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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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왕국 제2대 국왕 | |||
<colbgcolor=#1e3061><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7대 국왕 주앙 6세 João V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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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67년 5월 13일 | ||
포르투갈 왕국 켈루스 켈루스 궁전 | |||
사망 | 1826년 3월 10일 (향년 58세) |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벰포스타 궁전 | |||
재위기간 | 포르투갈 국왕 | ||
1816년 3월 20일 ~ 1826년 3월 10일 | |||
브라질 국왕 | |||
1816년 3월 20일 ~ 1822년 10월 12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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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e3061><colcolor=#fff> 가문 | 브라간사 가문 | |
이름 |
주앙 마리아 조제 프란시스쿠 샤비에르 드 파울라 루이스 안토니우 도밍구스 하파엘 (João Maria José Francisco Xavier de Paula Luís António Domingos Rafa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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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페드루 3세 | ||
어머니 | 마리아 1세 | ||
형제자매 | 주제, 마리아나 비토리아 | ||
배우자 | 스페인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1785년 결혼) | ||
자녀 | 마리아 테레사,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마리아 이자벨, 페드루 1세 & 4세, 마리아 프란시스카, 이자벨 마리아, 미겔 1세, 마리아, 아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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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7대 국왕이자 브라질 왕국 제2대 국왕. 별명은 "자비로운 자(O Clemente)"이다.2. 생애
1767년 5월 13일 포르투갈 왕국 켈루스의 켈루스 궁전에서 포르투갈 왕자 페드루와 포르투갈 공주 마리아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페드루와 마리아는 삼촌과 조카 관계로, 7년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마리아를 한 국가와 결혼시키면 그 나라를 적대하는 다른 국가들로부터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되는 것을 회피하고, 국내 귀족이 공주와 결혼했을 시 자신의 권력이 제약받을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권신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의 의도로 두 사람의 결혼이 성립되었다. 주앙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지만, 다른 형제들처럼 신학, 법률, 역사, 라틴어와 프랑스어, 궁중 예법 등 다양한 방면의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777년 할아버지 주제 1세가 사망하고 부모가 포르투갈의 공동 국왕에 선임된 뒤, 큰 형 주제가 브라질 공과 브라간사 공작을 동시에 역임하며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이때 주앙은 아스투리아스 공으로 선임되었고, 이후로는 형의 그늘 속에서 조용히 살아갔다. 그러던 1785년 17살의 나이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딸인 카를로타 호아키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주앙은 갓 10살된 아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는 누이 마리아나 비토리아와 주고받은 서신에서 아내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그녀에게 호의를 느끼긴 하지만 내가 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녀를 사랑하기엔 너무 작소."
1788년 9월 11일, 큰 형이자 왕위 후계자였던 주제 왕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주앙은 형의 뒤를 이어 왕위 후계자가 되었지만 이듬해 중병에 걸려 사제를 불러 병자성사를 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다행히 병세가 약해지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1791년에 입에서 피를 흘리는 증세를 보이며 며칠간 앓아누워야 했고 이후에도 잔병에 시달렸다. 자연히 건강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서 매사에 우유부단하고 정치보다는 종교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한편, 1786년 남편 페드루 3세를 잃은 데 이어 1788년 큰아들까지 잃은 어머니 마리아 1세는 절망에 빠진 나머지 광기에 사로잡혀버렸다. 1792년, 포르투갈 정부는 의사들의 의견을 종합해 마리아가 미쳐버렸으며 가까운 시일 내에 호전될 수 없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주앙에게 어머니를 대신해 국정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주앙은 공식적으로 섭정을 맡기를 꺼렸고, 성직자, 귀족, 상인 대표로 구성된 코르테스에서 국가를 운영하게 했다. 세간에서는 그 역시 어머니와 비슷한 광기를 보였다는 소문이 돌면서, 그가 통치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갈수록 증폭되었다.
1793년 루이 16세가 혁명 세력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각국의 국왕들은 대 프랑스 동맹을 맺고 프랑스 혁명을 진압하려 했다. 포르투갈 정부 역시 7월 25일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9월 26일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대 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다. 이후 피레네 전선에 6,000명의 포르투갈군이 파견되었지만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1795년 7월 22일 스페인과 프랑스간의 평화 협약인 바젤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포르투갈 역시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맺으려 했으나 포르투갈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의존하는 영국의 압력이 가해지자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프랑스와 무력 충돌을 벌이지 않으면서도 공식적으로 화해하지도 않는 어쩡쩡한 상태로 남았다.
