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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colcolor=#191919>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쟁기(1918).svg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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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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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6·8대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Franz Conrad von Hötzendorf
파일:Franz Conrad von Hötzendorf(oil painting).jpg
이름 Franz Xaver Josef Graf Conrad von Hötzendorf
프란츠 크사버 요제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1]

Franz Conrad-Hötzendorf
프란츠 콘라트회첸도르프[2]
출생 1852년 11월 11일
오스트리아 제국 펜칭
사망 1925년 8월 25일 (향년 72세)
독일국 뷔르템베르크 자유 인민공화국 바트메르겐트하임
묘소 히칭 묘지
재임기간 제6대 참모총장
1906년 ~ 1911년
제8대 참모총장
1912년 ~ 19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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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부모 아버지 프란츠 크사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3]
어머니 바바라 퀴블러[4]
형제 여동생 바바라 "베티"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5]
배우자 빌헬미네 레 베아우[6]
자녀 장남 쿠르트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7]
차남 에르빈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8]
삼남 헤르베르트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9]
사남 에곤 프란츠 아우구스트 율리우스 카를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10]
학력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Theresianische Militärakademie) (졸업)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k.u.k. Kriegsschule) (졸업)
군사 경력
복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1871년 ~ 1918년
최종 계급 제국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제국원수 계급장.svg 육군 제국원수
(k.u.k. Feldmarschall)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합동 육군, 1916년)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주요 직위 제1보병연대장
제11보병사단참모장
제93보병여단장
제1보병연대장
제55보병여단장
제8보병사단장
제6·8대 육군 참모총장
남티롤집단군사령관
주요 서훈 백엽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훈장 지휘관십자(Kommandeurkreuz des Militär-Maria Theresien-Ord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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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가계도2.2. 어린시절2.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시절
2.3.1. 군인의 길2.3.2. 보스니아 렘베르크2.3.3.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 교수 시절2.3.4. 지휘관 시절2.3.5. 이탈리아 국경에서2.3.6. 참모총장이 되기까지2.3.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참모총장2.3.8. 사라예보 사건2.3.9. 제1차 세계 대전
2.3.9.1. 동부전선2.3.9.2. 세르비아 침공2.3.9.3. 갈리치아 전투, 바르샤바 전투
2.3.9.3.1. 크라시니크 전투2.3.9.3.2. 코마루프 전투2.3.9.3.3. 라바-루스카 전투 (1914년 9월 3일)2.3.9.3.4. 갈리치아 전투의 결과2.3.9.3.5. 카르파티아 전투
2.3.9.4. 고를리체-타르누프 선을 돌파하다2.3.9.5. 이탈리아 전선으로 양면전쟁에 직면2.3.9.6. 세르비아 분할2.3.9.7. 트렌티노 공세2.3.9.8. 브루실로프 공세2.3.9.9. 루마니아 전선2.3.9.10. 참모총장에서 야전사령관으로2.3.9.11. 카포레토 전투2.3.9.12. 개인적 비극과 사상적 전환2.3.9.13. 제국의 붕괴와 무력한 은퇴
2.4. 말년과 죽음
3. 평가
3.1. 지휘 스타일과 성격3.2. 사상
3.2.1. 초기 사상3.2.2. 사상의 변화3.2.3. 군인으로서의 사상
3.2.3.1. 군사 개혁3.2.3.2. 전시 작전 성과와 한계
3.2.4. 그의 사상이 제국에 미친 영향3.2.5. 당대의 평가3.2.6. 현대의 평가
3.3. 책임 회피와 정당화3.4. 역사적 의의
4. 가족 관계5. 기타6. 저술7.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인이자 제국원수[11].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핵심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전투 교리에 대한 교보를 저술하여 대외적으로 명성을 쌓았고, 페르디난트 대공의 눈에 띄어 육군 참모총장에 올라 군의 최정점에 올랐다. 그는 타국에 배타적인 입장이었으며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는 발칸반도를 복속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고, 내각과 함께 세르비아 침공을 주도하고, 동부전선 이탈리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총괄 지휘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전술적 측면과 군사 전략에 대해서는 뛰어난 걸로 알려져 있다. 다만 후술할 이유로 평가는 극과 극이다.

2. 생애

2.1. 가계도

콘라트의 집안은 대대로 모라비아 브륀에서 군인 공무원을 업으로 삼았었다. 콘라트의 증조부 프란츠 안톤 콘라트(Franz Anton Conrad, 1738-1827)는 모라비아와 슐레지엔의 회계참사관(Rechnungsrat)이었다. 그는 50년 동안 합스부르크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1815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인 프란츠 1세로부터 세습기사 작위를 부여받았고, 세습 귀족이 되면서 바이에른 선제후국 출신이었던 아내 요제파 폰 회첸도르프(Josefa von Hötzendorf, 1739-1798)[12]의 성을 합쳐서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로 성씨를 정하였다.

콘라트의 조부 요제프 오이겐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Josef Eugen Conrad von Hötzendorf, 1768-1837)는 모라비아의 유력 귀족 가문인 잘름(Salm)가의 영지 관리인(Estate Administrator)이었다. 오이겐의 아내 바바라 포스타베크(Barbara Postavek)는 콘라트의 조상 중에서 유일한 비(非) 독일인으로, 체코계 가문 출신이었다.[13]

프란츠 안톤 콘라트의 손자이자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의 아버지인 프란츠 크사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Franz Xaver Conrad von Hötzendorf, 1793-1878)는 20세의 나이에 장교로 임관하여 해방 전쟁에 참전했는데, 이는 후에 그의 아들 콘라트에게 소중한 가문의 전통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군 황립 용기병연대 소속 중위 라이프치히 전투에 참전하였고, 이후 1817년부터 헝가리와 갈리치아 일대에서 후사르로 복무하였는데, 30년 동안 복무를 했지만 중령에서 더 이상 진급을 못하였다. 그러던 중 1848년 3월 빈 혁명 때 크사버는 폭동을 진압하던 중 낙마하여 골반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결국 최종 계급 후사르 대령으로 퇴역하였다. 퇴역 후 크사버는 제국의 수도 의 제14구역인 펜칭(Penzing)에 정착하였고, 1851년 말 57세의 나이에 화가의 딸이자 자신보다 32살이나 어렸던 26세의 바바라 퀴블러(Barbara Kübler, 1825-1915)와 결혼하였다. 이듬해 11월 11일 첫 자식을 얻었는데, 그가 바로 참모총장으로 올라서게 될 프란츠 요제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Franz Xaver Josef Graf Conrad von Hötzendorf)이었다.[14]

2.2. 어린시절

프란츠 요제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1852년 11월 11일 오전, 당시 외곽의 조용한 마을이었던 펜칭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쇤브룬 궁전 정문에서 약 800m 북서쪽에 위치했다. 두 살 무렵 가족은 서부의 마리아힐퍼 거리(Mariahilfer Straße)로 이사했고, 이후 근처 지벤슈테른 거리(Siebensterngasse)로 다시 이사했다. 8.5세가 되어서야 폴크스슐레에 입학했는데, 그 전까지는 가정교사 헤어 파베츠(Herr Pawetz)에게 2년 반 동안 초등교육을 받았고, 여교사 알레망드(Fräulein L'allemand)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폴크스슐레를 마친 후에는 김나지움이 아닌 레알슐레로 진학했다.

한편 콘라트는 화가였던 외할아버지 요하네스 퀴블러(Johannes Kübler)[15]에게 그림과 그리기를 배웠는데, 콘라트에게 예술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외할아버지가 이런 외손자에게 바이올린도 가르치려 했으나 실패하는 등 딱히 음악적 재능은 없었지만, 콘라트는 음악 감상을 즐겼고 베토벤을 가장 좋아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콘라트는 어릴 적부터 예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자연을 관찰하는 게 좋았던 콘라트의 취미는 나비 수집이었다고 한다.[16] 반면에 종교, 즉 가톨릭에 대해서는 무심했으며, 그보다 자연과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17] 다만 콘라트의 아버지인 크사버는 사냥을 즐겨 하였었는데, 이런 아버지와 다르게 콘라트는 사냥을 싫어하였다.[18]

2.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시절

2.3.1. 군인의 길

이러한 환경에서 크사버는 자기 집안이 대대로 그래왔던 것처럼 아들 역시 군대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9][20] 그리하여 콘라트는 에 있는 장크트안나 레알슐레(St. Anna-Realschule)를 다니던중에 1863년 가을, 11살의 나이에 하인부르크 사관학교(Hainburg Kadettenschulen)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21] 4년간의 재학 기간 동안 그의 가장 친한 친구는 카를 페흐만 폰 마센(Carl Pechmann von Massen)이었고, 가장 좋아하는 교사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피아리스트 수도회의 과학교사 카를 뮈를레(Carl Mürle)였다. 또한 동기들은 그를 이름인 "프란츠" 대신 그의 성 "콘라트"로 불렀다. 다만 콘라트에게 학교 생활은 순탄치 않았는데,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그에게 엄격한 병영 생활은 큰 도전이었다.[22] 하지만 콘라트는 어린 시절의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강인함을 키워나갔다.

1867년 가을, 15세의 콘라트는 성공적으로 하인부르크 생도학교를 졸업하고 페흐만, 아우펜베르크와 함께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23]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가장 좋아하는 교사였던 빌헬름 레더(Wilhelm Leder) 대위에게서 "비정상적인 상황은 오래갈 수 없다"와 "불완전한 조치는 항상 실패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레더는 1848년 혁명 당시 대학생이었다가 장교가 된 인물로, "장교의 충성심과 자유주의적 세계관을 겸비"했다고 한다. 콘라트는 뛰어난 학업 성적을 보였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특히 언어 습득에 재능을 보여 모국어 오스트리아 독일어 프랑스어 외에도 러시아어를 완벽히 익혔다.[24]

1871년 8월 말, 콘라트는 19살의 나이에 사관학교에서 88명 중 10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그 해 임관한 전체 소위들 중 15위의 서열을 기록했다. 참고로 페흐만은 수석으로 졸업해 명문 제3용기병연대에 임관했으나 이후 평범한 삶을 살았고, 콘라트의 동기인 모리츠 폰 아우펜베르크 프리드리히 폰 게오르기는 각각 34등, 43등으로 졸업하였는데, 이들도 훗날 큰 인물이 되었다. 한편,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한 콘라트는 오스트리아 제국군 황립 야전 경보병연대 제11보병대대 소속 소위로 임관하여 1871년부터 1873년까지 장크트푈텐 본대에서, 1873년부터 1874년까지 1년 동안 빌헬름스부르크(Wilhelmsburg) 파견대에서 복무했다. 콘라트가 복무했던 파견대의 주둔지가 에서 35마일 거리여서 부모의 잦은 방문이 가능했고, 1866년 전쟁 영웅인 카를 슈필포겔(Carl Spielvogel) 대위가 그의 주요 역할모델이 되었다.

1874년 가을, 복무 중 보여준 능력을 인정받아 콘라트는 약 1000명의 지원자 중 50명만 선발하는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 입학에 성공했다. 그는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 크사버로부터 100굴덴을 받아 쾨니히그레츠를 비롯한 1866년 전쟁의 전장들을 방문했다. 체력, 언어, 군사과학에 동등한 비중을 둔 엄격한 커리큘럼 속에서도 2년간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수석으로 졸업했다. 당시 13,000명의 장교단 중 300명 미만이었던 참모장교가 되어 카샤우 오스트리아 제국군 황립 후사르연대 제6기병여단 소속 중위로 진급, 참모 장교로 임명되었다.[25]

1878년, 콘라트가 참모장교로서의 경력을 쌓아가던 중 콘라트의 아버지 크사버가 85세의 나이로 3월 30일 사망하여 콘라트가 세습기사 직위를 이어받았다. 크사버의 유해는 쇤브룬 궁전 근처 히칭 묘지(Hietzinger Friedhof)에 안장되었는데, 당시 바바라는 장교 미망인 연금을 받을 자격[26]이 없어 연간 350굴덴의 적은 과부 연금만 받게 되었고, 참모장교로서도 급여가 넉넉하지 않았던 콘라트가 어머니와 여동생 베티의 부양을 많이 도왔다. 이런 가족 부양의 부담 속에서도 콘라트의 군 생활은 이어졌다.

2.3.2. 보스니아 렘베르크

군 생활 중 1878년 8월,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점령 작전이 시작되자 그는 작전 참여를 자원했다. 본래 그의 소속이었던 제6기병여단은 험준한 보스니아의 지형상 투입이 어려웠기에, 8월 16일 콘라트는 전보를 통해 제4보병사단 참모부로의 전속 명령을 받았다. 다음 날인 8월 17일, 카샤우에서 거행된 황제 생일 기념식에 참석하고, 18일 아침 여단의 사열식을 마지막으로 지켜본 뒤 기차역으로 향했다. 이후 콘라트는 사단 동원을 위해 브륀으로 가는 길에 을 들러 어머니와 누나를 잠시 만났는데, 이때 여동생 베티가 준 다마스크 칼이 그의 가장 소중한 물건이 되었다.

사단 동원을 마친 콘라트는 브륀에서 다시 을 거쳐 드라바강 연안의 에세그까지 긴 기차 여행을 했다. 이때 에서 어머니와 누나와 눈물의 작별을 했다. 에세그에서 사단은 슬라보니아를 횡단하여 사바강 연안의 브로드로 행군했다. 행군 도중 8월 26일에서 27일 밤을 쟈코바르에서 보냈는데, 이때 크로아티아 지도자 요시프 슈트로스마이어(Josip Strossmayer) 주교가 만찬을 베풀었다. 슈트로스마이어는 헝가리에 대한 적대감과 크로아티아의 헝가리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했고, 보스니아 원정이 남슬라브인들 사이에서 크로아티아인들과 가톨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를 희망했다. 콘라트와 사단 참모들은 8월 말에 사바강을 건너 보스니아로 들어갔다. 콘라트의 생애에서 이전까지의 26년이 비교적 단순했다면, 보스니아 점령 작전 참여는 그에게 새로운 책임과 의무가 시작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콘라트는 1878년 9월 4일, 북부 보스니아 통제의 핵심지역인 도보이(Doboj) 근처 리파츠 전투(Battle at Lipac)에 참가했다. 도보이는 브로드(Brod)- 사라예보 남북도로와 투즐라(Tuzla)- 바냐루카 동서도로의 교차점으로, 반군들은 이 전략적 요충지를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전쟁대학 전술 교관이었던 요한 폰 발트슈테텐(Johann von Waldstätten) 남작[27]이 지휘했는데, 콘라트는 그가 "냉철하고 충동적"이었으며 "뛰어난 지도자"였다고 회상했다. 특히 " 전쟁대학에서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리파츠 전투에서 그를 지켜보며 느낀 것이 그것을 모두 뛰어넘었다"고 평했다. 반군을 물리친 후 제4보병사단은 도보이를 점령하고 사라예보 방향으로 남하했다.

9월 말에는 제7여단과 함께 사라예보에 입성했다. 이미 도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장악한 후였고 요제프 필리포비치(Feldzeugmeister Joseph Philippovic) 야전대포장이 총사령관으로 주둔 중이었다.[28] 콘라트는 10월 대부분을 이 도시에서 보냈고, 가끔 제7여단과 함께 주변 산악지대 순찰을 나갔다. 10월 19일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보스니아 주둔군 감축을 명령하여 한 보병사단과 한 기병여단이 귀환했고, 요제프 펠리칸(Josef Pelikan von Plauenwald) 중장의 은퇴로 발트슈테텐이 제4보병사단장이 되었다. 이후 콘라트는 11월이 되자 제8여단 참모로서 동부 보스니아의 핵심지역인 고라주데(Goražde)로 이동했다. 이곳은 서쪽으로는 팔레(Pale)를 거쳐 사라예보로, 북동쪽으로는 비세그라드(Višegrad)[29]를 거쳐 세르비아로, 남쪽으로는 헤르체고비나를 거쳐 두브로브니크로 이어지는 교차로였다. 새로운 오스트리아- 튀르크 국경과 인접한 취약 지점이기도 했다. 콘라트는 이곳에서 10개월간 주둔했는데, 12월에는 폭설 속에서도 새 국경 지역을 정찰했다. 이때 튀르크군 전초기지에서 후한 대접을 받으며 처음으로 수저 없이 공동 그릇에서 먹는 중동식 식사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후 1879년 1월에는 이러한 정찰 임무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노비파자르 산작(Sanjak of Novi Pazar) 점령 계획을 수립했다. 이 지역은 베를린 회의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점령이 승인된 전략적 요충지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에게해 살로니카까지 200마일도 채 되지 않는 거리였다. 당시 1878년 동부 보스니아 무슬림 저항의 지도자였던 무프티 메헤메드(Mufti Mehemed)가 플레블례(Plevlje)로 도망쳐 있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이 지역을 탐내고 있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점령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국경 통합을 막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4월 21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오스만-오스트리아 협약이 체결되었고, 9월에는 제1보병여단 참모장으로서 점령작전에 참여했다. 그해 5월 1일 대위로 진급했고, 5월 4일에는 보스니아 공로로 특별 표창을 받았다.

점령작전은 9월 초에 시작되었는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새로운 총사령관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Duke William of Württemberg) 공작이 지휘했다. 외무성은 평화적인 점령을 희망하여 콘라트가 1월에 제안한 2개 사단(약 25,000명) 규모가 아닌 2개 여단(약 7,000명)만으로 작전을 수행하기로 했다. 콘라트는 니콜라우스 킬리치(Nikolaus Killic) 소장이 지휘하는 제1보병여단의 참모장이 되었다. 부대는 부코비나 출신의 루테니아- 루마니아계 제41보병연대, 헝가리계 제44보병연대, 그리고 모라비아 출신의 독일- 체코계 제25야전예거대대로 구성되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마찬가지로 노비파자르 산작도 미개척 지역이었다. 콘라트와 여단 참모부는 전진하면서 정찰과 지도 제작을 했지만, 대부분 세르비아 안내인들인 하이두크(Hajduks)에게 의존해야 했다. 이들은 좋은 보수, 튀르크인에 대한 깊은 증오, 작전 후 보스니아로의 안전한 이주 약속에 고무되어 자발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군복을 입고 "매우 좋은 복무"를 했다. 하지만 뷔르템베르크 공작이 이런 "강도와 살인자들"이 제1여단에 있다는 것을 알고 즉각 해고를 명령했다. 콘라트가 그들의 안전을 보장했기 때문에 이는 심각한 딜레마였다. 그의 지휘관 킬리치가 결국 그를 도와주었는데, 공작에게는 세르비아 안내인들을 내보내겠다고 약속하고 실제로는 콘라트에게 그들을 군복 입은 채로 보스니아로 돌아가는 순찰대에 합류시키라고 지시했다.

작전 기간 내내 퇴각하는 튀르크군 및 현지 무슬림들과의 긴장된 관계는 현지 세르비아인들의 환대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특히 9월 10일 제1여단이 입성한 플레블례에서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하지만 콘라트와 그의 동료 장교들을 당혹스럽게 한 것은 외교적 불확실성이었다. 그들은 튀르크군이 이 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이라는 인상을 받고 부대를 이끌고 들어갔지만, 튀르크 측은 두 제국 간의 협약이 주요 도시들에서의 공동 주둔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평화를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무장관 쥘러 언드라시(Gyula Andrássy) 백작은 플레블례에서조차 공동 주둔을 수용했다.

작전 종료 후 1879년 11월, 노비파자르 산작의 평화로운 점령이 완료되어 주둔군이 평시 체제로 전환되자 콘라트는 마침내 요한 폰 자모니그(Johann von Samonigg) 대령의 제안을 수락하여 지도제작국으로 복귀했다. 으로 돌아온 그는 어머니 바바라, 여동생 베티와 함께 이전 집이었던 지벤슈테른 거리에서 1블록 떨어진 서부 근교 몬드샤인 거리(Mondscheingasse) 12번지의 2베드룸 아파트에 정착했다. 콘라트는 군사 부관을 데리고 있었고, 어머니는 하녀를 두었으며, 베티는 미술과 언어 강습으로 수입을 보태었다. 또한 콘라트는 대부분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전쟁성 건물의 사무실에서 근무했고, 여가 시간에는 승마 세르보크로아트어 학습에 매진했다. 자모니그는 좋은 상관이었고, 콘라트의 어머니가 이미 그의 가족과 알고 지내 사교적 관계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1879년 성탄절 전야에 산작 점령 공로로 첫 군사공로십자장을 받아 더욱 특별했다고 회상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도제작국에서 근무하던 1880년 8월과 9월에는 남부 헤르체고비나와 노비파자르 산작 지역의 지도제작을 위해 파견되었다. 트리에스테를 거쳐 달마티아 해안으로 향했는데, 이것이 그의 첫 항구 방문이자 첫 해상 여행이었다. 다만 지형 특성상 대부분의 탐사를 말이 아닌 도보로 해야 했다. 콘라트는 1869년 현지 반란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전투를 벌였던 모스타르 주변을 작업한 후, 잠시 두브로브니크에서 휴가를 보냈는데 이 옛 성벽도시를 "진정한 낙원"이라 칭하며 그 문화유산에 감탄했다. 이후 산작 지역 여행에서는 플레블례에서 옛 전우들과 재회하기도 했다.

새로운 임무로 1881년 7월에는 "카를 베르그호프(Carl Berghof)"라는 위장 신분으로 세르비아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콘라트는 화가로 위장해 스케치북을 들고 다녔는데, 포제가(Požega)에서 식사 중 "오스트리아 스파이(Austriski spiun)"라는 외침과 함께 군중이 모여들자 뒷문으로 도망쳐야 했다. 다행히 그는 당시 세르보크로아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기에 대부분의 장소에서 오스트리아 화가 신분을 밝힐 필요도 없었고, 많은 곳에서 베오그라드 학생으로 오인받았다. 임무를 마친 후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로 돌아와 잠시 루마니아에서 휴가를 보내고 귀환했다.

이런 상황에서 1881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징병제를 도입하려 하자 이에 반발한 반란이 남부 헤르체고비나와 해군기지 카타로 배후지역에서 발생했다. 이는 1869년과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이었다. 1882년 1월, 콘라트는 제47보병사단 참모로서 반란 진압작전에 참여했는데, 당시 부대는 4개 예거대대와 여러 보병연대로 구성된 약 4,700명 규모였다. 슈테판 폰 요바노비치(Stephan von Jovanović) 중장 총사령관, 카를 폰 빈터할더(Karl von Winterhalder) 소장이 사단장을 맡았다.

3월 8일부터 반란군 진압을 시작했는데, 둘째 날에는 험악한 지형에서 더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크로아티아 제16보병연대의 한 소령이 반란군에 의해 살해되는 일도 있었다. 3월 10일 마지막 공격으로 대규모 반란군의 조직적 저항은 끝났다. 4월 5일 몬테네그로 국경 근처 우마츠에서의 전투에서 승리했는데, 당시 회색 예거 군복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검은색 참모복장 때문에 콘라트는 반란군의 표적이 되어 위험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한편, 작전 내내 해군이 수송, 지휘통제 통신, 산악 지역 포격 지원을 제공했다. 작전의 성공으로 5월 10일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작전에 참여한 장교들에게 훈장을 수여했고, 콘라트는 두 번째 군사공로 훈장을 받았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나흘 후인 5월 14일, 요바노비치는 카스텔누오보(Castelnuovo)[30]에서 직접 콘라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콘라트는 한 동료 장교와 함께 여권도 없이 몬테네그로 수도 체티네를 방문하기도 했다. 두 보병사단은 4개월 더 전시 태세를 유지했고, 콘라트는 여름 대부분을 두브로브니크 주변에서 보냈다. 9월 15일, 상황이 안정되어 현지 주둔군이 평시 체제로 전환되고 나머지 부대가 귀환하자 콘라트도 으로 복귀하여 지도제작국 근무를 재개했다.

전투 경험을 쌓은 후 1882년 겨울, 콘라트는 군사과학협회지에 세 번째 논문인 "군사지리학적 보조수단에 관하여(Ueber militar-geographische Behelfe)"를 저술했다. 1883년에 출간된 13페이지 분량의 이 논문에서 그는 참모본부 지도제작의 개선방안을 제시했다. 특히 지도가 장교들에게 지형에 대한 가장 관련성 높은 정보를 전달해야 하며, 모든 도로와 통로의 "통행가능성(Gangbarkeit)"을 표시할 것을 제안했다.

이어서 1883년 봄, 콘라트는 위조 여권으로 1852년생 붉은 갈색 머리, 연한 갈색 눈의 경제학자(Oekonom) "프란츠 코르돈(Franz Cordon)"이라는 위장 신분으로 러시아령 폴란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5월에 러시아 국경을 건넜는데, 서류 심사도 무사히 통과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러시아령 폴란드 남부 지역에서 보냈는데, 이곳은 후에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 되었다. 바르샤바 루블린을 방문하며 도로와 철도 개선상황을 특별히 주목했는데,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폴란드어는 기초 수준이었음에도 전혀 의심을 받지 않았다.

이러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해 10월에는 렘베르크의 제11보병사단 참모장으로 부임했다. 에서 330마일 떨어진 이곳은 기차로 25시간이나 걸렸지만, 11만 인구의 대도시였다. 폴란드계 상류층과 중산층이 루테니아계 하층민을 지배하고 있었고, 독일계 공동체와 큰 유대인 소수민족도 존재했다. 제11사단은 동부 갈리치아 출신들을 징집했는데, 제9, 80, 95보병연대와 제30야전예거대대가 주력이었으며 전체 병력의 2/3가 루테니아인, 1/4이 폴란드인이었다. 새로운 부임지 렘베르크에서 그는 참모장으로서 혁신적인 야전훈련 개혁을 시도하여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연중 내내 실전적인 전투훈련이 가능한 훈련장 설립을 주도했다.[31]

군사적 성과를 인정받아 1886년 4월 10일, 콘라트는 공병차감(Genieinspektor)인 오스트리아 제국군 대령 아우구스트 폰 레 베아우(August von Le Beau)의 딸 빌헬미네 레 베아우(Wilhelmine le Beau, 1860-1905)와 결혼하여 다시 으로 돌아왔다. 레 베아우 가문은 빌헬미네의 선조들이 프랑스에서 독일 남서부로 이주한 이래로 합스부르크 왕가를 오랫동안 섬겨왔는데, 빌헬미네의 어머니 에텔카 다고스톤(Etelka d'Agoston) 역시 프랑스계 혈통이었다. 빌헬미네는 1860년 12월 달마티아의 세베니코(Sebenico)[32]에서 태어났다. 1885년 약혼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1월 23일 결혼을 재가했고, 콘라트가 장교 결혼 보증금(Heiratskaution)을 예치한 후에야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대위 신분이었던 콘라트는 18,000굴덴이라는 거액의 보증금이 필요했는데, 이는 당시 그의 연봉 1,200굴덴의 15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빌헬미네의 부모가 전액을 부담했고, 어머니는 추가로 연간 252굴덴의 생활비도 지원하기로 했다.

결혼 생활과 함께 콘라트는 빌마[33]와의 사이에서 첫 아이인 쿠르트(Kurt, 1887-1918)[34]를 낳았는데, 쿠르트는 결혼 후 정확히 9개월 뒤인 1887년 1월 10일에 태어났다. 부모는 아들의 이름이 '콘라트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Konrad Conrad von Hötzendorf)'가 되는 것을 피하고자 쿠르트라고 이름 지었다.[35] 이후 둘째 에르빈(Erwin, 1888-1965)[36], 셋째 헤르베르트(Herbert, 1891-1915)[37], 막내 에곤(Egon, 1896-1974)까지 이렇게 총 네 명의 아들을 두었고, 모두 아버지를 따라 나중에 장교가 되었다.

2.3.3.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 교수 시절

1887년 11월 1일 소령으로 승진한 콘라트는 1888년 4월 프리드리히 폰 벡지코프스키 참모총장에 의해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 전술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개강 연설에서 "전쟁은 사람이 수행하는 것이므로, 전쟁을 이해하려면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반응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콘라트는 부대가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항상 강조했고, 평범한 병사에서부터 모든 계급의 지휘관에 이르기까지 '도덕적 힘(moralischen Potenzen)'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중시했다. 또한 '의사결정의 심리학'을 가르치고 '중도반단'을 배격하며 학생들의 성격을 형성하는데도 주력했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9월 중순부터 시작될 입학시험 채점을 앞두고 그는 여름 동안 동료 장교 아달베르트 폰 라우베(Adalbert von Laube) 소령과 함께 보불전쟁 당시의 전장을 순방했다. 콘라트는 17년간 이 전쟁에 대한 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육군의 가장 재능있는 중위들을 가르치기 전에 직접 현장을 방문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 여행 중 파리도 방문했는데, 이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서쪽으로 간 여행이었다. 새 임무 시작 직전에는 브루크 안 데어 라이타(Bruck an der Leitha)의 육군사격학교에서 현대 사격술의 실용적 측면을 배웠다.

교수로서 콘라트의 전술 교육은 1874년 보병규정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1866년 전쟁 패배 이후 프로이센 모델을 따라 보병화력 중심의 전술체계로 전환한 것이었다. 특히 기존의 백병전(Stosstaktik) 중심에서 벗어난 것이 특징이었다. 그는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발칸반도를 여행하면서 얻은 전술적 경험들을 가르쳤다. 특히 보불전쟁에 대해서는 백과사전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영웅인 대 몰트케 원수의 전역을 철저히 가르쳤다. 후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참모장교들이 이 전쟁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독일 제국군 장교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는 그의 교육 성과를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으로 콘라트는 당시 군사학교의 엄격한 군사규율과 독일어권 학계의 권위적 강의 스타일과는 달리, '자유로운 의견 교환'과 '토론'을 장려하는 혁신적인 교수법을 사용했다. 또한 전술에 관한 교과서 "전술 연구를 위하여(Zum Studium der Taktik)"를 저술했다. 콘라트는 전쟁대학의 장교들 사이에서도 꽤나 인기있는 편이었다. 교수로서도 훌륭했는데, 1888-90년 기수와 1890-92년 기수 각각 50명씩 총 100명의 학생 중 51명이 소장 이상으로 진급했고, 9명이 대령까지 진급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그의 제자들 중 5명이 군단장, 아우구스트 폰 우르반스키(August von Urbański)나 아돌프 폰 부크(Adolf von Boog)를 포함한 30명이 사단장, 14명이 여단장으로 복무했다.

당시 1888년 11월 입학생 중에는 콘라트의 처남인 아우렐 레 베아우(Aurel Le Beau) 중위도 있었는데, 그는 후일 중장이 되어 사단장으로 전쟁을 마쳤다. 교수진에는 카샤우 시절 친구였던 에밀 보이노비치(Emil Woinovich)가 군사사와 전략을 가르치고 1학년 러시아어 교육도 도왔다. 보이노비치는 후에 다작 저술가가 되어 오스트리아 전쟁문서보관소장을 지냈고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카를 폰 플란처발틴 소령도 교수진에 있었는데, 그는 후에 장군이 되어 1918년 가을 마지막까지 전선을 지켰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를 지휘했다.

또한 수업 외에도 콘라트는 주로 여름철에 교육훈련 기동(Übungsreisen)을 실시했다. 이는 1830년대부터 시작된 프로이센 참모본부 기동을 1870년에 도입한 것으로, 지도상이 아닌 실제 전장에서 실시되는 전쟁게임이었다. 각 진영은 서로 기동하며 하루 10-20마일을 이동하고 실제 지형에서 명령을 내리는 등 실전처럼 행동했다. 콘라트는 이 훈련에서 '인내력'과 '성격의 강인함'을 시험했고, 날이 갈수록 더 어려운 과제를 부여했다.

이러한 교육 성과를 인정받아 콘라트는 대위에서 8년 반, 소령에서 2년 반, 중령에서 3년을 보내며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진급을 거듭했다. 복귀를 요청받은 콘라트는 1892년 10월 올뮈츠에 주둔한 제93보병여단의 대대장이 되었다. 1893년 5월, 마흔 살이 되고 6개월 만에 대령으로 진급했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콘라트는 참모장교 지망생 평가위원회의 위원으로 유망한 장교들을 선별하였다. 이는 5년간의 빈 생활 중 13개월에 불과한 짧은 공백기였다. 이후 제국 및 왕립 '카이저' 제1보병연대를 4년간 지휘했다. 1899년 봄, 콘라트는 트로파우에서 트리에스트로 전보되어 제55보병여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5월, 그는 여단장에 걸맞은 소장으로 진급하여 마침내 별을 달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가 47세였던 걸 생각하면 상당한 고속 승진이었다.[38]

2.3.4. 지휘관 시절

1892년 10월, 콘라트는 올뮈츠에 주둔한 제93보병연대의 제2대대장이 되어 5년 만에 을 떠났다.[39] 제93보병연대는 1883년에 보병연대가 80개에서 102개로 증편될 때 창설된 신생 연대였다. 올뮈츠와 메리쉬-쇤베르크(Mährisch-Schönberg)[40] 지역에서 병력을 충원했으며, 1894년 기준으로 병력의 72%가 독일인, 27%가 체코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콘라트의 연대장은 에리히 토스(Erich Thoss) 대령이었고, 제1대대장은 제11야전예거대대 시절 동료였던 에마누엘 부리 폰 외덴발트(Emanuel Bourry von Ödenwald)였다. 부리와의 재회는 그에게 다소 쓴맛이었는데, 20년 전인 1874년 부리는 중위로서 당시 소위였던 콘라트보다 높은 계급이었으나, 1894년에는 부리가 겨우 소령인 반면 콘라트는 이미 두 계급이나 높은 대령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콘라트는 올뮈츠에서도 렘베르크 시절처럼 실전적인 전투훈련을 위해 연중 사용 가능한 훈련장 구매나 임대를 추진했으나, 재정적 제약으로 무산되었다. 대신 훈련장과 사격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훈련을 실시했고, 대대원들의 사기 진작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부리의 조카 프란츠 베네딕트에 따르면 "장교들과 병사들이 그를 거의 광신적으로 사랑했다"고 한다. 콘라트는 엄격했지만 부대원들의 복지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는 드문 "따뜻한 저녁 식사" 제공을 도입하기도 했다.

