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cc21,#deab0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무 장관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 Alois Lexa von Aehrenthal |
|
|
|
본명 |
Alois Leopold Johann Baptist Graf Lexa von Aehrenthal 알로이스 레오폴트 요한 밥티스트 그라프 렉사 폰 에렌탈 |
출생 | 1854년 9월 27일 |
오스트리아 제국 보헤미아 왕국 그로스 스칼 | |
사망 | 1912년 2월 17일 (향년 57세)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 | |
역임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무 장관(1906년 ~ 1912년) |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무성 장관.2. 생애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은 보헤미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가톨릭 신자였다. 1854년 9월 27일 보헤미아 왕국의 그로스 스칼[1]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대지주 요한 프리드리히 폰 에렌탈 남작 (Johann Friedrich Freiherr Lexa von Aehrenthal, 1817-1898)이었고, 어머니는 마리에 펠리치타스 폰 툰 운트 호헨슈타인 백작부인(Maria Felicitas von Thun-Hohenstein)이었다.어릴 때부터 귀족으로서의 특권의식을 함양한 에렌탈은 본 대학교와 프라하 대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1877년 오스트리아 외교관으로 외교 업무를 시작했고, 러시아, 루마니아 주재 대사 등을 역임했다. 특히 1899년부터 1906년까지 러시아 대사로 근무하며 러시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했다.
당시 에렌탈은 친러 성향을 보였다. 러시아 문학과 문화에 심취했고, 러시아 정재계에서도 신망이 두터웠다. 그는 비스마르크 시절 구상된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삼제동맹의 부활을 모색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1906년 10월, 에렌탈은 아게노르 골루호프스키(Agenor Gołuchowski der Jüngere, 1849-1921)의 후임으로 프란츠 요제프 1세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무 장관에 임명되었다. 재임 기간 그는 제국의 세력 확장을 위해 적극적이고 독자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했다.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1908년 단행한 보스니아 합병이었다. 1908년 10월 6일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에렌탈의 추진으로 보스니아의 합병을 선언했는데, 1878년 베를린 회의 이후 30여 년간 점령 통치해 온 이 지역에 대한 주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이는 국제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특히 인접국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주권을 두고 갈등을 빚던 러시아가 강력히 반발했다. 에렌탈은 합병을 기정사실화하려 했지만 열강들의 반대로 위기에 직면했다. 사태는 독일의 지원으로 봉합되었으나,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러시아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삼국동맹의 맹방이었던 이탈리아와도 마찰을 빚었다. 1911년 이탈리아의 리비아 침공 당시, 오스트리아 군부에서는 對 이탈리아 선제공격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에렌탈은 이를 반대하며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와 대립했다.
그 밖에도 그는 노비바자르 산자크(Novi Pazar Sandžak) 지역을 통과하는 빈- 살로니카 철도 건설 계획을 발표하는 등 발칸 반도에서 제국의 영향력 과시에 힘썼다. 그러나 주변국들의 견제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에렌탈은 1912년 1월 건강이 악화되어 사직을 요청했고, 후임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가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월 17일 57세로 사망했다.
3. 정책과 평가
에렌탈은 대외 정책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재임 초기에는 독일, 러시아와의 삼제동맹 부활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결국 보스니아 합병 등을 통해 제국의 세력 확장에 주력했다.그의 대표적 업적인 보스니아 합병은 오스트리아의 국제적 위신을 높였지만, 주변국들과의 외교 마찰을 초래했다. 특히 세르비아, 러시아 등 슬라브계 국가들과 대립하며 제국의 고립을 심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이탈리아와의 갈등으로 삼국동맹의 위기를 초래했으며, 합스부르크 제국 내부의 민족 문제에 대해서도 근본적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균형, 독일에 대한 자율성 유지 등 제국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펼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에렌탈의 후임자들은 그의 정책 기조를 이어받아 제1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대내외 정세에 대응해 나갔다.
동시대인들은 에렌탈을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로 묘사했다. 재임 당시 그는 러시아어 능력과 사교성으로 인정받았지만, 독선적이고 교활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확고한 보수주의자로서 군주제 체제를 수호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대국 지위 유지에 진력했던 인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