1799년 7월 14일, 주앙은 비로소 섭정에 취임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프랑스의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포르투갈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과 동맹을 맺은 뒤 포르투갈에 "영국과 손을 끊고 프랑스-스페인 동맹과 손잡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주앙이 거부하자, 스페인의 총리 마누엘 데 고도이는 나폴레옹의 권고에 따라 포르투갈을 침공해 올리벤사 등 일부 영토를 공략했다. 이후 엘바스를 공격하려 했다가 프란시스코 데 노로냐 장군이 지휘하는 포르투갈 수비대에게 격퇴당한 뒤 철수했고, 양국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럼에도 고도이는 엘바스 외곽에서 오렌지를 가져와서 마리아 1세에게 리스본으로 가겠다는 메시지와 함께 보냈다. 그래서 이 전쟁은 "오렌지 전쟁"이라는 명칭으로 일컬어졌다.
1801년 6월 6일 포르투갈은 영국 선박에 항구를 폐쇄하고 프랑스에 상업적 특권을 제공하고 올리벤사를 스페인에게 양도하며, 스페인은 그 대가로 철수한다는 내용의 바다호스 협약을 체결했다. 영국은 이에 대응해 1801년 7월 윌리엄 헨리 클린턴 대령 휘하의 3,500 병력을 파견해 북대서양에 있는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을 점령했다. 이들은 1802년 아미앵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그곳에 주둔했다. 또한 1801년 9월 29일 포르투갈령 기아나의 절반을 프랑스에 양도하는 대가로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맺는다는 내용의 마드리드 조약이 체결되었다.
1805년, 아내 카를로타가 남편을 섭정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역할을 맡으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켈루스 궁전에 유폐되었다. 이후 주앙은 코임브라 대학교 출신이며 자유주의 성향을 갖춘 정치가 및 지식인들을 끌어들여 자기 편으로 포섭하고자 노력했으며, 학자들의 권고에 따라 여러 과학 탐험을 조직하고 식민지의 잠재력과 사회 및 경제에 관한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이 시기에 설립된 왕립 해양 학회(Sociedade Real Marítima Militar e Geográfica)는 포르투갈 제국의 지리와 해상 및 수로를 다룬 지도 제작을 담당했고, 아르코 두 세고 문학관은 농업, 제조, 과학 및 예술에 관한 고급 연구의 제작 및 출판을 담당했다. 그러나 자유주의를 못마땅하게 여긴 보수 성향의 인사들이 대거 반발했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주의 성향의 정책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포르투갈은 전통적으로 영국에 우호적이었지만, 영국이 마데이라 섬을 점거하고 인도에서의 포르투갈인들의 활동을 제약하자 포르투갈 궁정 내에서 프랑스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주앙은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나 영국 중 한 국가와 갈라섰다가는 친 영국파나 친 프랑스파가 이반해 나라가 위태로워질 거라 여기고, 할 수 있는 한 두 나라에게 잘못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1802년에 체결된 아미앵 조약이 파기되고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재개했을 때 영국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영국 국왕 조지 3세에게 밀사를 보내 "프랑스의 협박 때문에 부득이 전쟁을 선포했지만 영국에 적대행위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안심하라"고 알렸다.
1805년 영국 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상대로 트라팔가 해전에서 완승을 거두자, 주앙은 즉시 영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관계를 회복했다. 이듬해 나폴레옹이 대륙 봉쇄령을 반포하면서 포르투갈에 이를 따를 것을 요구하자, 영국과의 무역에 의존하는 자국 상황에 대륙 봉쇄령에 동참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여겨 거부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바다호스 협약이 파기되었다고 선언하고 고도이와 협의해 양국이 포르투갈을 양분하는 대가로 스페인군의 지원을 받아냈다. 1807년 말 장앙도슈 쥐노가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7,000명이 포르투갈을 전격 침공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이 소식에 발칵 뒤집혔다. 일부 인사들은 영국과 연합하여 프랑스에 대항하자고 주장했고, 또다른 인사들은 프랑스에게 항복하고 영국과 관계를 끊자고 주장했다. 그러던 11월 16일 영국 함대가 리스본 항구에 도착했다. 그들은 왕실을 브라질로 호위할 의향이 있지만, 프랑스와 손잡는다면 리스본을 무력으로 장악하겠다고 통보했다. 주앙은 국론이 분열되고 군대는 프랑스에 비하면 지극히 미약한 상황에서 프랑스와 맞서는 것은 무리라고 여겼고, 그렇다고 영국을 적대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는 고심 끝에 영국 함대에 몸을 싣고 브라질로 피신하기로 마음먹었다.
