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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6-22 23:34:27

주시경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파일:건국훈장대통령장약장.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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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주시경
周時經 | Ju Si-gyeong
파일:external/dongan.dau.ac.kr/0EAE6CE13AE54863801FF8F3E7A6BFEE_001.jpg
출생 1876년 12월 22일[1]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전산리 무릉골 #
사망 1914년 7월 27일 (향년 37세, 총 13776일)
경성부
사인 돌연사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
본관 상주 주씨(尙州 周氏)
직업 언어학자, 교육자
별칭 아명(兒名)은 주상호(周相鎬)
자(字)는 경재(經宰)
호(號)는 한힌샘, 한흰매
가족 주학원(부), 연안 이씨(모)
김명훈(배우자)
슬하 3남 2녀
종교 개신교 ( 감리회) 대종교 개신교 ( 감리회)

1. 개요2. 생애3. 어록4. 기타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국어학자이며 언어 민족주의자이다. 호는 '한힌샘', '한흰매'이며 초명은 '상호'이다.

' 한글'이라는 말부터 주시경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한글을 창제한 건 세종대왕이지만 그때는 '한글'이라고 하지 않았고 ' 훈민정음', 줄여서 '정음'이라고 했으며 민간에서는 '언문', '암글'이라는 낮춤말이 더 많이 쓰였다.

한글은 조선 내내 쭉 있었지만, 주시경이 사실상 현대인이 사용하는 한글을 정립했다. 한글날에 세종대왕에게 밀려 어째 언급이 안되는 인물 중 하나지만, 현대 한글의 아버지는 주시경인 셈. 그리고 맞춤법도 주시경이 만든 것이므로, 사실 맞춤법이 틀리는 상황에선 세종이 아니라 주시경을 소환하는 것이 옳다.[2]

주시경의 제자들 또한 국어 연구에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한국어를 연구하고 한글을 쓰기 쉽게 다듬어 한국어를 근대성을 지닌 언어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이바지했다. 주시경의 제자들 중 1명이 북한의 초대 수령 겸 한글학자인 김두봉이며 문화어의 기반을 닦았는데 서울에 남았던 동문 최현배를 보면 남북한 모두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사람이 언어 정책을 맡아 남북의 언어가 지금까지도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다른 유명한 제자로는 이규영, 김윤경, 권덕규 등 550명 정도 있다.

2. 생애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전산리 무릉골 출생으로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아버지는 주면석(周冕錫)[3], 어머니는 연안 이씨이다. 어릴 적 둘째 숙부 주면진(周冕鎭)[4] 양자로 입적하였다. # 주시경이 국어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한문 강독법에 의문을 품은데서 비롯된다. 당시 한문 강독법은 한문 원문을 그대로 음독하여 달달 외우게 한 뒤 나중에 우리말 '토'를 붙여 무슨 뜻인지 풀어 주는 방식이었다. 이를테면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와 같은 것. 주시경은 마지막 우리말 단계에서야 애들이 말귀를 알아듣는 것을 보고 한문과 우리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말의 중요성을 깨달아 국어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5] 신학문을 접하고 이 때부터 국어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 독립신문>이 출간될 때 순한글로 교정보는 일을 했으며 독립협회에도 참여했다가 서재필이 떠난 후에는 < 제국신문>에 글을 싣거나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의 한국어 강사, 상동청년학원 강사로 취직해서 살았다. 그 와중에 배재학당을 졸업하였으나 높은 학구열로 흥화학교 양지과(量地科), 정리사 수물학(數物學)을 3년 동안 공부했는데 양지과는 지리학, 수물학은 수학 분야를 의미한다. 엄청난 학구열로 여러 학교에서 강사를 맡게 되었는데 간호학교, 공옥학교, 명신학교, 숙명여학교, 서우학교의 교원이었으며 협성학교, 오성학교, 이화학당, 흥화학교, 기호학교, 융희학교, 중앙학교, 휘문의숙, 보성중학교, 사범강습소, 배재학당의 강사를 맡았다. 국어 교사만 했을 것 같지만 양지과와 수물학을 나왔기에 주산 지리에도 능했다. 책가방을 쓰지 않고 보따리에 책을 넣고 다녔는데 빡빡한 수업 일정 때문에 늘 바쁘게 뛰어다녔고 그로 인해서 보따리가 대차게 휘날리는 탓에 별명이 '주보따리'였다.

1907년 창립된 국문 연구소 등에서 활동하면서 국어 음운 연구와 국어 문법 등을 짜임새있게 정리했는데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하였다고 표현해도 된다. 호인 '한힌샘'을 비롯하여 문법 용어와 학술 용어들을 토박이말로 지으려고 처음으로 시도하였는데 이를 두고 한문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두루때글'[6]이라며 비웃기도 했다. 마지막 저술서인 <말의 소리>에서는 서구 언어학보다 앞서간 발견을 하였는데 구조 언어학적 논리를 자세히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음운론에서 음소에 해당하는 '고나'의 발견, 형태론에서 어소로 해당되는 '늣씨'의 발견이 좋은 예이다. 근대 한국어에서 존재가 희미해진 아래아의 공식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승만 고종 퇴위 음모에 연루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주시경이 탈옥용으로 육혈포를 몰래 넣어준 적도 있다.

1914년 7월 27일 급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다가 사망하였다.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급성 체증이라고 서술되어 있으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콘텐츠에 이정선 박사가 집필한 주시경 항목 (링크)에는 사인에 대해서 정확히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대부분은 급체로 인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7] 향년 39세라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요절이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 국어학계는 아까운 인재를 보내야 했다. 제자인 한글학자 열운 장지영[8]은 주시경 선생 50주기 추도식에서 통곡하며 스승의 요절을 애석해 했으며 장지영이 쓴 <주시경 회고록>은 1990년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가난했던 주시경 이야기를 안타깝게 언급했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서대문 밖 수색 고택골(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하였다가 1960년 한글학회의 주선으로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로 이장하였고 1981년 12월 12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재이장하였다.

3. 어록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 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 주시경의 저서 <국어문전음학> 중에서 -

4. 기타

5. 관련 문서


[1] 음력 11월 7일 [2] 사실 이것도 정확하지 않은 게 이미 존 로스 선교사가 맞춤법을 한참 전에 쓰고 있었다. [3] 일명 주학원(周鶴苑) [4] 일명 주학만(周鶴萬) [5] 근대화에 상당히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배재학당에 입학할 적 가족과 의절까지 하며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앞장서서 머리를 깎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진취적인 성격이었기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이겠지만 말이다. [6] 두루때글은 주시경의 한자를 새김(훈)으로 읽은 것. 주시경의 이름에 쓰인 한자들인 두루 주(周)/때 시(時)/글 경(經)의 훈독 부분을 차례로 붙이면 두루때글이 된다. [7] 심근경색이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심근경색 증상 중에 체증이나 복통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 그 외에 복막염일 수도 있는데 사실 복통이 수반되는 질병은 수두룩하기에 확실한 것은 아니다. [8] 1887.4.22~1976. 3.15. 존경하던 스승 주시경 탄생 100주년에 맞춰 만 88세로 별세했다. [9] 실제로 말년에 별세할 때까지 상동 청년 학원, 배재 학교, 이화 학교 등 기독교 계통 학교 교사로 꾸준히 활동했으며, 그의 장례식 또한 감리회인 상동교회에서 거행됐다고 한다. #