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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5-11 12:45:51

나용환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파일:건국훈장대통령장약장.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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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용환.jpg
출생 1864년 8월 7일
평안남도 성천군 숭인면 흥인리[1] #
사망 1936년 8월 19일 (향년 73세)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국적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본관 나주 나씨
택암(澤菴), 봉암(逢菴)
종교 천도교

1. 개요2. 생애
2.1. 천도교의 거두2.2. 3.1 운동2.3. 이후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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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천도교의 거두

나용환은 1864년 8월 7일 평안남도 성천군 숭인면 흥인리의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가 누구였는지, 집안 형편은 어땠는지, 동학에 들어가기 전 무엇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거의 알 수 없다. 다만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훈장 노릇도 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1893년, 나용환은 영변에 사는 고화경(高化景)을 통해 동학을 처음 접했고 1894년 4월에 최제우가 지은 동학의 경전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가지고 동학에 입도했다. 이후 성천 주변에서 동학을 열심히 전파했고, 동학 농민 혁명 때는 나인협(羅仁協)과 함께 평안도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1897년 중화군 접주에 임명되었으며, 당시 관군의 추적을 피해 각지를 유랑하고 있던 2대 교주 최시형을 만나 포교에 힘써 노력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1898년 7월 20일 최시형이 교수형에 처해진 뒤, 손병희가 3대 교주로 등극했다. 그러나 최시형을 오랫동안 모셨던 김연국은 동학을 서양의 새로운 사상과 접목시켜야 한다는 손병희의 주장에 반발했다. 이때 나용환은 손병희를 지지했고, 손병희는 그 보답으로 1899년 나용환을 평안도 대접주에 임명했다. 이후 손병희는 당국의 추적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고, 나용환은 그를 대신해 동학을 전파하는 한편 동학의 교리를 시대의 흐름과 맞추도록 노력했다.

1904년 4월, 그는 손병희의 부름을 받고 문학수, 이겸수,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한 그는 그해 9월 1일 평양에서 진보회 민회를 개최했는데, 나용환이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때 모인 숫자가 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평양 관찰사가 그들을 해산시키려 했지만 도저히 막을 길이 없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했고, 나용환은 잠시 평안도 44주의 수령을 호령하며 부패 관리들을 대동강에 빠뜨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단체로 상투를 자르게 하기도 했다. 당시 진보회가 내세운 4대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1. 독립의 기초를 공고케 함.
2. 정부를 개선함.
3. 생명, 재산을 보호케 함.
4. 군정, 재정을 정리함

1905년 12월 1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 이듬해 3월, 천도교는 전국 각지에 72개의 대교구를 설치했다. 이때 나용환은 15교구장에 임명되었으며, 1907년 5월엔 정주순독(定住巡督)에 임명되었다. 1907년 12월 김연국이 끝내 천도교를 탈퇴하고 시천교에 가담했을 때 72개 교구 중 49개 교구가 한꺼번에 시천교로 이탈해버렸지만, 나용환이 이끄는 15교구는 끝까지 손병희를 따랐다. 이후 1909년 5월에 도사(道師)에 임명되었고, 1910년 천도교 중앙총부의 현기사장(玄機司長)으로 활동했으며, 1911년엔 공선관장(共宣觀長)에 임명되었다. 권동진은 1935년 6월 <삼천리> 기고문에서 "(손병희가) 천도교의 재정과 행정에 대해서는 오영창, 나용환 두 분을 가장 신임했다."라고 기술했다.

2.2. 3.1 운동

1919년 2월 26일, 나용환은 권동진과 만나 독립만세 운동 계획과 독립선언서 서명 건에 대해 전달받았다. 그는 즉석에서 찬성하고 자신도 서명하기로 결정했다. 이튿날 오후 7시경, 재동의 김상규 집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한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또한 28일에는 손병희의 저택에서 열린 최종점검회의에 참석해 거사 장소가 애초의 파고다 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되었음을 통보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 나용환은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태화관에 모여서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그 후 그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나용환은 신문을 받으면서 자신이 처음부터 독립 선언 계획에 참가하지 않아 구체적으로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독립선언의 취지엔 백분 공감한다면서, 다시 독립선언을 할 수 있다면 반드시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4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입장을 바꿨다.
문: 피고는 어째서 조선을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나.
답: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권동진이 나에게 조선은 일본에 병합되었으나 이번에 다른 나라와 같이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므로 이 일을 한 줄로 생각한다.
문: 피고는 일한합병을 반대하는가.
답: 나는 특별히 아무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문: 피고는 조선독립 선언을 하면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였는가.
답: 그렇다. 이렇게 하면 독립이 될 줄로 알았고 또 믿는다.
문: 피고 등 33인이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독립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답: 다른 사람들이 선언을 하면 독립이 된다고 말하므로 나도 그것을 믿었다.
문: 피고는 독립운동에 참가하면 처벌할 줄로 생각하였는가.
답: 그렇다. 처벌당할 것을 각오하였다.
문: 피고는 총독정치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는가.
답: 아무 불만도 없다. 오늘 내가 그러한 말을 하면 비겁한 자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 불만도 없고 그런고로 앞으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

그가 왜 입장을 바꿨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독립 만세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지만 일제의 지배는 여전히 강고하고 세계 열강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현실을 목도하자 만세운동에 대한 회의를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는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최종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서대문 형무소를 거쳐 마포 경성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그는 1921년 11월 4일 만기출옥했다.

2.3. 이후의 경력

나용환은 출옥 후엔 서울 삼청동에 거주하면서 천도교 도사로서 활동했다. 그는 1922년 1월 종무사(宗務師)로서 경리와 주임을 맡았고, 1923년 강도사(講道師)로 공선되었고, 1926년에는 종법사(宗法師)에 선임되었다. 또한 평안도 출신 청년들이 추진하는 문화 운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1924년 4월 5일 천도교 최고비상혁명위원회 부원장에 선임된 그는 1925년 4월 천도교가 신파, 구파로 갈리자 최린, 이종훈, 홍병기, 정광조, 이돈화 등과 함께 신파에 가담했다.

1928년 12월 최린이 도령에 선출되었을 때, 그는 종법사장에 뽑혔다. 그리고 1930년 12월 3일 최린, 권동진, 오세창, 이병춘 등과 함께 5인 고문에 위촉되었다. 그 후 수년간 조용히 지내던 그는 1936년 8월 19일 사망했다. 향년 73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나용환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 독립유공자 나병규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