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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6-06 15:32:25

김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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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김기원(金起元)
자 / 호 군석(君錫) / 당헌(棠軒)
본관 의성 김씨
출생 1888년 9월 27일
평안도 용강현 신정방 구룡동[1]
(현 평안남도 대안군 오신리)
사망 1950년 9월 28일 추정
황해도 서흥군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상하이2.3. 광저우2.4. 충칭2.5. 통일 민족국가 수립 운동2.6. 비참한 최후2.7. 사후
3.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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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2.1. 초년기

김붕준은 1888년 9월 27일 평안도 용강현 신정방 구룡동(현 평안남도 대안군 오신리)에서 아버지 김의현(金義鉉)과 어머니 김씨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1895년 7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907년까지 고향에서 사냥을 하며 지냈다. 또한 1904년엔 예수 재림교회 제7안식교회가 용강에 세워진 후 W.R. 스미스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교했고, 교회에 다니면서 서양 신학문을 배웠다.

1907년, 김붕준은 신학문을 더 자세히 익히기 위해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과 함께 서울로 상경했고 1908년에 보성중학교 농림과에 입학했다. 그는 보성중학교에 재학하면서 애국계몽 운동을 위해 세워진 서북학회에 가입해 노백린, 박은식, 안창호, 유동열, 이갑, 이동녕, 전덕기 등과 교류했다. 또한 비밀결사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에 가담해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했다.

1911년 일제가 105인 사건을 일으켜 신민회를 강제 해산시켰을 때, 김붕준은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진남포로 내려가 화를 피했다. 이후 서울 승동교회에서 한석진 목사와 여운형 등과 함께 승동학교를 운영했다. 당시 그는 불모지로 남아있는 땅이 많은 것에 매우 개탄해하며 불모지를 개간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중학교에서 농림과를 전공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몇년 간 준비한 후 1916년부터 대동강 지류인 인황천(仁皇川)과 인황천의 지류인 동창천(東倉川) 하류 대안에 걸친 갈밭 개간에 착수했으며, 마을에도 관개 시설을 건설했다. 그 결과 밭농사를 하기에 충분한 많은 땅들이 조성되었고, 지역 농민들의 삶이 향상되었다.

2.2. 상하이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김붕준은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상하이로 가서 안창호의 추천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서기를 맡아 실무를 담당했다가 1920년 2월 21일부로 군무부 참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임시정부 군무총장은 노백린이었지만, 그는 미국에서 비행사 양성에 주력하고 있어서 실제로 임시정부 군무부를 이끄는 이는 김붕준이었다. 그는 군무부 포고 제1호를 발표해 군대의 양성과 편성을 통해 독립전쟁을 준비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또한 김붕준은 1919년 7월 13일에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대한적십자회가 발기되고 8월 29일에 대한적십자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었을 때 선언문과 결의문을 내외에 선포한 78명 중의 1인으로 참가했고 적십자회원이 되었다. 대한적십자회는 일본적십자사에 대해 관계 단절을 선언하고 연금(捐金)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국제연맹을 향하여 일본적십자사의 무도무의(無道無義)한 죄악을 성토했다. 대한적십자회는 본부를 상하이에 두고 1919년 11월 15일에 제1회 총회를 개최했다. 국내는 물론 미국 로스엔젤레스와 러시아 니콜리스크(소왕령) 등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 지부를 설립했으며 중국인들과 서양인들까지 회원으로 모집했다. 또한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1920년 2월 1일에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여 전쟁에 대비한 의료 인력 양성을 시작하였다. 김붕준은 1921년 11월 25일에 개최된 대한적십자회 총회에서 상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2월, 노백린이 상하이에 비로소 도착했다. 김붕준은 그 밑에서 군무부 참사로 활약하면서 군무부가 운영하던 육군무관학교의 군사교육 과정을 이수했고, 1922년 손정도가 교통부 총장에 임명되었을 때 교통부 참사에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안창호가 1913년 미국에서 조직한 단체인 흥사단의 이념에 공감하여 1921년 예비단우로서 가입했다. 김붕준은 가입 초기 상하이 지역 조직 가운데 하나인 제16반에 속해 단우로서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당시 임시정부의 형편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안창호가 많은 기대를 걸고 추진한 연통제와 교통국이 1920년 초에 붕괴되었고, 이로 인한 재정 곤란, 비능률적인 정부운영 체제, 초대 임시 대통령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로 인한 내부 갈등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이승만은 1920년 12월 상하이에 도착해 1921년 정초부터 임시 대통령 직무를 수행했지만, 임시 정부를 둘러싼 독립운동 진영의 혼란은 오히려 가중되었다.

