를 다스리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1413년 10월 2일, 폴란드 왕국의 영토인 흐루비에슈프 인근 부 강 유역의 호로드워 마을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 의회가 개최되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이 의회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리투아니아, 루테니아, 사모기티아 출신 귀족들의 권리를 폴란드 귀족과 동등하게 만들었고, 리투아니아와 사모기티아 및 루테니아의 귀족 가문들의 문장을 폴란드 귀족 가문과 동등한 권위로 체택했다. 그러면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폴란드 왕국의 왕관에 통합한다는 입장을 재차 밝혔으며, 국장에 폴란드의 상징과 리투아니아의 상징을 동등하게 사용하기로 했다. 그는 이를 통해 양국이 서로를 인정하고 동질 의식을 가져서 국가 통합이 이뤄지기를 희망했다.

1414년 여름,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가 튜튼 기사단국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재발했다. 튜튼 기사단은 회전을 벌이기를 거부하고 요새에 틀어박히면서 청야 전술을 사용했고, 이 바람에 프로이센 전역에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튜튼 기사단이 농성하는 여러 성들을 장기간 포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교황 특사인 로잔의 윌리엄이 외교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자고 제안했고, 양자는 이를 받아들여 그해 10월 스트라스부르에서 2년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와 바타우타스는 때마침 개최된 콘스탄츠 공의회에 그니에즈노 대주교 미코이 트라바가 이끄는 폴란드 및 사모기티아 사절단을 보내 튜튼 기사단과의 분쟁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했다. 튜튼 기사단 역시 이에 맞서 사절단을 보내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 튜튼 기사단은 리투아니아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척만 했다는 구실을 들어 전쟁을 이어갔고, 리투아니아인들은 이에 맞서 콘스탄츠 공의회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의회는 논의 끝에 1417년 10월 24일 바르니아이 교구를 세우고 리투아니아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이 반 폴란드-리투아니아 선전을 이어가고 습격전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자, 브와디스와프 2세는 지기스문트와 교황 마르티노 5세에게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특히 지기스문트는 1420년 1월 브로츠와프에서 튜튼 기사단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중재안을 내놓는 등 기사단을 편드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1422년 양자간의 전쟁이 발발했고, 폴란드군은 니에자와, 무르지노보, 올워보를 공략했으며, 리투아니아군은 주무츠를 확보했다. 이들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던 튜튼 기사단은 1422년 9월 27일 멜노 협약을 체결해 사모기티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완전히 포기했다. 폴란드 왕국은 이에 대한 대가로 포메라니아, 헤움노, 미하우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 무렵, 후스 전쟁을 치르고 있던 후스파로부터 보헤미아 왕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한동안 고심한 끝에 이를 거부했지만, 리투아니아 공자 지그문트 코리부토비치를 프라하로 보내 후스파의 임시 지도자가 되게 했다. 이에 압박감을 느낀 지기스문트는 1423년 케즈마로크에서 튜튼 기사단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브와디스와프 2세는 그 대가로 후스파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이후 친 룩셈부르크파인 즈비그뉴 올레스니키가 크라쿠프 대주교에 선임되면서, 브와디스와프 2세와 지기스문트는 우호적인 관계로 전환했다.

1424년 10월 31일, 브와디스와프 2세의 장남 브와디스와프 3세가 태어났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통치자가 되는 걸 보장받게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폴란드 왕좌에 대한 그의 권리는 이전의 아내 야드비가와 결혼한 덕분에 주어진 것이었기에, 폴란드 귀족들은 그의 아들이 폴란드 국왕이 되는 걸 그냥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이에 브와디스와프 2세는 도시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대가로 아들의 계승을 보장받고, 귀족들에게 수많은 특권을 부여했다. 특히 1430년 에들니아에서 폴란드 귀족에게 개인적인 불가침성을 보장하는 특권을 부여했다. 1429년, 지기스문트가 루츠크 회의에 참석해 그에게 비타우타스를 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인정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내심 이를 껄끄럽게 여겼지만, 리투아니아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비타우타스와 이 일로 갈등이 생기길 원하지 않아 받아들였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은 비타우타스의 대관식을 반대했다. 그러다가 비타우타스가 1430년 10월 27일에 사망하면서, 이 문제는 흐지부지되었다.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비타우타스 사후 스비트리가일라를 리투아니아의 새 대공으로 선출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루테니아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톨릭과 정교회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했다. 폴란드 귀족들은 리투아니아인들이 폴란드 왕국 의 승인 없이는 새로운 대공을 선출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1413년 호로드워 합의를 위반했다며 불만을 제기했지만,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비타우타스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1430년 11월 7일에 스비트리가일라의 선출을 승인했다.

그러나 1430년 가을, 폴란드 귀족 그리츠코 케르디비치(Grytsko Kerdeevich), 테오도리크 부차츠키(Theodoric Buchatsky), 미하일 부차츠키(Michal Buchatsky) 등이 카메네츠 성을 무단으로 공략하고 리투아니아 수비대를 사로잡은 뒤 포돌리아 일대의 모든 요새를 공략하고 리투아니아 총독을 추방한 사건이 벌어졌다. 폴란드군은 여세를 이어가 볼히니아를 첨령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접한 스비트리가일라는 브와디스와프 2세와 측근들을 가택 연금했다. 얀 드우고시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9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던 과거를 상기시키며, 이제는 브와디스와프 2세 본인이 그리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포돌리아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계속 감옥에 갇혀 있게 하거나 심지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브와디스와프 2세는 1431년 8월 15일에 의회를 설립해 폴란드 귀족들이 무단으로 점령한 영토를 스비트리가일라에게 돌려주기로 결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후 카메네츠 성에 머물던 폴란드 귀족들에게 서신을 보내 당장 포돌리아의 모든 도시와 성을 리투아니아 총독에게 반환하라고 명령했고, 스비트리가일라는 교황 마르티노 5세로부터 당장 형제를 석방하라는 압력을 받고 석방했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 2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1431년 2월 즈비그뉴 홀샨스키의 지도하에 산도미에시에 집결한 뒤 왕이 협박을 받고 그런 약속을 했으니 원천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스비트리가일라에게 브와디스와프 2세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라고 요구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이를 거부하고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게 비타우타스에게 수여될 예정이었던 리투아니아 왕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튜튼 기사단, 몰다비아, 킵차크 칸국 등 주변국들에게도 사절단을 보내 폴란드를 협공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1431년 6월 25일, 폴란드군이 볼히니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볼히니아, 호로드워, 볼로디미르-볼린스키 및 즈브라 일부를 점령하고 루츠크 인근에서 스비트리가일라의 군대를 격파한 뒤 스비트리가일라를 루츠크 성에 가두고 포위 공격했다. 한편, 튜튼 기사단은 일전에 합의한 대로 폴란드에 전쟁을 선포하고 침공을 개시해 드브진을 황폐화하고 니에자와를 점령한 뒤 쿠야비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1431년 9월 13일 당브키 전투에서 패배한 뒤 본국으로 퇴각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한동안 버티다가 8월 20일에 평화 협상을 제안했고, 그해 9월에 폴란드, 리투아니아, 튜튼 기사단 사이에 합의가 스타리초르토리스크에서 이뤄지면서 2년간의 휴전 협정이 이뤄졌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2세는 자신에게 수모를 준 스비트리가일라를 용납할 생각이 없었고, 리투아니아 귀족들을 포섭해 그에게 대항하게 만들려 했다.

1432년 4월, 스비트리가일라는 폴란드 측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인정해줄 테니, 브와디스와프 2세를 주군으로 받들어달라. 그리고 당신이 죽으면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들 중 한 명에게 돌아가게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제안을 거부했고, 폴란드 귀족들은 그를 회유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음모를 밀어붙였다. 1432년 8월 31일 밤,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와 추종자들이 아시미아니에 머물고 있던 스비트리가일라 가족을 습격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그의 임신한 아내인 트베리의 안나가 구금되는 동안 폴로츠크로 탈출했다. 이후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가 리투아니아의 새 대공이 되었고, 브와디스와프 2세를 주군으로 받들 것이며 자신이 죽으면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들 중 한 명이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지기만타스는 포돌리아와 볼히니아를 폴란드에 양도하겠다고 밝혔고,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톨릭과 정교회 귀족 모두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그후 리투아니아는 지기만타스를 지지하는 리투아니아 본토, 사모기티아, 포들라스키에, 흐로드나, 민스크 등 서부와 스비트리가일라를 지지하는 폴로츠크, 비테브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볼히니아 등 동부로 양분되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지기만타스에 대항하기 위해 킵차크 칸국의 셰이드 마흐메드 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세이드는 자국의 영역을 갉아먹던 리투아니아를 우방국으로 돌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받아들였다.

1432년 12월 8일, 지기만타스의 군대와 스비트리가일라-세이드의 연합군이 야시미아니에서 격돌했다. 양군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얀 드우고시에 다르면, 스비트리가일라의 병력 중 1만 명이 사망하고 4천 명이 생포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기만타스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에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지 못했다. 1433년 7월과 8월, 스비트리가일라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리다, 크레바, 에이시슈케스를 습격하고 빌뉴스, 트라카이, 카우나스 교외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전역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1433년 6월, 폴란드는 튜튼 기사단이 스비트리가일라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을 통해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스파와 동맹을 맺었다. 그후 후스파는 4개월 동안 튜튼 기사단의 영역인 노이마르크, 포메라니아, 서부 프로이센을 황폐화시켰고, 뒤이어 그단스크를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이후 발트해에 도달한 뒤 병에 바닷물을 채워서 자신들의 여정이 성공했음을 자축했다. 이에 심한 압박감을 느낀 튜튼 기사단은 폴란드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고, 1433년 12월 15일 웽치차에서 폴란드와 기사단간의 12년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후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스비트리가일라에 대한 지원을 일체 중단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리투아니아에서 이같은 혼란이 이어지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루테니아로 가던 중 메디카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감기에 걸렸고, 이후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다가 1434년 6월 1일 그로데크 야기에우워스키에서 사망했다.

2.1.2. 브와디스와프 3세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사후인 1434년 7월 25일, 장남 브와디스와프 3세가 바벨 대성당에서 폴란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0살이었기에, 섭정을 둬야 했다. 어머니 조피아 홀샨스캬는 리투아니아 출신인 점 때문에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폴란드의 국정에 간섭할 것을 우려한 폴란드 귀족들의 거센 반발 때문에 섭정이 되지 못했고, 크라쿠프 주교 즈비그뉴 올레스니키를 비롯한 유력한 성직자 및 귀족들이 섭정을 맡았다. 하지만 조피아는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가 등극하기 앞서, 조피아의 막내 여동생 마리아의 남편이며 몰다비아 공국의 공작이었던 일리아슈는 형제 슈테판과 여러 귀족들의 반란으로 축출된 뒤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망명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2세는 새 몰다비아 공작이 된 슈테판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낸 뒤 일리아슈를 감옥에 가두었다. 1435년 여름, 조피아는 아들과 섭정단을 구슬려서 일리아슈가 석방되어 몰다비아로 돌아가게 했다. 몰다비아에 귀환한 일리아슈는 폴란드의 지원에 힘입어 슈테판을 상대로 포드라가 전투에서 승리한 뒤, 슈테판과 함께 권력을 공유하는 조건으로 복위했다. 그 후 일리아슈는 몰다비아에 대한 폴란드의 주권을 인정했다. 조피아는 이와 더불어 브와디스와프 3세와 당시 헝가리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의 상속녀였던 룩셈부르크 공작 부인 안과 약혼시키는 계획을 지원했지만, 안이 작센 공작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빌헬름과 결혼하면서 무산되었다.

브와디스와프 3세가 즉위했을 당시, 폴란드 왕국은 스비트리가일라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복위시키려는 튜튼 기사단을 상대로 리투아니아 현 대공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와 함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1435년, 스비트리가일라는 리투아니아인과 폴로츠크, 비테브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볼히니아 출신의 루테니아인,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용병대, 킵차크 칸국 출신의 최소 타타르인 5백 명, 튜튼 기사 몇 명을 포함해 총 1만 1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리투아니아 중심부의 빌뉴스와 트라카이를 향해 진격했다. 지기만타스는 이에 맞서 사모기티아, 포들라스키에, 흐로드나, 민스크 일대에서 동원한 리투아니아군 5천 명을 지휘했고, 야쿠브 코빌란스키가 이끄는 폴란드군 4천 명이 지기만타스에 가세했다.

양군은 1435년 9월 1일 빌코미에시 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9 km 떨어진 지점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스비트리가일라는 전군이 궤멸되는 참패를 입고 추종자 서른 명과 함께 폴로츠크로 달아났다. 이 전투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튜튼 기사단과 함께 1435년 12월 31일 브제시치 쿠야브스키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당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더 이상 리투아니아나 폴란드의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며, 전쟁 배상금으로 9500 헝가리 줄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1437년, 헝가리, 보헤미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사망했다. 이에 즈비그뉴 올레스니키는 지기스문트의 뒤를 이어 헝가리 국왕이 된 알브레히트 2세에게 브와디스와프 3세의 헝가리 계승을 보장받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당시 알브레히트 2세가 보헤미아 국왕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후스파 보헤미아 귀족들은 올레스니키에게 브와디스와프 3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제안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올레스니키는 후스파에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조피아는 아들이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기회를 걷어차버린 것에 깊은 반감을 품고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올레스니키와 정쟁을 벌였다.

1438년 4월, 로키차니의 요한 대주교가 이끄는 보헤미아 귀족들은 쿠트나 호라에서 선거를 실시해 브와디스와프 3세의 형제인 카지미에시 4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추대했다. 이에 알브레히트 2세는 헝가리군을 이끌고 프라하로 진군한 뒤 6월에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러자 보헤미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셍지워이 오스트로로그, 얀 텡친스키가 지휘하는 폴란드군 5천 명이 이들과 합류해 알브레히트 2세를 몰아붙였다. 결국 보헤미아에서 물러난 알브레히트 2세는 군대를 대대적으로 징발해 보헤미아 반란 세력 및 폴란드군과 대결했다.

양자간의 대결은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았고, 브와디스와프 3세는 보헤미아에서 활동하는 폴란드군을 강화하기 위해 1438년 9월 20일 소폴란드 출신 징집병들을 이끌고 오포예를 점거한 뒤 몇몇 상부 실레시아 공작들을 복속시켰다. 여기에 대폴란드 징집병들은 밀리츠를 파괴한 뒤 브제크를 공략했다. 그러다가 오스만 술탄국이 헝가리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알브레히트 2세는 휴전을 제안했다. 이후 양자는 1439년 2월 10일 니미스우프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1439년, 소폴란드 출신 귀족인 스피테크 멜슈틴스키의 지휘하에 노베 미아스토 코르친에서 귀족 연합이 신설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간섭하려 드는 즈비그뉴 올레스니키 주교를 실각시킬 때까지 싸우기로 맹세했다. 조피아 왕비는 초기엔 이들을 지지했지만, 올레스니키가 단호한 태도로 군대를 동원해 맞서는데다 본인이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자, 입장을 바꿔 올레스니키 주교와 타협하고 스피테크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결국 반란군은 그로트니키 전투에서 참패했고, 스피테크는 전사했다. 이후 올레스니키는 스피테크 등이 추진했던 카지미에시 4세의 보헤미아 국왕 옹립 계획을 백지화했다.

1439년 10월 27일, 알브레히트 2세가 헝가리 남부 일대를 약탈하는 오스만 술탄국에 대한 군사 원정을 준비하던 중 심각한 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임신한 아내 엘리자베트가 아들을 낳으면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를 물려주겠으며, 아내와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5세에게 섭정을 맡기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오스만 술탄국의 헝가리 침공을 두려워한 헝가리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않은 아기를 왕으로 받들라는 유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웃나라인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를 왕으로 받들고, 엘리자베트에게 브와디스와프 3세와 재혼할 것을 제안했다. 엘리자베트는 처음에는 권고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의사로부터 아들을 낳을 거라는 예측을 접하자 남편의 유언을 따르기로 했다. 그녀는 하녀 헬레네 코타너(Helene Kottanner)에게 비셰그라드 성에 있는 성 이슈트반 왕관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헬레네가 왕관을 성공적으로 빼돌려서 가져왔는데, 바로 그 날 엘리자베트는 진통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엘리자베트는 아들을 낳았고, 에스테르곰 대주교 세치 데네시(Szécsi Dénes 1410~1465)는 아기에게 세례를 주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였던 오스트리아 공국은 갓난아기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알브레히트 2세의 유언에 따라 프리드리히 5세를 섭정으로 지명했다. 엘리자베트는 폴란드에 사절을 보내 헝가리 귀족 대표들에게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와 협상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헝가리 귀족들은 단호히 거부하고 1440년 3월 8일 브와디스와프 3세를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울라슬로 1세로 선출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엘리자베트에게 자신과 결혼한다면 그녀의 아이가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에서 군림하도록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브와디스와프 3세의 제안을 거부하고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아들을 데려가서 1440년 5월 15일 세치 데네시의 주관하에 대관식을 치렀다. 6일 후 브와디스와프 3세가 폴란드-헝가리 귀족 연합군을 이끌고 부더에 입성하자, 엘리자베트는 아들과 함께 쇼프론으로 도주했다.

거러이 라슬로(Garai László 1410~1459), 브란코비치 주라지, 프리드리히 5세, 첼레 백작 울리크 2세를 포함한 여러 도시와 독일계 군주들은 어린 왕을 지지했지만, 대다수 헝가리 귀족들은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에 맞서려면 아기보다는 성인이 훨씬 낫다고 여겼기에 브와디스와프 3세가 집권하는 편이 낫다고 확신했다. 1440년 6월 29일, 헝가리 의회는 라슬로 5세의 즉위를 무효로 선언했다. 7월 17일 세치 데네시는 압력에 못이겨 헝가리의 초대 국왕인 이슈트반 1세의 무덤에서 가져온 왕관을 브와디스와프 3세의 머리 위에 씌웠다.

