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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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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4695__1453985727.jpg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톨레도 역사도시
영어 Historic City of Toledo
스페인어 Ciudad histórica de Toledo
프랑스어 Ville historique de Tolède
국가·위치 스페인 카스티야라만차 톨레도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6년
등재기준 (i)[1], (ii)[2], (iii)[3], (iv)[4]
지정번호 379
톨레도 (카스티야라만차)
Toledo
톨레도 (톨레도)
Toledo

파일:톨레도 기.svg

시기

1. 개요2. 역사3. 특징4. 주요 명소5. 여담

[clearfix]

1. 개요


스페인 중부 톨레도 주의 도시. 카스티야라만차 자치 구역에 해당한다. 인구는 83,000명이고 수도 마드리드에서 남서쪽으로 약 67km 거리에 있다.

세르반테스 언덕을 타호 강이 둘러싸고 있어 로마 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발전해 왔고 스페인 역사에서 오랫동안 수도 내지는 중심지 역할을 했던 도시다.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그리스도교, 이슬람, 유대교의 유적이 공존하고 스페인 문화를 잘 대변하는 곳이어서 도시 전역이 국립 기념지로 선포되었다.

크레타 섬에서 나고 자라 이탈리아에서 경력을 쌓으며 스페인에 정착했던 화가인 엘 그레코가 사랑하고 종국엔 제2의 고향으로 아꼈던 도시이기도 하다.

2. 역사

처음에는 '톨레툼(Toletum)'이라는 이름의 로마 제국의 도시였다. 역사가 리비우스는 톨레툼에 대해 "Urbs parva, sed loco munita"(작지만 천연의 요새로 이루어진 도시)라고 기록했다. 서로마 제국 말기에 일어난 게르만족의 대이동의 주역인 서고트족이 451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까지 이동해 457년경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507년 서고트 왕국은 남프랑스의 아키텐을 상실한 후 톨레도를 수도로 삼았다. 서고트 왕국은 400년경부터 702년 사이에 톨레도 공의회를 18차례에 걸쳐 열었으며, 589년 3차 공의회에서는 레카레드 1세에 의해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정되었다.

711년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한 이슬람 제국 기독교 왕국인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베리아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톨레도 역시 이슬람의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의 톨레도는 '툴레이툴라' 혹은 왕의 도시라는 뜻의 '마디낫 알 물르크(مدينة الملوك)'[5]라고 불리었다.

후우마이야 왕조(코르도바 칼리프국)의 치세에는 톨레도는 대 기독교 북부 전진 기지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으로 여겨졌다. 1035년 후우마이야 왕조의 멸망 이후에는 베르베르계 바누 딜눈 가문이 톨레도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국인 톨레도 타이파를 세워 잠시 동안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했으나 1085년 레온-카스티야 왕국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점령하면서 최종적으로 기독교 세력으로 재편입되었다. 이후 북부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인 무라비트 왕조가 이베리아 남부를 재통일하는 와중에도 톨레도는 다시는 이슬람 세력권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며 오히려 카스티야의 수도가 되면서 이베리아 기독교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스페인 통일 왕국의 수도로서 정치,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1561년 펠리페 2세가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김으로써 수도의 지위를 상실했다.