한편 콘라트가 올뮈츠에 있던 시기에 체코 민족의식이 고조되고 있었으나, 민족 구성이 혼합된 제93보병연대 내에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연대가 체코인 독일인 간의 민간 소요를 진압하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보헤미아 모라비아 전역에서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1893년 5월 보헤미아 의회에서 청년 체코당 의원들이 처음으로 시끄러운 반대 전술을 선보였고, 이는 후에 제국의회에서도 재현되었다. 3개월 후에는 프라하에서 황제 생일 전야 행진 중 체코인 독일인 간의 폭동이 발생했다.

더불어 지역의 산업혁명이 가져온 사회 문제도 긴장을 가중시켰다. 실제로 북부 모라비아에서는 민족 갈등보다 계급 갈등이 더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베네딕트에 따르면 근처 직물 공장 직공들의 "끔찍한 빈곤"이 콘라트를 매우 괴롭혔다고 한다. 그는 거리를 배회하며 구걸하는 노동자들의 누더기 옷을 입은 아이들과 가족의 음식과 자신의 용돈을 나누곤 했다. 베네딕트는 콘라트가 병영에서 집으로 걸어올 때 "노동자 아이들 무리(pack of Arbeiterkinder)"가 그를 따라오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했다고 한다. 사회진화론적 세계관과 아이들에 대한 연민 사이에서 후자가 승리한 것이다.

잠시 후 1894년 9월부터 1895년 10월까지 13개월 동안 콘라트는 으로 돌아와 참모장교 지망생 평가위원회("Kommission zur Beurteilung der Stabsoffiziers-Aspiranten") 위원으로 일했다. 이는 그의 화려한 경력에서 조용한 공백기였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연대장으로서 전선으로 복귀하기를 갈망했지만,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콘라트의 아내 빌마는 을 떠나 다음 임지인 트로파우로 갈 때 임신 4개월 차였고, 그곳에서 1896년 3월 20일 네 번째이자 막내아들인 에곤을 낳았다.

이후 부임지였던 트로파우는 인구 약 25,000명의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에 위치한 수비대 도시였다. 이는 1740년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빼앗긴 대(大)실레시아의 작은 잔여 영토였다. 이런 역사적 우연으로 이 지역은 주로 체코인이 사는 보헤미아 모라비아 독일인 거주 지역의 북쪽 연장선이 되었고, 1918년 이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이른바 주데텐란트의 일부로 여겨졌다.

당시 트로파우는 1853년부터 제국군에서 가장 명망 높은 연대인 제1보병연대의 본거지이자 신병 모집 중심지였다. 1895년 10월 콘라트가 지휘를 맡은 것이 바로 이 연대였다. 제1보병연대는 1745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었던 당시 연대 소유주 프란츠 1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시작된 전통에 따라 황제가 직접 연대 소유주(Inhaber)를 맡은 유일한 정규 보병연대였다. 1765년 그의 아들 요제프 2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와 연대 소유주가 되었고, 이런 연관으로 4년 후 제국 연대들에 번호가 매겨질 때 이 연대가 '1번'을 받았다. 1895년 기준으로 제1보병연대는 병력의 82%가 독일인이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가장 높은 식자율을 가진 지역에서 충원되었다. 제5보병사단 소속이었는데, 이 사단의 지휘관은 20년 전 전쟁대학 시절 콘라트의 전략 교수였던 카를 폰 골트(Karl von Gold) 중장이었다.

이곳에서 콘라트 가족이 반링(Bahnring) 29번지 집에 정착하면서부터 그의 가정은 연대 사교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콘라트는 연대 장교들과 그들의 아내를 위해 잦은 파티와 만찬을 여는 '오픈 하우스'를 운영했는데, 장교들은 '의무감'이 아닌 진정한 참석 의지로 모였다. 미혼 하급 장교들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매주 그들과 식사하는 습관을 들였다. 20년 전 그의 첫 논문에서 주장했던 장교 식당이 이미 대부분의 연대에 도입되어 있었는데, 콘라트는 형식과 형식주의(Form und Formalismus)[41]에 대한 경멸로 종종 견습 장교들과 생도들의 어린이 식탁(Kindertisch)[42]에 앉곤 했다.

지휘관으로서 부하 장교들에게 최대한의 권한을 위임하는 임무형 전술(Auftragstaktik)[43]의 강력한 지지자로서, 콘라트는 대대장들에게 그의 지침 정신 안에서 유연성 있게 행동할 수 있는 재량권을 주었고, 그들도 예하 장교들과 부사관들에게 같은 방식을 적용하기를 요구했다. 한 관찰자에 따르면, 이러한 책임 공유의 원칙은 "가장 단순한 병사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좋은 심성을 가진 지휘관이자 전우"로서 그는 장교들과 부대원들의 신뢰와 애정을 얻었다.

또한 후일 참모총장이 되어 모든 군악대를 폐지하려 했던 것을 예고하듯, 콘라트는 제1보병연대에서 연대 열병식과 대부분의 공식 행사를 없앴다. 한 역사가의 말을 빌리면, "그는 평시에 군대가 수행하는 더 넓은 역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44] 그의 저서 '전술 연구를 위하여'에서 콘라트는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평시에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지만,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는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열병식과 군악대 연주에서부터 징집병들에게 모래주머니를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옮기게 하는 것과 같은 일에까지 해당되었다. 훈련장에 대한 그의 혐오는 훈련 자체를 완전히 거부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입장으로까지 이어졌다. 전통주의자들이 훈련을 규율의 핵심으로 보는 반면, 혁신주의자 콘라트는 이를 시간 낭비로 여겼고, 그런 면에서 규율에 해로운 것으로 보았다. 그는 병사들이 그 시간을 실전적인 전투 훈련에 쓰기를 원했다. 트로파우 외곽에서도 이를 위한 부지 구매나 임대를 시도했지만, 올뮈츠에서처럼 재정적 제약으로 무산되어 훈련장 없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군사 이론가로서 전쟁대학에서 올뮈츠로 전출된 이후 콘라트는 더 이상 교직을 맡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저술가로서의 경력은 대부분 1892년 이후에 이루어졌고, 학자다운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한 독일 장군이 그를 "군인이라기보다는 학자"라고 평했다. "전술 연구를 위하여"의 2판은 올뮈츠 시절에 출간되었는데, 1893년 9월자 서문에서 그는 "시간 부족"으로 인해 약간의 수정만 했다고 밝혔다. 에서의 공백기인 1894-95년에는 36개의 전술 문제를 포함한 459페이지 분량의 세 번째 전술 문제집(Taktik-Aufgaben)을 완성했다. 이듬해에는 첫 번째 전술 문제집의 완전한 개정판도 출간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대한 그의 포괄적이고 지속적인 논평으로, 1892년부터 1900년까지 군사과학협회 기관지에 실린 8개의 긴 논문으로 총 980페이지에 달했다. 전쟁대학 재직 마지막 해에 시작된 이 연재는 올뮈츠, , 트로파우에서의 시절 동안 계속되었다. 8편의 논문은 거의 연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첫 회에서 콘라트는 "현재의 작업이 거의 전적으로" 독일 참모본부의 공식 전쟁사를 기반으로 한다고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재를 통해 1891년 초판 "전술 연구를 위하여"에서 1898년 3판까지의 그의 사고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

마침내 트로파우에서의 콘라트의 시절은 1899년 봄, 제55보병여단장으로 트리에스테에 부임하면서 끝났다. 그는 여단장에 걸맞은 소장으로 진급하여 마침내 별을 달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가 47세였던 걸 생각하면 상당한 고속 승진이었다.[45]

2.3.5. 이탈리아 국경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대의 상업 도시였던 트리에스트는 1900년 당시 17만 8,500명의 인구를 가진 제국의 주요 항구도시였다. 다음으로 큰 도시였으며, 20세기 초 급속한 성장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유럽의 가장 번화한 항구 중 하나가 되었다. 도시 인구는 다국적 상업 엘리트와 슬로베니아계 노동자들로 구성되었으나, 대부분은 이탈리아계였다.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이곳을 '미회수된 이탈리아(Irredentismo italiano)'로 간주했다.

콘라트는 1899년 4월 제55보병여단 지휘관으로 트리에스트에 부임한 후 얼마 안 가 소장으로 승진했었다. 제55보병여단은 카르니올라 제87보병연대와 제97보병연대로 구성되었으며, 병력의 65% 이상이 슬로베니아계였다. 제87연대는 슬로베니아어만을 연대 언어로 사용했고, 제97연대는 슬로베니아어, 이탈리아어, 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하는 3개 언어 부대였다. 1899년에서 1903년 사이 여단의 슬로베니아계 비율은 69%까지 증가했다. 당시 슬로베니아계 병사들은 85%에 달하는 높은 문해율을 보이며 제국군의 우수한 병력으로 평가받았다.

콘라트는 부임 직후 부대 훈련장 확보에 주력했고, 트리에스트 북부 바소비차(Bassovica) 인근에 부지를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1880년대 중반 렘베르크 이후 그의 첫 본격적인 훈련장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전시 '현실성'을 평시 훈련에 반영하는 데 집중했다. 심지어 일상적인 군사생활에서도 엄격함을 고집했는데, 후일 콘라트의 제자 우르반스키의 회고에 따르면 콘라트는 트리에스트에서 겨울에도 참모장교들의 외투 착용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는 이를 러시아와의 동부전선 전쟁을 상정하며 " 트리에스트에서 외투를 입는다면, 타르노폴에서는 몇 벌의 외투를 입어야 하겠는가?"라며 정당화했다.

1900년 1월, 그의 저서 "보병의 전투훈련(Die Gefechtsausbildung der Infanterie)"의 초고가 완성되어 의 L. W. 자이델 앤 존(L. W. Seidel & Sohn)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 255페이지 분량의 이 책은 실전적인 조언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병사들의 '도덕적 효율성(Tüchtigkeit)'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저자는 신병들에게 군사 개념을 이해시키는 예시 대화를 시작으로, 점차 복잡한 내용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예를 들어 언덕 점령 훈련을 어린 시절 '왕의 산' 놀이에 빗대거나, 마을과 시골에서의 전투를 '강도와 판두르' 놀이에 비유하는 등 일상적 경험을 활용했다.

책은 무기 관리법, 장교·동료·부대 상징물에 대한 예절 등 병사가 알아야 할 모든 평시 일과를 다루었다. 전투 전·중·후의 임무, 부상이나 포로가 되었을 때의 행동 수칙, 식량과 물이 부족할 때의 대처법, 부상당한 동료나 적군 포로 관리에 대한 책임도 포함했다. 약 절반의 분량은 중대·대대·연대급 훈련 프로그램 3종의 예시로 구성되었다. 콘라트는 자신의 생각이 공식 훈련 체계가 아닌 실용적 제안임을 분명히 했으며, '형식주의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했다.

이 저서는 1889년 육군규정을 기반으로 했으나 매우 자유롭게 해석했으며, 실제 전투 사례나 다른 저자들의 견해를 거의 인용하지 않았다. 전술적으로 새로운 발견은 없었음에도 콘라트의 명성 덕분에 큰 호평을 받았고, 1917년까지 6판이 발행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한 역사가는 이를 콘라트의 '가장 지속적인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1901년 여름, 크로아티아의 마우니츠-라케크(Maunitz-Rakek)에서 열린 제28보병사단 훈련에서 콘라트가 이끄는 제55여단은 열세에도 불구하고 사단 내 다른 부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참관한 페르디난트 대공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같은 해 가을 헝가리 남서부에서 열린 황제기동훈련(Kaisermanöver)에는 제55여단이 참가하지 않았으나, 콘라트는 심판관으로 참여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한 훈련이 끝난 후 바크사(Baksa) 마을의 콘라트 숙소를 깜짝 방문했다. 2시간에 걸친 마차 산책 동안 페르디난트 대공은 콘라트에게 군사 조직, 부대 발전, 장교 교육 등 군사적 주제와 함께 국내 정세, 남슬라브 문제, 헝가리의 헌법적 지위와 야망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물었다. 콘라트는 헝가리의 야망에 대한 반대와 남슬라브 문제의 크로아티아계 우위 해결 지지를 표명했는데, 이는 페르디난트 대공의 '삼원론' 구상과 일치했다.

1902년 2월, 트리에스트에서 오스트리아 로이드 선박회사(Lloyd Steamship)의 화부들이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파업을 일으켰다. 회사 측이 대체 인력을 고용하고 해군이 자체 화부들을 파견하자 사태가 악화되었고, 2월 중순에는 다른 노조들도 동참하며 총파업으로 확대되었다. 콘라트는 1848년 빈 봉기 진압 실패로 군 경력이 끝난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14일 오후 군대가 시위대에 발포하여 8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했으며, 다음날 추가 발포로 6명이 더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했다. 시위대도 2명의 군인과 6명의 경찰을 심각하게 다치게 했으며, 이 중 한 경찰관은 후에 사망했다. 2월 15일 저녁, 로이드사가 파업자들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면서 사태가 진정되었다. 폴라에서 전함 1개 사단과 라이바흐를 비롯한 남부철도 연선의 주둔지에서 수천 명의 병력이 증원되었다. 콘라트는 지역 경찰을 보완하기 위해 군인과 해군을 2인 1조로 거리 순찰을 하도록 했다. 파업에는 슬로베니아계 크로아티아계도 참여했으나, 콘라트는 특히 이탈리아 선동가들의 개입을 의심했다. 그는 이들과 지역 이레덴티스트들의 연계를 조사하려 했으나 정부와 해군 당국의 저지로 실패했다. 이 사건은 삼국동맹 이탈리아 왕국의 신뢰성에 대한 그의 의구심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열린 해군합동기동훈련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의 악화된 관계를 반영했다. 훈련은 주요 해군기지인 폴라에 대한 적군의 상륙 작전을 가정했다. 적군 역할을 맡은 콘라트의 여단은 임차한 로이드사의 증기선을 이용해 이스트리아 반도 해안으로 상륙을 시도했고, 전함 1개 사단이 적 함대 역할로 이를 지원했다. 콘라트의 부대가 폴라 점령 직전까지 이르자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훈련 종료를 선언했다. 이 비정통적인 작전에서 여단의 뛰어난 성과는 콘라트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 참관한 페르디난트 대공은 이 훈련을 통해 아드리아해에서의 해군력 우위 확보가 적의 상륙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콘라트는 폴라만큼이나 트리에스트도 적의 상륙 작전에 취약하다고 판단했다. 트리에스트는 무지아만(Bay of Muggia)에 어뢰정 전대를 위한 소규모 해군기지만 있었기 때문에, 기습 공격 방어는 주로 육군의 책임이었다. 이에 콘라트는 1,500만 크로네 규모의 방어 체계 강화 계획을 제안했다. 3개의 장갑 요새와 반영구적인 토축, 최신 해안포 설치 등이 포함된 이 계획은 군사 예산 우선순위에서 밀려 실현되지 못했다.

1903년 봄, 콘라트는 "보병 문제와 보어전쟁의 현상(Infanteristische Fragen und die Erscheinungen des Burenkrieges)"을 완성했다. 101페이지의 이 간결한 저서는 연대기적 서술을 피하고 전투의 개별 사례들을 분석했다. 그는 이미 가지고 있던 신념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을 선택했는데, 일부는 정확하지 않았다. 영국군 보병이 초기에 겪은 좌절은 실전보다 열병식이나 의식에 맞춰진 형식적인 규율과 비현실적 전투 훈련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보어군이 수세적 전쟁을 펼쳤다가 결국 패배한 점을 지적하며, 방어는 거의 항상 패배로 이어진다는 자신의 주장을 재확인했다.

콘라트의 "보병의 전투훈련"은 255페이지 분량으로, 실전적인 조언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병사들의 '도덕적 효율성(Tüchtigkeit)'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신병들에게 군사 개념을 이해시키는 예시 대화로 시작했다. 언덕 점령 훈련을 '왕의 산' 놀이에 비유하는 등 어린 시절 놀이에 빗대어 훈련 방법을 설명했고, 무기 관리부터 장교/동료/부대 상징물에 대한 예절까지 상세히 다루었다. 또한 전투 전/중/후의 병사 임무, 부상자/포로 처리 방법을 포함했으며, 다양한 지형에서의 부대 운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책의 절반가량은 중대/대대/연대급 훈련 프로그램 3종으로 구성되었다. 콘라트는 형식주의를 배격하며 이를 공식 교범이 아닌 실용적 제안으로 제시했다.

1903년 출간된 "보병 문제와 보어전쟁의 현상"은 101페이지의 간결한 분량으로, 연대기적 서술 대신 개별 사례 중심의 분석을 시도했다. 그는 보어 전쟁의 교훈을 통해 정면 공격의 필요성과 수적 우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이전 저작들과 달리 야전포 지원의 필요성을 인정했으며, 보어 저격수들의 정확한 사격에 대한 대응책으로 위장 군복의 도입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1882년 발칸 전역 경험을 인용하며, 당시 짙은 녹색의 참모장교 제복이 적의 표적이 되었음을 상기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군대의 전통적인 화려한 색상의 제복을 예거(Jäger) 부대가 착용하던 회색 제복으로 교체할 것을 제안했다.

트리에스트 시기 동안 콘라트는 엄격한 군인이자 아버지로서 가정을 이끌었다. 그의 아들들은 모두 장교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장남 쿠르트는 학업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1902년 세 과목 낙제로 유급 위기에 처했을 때, 콘라트는 아들에게 침묵으로 실망감을 표현했다. 아들들에 대한 체벌은 하지 않았으나, 이러한 침묵이 더 큰 공포로 작용했다고 한다. 다행히 쿠르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미술 재능으로 위안을 얻었다. 둘째 헤르베르트는 승마에 재능을 보였고, 막내 에곤은 어머니의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아 피아노를 배웠다.

2.3.6. 참모총장이 되기까지

1903년 9월, 콘라트는 티롤 인스브루크에 주둔한 제8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이 사단은 오이겐 대공이 지휘하는 제14군단의 일부였으며, 헤르만 쾨베시 소장이 지휘하는 제15보병여단과 1905년부터 빅토어 단클 소장이 지휘한 제16보병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트리에스트와는 달리 거의 전적으로 독일계 주민들로 구성된 알프스 산악 도시 인스브루크는 인구가 약 4만 명에 불과했다.

이곳에는 14군단과 제8보병사단, 제15보병여단의 본부가 위치해 있었는데, 오이겐 대공이 최고 장교, 콘라트가 두 번째, 쾨베시 여단장이 세 번째였다. 쾨베시는 콘라트보다 먼저 티롤에서 복무하여 지역 사정에 밝았기에 그의 경험을 활용하며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트리에스트에서와 달리 최고위직이 아니었던 콘라트는 사교적 의무의 부담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콘라트는 티롤 지역을 시찰하며 이탈리아 민족주의 운동의 확산을 목격하게 되었다. 동맹이지만 언제든지 적으로 이탈할 수 있는 이탈리아에 대항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티롤 방어를 위해서 콘라트는 국경을 보안하기 위한 작전으로 산악 요새를 건설하고, 병력 증강을 건의, 황립 오스트리아 및 왕립 보헤미아 산악부대(K.k Gebirgstruppe)[46]를 창설하였다.

1904년, 티롤의 제8보병사단장으로서 콘라트는 12년 만의 첫 훈장인 레오폴트 훈장 기사작위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상오스트리아에서 열린 황제기동훈련에 콘라트의 제8보병사단이 참가하여 그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오픈카를 타고 저녁에 방문하여 콘라트와 참모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며, 다음날 춥고 험악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기동훈련을 참관한 뒤 콘라트의 부대에 대해 '인정의 말'을 전했다. 이는 단순한 격려를 넘어 이후 콘라트를 참모총장으로 발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처음 콘라트의 제8보병사단은 15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 제2카이저예거(Kaiserjäger)연대에서 각 4개 대대, 제14연대( 상오스트리아)와 제102연대( 보헤미아)에서 각 3개 대대, 제3카이저예거에서 1개 대대가 그것이었다. 민족 구성은 독일계가 54%, 이탈리아계가 24%, 체코계가 19%였다. 1904년부터 1906년 사이 부대는 20개 대대로 증강되었는데, 제3카이저예거연대의 나머지 대대들과 제2, 제12 보헤미아 야전예거대대가 추가되었고, 제102보병연대가 제88보병연대로 교체되는 등 변화가 있었다. 콘라트는 알펜페라인(Alpenverein)[47]에 가입하여 여가 시간에 등산을 하며 티롤 지역의 지형을 연구했다. 이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군사적 목적을 겸한 것이었으며, 은퇴할 때까지 이 협회 회원자격을 유지했다. 그의 노력으로 1906년에는 두 개의 란데스슈첸(Landesschützen) 연대가 알파인 부대로 지정되어 특수장비를 받게 되었고, 이탈리아와의 전쟁 가능성에 대비해 남티롤 요새 강화 계획도 추진했다.

이러한 군사적 성과 속에서, 1905년 초 콘라트의 부인 빌마가 위암 판정을 받아 수술을 받았고, 4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가족과 함께 인스브루크의 팔크슈트라세(Falkstrasse) 18번지로 이사한지 고작 1년이 지난 때였다. 빌마의 죽음은 콘라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이후 그의 성격은 크게 변화했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다윈주의적 세계관이 일상생활에까지 깊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스트레스로 인한 복통이 심해 위암을 의심했으나 군의관이자 빈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였던 알로이스 피크(Alois Pick) 박사의 진단 결과 '신경성 복통'으로 판명되었다.

이를 계기로 콘라트는 더욱 엄격한 생활 방식을 따르게 되어 커피와 차도 마시지 않고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는 음식만 섭취하는 등 철저한 자기 관리를 시작했다. 사별 후 몇 달 동안 콘라트는 일에 몰두하고자 했고, 기동훈련 준비가 다소간의 치유 효과가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 시기 가족도 크게 변화했는데, 맏아들 쿠르트는 1904년 가을 무렵에 비너노이슈타트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둘째 에르빈은 1905년에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셋째 헤르베르트는 여전히 아버지와 함께 지내며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장교단 내에서 부상한 소수의 젊은 장교들에게 콘라트는 늙어보이고 더 이상 첨단에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수의 헌신적인 추종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군 내에서 가장 "현대적인" 장군으로 남아있었고, 이런 점에서 그를 능가하는 고위 장교들, 특히 1905년 75세가 된 참모총장 포병대장과는 크게 대조를 이뤘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 군 총사령부에 파견되어 알렉세이 쿠로팟킨 장군 휘하에서 참관한 막시밀리안 치체리치 폰 버차니 중령은 콘라트보다 12살 어리고 기수는 13기나 차이나는 한참 후배였으나, 이후 콘라트의 전술 철학을 비판하는 주요 인물이 되었다.

그는 만주에서의 전장 현실에 기반한 전술이 35년이나 지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기반한 것보다 현대전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참호전, 야간 공격, 경기관총과 같은 기술적 혁신을 포함한 새로운 전장의 모습을 제시했다. 1908년 그의 저서 《전투(Die Schlacht)》가 출간되자 20여 년 전 콘라트가 그랬던 것처럼 젊은 장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콘라트는 참모총장으로서 이 책의 출간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치체리치의 전술 실험을 용인했다. 이는 자신의 견해와 다르더라도 군 내 토론을 위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콘라트는 만주에서 관찰한 것들이 자신의 견해를 입증한다고 보았다. 러일전쟁은 최초로 연속된 확장 전선에서 치러진 전쟁이었고, 이는 전통적인 측면 공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치체리치는 이를 바탕으로 보병의 정면 공격이 지배하는 미래 전쟁을 예측했다. 일본은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공격을 지속함으로써 승리했다. 양측이 최신 무기를 보유하고 전례 없는 화력을 퍼부었음에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보다 백병전으로 인한 사상자 비율이 두 배나 높았다는 점은 러시아 참호에 대한 일본군의 최후 공격에서 백병전이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치체리치도 콘라트처럼 여전히 "정신적 우월성", "공격 정신", "최초 전투의 중요성"을 믿었다. 콘라트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분석을 반영하듯, 치체리치는 러시아가 초기에 방어적 태세를 취한 것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콘라트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내 대표적인 혁신주의자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러일전쟁 치체리치 같은 도전자가 등장했지만, 콘라트의 인기와 영향력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1905년 황제기동훈련에서의 활약은 콘라트가 곧 제국의 군사 수장이 될 수 있음을 예고하는 듯했다. 제8보병사단이 2년 연속으로 황제기동훈련에 참가하는 이례적인 상황이었던 1905년 훈련은 남티롤의 논탈 계곡(Nontal)에서 실시되었다.

이 훈련에서는 남쪽에서 "적군"인 이탈리아군이 티롤로 공격해오는 상황을 가정했다. 콘라트의 사단은 처음 이틀 동안은 이탈리아 침략군을, 셋째 날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방어군을 연출했는데, 공격과 방어 양측 모두에서 콘라트는 공격적인 전술로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여기에는 콘라트 휘하에서 그를 능력 있게 보좌한 쾨베시 단클 소장의 지휘도 한 몫을 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참관자들은 특히 보병의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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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육군 원수 콘라트

장차 제국을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될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자신의 핵심 계층을 만들기 위해 열중이었다. 1906년, 그는 이를 위한 대대적인 군부 개편을 단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콘라트는 제격의 인사였다. 콘라트는 곧바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그림자 내각'[48]의 일원이 되었다. 현대적인 전투 훈련 방식으로 제국군을 개혁하려는 콘라트를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눈여겨보았고, 그를 참모총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프리드리히 폰 벡 장군의 해임이 필요했다. 은 참모총장이 되기 전 20년 이상 황제의 군사비서실장을 지내며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매년 여름 휴가 때는 함께 사냥을 할 정도로 황제에게 큰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참모총장 교체 요구에만 4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마침내 이 해임되고 그해 10월 말, 콘라트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제안으로 참모총장 후보로 물망에 오르게 되었다. 이는 콘라트에게는 예상치 못한,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그는 오히려 을 보좌하면서 경험을 쌓아놓은 전략과 병참 전문가 오스카르 포티오레크가 더 명백한 선택이 될 것이라 보았고, 실제로 황제에게 그를 후임자로 추천했다.[49]

그러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체제의 연속성을 피하고 군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포티오레크 대신 콘라트를 선택했다.[50] 당시 인스브루크의 제8보병사단장이었던 콘라트는 오히려 이 보직을 계속 유지하기를 희망했으며, 나중에는 오이겐 대공의 뒤를 이어 14군단장 자리를 희망했었다. 그래서 자신의 전략가로서의 경험 부족을 이유로 제안을 사양했으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강력한 추천으로 이미 내정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군인으로서의 의무감까지 언급하면서 간곡하게 호소하는 등 끈질긴 부탁을 하자 결국 콘라트는 내키지 않음에도 이를 수락하고 말았다.

2.3.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참모총장

1906년 11월 18일,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승인을 받으며 콘라트는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의 호이마르크트(Heumarkt) 7번지에 정착했고, 이제 육군, 해군 및 예비군의 전시 배치에 대한 작전상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1914년까지 군부에서 그의 명목상 상관은 오직 페르디난트 대공뿐이었고 그의 사후에는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대공만이 그의 상관으로서 존재했다.

이러한 권한을 가진 콘라트는 과학적 유물론에 기반한 현대주의자로서, 군사 개혁과 현대화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운동가였다. 삶을 "끊임없는 생존 투쟁"으로 보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을 가진 그는 공격만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어 형태라고 믿었다. 그는 "만약 신이 있다면"이라는 단서를 달 정도로 종교에 회의적이었고, 기독교의 가르침이 군인의 의무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심지어 참모총장 시절에는 점성술에도 관심을 보여 최소한 한 번의 상세한 점성술 해독을 의뢰했는데, 1911년 해임과 1925년 사망이라는 예언을 받았다.

그의 이념을 바탕으로 참모총장으로서 그의 권한은 점차 확대되었다. 1908년부터는 외무장관과 직접 연락할 수 있게 되었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국방장관들, 해외 주재 무관들과도 직접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전쟁성으로부터 참모본부의 실질적 독립을 이루었다. 다만 콘라트는 프란츠 폰 쇠나이히(Franz Xaver von Schönaich) 전쟁장관과는 군사 예산과 신병 모집 문제를 두고, 맥스 폰 벡(Max Wladimir von Beck) 오스트리아 수상과는 헝가리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 게다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는 매주 면담 기회가 있었으나 과 달리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고, 군사 고문실 경험은 커녕 황제의 사냥 초대도 받지 못했다. 특히 외교 문제에 대한 그의 잦은 발언은 황제와 외무장관 모두의 반감을 샀고, 그의 성향상 군사 계획을 내각 황실에 상세히 공유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

권한 확대와 더불어 콘라트는 즉시 군 개혁에 착수했다. 1907년에는 기존의 파란색 제복을 산악전에 적합한 회색(pike grey) 제복으로 교체했다. 기병연대는 처음에 이를 거부했으나, 대신 파괴공작 훈련, 전신대, 기관총 도입을 수용했다. 다만 많은 후비군과 민병대는 1914년에도 여전히 파란 제복을 입고 참전했다. 전쟁대학의 교육과정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고 실용적인 과목을 강화했다. 알프레트 크라우스 소장이 교장을 맡았으며, 그는 콘라트에게 "아첨꾼들과 알랑쇠들"을 걸러내도록 지시를 받았다.[51] 참모부 내에서는 포티오레크를 지지하는 파벌이 존재했으며, 이후 콘라트는 하인리히 폰 엘리아고(Heinrich Kraus von Elislago)의 후임으로 요제프 메츠거를 작전국장에 발탁했다. 또한 입학시험 관리를 위한 교육국(Instruktionsburo)과 동원계획 부담 경감을 위한 병참국(Etappenburo)을 신설했다.