엘리자베트는 브와디스와프 3세에 대항하고자 1440년 11월 22일 노이슈타트에서 프리드리히 5세와 협약을 맺었다. 쇼프론을 프리드리히 5세에게 저당잡혔고, 성 이슈트반 왕관 역시 그에게 넘겼다. 이후 라디슬라우스는 프리드리히 5세의 궁정에서 살았다. 또한 그녀는 보헤미아인 용병대장 얀 이스크라(Jan Jiskra z Brandýsa 1400~1469)에게 커셔를 비롯한 12개 마을을 장악하게 했다. 그러나 1441년 초 후냐디 야노시와 우일러키 미클로시(Újlaki Miklós 1410~1477)가 이끄는 헝가리군이 라슬로 5세 지지를 천명한 적군을 상대로 바트셰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브와디스와프 3세와 휘하 지휘관들은 헝가리 서부와 동부 영토를 장악했지만, 엘리자베트의 추종자들은 에스테르곰, 죄르, 프레스부르크 및 여러 도시들과 함께 헝가리 북부 일대를 계속 장악했다.

이렇듯 브와디스와프 3세가 헝가리 문제에 전념하던 1440년 3월 20일, 리투아니아 대공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가 차르토리스키 공작 이반 바실리예비치와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빌뉴스 총독 얀 도브거드, 트라카이 총독 표트르 렐루쉬 등에게 피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올레스니키는 브와디스와프 3세를 설득해 당시 12살이었던 카지미에시 4세를 리투아니아 총독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 3세가 헝가리 문제로 정신없는 틈을 타 1440년 6월 29일 카지미에시 4세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옹립했다. 동생과 쓸데없이 마찰을 벌일 겨를이 없던 브와디스와프 3세는 이를 용인해주기로 했다.

1442년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더 이상 내전을 벌일 수는 없다고 판단한 브와디스와프 3세는 그해 12월 13일 죄르에서 엘리자베트와 만나서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특사 줄리아노 체사리니의 중재 하에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엘리자베트는 브와디스와프 3세를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인정했지만, 아들의 왕위 계승권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3일 후 엘리자베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라디슬라우스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렸다. 이에 대해 그녀가 브와디스와프 3세와 체사리니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오스만 술탄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왕실 재산을 대규모로 저당잡혔고, 귀족들에게 막대한 돈을 빌렸다. 1443년 10월, 군자금을 충분히 모은 그는 오스만 술탄국을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1443년 11월 3일 알렉시나츠 인근에서 첫번째 승리를 거두었고, 그 해 12월 1일 소피아를 점령하고 불태웠으며, 12월 12일 즐라트니차에서 투르크군을 다시 한 번 격파했다. 하지만 12월 15일 즐라트니차 요새에서 농성하는 투르크군을 무너뜨리지 못하자 멜스트니차로 후퇴했고, 12월 24일 그곳으로 쫓아온 투르크군을 격파했다. 1444년 1월 2일, 그는 쿠노비차 협곡에서 투르크군을 격파했다. 이후 양국은 평화 협상을 벌였고, 1444년 6월 12일 세게드에서 10년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오스만 술탄 무라트 2세는 세르비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24개의 다뉴브 강 유역 성들을 헝가리인과 세르비아인에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3세는 1444년 8월 4일 교황 특사 줄리아노 체사리니로부터 "부르고뉴군과 베네치아 함대가 도와줄 테니 이교도와의 휴전 협약을 파기하고 공세를 이어가라"는 주장에 따르기로 마음먹고 협정을 깨뜨렸고, 9월에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헝가리-폴란드-왈라키아 연합군 2만 5천 명을 이끌고 에디르네로 진격했다. 그의 군대는 9월에 비딘, 10월에 슈멘, 11월 6일에 프로바디아를 점령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함대가 무라트 2세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나톨리아에서 발칸 반도로 건너오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안전한 후방으로 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1444년 11월 10일, 베네치아 함대와 조우하기 위해 바르나 해안에 머물던 브와디스와프 3세의 군대는 6만 명에 달하는 투르크군과 조우했다. 이후 벌어진 바르나 전투에서, 중앙 부대를 이끌던 후녀디 야노시가 튀르크군을 격파하고 시파히 지휘관 카라자 파샤가 전사하면서 한때 기독교 측이 유리해지는 듯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적군이 지휘관의 전사로 혼란에 빠진 것을 보고, 자신이 도와주러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는 야노시의 권고를 무시하고 폴란드 중기병대를 이끌고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예니체리 부대에게 포위되어 삽시간에 궤멸되었다. 이후 폴란드-헝가리 군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후녀디 야노시는 나머지 병력을 가까스로 수습해 헝가리로 귀환했다. 일설에 따르면, 브와디스와프 3세는 타고 다니던 말에서 낙마한 뒤 코자 기즈르(Kodża Hyzyr)라는 이름의 예니체리 병사에게 목이 베어졌고, 무라트 2세는 그의 수급을 전달받은 뒤 꿀 단지에 보관하라고 명령했다. 수년 후, 무라트 2세는 꿀 단지에 담긴 그의 수급을 손님들에게 보여줬다고 한다.

2.1.3.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

2.1.3.1. 폴란드 공위기
브와디스와프 3세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 술탄국에게 참패한 후, 수년간 그가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때문에 헝가리 귀족들은 1445년 6월 1일까지 브와디스와프 3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끝내 돌아오지 않자, 지난날 브와디스와프 3세와 헝가리 왕위를 놓고 경쟁했던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를 헝가리 국왕으로 옹립했다. 한편 폴란드 귀족들도 한동안 브와디스와프 3세가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자 1445년 4월 시에라츠에서 회의를 소집한 뒤 리투아니아 대공을 맡고 있던 동생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를 폴란드 국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카지미에시 4세가 폴란드 왕위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자신들의 고귀한 특권을 확인 및 확장하며, 리투아니아를 폴란드에 종속시키길 바랐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4세는 폴란드 귀족에 대한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강화하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들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는 형이 확실히 죽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자신은 형의 귀환을 기다리겠다고 답했다.

카지미에시 4세가 폴란드 왕위 계승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자, 올레스니키는 그의 속셈을 눈치채고 리투아니아를 폴란드에 종속시키는 것을 받아들일 리투아니아 대공을 세우는 방안을 모색했다. 이보다 앞서, 전임 리투아니아 대공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의 외아들 미하즈우슈카 지기만티타스는 아버지가 살해된 뒤 사모기티아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리타아니아 대공위를 놓고 카지미에시 4세에 대적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고 마조프셰 공국에 망명가 있었다. 올레스니키는 그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내세워서 카지미에시를 압박하려 했다. 이에 카지미에시 4세는 미하즈우슈카가 리투아니아로 오는 것을 막기 위해 튜튼 기사단장 콘라드 폰 에를리히스하우젠과 폴란드를 공동으로 견제하기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이후에도 카지미에시 4세가 폴란드 왕위에 오르는 것을 계속 지연시키자, 올레스니키는 폴란드 왕위에 대한 다른 후보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 바르샤바 공작 볼레스와프 4세를 폴란드 국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다른 폴란드 귀족들이 이에 호응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이에 카지미에시 4세의 모친인 조피아 왕비가 나섰다. 1446년 4월 24일, 빌지체에 열린 회의에 참석한 소폴란드 귀족들은 카지미에시 4세를 폴란드 국왕으로 선포하고 리투아니아 출신인 표트르 쿠로프스키에게 카지미에시 4세를 설득하게 했다.

이후 어머니와 쿠로프스키의 간절한 설득을 받은 카지미에시 4세는 1446년 9월 17일 폴란드 국왕 직위를 받아들이겠다고 선포했다. 그 대신, 리투아니아가 폴란드 왕위에 속한다는 것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게 했다. 이 때부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2개의 동등한 국가 기구를 구성하게 되었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동등한 지위로 취급되었다. 1447년 5월 2일, 카지미에시 4세는 빌뉴스에서 리투아니아 영토의 불가침성을 보장해 폴란드 영주들이 더 이상 현재 리투아니아에 속한 볼히니아와 포돌리아 동부를 요구할 수 없도록 하는 법령을을 발령했다. 그리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모든 공직을 리투아니아인으로 채우게 했다. 이하여 장장 3년간 이어졌던 폴란드 공위기는 막을 내렸다.
2.1.3.2. 초기 치세
1447년 8월 25일, 카지미에시 4세는 바벨 대성당에서 그니에즈노 대주교 윈첸티 코트의 주관하에 폴란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자신 대신 다른 사람을 폴란드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여러 차례 세웠던 크라쿠프 주교 즈비그뉴 올레스니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하기로 했다. 때마침 1447년부터 1449년까지 교황 직을 놓고 니콜라오 5세 대립교황 펠릭스 5세간의 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올레스니키가 펠릭스 5세를 지지하자, 그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니콜라오 5세를 교황으로 받들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대가로 성직과 교회 직위를 자기 지지자들로 채울 권리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니콜라오 5세는 그에게 교회 고위직 스무 명을 임명하고 타타르족과의 싸움을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1만 두카트를 모을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1448년, 미하즈우슈카가 크림 칸국의 도움을 받아 키예프, 스타로두보, 노브고로드-시베르스키를 공략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공격으로 체포된 뒤 모스크바로 끌려갔다가 1452년경에 중독사했다. 카즈미에시 4세는 미하즈우슈카를 지지했던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했고, 올렐코 브워지이메조비츠를 새 키예프 총독으로 선임했다.

1449년, 니콜라오 5세는 펠릭스 5세를 물리치고 교황으로서 보편적인 인정을 받았다. 니콜라오 5세는 올레스니키와 화해한 뒤 그에게 내려줬던 특권을 거둬들이려 했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4세는 특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폴란드 주교직을 임명했다. 이로 인해 파문을 선고받았지만 무시했다. 이리하여 폴란드 교구직에 추종자들을 마음껏 임명할 수 있게 된 카지미에시 4세는 1452년 오순절에 올레스니키 반대자 및 추종자들을 산도미에시로 불러모아 일주일간 회의를 열고 올레스니키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카지미에시 3세의 유대안에 대한 관용 조치를 지지했다. 그러나 폴란드 국왕이 된 이래 귀족들의 특권을 좀처럼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대폴란드의 여러 귀족들이 올레스니키를 지지하면서 내전이 발발할 위기에 봉착하자, 카지미에시 4세는 일단 올레스니키와 화해했다. 올레스니키는 이후에도 카지미에시 4세와 지속적으로 반목하면서도 크라쿠프 주교직을 유지하다가 1455년에 사망했다.

1453년 6월 24일, 피오트르쿠프에서 열린 왕실 귀족 회의에서, 카지미에시 4세는 장차 있을 튜튼 기사단과의 전쟁에서 귀족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 그들의 특권을 공인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 폴란드의 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이자 루스의 세습 영주인 카지미에시는 이 신성한 복음을 바탕으로 나의 폴란드 왕국의 성직자와 세속적 모든 권리, 자유, 특권, 유증 및 보조금을 다음과 같이 맹세하고 맹세하며 약속한다. 교회와 폴란드 왕국, 주교와 공작, 영주, 기사, 도시, 주민, 일반적으로 모든 계급과 직업의 모든 신민, 왕자, 왕, 통치자 및 모든 영주와 상속인에게. 축복받은 기억의 폴란드 왕국, 즉 내 아버지 브와디스와프와 내 형제 브와디스와프에 의해 폴란드 왕들이 부여하고 부여한 것을 모든 조건과 설명 하에서 유지하고 유지하고 실행할 것이다. 이 왕국에서 부당하게 분리되거나 분리된 것이 무엇이든, 나는 최선을 다해 그것을 복원하고 국가 전체와 통합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는 국경을 축소하지 않을 것이며, 온 힘을 다해 국경을 방어하고 확장하려고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그 후 카지미에시 4세는 피오트르쿠프에서 공언한 대로 확장정책을 실시했다. 1454년 3월 실레시아에 속한 오시미엥침 공작 요한 4세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하였으며, 1456년에는 자토르 공국을 획득했고, 1457년 2월에는 오시비엥침 공국을 구매해 폴란드 왕국에 통합시켰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주요 목표는 튜튼 기사단이 장악하고 있던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튜튼 기사단은 이 지역을 폴란드로부터 탈취한 이래 폴란드와 오랜 세월 무력 충돌을 벌였고, 폴란드 상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했으며, 폴란드인들이 포마라니아 도시들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 결과 비스툴라 강과 발트해 연안의 도시들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튜튼 기사단을 완전히 제압하고 고토를 회복하기로 마음먹었다.
2.1.3.3. 13년 전쟁
1440년, 프로이센 내 반 튜턴 조직인 '프로이센 연맹'이 설립되었다. 귀족과 상인들로 구성된 이들은 폴란드 통치자들에게 프로이센의 권력알 장악할 것을 수시로 요청했다. 1453년 12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는 튜튼 기사단의 요청에 따라 프로이센 연맹을 즉각 청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연맹은 이에 따르지 않고 1454년 2월 6일 기사단을 몰아내기 위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기사단의 본거지인 말보르크와 슈툼을 제외한 프로이센 전역이 연맹에 넘어갔다. 이후 연맹은 크라쿠프로 사절을 보내 카지미에시 4세에게 프로이센 전체를 바칠 테니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1454년 3월 6일, 연합 대표들은 2주간의 협상 끝에, 폴란드에서 분리된 포메라니아의 정당한 상속인인 폴란드 국왕에게 프로이센 전체를 바친다는 내용의 공식 문서를 발행했고, 카지미에시 4세는 프로이센 합병 법안을 반포했다. 카지미에시 4세가 반포한 법은 모든 국가 특권과 지역 권리의 유지를 보장하고 폴란드 귀족과 동일한 권리를 추가로 부여했으며, 가장 중요한 권리인 국왕 선거에 참여할 권리를 부여했다. 또한 프로인센 항구의 관세와 난파된 선박에서 일부 재산을 가져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튜튼 기사단이 도입했던 모든 관세와 수수료가 폐지되었으며, 프로이센 상인들은 폴란드에서 무역의 자유를 얻었다.

튜튼 기사단은 이에 대응해 신성 로마 제국 내 용병들을 고용한 뒤 반격을 개시해 그해 3월 호즈니체를 탈환했다. 여기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에게 노이마르크를 넘겨주는 대가로 독일과 보헤미아에서 용병을 모집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이에 카지미에시 4세는 튜튼 기사단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대폴란드 귀족들은 전쟁에 회의적이었고, 왕이 새로운 특권을 부여하지 않으면 싸우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카지미에시 4세는 체레크비체-니에스와 법령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국왕은 세임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세금을 채택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아야 하며, 귀족이 제시한 후보자를 영지의 주인, 법원 관리, 서기 등에 임명하기로 약속했다. 여기에 왕의 직속 관료들은 각 지역의 의장을 맡은 스타로스타 직책을 맡은 기회를 박탈당했다. 이러한 특권은 군주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귀족 전체의 위세가 강해지게 했고, 세임의 역할이 늘어나면서 장차 폴란드 정국을 좌지우지하게 될 배경이 되었다.

체레크비체-니에스와 법령 반포 후, 대폴란드와 프로이센, 그리고 용병 부대 1만 8천 명이 카지미에시 4세에게 귀속되었다. 대부분의 병력은 대폴란드에서 징발되었고, 카지미에시 4세와 포즈난 총독 우카시 고르카, 칼리슈 총독 스타니스와프 오스트로그, 브제크 총독 미코와이 샤를레이스키 등이 군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폴란드군은 군자금이 부족해 전투력이 우수한 용병대를 제대로 고용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1454년 9월 18일 호이니체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 튜튼 기사단에게 참패했다. 그후 기사단은 잃어버린 요새 상당수를 탈환했다.

상황이 이렇듯 악화되자, 카지미에시 4세는 보헤미아 및 실레시아 군인들을 고용해 포메라니아 전선으로 보내기 위해 폴란드 왕국 전역에 징수금을 한꺼번에 거둬들이기로 했다. 이에 소폴란드 귀족들이 오포카에서 그가 대폴란드 귀족들과 맺었던 체레크비체-니에스와 법령에서 제시한 것과 유사한 특권을 자신들에게 내려달라고 요청했고, 카지미에시 4세는 곧바로 받아들였다. 그후 카지미에시는 1454년 11월에 왕이 새로운 법률을 제정할 때, 군대 동원을 부과할 때, 새로운 세금을 부과할 때 귀족들의 의회인 세임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니에자와 법령을 반포함으로써 귀족들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이렇게 많은 특권을 귀족들에게 넘긴 대가로 기명 3천 명과 용병 3천 명을 새로 고용하는 데 성공한 뒤, 카지미에시 4세는 반격에 착수했다. 튜튼 기사단은 이들과 공개 전투로 싸우기엔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전투를 피했고, 폴란드군은 오스트리아 용병 프리츠 로웨넥이 수비대장으로 있던 레센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을 점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공성전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후 카지미에시 4세는 용병들에게 돈을 지불하기 위해 성직자들로부터 돈을 빌렸고, 스톨프에서 북부 포메라니아 공작 공작 에리히 2세에게 2개 도시를 영지로 주는 대가로 그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리투아니아에서 반란이 터지는 바람에, 그는 그곳으로 가서 1455년 여름까지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튜튼 기사단은 카지미에시 4세가 리투아니아로 가 있느라 포메라니아에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공세를 개시해 1455년 4월 17일 쾨니히스베르크 시를 포함한 프로이센 동부 일대를 회복했다. 이들이 이토록 빨리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카지미에시 4세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포메라니아 각지에 대규모 전쟁세를 매겨서 민심이 악화된 것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크나이호프는 동프로이센에서 유일하게 카지미에시 4세에 대한 충성을 이어갔지만, 튜튼 기사단장 하인리히 로이스 폰 플라우엔이 지휘하는 기사단의 포위 공격 끝에 1455년 6월 14일에 함락되었다. 폴란드군은 이후에도 연이은 패배를 겪었고, 나중에는 비르미아를 상실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자금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용병들에게 돈을 지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보헤미아인 울리히 체르윈카가 이끄는 용병대는 마리엔부르크, 디르샤우, 아일라우를 무단으로 점령한 뒤 폴란드 측과 협상한 끝에 1457년 6월 6일에 이 성들을 매각했다. 울리히 체르윈카는 포란드 치안관이 되었으며, 다른 3개의 영지도 별다로 수여받았다. 기사단은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세를 새로운 동맹자로 끌어들이기도 했지만, 크리스티안 1세는 스웨덴과 전쟁을 치르느라 바빠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후 양측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의 중재하에 평화 협상을 벌였다. 이때 폴란드 측은 튜튼 기사단에게 이교도인 타타르족의 영역 인근의 포돌리아로 가서 타타르족과 맞서 싸워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자간의 의견 차가 너무 컸기에,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1457년 9월 28일, 베르나르트 폰 치넨베르크가 이끄는 튜튼군은 폴란드에 넘어간 것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의 도움을 받으며 마리엔부르크를 기습 공격했다. 그 결과 울리히 체르윈카가 버틴 성채를 제외한 도시 전체가 튜튼 기사단에게 넘어갔다. 그후 그들은 아일라우를 탈환하기도 했지만, 대폴란드에서 파견된 새로운 군대에게 저지되어 더 이상의 공세를 펼치지 못했다. 1458년 봄, 카지미에시 4세는 다시 마조프셰인들을 포함한 대규모 징병을 벌이고 리투아니아인과 타타르 보조군을 포함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한 뒤 프로이센으로 재차 진군했다. 포즈난 성주 샤모툴리의 표트르가 실질적으로 지휘한 이들은 그해 8월 10일 마리엔부르크를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도로 탈취하기 위해 공세를 벌였지만, 양자간의 긴 협상과 표트르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함락시키 못했다. 그 사이에 니더프로이센에서 폴란드 통치에 반대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몇 개의 성을 점령하고 이를 튜튼 기사단에 넘겨줬다.

