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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4:47:48

이탈리아 전선(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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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이름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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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
<colbgcolor=#536349> 이탈리아 전선
The Italian Front
Gebirgskrieg
Fronte italiano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선 중 하나
날짜
1915년 5월 23일 ~ 1918년 11월 6일
장소
동부 알프스, 베네치아 평원
결과
협상국 승리
협상국 동맹국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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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틀:국기|]][[틀:국기|]]
지휘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루이지 카도르나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아오스타 공작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아르만도 디아츠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장세자르 그라치아니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루돌프 램버트
[[틀:깃발|]][[틀:깃발|]][[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틀:깃발|]][[틀:깃발|]][[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틀:깃발|]][[틀:깃발|]][[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
]]
[[틀:깃발|]][[틀:깃발|]][[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
[[틀:깃발|]][[틀:깃발|]][[오이겐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오이겐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
[[틀:깃발|]][[틀:깃발|]][[오토 폰 벨로|]]
병력 5,000,000명 8,000,000명
피해 규모 사망 651,000명
부상 953,886명
사망 404,000명
부상 1,200,000명
결과
협상국 승리
1. 개요
1.1. 발단1.2. 전개1.3. 결과

[clearfix]

1. 개요

협상국으로 갈아탄 이탈리아 왕국 동맹국의 일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대결한 전선이자 참호전. 이탈리아 왕국은 1915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였으며 알프스 산맥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게임 배틀필드 1의 캠페인 미션 중 하나인 '사보이아에 영광이 있으라!!' 가 이 전선을 다룬다.

1.1. 발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의 관계는 험악했다. 당장 제2차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상대가 오스트리아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도 트렌티노 이스트리아 반도, 달마티아 일대에는 아직 이탈리아인이 많이 살아 이탈리아 정부와 국민들은 그 곳을 언젠가 이탈리아가 획득해야 할 영토, 미수복 이탈리아(Italia irredenta, 이탈리아 이레덴타)라고 하며, 미수복 이탈리아를 수복하자는 주장을 이탈리아 수복주의(Irredentismo italiano, 이레덴티스모 이탈리아노)라고 한다. 미수복 이탈리아의 수복을 위해 1877년 미수복 이탈리아 협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한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 제국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외교 전략을 채택하게 된다. 그래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제국이 모여 3제 동맹을 결성해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프랑스와 전쟁이 났을 때 후방의 안전을 도모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발칸반도의 패권을 둘러싼 문제로 러시아 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878년 러시아가 세르비아,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독립군과 함께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그 전쟁에서 승리를 한 러시아는 불가리아의 독립과 더불어 에게해 연안의 도시 카발라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떼어냈다. 카발라가 불가리아의 영토가 된 다는 것은 러시아가 지중해로 진출한다는 것이고 이는 그레이트 게임으로 러시아와 대치 중이던 영국의 심기를 거슬렀다. 또한 러시아가 예상 외로 큰 승리와 전리품을 획득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불안감을 얻었다. 그러자 독일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베를린 회의를 열어 이를 중재했지만 사실상 러시아가 얻은 전리품을 도로 내뱉게 만들어서 러시아가 3제 동맹에서 탈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다른 국가를 끌어들여서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했는데, 그 국가가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튀니지를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으나, 베를린 회의에서 중재를 해준 대가로 튀니지를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눈치 챈 비스마르크는 1882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세 국가가 모여 삼국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도 달마티아 지역을 두고 서로 대립을 하고 있었고 이는 프랑스가 고립을 타파 할 기회였다. 1894년 러불동맹을 맺음으로서 고립을 타파한 프랑스는 1902년 이탈리아와 비밀 협상을 맺는다. 프랑스가 독일과 전쟁을 벌일 때 이탈리아가 중립을 지키는 조건으로 이털리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전쟁을 벌일 때 프랑스도 중립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독일과 프랑스 사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탈리아는 독일을 돕는다는 삼국 동맹 조약을 전면으로 위배한 것이다. 하지만 1차 대전 발발 직전 까지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의 기한을 갱신하는 이중 외교를 선보였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를 합병하는 보스니아 위기가 발발했다. 이는 이 지역을 노리고 있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항의를 촉발시켰다. 하지만 전쟁까지는 원하지 않았던 세르비아의 후견국 러시아의 압박으로 세르비아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정식으로 합병 된다.[1]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오스만 제국에 보상금으로 2,200,000 리라를 지불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이는 베를린 조약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으로 프랑스, 이탈리아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 조약에서 합의한 바에 같이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를 합병을 인정하는 대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치 하에 있는 미수복 이탈리아 영토의 보상을 기대했지만 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이탈리아가 삼국 동맹을 파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승리를 한 이탈리아는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를 획득했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확장 정책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불안감을 야기시켰다. 이는 곧 현실이 된다. 이탈리아가 승리하는 것을 본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들이 1912년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발칸 전쟁을 일으킨다. 발칸 전쟁의 결과 러시아가 추친하던 발칸 동맹은 획득한 영토를 두고 발칸 반도 국가들의 이전투구로 적대관계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또한 발칸 반도에서 터져나오는 긴장감과 갈등은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 부처가 암살당함으로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신호탄이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적대적인 스탠스와 달리 삼국협상을 맺었던 영국,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 병합을 즉각 승인함으로서 그들 사이가 좋아지는 하나의 단초를 마련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이탈리아가 삼국동맹보다는 삼국협상에 가담했을 때 얻어 먹을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편 사라예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는 중립을 선언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독일과는 상의를 했지만 이탈리아의 의사는 확인하지 않은 불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가 되자 협상국 동맹국은 이탈리아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에 가장 적극적인 것은 협상국이었다. 중립을 대가로 트렌티노를 주겠다는 동맹국과 달리 협상국 트리에스트, 괴르츠, 이스트리아 반도, 달마티아, 쥐트티롤을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중립을 주장했던 조반니 졸리티 총리가 사임을 하고 참전파였던 안토니오 살란드라가 총리가 되자 1915년 4월 26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런던 조약을 체결하고 공식적으로 협상국의 일원이 되었다.