1807년 11월 29일, 주앙과 왕실 인사들, 고위 관료들과 하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인파가 영국 함대 15척에 몸을 실었다. 그는 왕국의 무결성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부득이 브라질로 망명할 수 밖에 없다며, 자신이 떠난 뒤에도 질서를 유지하며 피를 헛되이 흘리지 말고 침략자들에게 저항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내용의 포스터를 거리 곳곳에 붙이게 했다. 그는 모왕 마리아 1세, 아들 페드루, 미겔과 함께 한 배에 올라탔고, 아내 카를로타와 다른 딸들을 다른 2척의 배에 태웠다. 그와 함께 승선한 사람들의 수는 분명하지 않다. 19세기에는 최대 3만 명이 그를 따라갔다는 이야기가 대두되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4,000명에서 7,000명 사이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이 몸을 실은 배들은 하나같이 수많은 승객과 짐이 가득 실린 과적 상태였으며, 승객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잠을 자야 했고 곳곳에 배설물이 쌓였다. 갈아입을 옷조차 챙겨오지 못하다보니 머릿니가 들끓는 등 위생 상태가 지극히 나빴고 많은 이들이 병에 걸렸다. 또한 보급품이 부족해서 배급이 실시되었다. 게다가 항해 내내 무더위에 시달려야 했고, 2번의 폭풍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남미에 근접할 무렵, 주앙은 본래 리우데자네이루에 곧바로 가려던 계획을 변경해 바히아의 살바도르를 먼저 들리기로 했다. 이는 브라질 최초의 중심지였다가 리우데자네이루에게 그 지위를 잃은 뒤 민심이 흉흉했던 이들을 달래기 위한 조치였다. 다만 다른 배들은 원래 목적지인 리우데자네이루로 향했다.
1808년 1월 22일, 주앙의 배와 다른 2척이 살바도르에 도착했다. 브라질 식민 행정관을 맡고 있던 폰테 백작 주앙 데 살다냐 다 가마 멜로 토레스 게데스 브리투는 시민들에게 섭정 왕세자의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마중나오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 부두는 텅 비어 있었다. 주앙은 고된 여정에 시달린 귀족들이 회복할 수 있도록 하선을 다음 날로 미뤘다. 이튿날 배에서 내린 주앙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경의를 표하고자 찾아온 모든 이들이 베자-마오(beija-mão: 군주의 손등에 입맞춤하는 의식)를 행하는 것을 허락했다.
실바도르 총독부에 입성한 후, 주앙은 식민지 주민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경제학과 외교학과 학교를 독자적으로 설립하는 것을 허락하고, 우호적인 국가에 대한 항구 개방을 용인하며, 마리아 1세가 포르투갈의 섬유업이 위협받는 것을 막기 위해 식민지인들이 섬유품을 개별적으로 생산하여 해외에 판매하는 것을 금지한 <1785년 헌장>을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실바도르 시민들은 이를 열렬히 환영하는 한편, 왕실을 위한 호화로운 궁전을 짓겠으니 이곳에 계속 머물러달라고 요청했다. 주앙은 자신을 정성껏 영접하는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통치를 하겠다고 분명히 밝힌 뒤 그 곳을 떠났다. 리우데자네이루 시민들은 3월 8일에 도착한 주앙을 위해 9일간의 축하 행사를 거행했다.
그 후 포르투갈 왕실은 리우데자네이루를 새 수도로 삼고 총독의 대저택에 임시로 머물다가 상인 엘리아스 안토니오 로페스가 마련한 별장으로 이주했고, 몇 차례의 확장을 거치면서 훗날 브라질의 역대 통치자들이 기거하게 될 파코 데 상 크리스토방 궁전이 세워졌다. 그러나 왕실 자제와 귀족들을 만족시킬 만한 집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카르모 수녀원 외 수많은 주택들이 몰수되고 주인들은 푼돈을 받고 쫓겨났다. 한편 주앙과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던 카를로타 왕세자비(훗날 왕비)는 보타포고 해변 농장에 머물렀다.