카지미에시 4세는 튜튼 기사단과 재차 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그는 튜튼 기사단에게 프로이센을 떠나 포돌리아로 가라고 재차 제안했다. 튜튼 기사단은 포돌리아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는 것엔 동의했지만 프로이센을 떠나는 건 거부했다. 이에 보헤미아 용병으로서 폴란드군에 배속되었다가 중재 역할을 맡은 얀 기스크라는 폴란드가 프로이센 대부분을 갖되, 일부는 튜튼 기사단이 계속 점유하게 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양자는 이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9개월간 휴전 협정을 맺고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4세는 나중에 프로이센 귀족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프로이센에서 튜튼 기사단을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 협상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458년 7월, 스페인 국왕 칼 8세가 칼 8세 크누트손을 일시적으로 밀어내고 스웨덴을 제패하는 듯 했지만 칼 8세가 고용한 사략선에게 발트해 무역로가 차단되면서 고통을 겪던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세가 휴전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이리하여 크리스티안 1세가 보내주던 물자 지원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지만, 튜튼 기사단은 이에 개의치 않고 1459년 폴란드를 향한 공세를 개시하기로 했다. 그들은 기사단장 시보르 폰 바이젠의 지휘하에 대폴란드 북부의 도시들을 몇 달간 점령하는 등 폴란드에 타격을 입혔다. 여기에 보헤미아 국왕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는 튜튼 기사단에 속한 군인들을 왕국의 영토에 고용하기로 결정하고, 폴란드를 도왔던 울리히 체르윈카와 그의 동료들을 체포해 투옥시켰다.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자, 카지미에시 4세는 폴란드 왕국과 프로이센의 부유한 도시(그단스크, 엘블롱, 토룬) 등지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여 자금을 최대한 끌어모인 뒤 새로운 군대를 동원했다. 1460년 3월 21일, 폴란드군은 마리엔부르크 시를 재차 포위한 뒤 포격을 퍼부은 끝에 7월 5일에 함락되었다. 마리엔부르크 시장 블루메는 폴란드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나중에 튜튼 기사단에게 마리엔부르크 성문을 열어줬다는 이유로 반역자로 낙인찍히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튜튼 기사단은 이에 대응해 1460년 7월 프라우스트 근처에서 그단스크군을 격파하고 그단스크 교외를 불태웠다. 여기에 포메니아 공작 에리히 2세가 소유하고 있던 웨바, 푸츠크, 렝보르크, 비토프를 공략했다. 여기에 프로이센의 성들과 도시들은 점점 튜튼 기사단 쪽으로 기울었다.

카지미에시 4세는 또다시 동원령을 내렸지만, 큰 소득이 없이 질질 끌기만 하는 전쟁에 지칠대로 지친 귀족들은 동원령에 응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전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폴란드 대귀족 안제이 텡친스키는 1461년 7월 16일 크라쿠프에서 갑옷 제작자인 클레멘스가 갑옷 수리를 만족스럽게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합의된 것보다 훨씬 적은 금액만 지불했다. 이에 클레멘스가 항의하자, 안제이는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후 그는 크라쿠프 시장에게 귀족에게 감히 불손한 언사를 내뱉은 클레멘스를 체포하라고 요청했고, 시장은 이에 따랐다. 클레멘스는 곧 체포되어 끌려가던 중 안제이와 마주치자 "당신은 제 집에서 저를 수치스럽게 때렸지만, 더 이상 저를 때리지 않으실 겁니다"라고 소리쳤고, 안제이는 다시 그를 마구 구타해 초주검 상태로 만들었다.

그러자 대귀족의 오만하고 가혹한 태도에 분노한 크라쿠프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안제이는 자신의 집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버티려 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아들 얀 텡친스키와 몇몇 친구들과 함께 프린시스코회 수도원으로 피신하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폭도들에게 붙잡혀 살해되었고, 그의 유해는 거리로 질질 끌려다니며 훼손되었다. 포메라니아 전선에서 튜튼 기사단의 공세를 어렵게나마 저지하고 있던 카지미에시 4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급히 크라쿠프로 달려가서 폭동을 수습한 뒤 재판을 열어서 폭동 주모자 6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크라쿠프 시에 벌금 8만 플로린을 부과했다.

가장 적극적인 주전론자였던 안제히 텡친스키의 불미스런 죽음 이후, 대다수 귀족들은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카지미에시 4세는 폴란드 귀족들의 사병대로는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표트르 두닌이 이끄는 용병군이 주축이 된 정규군에게 전쟁을 맡기고 귀족들에게는 이들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세금을 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461년 10월 병력 2천 명을 이끌고 출진한 표트르 두닌은 레센과 슈툼을 성공적으로 탈환해 폴란드인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이에 세임은 폴란드 정규군을 늘리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1462년 9월 17일, 표트르 두닌이 이끄는 폴란드군 2천 명과 기사단장 프리츠 로웨넥이 이끄는 튜튼 기사단이 포메라니아의 패권을 놓고 시비에친에서 맞붙었다. 두닌은 소규모 기병 부대를 파견해 튜튼 기사단을 도발해서 숲과 갈대밭으로 유인하게 했다. 기사들이 이에 넘어가 그들을 추격하자, 숲과 갈대 속에 숨어있던 석궁병들이 갑작스럽게 공격해 이들을 물리쳤다. 그 후 두닌은 패주하는 기사들을 추격해 적진까지 이르러 맹공을 퍼부었다. 오랫동안의 격전 끝에 프리츠 로웨넥이 전사하자, 전의를 상실한 기사단은 붕괴되었다. 70명이 항복하여 포로 신세로 전락했고 1천 명이 전사했으며, 나머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폴란드군의 사상자는 250명이었다.

시비에친 전투에서 완패하면서 막대한 전력을 손실한 튜튼 기사단은 요새 수비에만 전념해야 했고, 폴란드군은 최근에 풀려난 보헤미아 용병대장 울리히 체르윈카의 지원을 받으며 요새들을 하나둘씩 공략하면서 천천히 밀어붙였다. 1463년 7월 27일, 두린은 포메라니아의 요충지인 그니에브를 포위했다. 튜튼 기사단은 이 도시를 어떻게든 구하기 위해 44척의 선박을 스타가르드에 소집하여 파견했지만, 1463년 9월 15일 자토카 시비에차 해전에서 폴란드에 가담한 두 해안 도시인 그단스크와 엘블롱 소속 함대 30척의 급습으로 궤멸되었다. 결국 그니에브는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1464년 1월 1일에 항복했다.

이후 튜튼 기사단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해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고, 튜튼 기사단군의 핵심인 용병들은 급여를 받지 못하자 어떠한 전투도 치르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두린은 그런 그들을 천천히 몰아붙인 끝에 1466년 9월 28일 호이니체를 함락했다. 결국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기사단은 평화를 요청했다. 이후 교황 바오로 2세의 중재하에 협상이 이어진 끝에, 1466년 10월 19일 토룬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폴란드는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말보르크, 엘블롱그, 헤움노, 미하우프, 바르미아를 획득하며, 튜튼 기사단은 폴란드 국왕의 봉신이 되는 대가로 프로이센의 나머지 부분을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사단장은 선출된 후 6개월 이내에 폴란드 국왕에게 경의를 표할 의무가 있었다. 이리하여 폴란드 왕국은 158년만에 그단스크 포메라니아의 주권을 회복하고 비스툴라 강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2.1.3.4. 보헤미아 왕위 계승 전쟁
1460년대, 후스파에 호의적인 보헤미아 국왕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에게 반감을 품은 교황청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무리를 들어 이단 왕을 폐위시키라고 촉구했다. 이에 보헤미아 내 가톨릭 신자들은 헝가리를 통치하고 있던 마차시 1세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마차시 1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1469년 5월 3일 보헤미아 가톨릭 교회는 올로모우츠에서 마차시를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했다.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는 마차시를 받아들였지만, 보헤미아 본토는 이르지를 계속 지지했다. 일부 귀족들은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인 브와디스와프 야기엘론치크가 이르지의 뒤를 이을 권리를 인정했다.

이르지는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 브와디스와프를 차기 국왕으로 세우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카지미에시 4세는 1469년 10월 피오트르쿠프 회의에서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선포했다. 1471년 3월 22일 이르지가 사망하자, 보헤미아 의회는 5월 27일 브와디스와프 야기엘론치크를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로 추대했다. 교황 특사 로렌초 로베렐라는 이를 무효로 선언하고 마차시 1세가 보헤미아 왕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의회는 이를 묵살하고 블라디슬라프의 집권을 받아들였다.

마차시 1세가 블라디슬라프를 몰아내기 위해 공세를 준비하자, 카지미에시 4세는 자신의 차남 카지미에시를 헝가리 왕으로 세울 계획을 세우고, 마침 마차시 1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을 포섭했다. 이 정보는 도중에 샜고, 마차시 1세는 즉시 의회를 소집해 "앞으로는 귀족들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지 않겠으며 매년 의회를 소집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이에 귀족들은 만족했고, 9월 21일 50명 가량의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471년 10월 2일, 카지미에시 왕자가 헝가리를 침공했다. 그는 판노니우스 야노시의 지원에 힘입어 니트러를 공략했지만, 오직 로스고니 야노시와 페레니 미클라시만 가담했을 뿐, 다른 귀족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차시가 즉각 반격을 가해오자, 카지미에시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판노니우스 야노시는 헝가리에서 도주하던 중 사망했고, 비테츠 야노시 대주교는 교구 밖으로 나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1472년 3월 1일, 교황 식스토 4세는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가 마차시 1세를 상대로 전쟁을 지속한다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그해 5월 31일 카지미에시 4세, 블라디슬라프, 그리고 마차시는 평화 협약이 체결될 때까지 휴전을 갖는 데 합의했다. 이후 양자간의 협의 끝에 1474년 2월 21일 스타라 베스 스피스카에서 3년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1474년 3월, 블라디슬라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 카지미에시 4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와 다시 전쟁을 벌였다.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는 그 해 10월에 슬레스코를 침공하여 브라티슬라프에 있던 마차시를 포위했으나, 마차시가 청야 전술을 구사하는 바람에 식량 공급에 차질을 겪은 끝에 퇴각했다. 이후 슬레스코-모라바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마차시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는 12월 8일 마차시와 3년 평화 협약을 맺었다.

1476년, 교황 특사 발타자르 데 피시아가 카지미에시 4세의 궁정에 찾아와서 몰다비아와 헝가리 왕좌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헝가리와의 휴전 협정을 파기할 경우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카지미에시 4세는 왕위에 대한 주장을 그만두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휴전 협정을 파기하지 않았다. 1477년 5월 25일 3년간의 휴전이 만료되었지만, 양국 모두 전쟁을 재개할 의사가 없었기에 협상이 재차 이뤄졌고, 1478년 11월 21일 최종적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1479년 4월 2일에는 카지미에시 4세가 직접 부다로 가서 마차시 1세와 화해했다.
2.1.3.5. 오스만 제국 크림 칸국과의 전쟁
1484년, 오스만 제국 몰다비아 공국 흑해 항구 도시인 킬리아와 벨고로드를 점령하고 폴란드 동부 무역을 차단했다. 이에 폴란드와 몰다비아의 경제가 악화되자, 몰다비아 공작 슈테판 3세는 1485년 9월 15일 콜로미아로 가서 카지미에시 4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카지미에시 4세는 얀 칸코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용병 수천 명을 주어서 몰다비아에 진주한 투르크군을 물리치게 했다. 하지만 몰다비아에 대한 지원을 곧 중단하고 크림 칸국 쪽으로 관심을 돌렸고, 슈테판 3세는 1년 후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당시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들은 루테니아와 포돌리아를 매년 습격해 포로 수천 명을 노예로 팔았고, 각지를 심하게 약탈했다. 급기야 1482년에는 타타르군이 키예프를 공략하고 황폐화시켰다. 이에 견디다 못한 카지미에시 4세는 1486년 아들 얀 1세 올브라흐트에게 크림 칸국에 보복 원정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얀 1세 올브라흐트는 1487년 9월 8일 포돌리아의 코피스트친 전투에서 타타르군 5천 명과 맞붙어 1500명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뒀고, 이후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남동쪽 국경지대를 맡아 타타르족과 튀르크족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항했다.
2.1.3.6. 헝가리 왕위 계승 전쟁
1490년,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가 사망했다. 헝가리 의회는 사생아 코르빈 야노시를 왕으로 받들어달라는 마차시 1세의 유언을 묵살하고,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인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를 새 국왕 울라슬로 2세로 옹립했다. 하지만 독일왕 막시밀리안 1세는 1463년 노이슈타트에서 마차시가 합법적인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할 경우 프리드리히 3세나 그의 후계자들이 헝가리를 상속하자고 했던 협약을 상시키기며 자신이 헝가리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카지미에시 4세는 모든 아들들에게 독립된 왕국을 물려주고 싶어했기 때문에 이미 보헤미아 국왕인 장남 대신에 셋째 아들인 얀 1세 올브라히트를 헝가리 국왕으로 세우려 했다.

1490년 9월 18일, 울라슬로 2세가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에 얀 올브라흐트는 실력 행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에게르를 점령한 뒤 커셔를 포위했다. 독일왕 막시밀리안 역시 헝가리를 침공해 11월 말에 솜버트헤이, 베스프렘, 세케슈페헤르바르를 점령했다. 울라슬로는 에스테르곰에서 마차시 1세의 전 왕비였던 베아트리체와 비밀 결혼을 했고, 그녀로부터 지원받은 막대한 자금을 활용해 대규모 병력을 편성했다. 이후 헝가리군이 반격을 가해온 데다 헝가리 귀족들을 포섭할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막시밀리안은 12월 연말에 헝가리에서 철수했다. 울라슬로는 여세를 이어가 커셔를 구원했고, 얀 올브라흐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1491년 2월 20일 글로가우 공국과 슬레스코 절반을 자신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헝가리 왕위 주장을 취소했다. 1491년 가을 얀 1세가 다시 헝가리를 공격했지만, 서포여이 이슈트반이 이끄는 헝가리군이 격파했다.

1491년 11월 7일, 울라슬로 2세는 포조니에서 막시밀리안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마차시 1세 생전에 헝가리가 빼앗았던 모든 오스트리아 영토를 막시밀리안에게 돌려주며, 울라슬로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상속받는 것을 인정했다. 그 대신, 막시밀리안은 헝가리에 대한 그의 주권을 인정하며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헝가리 왕위는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 울라슬로 2세의 차지가 되었다.

2.1.4. 얀 1세 올브라흐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1492년 6월 7일, 카지미에시 4세는 64세의 나이로 그로드노에서 사망했다. 사후에 셋째 아들 얀 1세 올브라흐트가 폴란드 왕위를 이어받았고, 넷째 아들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는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었다. 1493년 1월, 2개의 방으로 구성된 세임이 피오트르쿠프에서 소집되었다. 지금까지는 비정기적으로 열리던 세임은 이때부터 피오트르쿠프에서 정기적으로 열렸고, 귀족 위주의 의회 제도가 이를 통해 확립되었다. 1496년, 얀 1세는 아버지 키지미에시 4세가 니에스와 법령을 통해 귀족들에게 부여했던 특권을 확대하는 피오트르쿠프 법령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농민은 한 카운티 안에서만 이주할 수 있으며, 마을 주민이 토지를 사사로이 구입하거나 공직을 맡는 것이 금지되었다. 또한 귀족 출신이 아닌 성직자는 교회의 고위 직책을 맡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귀족이 아닌 사람의 학술 의장직 권리도 제한되었다. 이후 귀족들은 확고부동한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며 토지, 특권, 직위를 그들의 손에 집중했다. 그는 이러한 조치를 통해 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기를 희망했다.

1494년, 얀 1세는 크라쿠프와 오시비엥침 사이에 위치한 자토르 공국을 8만 헝가리 줄러에 구입해 폴란드 왕국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1495년 일전에 폴란드 국왕 선거에 출마했던 마조프셰 공작 야노시 2세가 후손을 두지 못하고 사망하자, 즉시 그가 다스리던 영역을 폴란드 왕국에 편입시켰다. 야노시 2세의 형제인 콘라드 3세는 이에 대응해 소규모 병력을 모아서 프워츠크를 점거했지만, 곧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깨닫고 1496년 피오트르쿠프로 가서 얀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얀 1세는 불복종 혐의를 적용해 콘라드 3세의 재산 대부분과 영지를 몰수했다.

얀 1세는 뒤이어 오스만 제국이 1484년에 공략한 흑해 항구 도시인 킬리아와 벨고로드를 탈취해 폴란드 동부 무역을 활성화하고,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된 몰다비아 공국을 정벌하고 동생 지그문트 1세를 몰다비아 공작으로 세우고자 전쟁을 준비했다. 1497년, 얀 1세가 동원한 4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군이 몰다비아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몰다비아 공국의 수도인 수체아바를 포위 공격했지만,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다 전염병마저 창궐하자 별 수 없이 몰다비아 공작 슈테판 3세와 휴전 협약을 맺고 본국으로 철수했다. 그러던 1497년 10월 26일, 슈테판 3세가 휴전을 깨고 철수 중이던 폴란드군을 부코비나 숲의 코즈민 인근에서 급습했다. 몰도바인 1만 8천 명과 튀르크, 왈라키아, 타타르인 1만 명에게 급습을 받아 폴란드군은 기사 및 민병대 5천 명이 죽고 마차 6천 대 마차가 탈취되는 큰 타격을 입고 패퇴했다.

