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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1875)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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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조성환(曺成煥)
이명 조욱(曺煜)
청사(晴蓑)
본관 창녕 조씨
생몰 1875년 7월 9일 ~ 1948년 10월 7일
출생지 한성부 낙원동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사망지 대구광역시
매장지 효창공원
추서 건국훈장 대통령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신민회 활동2.3. 해외 망명2.4.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 활동2.5. 중국 관내 활동2.6. 광복 후의 행적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조성환은 1875년 7월 9일 한성부 낙원동에서 진사 벼슬을 역임하고 있던 조병희(曺秉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성장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명문가에서 한학을 수학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17살 때 풍양 조씨와 결혼했고 26세 때인 1900년 9월 무관학도 2기로 선발되어 11월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무관학교는 장교를 양상하기 위한 교육기관이었고 당시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최고학부였다. 그 선발과정은 군부의 장군, 부관의 추천이나 칙임관과 각도 관찰사들의 추천을 받은 학도들이 경쟁하도록 되어 있어서 개인의 실력은 물론이고 신분적인 요소도 선발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가 입학한 해에 선발된 무관학도는 모두가 칙임관의 아들 또는 종제들이었고, 발탁되지 못한 자만 500여 명에 달했다.

무관학교에서 이뤄진 교육 내용은 전술학, 병기학, 외국어학 등이 주요 과목이었는데, 특히 외국어학의 비중이 42%에 달했다. 이는 무관학교 자체의 교육이 신학문이었고 많은 군사교재가 외국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성환이 이곳에서 습득한 군사학과 외국어 등은 후에 이어질 그의 독립운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는 이곳에서 동기인 신규식, 서상팔(徐相八) 등과 의기투합했고, 당시 교관으로 있던 노백린, 김의선(金義善) 등 선배 장교들과 교유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던 1902년 1월 9일, 무관학교 학생들이 소요를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무관학교 전교생이 퇴교를 결의하고 학교를 이탈한 것이다. 이 사건의 주동자는 다름아닌 조성환이었고, 그는 군기강을 문란케 한 죄로 당국에 구속되었다. 이후 2월 7일 육군법원에서 함께 동맹퇴교를 주도한 정규환(鄭圭煥), 서상팔 등 12명과 함께 재판을 받았고,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다른 주동자들은 종률을, 사건에 관련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교관은 면직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1901년 이후 일본 육사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대거 무관학교 교관으로 발령되면서 이들과 학교 당국간에 마찰이 있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무관학도들은 학교와 군부 당국의 부패와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인 운영에 대해 개혁을 외치며 지속적으로 건의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성호나 등은 동맹퇴교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쓴 것이다. 그의 요구 사안은 정당한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 같다. 육군법원은 3월 3일 '진의(眞意)'를 참작하여 조성환에게 역 15년으로 감형하고 다른 12명을 방면 조치했다. 결국 조성환 만이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1904년 6월 9일 고종의 칙령을 통해 그를 비롯한 13명이 복권되었고, 조성환은 6월 19일에 보병 참위로 임관했다. 그러나 보직 발령을 받지는 못한 채 대한제국군이 해산될 때까지 군적만 유지했다.

조성환은 군대에서 하릴 없이 지내는 동안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며 상동교회를 출입하는 여러 인물들과 교류했다. 그가 활동한 상동청년회는 외형적으로는 기독교 계열의 종교단체였다. 그러나 여기에 참여한 많은 이들이 대종교 천도교 단체에서 구국운동을 벌인 것을 볼 때, 이들은 신앙적 동기보다는 효과적인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이 모임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는 전덕기, 이준, 김구 등 여러 애국지사들과 함께 시국에 대해 논의했다. 그 결과 다섯 명 정도가 한 조가 되어 지속적으로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로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조성환은 소수만의 구국행위로는 시국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인민을 계몽시키기 위해 교육을 통한 계몽활동에 전력했다. 1908년 이후에는 상동청년학원에서 한문교사로서 직접 수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편 1907년 8월 대한제국군이 정미7조약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서울 시내에서 대한제국군 시위대가 무장 봉기해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한국군 사상자가 발생하자, 조성환은 이들 장병들의 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 정규환 등 3인과 함께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 광고를 내고 구휼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2.2. 신민회 활동