개혁의 일환으로 콘라트는 기존의 형식적인 황제기동훈련도 실전적 훈련으로 개편했는데, 미리 짜여진 시나리오를 없애고 최소 3일 이상 연속된 실전적 전투를 시뮬레이션하도록 했다. 심판들에게는 실제 전장의 화력 영향을 과소평가하도록 지시했고, 속도를 너무 강조해서 포병 지원이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훈련 중 병사들이 종종 사망했으나 콘라트는 사과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909년 브륀 훈련을 마지막으로 참관을 중단했는데, 이는 콘라트가 "황제의 군대를 빼앗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의 군사교리는 러일전쟁 참관인이었던 치체리치 중령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치체리치는 1908년 발간한 저서에서 참호전 야간공격, 경기관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콘라트의 전술론과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이와 달리 콘라트의 전투 교리는 기동력이 잘 훈련된 보병의 중요성과 모험적이며 항상 공격적인 작전 개념을 강조했다. 그는 단 한 번의 대규모 전술 기동을 통해 신속하고 전면적인 측면 공격으로 적을 패배시켜 몇 주 만에 평화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강점은 독창성, 결단력, 사명감과 더불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능력이었다. 콘라트의 부관들이 매일 그에게 보고를 해야 할 만큼 부하들과는 업무 면에서 함께 부지런했지만, 정작 작전을 구상할 때는 부관들과 함께 구상하기보다 스스로 연구하는 것을 선호했다.[52]

그러나 참모총장으로서 그는 전략가보다는 전술가로서의 전문성을 보였는데, 특히 철도를 이용한 동원계획에서는 경험 부족을 드러냈다. 그가 이끄는 참모부에는 독일군 에리히 루덴도르프 같은 철도 전문가가 없었다. 그 결과 독일군이 시간당 30킬로미터로 계산했던 군사열차 속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복선에서 18킬로미터, 단선에서 11킬로미터로 잡았고, 전략적 예비대인 B-Staffel의 신속한 재배치 계획도 철도 전문가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군사력 재편성과 관련해 1909년에는 국경 방어 체계를 개편하여 군대를 3개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주력군(A-Staffel)은 제1, 제2, 제3, 제5, 제6, 제10, 제11, 제12, 제14 군단으로 구성되어 총 28개 보병사단과 10개 기병사단을 보유했고, 예비군(B-Staffel)은 제4, 제7, 제8, 제9 군단으로 구성되어 총 12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사단을 보유했다. 그리고 발칸방어군(Minimalgruppe Balkan)은 제13, 제15, 제16 군단으로 구성되어 총 8개 보병사단을 보유했다. 이는 향후 전쟁 계획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군사력 재편 작업을 진행하던 1909년, 콘라트가 트란실바니아에서 참모순시를 하다가 루마니아 카롤 1세를 만났는데, 카롤 세르비아에 대항해 불가리아와 공동전선을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독일과의 관계에서는 1907년 5월 빌헬름 2세와의 첫 만남에서 좋은 인상을 남겼고, 1909년 3월에는 소 몰트케와의 서신교환을 통해 러시아 전선에 대한 독일의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다만 프랑스- 러시아 동맹과 달리 구체적인 군사협약은 없었으며, 독일의 슐리펜 계획 세부사항[53]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변국들의 팽창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이탈리아 왕국 트렌티노 발칸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노렸고, 세르비아 보스니아를,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 또한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반도에서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

이런 가운데 콘라트와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 외무장관의 갈등은 1908년 보스니아 합병 위기를 계기로 깊어졌다. 에렌탈 러시아와의 외교적 타협을 선호한 반면, 콘라트는 러시아 일본과의 전쟁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시점을 이용해 세르비아에 대한 예방전쟁을 주장했다. 비록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이탈리아를 합친 것보다 더 큰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으나, 제국 내 슬라브계 민족들과 헝가리 지도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특히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당시 콘라트의 이탈리아 예방전쟁 주장은 결정적인 갈등을 불러왔다. 보다못한 에렌탈의 건의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11월 30일 콘라트를 직접 만나 해임을 통보했다. 황제가 '우리는 친구로서 헤어진다'고 했으나, 콘라트는 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의 관계도 악화일로를 걸었다. 군대의 역할을 놓고 두 사람의 견해차는 뚜렷했다. 대공이 군을 국내 질서 유지의 도구로 본 반면, 콘라트는 전쟁 수행 능력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 평화를 중시한 대공에게 호전적인 콘라트는 처음부터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여기에 종교적 차이도 한몫했다. 대공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사냥을 즐겼으나, 콘라트는 무신론에 가까웠으며 사냥을 혐오했다.[54]

해임과 동시에 육군총감(Armeeinspektor)으로 임명된 콘라트는 1912년 폰 에렌탈 백혈병으로 사망하고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백작이 외무장관이 되면서 참모총장직에 복귀했다. 발칸 전쟁 발발 후에는 이탈리아 세르비아의 팽창주의적 행보에 맞서 예방전쟁을 주장하며, 러시아, 세르비아, 이탈리아에 대한 상세한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특히 1913년과 1914년 발칸 전쟁으로 세르비아의 영토와 군사력이 증가하자, 세르비아 침공을 25차례나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위협에 대비해 콘라트는 동부전선에서의 두 가지 전쟁 계획을 마련했다. 러시아가 중립을 지킬 경우 제국의 주력군을 세르비아에 집중하고, 러시아가 참전할 경우 예비대를 미리 러시아 전선에 보내는 것이었다.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백작, 카를 폰 슈튀르크 제국수상, 재무장관 레온 폰 빌린스키, 전쟁장관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남작 등이 그의 계획을 지지했다. 이에 대해 보헤미아 정치인이자 법학자이며 콘라트의 친구인 요제프 레들리히(Josef Redlich, 1869-1936)는 훗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콘라트의 삶과 세계, 국가에 대한 판단은 오스트리아 군 고위 참모장교들의 평균적인 견해와 거의 다름없었다"고 평가했다.

2.3.8. 사라예보 사건

제국의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아내와 함께 암살당했다. 사건 당시 아그람역에 있던 콘라트는 레멘 보병대장으로부터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 소식을 전달받았다. 콘라트는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의 장례식 다음날인 7월 5일, 쇤브룬 궁전에 방문하여 황실에 알현하였다. 콘라트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조카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사라예보의 보안이 무너진 것에 대해서 오스카르 포티오레크에게 분노할 거라 예상했으나 정작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독일 제국을 지원할 것인지에 대해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는 독일의 의중과 지원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헝가리의 외무성 보좌관 알렉산더 폰 호요스 백작(Alexander Graf von Hoyos, 1876-1937)을 베를린에 보냈고, 베를린에서 돌아온 호요스는 7월 7일까지 으로 돌아와 제국의회에서 브리핑을 했다. 호요스를 비롯해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외무장관과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전쟁장관, 레온 폰 빌린스키 재무장관, 카를 폰 슈튀르크 수상과 티서 이슈트반 수상이 제국의회에 참석했고 군부 쪽 인사로는 육군을 대표하는 콘라트, 해군 대표로는 전쟁성 해군부장 안톤 하우스 대장을 대신해 카를 카일러 폰 칼텐펠스(Karl Kailer von Kaltenfels, 1862-1917) 해군소장이 소집되었다. 콘라트와 카일러는 가능한 군사 작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호출되었기에 그 외에는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다.

콘라트의 전쟁 의지는 발칸 전쟁때부터 강경파의 일원이었던 슈튀르크 총리와 빌린스키에게 진즉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전쟁 여론은 시간 문제였다. 더불어 베르히톨트도 찬동하고 있었고 세르비아 왕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콘라트는 황위 계승자가 암살 된 것에 대한 대응으로 세르비아에 대한 즉각적인 전쟁을 원하였다. 무력을 써서라도 당장 세르비아를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료 장군이었던 크로바틴은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오직 티서 수상만이 망설이고 있었다.
이것 광신자 1인의 범죄가 아니다. 이 기회를 우리가 놓친다면 우리 제국 남부 슬라브인, 체코인[55], 러시아인,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들의 야망의 폭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쟁을 해야만 한다.
사라예보 사건 발발 질후인 다음날, 콘라트는 제국의회에서 이것을 구실로 전쟁을 주장하였다. 콘라트는 세르비아 왕국의 몰락을 진정 바라고 있었으며, 세르비아를 몹시 싫어했다. 이는 세르비아가 발칸반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비공식적 통치권을 의당 존중하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 내의 반체제 세르비아인들을 유인하는 자석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동안 유화 노선을 채택해 온 페르디난트 대공마저 사라졌으니, 콘라트의 전쟁 불가피론은 제국의회를 휘어잡았다.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트 대공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보스니아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포병대장도 강경파에 합류했다. 전쟁론자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안 그래도 빛이 바래가는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되찾고 세르비아의 싹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쟁에 회의적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정확한 수사 후에 행동할 것을 요구하였고, 베르히톨트 또한 전쟁 불가피성을 인식하면서도 순서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일단 세르비아에 반오스트리아 조직을 해체하고 피격사건의 책임자를 축출하기를 먼저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전포고는 그 다음이었다.

1914년 7월 당시 유럽의 다른 참모총장들과는 달리 콘라트는 내각 각료들에게 자신의 전쟁 계획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했다. 콘라트는 제국과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러시아 제국이 개입할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각료들은 1913년 5월과 10월의 위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놀라운 결의를 보였다. 슈튀르크 빌린스키는 국내 사정상 압도적인 전력을 과감히 사용하는 것 이외의 사항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조치를 장기적으로 애매하게 했다가는 제국 경제에 원치 않는 혼란을 가져올 것이며,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가 분쇄되지 않는 한 유지하기 힘들것이라고 봤다.

호요스가 베를린으로 떠났던 2주간의 기간 동안 당시 많은 부대들은 콘라트가 농촌 지역의 군대가 연례 기동 전에 수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특별 여름 휴가를 미리 승인해 준 상태였었는데, 다시 곧바로 복귀를 명령하면 수확에 영향을 미칠것이고 제국이 세르비아와 전쟁을 할 의도가 있다는 의혹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7월 22일, 23일은 에서 영국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하기 위해 고려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날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실의 단호한 결심은 전쟁의 촉구가 아닌 지연이 되어버렸다.

콘라트는 추수 휴가 보고서를 통해서 확인한 결과 16개 군단 중 7개 군단인 제3군단( 그라츠, 제4군단( 부다페스트), 제4군단( 포조니), 제6군단( 커셔), 제7군단( 테메슈바르, 제13군단( 아그람), 제14군단( 인스브루크)은 즉각 동원 명령에 응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추수가 일찍 끝나지 않는 한 세르비아에 대한 최후 통첩은 본래 날짜보다 며칠 이상 앞서서 보낼 수가 없던 것이다.[56]

7월 7일, 회의에서 콘라트는 각료들을 위한 전쟁 계획을 검토했다. 다시, 그는 계획 B(세르비아에 대한 발칸 전쟁)에 집중했고 계획 R(러시아)을 단순한 우발 사태로 취급했다. 7월 8일 콘라트는 베르히톨트, 호요스 및 기타 주요 외무성 관리들을 만나 베르히톨트로부터 7월 22일 이전 "추수 후에만 최후통첩을 전달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면서 베르히톨트는 콘라트에게 주변국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크로바틴과 함께 휴가를 떠날 것을 제안했다.

휴가에서 돌아온 콘라트는 7월 19일, 베르히톨트의 집에서 극비리에 모임을 가졌다. 카일러 해군소장과 함께 그는 유명한 10개 조항의 초안을 작성할 때 제국의회 구성원에 합류했다. 7월 23일, 최후 통첩이 발송되기 몇 시간 전, 콘라트는 베르히톨트를 만나 일단 동원하면 돌이킬 수 없다며 그들의 이전 이야기를 상기시켰다. 베르히톨트는 콘라트에게 동원 중 만약 세르비아가 항복한다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자 콘라트는 세르비아한테 제국이 동원을 일으키게 만든 책임을 비용으로 물게 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만약 동맹을 배신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의견이 나왔을 때 콘라트는 이탈리아를 두려워해서는 세르비아를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 참모총장은 알베르토 폴리오 중장(Alberto Pollio, 1852-1914)으로 그는 평소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참모총장과 콘라트와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폴리오는 콘라트가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유일한 이탈리아 장군이었다. 그랬기에 콘라트는 이탈리아를 동맹으로 생각했으나 폴리오가 사라예보 사건 3일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이탈리아의 동맹은 점차 흔들리게 되었다. 이미 낙관론자들을 제외하면 제국 내부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탈리아가 삼국 동맹에 충실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7월 25일, 세르비아가 제국의 최후 통첩을 거부한 날, 콘라트는 세르비아 왕국군의 참모총장 라도미르 푸트니크 원수(Радомир Путник / Radomir Putnik)[57]의 운명에 대해 논란이 되는 결정을 내렸다. 푸트니크는 당일 오스트리아의 바트 글리헨베르크에 휴가를 와 있었는데, 자신의 나라가 곧 그가 휴가를 보내고 있는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제국의회가 베오그라드에 최후 통첩을 보낸 후 푸트니크는 휴가를 끝내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부다페스트에서 기차를 갈아타던 중 경찰에 체포됐다. 다음날 베르히톨트는 그의 처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 호요스를 콘라트에게 보냈는데 콘라트는 푸트니크를 곧바로 풀어주기 결정한 것이었다. 베르히톨트는 푸트니크에게 베오그라드행 특별 열차를 제공해주었다. 이를 두고 요제프 레들리히조차도 이러한 콘라트의 행보를 "거짓된 기사도"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콘라트의 결정은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과 일치했다.

콘라트는 개인적인 요인에 따라 소 몰트케와 폴리오를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결정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군사 지도자들 사이의 경쟁으로 보지 않았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적 지도자의 자질이나 능력을 자신의 전략 요소로 고려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가 가진 사회진화론적 사고방식을 통해 풀어보자면 콘라트에게 전쟁은 보다 더 광범위한 세력들의 충돌로 이루어지는 것 뿐, 그 세력에 속한 개인, 심지어 전시 참모총장으로서 자신도 포함해서 다소 미미한 역할을 수행 한다는 걸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콘라트는 전쟁을 빨리 시작하고 싶어 안달복달했었다. 7월 25일 저녁, 마침내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발칸 전쟁을 위한 계획 B의 실행을 승인했다. 그러나 황제의 서명을 얻어낸 것이 무색하게도, 막상 전쟁이 터지려고 하는 시점에서는 오헝제국군이 전쟁을 치를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콘라트는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베르히톨트가 콘라트에게 선전포고를 언제 해야 될지 질문했을 때, 콘라트는 동원이 완료되고, 군사 작전이 준비가 되는 8월 12일에 선전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국군은 2주 정도 지나야 작전할 준비가 끝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베르히톨트는 외교 상황의 급박함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제국군은 전면전을 대비한 동원령이 발령될 경우 16만이었던 병력을 최대 330만까지 증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국력의 쇠퇴에 따른 재정 부담으로 인해 국방비를 지속적으로 절감해 왔기에 단지 병력만 늘린다고 전력이 대폭 증가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장비 수준도 높지 않았다. 그나마 당시 열강들의 제국의 제식 소총 열풍에 덩달아 만든 만리허 소총만이 자랑할 만한 무기였다. 전쟁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방비는 독일이나 러시아의 25퍼센트 수준 밖에 되지 않아 당연히 질적 수준이 뒤질 수밖에 없었다. 불과 10년 전 러일전쟁에서 망신을 당하고 덩치만 큰 약체라고 조롱받던 러시아조차 오스트리아를 만만하게 볼 정도였다. 오스트리아도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러시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천명했을 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었으므로 까딱하다간 러시아와의 전면전으로까지 번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강을 자부하는 독일이 도움을 주기로 했다는 점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 개시 직전에 16개 군단중에 일단 애초에 계획했던 병력의 60퍼센트 수준인 200만을 7개 군단으로 서둘러 편성할 수 있었다. 콘라트는 세르비아 침공에 50만, 북동쪽에서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 100만, 그리고 중앙에 예비대로 50만을 할당했다. 우선 목표인 세르비아에 집중하지 못한 모양새 같았지만, 50만 정도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고 오히려 작전의 성패는 러시아의 움직임을 얼마나 막을 수 있냐에 달려 있다고 낙관했다. 하지만 문제는 12개 언어[58]로 공표된 포고문에서 알 수 있듯이 병력의 60퍼센트 정도가 슬라브인을 포함한 소수민족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이 세르비아나 러시아와 싸울 때 얼마나 충성심을 발휘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결국 실제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출신의 병력인데, 이들도 평소에 제국의 지휘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각각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정부의 통제 하에 있어서 전투력이 미지수였다.[59][60]

팔켄하인의 속셈은 일단 서부전선을 정리한 후 80개 사단을 모두 동부전선에 투입해서 러시아 제국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줌으로써 평화를 애걸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반면 콘라트는 러시아의 병력 동원 속도가 느리다는 점을 감안할 때 8월 말까지는 제국군이 러시아 제국군에 대해서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 사이에 러시아령 폴란드(바르샤바 돌출부)의 남쪽 측면을 최우선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1][62][63]

콘라트는 가능한 한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세르비아에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하기를 원했다. 북동쪽 국경에서에 러시아군 마주하기 전에 신속히 세르비아를 침공해서 항복을 받아내야 했다. 여기서 독일이 러시아를 압박만 해준다면 러시아는 세르비아에 개입하기 어려울것이고 제국이 손쉽게 세르비아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7월 30일, 러시아 제국은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는 독일 제국의 슐리펜 계획의 속행을 의미하였다. 제국의회는 세르비아 침공이 러시아와의 전쟁과 유럽에서의 전면전을 의미할지라도 지지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확실해지자 콘라트는 지난 며칠간.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플랜 B는 취소되어야 했고 플랜 R이 실시되면서 세르비아에 대한 공세는 제한적이 되었다. 문제는 콘라트가 절반의 병력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64]

7월 31일, 러시아와 세르비아에 대한 양면 전쟁을 예상하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나머지 8개 군단(AStaffel)을 활성화하는 총동원령을 내렸고, 황제의 명령으로 황립 및 왕립 군사령부와 최고사령부(Armeeoberkommando, 이하 A.O.K.)가 개설되었다. AOK의 총사령관에는 콘라트와 프리드리히 대공의 사이가 좋은 점을 고려하여 프리드리히 대공이 임명되었다. 본부는 프리드리히 대공의 영지인 테셴에 자리를 잡았다. 다만 프리드리히 대공은 명목상의 지휘관이었고 실질적인 지휘관은 참모총장인 콘라트였다.[65] 제국의회는 해산되었고, 전시동안 오스트리아 정치인들은 군법에 따라야 했고, 육군총사령부의 권한은 막강해졌다. 콘라트는 사실상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티서가 가능한 한 많은 평시 특권을 유지하면서 정부 기능을 유지했던 헝가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스니아에는 총독인 포티오레크가 있었기 때문에 콘라트의 권한이 적게 닿았지만 명목상 AOK의 통제 하에 있을 뿐, 나머지 전시 자원동원은 콘라트의 지시에 따라 진행되었다.

2.3.9. 제1차 세계 대전

2.3.9.1. 동부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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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콘라트 브리핑하던 모습[66]

육군총사령부의 총괄 지휘관인 콘라트는 6개의 을 편성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콘라트는 동부전선에 있는 프셰미실 요새로 출발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전에 미리 가족들과 마지막 휴가를 떠났었다. 그 후, 폐질환으로 요양 중인 장남 쿠르트를 제외한 콘라트의 아들들은 장교로서 일찍이 전선으로 이동했다. 차남 에르빈은 제10기병연대로, 막내 에곤은 18살이었는데,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로 돌아가기 보다 셋째 형인 헤르베르트가 복무 중인 제15기병연대에 지원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67] 89세였던 노모 바바라의 집을 방문하여 출발 전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8월 15일 아침, 콘라트는 전선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황제와의 접견을 하기 위해서 쇤브룬 궁전을 찾아갔다. 모임이 끝날 무렵 노쇠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콘라트의 손을 잡고 감정이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So Gott will, wird alles gut gehen, aber selbst wenn es schlecht gehen sollte, werde ich durchhalten."

"신의 뜻대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만, 설령 잘못되더라도, 나는 끝까지 해낼 것입니다."

8월 15일, 콘라트는 프리드리히 대공 카를 대공을 대동하여 나머지 육군 총사령부의 참모들과 함께 특별 열차를 타고 이틀 만에 프셰미실 요새에 도착하였다.
2.3.9.2. 세르비아 침공
7월 29일 다음 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군함들이 도나우강을 타고 올라와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포격했고,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포병대장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2군, 제4군, 제6군은 사바강과 드리나강을 도하할 준비를 했다. 당시 세르비아 왕국군은 45만 명의 병력과 엉성한 훈련을 받은 몬테네그로인 보조병들만을 갖추고 있었다. 세르비아 왕국군 총사령관 라도미르 푸트니크 원수는 압도적인 적을 맞아 세르비아 병사들의 목숨을 최대한 비싼 값에 팔 각오를 다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불가리아 왕국에 이르는 450마일에 달하는 국경선을 지켜야 했던 푸트니크는 휘하의 3개 군을 세르비아 중부 지역에 배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불가리아 왕국 어느 쪽이 침공해와도 대처할 수 있도록 병력을 배치했다. 푸트니크는 소수의 병력으로 주요 하천 방어선을 지키고 있다가 오헝군의 주요 도하 지점을 포착한 후 자신이 선택한 장소에 전략을 집중해 제국군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짰다. 푸트니크가 정확하게 오헝군의 주공 방향을 예측한 덕분에 오헝 제국군이 실제로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해왔을 때 세르비아군은 이를 맞아 싸울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반면, 포티오레크의 전략은 미적지근하기 그지없었고,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그의 병사들 중 상당수는 동포 슬라브인 세르비아군과 싸울 의욕도 없었다. 당시 군기가 해이해져 있던 제국군은 세르비아 민간인들을 상대로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콘라트는 이 지역에 제2군도 투입할 생각이었지만, 당시 제2군은 세르비아 공격을 위해 발칸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러시아 제국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시점에서 콘라트는 제2군이 세르비아 전선으로 빠짐으로써 갈리치아 일대가 취약해졌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7월 30일, 콘라트는 다시 제2군을 갈리치아로 되돌리라고 명령했지만, 철도 이용량의 폭주로 인해 제2군의 복귀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2군이 삼보르(Sambor) 동쪽의 방어선에 자리를 잡은 것은 8월 25일이 되어서였다.

8월 1일,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8월 6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마침내 양면전쟁을 공식화했는데, 전반적으로 전략적 상황은 콘라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암울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은 여전히 중립이었다. 레들리히는 8월 첫째 주에 콘라트가 확실히 절망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8월 4일 레들리히는 이를 회상할 때 에서 콘라트을 만났을 당시 콘라트의 상태가 차분하게 좋았다고 말했다. 동원은 콘라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진행되고 있었다. 펼쳐진 철도 문제는 실망스러웠지만 수백 대의 기관차가 하루마다 평균적으로 7,000명의 병력과 보급품을 전선으로 수송하고 있었다. 독일계, 헝가리계, 슬라브계 가릴것없이 남성은 황제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으로 앞다투어 입대를 하였고, 이는 진정으로 콘라트를 놀라게했다.

8월 12일, 세르비아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9일 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세르비아군은 자다르 전투에서 오헝 제국군을 공격개시선으로 밀어내버리면서 퇴각하는 오헝군을 쫓아 보스니아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오헝 제국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도 결의에 찬 세르비아군의 반격에 무질서하게 패주했다.

9월 7일, 포티오레크는 다시 한 번 세르비아군을 공격하여 너무 멀리 진출해 나온 세르비아군을 보스니아에서 축출하려고 했다. 세르비아군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세르비아군은 11월 29일, 어쩔 수 없이 수도 베오그라드까지 내주고 퇴각을 계속해야 했다. 그러나 12월 3일, 질서정연하게 남서부 방면으로의 철수작전을 끝마친 푸트니크는 콜루바라강에서 반격에 나섰다. 이때까지도 페타르 1세는 소총과 50발의 실탄을 지니고 최전선에 머물러 있었다. 독기 어린 세르비아군의 반격에 제국군은 다시 한 번 무질서하게 패주했다. 12월 15일 무렵, 세르비아군 정찰대가 다시 수도 베오그라드로 진입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세 번째 침공 역시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콜루바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27만 명에 달하는 피해를 입고 133문의 야포까지 잃었으며 거듭된 졸전의 책임자였던 포티오레크는 결국 오이겐 대공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제국군은 전황이 급박해진 동부전선에 주의를 돌리면서 세르비아 전선은 소강상태를 맞게 되었다. 1915년 여름 동안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는 국지적인 소규모 교전 이상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큰 문제가 동부전선에 도사리고 있었다.
2.3.9.3. 갈리치아 전투, 바르샤바 전투
2.3.9.3.1. 크라시니크 전투
1914년 8월 23일, 동부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사이의 첫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콘라트의 전략은 명확했다. 러시아 제국군 루블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방향으로 밀어내고, 이를 독일 제국군의 공세와 연계하여 폴란드의 전선을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콘라트의 계획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사이의 첫 번째 대규모 교전인 크라시니크(Kraśnik) 전투에서 빅토어 단클 기병대장을 위시한 제1군은 10.5개 보병사단과 2개 기병사단의 강력한 전력으로 러시아 제4군을 상대했다. 루블린 방향으로 적과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적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쪽으로 밀어내며, 동시에 독일 제국군의 시들체(Siedlce) 방향 작전과 연계하여 폴란드 왕국의 불리한 전선 돌출부를 바로잡아야 했다. 제1군은 3개의 주요 공격집단으로 편성되었는데, 좌익에는 카를 폰 키르히바흐의 제1군단, 중앙에는 파울 푸할로 폰 브를로크의 제5군단, 우익에는 제10군단이 배치되었으며 각 군단은 2-3개의 보병사단과 1개의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산강 선에 집중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1군은 8월 20일부터 갈리치아 북부 국경을 넘어 전진했다. 오헝군의 공세에서 좌익은 비스와강 동안으로 보호받았고, 서안의 산도미에시에서는 하인리히 쿠머 폰 팔켄펠트 기병대장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집단군이 동시에 전진하며 서쪽에서 지원해야 했다. 동시에 동쪽 측면에서는 모리츠 아우펜베르크을 위시한 제4군이 빅토어 단클의 진격에 동반하여 공세를 지원했다.

전투 시작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러시아 제국군에 비해 수적 우위와 더 나은 전략적 출발점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1군은 10.5개 보병사단과 2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던 반면, 러시아 제4군은 6.5개 보병사단과 3.5개 기병사단에 불과했고, 깊이 있는 방어진지도 구축하지 못한 상태였다. 콘라트의 지시에 따라, 쿠머 집단군을 비스와강 서안에서 신속히 이동시켜 공격 작전을 강화했는데, 이는 러시아 남서부 전선 참모총장 미하일 알렉세예프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8월 22일부터 23일까지의 개전 단계에서 제1군은 3개 방향에서 동시 공격을 감행했다. 좌익에서는 안나폴(Annopol) 방향으로, 중앙에서는 야누프-크라시니크(Janów-Kraśnik) 도로축선을 따라, 우익에서는 프라멘카 방향으로 진격했다. 단클 장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루블린 방향으로의 돌파를 시도했다. 러시아군 참모총장 미하일 알렉세예프 장군은 더 뒤에 있던 파벨 아다모비치 폰 플레흐베(Pavel Adamovich von Plehve)의 제5군을 제4군의 지원군으로 보냈으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8월 23일에서 24일까지의 돌파 단계에서는 중앙의 제5군단이 주공을 맡아 전면 공격을 감행했다. 제33사단이 정면을 돌파하고 제14사단이 측면을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좌익에서는 카를 폰 키르히바흐의 지휘 아래 아돌프 폰 브루더만의 제1군단 제3기병사단이 제5사단, 제46사단과 함께 안나폴 동쪽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중앙에서는 파울 푸할로 폰 브를로크의 제5군단이 야누프(Janów)를 지나 비스트르지스타(Bystrzyca) 강을 따라 북진, 러시아의 제14군단과 제16군단을 격퇴했다. 또한 단클의 우익에서는 제10군단이 8월 22일 제2사단, 제24사단, 제45사단을 이끌고 전투 없이 타네프(Tanew) 강을 건너 북쪽의 비엘고라이로 향했고, 러시아 근위군단과의 전투에서 폴리흐나-투로빈(Polichna-Turbin) 선에서 비아와(Biała)강까지 도달했다. 8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5사단과 제46사단이 크라시니크에 진입했고, 비스와강 쪽으로의 서방 엄호는 이제 제12사단이 맡았다. 24일과 25일, 제1군은 공격을 성공적으로 계속하여 좌익을 포위를 위해 전진시켰고, 패배한 우익을 적시에 후츠바(Huczwa) 강 뒤로 철수시켰다. 8월 25일부터 27일까지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전선 재정비와 포위망 형성을 위한 좌익 기동, 우익의 전략적 후퇴, 그리고 전과 확대를 위한 추격작전이 전개되었다.

크라시니크 전투는 서부전선을 지배하게 될 참호전과도 다르고, 대개 더 큰 규모의 병력이 투입되는 동부전선의 전투 양상과도 달랐다. 어느 군대도 장기 방어를 위한 진지를 구축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참호를 파지 않았다. 대신 전투는 더 기동성 있게 진행되었고, 양측이 총 5.5개 기병사단을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기병 전투가 포함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성공으로 북부 갈리치아로의 러시아 침공은 일단 저지되었고, 열세에 있던 러시아군 사령관 살차(Salza) 남작은 전투 중에 에베르트(Evert) 장군으로 교체되었다. 크라시니크 전투는 렘베르크 전투와 연관된 갈리치아 대전선을 따라 일련의 추가 충돌을 촉발했다. 8월 27일에 전투가 다시 격화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1군단과 제5군단은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8월 30일까지 빅토어 단클은 요제푸프(Józefów)에서 비스와강을 건넌 레무스 폰 보이르슈 지휘 하의 슐레지엔 향토방위군단으로 증강될 수 있었다.
2.3.9.3.2. 코마루프 전투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크라시니크 전투 사흘 뒤 벌어진 코마루프(Komarów) 전투에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고, 이 전투는 브루더만에게 있어서 재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우펜베르크의 제4군이 파벨 아다모비치 폰 플레흐베(Pavel Adamovich von Plehve) 지휘 하의 러시아 제국군 제5군을 맞아 헬름 방향으로의 돌파를 시도했으나, 루돌프 폰 브루더만의 제3군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의 선봉대가 공격해올 때까지 그 뒤에 러시아 본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이날 브루더만은 군단 간의 작전 조율이나 포병 사격 계획도 없이 2개 보병 군단으로 무모한 반격을 시도했다가 오히려 큰 타격을 입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제3군은 러시아의 주력이 북쪽에서 제1군과 제4군에 의해 저지될 것이라 믿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으나, 러시아군은 오히려 제3군 정면에 주력을 집중했다. 포모르자니 지역의 제12군단은 삼면에서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병력에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8월 27일, 콘라트는 초기 공세 계획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제3군에게 그닐라 리파(Gnila Lipa)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사실상의 후퇴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군의 추격이 시작되자 콘라트는 제2군의 제7군단 소속 제34사단을 그닐라 리파에 급파했으나, 증원부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쾨베시의 제12군단은 브제자니(Brzezany)에서 러시아 제8군에게 대패했고, 간신히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의 포위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행히도 제4군은 선전했다. 이전 전투로 이미 약화된 플레베의 우익을 상대로 1914년 9월 1일까지 전술적 승리를 거두며 다수의 포로를 획득했다. 그러나 러시아군 전체를 포위하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8월 25일부터 제4군은 세 개 군단( 셰무아의 제2군단, 보로예비치의 제6군단, 프리델의 제9군단)으로 자모시치-토마쇼프 선을 향해 진격했고, 제17군단이 제6군단 뒤를 따랐다. 우익에서는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의 제14군단이 라바-루스카에서 북진을 시도했다. 동쪽으로의 우익을 비트만 중장의 기병군단이 엄호했고, 이들은 렘베르크 지역을 동쪽으로 러시아 제3군의 전진에 대비해 방어하던 제3군 사령관인 루돌프 폰 브루더만과 연락을 유지했다. 전투 초기에 러시아 제국군 제5군은 7.5개 사단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추가 6개 사단은 다음 날에야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8월 26일, 모리스 아우펜베르크의 좌익 공격이 시작되어 러시아군을 자모시치에서 격퇴했다. 크라시니크 전투와 코마루프 전투로 러시아 제5군에게 40%의 사상자를 내고 2만 명의 포로와 100문의 포를 노획하는 큰 승리를 거둔 것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첫 번째 주요 승리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승리는 오히려 불필요한 전투에서 거둔 승리였다. 이 승리로 단클 아우펜베르크는 각각 "크라시니크의 단클"과 "코마루프의 아우펜베르크"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단클은 콘라트의 오른팔이었고, 아우펜베르크는 콘라트의 오랜 친구였기 때문에 승리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단클의 제1군은 10월 이반고로드 전투에서 패배했고, 11월 말에는 니다(Nida)강과 필리차(Pilica)강 뒤 크라쿠프 북부 전초기지까지 밀려나고 말았다.[68]

중앙의 제6군단은 타르나바트카에서 러시아 제19군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8월 27일, 새로운 러시아군의 개입이 시작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4군의 우익이 위협받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6군단과 제17군단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8월 28일, 좌익에서 제25사단이 자모시치를 점령했지만, 중앙에서 제15사단이 티쇼프체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에 패배했다.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전투가 계속되었고, 양측 모두 포위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9월 1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술적 승리가 완성되었고 러시아군은 부크강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그닐라-리파 전투에서의 제3군 패배로 이 승리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군은 26,000명의 손실(포로 10,000명 포함)과 156문의 포를 잃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도 40,000명의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승리였지만, 동시에 발생한 그니라 리파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전체적인 전황은 러시아에 유리하게 변화했다. 이렇게 크라시니크 전투와 코마루프 전투 등, 오헝이 승리한 전투도 더러 있었고 패배한 전투도 많았지만 현대 군사 문헌은 1914년 당시의 오헝군의 동부전선을 갈리치아 전투라는 명칭으로 통합하고 있는 실정이다.
2.3.9.3.3. 라바-루스카 전투 (1914년 9월 3일)
9월 1일, 갈리치아 전선의 상황은 급변했다. 렘베르크로 후퇴하는 군대를 지켜본 콘라트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베레시차(Wereszyca) 방어선에서 군대를 재편성하여 반격을 시도하기로 한 것이다. 코마루프 전투의 전술적인 승리로 북부 전선의 러시아군이 충분히 약화되었다고 판단한 콘라트는 토마쇼프(Tomášov) 근처에서 제4군 주력을 빼내는 위험한 결정을 내렸다. 세르비아에서 급히 철도로 이동해 온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의 제2군과 합쳐 렘베르크 동쪽에 150개 대대, 828문의 포를 배치하는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쾨베시 보병대장의 제12군단도 제2군에 편입시켜 루비엔-코마르노-루드키(Lubień—Komárno—Rudki) 전선을 보강했다.

