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 독일 제국군 육군 소장 프리츠 폰 로스베르크 Fritz von Loß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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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Friedrich Karl "Fritz" von Loßberg 프리드리히 카를 "프리츠" 폰 로스베르크[1] |
출생 |
1868년
4월 30일 바이에른 왕국 헤센 |
사망 |
1942년
5월 4일(향년 74세) 독일국 뤼베크 |
복무 |
독일 제국군(1886년 ~ 1918년) 국가방위군(1920년 ~ 1927년) |
최종 계급 | 소장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주요 서훈 | 푸르 르 메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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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군의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소장이다.2. 생애
2.1. 1차 세계 대전 전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그 역시 마찬가지로 1886년 군에 입대하였다. 3대째 속했던 근위대에 들어갔고, 일반참모과정을 거치고, 1911년, 프로이센 전쟁대학의 교사가 되었다.2.2.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1차 세계대전 당시 로스베르크는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둘 다 싸웠다. 그러면서 승진을 거듭하였다. 1915년 1월, 중령 진급과 함께 OHL 본부로 옮겼다. 당시 로스베르크는 참모총장이었던 에리히 폰 팔켄하인과 그외 참모장교들은 잘 알았지만, 카이저는 그를 '베를린의 팬싱 중위'로 기억하였다. 이후 서부전선으로 갔다.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을 잘 막아낼 수 있었다. 이후 로스베르크는 카를 폰 아이넴의 3군의 참모총장이 되었다. 3군의 참모총장으로 제2차 샹파뉴 전투에 참여하였다. 당시 제 3군은 프랑스군에게 밀리고 있는 상태였다. 로스베르크로 참모총장이 교체되자 로스베르크는 이전 참모총장처럼 후퇴하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겠다고 아이넴 장군에게 전해주었다. 그는 본인이 방어술의 귀재라는 것을 이 전투를 통해 알려주었는데 그의 신념인 "방어의 힘은 적의 관찰을 은폐하는 데 있다"이 제대로 작용하였고, 상파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솜 전투가 발발하자, 팔켄하인은 로스베르크를 불러 제2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제2군의 사령관이었던 프리츠 폰 벨로는 로스베르크에게 전선에서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전선을 둘러보고 로스베르크는 포격을 이용한 수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팔켄하인이 해임당하고 힌덴부르크가 참모총장이 되자 로스베르크는 의외로 만족하였다. 이전과는 달리 자유롭게 토론하고 또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혁신적인 방어 방법은 젊은 일반참모과정을 밟는 이들에게 가르쳐졌다.
이후 로스베르크는 영국군이 아라스를 침공하자 그 근처에 있던 제 6군의 참모총장이 되었다. 로스베르크가 금방 방어선을 구축해낸 것을 본 사령관 루프레히트 왕세자는 그를 초인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포격으로의 방어와 돌격대 전술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루프레히트의 후임으로 사령관이 된 루트비히 폰 팔켄하우젠의 실책으로 결국 패배하였다. 이후 로스베르크는 제 4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제3차 이프르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프르의 지형을 잘 알던 로스베르크는 쉽게 방어선을 구축하였지만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종전 후에는 국가방위군에 남아 국가방위군의 정예화에 힘썼다. 이후 국가방위군에서 폴란드 국경 방위부대를 지휘하였다. 전간기 도중 로스베르크는 발터 모델을 만났고, 그에게 많은 방어술을 가르쳤다. 로스베르크는 1927년 은퇴하고, 1942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