1907년 4월, 안창호, 양기탁, 김구 등은 국권의 회복과 공화정체를 목표로 국내에서 교육, 언론, 실업 등 여러 방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했다. 신민회는 국내에서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자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인재를 양성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이때 신민회에 가담한 조성환은 1908년 1월 러시아령 연해주로 가서 최재형을 만나고 돌아왔다. 이들이 어떤 대화를 주고 받았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신민회가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계획하고, 최재형이 연해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던 만큼 양측이 서로 협력해주기를 부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후반에서 1908년 전반 무렵, 조성환은 기독교계 학교인 평양 기명학교(箕明學敎)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 출신인 그가 군대 해산 후 평양에서 활동한 것은 단순히 교육 활동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여진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 후 안중근을 심문한 일제 관헌의 취조 기록에 따르면, 안중근은 기명학교 교사 조성환과 긴밀히 논의한 결과 한국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신학문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조성환의 조언에 따라 간도로 향했다고 한다. 또한 기명학교는 1908년 2월 연해주에서 창간된 <해조신문(海潮新聞)>의 발매소였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했을 때, 당시 조성환은 평양에 있으면서 간도 및 러시아 일대의 인사들과 연계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09년 1월 미주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크 지회가 조직되었다. 국내의 신민회 역시 이 움직임에 발맞춰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조성환, 안창호, 양기탁, 노백린, 이갑, 유동열 등은 회의를 갖고 논의한 결과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군사교육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군인이 되려고 하는 청년들을 베이징으로 파견해 교육시키기로 결정하고, 이 임무는 조성환이 맡았다. 조성환은 유동열, 이갑으로부터 500원의 여비를 받고는 1909년 2월 국내를 떠나 베이징으로 떠났다. 조성환은 베이징 망명 후 조욱(曺煜)이라는 이명을 사용했으며,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중국에 귀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성환은 1909년 7월경 독일의 조계지였던 중국 칭다오에서 국내를 탈출한 인사들과 모여 기지 개척과 독립운동 방침을 논의햇다. 그 결과 만주 지린성 유하현에 농토를 매수하여 개간 사업을 일으키고 무관학교를 설립할 것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에 합의했다. 회의 후 일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고, 조성환은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는 베이징에 재류하면서 하얼빈 등지를 오가며 청년 인재를 발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선발한 학생들은 학생의 능력과 재정 사정에 따라 미국 유학을 주선하거나 중국 각지의 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청년 인재를 양성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학생 개개인에 대한 학비, 식비 등의 재정적 지원이 부족해서 조성환 자신이 개인적으로 교류하고 있던 중국 인사들에게 부탁하여 많아야 1개 성에 3명 정도의 학생을 입학시킬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또한 조성환은 어학 등의 지식을 갖추고 인성적인 측면도 훌륭한 청년이 많지 않은 것에도 안타까워했다.

조성환은 중국 인사들과의 교류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중국의 협조 없이는 학생들을 위탁시킬 수 없기도 했지만, 장래에 독립운동을 전개함에 있어 중국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성환은 베이징으로 간 직후부터 중국 인사들과의 교류에 정성을 기울였지만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했고, 1910년 이후 비밀리에 교제하는 중국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교육계 인사들이었고, 조성환은 이들로부터 교육계로 투신할 것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신민회의 임무 때문에 거절했다.

또한 조성환은 중국 내 한인들 대다수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생활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각처에 연락해 주의를 구하는 한편, 한인 동포의 중국 입적을 추진했다. 이러한 일련의 역할 중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은 신민회의 연락책으로서 국내, 러시아, 미주 지역 독립운동가들 간의 연락과 통신을 담당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베이징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던 1911년 10월부터 무창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했다. 조성환은 무창에서 신군이 청나라를 상대로 봉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고무되어 혁명의 발단부터 각 성의 개전 상황, 진압군의 출정 소식 등을 미주 한인 사회에 소상히 전했다. 그는 혁명군의 성공은 수년간의 준비를 통해 민심을 얻고 개전 초기 군량과 탄약을 확보했기에 가능하다고 봤다. 이와 함께 혁명 과정에서 치안과 질서를 잘 유지하여 열강국 재류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함으로써 이들의 간섭을 받지 않았던 것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특히 그는 이번 혁명을 한족이 300년간 이어진 만주족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도 이에 대한 지지의사를 조속히 표해야 한다는 점을 누차레 강조했다. 하지만 한인의 지지의사를 표현할 만한 능력과 대표기관이 없는 현실에 안타까워하며 어떻게든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던 11월 중순, 그때까지 독립하지 못한 4개성 중 하나였던 산동성의 혁명 세력이 조성환에게 군사 훈련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조성환은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개인 자격으로라도 혁명 대열에 참가하려 했다. 그리한다면 산동을 비롯한 각 성의 동정을 얻을 수 있고, 혁명 과정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음으로써 후일 한국의 독립운동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때 국내에서 산동성으로 달려온 신규식이 조성환에게 함께 난징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신규식은 난징으로 가서 혁명군의 전투에 참가하거나 자금의 일부를 군자금으로 기부함으로서 혁명 지지 의사를 표명할 계획을 밝혔다. 조성환은 이에 동의하고 그와 함께 산동을 떠나 상하이를 거쳐 1912년 1월에 난징에 도착했다. 그들은 난징에서 중화민국의 탄생을 지켜보고 중국 혁명이 성공했으며 한국 또한 독립할 수 있음을 확신했다. 이후 그들은 중국의 공화 혁명에 절대적인 지지를 표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유당의 당원이 되었으며, 1911년 12월 말 상하이에서 성립된 공화헌정회에도 가입했다. 그들은 자유당 당원이 됨으로써 혁명인사와의 교제를 넓히고 자유당에서 준비하는 <민권보(民權報)>의 창간 작업에 참가하기도 했다.