그러나 9월 2일 콜로메아 전투에서 또 다시 패배를 당했고, 이런 상황에서 제12군단은 러시아군의 수적 우세와 강력한 화력으로 인해 방어선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쾨베시는 후퇴하는 부대들을 위해 스비르즈(Swirz)강 구간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으나, 전반적인 전황 악화로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중요한 방어 책임을 맡았던 제12군단이 무너지자 제3군은 렘베르크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9월 3일, 라바-루스카(Rava-Ruska)에서 시작된 전투는 역사에 길이 남을 재앙이 되었다. 렘베르크는 제4군과 제2군의 중심축이었는데, 콘라트는 렘베르크로 두 방향에서 집결하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원투 펀치 전략을 구상했다. 북쪽에서는 코마루프 전투에서 수모를 겪은 파벨 아다모비치 폰 플레흐베(Pavel Adamovich von Plehve)가, 동쪽에서는 브루더만의 수적 열세인 제3군을 거의 궤멸시킨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루스키(Nikolai Vladimirovich Russky)가 진격하며 압박해오는 상황이었다. 콘라트는 즐로타 리파(Zlota Lipa)와 그닐라 리파(Gnila Lipa)에서의 패전으로 폴란드에서의 전역이 위태로워지자, 콘라트는 제4군과 제2군의 일부 병력으로 루스키를 동부 갈리치아에서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콘라트와 그의 참모들은 치명적인 오판을 저질렀다. 코마루프에서 패배한 플레흐베가 이렇게 빨리 전력을 회복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콘라트가 루스키를 공격하자마자, 플레흐베는 국경을 넘어 제4군의 후방으로 신속하게 진군했다. 첫 공격은 루스키와 맞서도록 보낸 부대가 너무 약해 실패로 끝났고, 콘라트는 제4군 전체를 동원해 플레흐베와 맞서게 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러시아 제5군이 바르샤바 방어를 위해 배치되었던 신설 제11군의 병력으로 증강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콘라트의 동기이자 제4군 사령관인 아우펜베르크는 군의 방향 전환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9월 첫 주 중반, 재배치 중이던 그의 선발 사단들에 플레흐베의 결연한 군대가 돌진해 들어왔다. 콘라트가 모든 사단에 적과 맞서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그닐라 리파에서 큰 손실을 입은 쾨베시 장군의 제12군단 엄호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6일간의 전투"로 알려진 라바-루스카 전투는 제국과 콘라트에게 역사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콘라트의 계획은 완전히 무너졌고, 렘베르크와 라바-루스카에서의 참패가 알려지면서 그의 지도자로서의 명성도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전투는 콘라트가 뛰어난 전술가였음에도 실전에서의 즉흥적 대응에는 취약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나중에 콘라트는 육군 총사령부의 장교들에게 만약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만약 죽지않고 총사령관이 되었다면, 갈리치아 전장에서의 실패로 자신을 총살했을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9월 5일, 콘라트는 재편성된 제4군으로 제3군의 공세를 막아보려 했고, 에베르트 장군도 루블린 남부에서 강력한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끈질긴 추격과 압박은 계속되었다. 9월 6일,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오헝 최고사령부와 콘라트는 마침내 렘베르크 포기를 결정하고 프셰미실 요새로의 후퇴를 명령했다.

이미 전력이 바닥난 오헝군은 계속해서 밀려났다. 9월 7일에는 그로데크(Gródek) 시가 함락되었고, 에베르트의 반격으로 단클마저 후퇴를 강요당했다. 9월 8일, 전투는 베레시차(Wereszyca)강을 따라 약 100km에 걸쳐 확대되었고, 렘베르크 북쪽 50km 지점의 라바-루스카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다. 제2차 렘베르크 전투마저 패배하면서 오헝군의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졌고, 렘베르크는 9월 11일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1군도 산강 뒤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69]
2.3.9.3.4. 갈리치아 전투의 결과
이 전투는 갈리치아 전역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갈리치아의 수도이자 핵심 도시였던 렘베르크의 상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치명타였다. 약 3주간의 연전연패로 32만 명의 사상자를 낸 오헝군은 카르파티아산맥까지 후퇴해야 했고, 갈리치아의 대부분을 잃었다. 더구나 아우펜베르크의 제4군과 보로예비치의 제3군은 북서쪽과 남동쪽에서의 협공 위협에 시달렸다. 독일 제국군에 요청한 추가 지원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콘라트는 마지막 승부수로 지친 제3군을 베레시차 진지에서 다시 공격에 투입했다. 또한 렘베르크 전투의 실패로 루돌프 폰 브루더만은 제3군사령관에서 해임되었고, 보로예비치 보병대장이 제3군을 이어받았다. 아우펜베르크 렘베르크-라바루스카 전투에서의 늦은 대응으로 해임 위기에 처했다. 콘라트는 오랜 친구인 아우펜베르크[70]의 해임을 극도로 꺼렸지만, 프리드리히 대공의 압박으로 결국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전체 전역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갈리치아 전투는 제국군의 치명적인 약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장군은 독일 제국군의 지원 필요성을 제기했고, 팔켄하인도 이에 동의했다. 9월 16일, 독일 제국군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사령관으로 하는 제9군을 창설했다. 이틀 후 제9군 참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콘라트와 작전 논의를 했으나, 콘라트는 제국군의 독일군 예속을 거부했다. 9월 29일, 독일 제9군은 러시아군을 바르샤바 이반고로드 사이의 비스와강 상류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루덴도르프의 의도는 독일군의 공격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대한 러시아군의 압박을 줄여 제국군이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독일군에 점차 종속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하튼 갈리치아에서 일어난 일련의 전투들은 제국군의 결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전투였다.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장군은 독일 제국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선을 보강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팔켄하인은 그의 의견을 지지했지만 가능하면 서부전선의 독일군 부대를 동원하지 않고 달성하기를 원했다. 9월 16일 독일 제국군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사령관으로 하는 제9군을 창설하였다.[71] 이틀 후, 제9군 참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향후 작전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콘라트와 회동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제국군을 독일 제국군의 지휘하에 편입시킨다는 제안을 거부했고, 루덴도르프도 굳이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다. 제국군은 재정비를 하기 위한 여유가 필요하며 이러한 여유를 줄 수 있는 것은 독일 제9군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루덴도르프는 어차피 콘라트와 만나러 가기 전에 이미 적절한 명령들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9월 29일, 독일 제9군은 러시아군을 바르샤바와 이반고로드(Ivangorod)[72] 사이의 비스와강 상류로 밀어내기 위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루덴도르프의 의도는 독일 제국군의 공격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대한 러시아군의 압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공세를 재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러시아군이 독일 제국군 전선으로 병력을 집중시키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10월 4일, 전면에 있는 러시아군이 단순한 견제 부대임을 파악하고 산(San)강으로 진격하여 10월 9일에는 고립된 프셰미실 요새의 포위를 푸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군의 저항이 격화되면서 제국군의 진격은 정지되고 말았다. 독일 제9군 좌익은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바르샤바 방면으로부터 러시아군에게 공격당할 위기에 처해있었는데다. 독일이 받는 압박을 줄이려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공세에 나서줘야만 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공세에 나가는 것을 거부했고, 그렇다면 최소한 마켄젠을 도와주기 위해 병력을 북쪽으로 급파해달라는 루덴도르프의 대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요청하였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콘라트의 방침을 옹호했다. 하지만 타협책으로 제국군이 독일의 근위예비군단이 맡은 이반고로드 전선을 인수하자, 그 병력을 북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인해 포위당하는 사태를 피하려던 루덴도르프는 마켄젠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독일은 동맹국을 돕기 보다는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제국군은 러시아군의 공세에 혼자 힘으로 알아서 대처해야 했다. 결국 제국군 제1군도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퇴각해야만 했다. 10월 말, 러시아군의 보급 물자가 다 떨어지면서 제1차 바르샤바 전투는 끝이 났다. 독일군은 초반에 얻은 이득을 모두 잃어버렸고, 제국군은 더 많은 영토를 상실했으며, 프셰미실은 다시 한 번 러시아군에게 포위당했다.

러시아군은 베를린 공세를 시도했지만 좌절되었고, 이에 대하 반동으로 러시아군 지휘부에서는 제국군을 쳐서 독일군의 '부드러운 아랫배'에 칼을 꽂자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마켄젠을 지원하기 위해 콘라트가 11월 18일부터 크라카우에서 북쪽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치와 크라카우 전선에서 러시아군이 예상외로 강하게 저항하면서 제국군은 러시아군을 포위하거나 비스와강 선으로 쫓아낸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한편 제국군이 공격을 위해 전력을 북방에 집중하자 상대적으로 크라카우 동쪽 전선에 대한 방비는 크게 약화되었다. 콘라트는 이 지역에 대한 수비를 보로예비치 보병대장의 제3군 소속 11개 사단과 크라카우 남쪽에서 급하게 편성된 몇 개 사단에게 맡겨놓은 상태였지만, 급편된 이들 부대들의 전력이 시원치 않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러시아군 총사령부는 이러한 정황을 파악하자마자 병력을 동원해 공격에 나섰고, 브루실로프의 공격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헝가리의 대평원 지대 부근에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군은 광대한 전선에 배치된 대규모 부대들의 움직임을 조율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또다른 공세에 나섰는데, 크라카우를 공격하는 동시에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에서 계속 압박을 가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크라카우 지원에 나서지 못하도록 하였다. 비스와강 카르파티아산맥 사이에 배치된 콘라트의 4개 군은 이미 전력이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또 브루실로프가 거의 헝가리까지 밀고 들어옴에 따라 이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심장부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콘라트는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이 지휘하는 제4군의 일부 부대와 완편된 독일군 1개 사단을 크라카우로부터 남쪽으로 파견하여 제3군의 좌익을 보강했다.

제국군은 이런 움직임으로 러시아군을 공격하였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브루실로프가 제국군을 포위하려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2월 8일, 제국군 제3군이 공격을 개시하여 카르파티아 산맥의 핵심 통로들을 점령하자 브루실로프의 헝가리 진격은 다시 한 번 좌절되고 말았다. 러시아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보기보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되었다. 결국 러시아군 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먼저 때려눕히자는 주장을 힘을 잃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도 그 후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선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1915년 1월 1일, 팔켄하인은 베를린에서 콘라트 및 루덴도르프와 회동했다. 1주일 후 빌헬름 2세 베트만홀베크의 압력에 팔켄하인은 마지못해 동부전선의 독일군 사단 몇 개를 카르파티아 산맥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다는 데 동의했다. 한편, 러시아군 지휘부에서는 전략적 우선순위를 놓고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독일을 상대로 승리하기 어려우니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먼저 공격하여 확실하게 패배시키고 이탈리아 루마니아의 참전을 유도하자는 것과, 주적은 독일인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전력 낭비라며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결과는 독일 전선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한숨 돌리게 되었다.

프셰미실 공방전 당시 10만 명 이상의 제국군이 프셰미실 요새에 틀어박혀 있었다. 공성을 시작한 러시아 제국군은 반년 가까이 지나도록 요새를 함락하지 못하였다. 러시아군은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헝가리를 공격한다는 계획을 고집하고 있었는데, 콘라트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카르파티아산맥으로부터 러시아군에게 공세를 가할 경우 비스와강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판단하에 양측 모두 카르파티아 산맥 동부지역에 대한 동계 공세를 준비했다. 그러나 산악 지형에서 동계 공세를 펼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카르파티아 산맥의 산들은 고도가 높지는 않았지만 매우 가파른 산비탈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산들을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고개들도 극소수에 불과했고, 쓸 만한 도로는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이런 고개들조차 겨울에는 대부분 눈으로 막혀 버리기 일쑤였고, 날씨가 풀릴 때는 진창을 이루면서 사람과 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런 조건하에서도 공격을 고집한 콘라트에 의해 그 해 겨울, 수천 명이나 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카르파티아의 험한 산속에서 동장군의 무자비한 손길에 죽음을 당해야 했다.[73]
2.3.9.3.5. 카르파티아 전투
1월 23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3군은 프셰미실 요새 구원을 위해 진격하였다. 하지만 브루실로프의 제8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공격을 끈질기게 방어하자, 구원군은 제풀에 지쳐 1월 26일 공세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공격이 중지되자, 브루실로프는 바로 반격에 나서면서 보로예비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3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혹독한 겨울 속에서 이어진 3주간의 전투에서 제3군은 전체 병력 10만여 명 가운데 6만 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2월 27일, 콘라트의 두 번째 공세 역시 제한된 성과만을 거둔 채 끝이 났지만, 러시아군을 드네스트르강 동쪽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셰미실 요새의 구출 시도를 지속하기에는 한계가 다가온 상황이었기에, 콘라트는 요새 사령관 헤르만 쿠스마네크에게 더 이상의 구원 시도는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결국 3월 22일, 프셰미실 요새가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고, 헤르만 쿠스마네크를 포함한 10만 여명의 제국군은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러시아군은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다시 한 번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러시아군이 평야지대에 대규모로 쏟아져 나올 것에 대비해 부다페스트 사이의 도나우강 선의 방어진지를 강화했다. 게다가 러시아의 포탄이 고갈되어 버리면서 러시아군의 공격이 잠시 주춤해졌고, 독일의 증원 부대가 도착하면서 전선은 다시 안정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누적된 피해로 인해 이제 제국군에는 제대로 훈련된 일반 장교들과 부사관들을 찾아보기가 힘들 지경이 되어버렸다.[74] 물론 러시아군도 별반 사정이 좋을 것은 없었지만, 그대로 만약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러시아군 지휘관들의 야망이 마침내 실현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2.3.9.4. 고를리체-타르누프 선을 돌파하다
팔켄하인도 이제 동부전선에 더 많은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 프셰미실 요새 상실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이탈리아 루마니아는 영토 양보를 요구하며 전쟁 참여를 압박했다. 팔켄하인과 콘라트는 러시아군을 격파해 이들을 견제하기로 결정했다. 4월 9일, 두 사람은 서부전선에서 독일군 8개 사단을 비밀리에 차출하여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켰다. 팔켄하인은 이들을 마켄젠 휘하의 제11군으로 편성해 고를리체 서쪽에 배치했다. 콘라트는 마켄젠에게 제국군 제3군과 제4군의 지휘권도 넘겨주어, 22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사단의 대규모 집단군을 구성했다. 마켄젠 집단군은 고를리체-타르누프 선을 돌파하고 러시아군을 남북에서 협공하는데 성공했다.

5월 25일 이탈리아가 참전했으나 당장의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콘라트와 마켄젠은 6월 12일 공세를 재개해 렘베르크를 탈환했다. 이어진 제3차 바르샤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15개 사단이 전멸하고 20개 이상의 사단이 전력을 상실하는 등 타넨베르크보다 큰 타격을 입었다. 1915년 5월부터 시작되어 7월까지 진행된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폴란드 돌출부가 제거되어 전선이 800마일로 단축되었으며, 러시아군은 160만의 막대한 병력 손실과 함께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벨라루스 등 광활한 영토를 상실하는 대참패를 겪었다. 반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이러한 대승리의 공로를 이유로 콘라트를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시켰는데, 이는 독일 제국군과의 지휘권 확보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여하튼 팔켄하인과 콘라트의 러시아군 무력화 계획은 초기에는 성공적으로 보였다.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를 통해 갈리치아 대부분을 탈환하고 러시아군을 대규모로 격퇴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리의 대가는 엄청났다. 카르파티아 전투에서만 약 80만 명, 1915년 여름 전투에서는 12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런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독일군의 지원 없이는 전선을 유지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사실상 호엔촐레른 가문의 종속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대신해 이탈리아 루마니아에게 영토 양보를 약속하는 등 외교적 주도권마저 잃어갔다. 거기다가 식량 사정 역시 오스트리아의 전력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갈리치아 곡창지대 상실, 농촌 인력 부족에 더해 협상국의 해상 봉쇄가 겹치며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순무의 겨울보다 한발 앞선 1914년 10월부터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런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콘라트는 1915년 8월 말 로브노 공세(Rovno offensive)를 통해 전세 반전을 시도했다. 콘라트는 38개 사단을 동원해 단독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당초 목표는 러시아군을 결정적으로 무력화시켜 동부전선 전체의 전황을 뒤집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전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최대 25개 사단을 포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콘라트의 구상과 달리, 동맹국 독일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팔켄하인 동부전선보다는 세르비아 전선을 더 중시했고, 오스트리아군과의 공세적 협력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콘라트는 단독으로라도 무리한 공세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초반에는 러시아군을 뒤로 밀어붙이며 루츠크를 점령하는 등 진격에 성공했으나, 9월 들어 러시아군의 맹렬한 반격에 직면했다. 독일군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과도하게 확장된 전선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오스트리아군은 결국 후퇴를 강요당했다.

알렉세이 브루실로프가 지휘하는 러시아군은 신선한 병력을 투입해 반격을 가속화했고, 오스트리아군은 국지적으로 포위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다 독일군의 린징겐이 개입해준 덕에 가까스로 전선을 지탱할 수 있었지만, 막대한 병력 손실과 전의 상실로 이미 오스트리아군은 사실상 붕괴 직전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제국군 사기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고, 일부 장병들은 항복을 택하거나 민족 갈등으로 인한 이탈도 속출했다. 이처럼 팔켄하인의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해 섣불리 진행된 로브노 공세는 오스트리아군에 치명적인 피해를 안겼다. 약 23만 명의 사상자와 대량의 전쟁 물자를 상실한 것은 물론, 군 전체의 붕괴 직전까지 내몰리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결국 이 무리한 작전의 실패로 오스트리아군은 독일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팔켄하인은 가을에 접어들어 악천후로 인해 양측의 공세가 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러시아 전선이 안정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빼내 서부전선으로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동부전선에서의 팔켄하인과 콘라트 연합 작전은 오스트리아의 위기만 심화시킨 채 막을 내리게 되었고, 전쟁의 추이는 이제 완전히 독일의 손에 달리게 되었다.
2.3.9.5. 이탈리아 전선으로 양면전쟁에 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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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를 시찰하는 회첸도르프
1915년 5월 24일 중립을 지키던 이탈리아 왕국이 협상국에 가담, 제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참전하게 된다. 그런 이탈리아와 맞서기 위해 콘라트는 10개가 넘는 사단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냈는데, 황제 프리드리히 대공은 콘라트에게 과연 이탈리아에 대한 공세를 위해 동부전선의 방어를 약화시키는 것이 맞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콘라트는 1915년 7월부터 갈리치아와 부코비나 전선에 거의 변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915년에 해낸 반격의 대성공으로 러시아 제국이 당분간은 공세를 취할 여력이 없을 것이고 러시아군이 잇다른 전쟁으로 전력이 약화되었기에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의 4군만으로도 러시아를 막아낼수 있을거라 확신하여 동부전선쪽 병력을 보강할 필요가 없다며 이를 황제에게 보장하는 오판을 했기 때문이었다. 팔켄하인은 동부전선의 병력을 계속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제국군은 1915년에서 1916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기간 동안 수십여 겹의 철조망과 삼중사중으로 구축된 참호선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을 뿐이었다.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병력은 린징겐 집단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2군, 제4군, 카를 폰 플란처발틴 기병대장이 이끄는 제7군 외에 독일 남부군[75]이었다. 1916년 3월 이래 에리히 루덴도르프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동부전선 독일 제국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지휘체계를 일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자신들이 독일군에게 종속되는 듯한 모양새를 좋아하지 않은 콘라트는 이를 반대했다. 따라서 그 무렵까지는 독일-오헝 제국군 간에 단일 지휘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이탈리아 국경은 1866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마련한 조약에 따라 인위적으로 그어진 것이었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국경지대의 산맥 일대를 자국 영토로 확보하여 이탈리아의 침공에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동시에 또 마음만 먹으면 산꼭대기에서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평원지대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의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든 간에 공세를 벌이려면 험준한 산악지대를 기어 올라가야 했으며, 국경선의 형태 역시 이탈리아군이 직면한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선은 거대한 S자 형태로, 트렌티노 지역에서 오스트리아의 거대한 돌출부가 이탈리아로 깊숙히 파고 들어오고, 이탈리아의 우디네 돌출부가 오스트리아 영토로 뻗쳐 있는 형상이었다. 두 돌출부 중 잠재적으로 이탈리아에 더 위협이 되는 것은 트렌티노 돌출부였다. 그러나 이곳은 도로와 철도 사정이 열악해서 제대로 된 군사 작전을 벌이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제국군 지휘관들도 이 지역에서 어떻게 작전을 펼쳐야 할지를 놓고 머리를 싸매야 했다. 스위스 국경지대에서 아드리아해까지 400마일 길이로 형성된 이탈리아 전선은 3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트렌티노 알프스산맥, 그리고 이손초강 전선이 바로 그것이었다. 강변을 따라 형성된 약 30마일 길이의 전선은 그래도 좀 덜 험한 언덕지대로 되어 있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거의 전 전선이 험한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탈리아에게 빼앗긴 베네치아 지방을 되찾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콘라트가 전선에 투입할 수 있던 병력은 당시 39개 보병사단, 10개 기병사단 약 50만여 명이었다. 국경지대에 항구적인 방어진지를 건설하면서 후방 지역의 교통망을 정비했다. 고정방어시설을 구축함에 따라 향후 이탈리아 전선은 주로 정적인 진지전이 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철도망은 국경 지대를 따라 평행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이탈리아와는 달리 별다른 지선이 건설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선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데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제국군이 트렌티노에서 공세를 나섰을 때 공격 기세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는 방어진지를 지키고 있는 20개 사단을 상대로 35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개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전쟁 준비 상태는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전 전선에서 공세에 나서면서 제국군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탈리아군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이손초강 방면에서 오스트리아 영토 내의 여러 거점들을 점령했다. 이후 이 거점들을 중심으로 양측의 전선이 안정되면서 계속해서 벌어질 소모전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6월 23일, 여러 차례 벌어질 소모전 가운데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76]

1915년 말까지 이탈리아군은 이손초강 전선에서 4차례에 전투를 벌이며 전략 요충지인 고리치아를 점령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고리치아 마을은 강력한 제국군 교부도의 보호를 받고 있었고, 마을을 둘러싼 여러 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제국군은 공격해오는 이탈리아군에게 무시무시한 화력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력한 제국군 방어진지에 병력을 연거푸 투입하면서 공격을 퍼부었고, 그 과정에서 양측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전투의 규모 자체도 대단해서 제2차 이손초강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제국군 129개 대대에 대항해 260개 대대를 동원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런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은 난공불락의 방어진지에서 버티고 있던 제국군을 몰아낼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군은 16만 1,000명을 제국군은 14만 7,000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겨울이 닥치면서 전투의 열기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2.3.9.6. 세르비아 분할
1915년 초, 오스만 제국 사리카미시 전투와 제1차 수에즈 공세에서 패배하자, 독일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참모총장 콘라트에게 세르비아 점령의 전략적 중요성을 설득하려 했다. 이는 독일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거쳐 이스탄불까지 이어지는 직접적인 철도 연결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군사 물자와 잠재적으로는 병력도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는데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여전히 강력한 위협으로 존재했고, 이탈리아 협상국 참전으로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마침내 1915년 9월 8일, 에리히 폰 팔켄하인과 콘라트는 플레스에서 군사협약을 체결했고, 이 회의에서 세르비아에 대한 즉각적인 공격이 결정되었다. 이는 1914년의 첫 번째 침공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914년 12월 14일 늦게 끝난 첫 침공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22만 4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세르비아도 17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더 이상의 공세작전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1915년 12월, 숙원이었던 세르비아 정복이 현실화되자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은 전후 처리를 논의했다. 불가리아 왕국 세르비아 제2차 발칸 전쟁 이후 차지했던 마케도니아 전역의 반환을 요구했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베를린- 바그다드 철도 건설을 위한 통행로 확보가 주목적이었기에 이를 수락했고, 모라바(Поморавље) 능선을 경계로 세르비아를 분할했다. 1916년 1월 1일, 콘라트는 베오그라드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크로아티아 출신의 요한 폰 잘리스제비스 장군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어 1월 7일 열린 합동 장관 회의에서는 제국의 미래와 직결된 중대한 문제가 논의되었다. 세르비아의 제국 편입 여부였다. 티서 총리는 세르비아 침공 당시 세르비아를 합병하지 않기로 한 헝가리와의 약속을 지킬 것을 주장했다. 이는 단순한 영토 문제를 넘어, 제국 내 슬라브계 인구 증가로 인한 헝가리의 입지 약화를 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콘라트는 티서를 편협하다고 맹비난하며, 제국의 발칸 지배력 강화를 위해서는 세르비아 합병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의 약속을 저버린 채 세르비아 합병을 단행했다. 이 결정은 제국 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향후 제국의 안정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2.3.9.7. 트렌티노 공세
1916년 초, 독일 제국은 제국군 주력을 동부전선에서 철수시켜 서부전선에 투입하길 원했으나, 콘라트는 다른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취약점을 포착한 그는 트렌티노 아시아고 고원에서 결정적 공세를 감행, 이탈리아 북부 평원을 장악하려 했다. 3월,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의 5차 공세가 실패하자 콘라트는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40만 병력을 동원해 아시아고 방면을 공격하면 이손초 전선의 압박을 줄일 수 있고, 나아가 베네치아 베로나를 점령해 이탈리아군을 포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팔켄하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쾨베시 제3군을 비롯한 발칸과 동부전선의 정예부대와 중포를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했다. 5월 15일 시작된 공세에서 제국군은 2,000문의 야포로 이탈리아군 방어선을 초토화시켰다. 산악지형에서는 포격이 눈사태와 산사태를 유발해 이탈리아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험준한 지형으로 진격이 지연되는 사이, 이탈리아 알피니 산악부대의 지연전으로 이탈리아 본군이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다. 6월 4일, 핵심 철도까지 20마일 남짓한 거리까지 진출했으나 제국군의 기세가 꺾였고, 이탈리아군의 반격으로 원위치로 후퇴했다. 이 실패는 큰 대가를 치르게 했다. 동부전선이 약화된 틈을 타 브루실로프 공세가 시작되었고, 이탈리아군은 8월 고리치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겨울이 되어서야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2.3.9.8. 브루실로프 공세
브루실로프는 러시아군의 주력이 공세를 개시할 시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기회를 발견했다. 콘라트가 이탈리아 전선 공세를 위해 10개가 넘는 사단을 동부전선에서 빼내면서 생긴 거대한 공백이었다. 게다가 초반 전투에서 제국군의 맹공에 대패한 이탈리아군이 황급히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한 상황이었다. 브루실로프는 이미 자신의 군을 다른 러시아군보다 월등한 수준으로 준비시켜 놓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미하일 알렉세예프는 다른 러시아군의 준비가 미흡했음에도 브루실로프에게 단독 공세를 제안했고,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6월 4일 새벽 4시 30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 전선에 걸쳐 러시아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브루실로프는 기존 전술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채택했다. 꾸준한 항공정찰로 적의 참호선 취약점을 미리 파악했고, 남부는 정오까지, 북부는 12시 30분까지 정확한 포격을 집중했다. 포격이 멈추자마자 러시아 보병이 제국군 참호로 돌진했고, 저녁 무렵에는 공격 지역의 모든 참호선을 장악했다. 제국군은 예비 병력을 제대로 투입하지도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위기를 직감한 콘라트는 즉시 트렌티노 공세를 중단하고 팔켄하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3개 사단을 차출했지만, 이탈리아 전선의 병력을 모두 동부로 이동해야만 추가 지원이 가능하다는 조건을 달았다. 힌덴부르크 루덴도르프는 5개 사단을 급파하면서 제4군 사령관 교체도 요구했다. 6월 8일, 팔켄하인은 린징엔 휘하에 5개 사단을 코벨 근처에 집중시켰다. 플란처발틴의 제7군은 프루트강으로 후퇴했고, 부코비나의 수도 체르노비츠 북쪽의 교두보만을 겨우 지키고 있었다. 그마저도 6월 19일에 러시아군에게 점령당했고, 이틀 후 세레트강으로 퇴각해야 했다. 6월 23일까지 제국군의 포로만 20만 4천 명에 달했다.

브루실로프는 공세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 철도 교통의 요충지인 코벨 탈환에 전력을 기울였다. 러시아는 동원 가능한 병력은 충분했으나, 산업화의 미비로 철도망이 부실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철도를 통해 대규모 증원을 할 경우 불리해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7월 24일 시작된 코벨 전투는 2주 만에 러시아군의 패배로 끝났다. 러시아군이 2배의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급히 차출된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이 효과적인 지연전을 펼쳤다. 특히 독일군이 제공권을 장악하여 브루실로프의 특기인 정밀 포격과 충격부대 운용이 불가능해진 것이 결정타였다. 전장의 주도권은 여전히 러시아군이 쥐고 있었으나, 코벨 전투의 패배로 초기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더구나 베르됭 전투가 7월에 종료되면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방어로 전환하고 전력을 동부전선으로 쏟아부었다. 러시아군은 6월 4일 이후 100km나 진격했으나, 전선이 돌출부를 형성하며 오히려 후퇴를 강요받았다. 페트로그라드 지휘부는 북부전선의 예비전력을 투입하며 공세를 독려했으나, 낙후된 철도망으로 인해 효과적인 병력 재배치가 불가능했다.
7월 26일, 팔켄하인은 테셴의 프리드리히 대공 사령부를 방문해 동부전선 통합 사령부 설치를 요구했다. 다음날 베트만홀베크, 힌덴부르크, 루덴도르프와 콘라트의 회의 끝에 힌덴부르크 동부전선 최고 지휘권을 얻게 되었다. 독일의 지원 없이는 전쟁 수행이 불가능했던 콘라트는 이에 반발했으나, 결국 지휘권을 양도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독일 남부군과 제7군은 카를 대공과 AOK 통제 하에 두는 조건을 관철시켰다.

8월 7일, 러시아군은 다시 한 번 코벨 점령을 시도했으나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완강한 저항에 막혔다. 브루실로프는 더 이상의 공세가 무의미하다고 판단, 이틀 만에 작전을 중단했다. 그는 계속해서 상부를 설득해 9월 20일 마침내 공세를 완전히 종료했다. 동부전선만 놓고 보면 브루실로프 공세는 러시아의 대성공이었다. 전선을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밀어내 안전한 방어선을 확보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사실상 무력화시켰으며, 루마니아 왕국의 협상국 참전까지 이끌어냈다. 이 공세의 영향으로 독일은 8월 29일 에리히 폰 팔켄하인 대신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새로운 참모총장으로 임명했고, 힌덴부르크는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병참장군으로 발탁했다. 기존 전술의 틀을 깬 브루실로프의 혁신적인 작전은 빛났지만, 러시아가 치른 대가 또한 엄청났다. 55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40만 명의 전선군 예비병력 중 4분의 3이 소모되었다. 브루실로프 본인은 온갖 훈장과 페트로그라드 궁정의 축하를 받았으나, 막대한 인명 손실에 비해 전략적 목표 달성이 미흡했다고 자평했다. 결과적으로 이 공세의 과도한 인적 손실은 러시아 혁명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8월 12일까지의 전과를 보면 동맹군에서는 장교 8,255명과 병사 37만 153명이 포로가 되었다. 전사자와 부상자까지 합하면 동맹군은 70만 명 이상의 병력과 1만 5천 제곱마일의 영토를 잃었다. 갈리치아 전투에서 패한 이후 10개 사단을 추가로 잃은 제국군은 브루실로프 공세로 동부전선이 초토화되었고, 이후 콘라트는 독일 제국에 의해 점차 전선에서 소외되어갔다.
2.3.9.9. 루마니아 전선
평소에 루마니아 왕국이 눈독을 들이고 있던 것은 바로 트란실바니아였다. 루마니아는 브루실로프 공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힘이 한계에 달했으니 트란실바니아를 탈취할 기회가 왔다고 보고 8월 27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동부전선에 참전한다. 모든 루마니아군 사단들이 트란실바니아로 진격해 들어갔다. 당시 트란실바니아에는 극소수의 제국군만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마니아는 며칠 만에 트란실바니아를 점령한 후 도브루자의 방어를 강화할 심산이었다.

루마니아군은 9월 6일까지 트란실바니아 지역을 완전히 점령했지만, 동맹군은 신속하게 반격에 나섰다. 베르됭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힌덴부르크에게 총사령관직을 넘겨준 팔켄하인이 제9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콘라트는 명목상 최고 지휘관이었지만, 독일의 제9군 사령부가 실질적으로 전선을 도맡았다. 그래도 콘라트가 짜놓은 전략을 독일이 따르면서 루마니아의 침공을 저지하고 역으로 루마니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루마니아의 식량과 목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유전을 차지한다는 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내 전선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지만, 정작 승리는 사령부나 군대의 위신을 되살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독일이 큰 수혜를 입게 되었다. 콘라트에게 설상가상으로 이 전선에서 복무하던 맏아들 쿠르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 평소에도 몸이 좋지 않았던 쿠르트는 세 번째로 복귀해서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였는데 동일한 폐 질환이 재발하는 바람에 후방으로 이송해야했다. 의 군 병원에서 처음 치료를 받았으나, 의사들의 판단으로는 전시의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안전하게 치료하기에는 그의 상태가 너무 심각했다. 결국 콘라트는 중립국이자 휴양지로 유명한 스위스의 아로자(Arosa)로 쿠르트를 보내 요양하도록 조치했다.