안창호는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1921년 5월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회의 소집은 개최경비 문제로 계속 연기되다가 1922년 4월부터 개최되었다. 여기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요구하는 청원이 제기되었고, 임시의정원은 이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 개최를 승인했다. 이리하여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 회의가 상하이에서 열렸다. 각지의 지역대표와 단체대표 140여 명이 참가하여 그해 6월까지 지속된 회의에서 임시정부를 둘러싸고 두 가지 의견이 제기되었다. 하나는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새로운 독립운동 기구를 설립하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것이었다.

김붕준은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1923년 열린 제 11회 의회에서 차이석과 함께 평안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된 후 임시정부를 개조하는 쪽을 지지했다. 그는 임시정부에 대한 독립 진영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대통령 이승만을 외교정책 실패와 독단주의를 이유로 탄핵시키는 데 동의했으며, 임시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종전 대통령에게 속했던 권력의 일부를 국무원과 의정원에 넘기는 데 찬성했다. 그러나 이 임시헌법 개정문제는 1924년 2월 29일 거행된 제12회 의회에서 거론되었지만 의원의 자격과 권리를 둘러싸고 공방이 이어진 바람에 상정하지도 못했다. 어찌나 반발이 심했는지, 의회 첫날에 임시의정원 의장 윤기섭과 김붕준, 여운형 등 7명만이 참석해 개회식만 거행하고 산회될 정도였다.

김붕준은 이러한 상황에 실망하여 "대다수의 의원들이 출석하지 않은 것은 필경 국민이 현 정부를 승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최석순과 함께 의원직을 사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임시정부의 위상을 회복하고자 전력을 기울였고, 1925년 1월까지 진행된 제12회 회기에서 이승만 탄핵, 이동녕 임시대통령 직권대리 선임, 그리고 연이은 이동녕 내각의 사직에 따른 박은식 대통령 대리의 선출 등 굵직한 정치적 현안을 논의했다.

한편 김붕준은 상하이 동포사회의 자치조직인 대한교민단의 사무와 국정교과서의 편찬에도 관여했다. 1923년 1월 4일 도인권이 신임 단장에 선출되자, 김붕준은 교민단 총무를 맡아 주요 업무인 상하이 동포의 생활을 보고하고 임시정부 기반조직을 확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그는 1923년 11월 5일부터 임시정부 학무부 주관으로 개최된 국정교과서 제정과 발간에 관한 협의회에 참석했다. 협의회는 해외 한인 아동들에 대한 교육이 일정하지 못해 독립 운동에 대한 능력 발휘가 제대로 되지 못한다고 판단한 상하이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성한 것이다. 협의회에서는 편집위원을 선정하고 독립신문사에서 교과서를 간행하기로 결정했다.

1924년 12월 박은식이 국무총리 겸 임시대통령 대리를 맡았다. 김붕준은 국무를 총괄하는 국무원의 비서장으로 선임되어 박은식을 보좌했다. 박은식 내각은 출범과 더불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추진했다.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민대표회의 때 제기된 임시헌법 개정이었다. 두 안건은 1925년 임시의정원 정기의회에서 논의되었다. 대통령 탄핵안은 안건으로 제출된 지 4일 만인 3월 18일에 통과되었고, 심판위원회의 심리를 거치면서 탄핵이 면직으로 바뀌어 3월 23일 '임시대통령 면직안'이 의정원의 결의로 통과되었다.