몰다비아 원정이 참담한 실패로 끝난 뒤, 주변 국가들이 이 기회를 노려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1498년, 오스만 제국 사령관 파샤 실리스트리아 발리 베이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몰도비아 군대의 지원을 받으며 드니에스테르 강을 건너 루테니아로 쳐들어가서 그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사노크, 프셰보르스크에 입성한 뒤 주민 10만 명을 본국으로 끌고 가서 노예로 팔았다. 그 해 여름엔 크림 칸국 소속 타타르인들이 포돌리아와 볼히니아를 공략해 막대한 전리품과 포로를 챙기고 돌아갔다. 그해 가을에는 튀르크군 습격대가 삼보르까지 쳐들어가서 심각한 약탈을 자행한 뒤 귀환했다. 얀 1세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1499년 4월 15일에 슈테판 3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한편,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이반 3세는 카지미에시 4세가 사망한 직후인 1492년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전쟁을 벌였다. 그가 이끄는 모스크바군은 루부츠크, 므첸스크, 츨레피엔, 로하체프를 점령하고 비야즈마를 위협했다. 여기에 세르페이스크 공작과 메시초프스크 공작은 리투아니아 대공에 대한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자기들의 영지를 모스크바에 넘겼다. 그해 겨울 리투아니아군이 반격에 착수해 세르페이스크와 메시초프스크를 탈환했지만, 1493년 1월 모스크바 원정대가 비야즈마를 공략하고 스몰렌스크를 위협했다. 1494년 양자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된 후 수년간 잠잠했던 모스크바 대공국은 폴란드가 코즈민 전투에서 완패한 뒤 위축된 모습을 보이자 1500년 5월 병력을 세 부대로 나눈 뒤 토로페츠, 스몰렌스크, 브랸스크를 향해 진격했다.

야쿠브 자카리치가 이끄는 모스크바 별동대는 브랸스크를 점령하고 총독 스타니스와프 바르토스제비츠를 비롯한 포로들을 끌고 갔으며, 뒤이어 므첸스크, 트루브체프스크, 스타로두브, 노브고로드 시에비에르스키, 푸티울, 릴스크, 고멜, 루베츠를 점령했다. 또한 다닐 바실리예비치 셰냐가 이끄는 모스크바군 2만 명은 도로고부즈를 점령하고 스몰렌스크를 포위했다. 리투아니아의 대 헤트만 콘스탄틴 오스트로그스키가 스몰렌스크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지만, 1500년 7월 14일 비드로자 전투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모스크바군은 이 전투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고 스몰렌스크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한편, 안드레이 표도로 비치 첼라드닌이 이끄는 세번째 모스크바 분견대는 토로페츠를 점령한 뒤 북부 리투아니아 국경지대를 유린한 뒤 리투아니아군이 반격에 착수하기 전에 물러났다. 여기에 멩글리 1세 가라이가 이끄는 크림 타타르군은 모스크바군과 협력해 키예프와 리비프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리투아니아 대공 알렉산데르는 이 일련의 상황에 분노해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지에서 대규모 용병을 모집해 반격에 착수하려 했다. 그러면서 형 얀 1세에게도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코즈민에서 완패한 뒤 폴란드군 전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에 새로운 전쟁을 벌일 엄두가 안 났던 얀 1세는 올라슬로 2세와 함께 모스크바에 사절단을 보내 리투아니아와 모스크바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이반 3세가 완고한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리투아니아는 튜튼 기사단의 리보니아 지부인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10년 동맹을 맺고 모스크바 대공국을 공동으로 공략하기로 했다.

이 무렵, 1466년 토룬 협약 이후 폴란드의 봉신이 되었던 튜튼 기사단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1498년 새로운 기사단장이 된 프리드리히 폰 작센은 토룬 협약에 따라 폴란드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거부했다. 1499년에는 세임에 참여해달라는 얀 1세의 요청에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러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막시밀리안 1세는 토룬 협약은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 모두 승인하지 않았으니 무효이며, 프리드리히가 폴란드를 돕는 건 용인할 수 있지만, 폴란드 왕에 대한 맹렬한 충성 맹세는 삼가고 대신 "우호적인 이웃"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튜튼 기사단의 복종 거부와 막시밀리안 1세의 선언에 분노한 얀 1세는 1501년 전국에 소집령을 내린 뒤 토룬으로 가서 프리드리히에게 당장 와서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면 공격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프리드리히는 협상을 위해 사절단을 보냈고, 작센 공작 게오르게와 얀 1세의 처남 바바라 야기엘론은 마이센의 가톨릭 주교에게 폴란드와 튜튼 기사단간의 중재를 맡겼다. 그러던 1501년 6월 17일, 얀 1세는 토룬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인은 매독이었지만, 몰다비아 원정 때 입은 부상과 심리적 타격도 사망에 이르게 한 원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얀 1세 올브라흐트가 사망한 뒤, 피오트르쿠프에 긴급 소집된 세임은 그해 10월 3일 알렉산데르를 차기 국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이 소식을 전달받은 알렉산데르는 모스크바와의 전쟁에서 폴란드의 지원을 받아낼 수 있겠다고 여기고 크라쿠프로 곧장 이동했다. 1501년 12월 12일 바벨 대성당에서 그니에즈노 대주교이자 그의 형제인 프레데리크 야기엘론치크 추기경의 주관하에 폴란드 국왕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아내 헬레나는 정교회 신앙을 고수했기에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폴란드 왕비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알렉산데르는 폴란드 귀족들이 자신을 폴란드 왕으로 추대하는 대가로 제시한 요구사항을 받아들였다. 그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세습 권리를 포기하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된다는 내용의 미엘니카 연합 칙령을 반포했으며, 세임에 폴란드 통치를 실질적으로 행사할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에 왕이 국고를 쓸 때 세임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왕실 물품의 분배 역시 제한되었다. 알렉산데르는 그 대가로 폴란드 귀족들로부터 병력과 물자 지원을 받아내고 모스크바와의 전선에 투입했다.

한편, 이반 3세는 알렉산데르가 폴란드 국왕이 되기 위해 리투아니아를 떠난 틈을 타 므스티슬라프를 포위 공격했지만 리투아니아의 대 헤트만인 스타니스와프 야노비츠 키에즈가이워가 이끄는 구원군에 의해 패퇴했다. 1502년, 이반 3세의 아들 디미트르 이바노비치 주이우카가 지휘하는 모스크바군이 오르샤를 점령하고 비테브스크 일대를 황폐화시킨 뒤 스몰렌스크를 포위했다. 이에 리투아니아 장군 스타니스와프 키슈카가 용병대와 귀족 사병대 8백 명을 이끌고 모스크바군의 보급로를 끊고 습격전을 이어갔고, 디미트르는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스몰렌스크 요새를 돌파하지 못했다. 그해 9월 13일, 튜튼 기사단이 스몰리나 호수 전투에서 압도적인 숫자를 앞세운 모스크바군을 격파했다. 이에 모스크바군은 스몰렌스크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1503년 3월, 이반 3세는 알렉산데르의 부인이자 자신의 딸인 헬레나의 간절한 설득을 받아들여 리투아니아와 6년간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 조건으로, 아래의 영토를 모스크바가 가지는 것을 받아들이게 했다.

또한 알렉산데르는 이반 3세가 "모든 루스인의 통치자"를 자처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고, 모스크바 상인이 리투아니아 영내에서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하는 걸 보장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이 협약으로 인해 영토의 1/3을 모스크바 대공국에 빼앗겼다.

1504년, 알렉산데르는 그단스크를 방문해 그들의 특권을 확인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무역을 이 항구도시에 의존했다. 1505년에는 라돔에서 열린 세임에 참석해 일명 "니힐 노비(Nihil novi: 새로운 것이 없다)"로 명명된 세임 헌법을 승인했다. 니힐 노비는 헌법에 명기된 라틴어 문구인 "Nihil novi [...] sine communi Consiliorum et Nuntiorum Terresterium consensu(영주와 지주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것이 없다)"를 축약한 것으로, 폴란드 국왕이 세임의 동의 없이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금지했고, 단지 왕실에 직속된 도시, 교육, 종교, 유대인, 봉토, 왕실 토지의 농민 및 광산 문제에 대해서만 독립적인 칙령을 내릴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왕의 입법 권한은 매우 제한되었고, 폴란드 귀족들의 권세는 한층 더 강력해졌다.

1506년, 크림 칸국에 소속된 타타르인 5천 명이 멩글리 1세 가라이 칸의 아들 가라이 페티와 부르나쉬의 지도하에 두 달 동안 1800 km를 주파하면서 각지를 약탈했다. 7월 20일 클레크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에 진영을 세운 뒤 민스크, 나바흐루다크, 아시미아니, 리다, 볼로비스크 등 반경 100km 내 도시 및 촌락들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당시 병에 걸린 채 리다에 체류하던 알렉산데르는 리투아니아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키슈카와 왕실 원수 미하우 글린스키에게 지휘권을 맡겨 타타르인들을 몰아내게 했다. 이에 따라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인 7천 명을 소집한 뒤 두 사람은 7월 30일 리다에서 출격했다. 그러다 도중에 키슈카가 병에 걸려 더 갈 수 없게 되자 글린스키가 전군을 홀로 통솔하기로 했다.

1506년 8월 5일, 글린스키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클레크에서 타타르군과 격돌했다. 그 결과 타타르군은 크게 패하여 도주했고, 사로잡힌 타타르 병사들은 그들이 파괴한 많은 정착지에 정착했다. 알렉산데르는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에 기뻐했지만, 자신이 곧 사망할 것을 직감하고 빌뉴스로 갔고, 그해 8월 19일 그곳에서 45세 나이로 사망했다.

2.1.5. 지그문트 1세

2.1.5.1.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전쟁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사후, 동생 지그문트 1세가 1507년 1월 24일 바벨 대성당에서 폴란드 대주교 안제이 보리셰프스키의 주관하에 폴란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다. 1507년 2월, 그는 리투아니아 의회를 설득해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게 했다. 당시 리투아니아인들은 자국의 영토를 1/3이나 뜯어가버리고 심한 약탈을 자행한 모스크바 대공국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기꺼이 따랐다. 지그문트 1세는 모스크바 대공국에 1494년 이후 빼앗아간 모든 리투아니아 영토를 반환하라고 요구했고, 이것이 거부당하자 곧바로 전쟁을 단행했다. 리투아니아군은 가올브라흐트 가스톨드가 지휘하는 스몰렌스크 방면 군대, 스타니스와프 홀레보비츠가 지휘하는 폴로츠크 방면 군대, 리투아니아 대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키슈카가 지휘하는 민스크 방면 군대로 나뉘었다.

1507년 4월 모스크바군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침공했지만, 지그문트 1세가 폴란드군을 이끌고 베레지나 강을 건너 반격해오자 철수했다. 그 해 8월, 스타니스와프 카슈카가 드루크 인근으로 진군했고,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은 멩글리 1세 가라이 칸 휘하의 크림 칸국 군대가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그 해 10월,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는 멩글리 1세를 물리친 뒤 리투아니아의 므스티슬라프와 크시세프 요새를 공격했지만, 스타니스와프 키슈카의 리투아니아군이 위협을 가하자 철수했다. 그러는 사이, 지난날 생포된 뒤 모스크바로 끌려갔던 리투아니아의 전임 대 헤트만 콘스탄틴 오스트로그스키가 탈출해 리투아니아군에 복귀했다.

1508년 초, 리투아니아 왕실 원수이며 1506년에 쳐들어온 타타르족을 클레크 전투에서 크게 격파했던 미하우 글린스키는 트라카이 총독 얀 자브제진스키로부터 알렉산데르 사후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탈취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글린스키는 지그문트 1세에게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지그문트 1세는 모스크바와의 전쟁이 급하다는 이유로 그가 억울한 지 여부를 가릴 재판을 연기했고, 왕실 원수 직임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글린스키는 1508년 2월 2일 그로드노 근처에서 자신을 고발한 자브제진스키를 살해했다. 이후 기병 700명과 함께 투로프로 이동한 뒤 지그문트 1세에게 자신을 사면시켜주면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7배나 더 봉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바실리 3세에게 전령을 보내 모스크바 대공국에 귀순하겠다고 밝혔고,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미하우 글린스키는 마지르를 점거해 리투아니아에서 키예프를 고립시켰고, 형제 바질 글린스키에게 오브루치와 지토미르 공략을 맡겼으나 실패했다. 이후 슬루츠크를 향해 진격했지만 수비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자 쳘수했다. 모스크바군은 이 때를 틈타 민스크로 쳐들어가서 그 주변 일대를 약탈했다. 이후 리투아니아군이 반격해오자, 미하우는 점령지에서 물러난 뒤 다닐 오볼렌스키가 이끄는 모스크바군에 합류했다. 1508년 7월 13일, 콘스탄틴 오스트로그스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과 다닐로와 미하우가 이끄는 모스크바 대공국 및 리투아니아 반란군이 오르샤에서 격돌했다. 지그문트 1세는 콘스탄틴에게 지휘권을 위임한 뒤 인근 언덕에서 상황을 살폈다. 오르샤 전투 결과 모스크바군이 상대적으로 더 큰 피해를 입었고, 숙영지로 철수한 뒤 야간을 틈타 부상병들과 소, 장비들을 전부 버리고 두브로브나로 퇴각했다.

그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민스크, 오르샤, 슬루츠크를 포위했던 모스크바군을 몰아낸 뒤 스몰랜스크 주변의 영토를 전부 회복했다. 지그문트 1세는 바실리 3세를 좀더 압박하기 위해 스타니스와프 키슈카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 기병대 수천 명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조이도록 하였다. 키슈카는 모스크바를 향해 전진하여 도로고부즈, 뱌지마, 토로페츠 및 벨라를 점령하고 르제프, 모자이스크에 접근했다. 이에 바실리 3세는 평화 협상을 맺자고 요청했고, 지그문트 1세는 즉시 따랐다. 1508년 10월 8일 모스크바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루베츠 등 드네프르 강 연안 지역을 포기했지만, 남은 점령지는 그대로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그문트 1세는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크림 칸국과 상호 방위 및 공세 동맹을 체결했고, 1512년 크림 칸국과 협의해 그들이 모스크바 대공국 남부 지역을 약탈하는 걸 지원했다. 타타르족은 랴잔까지 약탈한 뒤 전리품의 1/3을 키예프를 통해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에게 나눠줬다. 바실리 3세는 이 소식에 격분했고,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들이 자신의 누이이며 리투아니아 전임 대공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의 미망인인 헬레나를 박해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를 근거로 삼아 리투아니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1512년 11월, 이반 레프닌-오볼렌스키, 다닐 슈체니아, 이반 첼라드닌이 이끄는 모스크바군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스몰렌스크, 폴로츠크, 비테브스크, 오르샤, 블라슬라프, 민스크 및 드루츠크로 진격했다. 1513년 여름, 미하우 글린스키가 이끄는 모스크바군과 리투아니아 반란군은 스몰렌스크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 키예프 총독 예르지 라지비우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의 역습을 받고 드비나 강으로 퇴각했다. 바실리 셰미아키치가 이끄는 모스크바 별동대가 키예프를 기습 공격했지만 격퇴되었고, 리투아니아군은 비에르슈치즈나 일대까지 반격했다.

1513년 9월, 바실리 3세는 스몰렌스크를 포위한 뒤 수많은 중 공성포, 박격포, 팔코넷을 동원해 성벽을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6주간의 공세에도 성벽이 굳건히 버틴 데다, 콘스탄틴 오스트로그스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이 오르샤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모스크바군을 본국과 차단하려 하자, 바실리 3세는 어쩔 수 없이 스몰렌스크 포위를 풀고 귀환했다. 이후 바실리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협상한 끝에 1514년 2월 상호 공격 및 방위 동맹을 체결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공동으로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1514년 2월, 빌뉴스의 리투아니아 의회는 폴란드 용병 모집을 위한 새로운 전쟁세를 통과시켰다. 리투아니아인들은 트렘보울라의 스타로스타인 야누스 시비에르초프스키의 지휘 아래 용병과 기사 8천 명을 모집했다. 1514년 4월, 미하우 글린스키가 이끄는 모스크바군이 스몰렌스크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뒤이어 그해 6월엔 바실리 3세가 친히 스몰렌스크에 이르렀다. 적의 군세가 압도적인 데다 구호품이 부족해지자, 스몰렌스크 총독 예르지 소위허브는 7월 31일에 스몰렌스크 요새를 모스크바에 넘겨줬다. 곧 므스티슬라프, 크시세프, 두브로브나도 모스크바군에 항복했다. 모스크바군은 스몰렌스크에 살던 사람들을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역에 속한 루테니아 깊숙한 곳으로 강주 이주시키고 모스크바에서 온 이들을 스몰렌스크에 정착시켰다.

1514년 8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민스크 인근에 집결한 뒤 보리소프를 향해 진격했다. 지그문트 1세는 일부 군대와 함께 보리소프에 머물렀고, 나머지는 8월 27일 베레지나 강을 건너 공세를 이어갔다. 그해 9월 8일, 콘스탄틴 오스트로그스키가 지휘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오르샤에서 이반 첼라드닌이 이끄는 모스크바군과 격돌했다. 이때 병력이 1만 2천 명 가량이던 연합군은 모스크바군 4만 명 남짓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스몰렌스크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지만, 모스크바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인해 큰 희생을 치렀다. 스몰렌스크 주교 바르소노피예가 이끄는 반 모스크바 음모가 스몰렌스크 시에서 진행되었으나, 모스크바 사령관은 이를 적발하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지지자들을 성벽에 매달게 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주력군은 므스티슬라프, 크시세프, 두브로브나를 포기하고 철수했으며, 뒤이어 도로고부즈를 불태우고 물러났다.