당시 약 6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리우데자네이루는 포르투갈의 귀족들이 한꺼번에 모여들면서 크게 달라졌다. 상인들은 사치품을 포함해서 귀족들이 만족할 만한 식품 및 기타 소비재 공급을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고, 귀족들을 위한 수많은 새 거주지 및 기타 건물이 수 년간 건설되었으며, 서비스 및 기반 시설이 대폭 개선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내게 된 주민들은 차츰 포르투갈 왕실과 귀족들에게 불만을 품었다.
주앙 6세의 궁정에서 거행된 손키스 행사 풍자화
주앙은 시민들의 불만을 눈치채고 그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포르투갈에서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손키스 의식을 리우데자네이루에서도 주기적으로 실시했다.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한 날마다 귀족과 평민이 섞인 긴 줄이 섭정 왕세자의 거처에 늘어섰고, 주앙은 그들 한 사람씩 대면하여 손등을 내밀면서 따뜻한 말을 건넸다. 브라질 화가 엔히크 레베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왕세자는 어떤 사람을 위로하고 또다른 이들을 격려했다. 왕세자는 천박한 매너, 촌스러운 말투, 쓸데없는 고집, 장황한 언사 등 그 어떤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군주라기보다 아버지처럼 민중을 대했다."
브라질 작가 및 역사가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 리마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자신을 만나러온 자들의 얼굴이나 탄원을 혼동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삶과 가족, 심지어 과거에 발생한 작은 사실을 언급해 그들 모두를 놀라게 했다."
주앙은 브라질에 머무는 동안 많은 기관과 공공 서비스의 창설을 공식화하고 경제, 문화, 예술 및 기타 국가 생활 영역을 촉진했다. 그는 많은 브라질인을 왕실 비서로 고용하고, 언론 및 제조 시설의 설치를 허가하고, 새로운 농업 문화를 도입했다. 또한 종교재판소의 폐해를 인정하고 더 이상 종교재판을 열지 못하게 했으며, 도로를 개선하고, 여러 학급, 학교 및 공립 아카데미를 만들고, 과학 연구를 장려하고, 공공 행정을 조직했다. 이 모든 조치는 이러한 자원이 없었던 식민지를 관리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시행된 것이었지만, 브라질이 독자적인 국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주앙이 포르투갈을 떠났을 때 포르투갈에 남겨둔 섭정 위원회는 프랑스군의 공세에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했다. 쥐노의 프랑스군은 포르투갈을 행군하는 동안 막대한 비전투 손실을 입었던 터라 리스본을 가차없이 약탈했다. 그 바람에 리스본의 많은 역사적 명소가 파괴되었으며, 리스본 시내의 식량은 사라지고 화폐 가치가 폭락했으며, 환전소와 사업체는 문을 닫았다. 그 후 쥐노는 군사 정부를 수립한 뒤 나폴레옹 1세의 명령에 따라 포르투갈 군인을 대거 징발해 독일에 주둔한 프랑스군에 파견했으며, 모든 지방 행정직과 치안관에 프랑스인을 임명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이에 분노해 리스본에서 여러 차례 무력 시위를 벌였지만 그때마다 가차없이 진압되었다. 많은 포르투갈인이 내륙의 외딴 지역으로 숨거나 영국 등 해외로 피신했지만, 이들 대부분은 약탈과 몰수로 재산을 잃었다. 런던의 포르투갈 대사는 영국 국왕 조지 3세에게 약 2만 가량의 주민만이 리스본에 남아있으며 그나마도 거의 모두가 굶주리고 있다며 포르투갈을 구원해달라고 호소했다.
포르투갈인들은 프랑스의 폭압적인 정책에 분노해 전국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파루와 포르투에 2개의 의회가 수립되었고, 각지에서 별도의 지방 의회가 세워져서 행정망이 개편되었다. 쥐노는 이를 진압하기엔 병력이 부족하고 자기가 출진했다가 리스본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리스본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1808년 8월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군이 포르투갈에 상륙해 쥐노를 여러 차례 격파했다. 이에 쥐노는 아서 웰즐리의 뒤를 이어 부임한 영국 장군들과 협상한 끝에 포르투갈에서 물러나는 대신 영국 수송선에 약탈품과 함께 탑승하여 프랑스로 수송된다는 내용의 산트라 협약을 체결하고 포르투갈을 떠났다.