임시헌법 개정도 신속하게 추진되었다. 1925년 3월 30일, 의정원은 정부가 제출한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4월 7일 개정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했다. 이때 김붕준은 의정원에 출석해 새로 마련된 임시헌법을 낭독했다. 개정된 임시헌법에 따라 국무령제가 실시되었고, 초대 국무령에 이상룡이 선출되었다. 그러다가 이상룡이 임시 정부 내의 사상적 대립과 파쟁으로 정치적 경륜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국무령을 사임했고, 1926년 2월 양기탁, 안창호가 후임으로 선임되었지만 둘 다 사양하면서, 1926년 7월 홍진이 국무령에 선출되었다. 홍진이 국무령에 취임하고 국무원을 선출해 정부의 조직을 갖추면서 임시정부는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민족 유일당운동이 전개되면서 임시정부는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홍진은 '민족대당론'을 제기하기 위해 1926년 12월 국무령을 사임했고, 김구가 1926년 12월 10일 국무령에 취임했다. 김구는 국무령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개헌을 추진했다. 김붕준은 12월 23일에 윤기섭, 이규홍, 정원, 김철 등과 함께 헌법기초위원을 맡았다가 12월 25일 사임해 자신이 개헌에 회의적임을 드러냈지만, 1927년 4월 국무위원 집단지도체제를 골자로 삼은 헌법 개정안이 공포되는 걸 막지 못했다.

새 헌법은 유일독립당 촉성운동을 반영해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건설되면 국가의 최고 권력은 이 당에 있다고 규정했으며, 임시의정원에 7인으로 구성된 상임위원회를 설치해 폐회중에도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대행하도록 했다. 김붕준은 임시의정원의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단일 당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걸 탐탁치 않게 여겨 유일독립당 촉성 운동에 소극적으로 대했다. 이후 유일독립당 촉성 운동은 각지의 파벌들간의 격렬한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고 1929년 10월 26일 마지막까지 버티던 상하이 촉성회가 해체되면서 실패했다.

김붕준은 유일당운동이 결렬된 후 1930년 1월 25일 민족주의 계열에 속한 이동녕, 안창호, 조소앙, 김구 등 28인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했고 한국독립당 광동지부 대표를 맡았다. 그려면서 부인과 자식들이 상하이로 망명온 뒤 생활고에 시달리는 걸 극복하기 위해 사진관을 운영하다가 수지가 맞지 않자 사과 중개상을 하며 생업을 이어갔다.

2.3. 광저우

1932년 4월 29일, 김구의 의뢰를 받은 윤봉길 훙커우 공원 의거를 일으켰다. 이후 일제가 임시정부 인사들을 체포하려 들자,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야 했다. 이때 김붕준은 마침 주거지인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역을 떠나 "남양지방으로 여행 중"이었다. 김붕준이 왜 그곳에 '여행'갔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한국독립당으로부터 '남양' 개척의 임무를 받고 광둥에 특파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국독립운동계는 독립운동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남양' 방면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김붕준은 광둥에서 한국 독립당의 조직을 확대하는 활동을 했다. 그는 중국 측의 지원을 받으며 다수의 한인 유학생을 중산대학에 입학시켰다. 유학생들 중에는 그의 자녀 김덕목(1913년 생), 김효숙(1915년 생), 김정숙(1916년 생)도 있었다. 이들 삼남매는 1936년과 1937년에 중산대학 법학원 경제과를 졸업하고 중산대학 학생전시복무단에 가담해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

1932년, 통일동맹 주도하에 각 정당과 단체의 통일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임시 정부의 전폐문제가 거론되었고,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있던 한국독립당 내부에서는 1935년 들어 통일운동이 본격화되자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통일운동에 들어가야 할지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에 그해 21월 당론을 결정짓기 위한 제7차 당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한국독립당의 입장은 대동단결체를 조직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임시정부 처리를 둘러싸고 의견이 나뉘었다.