1912년 2월, 조성환과 신규식은 신해혁명의 주역 중 한 사람인 황싱을 만났다. 그들은 황싱에게 자금 일부를 혁명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하고 한민족의 정신을 글로 써서 알렸다. 이에 황싱은 한국 독립 지지와 중한 우호협력 의사를 표명했다. 또한 그들은 혁명 세력과 지속적인 교류가 이뤄질 수 있는 연락기관을 상하이에 설치하려 하니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황싱은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조성환은 아직 베이징을 비울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상하이에 연락기관을 설치하는 문제는 신규식이 담당하기로 하고, 자신은 베이징으로 돌아가 활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1912년 3월 베이징에 돌아온 조성환은 베이징에서 맡고 있던 임무를 손정도에게 맡기고 중국 각 지역을 왕래하면서 애국지사들과의 연락을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손정도의 도착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그는 베이징에 좀더 체류해야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이주 한인들이 중국 국적을 취득함으로써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려 애썼다. 그는 한인이 중국민으로 입적하기 위해서는 병역의 의무를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청소년들을 군사학교 및 관립학교에 입학시킴으로서 장래의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이들이 중국인과 교우를 맺음으로서 한중 관계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를 위해 각지에 편지를 보내 한인의 중국 입적을 주선했는데, 그 내용은 한, 중 양국의 이해와 장래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조성환이 이러한 노력을 통해 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한인의 통일된 자치기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위해서는 중국의 혁명 완수가 우선되어야 함을 분명히 했다. 이윽고 1912년 7월 4일, 그는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결성하면서 마침내 중국과 한국 인사들간의 연락기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동제사는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중국과 한국의 상호부조를 실행하기 위한 단체로, 상하이를 중심으로 중국 혁명 인사들과의 교류와 청년들의 교육 활동에 주력했다.

그러나 동제사가 결성된 지 한달 만인 1912년 8월 7일, 조성환은 가쓰라 다로 전 일본 총리가 러시아를 방문할 때 암살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베이징에서 체포되었다. 그가 실제로 암살을 모의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912년 7월 가쓰라 다로의 구미 방문 소식이 하얼빈 등지에 알려졌을 때, 일본 측은 하얼빈 지방 한인 청년단체의 움직임에 주목했고, 이후 8월 초까지 암살모의에 관계된 혐의로 하얼빈 러시아국 관헌에 체포된 한국인은 총 92명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방면되었고, 18명이 일본 관헌의 취조를 받았지만 음모의 진상을 밝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일러비밀선언의 취지에 따라 러시아 정부에게 한국인들의 국외 추방을 요구했고 일본관헌이 한인들을 조선 국내로 호송했다.

바로 이 시기 조성환도 천진 일본군의 통지로 북경주차일본공사관에 체포되어 조선총독부로 인도되었다. 이후 그는은 암살모의죄로 유배형을 선고받고 1912년 11월 이후 진도에서 1년간 거주제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이 일은 당시 신민회 회원들이 105인 사건으로 탄압받은 것과 연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3. 해외 망명

조성환은 1913년 말에서 1914년 초 무렵 유형 생활을 마치고 육지로 나왔다. 그러나 그는 이후에도 계속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감시당했다. 그러다가 1915년 3월, 그는 조선을 탈출하여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는 신규식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 결성과정에 관여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후 성낙형(成樂馨)이 비밀리에 한국으로 입국해 고종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으려 했지만 7월에 체포되면서 실패로 끝났다. 이후 조성환은 1915년 말까지 베이징에 있으면서 학생들을 관리하고 만주, 러시아 등지의 인사들과 교류했다.