1809년 1월 2일 지방 총독들의 기능과 권한이 정해졌고 포르투갈 재무부는 브라질에서 임명된 왕립 재무부 장관에 종속되었다. 그 해 3월 프랑스군이 포르투갈 북부를 침공했지만 영국 장군 윌리엄 베레스포드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후 포르투갈군이 재편되어 영국군과 합류해 프랑스군의 연이은 침략을 격퇴하고 아서 웰즐리가 이베리아 반도 전쟁을 치르는 기반이 되어줬다. 한편 브라질에 있던 주앙은 프랑스에 전쟁을 정식으로 선포하고 프랑스령 기아나를 공략했다가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 왕조가 복귀하자 프랑스에 돌려줬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상황은 프랑스군의 위협 외의 다른 이유로도 위험해졌다. 지방 총독들은 섭정 왕세자가 자신들에게 부과한 권한으로는 외부의 적에 대한 효율적인 방어를 할 수 없으며, 동요하는 시민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또한 왕실이 자신들을 버리고 브라질로 망명한 것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매우 강했고, 자유주의자들은 이 때를 틈타 주앙 5세부터 이어지는 절대군주제를 '자유군주제'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앙은 이에 대응해 언론과 비밀 결사에 검열을 가해 선동적인 사상의 유포를 억제하려 했고, 알로마 후작 페드루 데 아르마다를 "프랑스주의"를 설파하는 등 왕실에 불손한 언행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하고 모든 직함과 특권을 박탈했다. 또한 지방 총독들의 호소에 따라 1809년 8월 30일 그들의 권한을 확대해 군주의 허락을 따로 받지 않고도 임의로 군대를 이끌고 시민들을 통제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로도 무질서해진 사회를 통제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고, 포르투갈 경제는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다. 포르투갈은 전쟁 기간인 1807년에서 1814년 사이에 전체 인구의 1/6을 전쟁, 기근, 질병, 실종 등의 요인으로 상실했다.
브라질 역시 경제 문제에 시달렸다. 1810년 프랑스의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기 위한 영국의 요구에 따라 체결된 상업 협정으로 인해 브라질 시장에 영국의 상품이 대거 유입되면서, 브라질의 국내 산업에 큰 피해가 야기되었다. 또한 왕실의 사치를 감당하기 위해 무거운 과세가 부과되었고, 현지인들을 회유하려는 섭정 왕세자에 의해 특별 칭호를 부여받은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제임스 핸더슨 영국 영사는 본국에 당시 포르투갈 궁정에 근무하는 관료의 수는 유럽의 어떤 궁정보다 많으며, 그들 대부분은 별다른 직무를 수행하지 않고 무위도식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814년 프랑스군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최종적으로 축출되면서 전쟁이 종식된 후, 포르투갈인들은 주앙에게 조속히 귀국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불안정하고 이웃의 스페인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포르투갈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브라질에서 그대로 통치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815년 12월 16일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을 창설하고 리우데자네이루를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1816년 3월 20일 정신병에 시달리던 마리아 1세가 사망하면서, 주앙 왕자는 비로소 주앙 6세로 등극했다. 대관식은 1818년 2월 6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성대한 축제와 함께 거행되었다.
한편, 카를로타 왕비는 남미 대륙의 스페인인들과 리우 데 플라타 지역(현재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민족주의자들과 손잡고 남편을 퇴위시킨 뒤 자신이 남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들의 새로운 여왕으로 등극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그녀의 음모는 도중에 정보가 새는 바람에 실패했고, 주앙 6세는 그녀를 별궁에 유폐하고 철저히 감시하게 했다. 이후 브라질의 지배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1817년 몬테비데오를 공략하고 1821년 시스플라티나 주를 합병했다. 또한 1817년 장남 페드루의 아내로 오스트리아 제국 초대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인 마리아 레오폴디네를 결혼시킴으로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동맹을 맺었다.
