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일반참모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1859년 7월 11일 당시
보헤미아
베지르크 프라크오스트의 메시체(Měšice) 성에서
잘츠부르크
총독이었던 지크문트 툰호헨슈타인(Zikmund Thun-Hohenstein, 1827-1897) 백작과 노스티츠리네크(Nostic-Rieneck) 가문의 마틸데(Mathilde, 1831-1910) 백작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툰호헨슈타인은
군인의 길을 택해 1878년 브란디스(Brandýs)[1]}}}의 제13용기병연대
소위로 임관했다. 1883년
중위가 되어 황제 친위대에서 복무하기 시작했다. 1891년
기병대위(Rittmeister)로 진급해
체르노비츠의 제9용기병연대, 이후 베레츠자니(Brzeżany)[2]와
마르부르크의 제5용기병연대에서 근무했다.
1900년
소령으로 진급해 황제친위기병대대장(Garde-Eskadrons-Kommandant der k.u.k. Leibgarde-Reiter-Eskadron)이 되었다. 이후 툰호헨슈타인은 1905년
중령, 1908년
대령으로 진급했고, 1912년에는 퇴역했다. 1911년부터 1915년까지는 슐레지엔 주의회 대지주 의석 의원을 지냈는데, 이는 그의 부인이
슐레지엔의 벨케 쿤치체(Velké Kunčice)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역에서 물러난 후에도 1913년 명예
소장, 1917년에는
중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모스타르 군관구사령관을 지냈다.
1893년 빈에서 라리시뫼니히(Larisch-Mönnich) 가문의 가브리엘라(Gabriela, 1872-1957) 백작부인과 결혼했다. 그녀는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페르디난트 다임 폰 슈트르지테르제(Ferdinand Deym von Stříteže) 백작의 보호 아래 자랐고, 벨케 쿤치체 영지와 페트르즈발트(Petřvald)의 탄광들을 상속받았다. 결혼 직후 탄광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벨케 쿤치체 성을
신르네상스 양식으로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가브리엘라는 황실 궁정 여관(Palastdame)이자 성십자훈장 수훈자였고, 자선활동에도 힘썼다. 1922년에는 폴란드 재건 훈장을 받았다. 1945년 재산을 몰수당할 때까지 벨케 쿤치체의 영주부인이었고, 이후에는 테신(Těšín)에서 은거했다.
부부는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장녀 헨리에타(Henrietta, 1894-1984)는
빈의 모자 제조업자 가문 출신의 카를 하비히(Karl Habig, 1879-1937)와 결혼했다. 장남 에르빈 지크문트(Erwin Sigmund, 1896-1946)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으로 참전했고, 전간기에는
아르헨티나에서 살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초에 유럽으로 돌아와 아프베어(Abwehr)에서 일했으나 1945년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1946년 2월
쇼프론에서 처형되었다. 차남 페르디난트(Ferdinand, 1898-1978)와 차녀 안나(Anna, 1902-1988)는
빈에서 살다가
잘츠부르크 시립묘지의 조부모 묘소에 함께 묻혔다. 툰호헨슈타인 부부는 벨케 쿤치체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