루마니아 전쟁 기간 중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시 대비책의 일환으로 카를 대공에게 콘라트의 대안 후보를 제안해달라고 요청했다. 카를 대공은 전쟁 중 성과를 냈던 장성들을 위주로 후보군을 검토했는데, 오이겐 대공, 그의 참모장 알프레트 크라우스, 제14보병사단장 막시밀리안 치체리치 폰 버차니, 제6군단장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가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유능한 인재들이었음에도 콘라트의 지위에 걸맞은 인물은 없었다. 독일이 콘라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빌헬름 2세는 이미 콘라트를 프로이센 보병 의례 연대장으로 임명했고, 장차 원수(Generalfeldmarschall)의 지위도 수여하겠다고 했다. 콘라트는 팔켄하인, 힌덴부르크, 루덴도르프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카를 대공 이손초 전투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독일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황제에게 콘라트를 해임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대신 AOK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총사령관을 프리드리히 대공에서 더 강력한 의지를 가진 오이겐 대공으로 교체하여 균형을 이루고자 했다.
2.3.9.10. 참모총장에서 야전사령관으로
11월 17일, 콘라트는 쇤브룬 궁전에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마지막 알현을 가졌다. 황제는 평소와 같은 관심으로 전황 보고를 경청했으나 한 번 졸기도 했고 전보다 훨씬 약해진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항상처럼 친절했으며, 입장과 퇴장 시 모두 일어나 맞이하고 배웅하며 악수를 나눴다. 나흘 후인 11월 21일 황제가 서거했다. 콘라트는 황제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다른 많은 이들처럼 노황제의 서거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조종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11월 25일, 새 황제 카를 1세는 콘라트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원수(k.u.k. Generalfeldmarschall)로 진급시켰다. 이는 비(非) 합스부르크 가(家) 군인으로서는 47년만이며, 현역 군인으로서는 57년만의 첫 승진이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카를 1세는 콘라트의 권한을 축소하기 시작했다. 12월 2일 프리드리히 대공을 총사령관 대리로 강등시키고 직접 총사령관이 되었다.

새해가 되자 육군 최고 사령부(A.O.K.)를 테셴에서 바덴바이빈으로 옮겼는데, 이는 황제가 총사령관으로서 사령부를 통치하기에 편리한 위치였다. 콘라트는 독일 최고사령부가 있는 플레스 성(Schloss Pleß)과의 거리를 이유로 반대했다. 콘라트가 독일에 대한 종속을 '필연'으로 받아들인 반면, 카를 1세는 군의 독자성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새 본부에서는 여성의 존재가 금지되어 콘라트는 두 번째 부인 지나와 떨어져 지내야 했다.[77] 이는 " 자유사상가" 참모장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같은 보수적인 국가의 고위직에 적합하지 않다는 분명한 신호였다.

1917년 1월 22일, 콘라트는 제국의회에서 독일 제국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인의 참여를 지지하는 장관들과 뜻을 같이했다. 그는 이미 1916년 8월부터 이 작전에 우호적이었다. 물론 그 결정이 미국의 중립을 종식시킬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장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세계대전에 대한 사회진화론 관점에서 그는 '앵글로색슨' 강대국인 미국이 전쟁에서 영국 동맹국이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콘라트는 미국을 이미 삼국 협상의 침묵하는 동반자로 보았고, 실제로도 식량과 보급품의 공급자로서 이미 전쟁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는 독일의 장군들과 제독들처럼 미군이 1918년 이전에 서부전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았기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콘라트의 의견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사령관 안톤 하우스 대제독의 의견과 일치했으나, 카를 1세와 부리안의 후계자인 외무장관 오토카어 체르닌 백작만이 새로운 정책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 콘라트는 카를 대공에 대해 '그는 내가 큰 기쁨으로 모실 군주'라며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보다 훨씬 더 마음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17년 초 첫 몇 주 동안 콘라트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2년 반 동안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쟁 수행을 지휘했고, 프란츠 요제프 1세 프리드리히 대공만이 그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독일 최고사령부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던 그였기에, 29세의 젊은 황제가 실제로 군사적 권한을 행사하려 하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거의 매일 카를 1세와 다투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바덴바이빈의 새 본부로 이전한 후 콘라트는 지나를 단 두 번 만날 수 있었는데,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2월 말의 방문은 그녀의 38번째 생일과 겹쳤다. 방문 몇 시간 후 프리드리히 대공이 찾아와 카를 1세 남티롤 공세의 실패를 이유로 콘라트를 새로운 참모총장으로 교체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동시에 황제는 콘라트가 티롤의 제10군과 제11군으로 구성된 집단군[78]의 사령관으로서 현역에 남기를 바란다고 했다. 콘라트는 처음에는 은퇴를 요청하려 했다. 지나는 모든 전선에서 전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지금 은퇴한다면 이후 발생할 일들로 인해 그의 명성이 손상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콘라트도 이에 동의했다. 다음 날인 2월 28일 그는 카를 1세를 만나 은퇴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의 제복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훈장을 떼어 콘라트에게 수여하며 설득했고, 이후 콘라트는 숙소로 돌아가 필수품만 챙겨 지나와 함께 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황제의 군사비서실장 페르디난트 폰 마르테러(Ferdinand von Marterer) 남작이 콘라트의 자크인가세(Jacquin-Gasse) 아파트를 방문해 군집단 사령관직을 수락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전달했다. 콘라트는 전날 황제와의 대화를 언급했으나, 마르테러는 이것이 직접적인 명령이므로 따라야 한다고 했다. 콘라트가 서면 명령을 요구하자 마르테러는 바덴바이빈으로 돌아가 이를 준비했다. 그 동안 콘라트는 극도로 격앙된 상태였고 지나와 몇몇 친한 친구들이 그를 위로했다. 황제에 대한 불복종도 고려했으나, 파울 슐츠(Paul Schulz)와 전 부관 프란츠 푸츠(Franz Putz)의 조언으로 결국 군집단 사령관직을 수락했고, 이는 지나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3월 1일에 콘라트는 참모총장에서 해임되었다. 3월 2일, 카를 1세는 콘라트를 콘라트 군집단 원수(Heeresgruppe Feldmarschall Conrad)로 임명하였고 공식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훈장을 수여하였다. 콘라트는 중간에 1년동안 육군 감찰관에 있었던 시절을 제외하고 1906년부터 1917년까지 총 1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참모총장에 재직했었다. 1906년에는 별다른 열의 없이 그 자리에 앉았고, 6년 후에는 마지못해 돌아왔다. 콘라트는 대전략가가 아닌 전술가로 명성을 얻었고, 야전사령관으로서 전선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본부에서 펜대나 굴려야 했던 참모 업무에 대해선 애정과 열정이 거의 없었다. 1914년 러시아 전선에서의 첫 패배와 그의 셋째 아들 헤르베르트의 죽음으로 그는 망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에 패배한 후 신경쇠약을 겪고 직위를 잃은 그의 동맹 소 몰트케와는 달리 콘라트는 계속 복무했다.

다만 콘라트가 참모총장이 아니었을지라도 그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군대를 지배했고, 결과적으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군대는 콘라트의 군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여전히 그의 사상에 깊이 물든 사람들의 손에 있었다. 1888년부터 1890년까지와 1890년부터 1892년까지의 기수 중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생도들 중 49명이 1917년과 1918년 사이에는 소장 이상의 장성이 되어있었고, 부대 사령관이나 참모부에서 콘라트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한 수많은 장교들도 여전히 책임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 때문에 옛 군주가 살아있는 동안 콘라트는 사실상의 총사령관으로서 직위를 유지했으며, 브루실로프 공세 이후에 그가 당면한 임무를 수행할 마음도 능력도 없었다는 것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프리드리히 대공이 계속해서 그의 판단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79]

콘라트의 후임으로는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로 결정되었다. 콘라트는 아르츠에 대해 부대 사령관으로서는 좋은 인물로 고려는 했었지만 참모총장으로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아르츠도 콘라트가 누렸던 권한을 누릴 수 없을 것이었다. 참모총장이 교체됨과 동시에 광범위한 인사개편이 이루어졌다. 콘라트의 보좌관인 루돌프 쿤트만(Rudolf Kundmann, 1869-1934)과 나머지 부관들을 포함하여 일반참모의 많은 부하들이 직위를 잃었다. 특히 여기에는 콘라트의 충실한 부관이자 콘라트가 자신의 후계자로 간주했던 요제프 메츠거 소장[80]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콘라트가 구상했던 참모본부의 지휘 연속성이 완전히 단절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콘라트의 해임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다. 그의 친구 슐츠는 '이 불쌍하고 불운한 국가와 그 모든 국민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고, 체르닌 외무장관은 '공동 작업'이 끝난 것을 유감스러워하며 자신이 해임에 관여했다는 소문을 부인했다. 에서는 치타 황후가 콘라트를 개인적으로 싫어했거나 그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겨 해임에 영향을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콘라트 자신은 지타 황후와 가톨릭 교회, 그리고 외교관들, 장군들, 궁정의 여러 적들을 탓했다. AOK 주재 독일 연락장교였던 아우구스트 폰 크라몬(August von Cramon) 장군은 전선이 비교적 조용하고 큰 패배 직후가 아닌 시점에서의 시기를 봤을 때 콘라트의 해임은 군사적 이유보다는 '개인적' 이유가 더 컸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독일 장군 한스 폰 젝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 대한 평가에서 콘라트의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그는 군대가 '비합리적으로' 사용되었고, 지휘가 너무 '체계적'이며 하급 장교들의 주도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특히 병력이 전투를 위한 훈련이 충분히 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해임 이유는 콘라트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카를 1세는 1918년 4월 식스투스 사건으로 드러났듯이, 1917년 동안 자신의 처남인 부르봉-파르마의 식스투스(Sixtus of Bourbon-Parma) 왕자를 협상국과의 개인 특사로 이용하여 독일 제국과의 동맹을 깨고 전쟁에서 이탈하려 했다. 카를은 전쟁의 부담으로 다민족 제국이 내부 붕괴를 겪기 전에 전쟁에서 빠져나오는 것만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1916년 여름의 패배 이후 콘라트는 더 이상 이중제국이 구원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독일의 지배를 받아들이며 독일이 승리하거나 싸움을 멈추기로 결정할 때까지 전쟁이 계속될 것이라고 체념했다. 자국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만으로도 그는 더 이상 참모총장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35년 후, 콘라트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오스카어 레겔레(Oskar Regele, 1890-1969)는 그의 해임을 해리 S. 트루먼 더글러스 맥아더를 해임한 것에 비유했다. 하지만 전시 상황에서 당시의 '여론'을 판단하기 어렵기에, 이 결정의 대중적 인기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맥아더처럼 콘라트도 자신의 총사령관과 지내기 어려웠고 주요 정치인들의 신뢰를 잃었다. 또한 그는 전쟁에 반대하게 된 지식인들, 특히 군 내부의 카를 크라우스(Karl Kraus)같은 이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에드워드 팀스(Edward Timms, 1937-2018)가 지적했듯이, 크라우스는 전쟁 전부터 《Die Fackel》에서 콘라트를 풍자했다. '인류의 마지막 날들'과 다른 전시 저작들에서 크라우스는 장교 계급의 허세를 보여주는 전형으로 허구의 인물이 아닌 콘라트를 직접 사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묘사는 크라우스와 다른 문인들이 콘라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콘라트는 명예, 훈장, 허례허식을 거의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인물이었다. 비록 이 '종말론적 풍자가'와 그의 동료들은 참모총장과는 다른 사회적 환경에서 활동했지만, 그들은 같은 지적 전통에서 형성된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했다. 콘라트는 단지 다른 이들의 비관주의를 입증하게 될 전쟁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줬을 뿐이었고, 영향력 있는 문화계 인사들보다 군사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훨씬 더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맥아더처럼, 콘라트도 의심스러운 지휘 결정들을 내렸고, 막대한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며,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나 대다수 민간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잃지 않았다.

국내 전선에서는 많은 영예가 그의 몰락을 완화시켜주었다. 1917년 3월에만 해도 그는 빈 공과대학의 공학 박사 학위, 브륀의 프란츠-요제프-도이체 대학의 공학 박사 학위, 프라하 독일대학의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는 이전에 체르노비츠 대학 법학부와 인스브루크 대학 의과대학에서 받은 명예학위에 더해진 것이었다. 빈 공과대학의 총장이었던 막스 밤베르거(Max Bamberger, 1861-1927) 교수는 콘라트가 야전 전신과 전화, '모든 구경의 포', 항공기, 철도 개선 등 기술 발전을 장려한 공로를 치하했다. 카를 1세는 이후 콘라트에게 은군사봉사훈장과 오스트리아 상원의원 종신직을 수여했다. 1917년 후반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기사단의 총장이 되었고 두 번째 금군사봉사훈장을 받았다.

1917년 3월 11일, 콘라트는 이전 사령관이었던 오이겐 대공을 대신해 새로운 보직을 맡게 되었고, 집단군 사령부는 보첸에 위치하였다. 3일 후 그는 편안한 숙소를 마련했다. 콘라트는 AOK에서 벗어나 '음모의 둥지, 비겁함과 아첨꾼들에게서 벗어나게 되어 기쁘다'고 털어놓았다. 새 임지에 도착한 지 일주일 후, 그는 제4카이저예거연대를 시찰하기 위해 폭설 속을 썰매를 타고 전선을 처음 방문했다. 그는 '아첨하고 기어오르려는 아부꾼들이 아닌' 진짜 군인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겼고, 전선을 자주 둘러보았다. 뤼디거 조이터 폰 뢰첸(Rüdiger Seutter von Lötzen, 1873-1940)은 AOK에서 함께했던 유일한 참모장교로서 그의 새로운 참모진에 합류했다. 콘라트 집단군은 제10군과 제11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제10군사령관으로는 전쟁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제국상급대장이, 제11군사령관으로는 빅토어 폰 쇼이헨슈투엘 보병대장이 맡았고 둘다 콘라트의 지휘를 받았다. 그의 오래된 심복인 메츠거의 제1보병사단이 제10군 소속으로 콘라트 집단군에 들어오게 되었다. 참모장 쿤트만도 제1군단사령관으로 콘라트 집단군에 합류하였다. 또한 차남 에르빈이 티롤에 주둔하고 장남 쿠르트가 스위스 근처에서 요양하는 것은 콘라트의 심신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티롤에서 동부전선으로 이동한 에곤과 연락이 끊긴 일이었다.

봄이 시작되면서 콘라트가 남티롤 방면의 사령관으로 부임하였을 때 이탈리아 왕국군 이탈리아에 대한 그의 증오와 공격적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다음 주요 공세가 이손초강이 아닌 알프스에서 시작될 것으로 예상했다. 콘라트는 티롤에서 이탈리아군을 공격하기 위한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카를 1세의 AOK는 오히려 이탈리아 전선에서 병력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점진적으로 콘라트 집단군의 3분의 1에 달하는 병력이 보로예비치 집단군을 보강하기 위해 실제 다음 공격이 시작될 이손초강으로 파견되었다. 콘라트는 자신이 실제 공격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탈리아군의 주의를 티롤 쪽으로 끌어두는 카를 황제의 정교한 전략적 기만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낙담하였다.

다행히 1917년 3월에 시작된 러시아 혁명 덕분에 동부전선에서 비교적 여유가 생겼고, 이를 통해 일부 부대를 이손초강과 트렌티노 전선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군의 사기는 이미 크게 저하되어 있었고, 특히 비(非) 독일계 병사들은 전쟁 지속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8월, 카를 1세 빌헬름 2세에게 동부전선의 오스트리아-헝가리 부대들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동부에서의 전투가 줄어들면서 합스부르크 사단의 수가 이탈리아 전선의 3배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카를 1세는 독일의 지원을 중포병으로만 제한하고 자체적인 공세를 계획했으나, 독일 최고사령부는 이탈리아군에 승리를 거두며 체면을 세운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전쟁을 계속할 이유가 없어질 것을 우려했다. 작전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힌덴부르크 팔켄하인의 뒤를 이어 독일군 참모총장이 된 루덴도르프는 중포병 외에도 7개 보병사단을 파견했다. 이때 파견된 부대에는 에르빈 롬멜 소위도 포함되어 있었다.[81]

1917년 여름, 콘라트의 축소된 집단군이 수행한 가장 큰 전투는 방어전이었다. 6월 9일부터 29일까지 벌어진 몬테 오르티가라(Monte Ortigara) 전투에서 그의 43개 대대는 165개 대대 규모의 이탈리아 제6군 공격을 저지하고 23,00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이를 제외하면 콘라트는 이손초에서 벌어진 10차 전투(5월-6월)와 11차 전투(8월-9월) 기간 동안 주목할 만한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다. 7월에 러시아 임시정부가 동부 갈리치아에서 이른바 ' 케렌스키 공세'를 개시했으나, 초기 침투 규모는 전년도의 ' 브루실로프 공세'에 미치지 못했고, 제국군의 반격으로 러시아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2.3.9.11. 카포레토 전투
1917년 10월 24일, 오토 폰 벨로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 제14군이 이손초강 상류의 카포레토(현재 슬로베니아의 코바리드) 마을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이 '독일' 제14군은 실제로는 15개 사단 중 9개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사단이었고, 이때 에르빈 롬멜 소위도 뷔르템베르크 산악대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벨로의 공격 계획은 콘라트의 구상에서 비롯되었다. 콘라트는 1908년 참모부 전적지 답사 당시 카포레토 북쪽 7마일의 플리츠(보비츠)와 남쪽 8마일의 톨메인(톨민) 사이 구간에서 이손초강을 돌파하는 공격 계획을 구상한 바 있었다. 1917년 1월 힌덴부르크 루덴도르프와의 마지막 회동에서 이 계획을 다시 제안했으나, 독일군은 카를 1세가 이탈리아 공세를 요청할 때까지 이를 보류해두었다.

10월 24일의 공격은 이탈리아 전선에 20마일 너비의 돌파구를 만들어냈고, 전선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왕국군은 거의 완전한 붕괴 직전까지 갔다. 공세는 2주 동안 계속되어 11월 7일 피아베강에 도달했고, 이때서야 이탈리아군 영국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동맹국은 7만 명의 사상자(전사, 부상, 포로)를 냈지만, 이탈리아군은 전사자 4만 명, 부상자 3만 명, 포로 29만 4천 명의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또한 3천 문의 야포, 3천 정의 기관총, 2천 문의 박격포와 막대한 양의 탄약 및 장비를 잃었다. 이렇게 카포레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향후 11개월 동안 거의 독일군의 도움없이 피아베강 방어선을 지켰고, 힌덴부르크 루덴도르프는 11월 30일부터 벨로의 독일군 부대들을 서부전선 증원을 위해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한편, 카포레토 전투에서 대패한 이탈리아의 혼란을 이용하기 위해 콘라트는 11월 9일 티롤에서 자체 공세를 개시했으나, 병력 부족으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루덴도르프 보로예비치에게 피아베 전선의 병력을 서쪽으로 이동시켜 콘라트의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청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도 12월 5일까지 콘라트군은 바사노(Bassano)에서 12마일 거리까지 전진했고, 1916년 6월 트렌티노 공세 당시 마지막으로 점령했던 멜레테산(Monte Melette)도 재탈환했다.
2.3.9.12. 개인적 비극과 사상적 전환
그 해 말까지 러시아 루마니아가 전쟁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이는 동부전선에서의 전투가 사실상 종결되었음을 의미했고, 이후 카를 1세가 제국의회를 다시 소집하자 콘라트는 큰 관심을 가지고 양원의 절차를 지켜보았다. 특히 1912년부터 1914년 시기 자신의 "전쟁당" 핵심 멤버였다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그 입장에서 벗어난 레온 폰 빌린스키 前 재무장관이 상원에서 자신과 전 테셴 AOK의 기록을 비판하자 날카롭게 반응했다. 콘라트는 귀족의 일원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여, 현재 전선에 있어 직접 의회에 참석할 수 없음을 밝히면서 전보로 공식 반박을 보냈다. 그는 구 AOK의 유산으로 러시아군의 붕괴와 " 폴란드의 해방"을 들었으며, 이는 모두 " 독일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달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든 것은 개인적인 비극이었다. 스위스 아로자에서 요양 중이던 장남 쿠르트가 1918년 1월 10일, 31번째 생일에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온 폐 질환으로 사망했다. 쿠르트는 죽기 전 "심한 향수병"을 앓으며 봄에 이탈리아 전선 복귀를 희망했었다. 3일 후 을 방문하고 보첸으로 돌아온 콘라트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즉시 쿠르트의 유해를 빌마와 콘라트의 아버지, 그리고 누이 베티가 안식하고 있는 의 히칭 묘지로 이송하도록 조치했다. 이 충격은 3년 전 자신이 지휘하는 작전에서 전사했던 삼남 헤르베르트의 죽음만큼이나 컸다. 헤르베르트는 콘라트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었고 둘은 좋은 부자관계였다. 그가 죽은 후 콘라트는 그를 끔찍하게 그리워했고, 아무에게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 책임감과 고통을 느꼈다.

특히 쿠르트와의 관계는 더욱 비극적이었다. 장남이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아버지의 높은 기대에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 이후 계속 폭풍이 몰아쳤다. 물론 사이가 결코 소원해진 적은 없었지만, 전쟁 중 요양 기간에 쿠르트가 작성한 개인적인 회고록은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이해하거나 감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결국 쿠르트는 부자 간의 의견 차이를 진정으로 화해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콘라트는 이러한 깊은 감정을 오직 지나에게만 털어놓았을 뿐, 자신의 아들들과는 이런 개인적인 감정을 결코 나누지 않았다.

이러한 개인적 비극은 그의 세계관 변화를 가속화했다. 비록 콘라트가 태생에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그는 강한 독일계 정체성보다는 다민족 제국의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제국을 다양한 민족들의 이해관계가 결합된 생존을 위한 공동체로 보았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독일계 배경을 인식하면서도 초기에는 민족적인 애착을 보이지 않았던데다, 다른 슬라브계 병사들에 대해서도 부정적 견해를 가지기는 커녕 오히려 루테니아인 부관들의 "충성심"과 "이타성"을 칭찬했고, 헝가리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는 반대했으나 민족적 편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초민족적 태도는 한때 오스트리아의 독일 민족주의자들을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과 동일하게 가혹한 용어로 비판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콘라트의 초민족적 태도는 전쟁 초기까지도 이어져갔다. 일례로 주재 바이에른 대사 하인리히 폰 투허 남작(Baron Heinrich von Tucher, 1853-1925)이 1914년 러시아 전선에서의 첫 패배 이후 테셴을 방문하여 콘라트를 만났을 때 그에게 '엄격한 체제'와 ' 독일과의 긴밀한 연합(Anschluss)'만이 오스트리아를 구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투허는 1866년 이후 프로이센의 지배 하에서 바이에른이 이룬 '놀라운 진보'를 예로 들며, ' 프로이센과의 연합이 바이에른의 자율성을 제한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독일 민족주의처럼 민족적 이익으로 뭉쳐진 독일 제국과는 다르게, 일반적 이익으로 결속된 다언어 이익공동체 형식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다민족 제국으로서의 정체성과 위상을 가졌다고 보았기에 특히 오스트리아를 바이에른과 비교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나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군사적 패배와 제국 내 균열은 그의 입장을 서서히 바꾸어놓았다. 특히 체코 민족주의의 위협이 심각했는데, 마사리크와 같은 온건파들마저 전범 신세로 전락할 것을 우려해 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슬라브계 병사들이 전쟁 초기부터 동족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 반발하고, 특히 다민족 제국에서 그나마 보장받던 지위마저 독일의 영향력 증대로 위협받자 더욱 이탈하며, 대러시아전에 투입하기에는 신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전향이 단순한 이념적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세계관은 다윈의 생존투쟁 개념과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근거한 과학적 유물론에 기반했다. 이는 그로 하여금 프란츠 요제프 1세, 페르디난트 대공,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 등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전통과 종교적 교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반면에 콘라트는 신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신이 있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고, 기독교 교리와 군인의 의무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태도는 상황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입장을 조정할 수 있게 했고, 그의 생존투쟁 관점은 제국에서 민족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이러한 변화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는 러시아 사회주의의 물결이 서방을 덮치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했는데, 이는 계급투쟁이라는 사회주의적 해석보다 민족 간의 생존투쟁이라는 사회진화론적 해석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적어도 한번은 지나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열광을 꾸짖기도 했다. 1918년 3월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은 이러한 그의 인식을 더욱 강화했다. 러시아 루마니아의 완전한 전쟁 이탈을 가져온 이 조약을 그는 '동방의 시대적 사건들' 중 하나로 보며, 유럽이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종말과 함께 거대한 변화의 과정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했다.

그의 대독일주의로의 전향은 1918년 2월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전직 참모 장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쟁을 "독일의 존재를 위한 투쟁"이라고 묘사했으며, 오스트리아의 독일적 성격을 강조하고 독일과의 통합을 지지하는 독일 국민 연합(Deutschnationalen Verein)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9명의 제국원수들 중 유일하게 이러한 대독일주의적 감정을 표현했다는 사실은 그의 입장 변화의 극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이후 그의 이러한 입장은 루덴도르프와의 우호적 관계로 이어졌는데, 둘은 같은 非기독교적 세계관을 공유했으며 특히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군대와 사회가 보여준 엄격한 규율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82]

이러한 전향은 철저히 현실적 판단에 기반했다. 그는 여전히 군주제를 가장 효과적인 통치 체제로 보았지만, 그것도 '자유주의적 사고와 순수하게 독일 지향적인 군주' 하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고, 그러한 조건의 군주제가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독일 지향의 공화국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그는 다민족 제국이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때, 자신의 기존 입장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적 대안을 모색했다. 독일과의 연계를 선택한 것은 자신의 독일계 배경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강대국이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동맹국이었다는 현실적 판단이 더 중요했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접근은 그의 과학적 유물론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이 현실적 생존을 위한 적응을 중시했기 때문이었고, 특히 브루실로프 공세의 패배와 제국의 균열, 슬라브계 병사들의 신뢰성 문제 등을 직접 목격하면서 이념보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83]

역설적인 것은 정치적 입장에서는 이처럼 유연했던 그가 군사 전술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경직된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사실 그는 초기에는 전술적 유연성을 보여주었는데, 처음에는 포병을 중요하게 보지 않다가 보어 전쟁 경험 후에는 포병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등의 변화를 보였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에는 치체리치가 전장에서 관찰한 새로운 전술 현실을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기존 공격 중심 전술을 더욱 강화했다. 전술적 문제에 있어서 포병운용, 지형활용, 기후조건, 기관총 운용 등에 대해 고정된 견해를 고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직성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50대 이후 새로운 전술 수용에 소극적이었던 나이의 문제도 있었고, 보불전쟁 경험에 과도하게 의존했던 점, 전술가로서의 명성이 오히려 새로운 변화 수용을 방해했다는 점도 있었다. 특히 전술 분야는 그의 핵심 전문성이었기에 오랜 기간 형성된 확신과 이미 성공적이었던 경험을 쉽게 바꾸지 못했고, 새로운 전술 현실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정치적 위기를 직접 경험하면서 과감한 변화를 수용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2.3.9.13. 제국의 붕괴와 무력한 은퇴
1918년 4월 이른바 '식스투스 사건'으로 카를 1세의 비밀 평화 계획이 대중에게 알려졌을 때,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은 지금까지 가장 큰 균열을 경험했다.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가 충격적인 폭로를 한 후, 합스부르크 황제는 그 소식을 부인했고 빌헬름 2세는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카를 1세는 콘라트를 바덴으로 소환하여 자문을 구했다. 콘라트는 황제의 부인에 대해 진실성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는 황제의 입장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분리 평화를 추구하는 동기를 이해한다고 표명했다. 독일과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과거에도 불구하고, 두 제국의 운명은 이제 연결되었고 모든 차이를 넘어서 '함께 진행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 달 카를 1세가 스파에서 빌헬름 2세를 만났을 때, 독일은 동맹국 간의 구속력 있는 군사 협정과 이탈리아에 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또 다른 공세를 요구함으로써 카를 1세의 충성심을 시험했다. 5월 12일 카를 1세는 예비 군사 협정에 서명했고, 다소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공세에도 동의했다. 전선에서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1900년생 젊은이들의 징병을 승인했다. 콘라트와 대부분의 장군들은 새로운 공세의 전망을 환영했고, 새로 징집되는 병사들 대부분이 17세 소년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하고 1918년 3월에 시작된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공세가 성공적으로 보이면서, 남부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콘라트는 1916년 실패한 트렌티노 공세의 기본 계획을 다시 제안했다. 당시 알프스 돌출부에서 아드리아해로의 진출이 날씨와 혼란스러운 지휘 체계 때문에 실패했었지만, 이번에는 여름에 콘라트가 직접 지휘하기로 했다. 하지만 보로예비치 카를 1세에게 다른 조언을 했다. 독일이 협상국과 휴전에 동의할 날을 대비해 평화 회담의 협상 카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세가 필요하다면 피아베강을 건너 이탈리아군 본대와 맞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콘라트와 보로예비치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카를 1세와 그의 참모들은 가용 병력을 양쪽에 나누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콘라트는 25개 보병사단을 요청했으나 17개 보병사단과 3개 기병사단만을 배정받았다. 그나마 포병 지원도 보로예비치의 2,500문에 비해 훨씬 적었다. 게다가 AOK가 메츠거의 제1보병사단을 스위스 국경 근처 티롤 전선 서쪽 끝의 예비 공격에 투입하기로 결정하면서 병력은 더욱 분산되었다. 메츠거는 토날레(Tonale) 고개를 통해 롬바르디아로 진격하기로 했으나, 이 잘못 구상된 작전은 시작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다.

6월 15일, 콘라트는 그라파산 전선에서 공격을 시작했고, 동시에 보로예비치 피아베강 전선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의 군대는 보급과 물자가 형편없는 상황에 대부분의 부대는 적절한 포병 지원 없이 공세를 시작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군은 첫날 성공을 거두었다. 콘라트 집단군은 비첸차 (Vicenza) 지역에서 트렌티노 고원능선을 따라 양면공격을 시작했다. 반면 보로예비치 집단군은 피아베강 지역을 따라 총공격을 가했다. 보로예비치 집단군이 피아베강을 가로질러 돌진하여 15마일 너비의 적 전선에 구멍을 뚫는 처음 몇 시간 동안 콘라트는 알프스 산맥에 자리를 잡았고, 1만 명의 이탈리아군 포로를 잡았다. 그러나 콘라트의 진격은 곧 이탈리아군, 영국군, 프랑스군 부대를 상대로 좌절되어 콘라트 집단군의 3분의 2가 다시 그들의 원래 위치로 후퇴했다. 한편, 이탈리아의 증원군이 균열을 봉쇄하는 사이 동쪽의 보로예비치 집단군의 침투는 겨우 5마일의 깊이에 도달했다. 이탈리아군은 곧바로 선제포격과 촘촘한 방어선 대응하였다. 결국 보로예비치 집단군은 교두보를 유지하는데 실패했고, 다음 날 보로예비치의 두 번째 싸움에서 완전히 파괴되어 실패했으며, 강둑에 약간의 교두보를 만든 시점에서 오스트리아군은 2만명이라는 대량의 전사자를 포함해 15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결국, 6월 19일, 아르만도 디아츠는 이탈리아군에게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격을 명령해 강둑의 교두보를 탈환하면서 그 다음 날인 6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피아베강 도하 철수가 명령되면서 전체 공세가 포기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마지막 큰 도박은 또다른 재앙으로 끝났다. 콘라트와 보로예비치의 군대는 전사자, 부상자, 포로 모두 합쳐 15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이중 거의 절반인 7만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8만 4천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공세의 실패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려 더 이상의 공격 작전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다만 그런 패배를 당했음에도 다행히 이탈리아군은 곧바로 진격하지 않았고, 콘라트와 보로예비치 이탈리아군과 반격에 맞서 간신히 원래의 방어선을 지켜냈다. 이는 겪은 손실을 고려할 때 쉽지 않은 일이었고, 더구나 6월 25일 카를 1세 힌덴부르크의 명령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부대를 서부전선 증원을 위해 이동시키는데 동의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여기에는 메츠거의 제1보병사단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7월 15일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독일군에게 불리하게 전세가 기울어진 뒤였다. 콘라트의 차남 에르빈도 같은 사단의 참모장교로 복무했고 서부전선에서 전쟁을 끝마쳤다.

실패한 공세의 책임을 물어 카를 1세는 희생양을 찾았다. 제국의회가 7월 16일 재개될 예정이었고, 정부는 실패한 공세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의 터무니없는 계획으로 콘라트의 이전 공세들마저 합리적으로 보이게 만든 카를 1세 자신의 AOK가 비난받아 마땅했음에도, 그는 콘라트나 보로예비치 둘 중 하나를 해임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제국을 보존하려는 희망을 여전히 가지고 있던 카를 1세는 정치인들의 불만족과 남슬라브인들의 충성심 상실을 우려해 보로예비치의 해임을 꺼렸다. 결국 페르디난트 폰 마르테러(Ferdinand von Marterer) 장군의 조언에 따라 콘라트의 해임을 결정했다.

7월 11일 콘라트는 수도로 소환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3일 후 카를 1세 북쪽 에카르트사우 궁(Schloss Eckartsau)의 관저에서 직접 이 소식을 전했다. 이 마지막 만남에서 콘라트는 암울한 군사 상황을 평가하며 '군대는 방어 진지를 지킬 것이지만, 더 이상의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그의 해임은 다음 날인 7월 15일 월요일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카를 1세의 공식 발표문은 마치 콘라트가 이 조치를 주도한 것처럼, '은퇴에 대한 당신의 거듭된 요청을 수락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콘라트를 해임하면서 카를 1세는 그에게 근위대 총사령관이라는 의례적인 직책을 제안했다. 백작도 1906년 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날 때 이 직책을 받았었다. 콘라트에게는 이 명예직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거절을 고려했으나, 지나와 전화 통화 후 그녀의 조언에 따라 수락했다. 이후 보첸으로 돌아가 크로바틴에게 지휘권을 이양했다. 곧이어 카를 1세의 편지로 세습 백작 작위가 수여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는데, 이는 오히려 콘라트의 분노를 샀다. 그는 저널리스트 카를 프리드리히 노바크(Karl Friedrich Nowak)에게 이러한 것들에 '절대적으로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는다'고 말했고, 자신이 '은퇴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해임당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도 좋다는 허락을 했다.