오르샤 전투 소식을 접한 막시밀리안 1세는 1514년 8월 4일 모스크바 대공국과 맺었던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그후 지그문트 1세와 협상한 끝에 1515년 빈에서 합의를 맺었다. 이에 따르면, 막시밀리안 1세는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맹세했고, 지그문트 1세는 막시밀리안 1세가 명시한 상속 및 결혼 계약을 인정했다.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자이며 지그문트 1세의 조카인 러요시 2세는 막시밀리안 1세의 손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와 결혼하고,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공주이며 지그문트 1세의 여조카인 언너 는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페르디난트 1세와 결혼하기로 했다.

이렇게 신성 로마 제국과 화해한 뒤, 지그문트 1세는 모스크바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1515년, 야누시 시비에르초프스키가 지휘하는 폴란드 용병부대는 모스크바 깊숙히 진격해 비엘키에 루키와 토로피에츠를 약탈했다. 동시에 크림 타타르군이 리투아니아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시에비에르쉬나를 약탈했다. 이에 모스크바군이 반격을 가해 비테브스크, 폴로츠크, 므스티슬라프 등지의 촌락들을 황폐화시켰다. 1515년 5월 30~31일 밤, 성 베드로 교회를 포함한 바르샤바 시 일부가 화재로 인해 파괴되었다. 바르샤바 법원 장부에는 모스크바 대공이 보낸 강도 집단이 이 일을 저질렀다고 기술되었다.

1516년 모스크바군이 비테브스크를 포위했으나 공략에 실패했고, 리투아니아군은 고멜을 포위한 끝에 함락에 성공했다. 1517년, 콘스탄틴 오스트로그스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은 모스크바 대공국 깊숙히 진격해 오포츠카를 공략했다. 그 해 3월 10일, 모스크바 대공국은 튜튼 기사단과 공격 및 방어 동맹을 체결했다. 바실리 3세는 튜튼 기사단에 보병 1만 명과 기병 2천 명을 모집할 자금을 제공해주기로 했고, 튜튼 기사단이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호해주기로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그문트는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면서, 기사단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모스크바인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럽인이 아닌 아시아인입니다. 그들은 기독교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투르크족 및 타타르족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1518년, 모스크바군이 폴로츠크를 포위 공격했다. 이에 올브라흐트 가스톨드, 예지 라지비우, 얀 보라틴스키가 지휘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반격을 가했고, 그해 7월 29일 폴로츠크 전투에서 모스크바군이 크게 패하여 본국으로 달아났다. 1519년, 크림 칸국의 새 칸 메흐메트 1세 가라이는 모스크바와 동맹을 맺고 모스크바에 병력을 제공했다. 모스크바군은 이에 힘입어 빌뉴스에서 수십km 이내로 진격하면서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파괴했다. 또한 타타르군은 소칼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타타르군 역시 큰 손실을 입고 철수했고, 기대했던 튜튼 기사단의 공세가 좀처럼 이뤄지지 않자, 바실리 3세는 이러다가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맹렬한 반격을 홀로 감당할 것을 우려해 철수했다.

1520년 2월, 모스크바군이 폴로츠크와 비테브스크에 습격대를 보내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1세 가라이가 마음을 돌려 리투아니아와 손잡는 바람에 전세가 기울어졌다. 1521년 7월, 유스타키 다슈키에비츠가 고용한 카자크 부대는 메흐메트 1세 가라이의 타타르군과 함께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이들은 오카 강에서 모스크바군을 대파한 뒤 모스크바 성벽에 이르러 포위했다. 결국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바실리 3세는 막대한 공물을 바쳐서 그들이 물러나게 한 뒤 평화 협상에 응했다. 1522년 9월 14일, 양자는 모스크바에서 5년간 평화 협약을 맺었다. 리투아니아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스몰렌스크와 그 주변 지역을 가지는 것을 인정했지만, 나머지 영토는 돌려받았다. 또한 모스크바 대공은 스몰렌스크 대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 이 휴전 기간은 1526년에 6년, 1532년에 1년 연장되었다.

1533년 12월 4일,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가 사냥 도중에 낙마해 입은 다리 부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이반 4세는 고작 4살 밖에 안 되었기에, 모친 헬레나 글린스카가 보야르들과 함께 섭정을 맡았다. 지그문트 1세는 이 때를 틈타 스몰렌스크와 시에비에르슈치즈나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1534년 2월, 그는 리투아니아 의회로부터 모스크바에 대한 군사 작전을 벌이겠다고 선언해 동의를 얻어냈고, 폴란드 세임 역시 군대 모집을 위한 새로운 세금을 통과시켰다. 모스크바군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스몰렌스크에 군대를 집결시켰지만, 크림 칸국이 침공 위협을 가하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1534년 8월, 리투아니아의 대 헤트만 예르지 라지비우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 4만 명이 3개 부대로 나뉘어 공세를 개시했다. 한 개 부대는 시에비에르슈치즈나를 공격했고, 한 개 부대는 스몰렌스크로 진격했고, 나머지 한 개 부대는 예비대로서 모길레프에 주둔했다. 시에비에르슈치즈나로 진격한 안제이 야쿠보비츠 니에미로비츠는 9월 라도호슈치 전투에서 모스크바군을 격파하고 라도호슈치를 점령한 뒤 체르니히프와 포체프 주변 일대를 약탈한 뒤 스몰렌스크 인근에서 이반 비시니오비에츠키가 이끄는 스몰렌스크 직공 부대와 합류했다. 9월 13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스몰렌스크 공략에 성공했지만, 군자금이 바닥나버려서 급료를 줄 돈이 없어지자 모길레프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지그문트 1세는 10월 1일 군대를 해산하고 국경 요새를 지킬 병력 3천 명만 남겨뒀다.

모스크바군은 곧바로 반격에 착수해 비테브스크 주변을 약탈한 뒤 철수했고, 일부 분견대는 빌뉴스 외곽까지 이르러 무력 시위를 벌였다. 1535년 초, 모스크바군이 스몰렌스크와 오포치카 방향에서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리투아니아로 쳐들어가 반경 100 km 내의 마을을 황폐화시키고 모워데치노를 포위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군을 좀처럼 만나지 못하자 혹여 그들이 퇴각로를 끊어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오포치카로 후퇴했다. 그 사이에 얀 아모르 타르노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군 1만 명이 세임으로부터 군자금을 지급받은 뒤 리투아니아로 진군했다. 폴란드군은 7월 16일 사흘간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고멜 요새를 공략했고, 7월 30일 모스크바 대공국의 가장 강력한 요새 중 하나인 스타로두브를 포위했다. 얼마 후 폴란드 광부들이 설치한 화약이 폭발하면서 성벽이 무너지자, 폴란드군은 요새 내부로 밀려와서 수비대를 제압했다. 타르노프스키는 항복을 끝까지 거부한 모스크바 수비대 1400명을 참수했다.

1536년 1월, 모스크바군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점령지에 자보워체 요새를 건설했다. 2월 27일, 리투아니아군 2만 명이 이 요새를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모스크바군은 6월에 벨리즈 요새를 추가로 건설했으며, 비테브스크와 루베츠를 습격했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모스크바군이 이렇듯 강력한 요새를 연이어 세우고 버티기 작전에 돌입하면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지그문트 1세는 국고에 자금이 부족해 전쟁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게 되자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1537년 2월 18일, 양자는 5년간 휴전 협약을 맺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고멜 요새를 그대로 가질 수 있었고, 모스크바 대공국은 자보워체, 벨리즈 요새 등 리투아니아 점령지를 계속 가질 수 있었다. 이 협약은 1542년에 7년 연장되었고, 1549년에 재차 연장되어 1558년 양측이 리보니아를 놓고 전쟁을 벌일 때까지 이어졌다.
2.1.5.2. 튜튼 기사단과의 전쟁
지그문트 1세는 얀 1세 올브라흐트 치세 말기 때부터 폴란드 국왕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는 튜튼 기사단을 굴복시키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튜튼 기사단은 초기엔 신성 로마 제국에 기대어 폴란드로부터 독립하려 했고, 151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빈에서 지그문트 1세와 협약을 맺고 그들과 관계를 끊어버리자 다시 모스크바 대공국과 손잡았다. 이에 튜튼 기사단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오랜 반감이 폭발했고, 1519년 세임은 튜튼 기사단에 맞서 전쟁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용병 모집에 대한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폴란드의 헤트만 미코와이 피를레지는 코워 인근 숙영지에 폴란드 용병 4천 명을 집결시켰고, 얀 지에로틴스키는 보헤미아에서 온 용병대를 이끌고 가세했다. 폴란드군은 포메라니아를 거쳐 쾨니히스베르크를 향해 진격했다. 1520년 1월 1일, 튜튼 기사단은 브라니에보를 점령하고 그곳에 주둔했다. 폴란드군은 이에 맞서 크비진과 파스웽크를 포위했으며, 그단스크와 토룬이 동원한 폴란드 민간 함대는 튜튼 기사단의 항구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와 필라와를 봉쇄했다. 1520년 1월 18일, 폴란드군은 성밖으로 출격한 파스웽크 수비대를 격파했다. 뒤이어 4월 16일 바르토시체 전투에서도 기사단을 격파했다.

그러나 폴란드군에는 공성포가 없었기 때문에, 공성전은 지지부진했다. 이에 지그문트 1세는 크라쿠프에서 공성포를 제작해서 가져오게 했고, 그 결과 크비진과 파스웽크 함락에 성공했다. 반면 브라니에보 탈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와 동시에, 마조프셰 방면 폴란드군은 남쪽에서 튜튼 기사단국을 공격했고, 그단스크 소속 부대는 발가와 클라이페다를 습격했다. 1520년 7월, 튜튼 기사단은 반격에 나서 마조프셰를 공격해 웜자 일대를 황폐화시켰고, 8월 24일 레젤 전투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했다. 그들은 뒤이어 바르미아를 습격한 뒤 리즈바르크 워민스키를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1520년 9월, 볼프 폰 쇤부르크가 지휘하는 기병 1900명, 보병 8천 명 가량인 란츠크네히트가 독일에서 도착했다. 그들은 대폴란드를 공격해 그해 10월 14일 미엥제르제츠를 점령했으며, 뒤이어 스크비에지나를 파괴하고 투치노, 바우치, 레디체크 및 크라엔츠키를 점령했다. 지그문트는 이에 대응해 왕그로비에츠에 병력을 소집하고 그단스크와 포즈난에 수비대를 강화했다. 1520년 11월 2일, 지그문트는 총 4만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비드고슈치로 진군해 그단스크로 향하는 튜튼군을 저지하려 했다.

튜튼군은 1520년 11월 8일 그단스크 인근의 비스쿠피아 고르카 언덕에 도착한 뒤 포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포격이 비효율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성벽 파괴가 좀처럼 이뤄지지 못했다. 그 사이 칼리슈 총독 얀 자렘바가 11월 9일 그단스크에 군대를 이끌고 입성했다. 이후 폴란드군이 압박을 가해오자, 튜튼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한편, 다른 곳에서 군사 활동을 하던 튜튼 별동대는 11월 9일 미워믈린을 함락한 뒤 11월 15일 도브레 미아스토를 막대한 희생을 치른 끝에 함락한 뒤 주민과 수비대 전원을 학살했다. 지그문트 1세는 이 소식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며 튜튼 기사단에 대한 민중의 반감을 부추겼고, 폴란드 귀족들은 비드고슈치 숙영지에서 열린 세임에서 오랜 협상 끝에 7천에 달하는 병력을 왕에게 추가로 지원하는 데 동의했다. 미코와이 피를레지는 이들을 이끌고 초이니체를 포위 공격한 끝에 튜튼 수비대 150명에게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그후 보헤미아와 그단스크 용병군이 트제프와 스타로가르트를 동시에 포위해 각각 11월 28일과 12월 6일에 항복을 받아냈다. 얀 자렘바가 이끄는 그단스크군은 여세를 이어가 푸츠크를 향해 후퇴하던 란츠크네흐트를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고, 폴란드 민중들도 민병대를 결성해 호응하면서 란츠크네흐트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폴란드 국고가 바닥나서 더 이상의 전쟁이 어렵게 되자, 마조프셰 공작 스타니스와프와 안나 공자 부인을 대표로 삼아 튜튼 기사단국에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하지만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는 협상을 좀더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공세를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브라니에보에 4천 명을 집결시킨 뒤 도브레 미아스토를 향해 진격해 인근의 에지오라니 마을을 파괴하고 1521년 1월 루바와 성벽 앞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했다. 뒤이어 마조프셰로 진격해 주로민과 므와바 인근을 약탈했다. 한편, 볼프 폰 샴부르크가 이끄는 또다른 튜튼 분견대는 올슈틴을 포위했지만 공략엔 실패했고, 1521년 3월 8일 엘블롱을 기습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그단스크 민간 함대는 3월 27일 짧은 해전 끝에 튜튼 기사단 소속 해병 75명과 용병대, 무기를 갖춘 튜튼 선박 '크나이프펜'을 나포했다. 그 후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양측에 적대 행위를 즉각적으로 중단할 것을 촉구하자, 양측은 4년간 휴전 협정을 맺고 분쟁을 카를 5세와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의 중재단에 맡기기로 합의했다.

파일:프로이센의 경의.jpg
<프로이센의 경의>, 얀 마테이코 작, 1879~1882.

1525년 휴전 기한이 만료되었지만, 당해에 루터교회로 개종한 알브레히트는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의 지원을 더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폴란드와 맞서는 것은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더이상 벌이지 않기로 했다. 그는 지그문트 1세에게 협의를 구한 끝에 1525년 4월 8일 크라쿠프 협약을 체결하고 4월 10일에 크라쿠프의 도시 광장에서 지그문트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폴란드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튜튼 기사단국을 세습 프로이센 공국으로 전환시켰다. 프로이센 공국은 알브레히트의 남계 후손만 계승하기로 합의되었으며 쾨니히스베르크가 수도가 되었다. 또한 프로이센 공국은 자신들만의 군대, 폴란드에서 통용되던 굴덴 외 자체 화폐 주조권,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프로이센 지역 의회를 세워 주민들의 자치를 허용했다. 이리하여 오랜 세월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와 숱한 전쟁을 치렀던 튜튼 기사단은 프로이센 공국으로서 폴란드에 완전히 예속되었다.
2.1.5.3. 그 외의 외치
1524년, 지그문트 1세는 혹여 신성 로마 제국이 딴 마음을 먹고 모스크바 대공국과 연합해 폴란드를 협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었다. 프랑수아의 아들 오를레앙 공작 앙리는 지그문트 1세 의 딸과 결혼하기로 예정되었고, 지그문트 1세의 장남은 프랑수아 1세의 딸과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가 카를 5세에게 참패하고 포로로 잡히자, 지그문트 1세는 이 합의를 무효로 처리했다.

1526년 마조프셰 공작 야노시 3세와 남동생 스타니스와프가 후손을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에 지그문트는 마조프셰 공국과 바르샤바 공국을 폴란드 왕국에 통합시켰다. 세간에서는 두 사람이 지그문트 1세의 아내인 보나 스포르차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그문트 1세는 이 소문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조사를 명령했고, 1528년 2월 9일 두 사람이 자연사했거나 질병으로 사망했음을 확인하는 특별 칙령을 선포했다.

폴란드 왕국과 몰다비아 공국은 1530년부터 포쿠치에를 놓고 분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양자간의 상호 침략과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지그문트 1세는 몰다비아 공국의 주군 노릇을 하는 오스만 제국이 이를 빌미 삼아 폴란드로 쳐들어올 것을 우려해 몰다비아를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38년이 되어서야 몰다비아군을 물리치고 포쿠치에를 자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에 오스만군은 폴란드군을 막아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몰다비아 공국에 튀르크군을 주둔시켰다. 한편 그는 크림 칸국과 손잡고 모스크바 대공국을 합동 공격하는 등 타타르족과 우호관계를 맺으려 노력했지만, 타타르족이 리투아니아를 빈번하게 습격해 많은 주민을 노예로 삼아 끌고 가는 걸 틀어박지 못했다.
2.1.5.4. 내치
야기에우워 왕조 성립 이래, 역대 폴란드 국왕들은 튜튼 기사단 및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전쟁에 필요한 군자금과 병력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폴란드 귀족들에게 특권을 연이어 내려줬다. 급기야 지그문트 1세의 전임 군주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는 1505년 폴란드 국왕이 세임의 동의 없이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니힐 노비(Nihil novi: 새로운 것이 없다) 헌법을 승인했다. 이로 인해 폴란드 국왕의 입법 권한은 크게 제한되었고, 국정은 폴란드 귀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지그문트 1세는 이러한 상황에 내심 불만을 품었지만, 당장 모스크바 대공국과 튜튼 기사단과의 전쟁을 치르려면 귀족들의 협조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세임을 설득해 전쟁세를 승인하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 전쟁이 점차 폴란드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면서 지그문트 1세의 권위가 강화되자, 그는 이 기회를 살려 왕권 강화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왕실 재무부에서 공공세 회계를 분리했고, 크라쿠프 조폐국의 활동을 강화했으며, 제염소와 광산 개발로 인한 소득을 왕실이 직접 관리하게 했다. 여기에 151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속한 도시들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 이민자들에 적용되는 특별법을 반포하고, 1523년 절차 규칙을 반포하는 등, 국왕의 입법 권한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1523년 4월, 지그문트 1세는 맥주, 보드카, 꿀, 와인의 생산, 수입 및 판매에 대한 소비세인 초포웨(Czopowe)를 부과했다. 이때 세임의 동의 없이 이 세금을 부과했기에 반발이 상당했다. 급기야 그해 5월 5일, 바벨 성의 회랑을 걷고 있던 그를 향해 누군가가 총을 발포해 암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후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아들 지그문트 2세를 리투아니아 공동 대공에 선임했고, 1529년 선거를 통해 폴란드 공동 국왕으로 옹립했다. 지그문트 2세의 즉위식은 1530년에 거행되었다. 귀족들이 이를 세습으로 간주하고 불만을 제기하자, 그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1538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국왕 선거에 참가할 수 있다는 자유 선거법을 반포했다.