국왕이 포르투갈에 좀처럼 돌아오지 않자, 포르투갈인들은 각지에서 소요를 일으키며 왕을 압박했으며 자유주의자들은 영국식 의회를 포르투갈에도 도입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혔다. 브라질에서도 자유주의자들의 선동이 이어졌다. 1817년 레시페에서 시작된 페르남부쿠 반란이 일어났다. 도밍고스 호세 마르틴스, 안토니오 데 안드라다, 프레이 카네카 등이 이끄는 반란군은 공화 정부를 페르남부쿠에 수립하고 미국, 아르헨티나,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몇 달 만에 토벌되었다.
1820년 10월 17일 포르투에서 시작된 반란이 여러 도시들에 빠르게 확산되어 마침내 리스본에서 민중 봉기가 발발했다. 반란을 주동한 이들은 자신들이 "자유 혁명"을 일으켰다고 자축하며 포르투갈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왕실이 포르투갈로 즉각 돌아와야 하며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브라질과의 무역에서 포르투갈의 독점권을 회복하여 브라질을 식민지 상태로 되돌리고 공식적으로 "브라질 왕국"이 아닌 "브라질 공국"으로 격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왕이 돌아올 때까지 잠정적인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제헌 의회 선거를 실시해 변호사, 교수 출신의 의원들이 선출되었다.
1821년 1월 30일, 새 의원들로 구성된 코르테스가 리스본에서 소집된 뒤 군주의 즉각적인 귀환을 요구했다. 이 소식이 브라질에 전해지자, 이번에는 브라질인들이 반발했다. 그들은 포르투갈에 예속된 식민지인 취급을 받다가 주앙 6세의 망명 이래로 '브라질 왕국의 일등 백성'으로 인정받았는데, 이제 와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보고, 주앙 6세의 귀국을 강력히 반대했다. 주앙 6세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페드루를 포르투갈에 보내는 방안을 모색했지만, 자유주의 성향의 서적을 탐독하여 열렬한 자유주의자가 된 아들이 포르투갈에 갔다가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페드루의 출발을 가능한 한 연기했다.
그러던 1821년 2월 26일, 포르투갈 병사들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새 내각을 임명하고 포르투갈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하라"고 외치며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4월 21일 리우데자네이루에 모인 자유주의자들이 자체적으로 선거를 벌여 의원들을 선출해 코르테스를 조직했다. 주앙 6세는 이 사태를 어찌 수습해야 할 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다가 페드루 왕자로부터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설득을 받아들여 코르테스에 선출된 의원들을 받아들였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주앙 6세는 결국 포르투갈로 귀환하기로 했다. 그는 아들 페드루를 브라질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1821년 4월 26일에 왕실 식구들 및 귀족들과 함께 리스본으로 향했다. 전승에 따르면, 주앙은 포르투갈로 떠나기 전에 페드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페드루, 브라질은 곧 포르투갈에서 분리되겠구나!"
7월 3일 리스본 항구에 입항한 주앙 6세는 자유주의자들의 영접을 받은 뒤 그들이 정한 헌법을 승인했다. 1822년 10월 1일부터 헌법이 효력을 발휘되면서, 포르투갈 국왕은 상당한 특권을 상실했다. 카를로타 왕비는 헌법을 준수하겠다는 맹세를 수행하기를 거부했다가 왕비의 칭호를 박탈당하고 켈루스 궁전에 유페되었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아들 페드루가 브라질 자유주의자들의 추대를 받아 1822년 9월 7일 브라질 제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로 등극했다. 주앙 6세는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인지 아들이 브라질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1823년 6월 27일, 카를로타 왕비의 부추김을 받은 미겔 왕자가 절대군주제를 회복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자유주의자들 때문에 권력이 제한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주앙 6세는 즉시 호응해 제복을 입고 공개석상에서 아들 옆에 모습을 드러냈고, 병사들은 왕과 왕자를 향해 손뼉을 쳤다. 이후 코르테스를 무력으로 압박한 끝에 해산시키고 헌법을 대폭 수정해 절대군주 체제를 복원시켰다. 이후 카를로타의 권리가 회복되었고, 1823년 6월 5일 자유 헌법 수호를 위해 들고 일어난 시위대를 진압하고 일부 자유주의자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카를로타와 미겔은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1824년 4월 29일, 미겔은 리스본에서 수비대를 이끌고 주앙 6세를 체포한 뒤 왕을 살해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구실로 파코 다 뱀포스타에 감금했다. 이후 여러 정적을 체포해 반역 혐의를 적용해 처형할 준비를 하는 한편, 주앙 6세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그러다 외국 대사들이 궁궐에 들어서서 왕을 뵙기를 청하자, 반란군은 외국과 갈등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주앙 6세에게 다소의 자유를 줬다.