1916년, 그는 상하이로 건너가 신규식, 박은식 등과 함께 재류 한인들의 단결과 재외 한국인 단체와의 연락을 도모했고, 프랑스 조계에 설치된 광둥학원에서 중국어 교사를 맡아 청년 자녀들의 교육에 힘쓰기도 했지만 경영난으로 인해 오래 가지 못했다. 1916년 9월 하순 베이징으로 돌아온 그는 일정한 주소 없이 지냈는데, 일본 측으로부터 아편 밀수입의 혐의로 감시를 받기도 했다. 구로돈 1917년 중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결정하고 연합국 측에 가담하자 상황이 묘해졌다. 당시 일본도 연합국 측에 가담하고 있었기에 중국이 일본과 충돌할 것이라던 한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전개가 된 것이다. 이에 조성환은 1917년 7월에 신규식, 박은식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을 통해 신한혁명당이 추진하던 망명정부 계획을 버리고 국민주권설에 기초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창했다. 조성환은 중국 등의 외국 세력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버리고 우선은 한인 사회가 형성된 지역에서 활동해야겠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대동단결선언 이후, 조성환은 만주와 러시아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만들고자 북만주로 향했다. 그는 중국 길림성 단국과 교섭하여 흑룡강성 오문현에 약 5,000호의 한인이 거주하며 농사를 지을 토지를 얻고 둔전병제를 실시하기로 밀약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1917년 11월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는 바람에 실행될 수 없었다. 1918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문제가 불거지자,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이에 대한 조직적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해 3월 한족중앙총회를 중심으로 하바로브스크에서 '조선인 정치망명자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동휘 등은 이 회의에서 러시아의 볼셰비키당과 같은 조선의 무산계급 정당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볼셰비즘의 방향으로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했던 조성환, 이동녕, 양기탁 등 신민회 계열 인사들은 순수한 독립운동의 전개를 주장하며 이동휘의 제안에 반대했다. 이렇듯 독립운동 노선의 갈등이 빛어지자, 조성환은 더이상 전로한족종앙총회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1918년 후반, 조성환은 서간도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 기존의 전로한족중앙총회를 확대한 대한국민의회가 조직되자, 그는 이동녕, 조완구 등과 함께 기호지역을 대표하여 상설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3월 중순 니콜리스크에 도착한 조성환은 이곳에서 이동휘, 유동열, 김하석(金夏錫), 홍범도 등과 함게 대규모 무장 투쟁에 관해 논의 했다. 그러나 조성환을 비롯한 기호 지역 출신 인사들은 함경도 출신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국민의회 내에서 소외되었다. 그래서 그는 러시아 지역을 떠나 상하이에서 이뤄지고 있는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게 되었다.

2.4.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 활동

1919년 3월 하순, 조성환은 이동녕, 조완구 등과 함께 서간도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 모여드는 인사들과 함께 임시정부의 수립에 착수했다. 1919년 4월 10일부터 이틀간 프랑스 조계 안의 금신부로(金神父路)에서 개최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대한민국 국호와 관제를 제정하고 국무원에 대한 인선이 이뤄졌다. 조성환은 이때 군무차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차장제를 위원제로 변경하게 되었을 때, 그는 군무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군사 관련 업무를 수행했다. 또한 그는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재정심사원으로 선정되어 임시정부의 안정적인 재원을 호가보하고자 했다.