지그문트 1세는 거듭된 전쟁으로 국고가 종종 부족한 상황을 만회하고자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했고, 왕실에 속한 도시들의 경제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보나 스포르차 왕비는 왕실의 재산을 늘리는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리투아니아에서 수많은 영지를 구입하고, 농민에 대한 통일돤 관세와 면적 측정을 포함한 농지 개혁을 실시했다. 또한 토마토, 브로콜리, 아티초크, 강낭콩, 콜리플라워, 배추, 당근, 상추, 시금치 같은 여러 야채 종자를 폴란드 농촌에 보급해서 농가의 소득을 개선시켰다. 지그문트 1세는 이렇게 확보한 왕실 재산을 토대로 1527년 영구 징병군을 창설하고 국가를 통치하고 군대에 자금을 조달하는 데 필요한 관료 기구를 확대했다. 그는 여기에 더해 이전에 귀족에게 담보로 제공되거나 임대된 왕실 재산을 반환받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귀족들은 1537년 르부프 인근에 모여 왕을 위해 몰다비아를 정벌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대규모 사병대를 소집했다.[3] 귀족들은 이 군대로 왕실을 위협하면서 36가지 요구사항을 게재했는데,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귀족들은 여기에 더해 보나 스포르차 왕비가 지그문트 왕자를 잘못된 방식으로 양육하고 있으며, 폴란드 왕국에서 자신의 권력을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곧 분열되어 자기들끼리 자중지란을 일으켰고, 나중에 지그문트 1세가 토벌대를 이끌고 접근해오자 협상을 요청했다. 지그문트 1세는 그들이 제시한 요구 대부분을 거부했지만, 개인이 두 개 이상의 공식 행정직을 맡는 것을 금지하라는 것만은 받아들였고, 왕이 통치하는 동안 차기 국왕의 선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귀족들은 이에 만족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얀 드우고시 등 후대의 폴란드 역사가들은 귀족들이 이 반란을 통해 얻어낸 것은 그들이 르부프에 모여서 을 잡아먹은 것 뿐이라면서, "닭 전쟁"이라는 경멸적인 명칭을 붙였다.

1538년, 세임은 마을 주민들에게 토지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법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1543년에 농민들이 농노제에서 자유로워질 권리를 박탈하고 영주의 동의 없이 마을을 떠날 경우 가해지는 처벌을 강화하는 법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폴란드 농민들은 한층 더 예속되었고, 마을 주민들은 가난해졌다. 지그문트 1세는 귀족들의 협력을 받아야만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는 걸 잘 알았기에 이를 눈감아줬다.

한편,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열풍이 폴란드에 확산되자, 지그문트 1세는 1520년에 토룬에서 루터가 쓴 책의 수입, 판매, 사용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그는 루터의 책이 교황청에 반대하는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공공 질서의 혼란, 종교와 교회 질서를 훼손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며, 이를 읽는 것은 신앙의 적임을 자인하는 짓이라고 강조했다. 1523년, 그는 루터의 주장을 설교하고 옹호하고 칭찬하는 자들을 루터의 저작물을 소개하는 자들과 함께 사형에 처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하는 형벌을 내리겠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1525년 1월, 그단스크 시민들은 에버하르트 페르버 시장이 도시 자금을 횡령한 것에 분노해 집단 항의했다. 페르버 시장은 사임했지만, 시청은 국민 대표들에게 도시 회계를 제시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루터교를 신봉하는 부르주아지들은 이들이 부패한 가톨릭에 찌들었다고 비난하면서, 금식, 미사, 교회 노래를 폐지하고 무료 복음 전파의 도입을 요구했다. 급기야 1월 22일 그단스크에서 폭동이 일어나 시청이 무너지고 민주적인 도시 체제가 도입되었다. 모든 가톨릭 수도원은 해산되었고 성상과 성찬은 모욕되었다. 본당 신부 직은 폐지되고 설교자로 대체되었다. 그단스크 시민들은 마르틴 루터에게 대표단을 보내 새로운 신앙의 교사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도시 당국은 지그문트에게도 사절을 보내 자신들은 루터의 교리를 따르겠다고 알리면서, 그에게 계속 충성을 바칠 것이며 세금 납부를 지속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그문트 1세는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1526년 4월 17일, 그는 군인 8천 명을 포메라니아 공작 게오르크 1세에게 맡겨 그단스크를 공략하게 했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반란 지도자 14명이 아르투스 궁정 앞에서 참수되었다. 그리고 그단스크를 탈출하지 못한 루터교 설교자들은 말보르크로 이송된 뒤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지그문트는 루터를 지지하는 자들은 14일 이내에 도시를 떠나야 하고, 성직자들은 24시간에 떠나야 한다는 법령을 반포했으며, 순결 서약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된 성직자와 수도자 2백 명을 상대로 재판을 실시했다. 1534년에는 마르틴 루터를 방문하거나 루터교를 받아들인 국가에 머무른 폴란드 대학생들의 즉시 귀환을 명령했고, 향후에 폴란드 학생들이 다른 신앙을 가진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이렇듯 루터교회에 지극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정교회 유대교에는 이렇다할 간섭을 하지 않았다.
2.1.5.5. 예술 후원
지그문트 1세의 두번째 왕비인 보나 스포르차는 밀라노 공작 지안 갈레아초 스포르차의 딸로,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르네상스를 폴란드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유명한 이탈리아 예술가, 건축가 및 조각가들이 그녀의 부름을 받고 폴란드로 이동했으며, 이외에도 해외의 여러 예술가들이 활동했다. 폴란드에서 활동한 해외 예술가로는 바르톨로메오 베레치, 프란체스코 피오렌티노, 산티 구찌와 마테오 구찌 형제, 베르나르도 모란도, 지오바니 바티스타 디 쿼드로, 한스 뒤러 등이 있었다. 궁정에서 일하는 장식가의 대부분은 외국인, 특히 폴란드 건축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탈리아인과 독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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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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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예배당

이들이 이 시기에 건축한 대표적인 것으로는 폴란드 군주의 소재지이자 중부 유럽에서 가장 큰 성 중 하나인 크라쿠프의 바벨 성이다. 크라쿠프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요새화된 이 곳은 르네상스 방식에 따라 광범위하게 재건축되었다. 사각형 모양의 이탈리아 회랑형 안뜰 , 복도, 아치형 통로 등은 프란체스코 피오렌티노가 디자힌한 것이었다. 역대 야기에우워 군주들의 사냥 휴양지인 니에포워미체 성도 이 시기에 르네상스 방식으로 재건축되었다. 바벨 대성당 내에 세워진 지그문트 예배당도 피렌체 출신의 바르톨로메오 베레치의 주도하에 1519년에서 1533년 사이에 건설되어, 야기에우워 왕실의 영묘 역할을 수행했다. 많은 역사가 및 건축가들은 이 예배당을 "알프스 북쪽에서 토스카나 르네상스가 구현된 것 중 가장 아름답다"라고 평한다.

2.1.6.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2.1.6.1. 바르바라의 폴란드 왕비 등극을 위한 정치 투쟁
1548년 4월 1일, 지그문트 1세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의 유일한 적자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그는 정부였던 바르바라 라지비우를 폴란드 왕비로 세우는 문제를 놓고 홍역을 치렀다. 1548년 10월 31일부터 12월 12일, 피오트로쿠프에서 열린 세임에서, 지그문트 2세는 바르바라를 폴란드 왕비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표트르 크미타 소비인스키, 얀 가브리엘 텡친스키, 표트르 보라틴스키를 비롯한 폴란드 대귀족들은 바르바라를 왕을 현혹시킨 요부라고 비난하며 당장 바르바라와 헤어지라고 요구했으며,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지그문트 2세는 이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아내를 끝까지 옹호했으며, 심지어 퇴위까지 고려했다. 결국 세임은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산회했다.

이후 지그문트 2세와 바르바라는 크라쿠프에 입성했고, 바르바라는 1549년 5월에 남편으로부터 카우나스 성, 알리토스, 메르키네, 네무나이티스, 비르슈토나스, 지에즈마리아이, 카르멜라바, 빌키야, 다르수니스키스 등 많은 봉토를 수여받았다. 얼마 후, 귀족들은 바르바라를 지그문트 2세의 아내로 인정하지만 폴란드 왕비로서의 대관식을 거행하지 않는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지그문트 2세는 그렇게 하면 바르바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가 적법한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할 거라 여기고 거부했다. 1549년 여름, 지그문트 2세는 귀족들의 반란으로부터 왕권을 지키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고 여동생 이자벨라가 페르디난트 1세의 영지 중 하나인 헝가리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도와주던 걸 그만뒀다. 또한 교황청이 바르바라와의 결혼을 허락하도록 유도하고자 이단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으며, 귀족들이 결혼에 반대하지 않도록 위협하거나 뇌물을 주거나 정중하게 설득했다. 그러면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어머니 보나 스포르차를 마조프셰로 이송시켰다.

1550년 5~7월에 열린 세임에서, 왕에게 회유된 귀족들은 왕의 의지가 굳건한 이상 결혼을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 비록 명시적인 허가가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지그문트 2세는 왕비 대관식을 즉시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바르바라는 1550년 12월 7일 바벨 대성당에서 그니에즈노 대주교인 미코와이 지에르츠고프스키에 의해 폴란드 왕비로 등극했고, 어머니 보나 스포르차 역시 어쩔 수 없이 동의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발열, 복통, 식욕 상실에 시달렸고, 급기야 배에 고름이 가득 찬 덩어리가 나타나는 증세를 보였다. 지그문트 2세는 아내를 어떻게든 치료하려 애썼고, 고약한 고름 냄새가 나는 아내를 곁에서 정성껏 돌봤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결국 1551년 5월 8일 크라쿠프에서 사망했다.

지그문트 2세는 바르바라를 잃은 것에 깊은 슬픔에 빠졌고, 더욱 진지해지고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다. 그는 이후로 무도회를 피했고, 죽을 때까지 검은 옷을 입었다. 이후 1553년 7월 신성 로마 제국과 루스 차르국의 동맹을 막기 위해 페르디난트 1세의 또다른 딸인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와 결혼했지만, 이 결혼 역시 행복하지 못했다. 지그문트 2세는 카타리나가 뚱뚱하며 둔해 매력이 없다고 여겼고, 카타리나는 자신의 여자 형제인 엘리자베트를 박대해 그녀가 조기에 사망하게 만들었다며 지그문트 2세를 혐오했다. 그녀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책을 합스부르크 가문에 유리하도록 유도하려 애썼고, 왕을 알현하려는 합스부르크 사절단과 먼저 만나 지그문트 2세를 어떻게 회유해야 하는 지를 공모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그문트 2세는 환멸을 느껴 카타리나를 라돔으로 보내고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2.1.6.2. 리보니아 전쟁
지그문트 1세 치세인 1525년, 튜튼 기사단 알브레히트 루터교회로 개종한 뒤 폴란드 국왕의 가신이자 프로이센 공국의 공작이 되기로 했다. 그러면서 튜튼 기사단의 리보니아 지부인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에게 개신교로 개종하고 폴란드 왕국의 가신이 되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리보니아 기사단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1557년, 알브레히트가 형제 빌헬름과 루터교회 성직자들을 파견해 명령을 시행하게 하자, 가톨릭을 신봉하는 기사 및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켜 빌헬름과 메클렌부르크-기데부슈 공작 크리스토퍼를 체포했다. 알브레히트는 자력으로 반란을 진압할 수 없게 되자 지그문트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가톨릭 국가의 군주가 개신교를 신봉하는 봉신을 위해 가톨릭 반란군을 진압해야 하는 기묘한 상황이었지만, 지그문트 2세 본인이 종교에 별 관심이 없던 데다 주군으로서 봉신의 곤경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적용되었기에 리보니아로 군대를 파견했다. 1557년 7월 가톨릭 리보니아 영주들은 폴란드군에 대적하지 못하고 항복했고, 1557년 9월 14일 포즈볼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에 따르면, 대부분의 리보니아 영토는 폴란드의 주권을 인정하고,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해체되며 마지막 기사단장인 고타드 케틀러는 쿠를란트와 세미갈리아의 공작에 선임되어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보다 앞선 1554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루스 차르국과 15년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이제 리보니아가 폴란드에 예속되자, 루스 차르국의 차르 이반 4세는 계약 위반이라고 여기고 전쟁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1558년 1월 22일, 이반 4세는 리보니아를 폴란드의 침략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쟁을 선포했다. 그 해 5월에 타르투가 루스군에 함락되었고, 7월에는 나르바가 함락되었으며, 탈린은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으며, 그 외의 여러 요새가 루스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이에 리보니아 현지군은 란츠크네히트 1200명, 포수 1백 명을 고용한 뒤 반격을 개시해 라크베레를 성공적으로 탈환했다. 이후에도 여러 요새가 리보니아군에 넘어갔지만 타르투, 나르바 및 여러 소규모 요새들은 루스군에게 남아 있었다.

1559년 1월, 러시아군은 재차 공세를 개시해 리보니아의 여러 요새를 함락했다. 하지만 그해 5월 크림 칸국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리보니아와 6개월간의 평화 협정을 맺었다. 리보니아 측은 처음에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1559년 6월, 리보니아 전역은 제1차 빌뉴스 조약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식 보호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폴란드 세임은 이 조약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만 이롭다고 여기고 조약 동의를 거부했다. 1560년 1월, 지그문트 2세는 루스 기병대가 리보니아 시골 지역을 약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절단을 모스크바에 파견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지그문트 2세는 강성해지고 있는 루스 차르국과 당장 정면 대결을 벌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그 대신, 그는 외교를 통해 우호국을 끌어들이려 했다. 1561년 스웨덴 국왕 에리크 14세의 군대가 탈린을 포함한 에스토니아 북부 일대를 정복한 후 에스토니아 공국을 세우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국인 쿠를란트 공국과 맞닿게 되자, 그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에리크 14세의 형제이며 핀란드 공작인 요한 3세와 누이 카타지나 야기엘론카의 결혼을 주선했다.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동생이 외국의 공주와 결혼하면 자신의 위치가 위험해질 것이라고 판단한 에리크 14세는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요한은 에리크 14세의 동의 없이 혼담을 진행했다.

1562년 10월 4일, 카타지나는 요한과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에 분노한 에리크 14세는 1563년 8월 요한의 거처인 오보 성을 함락시키고 요한을 체포했다. 카타지나에게는 폴란드로 돌아갈지 성에 유폐될지 선택지가 주어졌고, 카타지나는 남편 곁에 있는 것을 선택했다. 요한과 카타지나는 그립스홀름 성에 유폐되었다. 이에 지그문트 2세는 같은 해 10월 에리크 14세에 맞서기 위해 덴마크 및 뤼벡 시와 동맹을 맺었다.

1563년, 이반 4세는 리투아니아를 대대적으로 침공해 비테브스크를 습격했고, 뒤이어 폴로츠크를 공략했다. 이에 리투아니아군은 반격을 가했고, 1564년 바르바라 라지비우의 남자 형제였던 미코와이 라지비우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 1만 명이 루스군 1만 7천~ 2만 4천 명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적군 사령관 표트르 이바노비치 슈이스키를 전사시켰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리투아니아군은 적으로부터 막대한 전리품을 탈취했는데, 그 양이 엄청나서 군인들은 빵을 무료로 분배받았고 갑옷은 헝가리 금화 1개에 팔렸다고 한다. 이후에도 리투아니아군은 루스군을 계속 몰아붙인 끝에 리보니아 해안 지대를 확보했다. 반면 리보니아 중부의 도시와 마을들은 여전히 루스군의 지배를 받았다.

1564년, 루스 차르국의 왕족이자 유력한 사령관이었던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 쿠르브스키가 이반 4세의 숙청을 피해 리투아니아에 망명했다. 지그문트 2세는 그에게 볼히니아에 있는 코벨 마을을 수여했고, 안드레이는 1564년 말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를 이끌고 벨리키에 루키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쿠르브스키는 1564년에서 1579년 사이에 이반 4세와 독설이 담긴 서신을 여러 차례 주고받았고, 1573년에 이반 4세를 미쳐버린 폭군으로 매도하는 팜플렛을 배포하기도 했다.

1566년 5월, 리투아니아 외교관들이 모스크바에 방문해 리보니아를 러시아와 분할하고 스웨덴을 에스토니아에서 몰아내기 위한 합동 공세를 펼치자고 제안했다. 이에 이반 4세는 리보니아 남쪽의 쿠를란트와 리투아니아-러시아 국경 지대의 폴로츠크를 리투아니아에게 양도할 테니 리가를 포함한 리보니아 전체를 루스 차르국이 갖겠다고 밝혔다. 리투아니아인들은 발트해 무역이 리가를 통해 이뤄졌기 때문에, 리가를 포기하라는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게다가 이반 4세는 7월에 타르투, 나르바 외에도 사아레마 섬까지 루스 차르군의 영역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협상은 중단되었고, 양자는 국경 지대에서 수차례 맞붙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한편, 에리크 14세는 카타지나와 요한의 결혼을 무효화하고자 이반 뇌제에게 카타지나를 보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스투레 가문 인사 살해, 평민 카린 몬스도테르와의 결혼으로 스웨덴 귀족들의 미움을 산 에리크 14세는 그전에 폐위되었고, 요한와 카타지나는 1569년에 각각 스웨덴 국왕과 왕비로 등극해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1570년, 폴란드-리보니아와 루스 차르국간의 3년 휴전 협정이 맺어지면서, 양국간의 전쟁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2.1.6.3. 루블린 조약
파일:루블린 연합.jpg
얀 마데이코 작, <루블린 연합>, 1869년.

지그문트 2세 치세의 가장 큰 성과는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하나의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통합하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프로이센 공국 및 도시들과도 연합한 루블린 조약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1569년 1월, 지그문트 2세는 폴란드 도시 루블린 근처에서 세임을 개최하고 양국의 통합안을 제시했다.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당초에 이 협약을 맺기를 꺼렸다. 자칫했다간 자신들의 지위와 부가 부유한 폴란드 대귀족이 아닌 소귀족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떨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그문트 2세의 전 처남인 미코와이 라지비우는 이 합의가 폴란드에 의한 리투아니아의 평화적 병합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동방에서 150년 이상 지속된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리투아니아 각지가 황폐화되었고, 모스크바 대공국의 뒤를 이은 루스 차르국이 이반 4세의 지도하에 계속 강성해지자,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현실적으로 폴란드 왕국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직시했다.