주앙 6세는 영국 대사의 권유를 따라 5월 9일 카시야스로 여행가는 척 했다가 리스본 항구에 정박한 영국 군함 윈저 호에 탑승했다. 이후 영국군의 도움에 힘입어 미겔을 체포한 뒤 추방했고, 뱀포스타에 돌아온 뒤 반란군 전원을 사면하는 대가로 다시 한 번 충성 서약을 받았다. 카를로타는 이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반란을 준비했지만 얼마 안가 발각되어 켈루스 궁전에 재차 감금되었다. 1824년 6월 5일 지난날 추방되었던 자유주의자들을 사면하고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새 헌법을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많은 대신들은 포르투갈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브라질의 반란을 진압할 원정군을 파견하자고 제안했지만, 주앙 6세는 포르투갈이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거부하고 협상을 택했다. 1825년 8월 29일, 포르투갈과 브라질은 영국의 중재 하에 양자를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주앙 6세는 투옥된 모든 브라질인을 석방하고 양국 간의 무역을 승인하고, 페드루 1세가 브라질의 황제를 칭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1826년 3월 4일, 주앙 6세는 예로니모 수도원에서 점심을 먹다가 갑작스러운 중병에 걸려 뱀포스타 궁전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구토, 경련 및 실신을 며칠간 지속하다가 3월 10일 오전 5시경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방부 처리되어 상 비센테 드 포라 성당에 안장되었다. 카를로타 왕비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것을 의심한 이들은 주앙 6세가 그녀에게 독살당했다고 여겼다. 실제로 2007년 주앙 6세의 시신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관련 논문 하지만 그가 죽상 동맥 경화증에 시달린 끝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어서 사인은 현재 확실하지 않다.
사후 브라질 황제를 자처하던 페드루 1세가 잠시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4세'를 겸임했다가 이내 자기 딸 마리아 2세를 포르투갈 여왕으로 선임하고 동생 미겔 1세를 섭정으로 삼았다. 그러나 미겔이 어머니와 손잡고 마리아 2세를 축출한 뒤 포르투갈 왕위에 오르자 이에 분노한 페드루 1세가 군대를 일으키면서 6년간 이어진 포르투갈 내전이 발발했다.
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자비 마리아 테레사 (Maria Teresa, Infanta of Spain and Portugal) |
1793년 4월 29일 | 1874년 1월 17일 |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페드로 카를로스 왕자[1] 슬하 1남 |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 왕자[2] | ||||
1남 |
베이라 공 안토니우 (Francisco António, Príncipe da Beira) |
1795년 3월 21일 | 1801년 6월 11일 | |
2녀 |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이사벨 (Maria Isabel, Queen of Spain) |
1797년 5월 19일 | 1818년 12월 26일 |
페르난도 7세[3] 슬하 2녀 |
2남 |
페드루 1세 & 4세 (Pedro I and IV) |
1798년 10월 12일 | 1834년 9월 24일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디네 슬하 3남 4녀[4] |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 슬하 1녀 |
||||
3녀 |
스페인의 왕자비 마리아 프란시스카 (Maria Francisca, Infanta of Spain) |
1800년 4월 22일 | 1834년 9월 4일 |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 왕자[5] 슬하 3남 |
4녀 |
포르투갈의 섭정 이자벨 마리아 (Isabel Maria, Infanta Regent of Portugal) |
1801년 7월 4일 | 1876년 4월 22일 | |
3남 |
미겔 1세 (Miguel I) |
1802년 10월 26일 | 1866년 11월 14일 |
뢰벤슈타인의 아델하이트 공녀 슬하 1남 6녀[6] |
5녀 |
마리아 다 아순상 공주 (Infanta Maria da Assunção) |
1805년 6월 25일 | 1834년 1월 7일 | |
6녀 |
롤레 후작부인 아나 데 제주스 마리아 공주 (Infanta Ana de Jesus Maria, Marquise of Loulé) |
1806년 10월 23일 | 1857년 6월 22일 |
제1대 롤레 공작 누누 조제 세베루 드 멘도사 홀링 드 모라 바헤투 슬하 2남 3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