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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ff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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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44년 11월 2일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츠라안 궁전 | |||
사망 | 1918년 7월 3일 (향년 73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이을드즈 궁전 | |||
묘소 | 이스탄불 술탄 레샤트 영묘 | ||
재위기간 | 오스만 파디샤[3] | ||
1909년 4월 27일 ~ 1918년 7월 3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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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 아버지 | 압뒬메지트 1세 | |
어머니 | 귈제말 카든에펜디 (출신: 보스니아) | ||
배우자 | 카무레스 바쉬카든에펜디 (출신: 우비흐인) | ||
미흐렌기즈 카든에펜디 (출신: 우비흐인) | |||
뒤르뤼아덴 카든에펜디 (출신: 러시아 소치 출신[4]) | |||
나즈페르베르 카든에펜디 (출신: 코스탄티니예 출신 압하스계 가문) | |||
딜피립 카든에펜디 (출신: 코스탄티니예 출신 체르케스계) | |||
자녀 | 메흐메트 지야옛딘 황자, 메흐메트 네즈멧틴 황자, 외메르 힐미 황자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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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컬러로 복원한 메흐메트 5세의 동영상.[5]
오스만 제국의 35대 술탄이자 29대 파디샤로, 31대 술탄 압뒬메지트 1세의 셋째 아들이다.
2. 생애
2.1. 즉위 전
1844년에 태어났다. 1851년 어머니가 죽자 계모인 세르베레차 카든의 의해 키워졌다. 1856년 12세의 나이에 그는 그의 이복동생들인 셰흐자데 아흐메트 케말렛틴, 셰흐자데 메흐메드 부르하넷틴[6], 그리고 셰흐자데 아흐메트 누렛틴과 함께 의식적으로 할례를 받았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피아노 교육을 받았다.2.2. 재위
1909년에 청년 튀르크당에게 폐위된 이복형 압뒬하미트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친절하고 온화한 성격에 역사에 관심이 많았으나 실권은 없는 엔베르 파샤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에 즉위부터가 청년 튀르크당과 엔베르 파샤, 탈라트 파샤, 제말 파샤 삼인방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의 즉위 직전 입헌군주제 개헌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었다.1911년엔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을 치러 패전한다. 이리하여 트리폴리, 키레나이카 지역을 할양했다. 사실 할양 이전에도 이 지역은 반독립 상태였다.
이 전쟁에서 패배하자 오스만의 약세를 확인한 발칸 지역 국가들이 동맹을 맺고 선전포고를 해 와 본격적으로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그야말로 탈탈 털린다. 사실 메흐메트 5세는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큰 잘못은 없지만 어쨌든 그가 황제이니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다만 1913년의 2차 발칸 전쟁에선 세르비아-그리스-루마니아-몬테네그로와 편먹고 간신히 동트라키아 지방을 되찾았다.
이후 1차 대전 참전 당시에도 전쟁 직전까지 친영파와 친독파로 나뉘어 입씨름 중이었던 오스만 조정 내에서 메흐메트 5세는 개인적으로 친영, 친불파였으나 결국 엔베르 파샤에게 밀려 제국은 동맹측에 참전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역사상 지하드를 선포한 최후의 칼리프[7]이기도 한데, 이 지하드라는 것이 다름 아닌 제1차 세계 대전. 하지만 칼리프 본인은 전쟁을 원치 않았음에도 엔베르가 떠밀다시피 하여 선언된 것인 데다 가장 먼저 이슬람을 받아들인 아랍인들조차 이 '성전' 에 맞서는 등, 지하드 치고는 나사가 여럿 빠져 있었다.
사실 지하드 선포를 통해 가장 크게 노렸던 건 당시 인도 제국 내 무슬림 주민들의 내부봉기였는데, 거짓말 같이 인도 무슬림들은 영국에 협조적이었으며(...) 인도 제국군에 참여해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비롯해 오스만 제국 동부에서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는데, 당시 아랍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무관심과 탄압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으며[8], 인도 무슬림들의 입장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좋은 인연은 어디까지나 옛 무굴 제국 튀르크계 지배층의 일일 뿐 이슬람교로 개종한 토착 인도인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또한, 아랍 지역에서도 대반란이 일어났고,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와 협력한 아랍 가문들이 반란에 성공하면서 헤자즈 왕국이 독립하기도 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가 대부분의 아랍 지역을 나눠가졌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다굴을 해오자 전황은 오스만 제국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다만 갈리폴리 전투에서 무스타파 케말과 오스만 제국군의 활약으로 영국군을 격퇴하여 코스탄티니예가 점령 당하는 치욕은 면했다. 1918년 패색이 뚜렷하던 전쟁 말에 당뇨병으로 급사했다. 제위는 이복동생 메흐메트 6세가 이었다.
[1]
Mehmed-i hâmis
[2]
Reşât (레샤트)는
페르시아어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오스만 역사상 메흐메트들이 한둘이 아닌지라 별명으로 불렸다. 그리고 실제로 본인도 메흐메트보단 레샤트로 서명하기를 선호했으며 당시의 화폐에도 레샤트의 이름이 박혀서 발행되었다. 의미는 '옷을 잘 입는 사람', '멋쟁이'라는 뜻이다. 이 사람도 술탄 레샤트라고 불린다.
[3]
수니파의 칼리파 겸직.
[4]
러시아 제국의
체르케스인 학살을 피해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해왔다.
[5]
1차 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을 방문한
빌헬름 2세를 영접하는 영상이다. 묘하게 왕따당하는것처럼 나오는
엔베르 파샤는 덤
[6]
바예지트 오스만의 할아버지.
[7]
그리고 그 시기부터 메흐메트 5세 사망 시기까지 발행된 화폐에는 그의 이름 대신 '성전사'라는 뜻의 'el-gazi'가 찍혀서 발행되었다.
[8]
메흐메트 5세 때를 기준으로 잡아도 수백 년 전인 메흐메트 2세니 쉴레이만 1세니 하던 시절에도 튀르크계가 아니면
데브시르메 제도로 징집된 그리스계,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계, 알바니아계 등등등이 정치를 했지 아랍계가 중앙 정계에 진출한 적은 없다고 봐도 좋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민족주의가 유행한 이후로는 같은 무슬림임에도 "아랍 놈" 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박해에 시달렸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아랍인들 중에도
오스만이나 튀르키예라고 하면 일단 고개부터 젓는 사람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