근위대 총사령관으로서 콘라트는 형식적으로는 전쟁 종료 시까지 현역으로 남아있었다. 티롤 지휘권에서 해임된 직후 그는 사라예보 암살 사건 이후 1918년 1월 18일 아들 쿠르트의 장례식에 참석한 하루를 제외하고는 계속 임무 수행 중이었다는 점을 들어 4개월의 휴가를 신청했다. 카를 1세는 11월 15일까지 어떠한 임무도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며 이를 승인했고, 그 기간 동안 콘라트의 오랜 친구 단클이 임시 근위대 총사령관직을 수행했다.

7월 중순 콘라트는 아내와 함께 보젠을 떠나 에서 며칠을 보낸 후, 예전에 거주했던 필라흐(Villach)에서 은둔했다.[84] 9월 초, 서쪽의 베르됭에서 복무중이던 메츠거는 독일군의 빈약한 무기와 지친 상태가 1915년 당시의 '카르파티아의 겨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상기시킨다며 독일 제국의 붕괴를 예언하는 편지를 보냈다. 콘라트를 방문하는 사람은 친인척과 가까운 지인들뿐이었는데, 여기에는 사별한 아내의 동생이자 제55보병사단장인 아우렐 폰 레 베아우(Aurel von Le Beau, 1866-1922)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를 1세가 주최한 무도회에서 콘라트는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무공훈장, 2급 무공훈장, 제국의회 상원 종신회원권과 제국원수 지휘봉을 받았지만, 필라흐로 돌아온 후 이를 '코미디'라며 일축했다.

9월 20일, 콘라트 부부는 지나의 어머니가 있는 트리에스트를 방문했다. 6주 동안 아드리아해에서 수영을 하거나, 지나와 산책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휴가를 보냈다.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는 직감에 콘라트는 아름다운 아드리아해의 해변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10월 24일 이탈리아 전선 제국군이 무너지자 북쪽으로 가는 도로와 철도는 후퇴하는 군대, 탈영병들, 난민들로 혼잡을 이뤘다. 10월 29일 콘라트는 트리에스트를 떠나 장모와 작별을 고했고, 아내와 함께 20시간을 기다린 끝에 10월 30일 으로 돌아왔다. 11월 4일, 이탈리아 왕국군 합스부르크의 통치가 무너진 트리에스트를 점령했다.[85] 그리고 그 날에는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임시 국민 의회는 사회민주당 지도자 카를 레너가 초안 헌법을 채택했다. 2주 동안 제국 정부는 점차 붕괴되어 새로운 공화국에 권력을 이양했다. 한편, 콘라트와 지나는 혼란 속에서도 완전히 은둔하며 살았다. 전쟁의 마지막 몇 주 동안 콘라트의 관심은 이제 그의 살아남은 두 아들들에게 돌아갔다. 1918년 10월 초, 프랑스 서부전선에서 메츠거 휘하에서 복무 중이던 차남 에르빈과 베네치아에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 중이던 막내 아들 에곤이었다. 다행히 두 아들들은 제국의 붕괴 이후 무사히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18년 여름, 유럽의 옛 질서가 무너져가고 있었고, 콘라트에게 중요했던 거의 모든 것들이 함께 사라져갔다. 콘라트는 현대적 군사주의와 전통에 대한 경멸로 처음에는 권력을 잡을 수 있었지만, 그의 공격성은 전쟁을 촉발시켰고 결국 자신이 쇄신하려 했던 군대와 제국 모두를 파괴했다.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인물들 중 상당수는 최후의 붕괴를 목격하기 전에 사망했다. 1918년 2월에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4월에는 건축가 오토 바그너, 10월에는 화가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와 에곤 실레가 세상을 떠났다.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암살자가 前 총리 티서 이슈트반의 목숨을 빼앗았는데, 이는 그의 나라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기 며칠 전이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 빅토르 아들러는 그의 당이 승리의 순간을 맞이하여 합스부르크 군주제를 대체할 오스트리아 정부 수립을 돕고 있을 때 죽었다. 아들러는 1852년 콘라트와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1918년 11월 11일 콘라트의 생일에 사망했다. 1918년 7월 해임 이후 콘라트 역시 때때로 죽음이 그처럼 자신을 방문해주기를 바랐겠지만, 그는 최후의 붕괴를 목격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1월 중순, 근위대 대장으로서의 임무를 맡아야 할 때쯤에는 이미 황제도, 군대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없었다. 그의 공식 퇴역은 카를 1세가 퇴위한 지 3주 후인 1918년 12월 1일자로 기록되었다.

2.4. 말년과 죽음

10월 30일 의 남부역에 도착했을 때 푸츠가 플랫폼에서 콘라트 부부를 맞이했다. 2일 후 이탈리아 왕국군 트리에스테를 점령하자, 지역 민족주의자들이 콘라트를 찾아 지나의 어머니가 사는 아파트를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18년 11월, 콘라트는 출생지와 현재 거주지를 근거로 오스트리아 공화국 시민권을 선택했다. 공화국이 모든 귀족 작위를 폐지하면서 그의 세습 백작 작위는 4개월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콘라트의 이름도 기존의 귀족식 이름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Count Franz Conrad von Hotzendorf)"이 아닌 "프란츠 콘라트회첸도르프(Franz Conrad-Hotzendorf)"가 되었다.

그는 이후 합스부르크 출신 장교들을 지원하고 일자리를 주선하기 위해 설립된 자조 단체인 '전문 장교 협회(Berufsgagistenosenschaft)'의 창설을 지지했다. 또한 오스카어 자이스(Oskar Zeiss)[86] 대령이 이끄는 퇴역 군인 단체 "전면 전사 연합"(Frontkampfervereinigung)에도 가입했다. 그러나 독일에 있는 그의 동료들 중 일부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을 때, 콘라트는 정치 생활에 대한 열망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의 살아남은 아들들인 에르빈과 에곤은 상업학교(Handelsakademie)에 등록하여 사업 경력을 위한 재교육을 받았다.

1918년 11월 이탈리아 군대 인스브루크를 점령했다. 콘라트 부부가 그곳으로 이사했을 때 군대는 여전히 도시에 주둔하고 있었고, 수비대의 장교들은 티롤러 호프(Tiroler Hof)에 살았다. 이탈리아 장교들은 콘라트를 존경하고 우대하였다. 콘라트는 이탈리아를 싫어한다는 평판을 분명히 하면서도 장교들에게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 " 이탈리아의 정책" 자체가 콘라트의 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콘라트는 이탈리아의 문화, 이탈리아 사람들, 그리고 그들 나라의 자연미에 대해 가장 큰 감탄을 했다.[87]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콘라트 부부는 인스브루크 시내의 티롤러 호프 호텔에서 지냈다. 공화국이 전직 장성들에게 지급하는 연금이 빈약했고, 지나가 이혼 정산금으로 받은 한스 폰 라이닝하우스(Hans von Reininghaus)의 호텔 체인 주식 12만 크로네가 무가치해지며 "거의 무일푼"이 되었다. 모든 오스트리아인들처럼 전후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의 영향을 받았다. 호텔 아파트는 "두 개의 작은 방"이었지만 알프스의 장관을 볼 수 있었다. 지나는 생애 처음으로 요리를 배워 식사를 준비했고, 콘라트는 설거지를 도왔다. 그는 인스브루크 대학 교수들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로마 철학자들에 대해 토론했고, 음악을 사랑했는데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의 "불의 마법(Feuerzauber)"을 좋아했다.

이후 콘라트는 인스브루크에 머물면서 노년을 보냈다. 그의 전쟁에 대한 견해는 1867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원제와 민족 문제 해결 실패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지나의 회고에 따르면, 콘라트는 오스트리아 독일과의 합병을 통해 구원받아야 한다고 확신했다.[88] 그는 "나는 자유주의적 사고와 순수하게 독일 지향적인 군주 하의 군주제를 지지한다. 그렇지 않다면 독일 지향성을 엄격히 유지하는 공화국을 선호한다"고 말했다.[8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체 전사자 수는 150만 명, 부상자는 190만 명, 포로는 120만 명에 달했다. 말년에 콘라트는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에르빈은 콘라트의 쿠르트가 죽은 이후 사실상의 장남이었지만 37세의 그는 아직 자식이 없었다.[90] 그의 개인적인 서류들은 지나에게 상속될 것이고 그녀가 죽은 후에는 막내 에곤의 아들인 그의 첫째 손자 프란츠에게 상속되기로 정하였다. 에곤은 손자 프란츠의 아버지로서 상속대리인을 맡았다. 콘라트의 사적 서신은 모두 에곤에게 갔고 이를 자유롭게 출판하거나 폐기하는 것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콘라트의 개인 소지품, 칼, 그리고 다른 군사 기념품들은 그의 손자 프란츠에게 남겨졌다. 콘라트는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줄 작은 기념품들을 선택할 것을 제안했는데, 그들 중에는 보좌관 루돌프 쿤트만과 조이터, 편집 보좌관 프리드리히 플라처(Friedrich Platzer), 저널리스트 카를 프리드리히 노바크, 그리고 리처드 폰 스턴(Richard von Stern)이 포함되었다. 그는 장례식을 간략하고 바로 그저 간단한 묘비만을 요청했다. 그는 지나가 나중에 죽으면 자기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는 1921년 4월 17일 리콜라 출판사(Rikola Verlag)와 계약을 맺고 회고록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지나에 따르면 이는 "우리가 굶주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경제적 이유였다. 리콜라 출판사는 인스브루크에 사무실을 제공했고, 콘라트는 매일 아침 이곳에서 집필했다. 전 참모본부 장교인 프리드리히 플라처와 카를 자우스너(Karl Zausner)가 보조원으로 일했다. 첫 번째 권은 1906년부터 1909년의 시기를 다룬 676페이지로 1921년 10월에 출간되었는데, 콘라트는 생애 말년에 영어를 배우며 아홉 번째 언어를 습득했다.[91] 1921년 회고록의 첫 권에서 그는 미국을 예로 들며 다양한 민족들이 영어라는 하나의 공통 언어로 통합된 강대국을 이룬 것을 언급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도 독일어 미국에서의 영어와 같은 역할을 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10년부터 1912년까지의 시기를 다룬 472페이지의 두 번째 권은 1922년에, 1912년부터 1914년 6월까지를 다룬 815페이지의 세 번째 권은 1923년 초에 출간되었다. 첫 두 권이 비교적 일관성 있게 서술된 반면, 세 번째 권에는 콘라트의 서신이나 대화 회의록과 같은 가공되지 않은 1차 자료들이 더 많이 포함되었고, 연대기적 틀은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서 주제별로 내용이 정리되었다. 956페이지 분량의 4권은 사라예보 암살부터 1914년 9월까지의 3개월을 다루었다. 여기서 콘라트는 독일 마른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이미 동맹국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주장했고, 이로 인해 독일에서 논란이 되어 일부는 책을 보이콧했다.[92] 한 달 뒤인 1924년 1월에 그는 심각한 병을 앓게 되었고, 그럼에도 1914년 10월부터 12월까지의 기간을 다룬 1007페이지 분량의 5권을 집필했다. 회고록은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이탈리아 참모본부에서는 각 권을 완역했다.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에 콘라트의 막내 아들 에곤과 그의 부인 칸디다 "칸다" 폰 블라제코비치(Candida "Canda" von Blažeković) 부부는 콘라트에게 뜻깊은 선물을 주었는데, 바로 클라겐푸르트에서 태어난 손자 프란츠였다. 이는 그들이 11개월 전에 콘라트에게 첫 손녀 엘리자베트를 선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콘라트는 회고록 작업을 중단하고, 대신 자신의 초기 경력, 즉 1878년부터 1882년에 이르는 보스니아 시기의 일기와 회고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원고는 베를린의 문화-정치출판사(Verlag für Kulturpolitik)에 판매되었다. 1925년 1월,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1924년 가을까지 완성하려 했던 계획을 1년 이상의 병으로 인해 이룰 수 없었다고 밝혔고, 또다시 안슐루스에 대한 호소를 포함시켰다. 실제로 담낭 질환을 지병으로 앓았던 콘라트는 1월 이후로 심각한 병세를 보였고, 1925년 8월 23일에는 폐 질환으로 쓰러졌다. 8월 24일 저녁에 콘라트는 지나와 도미노를 즐기고 몇 통의 편지를 구술했으며, 다음날 아침에는 의사가 숟가락으로 커피를 먹여주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습니다 - 제 인생에서 저는 항상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원했죠"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의식을 잃었다. 결국 5번째 회고록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1925년 8월 25일 정오 독일 바트 메르겐트하임(Bad Mergentheim)의 병원에서 향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틀 후, 8월 27일 목요일 아침에 의 주요 신문사들은 그의 죽음을 호외로 냈고, 콘라트의 부고 소식을 접한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그를 친애하는 동지였다며 애도하였다. 막내아들 에곤이 가족을 대표하여 아버지의 유해를 가지고 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가 파사우 국경에 도착했을 때, 독일군은 콘라트의 유해를 오스트리아 육군 의장대에게 넘겼다. 그곳에서 둘째형 에르빈이 에곤과 합류하여 아버지의 유해와 함께 으로 향했다. 기차는 린츠, 엔스(Enns), 멜크(Melk), 장크트푈텐에 한번씩 정차하여 지역 수비대의 장교와 병사들이 콘라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할 수 있었다. 8월 27일 오후, 기차는 마침내 종점 지역인 빈 베스트반호프 역(Wien Westbahnhof railway station)에 도착하였다. 역에는 공화국의 내각 장관들과 군 상층부 인사들, 그리고 크로바틴 단클을 비롯한 콘라트의 옛 동료 장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례식은 9월 2일의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주관 아래 국장(Staatsbegräbnis)[93]으로 치러졌고 100,000명 이상의 조문객이 참석했는데, 이는 그가 요제프 라데츠키 이후 가장 인기 있는 군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거 라데츠키의 장례식에서 당시 젊었던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직접 칼을 빼들고 장례 행렬을 지휘하며 유럽 최고의 군대가 화려한 도열을 했던 것과 달리, 콘라트의 장례식에서는 대부분 평복 차림의 전우들이 참석했다. 이미 과거의 영광은 빛바래졌고, 전우들은 7년 전에 무너진 제국의 패전 장교들이었지만, 그의 관이 지나갈 때는 평소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조차 콘라트를 당대 최고의 군인으로 인정했다. 그렇게 콘라트의 유해는 그가 사랑했던 삼남 헤르베르트 비롯해서 가족들이 묻혀있는 히칭 묘지에 안장되었다.[94]

3. 평가

파일:Franz Conrad von Hötzendorf(portrait photography).jpg
"le maréchal Conrad était non seulement l'esprit le plus brillant dans le camp des Puissances centrales, mais dans toute la Guerre mondiale."

"콘라트 원수 동맹국 진영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대전 전체 인물들을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인물이었다."
앙리 구로[95]

콘라트 사망 당시 폴란드를 방문하고 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콘라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이에 그는 콘라트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언급하였고, 이 발언은 1925년 9월 14일 오스트리아 빈 주말 신문(Wiener Sonn- und Montags-Zeitung)에 실리게 되었다.

콘라트와 같이 복무했던 전 동료 장성들에게 있어서 콘라트는 천재였다. 아닌 말로 과장 아닌 과장을 보태면 그의 추종자들은 콘라트를 사부아 공자 외젠에 비견된다고 자부하였다. 그의 공격적인 전투 교리는 군부 내에서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았고, 종전 후에도 세간에서는 그를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제국에 헌신하여 적과 맞선 훌륭한 영웅이라고 인식했을 정도였다.

3.1. 지휘 스타일과 성격

콘라트는 매우 독특한 업무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참모부 작전실에서도 부관들과 함께 작전을 구상하기보다는 혼자 연구하는 것을 선호했다. 참모총장으로서 그의 일과는 국장들과 다른 부하들과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가 물려받은 조직에는 작전국, 별도의 철도국과 전신국, 그리고 지도제작, 정보(Evidenzburo), 인사 문제(Direktionsburo)를 담당하는 부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육국(Instruktionsburo)은 장차 참모장교가 될 인재들의 입학시험을 관리하고 참모본부 실습과 같은 훈련 과정을 계획했다. 부관들은 매일 그에게 보고를 해야 했지만, 콘라트는 그들의 의견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협조성이 부족했던지라 남들을 믿지 못했던 콘라트는 제국군의 모든 작전 계획들을 본인의 검토 및 승인하에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군의 전쟁 준비태세를 개선하기 위해 그는 결국 병참국(Etappenburo)을 신설하여 작전 참모진의 동원 계획 부담을 덜어주기도 했다. 이러한 업무 스타일은 독일 제국군과의 합동작전에서도 다소 마찰을 일으켰다.

참모총장으로서 그는 매주 황제와의 알현 특권을 가졌으나, 궁정에 대한 접근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전임자인 은 황제를 개인적으로 20년 이상 알고 지냈고, 황제의 군사 비서실장으로도 일했던 반면,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콘라트를 평판으로만 알았고, 이후에도 그들의 관계는 결코 가까워지지 않았다. 은 심지어 매년 여름 휴가 때 황제와 함께 바트 이슐(Bad Ischl)에서 사냥을 했지만, 콘라트에게는 이런 친분이 없었다. 콘라트는 궁정의 예의범절을 싫어했고 "귀찮은 의식"이라고 여겼으며, 특히 빌마가 사망한 후 홀로 이런 의무를 수행해야 했던 것을 두려워했다. 황제와의 알현 시간도 에렌탈을 무너뜨리려는 시도에 활용하려 했고, 이는 결국 황제와 외무장관 모두와의 갈등을 초래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대공의 지원 아래 콘라트는 점차 자신의 직책과 권한을 확대해나갔다. 1908년부터 황제는 콘라트에게 외무장관과 직접 연락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이후 참모본부는 점진적으로 황립 및 왕립 전쟁성으로부터 독립성을 획득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방장관들과도 양국 수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연락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해외 주재 무관들과도 황립 및 왕립 전쟁성과 외무성을 거치지 않고 직접 연락할 수 있게 되었다.

콘라트는 군대 개혁에도 착수했다. 황제 시대의 연례 군사훈련을 완전히 바꾸어, 대본이 있는 시나리오와 일일 시작선을 없애고 각 측에 군단을 배치하여 실제와 같은 조우전을 벌이게 했다. 최소 3일간의 연속적인 전투를 통해 장교들의 주도성을 배양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심판들에게 사기와 "공격 정신" 유지를 위해 화력의 영향을 과소평가하도록 지시했고, 이로 인해 실제 전장에서는 큰 사상자가 발생했을 공격도 계속 진행되었다. 그의 " 현대주의"와 " 현실주의"로 인해 전통적인 기병 돌격과 폐회 열병식이 사라졌는데,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를 받아들이긴 했으나 결코 기쁘지 않았다. 한 역사가의 평가에 따르면, 황제는 "콘라트가 어떻게든 군대의 애정을 빼앗아갔다"고 느꼈다고 한다. 이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군대"가 "콘라트의 군대"로 변모하는 과정을 상징했다.

그만큼 콘라트는 군부 내에서 상당한 카리스마와 입지를 가진 지도자였다.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 교수 시절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49명의 장교들이 1917년에는 장성이 되어 있었고, 이들은 콘라트의 사상을 충실히 따르며 군부의 고위직에서 그를 지지했다. 그의 영향력 하에서 전쟁대학의 교육과정도 크게 변화했는데, 1906년 가을 입학생부터 2년 과정을 3년으로 연장했고, 1907년에는 교과과정을 더 실용적이고 덜 이론적으로 개편했다. 예를 들어 지리학 교육을 지도제작과 분리했고, 문화사를 정치학으로 대체했다. 1887년부터 필수과목이었던 러시아어 영어와 함께 선택과목으로 변경했는데, 이는 러시아가 아닌 이탈리아를 장차 가장 유력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적으로 본 그의 판단이 반영된 것이었다. 또한 학교 운영에 있어서도 개혁을 단행했는데, 알프레트 크라우스 소장이 교장으로 있던 전쟁대학에 기회주의자들, "아첨꾼들과 알랑쇠들"(Kriecher und Speichellecker), "교조주의자들과 형식주의자들"을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교육 개혁의 영향은 장기적으로 나타났는데, 참모총장 임명 직후인 1906년에서 1907년 시기 이후에 개편된 교육과정의 졸업생들 중 1909년부터 1914년까지의 기수들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계급이 너무 낮아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으나, 30년 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후계 국가들의 군대, 독일 국방군, 무장친위대에서 주요 역할을 했다. 부하들과의 일상적인 관계에서는 엄격하면서도 공정했으며, 나이나 출신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장교들을 등용했다.[96]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인간관계 능력은 매우 불균형적이었다. 젊거나 부하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성공적이었으나, 상급자들과의 관계는 매우 놀라울 정도로 실패했다. 이러한 특징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어 그는 많은 부하들의 약점을 보지 못했고, 부하들 역시 그의 약점을 보지 못했다. 이는 전쟁 초기의 여러 실패로 드러났다. 세르비아 전선의 포티오레크, 친구 아우펜베르크, 러시아군에 거의 저항도 못한 제4군의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 렘베르크를 전투 없이 포기한 제3군의 브루더만 등 그가 믿었던 지휘관들이 연이어 실패했다. 게다가 참모부에서도 전략예비대(B-Staffel)의 러시아 전선 도착 시기를 잘못 예측한 에밀 라첸호퍼(Emil Ratzenhofer)[97]나, 콘라트의 충실한 부관으로 장차 그의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결국 콘라트와 함께 물러나야 했던 메츠거 등 많은 약점이 드러났다. 반대로 콘라트의 부하들은 그가 뛰어난 전술가였음에도 대전략가로서는 부족했다는 점을 보지 못했고, 이는 결국 동원계획의 실패와 초기 전투에서의 패배로 이어졌다. 더구나 그의 교리 부재와 독창성 강조는 특히 예비역 장교들에게 더 큰 혼란을 가져왔는데, 이들은 정규군보다도 더 주도성을 보이지 못했고 다민족 제국의 군대에서 필수적이었던 다국어 능력도 부족했다.

3.2. 사상

3.2.1. 초기 사상

콘라트의 생애 초반 부분 사상을 면밀히 살펴보면 과학적 유물론에 기반한 현대주의적 성향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콘라트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수상이 100년 전에 내세웠던 것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콘라트의 면모 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종교관이었다. 당시 콘라트는 고위직 군인으로서 주변에는 동료 장성들과 왕족, 귀족들이 많았다. 그들 대부분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반면, 콘라트는 이들과는 다른 종교관을 가지고 있어 특이한 인물로 여겨졌다. 신을 언급할 때마다 "신이 있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으며, 기독교의 가르침이 군인의 의무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이 군인으로서 적을 죽여야 하는 의무와 양립할 수 없음을 지적하며 이를 위선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사냥을 혐오하고 대부분의 전통을 경시하는 등의 성향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프란츠 요제프 1세, 페르디난트 대공,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과 같은 진정한 복고적,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늘 외부자로 남았다. 다만 그의 세계관은 사회진화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루트비히 굼플로비치(Ludwig Gumplowicz)와 구스타프 라첸호퍼(Gustav Ratzenhofer)와 같은 오스트리아의 선구적 사회학자들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굼플로비치와 라첸호퍼처럼 그는 인류의 발전이 초기의 '무리'에서 후기의 민족과 국가로 이어지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 "지구상의 모든 사건의 기본 원칙"이며 "정책 결정의 유일한 실제적이고 합리적인 기초"라고 주장했다. 평화주의자들의 가르침이 1900년간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인류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생존투쟁의 법칙이 더 강력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은 민족국가들과 소수민족들은 생존을 위해 일시적이거나 영구적인 동맹을 통해 공동의 경제적, 안보적 이해관계를 추구한다고 보았고, 이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정당화했다. 즉, 그가 지닌 이중제국에 대한 시선을 보면 혈연, 언어, 문화적 동질성에만 국한되는 민족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실질적인 공동 이해관계를 통해 결합된 다언어 이익공동체(polyglot Interessenstaat)로 보았다. 그 때문에 콘라트가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 대립하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대독일 민족주의자들("die großdeutsche Irredenta")을 이탈리아 이레덴티스트들과 동일하게 비판하였고, 급진적 민족주의에 대해서만큼은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 입장을 같이했다. 따라서 콘라트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다민족 제국으로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지하며 제국의 안정성을 추구했다.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 보면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콘라트는 빈 체제와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그의 현대주의적 성향과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은 메테르니히 시대의 보수적 질서 유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제국의 생존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콘라트의 사상은 종교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비롯하여 실용적인 전술가로서의 경험과 전통과 관습보다 실리와 효율성을 중시한 과학적 유물론 사상, 그리고 국가간 관계를 생존경쟁으로 해석하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이 독특하게 결합된 형태였고, 전통적인 군사 교리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서 현대전에 맞는 새로운 전술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 때문에 그가 군사 전문가로서 보여준 혁신성은 당시 보수적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군부 내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래서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일반적인 장성들과 다르게도 콘라트는 단순한 군사 전문가를 넘어 복잡한 지적 정체성을 지닌 군인이었으며, 그를 따르던 수많은 추종자들이 왜 콘라트를 사부아 공자 외젠에 비견된다고 자부했었는지, 콘라트의 교리가 군부 내에서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았고, 전후에도 많은 존경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3.2.2. 사상의 변화

그러나 그의 이러한 사상은 시간이 지나며 크게 변화했다. 콘라트는 세르비아 침공 당시 초기 공세의 좌절과 1916년 6월 4일에 발발한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절망적인 패배로 인하여 더 이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구원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이후 러시아 전선에서도 독일 제국군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제국군의 주 병력에서 거의 절반의 비중을 담당하는 슬라브계였다. 이미 슬라브계 병사들은 전쟁 초기부터 자신들의 동족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동요했으며 제국의 영향력에서 이탈하고자 하였다. 더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최소한 다민족 제국으로서 슬라브계의 이해관계를 일부나마 대변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순수 게르만계 국가인 독일의 지휘 하에서 독일의 이익을 위해 동족과 싸워야 하는 모순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독일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제국 내 슬라브계의 지위가 더욱 낮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컸기에 슬라브계 병사들의 동요는 더욱 심해졌다. 따라서 1916년 중반 이후 슬라브계 부대들이 대러시아전에 투입하기에는 신뢰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은 전장이 아닌 곳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본래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를 필두로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Austroslawismus)를 지지하며 제국의 한축을 이뤘던 보헤미아에서 1890년대를 기점으로 급진적 체코 민족주의가 대두했었는데, 기존에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지지했던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를 비롯하여 현실주의적 온건파 체코 민족주의자들은 가까운 장래에 체코 민족 역시 제국 내에서 자신들의 역량에 적합한 자치 및 평등을 확보할 수 있다는 희망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제국의 패색이 짙어지자 이대로 전쟁이 패배로 끝난다면 체코 민족은 동등한 주권도 보장받지 못한 상황에서 전범 신세로 억울하게 전락할 상황에 처했고, 결국 이들마저 제국과의 타협을 포기하고 망명을 통해 독립을 모색하는 등 급진적 민족주의의 불에 기름을 붓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콘라트는 슬라브계의 영향력 증대에 깊은 근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1916년 가을 이후에는 독일과의 긴밀한 연합(Angliederung)이 필연적이며, 오스트리아 독일 제국 위성국이나 그에 준하는 일부가 될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동시에 그의 세계관은 더욱 염세주의적으로 바뀌었다. 특히 아들들의 죽음, 전쟁 중에 겪은 헤르베르트의 전사와 쿠르트의 병사는 그의 사회진화론적 성향을 더욱 종말론적으로 만들었다. 이후 콘라트는 인스브루크로 이주한 뒤 더욱 노골적으로 자신의 독일 민족주의적 신념을 드러냈는데, 오스트리아 독일과의 통합에서 구원을 찾아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19년 가을,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독일 장군들과 긴밀한 서신을 교환하였는데, 그 중 에리히 루덴도르프와의 편지에서는 "우리 독일인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대독일주의적 견해를 공유했다. 군주제에 대한 그의 입장도 변화했는데, 여전히 군주제를 선호했으나 " 자유주의적 사고와 순수하게 독일 지향적인 군주" 하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고,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독일 지향의 공화국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를 "마지막 위대한 합스부르크"로 평가하며 프란츠 요제프 1세 카를 1세의 통치를 비판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에 대해서는 그의 신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859년 마젠타와 솔페리노에서 1866년 쾨니그그레츠로 이어진 실패를 지적하며 '다가올 위험을 직시하고 행동으로 예방할 용기'가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카를 1세에 대해서는 자신을 1917년 3월과 1918년 7월 두 차례에 걸쳐 해임한 것과 식스투스 사건으로 대표되는 독일과의 동맹 파기 시도를 비판했다. 실제로 1922년 4월, 34세의 나이로 사망한 카를 1세의 죽음을 오스트리아의 왕당파들이 큰 비극으로 애도했을 때도 콘라트가 그들의 슬픔에 동참했다는 증거가 없었다. 이는 그가 한때 신봉했던 다국적 이익공동체(Interessenstaat)로서의 제국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3.2.3. 군인으로서의 사상

그리고 이러한 그의 사상과 세계관 변화는 군사사상에도 반영되었다. 그의 초기 군사 사상은 1904년까지의 저술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 시기 그는 동시대의 어떤 군사 전문가보다도 전쟁의 모든 측면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기동전 제공권을 중시했으며, 1914년 8월에는 '그들이 내가 군대에 1,200대의 비행기를 추천했을 때 나를 바보라고 했다. 이제 그들은 내가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기존의 군악대, 열병식, 전통적인 규율 주입 방식에 반대했고, 혁신적인 전투 훈련 방법을 도입했다. 그는 대규모 보병의 신속한 기동과 적과의 조우전을 추구하는 미래의 군사 작전을 구상했으며, 이를 수백 대의 항공기가 상공에서 지원하는 형태를 예견했다. 그러나 1911년 보병 규정 개정 시에도 드러났듯이 경기관총의 역할과 포병 지원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했고, 야전 요새화를 공격 정신에 반한다며 경시했다. 또한 훈련과 기동에서도 비현실적인 속도를 가정하여 포병이 보병을 제대로 지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화력의 영향도 실제보다 크게 낮춰 평가하도록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화력과 방어의 중요성을 무시한 그의 이러한 전술 철학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다만 그가 일찍이 항공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상군과 항공기의 협동을 강조한 점은 주목할 만한 선견지명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장단점을 모두 지닌 콘라트의 군사사상은 참모총장 취임 이후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그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 이 지구상의 모든 사건의 기본 원칙이라는 인식이 정책 결정의 유일한 실제적이고 합리적인 기초"라고 주장했다. 그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와 달리 전쟁을 정치의 연장이 아닌 "정치의 대체물"로 보았는데, 이는 대 몰트케 장군이나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과 같은 저명한 군사 인물들과 공유한 견해였다. 그는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조건을 조성한 뒤에는 군인들이 그들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뒤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콘라트는 대전략가가 아닌 군사 전력가와 전술가로서의 전문성을 가졌기에, 대전략 분야에서는 쇼펜하우어 다윈의 개념에서 가져온 그의 광범위한 세계관에 의존했다.