3. 특징

고대부터 품질 좋은 강철 생산과 도검 제작으로 유명했고 고대 로마 시대부터 중세 때까지도 톨레도산 검(劍)은 최고의 명품으로 호평받았다. 그 이유는 우선 톨레도에서 채광되는 철광석의 품위가 좋았던 점, 저탄소 강과 고탄소 강을 반복 접쇠하는 기술이 일찍부터 개발되어 우위를 점한 점[6], 강철의 최종적 품질을 결정짓는 열처리( 담금질/ 뜨임) 기술도 뛰어났고 무엇보다 그 공정들이 표준화되었던 점이다. 몇몇 소수 장인들의 감과 경험에 의존하는 것보다[7] 기술을 표준화하는 것이 품질의 상향 평준화에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단적인 예로 시계가 없던 시절에 담금질 시간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담금질 시간에 박자가 맞춰진 표준화된 기도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워낙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고급품은 전문 장인도 일 년에 두세 자루 정도씩밖에 만들지 못했다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톨레도산 강철은 명품이라는 이미지가 생겼고 그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제강 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다. 잘 알려진 로마군 글라디우스도 톨레도산 강철로 만들어졌고[8] 서고트인들과 무어인들이 오랫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이유들 중 하나도 톨레도 점령 이후부터 톨레도산 강철로 만들기 시작한 무기와 갑옷 덕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훗날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신대륙에서 압도적인 전력 차를 헤쳐 나가거나 오히려 정복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수급이 불안정한 화약 무기보다는 언제나 믿음직한 톨레도산 무구의 위력 덕이 더 컸다.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대부분 흑요석 무기를 사용했고 전금속제 무기는 사실상 본 적도 없어 강철 검의 대응법을 몰라서 검을 막을 만한 갑옷도 거의 입지 않았기 때문.

그 유명한 다마스쿠스 강조차도 방어구 분야에서는 톨레도 강을 대체할 수 없었던 정도다. 애당초 다마스쿠스 강이 개발된 이유도 톨레도 강 냉병기에 비견할 만한 강철검을 만들자는 것이었기도 하고. 톨레도 강에 비해 다마스쿠스 강은 전성과 연성이 떨어지며 경도가 너무 높아서 취성이 크다는 평을 받았다.

현재도 시 중심부에서 검과 철제 가공품을 생산하고 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실전용이 아닌 영화나 드라마의 소품용 검을 만들어 낸다고.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세 종교의 유적지가 모두 남아 있다. 또한 로마 시대의 원형 극장, 중세 가톨릭 성당, 이슬람 왕궁 등 여러 문화의 유적이 공존하는 여러모로 역사가 깊은 도시다. 고딕 양식 대성당들 가운데 가장 스페인적이라고 평가받는 이 도시의 대성당에는 엘 그레코, 프란시스코 데 고야, 반다이크 등 화가들의 그림들이 소장된 미술관도 있다.

파일:Mezquita_de_Bab_al-Mardum_(Toledo)-1.jpg

서기 999년 이슬람 모스크(메스키타)로 지어진 이후 12세기에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된 바브 알 마르둠 모스크(Mezquita Bab al-Mardum)/크리스토 데라루즈(Cristo de la Luz, 빛의 예수) 성당. 성당으로 개조됐다 해도 내부에 가톨릭 예배당 하나 추가한 거 빼곤 내외적으로 바꾼 게 거의 없어서 안달루시아 이북 카스티야 지방에서 가장 잘 보존된 무슬림 통치기 유적으로 꼽힌다. 입장료는 3유로이나 만 25세 이하 대학생(학생증만 있으면 국적 불문), 미성년자, 노인은 무료 입장할 수 있다.

1986년 역사성과 문화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선정되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4. 주요 명소