이때 광둥지부 대표 김붕준은 송병조, 조소앙, 조완구, 차이석, 박창세 등과 함께 신당 결성 반대 및 임시정부 지지의사를 표명했다. 결국 한국독립당은 단일당에 참가하지 않는 것을 당론으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3개월 뒤에 개최된 임시대표대회에서는 김붕준, 송병조, 조완구, 차이석, 이동녕, 이시영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두봉, 조소앙 등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제7차 대표대회의 결정사항을 번복하고 단일당 참여를 결정지었다. 이로서 1935년 7월에 5개 정당, 단체가 통일을 이룬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고,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독립당은 해체되었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7명 중 5명이 신당에 참가하면서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김붕준은 이런 상황에서도 임시정부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하지 않고 김구, 송병조, 차이석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재정비를 위한 조치를 도모했다. 이들은 1935년 10월 임시의정원 제28차 정기의회를 개최했다. 우선 국무위원 선거를 실시해 차이석 의원의 동의와 김붕준 의원의 재청, 양우조 의원의 3청으로 국무위원 5명을 새로 선출하고 정부와 의정원의 조직을 재정비했다. 이때 김붕준은 조소앙, 양평진 의원과 더불어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임시정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의 결성도 추진되었다. 정당의 결성은 민족혁명당에 참가하지 않은 전 한국독립당 세력 위주로 진행되었고, 그 중심엔 김구가 있었다. 김구는 이동녕, 조완구, 송병조와 한국독립당 광둥지부의 김붕준, 양우조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지지단체로서 민족혁명당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단체의 조직을 협의했다. 그결과 1935년 11월 하순 항저우에서 한국국민당이 창당되었다. 이사장에 김구가 선임되었고, 이동녕, 송병조, 조완구, 차이석, 김붕준, 안공근, 엄향섭이 이사에, 양우조, 이시영, 조성환이 감사에 선출되었다. 김붕준은 이사를 맡는 동시에 당의 검사 역할도 맡았다.

이후 김붕준은 광저우로 파견되어 당세 확장에 힘썼지만, 광저우 지역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민족혁명당에 참여하고 있어서 그 효과는 적었다. 당은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관지 <한민>을 발행하는 등 선전활동을 펴나갔고, 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한국국민당을 기반으로 운영되었다.

2.4. 충칭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1937년 11월, 일본군이 난징을 침략하자, 임시정부는 국민당 정부를 따라 창사로 옮겼다가 일본군의 공습이 있자 8개월 만에 광저우로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1938년 10월 광저우마저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자, 임시정부는 2년간 일본군의 공세를 피해 계속 이동해야 했고, 김붕준은 임시정부와 함께 피난을 떠났다.

그러다가 1939년 5월 기강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전열을 재정비한 뒤 그해 10월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을 11인으로 선출했으며 의정원 의원도 38명으로 늘렸다. 여기엔 우익진영의 재건한독당과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3당이 참여했다. 이때 김붕준은 1939년 11월 5일 의장으로 당선되어 의정원을 대표하여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주도했다. 이후 임시정부는 충칭 이전을 추진했다. 당시 충칭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시수도였는데, 임시정부는 그곳으로 옮겨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과 교섭을 용이하게 받고자 했다. 김구는 장제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장제스는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해 독립 운동을 전개하는 걸 허용했다.

