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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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2년 4월 29일(음력) |
전라도
영암군 옥천시면 영신원리 (現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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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9년 5월 26일 (향년 57세) |
경성부 서대문형무소 | |
국적 |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조선 |
본관 | 제주 양씨 |
별칭 |
호(號)는 지강(芝江) 자(字)는 경조(景朝)·길중(吉仲) |
소속 | 공진회, 헌정연구회 |
종교 | 천도교 |
직업 | 독립운동가, 교육자 |
반드시 되리라는 생각은 없어도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니 너는 근심하지 말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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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인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아호는 지강(芝江)이다. 자는 경조(景朝) 또는 길중(吉仲)이다.그의 가문은 명문가였고 양반가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가족들과 상의해 노비들을 풀어주었고, 아버지는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여러 비법을 사용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2. 생애
양한묵은 1862년 4월 29일 전라도 영암군 옥천시면 영신원리(현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아버지 양상태(梁相泰)와 어머니 낭주 최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894년 능주(현 화순군 능주면)의 세무 관리(능주세무관)로 일하다가 1897년 사직하고 중국 베이징과 일본을 여행하던 중에, 일본에 망명 중이던 천도교(당시 동학) 교주 손병희와 전직 개화파 관료 출신인 권동진, 오세창 등을 만나 1902년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병희는 일본에 머무르면서 국내에 진보회를 결성하도록 하여 단발을 권하고 내정개혁을 촉구하는 등 계몽운동을 펼쳤는데, 이때 이용구의 일진회 계열이 친일파로 변신한 사건이 있었다. 망명 중이던 천도교 동료들보다 앞서 귀국한 양한묵은,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준, 윤효정과 함께 공진회,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였다. 헌정연구회는 근대적인 헌정 연구를 내세운 계몽단체로 입헌군주제를 주장했으며, '헌정요의'를 저술하여 약 1달 간 황성신문에 연재하였다. 이후 장지연, 나수연이 대한자강회로 이어받았다.
이기, 나인영, 오기호 등과 미국에서 열리는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참가해 한국의 입장을 밝히려는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이 귀국한 뒤로는, 다시 천도교 기반 계몽 운동으로 돌아온다. 1909년 천도교 법도사에 임명되어 천도교 교리서인 '대종정의', '무체법경' 등 약 20권의 교리서를 저술하였다. 그 중 대종정의라는 책에서 최초로 '인내천(人乃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손병희의 교육 운동에 적극 동조하여 보성전문학교, 보성중학교, 동덕여학교 등 근대 교육기관의 인수와 경영에 참여했다.
1909년 12월 이재명 의사의 이완용 암살 미수 사건을 양한묵의 지시로 일어났다면서 체포되었다. 무고로 풀려났지만,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오사카 마이니치신문」과 「경성일보」를 보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를 알게 되었다.
자기 민족의 일은 자기 민족이 처리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서, 한국이 마땅히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는 2월 20일 서울 돈의동에 있는 권동진(權東鎭)의 집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큰 일이 있다. 우리 조선을 위하여 매우 좋은 일이 있다고 전제하고, 그 기쁜 일은 국권을 회복할 독립선언을 하려고 한다.
구주전란 평화회의에서 종래 속국인 각국은 전부 독립 자치를 용인할 것을 결의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조선의 국권회복을 희망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하여 종래 속국으로 있었던 나라들을 독립ㆍ자치케 한다는 소식이 있으니, 국권회복을 희망하는 한국인도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독립선언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계획이 손병희ㆍ오세창ㆍ최린과 협의하여 추진되고 있다는 설명도 들었다.
깜작 놀랄 만한 계획을 들은 그는 매우 기뻐하며 그 계획에 찬성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과 수단을 연구할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있던 윤익선(尹益善)에게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알리고 그로 하여금 학생을 동원케 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전남 화순군에 사람을 파견하여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알림으로써 이 지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인 3월 15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될 수 있도록 하였던 것 같다.
그는 2월 23일 권동진의 집을 방문하여 그로부터 개신교계 및 불교계와 힘을 합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왔다. 그리고 2월 25일 다시 권동진의 집에 가서 그가 보여준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돌려주었다.
그는 2월 27일 오전 손병희의 집에 가서 홍병기로부터 저녁에 김상규(金相奎)의 집으로 모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동일 오후 4시 손병희의 비서인 김상규의 집에서 손병희, 이종일, 이종훈 등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제출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는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예비모임에는 요통이 심하여 참여하지 못했다. 그래서 3월 1일 오전 손병희를 방문하였고, 학생을 비롯한 군중의 절제되지 않은 행동을 피하기 위하여 시위장소를 파고다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고, 그곳에 참석한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독립선언식 직후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어 가혹한 고문을 동반한 심문을 받는 과정에도 그는 민족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는 경성지방법원 예심괘 담당검사 영도웅장(永島雄藏)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문: 피고는 조선이 독립이 될 줄 아는가?
답: 반드시 되리라는 생각은 없어도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문: 금후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지금 강화회의에서도 민족자결이 제창됨으로써 일본 정부의 원조로 자립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금번의 독립운동을 한 것이고, 금후도 기회만 있다면 할 생각이다. 그런데 나는 야심이 있어서 한 것이 아니고 독립으로써 조국이 부흥된다면 대단히 좋겠다고 생각하고 나의 직책인 천도교의 포교에 종사할 것이다.
답: 반드시 되리라는 생각은 없어도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문: 금후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지금 강화회의에서도 민족자결이 제창됨으로써 일본 정부의 원조로 자립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금번의 독립운동을 한 것이고, 금후도 기회만 있다면 할 생각이다. 그런데 나는 야심이 있어서 한 것이 아니고 독립으로써 조국이 부흥된다면 대단히 좋겠다고 생각하고 나의 직책인 천도교의 포교에 종사할 것이다.
요컨대 그는 "이번 거사로 독립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한국인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하였다.
독립 후 어떤 권력이나 지위를 획득하려는 야망도 없었으며, 단지 한국인이므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며, 독립 후에는 전과 같이 천도교의 포교활동에 전념할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러한 그의 당당한 답변은 더욱 가혹한 일본 경찰의 고문을 불러왔으리라 짐작된다. 감옥에서의 고초에도 불구하고, 그는 면회한 아들에게 ‘몸과 마음이 편안하니 너는 근심하지 말라’는 쪽지를 보내어 가족의 근심을 덜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그러나 56세의 노구가 일본 경찰의 고문을 감당하기는 무리였다. 그는 1919년 5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길지 않은 인생을 마감하고 환원하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한 옥중순국이었다. 순국 후 그는 서울 수철리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1922년 5월 고향을 그리던 그의 마음을 헤아려 천도교단이 주선하여 그의 묘소를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으로 반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