파일:Alcázar de Toledo.jpg
톨레도 알카사르(Alcázar de Toledo)
알카사르(Alcazar)는 톨레도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스페인어로 '성'이라는 뜻으로 레콩키스타 시기에 이슬람과 싸우기 위한 요새로 지어졌다.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스페인 전국에 있는 여러 알카사르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꼽힌다.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대인 세르반테스 언덕 위에 해발 548m에 세워졌다. 로마 시대인 3세기에 처음 지어져 관아로 사용되었고 이후 이슬람 지배를 거쳐 카스티야가 수복한 후 이슬람 세력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사용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통일 스페인 왕국의 첫 국왕이 된 카를로스 1세[9] 낡고 오래된 요새를 개축할 것을 명해 1538년부터 1551년에 걸쳐 당시 최고의 건축가들을 동원해 왕궁으로 개축되었다. 그러나 장본인은 애초에 주 관심사가 유럽 대륙이라 평생 스페인 밖에서 전쟁이나 하러 돌아 다니고, 아들 펠리페 2세가 완공된 지 10년 만에 천도하면서 왕궁으로서 기능은 유명무실해졌다. 카를로스 시절만 하더라도 스페인은 중앙 집권화된 단일 국가가 아니라 덩치랑 위상은 가장 크다해도 실질적으론 유럽 전역에 걸쳐져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보편 제국 중 구성국에 가까웠는데[10], 펠리페 시절엔 합스부르크 제국 자체가 각각 스페인, 오스트리아를 기반으로 한 동서로 분리되고 스페인만의 단독 열강으로서 패권과 행정 체계를 쌓아가는 쪽으로 국정 운영의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전까진 법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던 영구적인 수도를 지정하게되었다.

이 와중 톨레도는 아버지 시절 1520년엔 아예 합스부르크 가문이 카스티야 왕국을 상속하자마자 다시 상실하게 될 뻔했던 '코뮤네로 반란'의 중심지로서 혁명 진압 이후에도 여전히 강력한 도시 자치민과 지역 봉건 영주 세력이 있으니 오히려 그 전통과 역사가 새 왕조의 수도로선 부적합했다. 따라서 지리적으론 톨레도, 바야돌리드 같은 기존 카스티야의 대도시들과 가깝지만 동네 자체는 한적한 촌이라 토착 유지 세력이 약했던 마드리드가 신생 스페인 제국의 수도로 정해지고, 톨레도는 한동안 여전히 역사적 대도시로서 그 위상을 한순간에 잃지는 않았지만 나머지 카스티야 중부 고원 일대의 역사 도시 전반과 마찬가지로 수백 년간 이어질 인구 감소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화재, 나폴레옹 전쟁, 스페인 내전 등으로 파괴되었지만 1939년부터 1957년에 걸쳐 복구되었다. 현재는 군사 박물관 겸 인근 대학의 연구실/ 도서관 겸으로 사용되고 있다.

스페인 내전 초기 나머지 톨레도 지방과 시 전체는 공화파가 사수하고 당시 군구장 호세 모스카르도 휘하 프란시스코 프랑코파 쿠데타 반군은 이 알카사르 요새만 점령한 상태로 포위, 두 달간의 치열한 농성 끝에 나머지 국가군에게 포위망이 풀려 톨레도를 정복한 바가 있다.[11] 이 과정에서 알카사르는 공화파의 포격으로 거의 가루가 될 만큼 완파되었다가 전후 프랑코 정권의 프로파간다로 대대적으로 복구되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의 건축학적 가치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단순한 전근대 역사 뿐만 아니라 이런 스페인 근현대사의 격동의 현장이기도 했고 군사 박물관 내부 구성물과 영어 번역도 충실하기 때문에 스페인 역사에 관심 있는 여행객들은 필히 방문할 가치가 있다. 일반에게 공개된 구역 중 알카사르 최상층은 카스티야라만차 대학 도서관인데 일반에게도 공개되어 있다. 독서대에 앉아 창밖을 보면 타구스 강변에 지어진 중세 보, 성벽 구조물들과 산 마르틴 대교가 장관이긴 한데 자리가 좀 부족해서 넋 놓고 구경하다 보면 실제로 공부해야 하는 현지 학생이 눈치를 줄 수도 있다. 책가방 메고 스페인 어디서나 넘처나는 에라스무스 교환학생인 척하고 당당하게 구경하자. 어차피 스페인 현지 학생들도 그 자리에 가방만 던져놓고 공부 안 한다.

5. 여담

미국의 이리 호 서부, 디트로이트 남쪽에 동명의 도시가 위치한다.[12] 지명의 유래는 스페인의 톨레도. 다만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없다. 그래도 인구가 280,000명에 달하고 유리 공업으로 명성이 있는 중규모 공업 도시다.