이리하여 1940년 충칭으로 자리를 옮긴 임시정부는 1940년 3월 제2차 대회에서 3당 합당안을 논의했다. 김붕준은 통합에 따른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그 결과 재건한독당과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3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다. 또한 당의 당강, 당책과 조직체제(민주주의 중앙집권제), 연호(대한민국), 그리고 당 간부 인선 등 신당 창립에 필요한 절차와 준비 작업을 완료했다.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된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에 김구가 선출되었고, 김붕준은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김붕준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헌법 개정을 추진해 1940년 10월 9일 <대한민국임시약헌>을 공포했다. 이번 개헌은 전시체제 하에서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국무위원회 중심의 집단지도 체제에서 주석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로 바뀐 것이 특징이었다. 김구는 주석에 선출되었고, 김봉준은 임시의정원 의장을 계속 맡았다. 그러나 1941년 10월 15일에 개원한 제33회 정기의회에서, 엄항섭, 박찬익, 차이석, 민병길, 양우조, 이상만 등 의원 6명이 김붕준 의장 탄핵안을 긴급 제기했다. 탄핵안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첫쨰, 의정원 창립 이래의 정례와 원칙을 파괴하고 불순한 의도로 외국인 기자를 초치하여 임시정부와 의정원의 결정을 발설함으로써 임정이 아주 불완전한 것처럼 인식케 하여 광복사업에 막대한 방해를 했다.
둘쨰, 인민을 기만 선동하여 불법적 선거를 자행케 하여 선거행정과 선거법례를 파괴했다.
셋째, 정부 재정기관을 경유하지 않은 채 의회 비용 외로 금전을 변통 사용하여 재무행정을 파괴하였다.

김붕준 의장 탄핵안은 개회 당일 가결되었고, 박찬익, 홍진, 이시영으로 구성된 징계위원회는 '위법 난동'을 이유로 다음날 김붕준을 의정원에서 제명 처분시켰다. 김붕준이 탄핵당한 표면적 이유는 "외국 기자에게 임시정부의 결점을 발설하고, 선거법을 위반했으며, 의회 비용을 자의로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김붕준이 김원봉, 손두환 등과 접촉하여 좌익 계열의 인사를 대거 원내에 진출시키려고 시도하면서 이 사실을 한국독립당 인사들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익이 임시정부를 확고히 장악해야 한다고 여기던 한국독립당으로선 그의 이같은 움직임을 용납할 수 없기에 탄핵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김붕준은 탄핵당한 뒤 한국독립당을 떠나 한국독립당 통일동지회를 조직해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 운동을 지속했다. 그러다가 1943년 민족혁명당이 당세를 확대, 개편할 때 여기에 참가했다. 당시 그의 부인과 둘째 딸은 아버지를 따라 민족혁명당에 가입했고, 셋째 딸은 한국독립당에서 계속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곧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계 인사들과 마찰을 빛다가 자신과 함께 한국 독립당 통일동지회를 구성했던 손두환, 김철남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떠났다.

김붕준은 민족혁명당을 떠난 뒤 한동안 조용히 지내다가 상하이 원동위원부가 해소되고 흥사단 단원들이 전향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김붕준은 흥사단 원동단원들과 함께 반박 성명서를 발표하고 원동위원부의 부활을 선언했다. 당시 흥사단원들은 충칭시 무신상(務信相) 95호에 모여 살았으며 충칭에서 흥사단 특별반을 구성했다. 흥사단원들은 각기 신념에 따라 정치활동은 각각의 정치 결사에서 활동했지만 흥사단의 기본 정신에 입각하여 민족통일전선 구축의 의지를 함께 모았다. 1942년 11월, 김붕준은 한국광복군총사령부 내에 유한책임한국광복군사령부 군관소비합작사를 설립하고 일상생활용품을 취급하는 소비조합을 운영했다.

1943년 5월 10일, 재중국자유한인대회가 개최되었다. 충칭의 각 정당과 단체의 한인 3백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김붕준은 대회를 주관할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당시 연합국 사이에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던 중 한국이 국제 공동관리로 들어간다는 소식이 충칭에 전해졌는데, 김붕준은 재중국자유한인대회에서 국제공동관리를 반대하는 데 앞장서서 활동했다.