조성환은 구급재원 마련을 위해 임시정부가 러시아 등지에 성립된 한인 사회와 연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의 성립을 러시아 한인 사회에 알리는 일을 맡는 등 임시정부의 수립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마지막으로 임시정부와 거리를 두었다. 이는 당시 임시정부 안에서의 여러 갈등이 원인이 되었다. 조성환, 이동녕, 이시영 등 러시아 및 간도 방면에서 상하이로 왔던 인사들은 한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던 러시아와 간도 등지로 내각을 이전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지만, 대다수 소장층 인사들은 상하이에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또한 조성환, 이동녕 등은 임시정부가 한인 사회에 기반을 둔 무장투쟁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작 임시정부가 외교론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자 크게 실망했다. 여기에 안창호 계열의 관서 출신 인사들과 조성환 계열의 기호 출신 인들간의 갈등이 벌어지자, 조성환은 상하이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1919년 8월 중순, 그는 상하이를 떠나 니콜리스크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박용만 등과 함께 독립군을 편성하고 간도와 길림 지역의 동지들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구체적으로는 대한국민군을 편성해 총사령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설치하고 총사령은 조성환이, 총참모는 박용만이 맡는다는 것이었다. 조성환은 3.1 운동으로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는 지금의 상황이 한민족의 독립을 준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여세를 몰아 동지를 규합, 일제와의 무력 투쟁을 벌이려 했다. 만약 그가 실질적인 군대를 편성한다면, 각지의 인물들을 호응할 것이고, 나아가 외국의 신뢰를 얻어 물질적인 지원까지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은 자금 모집원이 검거되면서 자연스럽게 무산되었다. 하지만 조성환은 포기하지 않고 서일의 대한정의단과 합작해 10월에 군정부를 조직했다. 사실 조성환은 1910년을 전후한 무렵에 서일이 신봉하는 대종교에 가입했었기에 서일의 협조를 쉽게 받아낼 수 있었다. 조성환은 만주 군벌 장작림이 친일 성향이라는 걸 파악하고 만주 군벌과 갈등을 빛는 길림 정부에게 접근해 군기와 토지를 지원받고 한인 군대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하는 밀약을 받아냈다. 이후 1919년 12월,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군정부의 명칭을 대한군정서로 개칭하면서 임정 산하의 군사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조성환은 이후 1920년 중반까지 김좌진 등과 함께 대한군정서의 장병을 양성하는 데 진력했다. 이어 그해 7월에는 총재 서일, 재무부장 계화 등과 함께 러시아로 건너가 니콜리스크 방면의 러시아 공산당 측과 기관총, 소총, 탄약 등의 무기 구입 계약을 체결했다. 조성환 일행은 9월 초 무기운반대를 이끌고 소련-만주 국경을 넘어 서대파 본영으로 무사히 귀대해 대한군정서가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과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일제가 간도 참변을 단행하자, 대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 단체들은 북만주를 벗어나 12월까지 밀산(密山)으로 집결했다. 각 독립군 대표들은 이 곳에서 회의를 열어 일본군의 세력이 미치지 않으며, 소련 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각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한 후, 간부진을 다음과 같이 편성했다.
총재: 서일
부총재: 김좌진, 홍범도, 서일
총사령: 김규식
참모총장: 이장녕
여단장: 지청천
중대장: 조동식(趙東植), 오광선

이때 조성환이 김좌진, 홍범도와 함께 부총재에 추대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독립군 내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실제로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독립군의 활동기반 조성과 군사력 건설에 크게 기여한 바 있었다.

독립군 부대들은 계획대로 러시아로 이동했고, 1921년 2월에는 치타에 위치한 완충정부 수석 카라한과 독립군 사이에 공동 작전 및 혀조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독립군은 이 협정에 따라 백군 토벌에 협조하기로 약속했고, 소련은 독립군의 군관학교 설립과 무기 공급 등을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독립군은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이르쿠츠크 시로 이동하고 이곳에서 학교를 세워 사관을 양성하는 한편, 소련군과 함께 백군을 토벌하는 전투에 종군했다. 조성환 역시 독립군 간부의 일원으로 이러한 군관학교 운영과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다.

하지만 조성환을 비롯한 독립군 지도자들은 러시아 내전 참전으로 인한 불필요한 전력의 소모를 막고자 만주로의 신속한 진출을 계획했다. 게다가 6월까지 백군 토벌 작전이 본격화되면서 독립군 내에 소련에 의한 공산주의 선전이 강화되자,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독립군의 만주 진출을 더욱 서둘렀다. 그는 6월 중순 독립군이 만주로 향할 만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하이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상하이에 도착한 직후 발생한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러시아 일대의 독립군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일부 병력 만이 만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조성환은 독립군을 재건하고자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대한군정서를 지원하려 애썼다. 하지만 서일이 자결하고 잔존한 독립군 내부에 자유시 참변을 둘러싼 책임 공방이 벌어지면서 조성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 그는 베이징에서 약 1년간 체류하면서 이세영(李世榮), 박용만, 이광(李光), 황학수 등 군인 출신 인사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면서 군사 양성을 도모했다. 그들은 대한광복군 참모부를 조직하려 했지만 자금 모집과 동지 포섭이 원활하지 않아 실패했다. 한편 그는 이들과 함께 일본군의 간도 토벌로 인해 발생한 한인 고아들과 베이징 일대 교민 자녀들의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1922년 8월에는 임시정부에서 조성환을 학무총장에 선임했지만, 그는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이전부터 대중국 외교를 위해 조성환을 상하이로 귀환시키려 했지만, 그는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에 전념했다.