자연 그늘 같은 게 없고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그대로 맞는 이베리아 메세타 중부 고원에서도 위도가 높은 편에 속한지라 스페인 전체에서도 꼽아주게 덥고 건조한 도시 중 하나이다. 특히 문화 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모인 구시가지는 산성 위에 지어진 도시 전체가 언덕길이라 햇빛 쨍쨍한 여름날 땀 삐질삐질 흘리면서 관광하다 보면 열사병 먹고 훅 쓰러지게 딱 좋다. 얼음물과 햇빛 가려줄 선스크린 같은 자외선 차단 도구, 부채나 손선풍기 같은 걸 꼭 챙기고 중간중간에 휴식하면서 관광하자.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5] مدينة(madina) = city, ملوك(muluk) = king [6] 접쇠 하면 흔히 일본도의 타마하가네나 패턴-웰디드 다마스쿠스 강이 유명하지만 기록상으로 접쇠 공법을 최초로 도입한 것은 톨레도산 강철이다. 고대 로마군 글라디우스 제작에도 접쇠 공법이 쓰였다. 그나마 일본도는 사철의 조악한 품질 때문에 어느 정도는 고육지책으로 택한 것. [7] 장인 정신으로 유명한 전통 일본도는 겉으로 보이는 예술성은 뛰어날지언정 실제 성능은 명성에 못 미쳤다. 통일 이후부터 소수의 명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술을 도입했으며, 전쟁도 일어나지 않아 쇠퇴하였다. 차라리 근대 기술을 사용해 공장에서 찍어낸 95식 부사관도 같은 것이 실제 성능은 비교도 안 되게 좋았다. [8] 원래 이름이 글라디우스 히스파니엔시스(gladius hispaniensis)로 '스페인 검'을 의미했다. [9] 엄밀하게 따지면 아버지인 미남공 펠리페 1세가 최초의 합스부르크 출신 스페인 왕이지만 워낙 단명한 관계로 실질적으론 카를로스 1세로 본다 [10] 그리고 자연스럽게 스페인 그 자체도 마치 냉전 시절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편의상 계속 ' 러시아'라 부른 것처럼 포괄적인 국방, 외교만 빼곤 실질적으로나 명목상으로나 다른 나라였던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합쳐서 편의상 부르는 이름에 가까웠다. 실제로 '에스파냐 군주정(monarquía hispánica)' 소속 개별 왕국들이 법적으로 '스페인 왕국(Reino de España)'이란 하나의 단일 국가로 묶인 건 18세기 보르본 왕조 시절 일이고, 이 시기 공문서들이나 서적들을 보면 주로 비정치적인 문맥에선 포르투갈도 '스페인'의 범주에 종종 묶였다가 빠졌다가 한다. 동시대인들도 정치적인 의미로서 포르투갈은 엄연한 주권을 가진 독립국이라고 당연히 인식했지만 지리학적 의미, 특히 가톨릭 교구상으론 여전히 '히스파니아'는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의미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11] 이 때 일어난 알카사르 (요새) 인질 협박 사건이 유명한데, 알카사르에 고립되어 치안대와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농성하던 모스카르도 대령에게 공화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의 아들을 처형하겠다"고 협박했다. 모스카르도 대령은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나이라면 주님께 영혼을 맡기고 '그리스도 왕 만세, 스페인 만세!'를 외치며 애국자로서 당당히 죽거라" 라고 작별인사를 했고, 아들 루이스 역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후 루이스는 바로 처형됐다고도 하고, 국민파의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이 사건은 숭고한 미담으로서 국민군을 단결시키는 상징이 되었으며, 프랑코 사후에도 '벙커파'라고 불린 친프랑코 강경파들이 펴낸 잡지 이름이 '알카사르'였을 만큼 당시 우파의 상징 역할을 톡톡히 했다. [12] 이쪽은 주로 '톨리도'로 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