1944년 4월 26일, 제3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약헌 개정안이 통과되어 임시 헌장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 의원의 선거제가 변경되고, 부주석직이 신설되었으며, 국무위원 숫자도 증원되었다. 총원 50명의 임시의정원 의원 중 민족혁명당 소속 의원이 12명으로 늘어났다. 김규식이 부주석으로 선임되었고, 김붕준은 김원봉, 장건상, 성주식과 함께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김원봉과 최석순은 각각 군무부장과 문화부장에 선임되었다. 또한 민족혁명당,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4단체연합선언을 발표하면서 통일전선이 구축되었다.

1945년 2월 8일, 김붕준은 홍진, 유동열과 함께 민족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을 탈당한 탈당파 인사들을 결집하여 신한민주당을 결성했다. 신한민주당은 자신들을 정치단체나 정당으로 자임하지 않고 당면한 민족의 독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집단이자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애국주의 결사라고 천명했다. 당의 정책과 노선도 정치적인 문제보다 독립운동 진영에서 시급히 추진해야 할 대일항전에 역점을 두었다. 그들은 일제가 패망하기 전에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을 이루어 어떠한 형태든지 전쟁에 참가해야 한다고 봤다. 당의 최고 기구는 주석단이었고, 김붕준은 홍진, 유동열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시 독립 운동 진영의 여론은 신한민주당에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몇몇 청년들은 그들이 당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댄스 파티'를 열었다며 행사장에 화약을 뿌리다가 검거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붕준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뜻이 당파 싸움이 아니라 조국의 진정한 광복에 있다고 주장했고,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확충하고, 국내외 민중 조직과의 연계, 해외독립운동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 일이 절실함에도 별 진전이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또한 전체 민족 운동의 영도 중심이 되어야 할 임시 의정원이 전체 한국 민족을 대표하지 못하고 충칭에 있는 몇몇 인사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김붕준은 1945년 3월 16일에 홍진 등 50여 명과 함께 충칭에서 한국구제총회를 창립했고, 5월 6일에는 황학수, 차이석, 최석순, 이상만, 윤기섭 등 6명과 함께 임시정부 생계설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2.5. 통일 민족국가 수립 운동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면서 한국은 광복을 맞이했다. 김국 주석 이하 임정 요인 15인은 제1진으로 11월 23일에 귀국했고, 김붕준은 제2진으로 11월 28일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기후가 불순하여 입국이 늦춰져 12월 1일에야 황학수, 조성환, 성주식, 장건상, 유림, 김성숙, 조경한, 조완구, 조소앙, 최동오, 김약산, 안우생, 이계현, 김준엽, 노능서, 윤재현, 서상렬 등과 함께 군산비행장에 착륙했다. 장장 26년만의 귀국이었다.

김붕준 등 2진 일행은 군산에서 하루를 숙박하고 12월 2일에 서울로 입경했다. 김붕준은 12월 4일 홍진, 최동오와 함께 망우리에 안장된 안창호와 손병희의 묘소를 찾아 성묘했고, 미국에서 막 입국한 송종익, 김병환, 김성락, 한시대, 전경무, 그리고 중국에서 입국한 유진동 등과 협의하여 1946년 흥사단 국내위원부를 결성했다.

1946년 2월 20일, 임시정부는 18개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비상정치회의 준비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김붕준은 신한민주당 대표로 참여했으며 비상국민회의 발기에 참여해 민주의원에 피선되었다. 임시정부 계열의 민주의원들은 시, 구 및 도로 명칭개정위윈으로 활약하면서 일본식 이름의 도로 명칭을 우리말로 바꾸는 일을 했다. 오늘날 세종로, 을지로, 충무로 등의 명칭 개청은 바로 이때 이뤄졌다.

얼마 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이 한국을 신탁통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전역에서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김붕준은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고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는 피로써 건립한 독립국과 정부가 이미 존재하였음을 다시 선언한다. 5천년의 주권과 3천만의 자유를 전취하기 위하여는 자기의 정권 활동을 옹호하고 외국의 탁치 세력을 배격함에 있다. 우리의 혁혁한 혁명을 완성하자면 민족의 일치로써 최후까지 분투할 뿐이다. 일어나자 동포여!

