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알프레트 폰 셴크는 1863년 7월 5일
오스트리아 제국
라이바흐에서 관리 모리츠 셴크(Moriz Schenk)와 그의 부인 에울랄리아 츠비에르지나(Eulalia Zwierzi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셴크는 어린 시절 일부를
프라크에서 보냈고,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도
슬로베니아어와
체코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프라크에서
김나지움과 생도학교를 졸업한 후 1880년
소위로 제21보병연대에 임관했다. 1882년에는
달마티아의 봉기 진압에 참가했다. 1887년부터 1889년까지
빈의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수학했고,
중위로 참모장교단에 편입되었다.
이후 셴크는
올뮈츠의 제9보병여단과 트레비녜(Trebinje)의 제2산악여단에서 참모장교로 근무했다. 1892년
대위로 진급해
헤르만슈타트(Hermannstadt)의 제12군단 참모부에 배속되었다. 1895년에는
카잔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며 1년동안 비밀요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리고 1898년 셴크는
소령으로 진급, 제16보병사단 참모장이 되었다.
1902년부터 1911년까지는
사라예보의 제1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보병연대에서 복무했는데, 그 사이에 1902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했고, 1907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연대장이 되었다. 1911년 귀족 작위를 받았고, 같은 해 5월
소장으로 진급해
사라예보 제9산악여단장이 되었다. 1년 후
빈으로 전출되어 제97보병여단장이 되었다.
이 당시 셴크는
빈에서 후방 부대를 지휘하다가 1914년 8월 제15보병사단장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 1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1915년 5월에는 제9보병사단장이 되어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 참가했고, 11월에는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해
이손초 전투에 참가했다. 1916년 8월 그의 제9보병사단은 다른 부대들과 함께 셴크 집단군(Gruppe Schenk)으로 통합되었고, 이는 같은 해 11월 8일 제23군단으로 정식 개편되었다. 1917년 6월 15일 셴크는 제23군단장직을
막시밀리안 치체리치 폰 버차니에게 이양하고
동부전선으로 이동, 그곳에서
치체리치가 이전에 지휘하던 제13군단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는
케렌스키 공세 당시 큰 손실을 입어 한 달 만인 7월 17일 해임되었고, 그의 후임으로는 프리계스 처나디 폰 베케시(Frigyes Csanády von Békés)가 임명되었다. 1918년 2월 1일
보병대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달 21일부터 4월 15일까지 잠시 제9군단장을 지낸 뒤 5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
아그람 군관구사령관으로 근무했다.
1919년 1월 1일부로 연금 16,800크로네를 받으며 퇴역했다. 이후 셴크는
슬라브어 실력을 인정받아 1923년
프라하로 초빙되어 1930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 군사고문으로 활동했다. 1952년 10월 12일 빈에서 89세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