1922년 10월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병하자, 러시아와 북만주의 한인 무장 독립단체들은 각각 단체간의 통일을 시도했다. 이때 조성환 역시 북만주로 건너가 김좌진, 김규식 등과 함께 무장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국내진공이라는 목표하에 단체간의 통일을 시도하는 한편, 독립군의 전력을 증강시키려 노력했다. 이들의 활동은 그해 12월에 김규식 부대가 장종창(張宗昌)의 중국군에게 무장해제되는 사건으로 인해 잠시 위축되었지만, 패퇴중이던 러시아 백군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면서 점차 전력을 보강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독립군이 자리잡기 위해선느 한인 사회의 기반이 공고해야 했다. 마침 1923년 4월 대종교가 만주에서 부흥을 시도하자, 조성환, 김좌진, 현천묵 등은 이를 적극 후원했다. 세 사람은 대종교 회의에 참석하여 대종교 본부를 하얼빈으로 이전해 교세를 확장시키기로 했고, 조성환은 하얼빈을 중심으로 자치 운동을 벌여 중국 관헌의 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이곳에서 둔전제를 확립시킴으로서 독립군의 근거지를 마련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만주 군벌의 거부로 실패했다.

1923년 이래 러시아령에서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무장독립단체들이 북만주로 들어오면서 북만주 일대 독립군과 이들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에 조성환, 김좌진, 현천묵 등은 민족주의를 우선시하는 단체 중심으로 통합을 시도했다. 그 결과 군사연합회가 조직되어 남북 반주의 각 단체 간 회의가 시작되었다. 조성환은 이 과정에서 남북만주를 오가며 각 단체의 대표들과 교섭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12월에 가서야 9개 단체만의 성명으로 대한독립군단을 형성하는 데 그쳤으며, 그나마도 이름만 올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24년 2월 조성환, 현천묵 등은 대한독립군단에 잔류하기로 결정한 김좌진을 제외하고 대한군정서를 재조직하기로 결정했다. 현천묵은 총재가 되었고, 조성환은 군사부장 겸 참모가 되어 새롭게 진형을 갖췄다. 이후 군정서는 4월 하순부터 항일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이들은 군인 모집과 사관학교 설립에 착수하는 한편 만주 각지에 모연대를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군정서의 재건 사업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는 남만주에서 전만통일회주비회(全滿統一會籌備會)가 결성되자 그곳에 가담해 군사분과위원으로 활동해 그 해 말 남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통괄하는 정의부(正義府)를 성립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이후에도 양기탁과 함께 의성단(義成團) 회의에 참석해 의성단이 정의부에 가입하도록 이끌어내기도 했다.

남만주에 정의부가 들어선 직후, 북만주 독립군 단체들도 1925년 1월부터 통합을 모색했고, 그해 3월 대한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을 포함한 각 단체가 통합하여 신민부(新民府)를 탄생시켰다. 조성환은 군정서의 대표 자격으로 통합 교섭을 주도했고, 신민부 조직 후에는 외교부장 및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신민부는 둔전제와 군단제를 실시해 상비군을 확보하고 사관학교를 설립해 운영하여 독립군의 근간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신민부는 이렇게 양성된 독립군과 공작원들을 통해 만주 일대의 친일파를 처단하는 한편, 국내에서의 활동도 전개했다. 특히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조성환은 간부 회의를 열어 순종의 국장일을 전후한 시기에 결사대를 국내에 진입시켜 일제 고관을 암살하고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와 같이 남북 만주의 한인 사회가 정비되자, 임시정뷔는 조성환을 비롯한 만주 지역의 유력한 지도자들을 대거 국무원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조성환 등은 임시정부 내각에 취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1925년 6월 일제와 장작림 사이에 체결된 비밀 협약(삼시협정)으로 인해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이 큰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신민부, 정의부, 참의부의 지도자들은 공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고, 조성환은 김좌진 등과 함께 중국 국민당의 만주 군벌 타도를 위한 북벌 정책에 협력하기로 하고 동북혁명군의 조직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국민당의 만주 지역 책임자들이 만주 군벌에게 검거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1926년 10월 베이징에서 열린 민족유일당촉성회에 참석한 조성환은 10월 12일 23차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원세훈 등과 공동으로 선언서를 기초했고, 촉성회가 결성된 후에는 집행위원겸 대표로서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한 촉성회 활동을 주도했다. 조성환을 비롯한 북경촉성회 인사들은 동포들이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나아가 자치권을 획득함으로써 만주에서의 한인 추방 정책에 대응하고자 했다. 이렇나 조성환의 활동은 1929년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해금되는 데 부분적으로 공헌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족 유일당 결성 운동은 1929년 말에 무산되었고, 그 사이 신민부는 분열되어 해체되었다. 이어 그는 만주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 관내에 남기로 했다.