1946년 좌우합작회의가 열렸을 때, 김붕준은 우익 측 대표자로 참석했고 1946년 9월 15일 신한민주당, 조선혁명당, 청우당, 재미한족연합회가 주축이 된 신진당의 창당을 주도했다. 신진당은 다음 3대 강령을 내세웠다.
1. 자주독립국가 완성과 민주주의 정치 실현
2. 국민의 평등 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경제제도의 확립
3. 민족문화의 건전한 발양으로써 인류문화에 공헌

김붕준은 1947년 과도입법의원에 피선되어 헌법 및 선거법 기초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1948년 민주자주연맹 발기에 참여하고 상무위원 겸 선전국장에 선출되어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나 사회에서 완전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경우에는 경제법칙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 같이 사실이 사실대로 인정되지 않고 도리어 유언비어로 민심의 불안을 조장할 뿐 아니라 본의아닌 건설적인 언론까지 봉쇄되는 염려가 있으니 책임당국은 언론자유에 유의하여 민심 불안을 제거하는 동시에 명랑한 사회 발전에 노력하기 바란다.

김붕준은 이후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협상회의에 김구, 김규식과 함께 참석했으며,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 각당 사회단체 대표연석회의에 김규식과 함께 참석했다. 평양에서 돌아온 후엔 1948년 6월 1일 경교장에서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고 김구, 김규식과 함께 통일 방략에 대해 논의했다. 그해 6월 8일, 80여 정당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통일독립촉성회 결성식에서, 김붕준은 개회사를 맡아 민족 통일 국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자는 취지의 개회사를 발표했다. 또한 통일독립촉성회 중앙집감위원 선출을 위촉하는 전형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23일 통일촉진회에 참석한 김붕준은 김구, 김규식과 함께 유엔 조선위원단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남북 각 정권 아래 군대는 선고 완료 시까지 유엔 국제 관리 하에 두고 남북을 통한 전국적인 총선거를 새로이 시행하여 전 인민의 의사를 물을 것을 유엔 총회에 전달해 달라.

그러나 김일성 등 북한 측이 끝내 총선거에 응하지 않자, 결국 남한 만의 선거가 실시되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김붕준은 초대 국회 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지만,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평화적 통일'·'명실상부한 의회 정치와 지방자치제 조속히 실시'·"헌법에 규정한 언론·출판·결사·신앙·행동의 자유 보장'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민주국민당 지청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6. 비참한 최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서울로 진격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적의 갑작스런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6월 28일 새벽 3시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 후 서울을 포기했다. 이때 김붕준은 낙선 후 서울의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유동열, 최동오, 윤기섭, 오하영, 원세훈, 엄항섭 등 임정 요인들과 함께 북한군에게 강제 연행되었다. 연행된 이들은 성남 호텔과 청파동, 성북동의 비밀 장소로 나뉘어 배치되었는데, 임정요인들은 주로 성북동 안가에 연금되었다.

그렇게 석달 동안 서울에서 북한군에게 붙들렸던 김붕준은 인천 상륙작전 이후 다시 북한군에 의해 강제로 이송되었다. 9월 27일 저녁, 북한군은 지프와 일반 승용차, 그리고 군 트럭에 연행 인사들을 나누어 실어서 북쪽으로 달렸다. 9월 28일 심야, 황해도 서흥에 이른 북한군은 미군기의 공습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북한군이 연행 인사들을 싣고 가던 차들 역시 포격을 받고 모조리 파괴되었다. 김붕준은 이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향년 62세.

2.7.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김붕준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또한 부인 노영재, 장남 김덕목, 큰 딸 김효숙, 사위 송면수, 둘째 딸 김정숙, 사위 고시복 등 7명도 항일 독립 투쟁에 헌신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제7선거구( 성동구 갑)) 민족자주연맹 8,669표 (23.29%) 낙선 (2위) [2]

[1]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 [2]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통계시스템 #에는 김명준(金明濬)으로 이름이 잘못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