지그문트 2세는 1385년 야드비가 요가일라의 결혼으로 이뤄진 두 나라의 동군연합은 오래 지속되기엔 불안한 요소가 많다고 여겼고, 후손을 얻지 못한 자신이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 될 것임을 직시하고 왕조의 유산을 보존하고자 했다. 그는 조약 반대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탁월한 웅변술과 외교력을 갖췄던 그는 리투아니아 세임에 지속적으로 참석해 귀족들을 열심히 설득했고, 때로는 뇌물 공세를 벌였다. 이에 여러 귀족이 설득되었는데, 특히 포들라키아, 볼히니아, 포돌리아, 키예프 등 루테니아 일대의 귀족들은 폴란드가 제공하는 정치적, 경제적 잠재력을 활용하기를 열망하고, 1569년 3월 1일 왕이 제시한 조건에 동의했다.

다른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얀 히에로니모비치 코드키에비츠[4]를 중심으로 한 연합에 긍정적인 리투아니아 귀족 및 폴란드 대귀족들의 열렬한 설득을 받았다. 그들은 루블린 조약을 받아들인다면 자신들과 동등한 지위와 명예를 보유하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1569년 7월 1일,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폴란드 국왕이 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국의 군주에게만 충성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루블린 협약을 승인했다. 7월 4일, 지그문트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 자격으로 이 협약에 서명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이제 임금 한 명이 통치하고 의회는 하나만 있게 되었으며, 리투아니아 대공 선출 제도는 폐지되었다. 다만 행정과 재정, 군대와 사법권은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당시에는 아직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법 체제가 더 정교하고 판례가 많다는 점 때문에 연방의 법 체계는 리투아니아 대법전을 기본으로 하여 1571년 5월 3일에 반포되었다.
2.1.6.4. 종교 정책
아버지 지그문트 1세는 확고한 가톨릭 신자로, 루터교회를 대상으로 지속적인 박해를 가했다. 반면에 지그문트 2세는 종교에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신하가 가톨릭을 받들든, 마르틴 루터 장 칼뱅의 주장을 따르든, 정교회를 믿든, 유대교를 믿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의 치세 동안 여러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이 루터교회 또는 칼뱅교회로 개종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스타니스와프 자모이스키, 얀 자모이스키, 미코와이 레이, 안제이 프리츠 모드제프스키, 라스코의 요한네스 등을 들 수 있다.

지그문트 1세 치세 때부터 왕실 비서로 일하면서 정치작가로도 활동하던 안제이 프리츠 모드제프스키는 <교회론>을 집필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폴란드에 대한 교황의 간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교황은 발을 올리고 거기에 키스하라고 요구하고 있으며, 마치 신의 비밀 계획에서 나온 것처럼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일 뿐인데도 신성한 명예를 부여받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폴란드 내 교회 의 지위를 규제하고, 국가에 종속되고 교황권으로부터 독립된 국가 교회를 설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1534년 헨리 8세의 <수장령>에 의한 성공회 창설에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지그문트 2세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1555년 피오트르쿠프에서 열린 세임에서 이 안건을 제시했다. 귀족들은 새로 제안된 폴란드 교회에 사제의 권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는데, 특히 독신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일부 가톨릭 주교들은 이를 지지했고, 폴란드, 리투아니아, 프로이센 등지의 모든 종파들을 공통 종교 아래 통합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지그문트 2세는 교황 바오로 4세에게 세임의 결정을 알리며 승인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바오로 4세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하고 파문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지그문트 2세와 세임은 이 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 등 가톨릭 국가들과 전쟁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 계획을 취소했다. 그렇지만 개신교는 계속해서 확산되었고, 1565년에는 칼뱅주의에서 파생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종파인 폴란드 형제단이 탄생했다. 지그문트 2세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년 후인 1573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맹 주민들의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는 바르샤바 조약이 세임에서 체택되기도 했다.
2.1.6.5. 예술 진흥 정책
지그문트 2세는 아버지 지그문트 1세가 시작한 폴란드 르네상스 후원을 이어갔다. 그는 바벨, 빌뉴스, 니에포워미체 및 바르샤바의 성채를 포함한 여러 왕실 거주지 개발을 실시했다. 1560년대엔 티코친 성을 인수해 르네상스 방식으로 재건했다. 티코친 성은 재무부와 도서관, 무기고를 갖춘 왕실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한편, 그는 보석과 원석을 열성적으로 수집했다. 그의 컬렉션은 16개의 상자에 보관되었는데, 그 중에는 카를 5세의 루비, 합스부르크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다이아몬드 메달이 있었다. 1571년 동헝가리 국왕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사망한 뒤, 그는 성 이슈트반 왕관을 본따서 만든 헝가리 왕관을 조카로부터 물려받았고, 스웨덴 왕관을 별도로 구입해 티코친 성의 개인 금고에 보관했다. 여기에 술탄의 검, 말덫 30개 덫, 개인용 갑옷 20개를 갖추었다. 1550~60년에 브뤼셀에서 제작한 테피스트리 컬렉션 360개도 티코친 성에 보관되었다.

지그문트 2세는 단편소설, 시, 풍자를 즐겨 읽었다. 당대 폴란드 최고의 작가로 손꼽히는 얀 코차노프스키는 크라쿠프 주교였으며 역시 뛰어난 문학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표트르 미슈코프스키의 소개로 1563년부터 왕의 비서가 되었고, 지그문트 2세는 코차노프스키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문학적 지식을 향유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 금세공인, 보석상 등을 대거 고용해 왕궁에서 활동하게 했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생식 판화 제작자 조반니 야코포 카라글리오는 폴란드에 고용된 뒤 동전, 보석, 메달 제작을 전담했다. 그가 이 시기에 제작한 메달과 동전에는 지그문트를 포함한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구성원들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1558년 10월 18일, 지그문트 2세는 크라쿠프에서 베네치아까지 운영되는 폴란드 최초의 정규 우편 제도를 도입하고 폴란드 우체국을 설립했다. 모든 유지 비용은 왕실이 부담했으며, 게시물은 대부분 이탈리아인이나 독일인이 관리했다. 1562년부터는 과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도시까지 포괄하게 되었고, 폴란드와 합스부르크 왕조에 속한 지역간의 지속적인 통신이 가능해졌다. 지그문트 2세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573년에는 바르샤바와 비스툴라 강을 가로지르는, 유럽에서 가장 긴 다리가 건설되었다.

2.1.7. 안나 야기엘론카

1572년 7월 7일,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자식을 끝내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당시 야기에우워 왕조의 유일한 상속녀였던 안나 야기엘론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차기 국왕으로 세워질 인물이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첫 국왕 선거 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인 에른스트 대공을 지지했다. 그러나 얀 자모이스키 등 폴란드의 여러 대귀족은 에른스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되면 가뜩이나 전 유럽에 위세를 떨치고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자국까지 집어삼킬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그 대신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아들인 앙주 공작 앙리를 지지했다. 선거 결과, 앙리가 에른스트를 꺾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앙리는 프랑스를 떠나 머나먼 폴란드로 가기를 주저했다.

1574년, 앙리 왕자는 프랑스 국왕이자 형제인 샤를 9세의 최후 통첩을 받고 측근 몇 명만 대동한 채 폴란드로 가서 2월 21일 바벨 대성당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헨리크 발레지'로 즉위했다. 얀 자모이스키 등은 앙리에게 안나와 결혼하도록 권고했지만, 앙리는 51세였던 안나와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졌다. 급기야 얀 자모이스키가 임금의 명의로 크늬쉰市를 인수하자, 그곳을 영지로 삼고 있었던 안나는 격분해 앙리에게 명령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녀는 언니 조피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앙리는 자신이 그런 명령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얀 자모이스키가 제시한 서류에는 그의 서명이 있었다며 불만을 털어놨다. 그러면서 조피아에게 이 사건을 다른 유럽 통치자들에게 알려서 앙리의 부당한 결정을 물려달라고 요구할 사절단을 세임에 보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뤄지지 않았고, 안나는 자신이 아끼던 도시를 얀 자모이스키가 부실하게 관리한다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1574년 5월 30일, 샤를 9세가 사망한 뒤 왕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앙리를 프랑스 차기 국왕으로 지명하고 귀국하기 전까지 섭정을 맡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앙리는 프랑스에서 함께 동행했던 측근들과 모의한 뒤 6월 18일 폴란드 왕위를 미련없이 버리고 크라쿠프에서 도망쳐 프랑스로 돌아갔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은 그가 다시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돌아오기를 간청했지만 무시당하자, 결국 포기하고 1575년에 차기 국왕 선거를 벌이기로 했다. 이때 안나는 일전의 일을 교훈으로 삼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에 직접 출마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니에즈노 대주교이자 폴란드 추기경 야쿠브 우찬스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를 추천했고, 즈보로브스키 가문은 트란실바니아 공국 프린스 스테판 바토리를 추천했다. 두 후보 모두 안나와 결혼하겠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세 후보가 경합한 결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여왕이 단독 군주가 되거나 위세가 대단한 합스부르크 가문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까지 꿰차는 대신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스테판 바토리를 군주로 세우고, 안나를 그와 결혼시키는 쪽을 택했다. 이에 안나는 승인을 요청하는 귀족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왕비가 되기보다는 여왕이 되고 싶다!"

다음 날인 1575년 12월 15일, 귀족들은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여왕이자 트란실바니아 프린스의 아내로 추대했다. 헤움의 시종장이자 기사단 원수인 미코와이 시에니츠키는 선거인단의 결정을 발표하면서, "공주를 여왕으로 지명하며, 스테판 바토리를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 지명했다"고 밝혔다. 1576년 5월 1일, 그녀는 바벨 성에서 스테판 바토리와 결혼했고, 바벨 대성당에서 쿠야비 주교 스타니스와프 카르노코프스키가 주관하는 대관식에 참석해 남편과 함께 왕관을 받았다. 그날 그녀는 어머니와 형제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포기하기로 동의한 법령에 서명했고, 그 대가로 리투아니아와 마조프셰 영지의 수입을 평생 가질 수 있었다. 여기에 어머니가 티코친에 보관한 금고에 들어있던 금화 6만 개와 어머니가 필리프 2세에게 대출한 돈의 이자를 매년 수령할 수 있었다.

안나는 남편보다 우위를 점하려고 노력했다. 외국 사절은 먼저 안나에게 신임장을 제출하고 공사관권을 제시해야 했다. 또한 안나는 스테판 바토리와 크라쿠프 대학의 학자들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했고, 1584년 크라쿠프 대학의 소재지를 방문한 후 대학에 보석을 기증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활용해 여러 건설 계획을 후원 및 감독했다. 바르샤바 왕궁, 우야즈두프 성의 재건축을 감독했고, 오빠 지그문트 2세 치세부터 건설되고 있던 바르샤바와 비스툴라 강을 가로지르는 목조 다리 건설을 완료하고 '지그문트 아우구스트 다리'로 명명했다. 이때 목조 다리를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스타라 프로코우니아(Stara Prochownia) 방벽을 건설했다. 1574년부터 1584년까지 이탈리아 건축가 산티 구찌의 도움을 받으며 지그문트 2세의 무덤 기념물을 건설했으며, 1589년부터 1595년까지 바리의 바실리카 디 산 니콜라스 대성당에 어머니의 무덤을 건설했고, 지그문트 예배당에 자신의 무덤을 별도로 짓게 했다.

그러나 안나와 스테판 바토리의 결혼 생활은 지극히 형식적이었고, 서로에게 이렇다 할 애정이 없었다. 부부는 멀리 떨어져 살았고, 리보니아 전쟁에 몰두했던 바토리가 바르샤바 회의에 참석했을 때에서야 대면할 뿐이었다. 게다가 바토리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길 희망한 아내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고 자신이 정국을 진두지휘했고, 안나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게다가 바토리가 젊은 여성과 결혼하여 자식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상속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안나와 이혼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안나는 리보니아 전쟁에서 바토리를 상대하는 적들을 은밀히 지원했다. 하지만 바토리는 안나와 이혼하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손상을 입어 입지가 위태로워짐을 잘 알았기에 이혼하지 않았다.

1586년, 스테판 바토리가 사망했다. 안나는 폴란드의 단독 여왕으로서 정치를 주도할 수 있었지만, 당시 62세로 고령이었기에 왕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다. 대신 조카인 스웨덴의 시기스문드 왕자가 입후보함을 지지하고, 또다른 후보인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선거 결과, 이번에는 시기스문드 왕자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기문트 3세로 등극했다. 안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반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시기스문드 왕자의 누이인 안나 바사와 막시밀리안 대공의 결혼을 약속했다.

이후 지그문트 3세가 개신교 신자인 홀스타인 공주 크리스티나와 결혼하기를 가톨릭 세임 의원들과 함께 강력하게 반대했다. 지그문트 3세는 이모의 뜻대로 크리스티나와의 결혼을 포기했지만, 그 대신 맞이한 아내인 합스부르크의 안나[5]가 폴란드 królowa() 칭호를 받는 것에 대해 안나가 강력하게 항의했을 때는 묵살했다. 지그문트 3세가 대항종교개혁을 단행해 개신교 세력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밀어내고 자국을 가톨릭에 신실한 국가로 세우고자 노력할 때 적극적으로 호응했으며, 마조프셰에서 개신교의 영향력이 사라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안나는 말년을 바르샤바에서 보냈고, 1596년 9월 9일 조카 지그문트 3세의 품에 안긴 채 사망했다. 이리하여 야기에우워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2.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국

2.2.1. 울라슬로 2세

울라슬로 2세의 본래 이름은 브와디스와프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와 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알브레히트 2세의 딸 엘리자베트의 장남이다. 1457년 11월 23일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국왕이었던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사망한 후, 카지미에시 4세는 아내가 라디슬라우스의 누이였던 점을 근거로 삼아 자신이나 아내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헝가리와 보헤미아 모두 폴란드 왕을 섬기지 않기로 결의했다. 헝가리는 1458년 1월 24일 마차시 1세를 국왕으로 선출했고, 보헤미아 왕국은 그해 3월 2일에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를 왕으로 선포했다.

브와디스와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의 유력 후계자였기에 유년기부터 제왕학을 익혔다. 그러던 1466년, 교황 바오로 2세 이단 얀 후스의 교리를 아직도 따른다는 이유로 이르지를 파문하고 십자군을 선포했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이르지에 맞서 봉기하면서 마차시 1세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마차시 1세는 1468년 3월 이르지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모라바를 침공했다. 이르지는 카지미에서 4세에게 보헤미아와 헝가리 사이의 평화 조약을 중재해준다면 브와디스와프를 후계자로 지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카지미에시 4세는 이 제안에 혹해 마차시 1세에게 평화조약을 맺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마차시 1세는 이를 거절했지만, 1469년 초 빌레모프에서 이르지의 군대에게 포위된 뒤 휴전 협정을 맺는 대가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1471년 3월 22일 이르지가 사망하자, 보헤미아 의회는 5월 27일 브와디스와프를 보헤미아의 새 왕 블라디슬라프로 추대했다. 교황 특사 로렌초 로베렐라는 이를 무효로 선언하고 마차시가 보헤미아 왕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제국의회를 개최해 이를 묵살하고 블라디슬라프의 집권을 받아들였다.

1471년 8월 22일 프라하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블라디슬라프는 폴란드군을 데리고 오지 못했기 때문에 보헤미아 귀족들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 결과, 보헤미아 의회는 그의 치세 동안 자체적으로 법령을 제정 및 반포하는 등 국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471년 마차시가 모라바로 가서 보헤미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헝가리의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블라디슬라프의 동생 카지미에시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카지미에시 4세는 카지미에시에게 군대를 맡겨 헝가리를 공격하게 했지만, 마차시 1세가 즉각 반격을 가하여 폴란드군을 격파했다.

1472년 3월 1일, 교황 식스토 4세는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가 마차시 1세를 상대로 전쟁을 지속한다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그해 5월 31일 카지미에시 4세, 블라디슬라프, 그리고 마차시는 평화 협약이 체결될 때까지 휴전을 갖는 데 합의했다. 이후 양자간의 협의 끝에 1474년 2월 21일 3년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1474년 3월, 블라디슬라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 카지미에시 4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와 다시 전쟁을 벌였다.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는 그 해 10월에 슬레스코를 침공하여 브라티슬라프에 있던 마차시를 포위했으나, 마차시가 청야 전술을 구사하는 바람에 식량 공급에 차질을 겪은 끝에 퇴각했다. 이후 슬레스코-모라바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마차시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는 12월 8일 마차시와 1년 휴전 협약을 맺었다.

1476년, 글로가우 공국의 공작 하인리히 11세가 사망했고 아내인 브란덴부르크의 바르바라[6]가 공국을 상속받았다. 블라디슬라프는 그 해에 바르바라와 결혼함으로써 글로가우를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 그러나 마차시 1세의 지원을 받은 하인리히 11세의 조카 요한 2세가 글로가우에 쳐들어와서 바르바라를 몰아냈다. 그는 글로가우를 탈환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3세와 손잡기로 했다. 교황 특사 발다사레 데 피사로부터 마차시의 영토를 침범한다면 파문하겠다는 위협을 받았지만, 그는 이를 무릅쓰고 1476년 12월 5일 또다시 프리드리히 3세와 손잡고 마차시와 전쟁을 단행했다. 1477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 3세는 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공인했다. 이틀 후, 마차시가 프리드리히 3세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니더외스터라이히를 침공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3세에게 지원군을 보냈지만, 적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자 7월 말 이전에 오스트리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프리드리히 3세는 에서 헝가리군에게 포위되자 12월 1일 마차시 역시 보헤미아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했다.

1478년 1월 15일, 발다사레 데 피사는 마차시와 전쟁을 벌였다는 이유로 블라디슬라프와 추종자들을 파문했다. 이에 블라디슬라프는 마차시와 재차 협상을 벌였고, 1478년 3월 28일에 최종적으로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에 따르면, 마차시와 블라디슬라프 모두 보헤미아 왕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으며, 보헤미아 본토는 블라디슬라프가 가지되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에서는 마차시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들은 7월 21일 올로모우츠에서 열린 회의에서 평화 협약을 비준했다.

올로모우츠 협약 이후, 마차시를 지지했던 가톨릭 귀족들이 보헤미아로 돌아왔다. 블라디슬라프는 몇 차례 파문당해서 떨어진 위신을 되살리고 보헤미아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들의 지위를 강화하기로 했다. 그는 보헤미아 각지의 시 의원들을 후스파에서 가톨릭 시민으로 대체하기 시작했으며, 후스파였던 이르지 전 국왕의 두 아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여기에 더해 프라하 대교구를 가톨릭 사제로 교체하려 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프라하 시민들은 1483년 9월 봉기를 일으켰다. 반란군은 도시 내의 대다수 가톨릭 성직자와 장로들을 살해하거나 추방했고, 독일인 유대인을 박해했다.