결국, 이탈리아는 1915년 5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전면적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독일을 향한 선전포고는 1년 이상 늦춰서 협상국들 사이의 발언권을 약화시켜, 이는 1차대전 당시 협상국에 참가해서 받기로 한 미수복 영토의 절반을 받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2. 전개

1915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를 한 이탈리아는 이손초강을 건너 괴르츠를 점령, 그 다음 카르스트 고원으로 진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 계획이 잘 풀리면 라이바흐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도 까지 진격하는 나름 야심찬 계획이었다. 이는 11차까지 이어지는 이손초 전투의 시작이었다.

러시아와의 동부 전선에 집중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병력을 3대 1로 앞선 이탈리아 왕국군은 호기롭게 공격을 시작했지만 고원 지대에 막혀서 별 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차량, 장비, 탄약은 매우 빈약하기 그지 없었고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서 얻은 손실을 회복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탈리아는 결국 북쪽의 고지대인 카닌 산맥과 고지대의 서쪽 끝 몬팔코네, 포글리아노 레디푸글리아만 점령 한채 첫번째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휴식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전투가 끝난 2주후, 곧바로 제2차 이손초 전투가 발발했다. 이탈리아는 철조망 절단기가 매우 부족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방어선을 뚫지 못해 결국, 바토그니카 산을 점령하는 것으로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비록 작은 영토를 획득했지만 이에 고무가 된 루이지 카르도나 장군은 더 많은 포병을 동원했다. 두달 반 정도 휴식을 한 이탈리아 왕국군은 1,200문의 중포로 무장한 채 이손초 강 일대를 또 다시 공격했다. 증강된 포병의 지원을 받은 이탈리아군은 순조롭게 진격을 하나 싶었지만 발칸 전선에서 온 원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제3차 이손초 전투가 끝난지 2주 후인 11월 1일 또 다시 이탈리아군은 이손초 강을 공격했다. 이번에도 전투의 대부분은 괴르츠 일대와 카르스트 고원이였다. 이탈리아는 이손초 강 일대를 모두 살펴볼 수 있는 오슬라비아와 그 주변 언덕을 점령하는 데 성공은 했지만 12월 중순 알프스에도 겨울이 도래하자 전투는 소강 상태가 되었다. 동부 알프스 일대에만 병력을 집중하면 되는 이탈리아와 달리 발칸 반도, 동부전선에도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로서는 상당한 불리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는 독일의 지원을 요청하게 되는 하나의 단초가 되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1915년이 지나고 1916년 봄이 오자 이탈리아는 또 다시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제5차 이손초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겨울 기간 동안 준비를 했지만 그건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베르됭 전투로 극심한 피해를 보고 있던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해 아무런 계획도 없이 공격을 한 것이다.[2] 어쨌든 괴르츠와 톨민의 교두보를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펼쳤으나 사바티노 산만 정복을 하고 나머지 공세는 전부 돈좌되었다.