그는 참모총장에게 필수적인 전략과 작전 기획 능력이 부족했고, 더구나 그의 임명은 이미 자신의 지적 정점을 지난 후에 이루어졌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전과 전시 중의 그의 결정들에서도 드러났다. 사실 그는 참모총장보다는 야전군 사령관 정도의 직책에 더 적합했고, 본인 스스로도 그 이상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까지 보여준 콘라트의 유연한 사고와 혁신적인 모습은 페르디난트 대공의 눈에 띄게 되었고, 결국 원하지 않던 참모총장 자리에 앉게 되었다. 콘라트의 초기 저술들을 살펴보면, 그가 군사 전략에 있어 확실히 유연한 사고를 가졌었음을 알 수 있다. 1891년에 출간된 전술 연구서 『전술 연구를 위하여(Zum Studium der Taktik)』에서 보오전쟁관련 글을 보면, 당시 콘라트는 포병 지원과 보병 공격의 조율이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때로는 보병이 포병 없이 독자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1903년에 저술한 『보병 문제와 보어전쟁의 현상들(Infanteristische Fragen und die Erscheinungen des Burenkrieges)』에서 그는 보어 전쟁의 교훈을 분석하면서, 이전과는 달리 포병 지원이 보병 작전에 필수불가결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전선 공격이 많은 사상자를 낼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공격을 포기하기보다는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나아가 이전에는 병사들의 사기가 수적 우위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던 그가, 이제는 수적 우세 역시 승리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를 보아 콘라트가 이때까지는 전쟁의 양상에 따라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판단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콘라트의 이런 면모는 그가 참모총장에 임명된 1906년 무렵,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약 10년 전에 일어난 러일전쟁때부터 점차 바뀌어 갔다. 당시 콘라트는 이 전쟁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러일전쟁은 전선이 끊김없이 이어진 최초의 전쟁이었다. 기존의 전쟁들에서는 전선 사이에 간격이 있어 적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는 빈 공간이 있었고 이를 통한 측면 공격이 가능했으나, 러일전쟁에서는 전선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어 적의 측면을 우회해서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결과적으로 정면 공격이 불가피해졌고, 이는 전통적인 측면 공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참관단 자격으로 전쟁 양상을 직접 관찰했던 막시밀리안 치체리치 폰 버차니는 이를 바탕으로 참호전, 야간 공격, 경기관총 등 새로운 전술적 혁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이러한 새로운 전술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일본군의 승리에서 자신의 기존 견해를 확인하려 했다. 물론 콘라트와 치체리치는 "도덕적 우월성", "공격 정신", "첫 전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러시아의 초기 방어적 태세가 패배의 원인이라고 분석했고, 보병 공격시 얇은 전투 대형의 필요성과 포병 지원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등 두 사람은 러일전쟁에 대해 대부분 일치된 견해를 보였으며, 단지 전투 대형이 얼마나 얇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의견 차이가 있었다. 사실 콘라트는 생애 초기와 보어 전쟁, 러일전쟁 경험을 통해 점진적으로 포병 지원의 중요성이라는 교훈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치체리치가 참호전, 야간 공격, 경기관총 등 새로운 전술적 혁신을 주장한 것과 달리 이러한 교훈을 실제 교리에는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1911년 보병규정에서 포병 지원에 대한 부분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고, 기관총의 치명적인 역할도 과소평가되었으며, 공격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오히려 총검이 선호되는 무기로 다시 등장했다. 이는 일본군 기관총 화력 하에서 한 번 전진했던 병사들은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고, 자신의 경험과 전문성만을 믿고서 실제 전투에서 현대 화력의 파괴력이 사기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러한 한계는 결국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무분별한 공세로 인해 포병 지원 없이 보병이 과도하게 희생되어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서 콘라트의 군사사상이 참모총장 임명 시기부터 이미 기본 원칙들에 너무 경직되어 새로운 전장 환경과 무기체계의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콘라트의 전체적인 군 경력을 통틀어보면 유연한 사고를 지녔던 사단장 시절과 이후 경직된 사고를 보여주는 참모총장 임명 시기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 둘의 행보가 상당히 대조된다는 점에서 콘라트는 피터의 원리(Peter's Principle)에 부합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2.3.1. 군사 개혁
콘라트는 참모총장 취임 이후 군의 현대화를 위한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1907년에는 그의 제안으로 제국군이 기존의 푸른색 제복을 산악전에 더 적합한 회색 제복(pike grey)으로 교체했다. 이는 산악전에서는 효과적인 위장이 되었으나, 동유럽의 평원 지대에서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다. 많은 후비군과 민병대 부대들은 1914년에도 여전히 구식 푸른색 제복을 입고 참전했고, 이는 동부전선 초기 공세 당시에 러시아군이 멀리서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2선, 3선 부대를 식별할 수 있게 했다. 그 외에 기병대 개혁도 추진했는데, 기존의 전통적인 기병대 역할에서 벗어나 정찰과 경계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폭파 훈련, 전신 부대, 기관총 등을 도입했으며, 교육 제도 개혁으로는 전쟁대학의 교육과정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했고, 이론 중심에서 실용적인 교육으로 전환했다. 예를 들어 지리학을 지도 제작과 분리하고, 문화사 대신 정치학을 도입했다. 또한 알프레트 크라우스를 교장으로 임명하여 기회주의자들과 아첨꾼들을 제거하고 교육의 질을 높이고자 했다. 황제기동훈련 체계도 대폭 개선했다. 기존의 대본대로 진행되던 훈련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바꾸어 지휘관들의 주도성과 창의성을 장려했다. 보통 한 군단씩 대치시켜 3일 이상 지속되는 실전적인 조우전 훈련을 실시했는데, 이는 장교들의 주도성을 키우고 병사들에게 실전과 가까운 경험을 제공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 방식에도 한계가 있었는데, 심판관들이 화력의 영향을 과소평가하도록 지시받았고, 실제 전장에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빠른 진군이 허용되었다. 또한 지휘관들이 훈련 성과를 위해 병사들을 과도하게 혹사시키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로 인한 사망자도 발생했다. 이러한 개혁들은 제국군의 현대화에 기여했으나, 실제 전쟁에서는 그 효과가 제한적이었다. 콘라트가 평시 훈련에서 화력의 영향을 과소평가한 것이 전쟁 초기의 과도한 희생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콘라트의 이러한 개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보다 현대적인 군대로 변모시키려 했던 중요한 시도였다고 평가된다.
3.2.3.2. 전시 작전 성과와 한계
콘라트의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가장 큰 한계는 그의 독특한 지휘스타일과 부하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났다. 그는 작전을 혼자서 구상하는 것을 선호했고, 모든 제안이 외부 검토 없이 그의 손에서만 나왔다. 거기다가 거친 성격 탓에 많은 장관들의 반감을 샀으며, 황제조차 그의 불필요한 전쟁 주장에 지쳐갔다. 물론 그에게는 독창성과 결단력, 침착함이라는 강점이 있었고 전략적 구상도 뛰어났으나, 실전에서 여러가지 현실적 요소들을 간과했다. 그러한 잠재적 위험들이 터진게 바로 전쟁 초기 갈리치아 전투였고,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제3군 사령관 브루더만 러시아군의 주력이 자신의 정면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 채 패배했고, 지켜야 할 요충지를 전투 없이 포기하는 실책을 저질러 해임되었다. 콘라트의 오랜 친구인 제4군 사령관 아우펜베르크는 코마루프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렘베르크-라바 루스카 전투에서 지체되어 패전의 원인을 제공했다. 콘라트가 본인의 후임 참모총장으로 추천했던 포티오레크 세르비아 전선에서 큰 실패를 겪었다. 또한 그가 과신했던 에밀 라첸호퍼 소령은 전략예비대 수송에 실책을 저질렀다. 이처럼 그가 신임했던 지휘관들이 연이어 실패를 겪었음에도, 콘라트는 아우펜베르크의 해임을 주저하는 등 개인적 친분 때문에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반대로 부하들은 콘라트가 뛰어난 전술가였음에도 대전략가로서는 부족했다는 점을 보지 못했고, 그의 판단을 맹목적으로 따르다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총력전 경험이 없던 그는 공세 외의 전술을 생각하지 못했고, 이러한 독선적 성향이 종종 작전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그가 자신의 부하와 부대를 맹신했지만 이들은 능력이 따라주지 않았고, 이들도 콘라트를 맹신했기 때문에 그의 잠재적 위험에 오히려 불씨를 지핀 꼴이 되었다.

또 한가지 알아야 할 점은 콘라트가 대전략을 짜기에는 능력이 부족할진 몰라도 전술가로서의 능력은 확실히 뛰어난 군인이었으며 의외로 군사 전략가로서 뛰어난 식견을 보여주기도 했다. 1915년 카르파티아 전투 이후 고를리체-타르누프 사이의 러시아 전선 돌출부에 대한 중앙 돌파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독일 측에 제안했다. 비스와강 카르파티아산맥 사이라는 지형적 이점과 철도망을 활용한 이 전략적 구상이 독일 제국군의 지휘 하에 실행되어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의 성공으로 이어졌으며, 세르비아 재침공에서도 콘라트의 계획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1917년 11월 이후에는 독일군의 지원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도 피아베강선 방어를 11개월간이나 유지했다. 다만 이같은 경우는 그의 전형적인 전략은 아니었는데, 1918년 6월 피아베강 전투에서도 콘라트는 여전히 알프스에서의 공격적인 작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카를 1세의 최고사령부가 그의 군대 일부를 보로예비치의 부대가 주둔한 이손초강 전선 방면으로 이동시키면서 전력에 구멍이 난 콘라트는 불가피하게 방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 제한된 병력으로도 11개월간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지켜낸 것이었다. 이처럼 공수 양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콘라트가 짜놓은 전쟁 계획은 종종 적의 힘을 과소평가하여 실패를 거둔 바가 있었다. 예를 들어 세르비아군은 콘라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전투에 나선 반면, 제국군은 무분별하게 패주할 뿐이었다. 동부전선의 초기 공세에서도 크라시니크와 코마루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후 연달아 패배를 겪고 렘베르크를 내주는 굴욕을 당했다. 이탈리아 전선에 대한 공세도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고,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특히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대패는 결정적이었다. 이러한 실수의 결과는 전쟁 첫 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치명적으로 약화시켰고, 이후 그의 군대는 독일 제국군의 막대한 지원을 통한 전투에서만 성공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는 결국 독일 제국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점차 전쟁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98]

그러나 콘라트의 전략적 구상이 완전히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1908년에 일반참모 실습 당시 플리치(Flitsch)와 톨메인(Tolmein) 사이의 이손초강 공격 계획을 구상했는데, 이는 나중에 콘라트의 계획을시 작전 성과와 한계 =====
콘라트의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가장 큰 한계는 그의 독특한 지휘스타일과 부하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났다. 그는 작전을 혼자서 구상하는 것을 선호했고, 모든 제안이 외부 검토 없이 그의 손에서만 나왔다. 거기다가 거친 성격 탓에 많은 장관들의 반감을 샀으며, 황제조차 그의 불필요한 전쟁 주장에 지쳐갔다. 물론 그에게는 독창성과 결단력, 침착함이라는 강점이 있었고 전략적 구상도 뛰어났으나, 실전에서 여러가지 현실적 요소들을 간과했다. 그러한 잠재적 위험들이 터진게 바로 전쟁 초기 갈리치아 전투였고,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제3군 사령관 브루더만 러시아군의 주력이 자신의 정면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 채 패배했고, 지켜야 할 요충지를 전투 없이 포기하는 실책을 저질러 해임되었다. 콘라트의 오랜 친구인 제4군 사령관 아우펜베르크는 코마루프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렘베르크-라바 루스카 전투에서 지체되어 패전의 원인을 제공했다. 콘라트가 본인의 후임 참모총장으로 추천했던 포티오레크 세르비아 전선에서 큰 실패를 겪었다. 또한 그가 과신했던 에밀 라첸호퍼 소령은 전략예비대 수송에 실책을 저질렀다. 이처럼 그가 신임했던 지휘관들이 연이어 실패를 겪었음에도, 콘라트는 아우펜베르크의 해임을 주저하는 등 개인적 친분 때문에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반대로 부하들은 콘라트가 뛰어난 전술가였음에도 대전략가로서는 부족했다는 점을 보지 못했고, 그의 판단을 맹목적으로 따르다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총력전 경험이 없던 그는 공세 외의 전술을 생각하지 못했고, 이러한 독선적 성향이 종종 작전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그가 자신의 부하와 부대를 맹신했지만 이들은 능력이 따라주지 않았고, 이들도 콘라트를 맹신했기 때문에 그의 잠재적 위험에 오히려 불씨를 지핀 꼴이 되었다.

또 한가지 알아야 할 점은 콘라트가 대전략을 짜기에는 능력이 부족할진 몰라도 전술가로서의 능력은 확실히 뛰어난 군인이었으며 의외로 군사 전략가로서 뛰어난 식견을 보여주기도 했다. 1915년 카르파티아 전투 이후 고를리체-타르누프 사이의 러시아 전선 돌출부에 대한 중앙 돌파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독일 측에 제안했다. 비스와강 카르파티아산맥 사이라는 지형적 이점과 철도망을 활용한 이 전략적 구상이 독일 제국군의 지휘 하에 실행되어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의 성공으로 이어졌으며 1917년 11월 이후에는 독일군의 지원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도 피아베강선 방어를 11개월간이나 유지했다. 다만 이는 그의 전형적인 전략은 아니었는데, 1918년 6월 피아베강 전투에서도 콘라트는 여전히 알프스에서의 공격적인 작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카를 1세의 최고사령부가 그의 군대 일부를 보로예비치의 부대가 주둔한 이손초강 전선 방면으로 이동시키면서 전력에 구멍이 난 콘라트는 불가피하게 방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 제한된 병력으로도 11개월간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지켜낸 것이었다. 이처럼 공수 양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콘라트가 짜놓은 전쟁 계획은 종종 적의 힘을 과소평가하여 실패를 거둔 바가 있었다. 예를 들어 세르비아군은 콘라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전투에 나선 반면, 제국군은 무분별하게 패주할 뿐이었다. 동부전선의 초기 공세에서도 크라시니크와 코마루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후 연달아 패배를 겪고 렘베르크를 내주는 굴욕을 당했다. 이탈리아 전선에 대한 공세도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고,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특히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대패는 결정적이었다. 이러한 실수의 결과는 전쟁 첫 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치명적으로 약화시켰고, 이후 그의 군대는 독일 제국군의 막대한 지원을 통한 전투에서만 성공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는 결국 독일 제국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점차 전쟁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99]

그러나 콘라트의 전략적 구상이 완전히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1908년에 일반참모 실습 당시 플리치(Flitsch)와 톨메인(Tolmein) 사이의 이손초강 공격 계획을 구상했는데, 이는 나중에 콘라트의 계획을 실제로 입안하여 1917년 10월 카포레토 전투에서 독일군이 성공적으로 활용하게 되었고, 이 카포레토 전투의 성공을 이용해 콘라트는 티롤에서 공세를 감행하여 바사노 12마일 근방까지 진격, 트렌티노 공세 이후에 처음으로 멜레테산 재탈환까지 성공하였다. 그리고 팔켄하인의 경우도 서부전선에서 소모전략이 실패한 후에는 결국 콘라트가 주장했던 것처럼 대공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를 놓고 봤을 때, 콘라트의 참모총장 재임 시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대부분의 주요 전쟁에서 패배하였고,[100] 연달은 패배로 궤멸되어 결국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즉, 초기 공세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실패가 제국에게 매우 치명적인 타격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패배들이 비단 콘라트만의 잘못은 아니었고, 원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약체화되고 불안 요소가 산재했던 제국군 전체의 상황도 큰 몫을 했다. 특히 제국군 병력의 절반을 차지하는 슬라브계 병사들의 신뢰성 문제는 심각했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독일 제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고, 이는 슬라브계 병사들의 동요를 더욱 심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콘라트는 전술적 측면에서 뛰어난 식견을 보여주었으나, 이를 실전에서 완전히 구현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제국의 구조적 한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제국군 병력의 절반을 차지하는 슬라브계 병사들의 신뢰성 문제, 약체화된 군사력, 그리고 전쟁이 진행될수록 심화된 독일 제국에 대한 의존도 등이 그의 작전 수행을 제약했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대전략적 식견이 뒤떨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는 예방전쟁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면서 이탈리아, 세르비아와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제국의 정치적 현실과 구조적 한계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군사작전을 계획했다. 제국 전쟁의 수렁텅이에 빠지게 된 것과 그가 겪은 어려움들이 꼭 그만의 잘못은 아니었으나, 적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제국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점, 그리고 참모총장에게 필수적인 전략과 작전 기획 능력이 부족했던 점은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이자 오스트로마르크시즘(Austromarxism)[101]의 창시자 오토 바우어(Otto Bauer)[102]는 콘라트를 단순한 전쟁광으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전쟁 발발의 주범으로 고려되는 유럽 전역의 5~6명을 꼽는다면 그 중 한 명은 확실히 콘라트 원수일 것이다."[103]
1925년 8월 25일, 콘라트의 장례식에서

3.2.4. 그의 사상이 제국에 미친 영향

그러나 콘라트의 입지와 황제의 신임은 그가 가진 참모총장으로서의 직책과 시너지를 이뤘고, 그의 초기 군사사상을 바탕으로 콘라트만의 대전략이 구상되었다. 여기서 콘라트가 말하는 대전략이 무엇이냐 하면, 최종적으로 전쟁을 통해서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인데, 이중제국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군대나 개별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들도 냉혹한 생존 투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전장에서 방어적 자세가 결국 패배로 이어진다는 이유로 공격을 강조했던 것처럼, 국가도 국제 무대에서 주도권을 유지하지 않으면 필연적인 쇠퇴에 직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신념은 그로 하여금 먼저 이탈리아에 대한, 그 다음으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두 나라 모두에 대한 예방전쟁을 주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페르디난트 대공과 근본적인 갈등을 빚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군대의 주된 역할이 국내 질서 유지와 제국 보존이라고 보았고, 이를 위해서는 국제적 갈등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콘라트는 군대를 경찰력으로 사용하는 것을 혐오했고, 오히려 적극적 외교정책의 도구로 보았다. 게다가 페르디난트 대공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非가톨릭 장교들의 승진을 거부[104]하기도 했는데, 이는 종교에 무관심했던 콘라트와 대립의 또다른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준비태세를 개선하려는 콘라트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던 페르디난트 대공은 군 조직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1906년과 1912년에 두 차례나 그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다만 콘라트는 페르디난트 대공과는 참모총장 임명 문제에서 생각이 달랐다. 참모총장 의 부관으로 일하고 있던 포티오레크는 콘라트보다 1년 후배였지만 참모본부에서 더 빨리 승진했고 병참과 전략 전문가로서 명성이 있었다. 반면 콘라트는 전술가로서 대대, 연대, 여단, 사단 등 현장 부대 지휘 경험이 많았던 것과 달리, 포티오레크는 대대와 여단 지휘 경험만 있었다. 하지만 포티오레크는 승마 실력이 부족하고 미혼이라 성적 지향성에 대한 소문이 있었으며 동료들에게도 그다지 호감을 얻지 못했다는 약점이 있었다. 거기다 1906년 9월 실레시아에서 열린 황제기동훈련에서 지휘가 좋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게다가 페르디난트 대공은 군 조직의 변화를 원했기에 의 부관으로서 연속성을 상징하는 포티오레크 대신 콘라트를 선택했다. 11월 17일 벨베데레 궁전에서 페르디난트 대공과의 두 번째 만남 당시에는 이 이미 사임한 상태여서 참모총장 자리가 공식적으로 비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콘라트는 전략과 병참 전문가인 포티오레크야말로 참모총장의 주 업무인 전략과 작전 기획에 더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페르디난트 대공 포티오레크가 아닌 자신에게 처음으로 제안을 하였고, 콘라트는 이를 청천벽력 같은 소식으로 받아들였다. 전략과 작전 기획이 주 업무인 참모총장에는 포티오레크가 더 적합해 보였고, 콘라트 스스로도 자신이 전략가가 아닌 전술가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직접 부대를 지휘하는 야전 지휘관으로 남기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대공은 이미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콘라트를 후임자로 추천했고 오이겐 대공 프리드리히 대공의 지지도 확보한 상태였다. 거기다 더해 페르디난트 대공이 군인으로서의 의무감까지 호소하자 콘라트는 결국 참모총장직을 수락했는데, 임명 이후 콘라트가 보여준 극단적 호전성과 거듭되는 예방전쟁 주장에 점차 질려버린 페르디난트 대공은 콘라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삐를 잡아줘야할 페르디난트 대공 사라예보 사건으로 암살 당하자 여론이 콘라트에게 쏠려버렸다. 정치와 외교의 수반이 콘라트를 지지하였고, 독일 제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이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105]

3.2.5. 당대의 평가

그동안 콘라트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극과 극인 편이었다. 전쟁 중과 전후 콘라트의 추종자들은 그를 '예언자'로 높이 평가했는데, 그들은 민간 지도자들, 특히 에렌탈이 제국의 몰락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콘라트가 전쟁 전부터 끊임없이 다가올 전쟁의 위험성과 군대의 준비 필요성을 경고했고, 세르비아의 위험성과 이탈리아 삼국 동맹의 신뢰할 수 없는 구성원이라는 점을 지적했음에도 그의 경고가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대 지식인들의 평가는 달랐다. 에드워드 팀스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전쟁 이전부터 카를 크라우스가 콘라트를 풍자했고, 그를 장교 계급의 허세를 대표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그러자 추종자들은 카를 크라우스와 같은 문인들이 콘라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그들은 콘라트가 명예, 훈장, 허례허식을 경시했던 인물이라고 변호했으며, 더 나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그 군대가 콘라트의 천재성에 걸맞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옹호 자체가 콘라트가 직면한 현실에 맞추어 계획과 목표를 조정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유럽 각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들은 콘라트를 높이 평가했는데, 일단 군부 내에서는 보로예비치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콘라트를 지지하였고,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군인들도 콘라트의 군사적 능력을 부정하지 않았다. 역시나 동맹국 장성들인 에리히 폰 팔켄하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 에리히 루덴도르프와도 친분을 유지했는데, 콘라트의 독선적인 성격을 생각하면 그의 능력은 독일 제국군내에서도 상당히 인정받는 부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평가는 아군과 적을 가리지 않았다. 협상국에서도 콘라트를 호평하는 부류가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앙리 구로가 있었다. 그는 프랑스 육군 장교로 전쟁에 참전했었던 이력이 있으며 콘라트에 대해 발언하길, 그는 동맹국 진영에서뿐만 아니라 세계대전 전체 인물들을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인물이었다며 높이 평가하였고, 협상국 군 지도부 사이에서도 이러한 인식이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콘라트가 자신의 구상을 실현하지 못한 것은, 그 전쟁의 그 어떤 총사령관도 그가 맞닥뜨린 것처럼 복잡하고 난해한 난제에 직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은 즉슨, 콘라트는 특별히 까다롭고 난해한 전략적, 전술적 딜레마에 봉착했지만, 다른 사령관들[106]은 상대적으로 그런 상황을 겪지 않았다는 의미를 뜻한다. 한마디로 콘라트가 자신의 구상을 실현하지 못한 것은 그의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이 유별나게 어려웠기 때문이라면서 콘라트를 변호했다. 그리고 소련 원수이자 이론가이며 러시아 제국군 소속으로 콘라트를 상대했었던 보리스 샤포시니코프의 경우, 1927년에 출간한 군사 교리 서적 《군대의 두뇌(Мозг армии)》를 통해 콘라트를 이상적인 참모총장의 모델로 평가했다. 샤포시니코프는 콘라트가 진정한 팀워크를 구축하고, 부하들의 주도성을 장려하며, 권한을 기꺼이 위임하는 등 "통합적" 참모본부의 모범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또한 개인적 자질면에서도 콘라트를 나폴레옹에 비견하며 그의 대담성과 강인한 성격, 독립성, 워커홀릭적인 성향을 높이 평가했다. 다만 샤포시니코프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에 따라 전쟁에서의 개인 영웅주의는 거부하고 집단적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07] 더불어 영국의 유명 군사 역사학자이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육군 참모장으로 복무했던 시릴 펄스(Cyril Falls)[108]가 1959년에 출간한 『대전쟁(The Great War)』에 따르면 콘라트는 분명 전쟁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략가이며, 독일 제국군이 성공을 거둔 동부전선 공세 작전의 대부분은 콘라트의 작전에 근거했다면서 그의 계획은 훌륭하게 구상되었다고 주장하며 콘라트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콘라트에 대한 비판 의견도 일부 있었다. 독일 제국군 장성 한스 폰 젝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대한 맹렬한 평가를 발표했는데 젝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붕괴에 대한 콘라트의 책임을 정확히 파악했다. 제국군의 군사와 장비는 일반적으로 좋은 수준이었지만, "비이성적인" 가차없는 공격은 초기 공세에 일찍 정예병력을 날려버렸고, 전투 훈련이 충분히 되지 않은 예비 병력을 전선에 급히 투입해야 했다. 그리고 예비역 장교들의 리더십이 쓸데없이 너무 "체계적"이었으며 하급 장교들에게는 너무 적은 주도권을 보여줬다는 점을 들어서 콘라트를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콘라트가 일찍이 제국군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고, 스스로 군대를 지휘할 계획을 세운 황제밑에서 복무하기에도 기질적으로 적합하지 못했다는 사실 외에도, 콘라트가 참모총장에서 해임된 가장 큰 이유는 평화를 추구했던 카를 1세에게 전쟁이 좋든 나쁘든 계속 지속하려 했다는 점이었다.

나치 독일은 콘라트를 독일 민족의 영웅으로 포용하려 했다. 정확히는 구 제국(舊帝國) 시절의 영웅으로서 상징성과 콘라트의 군사적 명성, 그리고 그의 우파 독일 민족주의 성향을 이용하여 나치의 우상화에 '위대한 독일 군인'의 이미지로 콘라트를 포함시키려 했지만, 콘라트 본인이 나치의 견해에 동조한 것은 기껏해야 간접적이었다. 나치가 왜 콘라트를 선택했는지에 대해 이유를 첨언하자면 콘라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최고 군사 지도자였기에 전후 패전국 독일의 민족적 자부심 고취에 유용했었고, 종전 이후의 활동에서도 정치나 공무적인 일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독일 국민주의에 대한 동조와 우파 참전용사 단체에 대한 지지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특히 전선전우연합(Union of Front Fighters)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에리히 루덴도르프 아돌프 히틀러 나치당 연루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어느 역사가는 콘라트가 전후 유대인 저널리스트 노바크와 불화를 겪은 후 분노의 폭발을 근거로 그를 반유대주의자로 규정했다. 하지만 이는 콘라트가 만약 인종적 의미에서 유대인을 미워했다면 애초에 노바크를 신뢰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게다가 이후 콘라트는 노바크와 관계를 개선하고 유언장에서도 그를 언급했다.

그리고 콘라트는 전후에 " 협상국 정치인들이 세계대전을 일으켜 (이하 생략) 오래된 아리아인 문화를 파괴하고 그 광범위한 발전에서 무한한 인종 투쟁(Rassenkampf)을 시작했다. 이제 동양인, 흑인, 유대인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무명이었던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나치 정치인들의 극단적인 인종주의 발언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으로, 오히려 루트비히 굼플로비치나 구스타프 라첸호퍼 같은 초기 사회학자들의 인종 이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회학자들은 인종과 민족 간 투쟁을 사회 진화의 원동력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콘라트의 발언은 이런 사회진화론적 관점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콘라트는 동양인이나 유대인에 대해 나치식의 인종적 증오 대신 사회과학적 인종 담론을 수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나치 점령 이후 나치에 동조하는 일부 오스트리아 장교들은 콘라트를 나치 질서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1938년에는 "국가사회주의제국전쟁퇴역군인협회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NS Reichs-Krieger-Kameradschaft Conrad von Hotzendorf)가 설립되기도 했으며, 나치 정권은 또한 1930년대 중반 오스트리아 연방국에서 나치즘에 동조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었던 콘라트의 미망인 지나의 책을 "복권"시키고 그녀를 포용했다. 요컨대, 콘라트는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성향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의 범게르만주의적 경향과 우파 성향으로 인해 사후 나치에 의해 이용당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치들은 콘라트를 일방적으로 그들만의 판테온에 끼워맞추려 했지만, 이는 콘라트 본인의 실제 견해를 충실히 반영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3.2.6. 현대의 평가

현대에 이르러서도 콘라트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여전히 다양한데, 일부는 콘라트의 군사사상을 '단순한' 것으로 비판하지만, 다른 일부는 그의 관점이 '비관적'이었으나 '상당히 정확했다'고 평가한다. 현대에 그를 연구한 인물로는 미국의 역사가 새뮤얼 R. 윌리엄슨(Samuel R. Williamson)[109]등이 있으며 콘라트를 아마도 제 1차 세계 대전 이전 모든 유럽의 군사 지도자들 중 가장 교활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독일 군사학자 군터 에리히 로텐베르크(Gunther Erich Rothenberg)[110] 지형 기후를 무시하고 보급에 대해 가치를 두지 않은 점, 경기관총 야포의 잠재력을 과소평가, 그리고 국가체급만으로 전력을 확인하는 오판으로 기껏 짜놓은 전략에 자국 역량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그를 비판하였다. 미국 역사학자 솔로몬 완크(Solomon Wank)는 콘라트가 자신이 경고했던 상황들을 스스로 촉발시켰다고 비판하면서, 그가 오히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이탈리아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했다. 영국 군인이자 군사학자 바실 헨리 리델 하트 역시 콘라트에 대해서 "그 누구도 그의 열의를 능가하지 못할 정도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총사령관 콘라트는 유럽에서 제일 전쟁에 열성적이었다."라는 평을 남겼다. 이는 콘라트의 능력이나 성과를 칭찬하기보다는 그의 호전적 성향과 결정이 초래한 재앙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리델 하트는 콘라트가 전쟁을 촉발하고 확전하는 데 열성적이었음을 지적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확대에 그가 중요한 책임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미국 역사학자이자, 헝가리 태생이었던 이슈트반 데악(István Deák)의 경우, 이탈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의 적대감에 대한 콘라트의 인식은 정확했으나, 그들에 대한 대처로 군사적 공격이 필연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은 위험을 크게 과대평가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그를 '비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합리적'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대체로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는 데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만, 그의 군사적 혁신성과 선견지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일단 콘라트의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페르디난트 대공이 한번은 콘라트가 다른 사람들을 너무 쉽게 신뢰한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페르디난트 대공 자신의 늘 타인을 경계하는 성향과 대조되는 것이었다. 페르디난트 대공이 한번은 콘라트가 다른 사람들을 너무 쉽게 신뢰한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페르디난트 대공 자신의 늘 타인을 경계하는 성향과 대조되는 것이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먼저 의심해보고 그들의 진실성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나타난 후에야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대공의 지적은 정작 콘라트의 실제 모습과 거리가 있었다. 콘라트는 에렌탈과의 관계에서 매우 신중하고 경계심 많은 모습을 보였고, 이탈리아 세르비아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불신과 의심을 표출했다. 또한 의 부관들이 포티오레크를 지지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일부를 다른 보직으로 전보시키거나 이들을 견제하여[111]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의 관계에서도 경계심을 보였다. 페르디난트 대공의 평가는 콘라트가 부하들과의 관계에서 보여준 신뢰와 개방성을 보고 내린 것일 수 있으나, 콘라트의 전반적인 성향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콘라트는 상황과 대상에 따라 신뢰와 불신을 선택적으로 적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06년 이후 그가 순수하게 군사적인 세계를 벗어났을 때, 이러한 단순한 이분법적 접근은 더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이나 민간 지도자들과 같은 상위 권력자들을 다루는 데 실패했고, 이는 그의 부하이거나 그에게 의존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거둔 성공만큼이나 주목할 만했다. 이러한 상하 관계의 불균형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어 많은 부하들이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도 그의 약점을 보지 못했고, 콘라트 역시 자신의 부하들의 약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한 점들이 결국 발목을 잡아 초기 공세가 좌절되는 원인이 되었다.

