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크라우스는 1862년 4월 26일
달마티아의
차라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관 프란츠 크라우스(Franz Krauß,1824-1905)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바나트의 브르샤츠(Vršac),
쇼프론,
실레지아의 치에신(Cieszyn) 등에서 보냈다. 바이스키르헨(Weißkirchen)[1]의 군사학교와
비너노이슈타트의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83년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886년부터 2년동안
빈의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 수학했다. 1894년
그라츠에서 이다 베버(Ida Weeber)와 결혼했다. 1901년 상급대대를 지휘했고 1904년
빈 군사기술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10년
빈의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 교장에 임명되었고
소장으로 진급했다. 1913년
중장이 되었다.
크라우스는 1914년 8월
리보리우스 폰 프랑크 휘하의 제5군 산하 제29보병사단장으로
세르비아 침공에 투입되었다. 9월, 크라우스는 샤신치(Šašinci)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의
사바강 도하를 저지했다. 12월에는
베오그라드 철수 전투에 참여했다. 1914년 말 발칸군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15년 5월
이탈리아가 참전하자 신설된
이손초 전선 남서부전선군 참모장이 되었다. 1916년 5월
남티롤 공세를 주도했으나 아시아고 지역 돌파 후 이탈리아군 반격으로 작전을 중단해야 했다. 1917년 3월
카르파티아산맥에 배치된 제1군단을 지휘했다. 같은 해 8월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한달 후, 제1군단이
이탈리아 전선으로 전환되어 독일 제14군에 배속되었다. 10월 24일부터 하루에 걸쳐 보베츠(Bovec)전투에서 이탈리아군 전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카르프라이트(Karfreit)의 기적'으로 불리는
카포레토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 공을 세웠다.
1918년 5월부터
우크라이나 주둔 제2군을 지휘했다. 전쟁 후 1920년
빈에서 결성된 독일인 장교 국민연합(Nationalverband Deutscher Offiziere)의 지도자가 되었다. 1927년부터 사망 시까지 범게르만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잡지 《도이칠란트 에어노이에룽》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후 4월 1일
나치당에 입당해
나치 독일 제3제국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돌격대(SA)에서 여단장 직위를 받았다. 6월 3일 부인과 함께
히틀러를 알현했다. 1938년 9월 29일 바트고이세른암할슈테터제(Bad Goisern am Hallstättersee)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크라우스는
세르비아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서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발휘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주요 승리에 기여했다. 특히 1914년
세르비아 침공 시
사바강 도하 저지와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크라우스는 황제
카를 1세의 신임을 받았으며, 참모총장
아르츠와 함께 젊고 진취적인 장교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여겨졌다. 특히 그의 전술적 재능과 리더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내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다만
트렌티노 공세 당시에
빅토어 단클과의 의견 대립으로 작전에 영향을 주었고, 패배를 당한 오점도 있었다. 무엇보다 크라우스의 제일 문제점은
제1차 세계 대전 말
독일군의 영향력 확대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독일에게 끌려다니는 오스트리아에게 줏대없이 독일을 의지했던 점, 전간기와 나치 시대에 범게르만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나치당에 입당해
히틀러를 지지하기도 했던 이러한 정치적 행보는
오스트리아의 민족 정체성 확립 노력과 상반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