한편 충분히 이탈리아에 피해를 주었다고 생각을 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러시아가 극심한 피해로 방어로 전환함에 따라 이탈리아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서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아직까지는 독일과 이탈리아는 전쟁 상태가 아니었으나 독일은 갈리치아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을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함으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해 주었다.[3] 한편 이탈리아에게도 이와 같은 정보가 전해졌지만 이탈리아의 루이지 카르도나 장군은 이를 무시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기본적인 목표는 이손초 강 일대에 가해지는 이탈리아 왕국군의 압박을 줄이는 것이었는데, 만약 작전이 매우 잘 풀려서 베네치아와 베로나까지 점령에 성공한다면 아예 이손초 일대의 이탈리아 왕국군을 포위섬멸하는 것까지 생각해두고 있었다.

트렌티노 공세가 시작이 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아지아고 고원으로 진격해 아지아고를 함락시켰다. 하지만 탄약 부족과 병사들의 기진맥진으로 더 이상 진격은 불가능했다. 또한 러시아 제국군 베르됭 전투의 압력을 덜어주기 위해 6월에 브루실로프 공세를 시작하자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탈리아는 바로 공세에 나섰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력군이 동부 전선으로 간 틈을 노린 것이다. 1916년 8월 6일 공격을 시작한 이탈리아군은 하루만에 사보티노 산과 몬테 산 미켈레 산을 점령함으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방어선을 무너트렸다. 결국 괴르츠를 함락시킨 이탈리아는 서부 카르스트 고원을 점령했고 전쟁에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이탈리아는 8월 28일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곧바로 노바 바스 지역을 향한 공세를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노바 바스 지역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를 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에 20,000여명의 병력을 소진시키는 데 성공을 했다. 이어서 제8차 이손초 전투, 제9차 이손초 전투를 감행한 이탈리아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4]

그러던 와중에 191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저번 1916년에 일어난 브루실로프 공세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어 동부전선을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어 독일한테 동부 전선을 전부 맡아달라고 요청을 보냈고 이에 독일은 제안을 거부하는 대신 이탈리아 전선에 증원병을 보냈다. 그 사이 일어나 제 10차 이손초 전투, 제 11차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는 선전을 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결국 노회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사후 새로 황제에 오른 카를 1세는 이기기 위해서는 공세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최초로 독일 제국군이 이탈리아 전선에 참여한 전투인 카포레토 전투가 발발하게 된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독일군의 참전과, 이전과 다른 대규모 독가스 공격은 이탈리아군에게 엄청난 치명타를 입히게 된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베네치아까지 후퇴하여 자칫 잘못하면 파국을 맞이할 뻔했지만 다행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군을 내쫒는것에 만족하여 공격을 멈춘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군 자력으로 피아베강에 공세를 가했지만 이탈리아군도 재정비를 하여 결국 실패한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부에서도 장기화된 전쟁으로 경제가 피폐해지자 반전 여론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인과 헝가리인이 아는 제국 치하의 피지배민족들 사이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파업과 반전시위 때문에 전쟁을 조기 마무리 하기 위해서는 공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가 조기 탈락을 하자 동부전선의 병력을 이탈리아로 돌리는 것이 가능했다. 카포레토 전투 패배 후 사임을 한 루이지 카르도나 장군 대신 아르만도 디아즈 장군이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도 지원을 보내주어 이탈리아의 방어선을 탄탄하게 만들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새로운 참모총장 아르투어 폰 슈트라우센부르크는 피아베강 일대로 공세를 감행 베네치아와 비첸차[5]를 점령을 해 이탈리아에 휴전을 강요할 생각이었다.