블라디슬라프는 가까스로 프라하에서 탈출한 뒤 진압군을 보내려 했지만, 님부르크, 자테츠, 흐라데츠크랄로베에서도 반란이 일어나면서 병력 모집이 어려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반란군과 타협하기로 했다. 그 결과 1484년 후스파 의원들이 대거 복직했고, 후스파 성직자들의 권리가 공인되었다. 1485년 3월 쿠트나 호라에 소집된 회의에서 블라디슬라프의 중재하에 후스파와 가톨릭 귀족들간의 타협안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귀족과 평민 모두 가톨릭과 후스파 중 하나를 자유롭게 택할 권리가 인정되었다. 이리하여 보헤미아의 종교 갈등은 어느정도 수습되었다.

1486년 2월 16일, 프리드리히 3세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했고 선제후들은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독일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왕으로서 선거 권한이 있었던 블라디슬라프와 마차시는 불참했다. 그들은 그해 9월 이흘라바에서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귀족들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블라디슬라프는 곧 마음을 바꿔 막시밀리안의 독일왕 선출을 인정했다. 이후 마차시와 프리드리히 3세의 전쟁을 관망하면서, 양측의 지원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1490년 4월 6일 마차시 1세가 빈에서 통풍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헝가리 귀족들이 5월에 국왕 선출을 위해 모였을 때, 경쟁사 4명이 경합했다. 마차시 1세의 사생아 코르빈 야노시는 헝가리 남부의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막시밀리안 대공은 1463년 노이슈타트에서 마차시가 합법적인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할 경우 프리드리히 3세나 그의 후계자들이 헝가리를 상속하자고 했던 협약을 상시키기며 자신이 헝가리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블라디슬라프는 자신이 마차시 1세의 전임 국왕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의 누이의 장남이니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이자 폴란드 왕인 카지미에시 4세는 모든 아들들에게 독립된 왕국을 물려주고 싶어했기 때문에 셋째 아들인 얀 올브라흐트를 헝가리 국왕으로 세우려 했다.

대다수의 헝가리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블라디슬라프가 자신들의 권익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에 혹해 그를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블라디슬라프는 마차시 1세의 미망인인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몰다비아 공작이자 헝가리의 봉신 슈테판 3세와 팔 키니시가 그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7월 4일 코르빈 야노시를 격파해 헝가리에서 축출했다. 7월 15일, 헝가리 의회는 블라디슬라프를 헝가리 왕으로 추대했고 크로아티아에서도 이를 받아들였다, 블라디슬라프는 8월 9일 헝가리의 수도 부더에 도착한 뒤 특별세를 부과하거나 다른 "유해한 세금"을 도입하는 것을 자제하고 의회와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의 헌장을 발표했다.

1490년 9월 18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울라슬로 2세'로 대관식을 거행한 후 부더에 정착했고, 보헤미아 왕국은 보헤미아 의회에 의해 대리 통치되었다.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 역시 그의 집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동생 얀 올브라흐트는 자신이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얀은 에게르를 점령한 뒤 9월에 커셔를 포위했다. 독일왕 막시밀리안 역시 헝가리를 침공해 11월 말에 솜버트헤이, 베스프렘, 세케슈페헤르바르를 점령했다.

울라슬로는 에스테르곰에서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비밀 결혼을 했고, 그녀로부터 지원받은 막대한 자금을 활용해 대규모 병력을 편성했다. 이후 헝가리군이 반격을 가해온 데다 헝가리 귀족들을 포섭할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막시밀리안은 12월 연말에 헝가리에서 철수했다. 울라슬로는 여세를 이어가 커셔를 구원했고, 얀 올브라흐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1491년 2월 20일 글로가우 공국과 슬레스코 절반을 자신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헝가리 왕위 주장을 취소했다. 1491년 가을 얀 1세가 다시 헝가리를 공격했지만, 서포여이 이슈트반이 이끄는 헝가리군이 격파했다.

1491년 11월 7일, 울라슬로는 포조니에서 막시밀리안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마차시 1세 생전에 헝가리가 빼앗았던 모든 오스트리아 영토를 막시밀리안에게 돌려주며, 울라슬로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상속받는 것을 인정했다. 그 대신, 막시밀리안은 헝가리에 대한 그의 주권을 인정하며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헝가리 왕위를 굳혔지만, 그는 마차시 1세의 중앙집권화 정책을 포기하고 거의 모든 정책이 의회에서 정해지게 내버려뒀다. 의회에서 정해진 결의안에 대한 서명을 요구받을 때마다 "도브르제"(Dobrze)[7]라고 말하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명했다. 마차시 1세 재위 32년 동안 5번밖에 소집되지 않았던 의회는 1492년 초 소집된 이래 그의 치세 내내 거의 매년 빠지지 않고 열리면서 헝가리의 중대소사를 결정했고, 자연히 의회를 운영하는 대귀족들의 권세가 대단히 강해졌다.

1492년 6월 7일, 아버지 카지미에시 4세가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각각 울라슬로의 동생인 얀 올브라흐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에게 넘기고 사망했다. 그는 폴란드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지만 폴란드 귀족들은 이를 무시했다.[8]

마차시 1세는 생전에 2만 기병대와 8천 보병대로 구성된 최정예군인 '검은 군대(Fekete sereg)'를 양성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과의 전쟁에서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해 헝가리 왕국이 승승장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마차시 1세 치세 때 이들에게 억압당했던 귀족들은 울라슬로 집권 이래 검은 군대에게 줘야 할 급료를 일부러 대폭 삭감해버렸다. 급료가 오랫동안 지급되지 않자, 검은 군대는 반란을 일으켜 사바 강 유역의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그러나 팔 카니시가 이끄는 진압군이 9월에 이들을 무찔렀다. 대다수 부대원들은 처형되었고, 1493년 1월 3일에 잔당들도 강제 해산되었다. 이리하여 헝가리 최강의 정예군은 마차시 1세 사후 3년도 안 되어 사라졌다.

검은 군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헝가리의 국방력이 약화되자, 오스만 제국은 이때를 틈타 헝가리를 공격했다. 1493년 9월 11일, 오스만군은 크르바바 평원 전투에서 크로아티아 귀족 연합군을 격파한 뒤 네레트바 강 북쪽의 아드리아 해 연안을 병합했다. 오스만 습격대는 이후로도 헝가리 남부 지역을 거의 매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울라슬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1494년 봄 의회의 승인없이 특별세를 부과했다. 귀족들은 왕국 전역에서 세금에 항의했는데, 특히 헝가리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이었던 우일러키 뢰린츠(Újlaki Lőrinc)는 세금 징수원들을 살해하고 울라슬로를 황소라고 모욕했다. 이에 울라슬로는 1495년 초 우일러키 가문이 오스만 제국과 협력했다고 비난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우일러키 뢰린츠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항복하고 벌금을 납부하는 대가로 대부분의 영지를 보전받았다.

1495년 4월 울라슬로 2세와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바예지트 2세는 3년간 휴전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오스만 습격대는 이후로도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남부 일대를 주기적으로 습격했다. 1496년 5월, 헝가리 의회는 울라슬로의 재무관 에르누스트 지그몬드를 횡령 혐의로 고발했다. 울라슬로는 귀족들의 강권에 못 이겨 에르누스트를 체포했고, 에르누스트는 40만 골드 플로린의 몸값을 지불한 후에야 풀려났다.

1498년, 헝가리 의회는 지주들이 자신의 가신들에게 지불하기 위해 세금의 절반을 보유할 수 있게 하고, 가장 부유한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이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비하여 사병을 양성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령을 반포했다. 또한 귀족 배심원들이 회의에 참석해야만 왕실 평의회의 결정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법령도 반포되었으며, 도시와 시민들의 경제적 특권을 제한하는 법령도 통과되었다. 1500년 3월 11일에는 왕실이 귀족들의 토지 소유를 간섭할 수 없다는 내용의 법령도 반포되었다. 이로 인해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귀족들은 왕의 간섭을 걱정할 필요없이 평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울라슬로가 통치에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의회가 내정을 이끄는 것을 내버려두면서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나름의 조치를 내렸다. 1498년 7월 20일 크라쿠프에서 얀 1세와 군사 동맹을 맺어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올 경우 서로 지원하기로 했다. 또한 코르빈 야노시와 화해하고 크로아티아의 방위를 그에게 맡겼다. 검은 군대가 해산되면서 국방력이 크게 약화된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에게는 다행히도 바예지트 2세가 페르시아와 지중해 연안 공략에 관심을 집중했기 때문에 생전에 오스만 제국의 대대적인 침략을 겪지 않았다. 1495년에 체결되었던 휴전 협약은 1498년, 1503년, 1511년에 갱신되었다.

울라슬로는 1476년 글로가우 여공작인 브란덴부르크의 바르바라와 결혼했다. 1478년 글로가우 영지를 요한 2세에게 빼앗겨버린 그녀와 결혼 생활을 이어가봐야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고 여기고 결혼을 없었던 일로 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1490년 헝가리 왕이 되기 위해 전임 왕 마차시 1세의 미망인인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비밀리에 중혼했다. 이 일이 나중에 공개되면서 심각한 논란이 일어났다. 교황은 바르바라의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는 요구에 난색을 표했고, 많은 성직자들이 베아트리체와 헤어지라고 종용했다.

울라슬로는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이 중혼 생활을 이어갔지만, 정작 베아트리체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하자 지극히 실망했다. 1493년, 울라슬로는 교황에게 자신이 스스로의 의지에 반하여 베아트리체와 결혼하도록 강요당했다고 알렸다. 이에 교황은 조사 위원회를 소집해 7년간 사건의 전말을 조사했다. 1500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베아트리체와 울라슬로의 결혼이 불법이라고 선언했고, 베아트리체는 재판 비용을 지불한 뒤 나폴리로 돌아갔고, 1508년 9월 23일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한편, 보헤미아에 남겨졌던 바르바라는 중혼 생활을 고집하는 남편에게 환멸을 느끼고 1493년 프랑켄 출신의 기사 콘라트 폰 하이데크와 비밀리에 약혼했다. 그러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그녀는 콘라트와의 약혼을 파기할 때까지 쿨름바흐의 플라센부르크 성에 수감되었다. 그 후 베아트리체와 울라슬로의 결혼이 무효가 되었을 때 그녀와 울라슬로의 결혼 역시 무효가 되었다. 바르바라는 플라센부르크에서 빈곤하게 살다가 1515년 9월 4일 안스바흐에서 사망했다.

1500년 베아트리체, 바르바라와의 결혼 무효 선고를 받아낸 울라슬로는 푸아-캉달 공작 가스통과 나바라 왕녀 카트린의 딸인 안과 약혼했고 1502년 9월 29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는 용모가 아름답고 성품도 고왔던 안을 무척 사랑했으며, 정치 문제에 관해 그녀의 조언을 기꺼이 들었다. 1503년 두 사람 사이에서 딸 언너가 태어났고, 1506년 7월 1일에 울라슬로가 오래도록 기다렸던 남자 후계자인 러요시 2세를 낳았다. 그러나 안은 출산으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리다가 아들을 낳은 지 3주가 조금 넘은 1506년 7월 26일 2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울라슬로는 아내의 죽음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이후로 죽을 때까지 기면증에 시달렸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약화되었던 왕의 권력은 유명무실해졌고,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 에스테르곰 대주교 바코치 타마시(Bakócz Tamás), 궁정백 페레니 임레(Perényi Imre), 그리고 재상 서트마리 죄르지(Szathmári György)가 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주도했다.

2.2.2. 러요시 2세

1516년 3월 13일, 울라슬로 2세가 부더에서 사망했다. 이후 10살 된 아들 러요시 2세가 왕이 되었다. 어머니 안은 이미 죽었기에,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 에스테르곰 대주교 버코츠 터마시(Bakócz Tamás), 궁정백 페레니 임레(Perényi Imre), 그리고 재상 서트마리 죄르지(Szathmári György)가 왕을 대신하여 헝가리의 국정을 주도했고, 보헤미아 쪽은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게오르크 변경백(Georg von Brandenburg-Ansbach 1484~1543)[9]이 담당했다.

러요시 2세는 재위 내내 별다른 실권이 없었고, 섭정들이 왕실의 수입을 낭비하는 바람에 가난에 찌들었다. 특히 에스테르곰 대주교 바코치 타마시가 사망한 후에는 바토리 추기경, 서포여이 추기경, 베르베츠 추기경이 에스테르곰 대주교 직위를 놓고 격렬하게 정쟁을 벌이면서, 국정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중앙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하자, 각지의 대귀족들은 정부를 대놓고 무시하고 백성들을 쥐어짜며 부귀영화를 누렸고, 민중은 자신들을 보살피지 않는 나라를 원망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도 군대에 제대로 된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국경지대의 요새들은 방치되었고 병사들의 기강은 문란해졌다.

1520년 오스만 제국 파디샤로 즉위한 쉴레이만 1세는 러요시 2세에게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칠 것을 종용했으나 러요시 2세는 이를 무시했고, 오스만 제국의 사신을 처형해 쉴레이만 1세에게 보냈다. 쉴레이만 1세는 이 사건에 분노하여 헝가리 공격을 준비했다. 당시 헝가리의 재정 상태는 파탄 직전이었고 군대는 해체 직전까지 몰려있었다. 국경 수비대는 임금도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국경 요새들은 제대로 된 보수 공사를 받지 못한채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으나 러요시 2세는 돈이 없다는 이유[10]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교황과 손윗처남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빽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헝가리의 약점을 전부 파악한 쉴레이만 1세는 벨그라드 공략에 나서 10만 대군으로 당시 헝가리 왕국 최남단의 요충지이자 군사 요새였던 벨그라드를 손쉽게 함락시켰다. 로도스 섬 공방전이 마무리 되자 본격적으로 헝가리 침공을 개시한 쉴레이만 1세에 맞서기 위해 친정에 나섰으나 종조부 브와디스와프 3세처럼 오스만 기병대를 상대로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똑같은 실책을 저질러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궤멸당했고 본인은 패주 끝에 도망치다가 강에 빠져 익사했다.

러요시 2세는 생전에 아내 마리아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했다. 사생아로 버시 야노시를 두었으나, 그 누구도 왕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보헤미아와 크로아티아는 울라슬로 2세와 막시밀리안 1세가 체결한 협약[11]에 따라 누나 언너와 결혼한 매형인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를 국왕으로 옹립했지만, 헝가리는 동부 에르데이 지역을 중심으로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 1487?~1540)를 왕으로 옹립하면서 끝내 합스부르크 헝가리, 오스만 헝가리, 동헝가리 왕국[12]으로 3분할되고 말았다.

3. 여담

벨라루스 역사에서도 중요한 왕조이다.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절 당시 리투아니아와 중세 벨라루스( 루테니아)는 두 민족 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브와디스와프 3세 카지미에시 4세 야드비가 사후 브와디스와프 2세가 새로 맞아들인 벨라루스 출신 왕비 조피아 홀샤니스카의 소생이었다. 때문에 이 시기는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양국의 최전성기에도 해당하며 특히 벨라루스 민족 문화는 이 시기에 프란시스크 스카리나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며 엄청난 진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루블린 조약 이후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폴란드화가 가속화되어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 귀족들의 입지는 이전보다 많이 약화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계 야기에우워 왕조의 군주들은 명군이 많았지만 보헤미아-헝가리계 야기에우워 왕조의 군주들은 쇠퇴기에 접어든 헝가리를 재건하지 못했고 보헤미아에서도 예스맨으로 일관하여 혼란을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러요시 2세[13]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후사 없이 전사하면서 두 나라는 보헤미아-헝가리계 야기에우워 왕조와 이중으로 결혼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에게로 넘어갔다.[14]

폴란드-리투아니아계 야기에우워 왕조도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며 1572년에 단절되었고, 이후 지그문트 2세의 여동생이었던 안나 야기엘론카가 여왕에 즉위하였으나 후사를 남기지 못했기에 왕위는 지그문트 2세와 안나 야기엘론카의 조카였던 스웨덴 바사 왕조 시기스문드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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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둘러보기

벨라루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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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바키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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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는 동부 슬라보니아 평야 일대, P는 풀라/이스트리아 반도, D는 달마티아 해안 지방 }}}}}}}}}


[1] 크로아티아와 동군연합. [2] 양국의 독립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공통의 군주를 섬기는 형태 [3] 당대 기록에는 사병 15만 명이 그들 밑에 집결했다고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한다. [4] 폴란드-리투아니아 역사상 최고의 기병대장이었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의 아버지다. [5] 외스터라이히 대공 카를 2세의 딸 [6]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의 딸. [7] 폴란드어로 아주 잘했다는 말. 얼마나 정치에 무감각한 예스맨이었는지 보여주는 단초이다. [8] 통념과 달리 폴란드 왕국은 야기에우워 왕조가 집권했을때도 세습제가 아닌 선거군주제였다. 반대로 리투아니아는 야기에우워 왕조의 전신인 게디미나스 가문 시절부터 통치했기 때문에 혈통으로 세습이 보장되었다. [9] 호엔촐레른 가문의 안스바흐 방계 출신으로 초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의 둘째 형이다. 동생이 독일 기사단국을 세속화하여 최초의 루터파 국가로 만들었듯, 형도 독일 종교 개혁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10] 부왕 울라슬로 2세가 헝가리를 이미 나락으로 보냈기에 러요시 2세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시피 했다. [11] 울라슬로 2세가 자식을 두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점유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12] 나중에 헝가리인의 자치공국인 에르데이 공국이 된다. [13] 보헤미아 왕으로는 루드비크. [14]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온전히 차지했지만 쉴레이만 1세의 침공을 받았던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합스부르크 가문령 헝가리 왕국 및 크로아티아 왕국, 오스만 제국 오스만 헝가리, 오스만 제국 편을 든 동부 헝가리인 귀족들을 중심으로 하는 동헝가리 왕국에서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이어져 1699년에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3분할되었다. [15] 헝가리 왕으로는 울라슬로 1세, 크로아티아 왕으로는 블라디슬라브. [16] 보헤미아 왕으로는 블라디슬라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