2.5. 중국 관내 활동

1930년, 조성환은 우익 진영이 창당한 한국독립당에 동참하여 북경지부 간사를 맡았다. 이후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그는 대독립당 결성과 한중 연합투쟁을 목표로 안창호, 이동녕, 최동오 등과 함께 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조직 운동을 주도했던 안창호가 1932년 4월 윤봉길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체포되면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임시정부로부터 지속적으로 각원 취임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의정원에는 여전히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던 1933년 2월 임시정부가 소재한 항저우로 향한 그는 이동녕, 조완구 등과 함께 회합하여 임시정부 강화를 위한 의견을 교환했다. 그 결과 이들은 3월 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을 11인으로 증원하고 여러 독립운동 계열을 입각시키게 했다.

그 후 그는 국무위원으로서 활동했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취약한 무장투쟁 역량을 보완하기 위해 재만 한국독립군의 중국 관내 이전을 추진했다. 1933년 5월, 김구 장제스와의 회담을 통해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설치에 합의했고, 이곳에 한국독립군을 입교시킴으로서 군사적 기반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 임무를 맡고 베이징으로 간 조성환은 이듬해까지 한국독립군의 낙양 이동을 지원했다. 그는 1934년 1월 국무위원에 연임되자 지리적 거리상 실질적인 업무수행이 곤란함을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하여 수리되었다.

1935년 조성환이 다시 항저우로 왔을 무렵, 한국독립당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임시정부를 폐지하자는 인사들과 임시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인사들간의 갈등이 빛어진 것이다. 임시정부 폐지론자들은 민족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한 혁명단체 대표대회에 참석해야 하며 임시정부는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임시정부 지지론자들은 임시정부는 민족을 대표하는 정부이니 유일당이 창설되더라도 해체할 까닭이 없다며 사수를 주장했다. 격렬한 논쟁이 오간 끝에, 한국독립당은 혁명단체 대표대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했고, 7월 5일 통일 정당인 민족혁명당이 창립되면서 해체되었다.

그러나 조성환을 비롯한 임시정부 지지 인사들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내각을 정비해 임시정부의 위상과 역할을 강화시키려 했다. 이들은 한국국민당을 창당해 민족혁명당에 대항하기로 했다. 마침 민족혁명당 내에서 의열단계의 독주에 반발한 인사들이 대거 이탈해 한국국민당에 가담하면서, 임시정부는 세력을 어느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조성환은 국무원 겸 군무장으로 선출되면서 실질적인 군사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이 때를 시작으로 8.15 광복 때까지 국무위원을 역임했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군무부장 조성환으로 하여금 대일 전쟁 수행을 위한 군사위원회의 설치를 담당하도록 했다. 그 결과 조성환을 중심으로 군사 경험이 많았던 유동열, 지청천 등으로 구성된 군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군사위원회의 주된 임무는 '독립전쟁 계획의 연구 작성', '군사 간부 인재의 양성', '군사상 필요한 서적의 편찬' 등이었다. 그러나 1937년 10월 이후 일본군의 전구가 점차 내지로 확대되면서, 중국 정부는 수도를 옮겼다. 이에 임시정부 역시 항저우, 진강, 창사, 광저우, 류저우를 거쳐 1939년 5월 기강에 이르는 피난길에 올랐다. 군사위원회는 이 때문에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다.

하지만 조성환은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1938년 전반기에 창사에서 군사학 관계 서적을 편수, 번역하는 등 가능한 군사사업은 계속 실행했다. 이후 기강에 도착하여 안정을 되찾은 임시정부는 군대 편성에 착수했다. 그러나 기강에는 한인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가장 시급한 사안이었던 병력의 모집이 어려웠다. 이에 임시정부는 화북 지역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초모 활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리고 10월 1일 국무회의에서 조성환을 단장으로 하여 군사위원회 위원이던 황학수, 왕중량(王仲良) 등을 군사특파원으로 선임했다.