1918년 6월 17일 피아베강 전투가 개시되었다.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정보를 습득한 아르만도 디아즈 장군은 다리들을 파괴함으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진격과 보급을 방해했고, 여기에 이탈리아의 거센 저항까지 더해져, 더 이상 진격을 할 수 없게 된 오스트리아군은 결국 후퇴하게 된다. 이 때 협상국 총사령관이었던 페르디낭 포슈는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무너트리기 위해 공세를 감행하라고 했지만 아르만도 디아즈 장군은 이탈리아군이 너무 분산되어 있어 무리라고 판단해 공세에 나서지는 않았다.

이탈리아는 계속해서 공세에 나서지 않았다. 서부 전선에서 더 많은 지원군이 도착하길 기다린 것이다. 그러는 사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내부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는 독립을 선언했고 병사들은 탈영, 명령 불복종, 상부의 허락 없는 퇴각을 했다. 카를 1세는 협상국과 단독 강화를 실시하였으나 실패로 끝이 났고 이중제국의 기틀이었던 헝가리 왕국 마저 독자적으로 협상국과 협상을 해서 패전국 지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도 협상국의 일원이 되어서 포로로 구성된 5개 연대가 창설되기도 했다.

마침내 1918년 10월 23일, 이탈리아는 최후의 공세를 감행하게 된다. 이탈리아 전선의 최후의 전투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싸울 의지가 없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무질서하게 패주를 했고 스베토자르 보로에비치 장군은 반격을 명했지만 그의 군대는 명령에 불복종하였다. 또한 전투가 진행 중이던 10월 31일 헝가리 의회는 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탈퇴를 선언했다.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최고 사령부는 전면적인 후퇴를 결정했다. 그리고 11월 3일 최고사령부는 모든 부대에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고 명령했고, 또한 이탈리아에 휴전 협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추가 진격을 중단 할 것을 요청했지만 전과 확대를 원한 피에트로 바돌리오 장군에 의해 거부 되었다. 그러나 협상국 수뇌부는 휴전 협정을 받아 들일 것을 지시했고 결국, 11월 3일 파도바 교외에 있는 빌리 주스트에서 휴전 협상을 하게 된다.

휴전이 되자 이탈리아 왕국군은 런던 조약에서 약속된 모든 지역에 진주하였다. 티롤의 중심 도시 인스브루크, 아드리아해의 주요 도시 트리에스트, 카포레토 전투의 패배로 빼앗긴 괴르츠, 이손초 계곡, 서부 크라인, 달마티아 일대에 진주한 뒤 이 땅을 이탈리아로 병합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1.3. 결과

패전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가 되고 이탈리아는 승전국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런던 조약에서 약속받은 영토를 얻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미수복지구는 물론이고 알바니아 왕국의 보호령화와 아나톨리아 반도 남부의 항구 안탈리야, 가능하다면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까지 원했다. 그러나 쥐트티롤, 트렌티노, 이스트리아 반도는 차지했지만 나머지 지역은 획득하지 못했다. 그 지역에는 이탈리아계가 많지 않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 일대에 들어선 신생국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크나큰 갈등을 빚었다. 결국 1920년 11월 12일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따로 조약을 맺었다. 이는 라팔로 조약으로 이로 인해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 크라인 공국의 일부, 차라를 얻었고 또한 1924년 로마 조약으로 이탈리아인이 다수인 피우메가 이탈리아에 병합되지 않자 분노한 이탈리아인들이 세운 피우메 자유국을 병합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로 인해 더 많은 영토를 획득하지 못한 이탈리아인들은 매우 분노했다. 이탈리아인들은 이를 불구의 승리(vittoria mutilata)라고 불렀다. 결국 이탈리아 총리 비토리오 오를란도는 베르사유 조약 체결 3일 전 사임했다. 전쟁이 끝나고 사회적 혼란은 이탈리아의 이념 대립에 불을 붙였고 이는 극좌, 극우 세력들이 활동하게 좋은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 결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묵인 아래 1922년 10월 좌익과 중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즘 성향의 검은 셔츠단 로마 진군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는 원인이 되었다.
[1] 베를린 회의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보스니아 지역을 얻었지만 이는 합병이 아니라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이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실권이 있는 공동통치령 형식이었다. [2] 원래는 아직 추운 3월이 아니라 날이 갠 4월 중순으로 공세 날짜를 정했다. [3] 3개월 후 이탈리아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4] 제8차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산텔리아가 전사했다. [5] 포 강 유역 평야지대와 알프스 산간지대를 연결하는 곳으로 이탈리아의 주요 군기지와 보급기지가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