3.3. 책임 회피와 정당화

콘라트는 제국의 패망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14년부터 1918년 사이 동원한 800만 명의 군인 중 150만 명이 전사하고, 190만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20만 명이 포로가 된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재앙에 대해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여러 방식으로 책임을 전가했다. 1918년 11월 제국 붕괴의 원인을 이원론과 민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정치적 실패로 돌렸으며, 페르디난트 대공과 함께 주장했던 "삼중제국" 개념( 크로아티아가 지배하는 남슬라브를 포함한 제국의 세분화)을 채택하지 않은 것을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또한 개전 초반 신속한 공세가 실패한 이유를 독일 제국의 군사적 지원 부족 탓으로 돌렸다. 그는 수년간의 정치적 다툼으로 인해 이중전선에 대한 군의 준비와 지원이 부족했던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종전 후에도 자신은 단순한 '군사 전문가'일 뿐 어떠한 정치적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더욱이 그의 사회진화론적 사상은 이러한 책임 회피의 근거가 되었는데, 그는 전쟁의 결과를 단순히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이기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치부하며 개인의 책임을 부정했다. 한편, 콘라트는 이 전쟁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큰 희생을 치렀다. 콘라트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는데, 어린 시절 부모의 과한 보살핌과 사랑을 받고 자란 그는 자신 또한 자식들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동료 장성들이 겪었던 것[112]처럼 콘라트 또한 자식들을 잃은 큰 슬픔을 겪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장남 쿠르트가 복무 중에 과로로 인해 병을 얻었고, 스위스에서 요양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콘라트가 무척이나 예뻐했던 삼남 헤르베르트는 동부전선에서 전사했고, 막내 에곤은 팔에 부상을 입었으며, 그나마 차남인 에르빈만이 몸 성하게 전역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네 자녀 모두가 현역으로 복무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이를 전쟁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보여주는 증거로 삼았다. 이는 그가 전쟁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도, 동시에 전쟁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부각시키려 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개전 초기 공세에 나섰던 6개의 가운데,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의 제2군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5개의 은 전부 실패를 겪었다. 참모총장이었던 콘라트가 직접 편성하고 인사 배치를 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대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마땅히 경질되어야 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군부내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던 인물이었고,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강력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갈리치아 전투 당시 큰 실책을 저질러 패배에 결정적 기여를 한 제3군 사령관 루돌프 폰 브루더만을 비롯하여, 제4군 사령관 모리츠 폰 아우펜베르크, 제5군 사령관 리보리우스 폰 프랑크, 제6군 사령관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등 이들을 해임하는 것으로 책임을 돌리며 콘라트는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다만 친구인 아우펜베르크까지 해임하는 것은 망설였으나, 독일 제국군 프리드리히 대공의 압박으로 콘라트는 결국 아우펜베르크의 해임까지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갈리치아 전투에서의 패배를 시작으로 프셰미실 상실과 신속한 세르비아 점령까지 좌절되었으며, 이는 주요 임무들이 결과적으로 대실패였다는게 자명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콘라트는 초기 공세의 실패에 대해서 독일의 지원 부족을 핑계로 대긴 했으나, 만약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살아남아 총사령관이 되었다면 자신을 총살했을 것이라며 이미 상황을 인지한 것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는 말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라트의 책임 회피에 정당성을 부여하자면, 초기 공세를 제외하고서 패배를 겪은 다른 전투들을 봤을 때, 콘라트가 모든 책임을 온전히 짊어지어야 하는가에 대해선 의문 부호가 붙는다. 물론 초기에는 러시아 제국군에 밀려 패배를 겪었다지만, 콘라트를 신뢰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는 참모총장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콘라트가 다시 기회를 노리며 복수의 칼을 간 끝에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며 오히려 러시아 제국에게 초기에 당했던 굴욕을 배로 돌려줄 수 있었다. 그렇게 러시아 동부전선에서 이탈하는게 확실시 되었고, 발칸반도 불가리아의 참전과 자신의 제자 쾨베시의 활약으로 마침내 정복을 달성하면서 남은 적은 자신들에게 겁없이 선전포고한 이탈리아뿐이었다. 따라서 콘라트는 이 건방진 이탈리아에게 최후의 응징을 가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려 했었다. 그러나 러시아 러일전쟁때와 마찬가지로 콘라트가 예상한 범주를 벗어나는 존재였고, 그들이 브루실로프 공세에 사활을 건 순간 콘라트에게는 만회의 가능성 자체가 날라가게 되었다. 분명 콘라트의 전략에는 도박성이 다소 있긴 했으나, 그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구상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콘라트가 상대하는 적들이 죄다 예측에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작계가 전부 꼬여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수습하나 싶었지만, 결국 브루실로프 공세가 콘라트의 명예를 영원히 실추시키게 되었고, 이는 콘라트가 책임 회피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3.4. 역사적 의의

콘라트는 당대 명성을 날리던 전술가였으나 현대 총력전에 대한 경험은 일천했다. 게다가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개인적으로 가깝지도 않았고, 그를 기용했던 페르디난트 대공과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라트가 오랫동안 중임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제국 군부의 주요 장성들도 총력전 경험이 피차일반으로 부족했던 데다, 이들 중 군사 이론과 전술에 대한 이해도, 군사적 식견면에서는 콘라트가 그나마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갈리치아 전투에서의 초기 공세 실패 후에도 그는 다른 군 사령관들을 해임하는 것으로 책임을 전가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사후에 즉위한 카를 1세는 1917년 2월, 콘라트의 군사적 능력은 인정했으나 전쟁 지속을 주장하는 그를 참모총장에서 해임했다. 그러나 콘라트의 군사적 명성과 능력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그를 티롤 방면 군집단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이탈리아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한 기만 작전의 일환이었다. 그리하여 콘라트는 1917년 후반기에 제한된 병력으로도 방어와 공세 양면에서 성과를 거두었지만, 1918년 6월 당시 피아베강 전투에서는 병력이 보로예비치와 분산되어 요청한 25개 사단 중 17개 사단만을 받았다. 비록 4,300문이라는 상당한 포병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굶주리고 누더기를 걸친 병사들로는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한 협상군을 돌파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콘라트와 보로예비치의 군대는 15만 명의 병력 손실만 입고 공세에 실패해버렸다. 그래서 카를 1세는 의회의 비판을 우려해 책임자를 찾았고 보로예비치를 해임할 경우 남슬라브인들의 반발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콘라트를 해임하였다. 이로써 콘라트의 군사 경력은 막을 내렸지만, 독일 제국군의 육군 참모총장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의 2대 대통령이 된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그를 '열렬한 오스트리아 애국자'로 평했는데, 이는 콘라트가 제국의 구조적 한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분투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까닭으로, 일부에서 그를 이론만 뛰어나고 실전에서는 실패한 탁상공론형 지휘관의 전형적인 인물이라 폄하하는 것은 그의 전술적 혜안과 일부 성공적인 작전 수행을 고려할 때 다소 박한 평가로 보인다.

최종적으로 콘라트가 지닌 역사적 의의는 크게 다섯 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로 콘라트는 제국군 근대화의 선구자로서 회색 제복 도입, 기병대 현대화, 교육제도 개혁 등을 통해 낡은 군제를 개혁하려 했다. 특히 항공력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지상군과 항공기의 협동을 강조한 점, 전쟁대학 교육과정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고 실용적 교육을 강화한 점은 주목할 만한 선견지명이었다. 두번째로는 군사사상가로서 독특한 위치를 점했다. 전쟁을 정치의 연장이 아닌 "정치의 대체물"로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는데, 이는 당대 저명한 군사 인물들과 공유한 견해였다. 또한 다국적 이익공동체로서의 제국관을 바탕으로 한 그의 군사전략은 제국 말기 군사사상의 한 흐름을 대표했다. 셋째, 그의 군사적 실패와 성공은 다민족 제국의 군대가 직면할 수 있는 한계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가 되었다. 뛰어난 전술적 식견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구조적 문제, 특히 슬라브계 병사들의 신뢰성 문제와 독일 제국에 대한 의존도 심화 등으로 인해 자신의 전략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네번째는 제국 말기 군부의 성격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과학적 유물론에 기반한 현대주의적 성향을 지닌 그는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 대립했으며,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을 군부 내에 확산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번째로는 그의 이력은 전술가가 전략가의 자리에 올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사단장 시절까지 보여준 유연한 사고와 혁신성이 참모총장 임명 이후에는 오히려 경직되어, 새로운 전장 환경과 무기체계의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러한 콘라트의 성과와 한계는 제국 말기 군 지도자의 딜레마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혁신적 시도들은 제국의 구조적 한계 속에서 좌절되었고, 전술가로서의 재능은 역설적으로 대전략가로서의 실패로 이어졌다. 그래도 그의 1906년부터 1911년 사이의 군사 개혁은 후대 오스트리아 연방군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남긴 성공과 실패의 교훈은 근대 군사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가족 관계

콘라트 개인으로는 수줍음을 많이 타고 쉽게 우울해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감수성이 풍부하고 가족을 사랑하였다. 다만 자식들에게는 엄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콘라트는 맏아들인 쿠르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었는데, 쿠르트는 그런 아버지를 어려워 했었다. 쿠르트가 15살이었을 때 아버지의 모교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3과목에서 낙제를 받아 1년을 유급해야 한다는 소식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을 때 쿠르트는 낙담했었다. 하지만 쿠르트는 아버지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기대에 짓눌려 무너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청소년기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해서 긴장 관계에 있었고, 결국 서로간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지 못한 채 쿠르트는 1918년 1월 10일, 31번째 생일에 폐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외에 콘라트가 가장 아끼는 아들인 3남 헤르베르트는 어릴때부터 승마에 재능이 있었다. 기수로서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헤르베르트는 아버지의 교육을 순조롭게 헤쳐나간 착한 소년이었다. 그래서 콘라트가 3남을 제일 좋아하였다.[113] 막내인 에곤은 어머니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아 어릴적부터 피아노를 잘 쳤었다고 한다.[114] 차남 에르빈은 전쟁 중 부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37세의 나이에 자신과 같은 나이의 스웨덴 출신 이혼녀 그레타 단과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콘라트의 아버지가 본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콘라트는 자식들도 군인으로서의 길을 걷기를 바랐다. 자식들은 학교, 숙제, 집안일 등 일상 생활에서 콘라트의 군인 규율에 묶여 있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그 시대의 아버지치고는 체벌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화가 나면 자식들에게 무언의 압박감을 안겨주며 집안의 분위기를 어둡게 하였다. 그래서 자식들은 학교 성적이 떨어졌을 경우 아버지가 실망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콘라트의 아내인 빌헬미네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어머니긴 했지만 남편의 엄격한 교육 방식을 지지했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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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폰 힌덴부르크와의 선전용 포스터도 있다.

콘라트는 군인 집안 출신으로 1910년에 남작(Freiherr) 작위를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수여받았으며 1918년에 카를 1세에게 백작(Graf)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이후 설립된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신분제를 폐지하여 이름에서 폰( von)이나 추(zu) 등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이때부터 프란츠 콘라트회첸도르프(Franz Conrad-Hötzendorf)가 되었다. 사실상 콘라트의 성에 회첸도르프가 붙은 기간은 1년도 안된다.

참모총장 시절 콘라트는 적어도 한 번의 상세한 점술을 본적이 있었는데, 이 점술에서 그의 미래 주요 전환점으로 1911년과 1925년을 예언했다. 흥미롭게도 이는 그가 참모총장에서 해임된 해와 사망한 해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의 측근들은 그의 신비주의적 성향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였지만, 이는 그의 과학적 유물론과 공존했던 또 다른 면모였다.

브루실로프 공세의 지휘관이자 콘라트를 완벽하게 나락으로 빠뜨린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와는 1살 차이인데, 둘 다 향년 72세에 사망한 공통점이 있다.

후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Hugo Conrad von Hötzendorf)[115]라는 오시예크 출신의 크로아티아인 화가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의 그림 스승이기도 했던 프라뇨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Franjo Conrad von Hötzendorf)[116][117] 브륀에서온 귀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프라뇨는 소싯적에 을 거쳐서 오시예크에 정착해 미술 사립 학교를 차렸다고 하는데, 콘라트의 조부인 오이겐과 성이 같고 둘 다 귀족이라는 점, 동향인 점, 비슷한 나이대임을 미루어볼 때 오이겐과 친척인게 확실하며 프라뇨의 손윗형제 내지는 사촌으로 추정된다. 만약 오이겐과 프라뇨가 친형제라면 후고는 콘라트의 당숙임이 틀림없다. 화가 친척을 둔 게 집안 내력인지 재밌게도 콘라트도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6. 저술

7. 대중매체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회첸도르프'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2]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법령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귀족 접두어가 철폐된 뒤 개명한 이름. [3] Franz Xaver Conrad von Hötzendorf [4] Barbara Kübler [5] Barbara "Betti" Conrad von Hötzendorf [6] Wilhelmine le Beau [7] Kurt Graf Conrad von Hötzendorf [8] Erwin Graf Conrad von Hötzendorf [9] Herbert Conrad von Hötzendorf [10] Egon Franz August Julius Karl, Graf Conrad von Hötzendorf [11]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국원수와는 좀 다른 개념의 계급이다. 자세한 사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항목 참조. [12] 콘라트의 증조모 [13] 나치 시대에는 이 체코계 혈통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콘라트를 "순수 남독일계(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혈통"으로 선전했다. [14] 2년 후인 1854년에는 크사버 부부의 딸이자 콘라트의 여동생인 바바라(베티)도 태어났다. [15] 또는 요제프(Josef) [16] 이는 '한 종 안에서도 놀라운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점에 매료되어서였다. 이런 예술적 재능과 자연 관찰에 대한 관심은 이후 그의 군사 경력에서도 드러났는데, 특히 지형 스케치와 지도 제작 능력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17] 이는 콘라트가 나중에 사회진화론에 관심을 갖게 되는 토대가 된다. 어릴 적 콘라트가 겪은 경험들은 그의 가치관에 영향을 크게 끼쳤고, 후에 종교적 믿음보다는 자연 법칙에 순응하는 성격이 형성되고 말았다. [18] 당시 19세기 유럽에서의 사냥은 지금으로 치면 골프와 같은 취미로, 남자들의 인맥을 형성하고 우정을 결속시키는 활동이었다. 즉, 콘라트는 시대에 맞지 않는 부류였다. 사냥을 좋아하지 않던 콘라트는 이후 사회적 교류에 제한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나중에 참모총장이라는 내부자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외부자로 남아있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19] 크사버는 1813년 하오스트리아 대공국 제4슈보레제(Chevauxleger)연대에 자원입대하여 해방 전쟁에 참전했다. 여기서 크사버는 라이프치히 전투에 참가했고, 나폴레옹 엘바 섬 호송 임무도 수행했다. 1817년 헝가리 제4후사르연대로 전속되어 중령까지 진급했다. 특히 55세이던 1848년 혁명 당시 요제프슈타트 거리(Josefstädter Straße)에서 군중 진압 중 말에서 떨어져 깔리는 중상을 입어 회복에만 3년이 걸렸고, 결국 최종계급 대령으로 퇴역했다. 더구나 그의 연대가 헝가리 혁명군에 가담한 것에 큰 상처를 받아 이후 反헝가리 성향을 갖게 되었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콘라트 또한 反헝가리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20] 바바라는 혁명 당시 심각한 부상을 당한 남편을 목격했고, 이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아들이 기병이 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하지만 콘라트는 뛰어난 기수가 되었고, 수십 년 후 장군이 되어서도 새 말을 살 때마다 노모(老母)인 바바라는 이를 여전히 걱정했다고 한다. [21] 입학하고 나서 아들을 그리워한 바바라는 남편 크사버를 설득해 하인부르크로 이사했다. 하지만 생도들은 일요일과 휴일에만 9시간의 외출이 허가되어 자주 만나기는 어려웠다. [22] 후일 황립 및 왕립 전쟁성 장관이 된 모리츠 아우펜베르크 폰 코마루프는 콘라트가 부모의 애지중지를 받고 자랐다고 회상했다. [23] 現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관학교라 불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명문 사관학교였다. [24] 이후에도 여동생 베티한테 이탈리아어를 배웠고 더 나아가 세르보크로아트어, 체코어, 헝가리어, 폴란드어까지 총 8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25] 당시 전쟁대학의 졸업생들 중 오직 절반만이 참모장교가 될 수 있었고, 나머지는 원대 복귀 시 재학 기간만큼의 선임권마저 박탈당하는 불이익을 받았다. 또한 성적이 공개되어 학생들은 서로의 순위를 알 수 있었는데, 이런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20세기 초의 한 사건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났다. 참모장교 자리를 노리던 한 졸업생이 자신보다 순위가 높은 동기들을 독살하려다 한 명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26] 크사버가 결혼할 당시 이미 퇴역한 상태였고, 장교 결혼 보증금(Heiratskaution)도 예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현역 장교들은 결혼 시 이 보증금을 예치해 미망인이 된 아내의 생활을 보장했는데, 퇴역 장교였던 크사버는 이를 하지 않았다. [27] 알프레트 폰 발트슈테텐의 큰아버지 [28] 후대에 콘라트가 사라예보 최초 입성 부대를 이끌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29] 보스니아 비셰그라드 [30] 몬테네그로 헤르체그노비(Херцег Нови, Herceg Novi) [31] 렘베르크 외곽의 홀로스코에 3,000×1,000야드 규모의 훈련장을 연간 2,500굴덴에 임대하여 포병·소총 사격장과 함께 운영했다. [32] 크로아티아 시베니크 [33] 빌헬미네의 애칭 [34] 동부전선에서 과도한 업무로 인해 스위스에서 과로사 [35] 당시 그의 성(姓)은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Conrad von Hötzendorf)였으며, 첫 이름으로 콘라트(Konrad)를 쓸 경우 이름과 성의 앞부분이 같아지는 문제가 있었다. [36] 동부전선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죽지 않았다. [37] 동부전선에서 전사 [38]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는 귀족이나 고위 장교 자제들이 더 빠른 승진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콘라트는 1815년에 귀족이 된 신흥 귀족 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전쟁대학 수석 졸업, 혁신적인 교수법과 뛰어난 교육 성과, 그리고 저술 활동과 이론적 기여 등 순전히 자신의 실력과 공적만으로 이러한 승진을 이뤄냈다. [39] 그의 다음 장기 부임지가 이 된 것은 14년 후인 1906년, 참모총장 임명 때였다. [40] 체코 슘페르크(Šumperk) [41] 군대 내 불필요한 관료주의와 경직된 의전을 비판하는 표현이었다. 콘라트는 실질적인 전투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형식적인 규율과 전통을 반대했다. [42] 장교 식당에서 가장 젊은 장교들이 앉는 테이블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고위 장교들은 이를 피했지만, 콘라트는 의도적으로 이곳에 앉아 젊은 장교들과 교류했다. [43] 프로이센 군대에서 발전한 지휘 철학으로, 상급자가 달성해야 할 목표만 제시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하급자의 재량에 맡기는 방식이다. 이는 하급자들의 주도성과 창의성을 장려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전장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한다. [44] 당시 군악대와 열병식 같은 의식적 행사들은 군대와 시민사회를 연결하고, 군대의 위상을 보여주며 대중의 지지를 얻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또한 장교들의 사교와 네트워킹 기회이기도 했다. 이 구절은 콘라트가 이러한 행사들을 단순한 시간 낭비로만 여기고, 평시 군대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비판적 평가다. [45]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는 귀족이나 고위 장교 자제들이 더 빠른 승진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콘라트는 1815년에 귀족이 된 신흔 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전쟁대학 수석 졸업, 혁신적인 교수법과 뛰어난 교육 성과, 그리고 저술 활동과 이론적 기여 등 순전히 자신의 실력과 공적만으로 이러한 승진을 이뤄냈다. [46] 오스트리아 란트베어 산하에 편제된 티롤 후백국의 향토방위군. 1906년 제8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재직중이던 콘라트의 주도로 티롤을 방위하는 란데스슈첸 산악보병대대들과 각종 향토예비군 부대들을 통합하여 만든 산악전 전문 부대이다. 주적인 이탈리아 왕국군 산악전 부대인 알피니 산악연대들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47] 산악인 클럽 [48] 황위 계승자가 자신의 즉위에 대비해 미리 구성해둔 비공식 측근 그룹을 의미한다. [49] 이는 후에 콘라트의 가장 치명적인 오판 중 하나로 평가되었다. 흠잡을 데 없는 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콘라트는 부하들에게서도 최상만을 기대했고, 종종 타오르는 야망이나 무제한적인 출세욕을 뛰어난 재능과 불타는 봉사 정신으로 착각했는데, 포티오레크에 대한 평가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50] 참고로 포티오레크는 콘라트보다 1년 후배였지만 승진은 더 빨랐고, 전략과 병참 전문가였으나 동료들에게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승마 실력이 부족했고,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한 소문도 있었다. [51] 그러나 1909년-1914년 졸업생들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너무 계급이 낮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52] 그 결과로 세르비아 침공 당시 콘라트의 결정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의문이 제기되었다. 콘라트의 계획에는 분명, 제국군의 역량이 따라가는 게 전제 조건이었지만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현실성이 결핍되는 경우도 있었다. [53] 벨기에 통과 등 [54] 다만 헝가리의 입지를 약화시켜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남슬라브라는 3개의 세력이 균형을 이뤄 제국을 지탱시킨다는 생각은 서로 공통되었다. [55] 다만 체코의 경우 처음에는 딱히 독립 여론이 크지 않았고, 오히려 제국 내에서 동등한 권리를 얻는 것을 더 원했다.(물론 에드바르트 베네시처럼 분리독립을 원하는 측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1차 대전에서 오헝 제국의 패색이 점점 짙어지자 체코는 결국 분리독립을 추구하게 되고 제국이 패망하자 슬로바키아와 연계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56] 여기서 군의 상태를 확인했음에 불구하고, 전쟁을 강행하려 한 콘라트의 무모함이 드러난다. [57] 생몰년도: 1847년-1917년 [58] 독일어, 헝가리어, 체코어, 이디시어, 슬로바키아어, 우크라이나어, 폴란드어, 세르보크로아트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 슬로베니아어, 이탈리아어, 루신어, 루마니아어. [59]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 독일 제국은 일단 전쟁이 터질 경우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동부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작전 협조를 할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1896년~1909년에 양국 참모부 간의 교류는 거의 완전히 정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콘라트와 소 몰트케가 서로 간간히 서신을 보낼 뿐이었다. 그 후 콘라트의 주장으로 양국 참모부 간의 교류가 재개되기는 했지만, 1914년 당시 양국 간에는 대러시아전을 염두에 둔 어떠한 합동 작전계획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전과 동시에 향후 전쟁의 전망에 대한 양국 간의 견해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60] 독일 제국군 육군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개전 당시 총 80개 사단 가운데 70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프랑스 공화국을 처리하는 데 36일~40일이 걸리는 동안, 동부전선에서는 나머지 10개 사단으로 방어에 전념한다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었다. [61] 그러나 러시아도 독일보다 약체인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먼저 치려는 목적으로 바르샤바 돌출부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후방과 측면을 칠 계획이었다. [62]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둘은 의견이 갈렸다. 콘라트는 항상 공세(der Offensive)로 일관하길 원했으나, 팔켄하인은 소모 전략(Ermattungsstrategie or Zermürbungsstrategie)으로서 전쟁을 이끌고자 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콘라트는 오히려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섬멸 계획(Vernichtungsplän)에 열렬한 관심을 가졌다. 양면전쟁에서의 우선순위도 논쟁거리였다. 개전때부터 팔켄하인과 콘라트는 이와 같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사이의 우선순위 문제를 놓고 갈등을 일으켰음에도 전쟁이 끝날때까지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 [63] 게다가 콘라트는 러시아의 공격에 대비해 러시아 국경지대에도 8개 육군 군단을 배치해야만 했다. 세르비아쪽에 배치한 부대는 구경 120mm가 넘는 중포(重砲)를 오늘날 1개 포병연대 전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과 40여문만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세르비아군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제국군은 허우대만 큰 약골이었다. 이는 콘라트가 야포를 과소평가했던 탓이 크다. [64] 수송 담당관인 에밀 라첸호퍼 소령(Emil Ratzenhofer)은 콘라트에게 세르비아 전선에서 전투를 중단하고 북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병력을 실으면 8월 23일 이전에 갈리치아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8월 23일에 러시아군이 도착했지만 제국군은 약속보다 16일 늦게 갈리치아에 병력이 도착했다. 심지어 나머지 부대들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철도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수송에 차질이 생긴 것이었다. [65] 둘은 지휘관에서 짤리기 전 2년 반 동안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다만 콘라트의 회고록에 따르면 "2년 반의 전쟁 기간 동안 함께 일했음에도 작은 기념품 하나 받은 적이 없고, 내가 중병을 앓았을 때도 안부를 물어본 적이 없다"며 서운함을 표현했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공이 공적인 관계에는 충실했으나 사적인 친분은 거의 없었음을 시사한다. [66] 옆에 있는 사람은 콘라트의 보좌관인 루돌프 쿤트만(Rudolf Kundmann)이다. [67] 헤르베르트는 이미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68] 그래도 크라시니크 전투에서 거둔 승리 하나로 단클은 1917년에 제국상급대장으로 승진하였고, 남작 작위와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기사십자훈장을 받았다. 아우펜베르크도 마찬가지였다. 1915년 4월 25일,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칙령에 따라 모리츠는 남작의 지위로 올라갔다. [69] 개인적 측면에서 이 전투는 당시 소장이었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의 경력에서도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는 러시아 제4군에 배속된 친위 울란 여단을 이끌었다. 만네르헤임은 이 전투에서의 지휘로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고, 갈리치아 전투 과정에서 많은 추가 전투에 참여했다. [70] 두사람은 끝까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유지했다. 이는 당시 군 고위층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다른 것이었다. 보통 실각한 장성들은 서로를 비난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50년이 넘는 우정이 군과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변치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었다. [71] 원래 제9군의 사령관은 리하르트 폰 슈베르트(Richard von Schubert) 포병대장이었으나, 오헝군의 지휘를 받기 싫었던 독일군은 오헝군의 장성 계급중에 제국상급대장이 없다는 걸 이용해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상급대장을 제9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꼼수를 썼다. 오헝군에는 없는 계급이지만 명목상 병과대장보다는 한단계 높은 직급이기 때문에 이를 구실로 동맹군의 지휘권 확보에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허나 오헝군도 얼마안가 제국상급대장 계급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72] 오늘날의 데블린(Deblin) [73] 물론 프셰미실 요새가 위험한 상황이라 구원군을 뒤로 물릴 수도 없었다. [74] 특히 프셰미실 요새 함락이 치명타였다. [75] 이름은 독일 남부군이고 지휘관도 독일인이지만, 부대 구성원의 대다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었다. [76] 이후 11차례에 걸쳐 지속적인 소모전이 벌어지면서 전력을 모두 소모한 이탈리아군은 빈사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77] 이 규칙이 카를 1세의 아내인 독실한 가톨릭 신자 치타 황후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치타는 이혼자와의 재혼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지나 역시 치타를 싫어했다. [78] 이 부대는 이후 콘라트 군집단(Heeresgruppe Conrad) 혹은 요제프 대공 군집단(Heeresgruppe Erzherzog Joseph)으로 불렸다 [79] 카를 1세의 참모총장 해임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늦은 편이었다. 콘라트는 31개월 동안 조국의 군대를 지휘했으며, 이는 각국의 최장수 참모총장들인 이탈리아의 루이지 카도르나(30개월), 프랑스 조제프 조프르(28개월 반), 독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보다 긴 기간이었다. [80] 그의 군사적 능력이 매우 유능한 것을 비롯해서 콘라트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콘라트(AOK)와 팔켄하인(OHL) 간의 분쟁을 중간에서 자주 조정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 휘하의 장교로서는 이례적으로 독일 장성들이 그를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 후에 메츠거는 카포레토 전투에서 제1보병사단을 지휘한 공로로 마리아 테레지아 기사십자훈장을 받으며 대외적으로도 유능한 부대 사령관임을 입증했다. [81] 롬멜 소위는 뷔르템베르크 산악대대의 중대장으로 제12차 이손초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다. [82] 특히 일본의 토속신앙인 신토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일본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83] 여기서 만약 이탈리아 삼국 동맹의 충실한 일원으로 남아 참전하지 않았다면 상황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이탈리아 전선이 없었다면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더 많은 병력을 러시아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고, 이는 콘라트의 대독일주의로의 전향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또한 이탈리아어 사용 지역과의 안정적 관계는 다민족 제국 모델의 성공 사례가 되어 제국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그의 비관적 전망도 달라졌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러시아로 가정을 바꿔도 마찬가지다. [84] 한편 콘라트는 전선에 나가 있는 동료들의 편지만 받았는데 그중 9월 초, 서쪽의 베르됭에서 복무중이던 메츠거는 독일에 대해 그들의 빈약한 무기와 지친 상태를 보고서는 1915년 당시의 "카르파티아의 겨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상기시켰다며 독일 제국의 붕괴를 예언하는 편지를 썼다. [85] 11월 4일, 합스부르크의 통치가 무너진 트리에스트를 이탈리아군이 점령했다. [86] 콘라트가 제1보병연대장으로 트로파우에서 행복한 군생활을 보냈던 당시에 콘라트의 부관이었다. [87] 지나는 나중에 많은 인스브루크 사람들이 이탈리아 점령군과 교제하는 부부의 관행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밝혔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콘라트가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인물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콘라트는 사령관에서 해임된 지 1주년이 되는 날, 인터뷰에서 이탈리아와의 외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반복했다. 콘라트는 이탈리아가 우리에게 대항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확실히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탈리아와의 전쟁은 세르비아와의 전쟁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콘라트는 1907년에 그가 옹호했던 예방전쟁이 이루어졌다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전속결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고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러일전쟁 패배의 여파로 러시아 세르비아 사태에 개입할 여력이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고, 세르비아 침공이 임박했던 1914년에도 그는 러시아의 개입을 확실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콘라트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정말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콘라트를 비롯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도자들은 보스니아 위기 때처럼 독일의 압력이 러시아를 저지할 것이라는 합리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콘라트는 산책할 때 마을 사람들과 주변 시골의 농부들과 매일 접촉했다. 그는 그들의 인사에 겸손하고 태도로 맞인사하면서 종종 수다를 떨거나 팬들을 사로잡았다. [88] 이는 나치 독일로 인해 실현되었다. [89] 그렇기 때문에 콘라트가 설사 죽지 않고 나치 독일에 의해 오스트리아 병합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살아있었어도, 실제 역사속 콘라트의 행보를 미루어 봤을 때 자유주의적 흐름과 반대로 움직이는 나치즘에 대해선 동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만든다. [90] 에르빈은 자기와 동갑인 스웨덴 출신의 이혼녀 그레타 단(Greta Dahn)과 결혼했다. [91] 콘라트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비롯해서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체코어, 헝가리어, 폴란드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이 중에서 독일어, 러시아어, 세르보크로아트어는 완벽히 습득한 정도였고 프랑스어 체코어는 유창한 수준이었던 반면, 헝가리어, 폴란드어, 이탈리아어는 그리 유창한 편은 아니었다. [92] 콘라트가 마른 전투의 패배를 결정적으로 본 것은 이것이 슐리펜 계획의 실패를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슐리펜 계획의 실패로 독일 프랑스를 신속히 격파하지 못하면서 동부전선 서부전선의 전쟁이 장기화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러시아 전선에서 독일의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됨을 의미했다. 실제로 콘라트와 소 몰트케는 서신 교환을 통해 독일의 대러시아 지원을 약속받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략은 독일의 슐리펜 계획 성공을 전제로 수립되어 있었다. [93] 공화국 정부의 첫 국장이었다. [94] 1918년 말, 콘라트는 혼란 속에서도 헤르베르트의 유해를 이장하는 일을 주선했다. 1915년 공세로 렘베르크 인근의 헤르베르트의 묘지가 다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통제 하에 들어오자,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콘라트에게 헤르베르트가 3년 전에 졸업한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 부지 내에 그의 유해를 다시 묻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제국의 붕괴로 사관학교의 미래가 불확실해지자 계획을 변경하여 결국 비너노이슈타트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 묘지(Akademie-Friedhof)에 안장했다. [95] 프랑스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여주었다. [96] 대표적인 예로는 가톨릭이 대다수인 군부에서 유일하게 개신교 신자로 복무한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가 있다. [97] 라첸호퍼는 B-Staffel이 러시아 전선에 8월 23일까지 도착할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실제로는 8월 31일에서 9월 8일 사이에 절반만 도착했고, 나머지는 너무 늦게 도착하거나 아예 도착하지 못했다. 콘라트는 저명한 전술가였던 구스타프 라첸호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를 과신했다. [98] 사실 이것은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99] 사실 이것은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100] 특히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대패로 인해 제국은 전투 불능 상황에 빠지고 만다. [101] 혁명적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절충을 주장한 사상. [102] 생몰년도: 1881년 ~ 1938년 [103] 하지만 이러한 바우어의 논평과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콘라트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당시 많은 오스트리아인들은 그의 비판에 동의하지 않았다. [104] 대표적으로 쾨베시가 있었다. [105] 특히 콘라트가 말하는 승리를 위한 조건을 달성하려면 총리인 카를 폰 슈튀르크와 외무장관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가 그 역할을 잘 해냈어야 했다. 그러나 결과는 알다시피 러시아 제국, 이탈리아 왕국의 참전과 제국의 분열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끝나고 말았다. [106] 파울 폰 힌덴부르크, 에리히 루덴도르프, 조제프 조프르, 페르디낭 포슈, 더글러스 헤이그,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루이지 카도르나, 아르만도 디아츠, 존 조지프 퍼싱 [107] 다만 걸러 들어야 할 것이, 이는 샤포시니코프의 일방적인 평가일 뿐이었고, 앞서 서술했듯 실제 콘라트의 지휘 스타일을 보면 팀워크라는 단어는 부하들에게 적합할지 몰라도, 상관들에게 대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왜냐하면 콘라트는 작전을 구상할 때 부관들과 함께하기보다 보통 혼자서 구상하는 것을 선호했고, 모든 제안이 외부 검토 없이 그의 손에서만 나왔다. 게다가 그의 성격은 "사포"처럼 거칠어 장관들의 반감을 샀으며, 황제조차 그의 불필요한 전쟁 주장에 지쳐갔다. 물론 콘라트에게는 독창성과 결단력, 침착함이라는 강점이 있었고 전략적 구상도 뛰어났으나, 이를 실제 전술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기동성, 지형, 기후, 보급, 무기의 잠재력 등 현실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간과했다. 특히 총력전 경험이 없던 그는 공세 외의 전술을 생각하지 못했고, 이러한 독선적 성향이 종종 작전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108] 생몰년도: 1888년-1971년 [109] 생몰년도: 1935년- [110] 생몰년도: 1923년-2004년 [111] 다만 참모부의 사기를 고려해 대대적인 숙청은 하지 않았다. [112]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카를 폰 플란처발틴, 자무엘 폰 허저이 등의 자식들은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 신임 장교로 임관하여 참전했다가 전투중에 목숨을 잃었다. [113] 그랬기에 훗날 헤르베르트가 동부전선에서 23세의 나이로 전사했을 당시엔 콘라트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114] 훗날 에곤은 결혼해서 한해 동안에만 자식을 2명 낳았는데, 1924년 1월 10일에 태어난 딸에겐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12월 25일에 태어난 아들에겐 프란츠라고 이름을 지어주며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다. 자식들도 장성하여 에곤 또한 누군가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115] 생몰년도: 1806년-1869년 [116] 생몰년도: 1770년-1841년 [117] 프라뇨의 독일식 이름이 프란츠이기 때문에 콘라트와 동명이인이 되기도 한다. [118] 근위대의 보고서를 보고 시찰을 갔던 회첸도르프가 근위대의 기강과 실력을 확인하고 프란츠 페르티난트에게 주의를 권고하는 보고서를 올린 상황이었다. [119] 원역사와 차이점은 근위대의 활약을 보고 자신감이 생겨서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 전쟁주장만 100번 넘게 하다가 해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