조성환은 군사특파단을 이끌고 1939년 11월 시안으로 출발했다. 당시 시안은 화북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과 최전선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서, 화북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을 대상으로 선전 및 초모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조성환 일행은 시안에 도착한 뒤 화북 일대의 한인 교포들을 대상으로 초모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중구군의 협조를 받아 일본군 점령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여 한인 청년을 모집해나갔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1940년 5월 한국국민당을 포함한 민족주의 진영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립했다. 이후 충칭으로 자리를 옮긴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총사령부의 성립식을 통해 군사정책의 목표였던 군대 편성을 실현했다.

이후 임시정부는 약헌을 개정하여 종래의 국무령 제도를 주석제로 전환했고, 통수부(統帥府)를 설치해 광복군의 지휘권 확립에 힘을 쏟았다. 통수부는 주석 밑에 참모총장, 군무부장, 그리고 국무위원 중 1인으로 막료를 구성하여 광복군에 대한 최고통수권을 행사하는 기구였다. 조성환은 이 통수부의 막료로 임명되었다. 광복군총사령부는 창설 직후인 11월 말 시안으로 이동하고 군사특파단이 모아놓은 인원을 중심으로 제1, 제2, 제3지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에 합류하여 5지대로 편성되면서, 총 4개 지대를 갖추게 되었다. 지대의 편성과 함께 임무를 다한 군사특파단은 해체되었고, 조성환은 책임국무원으로 선임되어 충칭으로 이동해 군무부장으로 복귀했다.

통수부 막료를 맡은 조성환에게 주어진 임무는 군사예산과 인사, 모병 업무 등 광복군의 군정을 지시, 감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였던 광복군이 당면한 현안을 담당해야 했다. 그러나 광복군은 자리잡기도 전에 커다란 난관에 부딪혔다. 중국 정책 당국자들이 광복군을 중국의 통제하에 두려 한 것이다. 그 결과 1941년 11월, 중국 국민당은 '한국광복군 9개 행동 준승'을 제의했고, 임정은 논란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광복군 행동 준승은 외형상으로는 한중연합의 형태를 띠었지만 광복군의 작전지휘권은 물론 인사권마저 중국측에서 행사하도록 규정되었다. 이로 인해 광복군의 자주성과 임시정부의 권위가 추락했다. 조성환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고, 임시정부에서는 9개 준승을 수정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1943년 1월, 조성환은 국무회의에서 유동열, 박찬익 등과 함게 소조회(小組會)를 조직해 중국과의 재교섭을 추진했다. 이들의 9개 준승 폐지 노력은 1944년 9월에 중국 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을 임시정부로 귀속시키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겨우 결실을 볼 수 있었다. 한편, 1944년 4월 김원봉이 민족혁명당 잔존 세력을 이끌고 임시정부에 가담한 후 군무부장 직을 맡았다. 조성환은 자신의 자리를 잃은 셈이 되었지만, 그가 오랫동안 군무부를 전담해왔던 만큼 이후에도 군사 업무를 수행했던 것 같다. 특히 1944년 10월 이후 통수부 내에 판공처(辦公處)가 증설되면서, 판공처 주임으로 조성환이 선임되었다.

1945년 4월, 조성환은 김구, 박찬익 등과 함게 국내외의 독립운동세력을 총망라하여 임정을 개편할 방안을 모색했다. 이들은 국내로 특파원을 밀파해 국내 인사들과의 연계를 추진했다. 또한 조성환은 미국과 협력해 광복군 내에서 선발된 요원들이 OSS훈련을 이수하고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게 했지만 8.15 광복으로 무산되었다.

2.6. 광복 후의 행적

조성환은 광복 후 1945년 12월 임시정부 요인들과 같이 환국한 뒤 한국장교단장, 대한독립촉성위원장, 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반탁운동에 가담해 즉시 독립을 촉구했으며,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에 지명되어 통일을 촉구했다. 또한 우국노인회 총재 등을 지내며 우익 정치인으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오랜 국외 활동으로 병을 얻은 그는 1948년 10월 7일 서울에서 병사했다. 향년 74세. 그의 장례는 각계 인사가 모인 가운데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치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조성환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3. 대중매체에서

1982년작 KBS1 기록드라마 <우둥불>에선 배우 조재훈이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